1. 관각(館閣)의 대수(大手)
문장(文章)은 흔히 그 향유(享有)하는 계층에 따라 대각(臺閣)의 문장(文章), 선도(禪道)의 문장(文章),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 이때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란 반교문(頒敎文)ㆍ교서(敎書)ㆍ윤음(綸音)ㆍ옥책문(玉冊文)ㆍ전문(箋文) 등 이른바 관각문자(館閣文字)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문형(文衡) 가운데서도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등은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 있으면서 특히 시에 능하여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관각삼걸(館閣三傑)’ 또는 관각(館閣)의 ‘호소지(湖蘇芝)’라 부르기도 한다.
노수신(盧守愼, 1515 중종10~1590 선조23, 자 寡悔, 호 蘇齋ㆍ伊齋ㆍ茹峰老人)과 황정욱(黃廷彧, 1532 중종27~1607 선조40, 자 景文, 호 芝川)은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관각삼걸(館閣三傑)’로 불린 바 있는 관각(館閣)의 대수들이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102에서 두 사람의 특징을 비교하여 ‘소재의 웅장하고 특출나며 풍부한 것과 지천의 횡행하고 방일하며 기이하고 위대한 것이 참으로 서로 다툴만 했다[蘇之雄發富贍, 芝之橫逸奇偉, 眞可相角].’라 하였고,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56에서 그들의 소장처(所長處)로 소재(蘇齋)의 오율(五律)과 지천(芝川)의 칠율(七律)을 들고 모두 천년 이래의 절조(絶調)라 평하였다[盧蘇齋ㆍ黃芝川, 近代大家, 俱工近體. 未知其故也. 盧之五律, 黃之七律, 俱千年以來絶調. 然大篇不及此, 未知其故也].
노수신(盧守愼)은 송시학(宋詩學)이 풍미하던 시대에 두보(杜甫)를 배워 뜻을 이룬 시인 중의 하나이다[盧蘇齋五言律, 酷類杜法, 一字一語, 皆從杜出. 『霽湖詩話』 / 盧蘇齋得杜法. 『惺叟詩話』].
김창협(金昌協)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세칭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의 시풍(詩風)을 비교하면서 삼가(三家) 중에서도 그를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으면서 침울노건(沈鬱老健)하고 한 그의 풍격(風格)은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것이어서 후대의 학두자(學杜者)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 하여 선조(宣祖) 초(初) 소단(騷壇)의 제일가(第一家)로 칭상을 아끼지 않았다[世稱湖蘇芝, 然三家詩實不同. 湖陰組織鍛鍊, 頗似西崑, 而風格不如蘇. 芝川矯健奇崛, 出自黃陳, 而宏放不及蘇, 蘇齋其最優. 『農巖雜識』 / 盧蘇齋詩, 在宣廟初最爲傑然, 其沈鬱老健, 悲,深得老杜格力,後來學杜者莫能及. 『農巖雜識』].
그의 소장처(所長處)가 오율(五律)에 있었으므로 득의작(得意作)의 대부분도 오율(五律) 속에 보인다. 19년 동안 해중(海中)에서 귀양살이를 했기 때문에 만년(晚年)의 작품 속에 특히 명편(名篇)이 많다.
40편이 넘는 명작 가운데서도 노수신(盧守愼)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알려진 「십육야환선정(十六夜喚仙亭)」은 다음과 같다.
二八初秋夜 三千弱水前 | 열엿새날 초가을 밤 삼천리 약수(弱水) 앞에 있네. |
昇平好樓閣 宇宙幾神仙 | 태평성세에 누각이 좋은데 우주에는 신선(神仙)이 얼마나 되는가? |
曲檻淸風度 長空素月懸 | 굽은 난간에 맑은 바람 지나가고 긴 하늘에는 흰 달이 걸려 있네. |
愀然發大嘯 孤鶴過蹁躚 | 서글피 길게 휘파람 부니 외로운 학 너울너울 날아가누나. |
미련(尾聯)의 시원하게 달리는 기상은 마치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를 다시 보는 듯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얼(餘孼)로 남황(南荒)으로 유배되던 해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몸은 배소(配所)에 있지만 태평성세(太平盛世)를 구가하고 있다.
누각(樓閣)이란 예로부터 승평(昇平)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 승평(昇平)은 또한 이 시가 지어진 작자의 배소(配所) 순천(順天)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허균(許筠)은 특히 그의 필력(筆力)이 굳세고 커서 기상이 일세(一世)를 덮을 만하다. 하였거니와, 이처럼 그 구도(構圖)가 크고 넓은 것은 바로 그의 기우(氣宇)가 남달리 큼에 힘입은 것이라 하겠다. 황정욱(黃廷彧)의 공교(工巧)와 스스로 대비(對比)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또 다른 명작으로 꼽히는 「벽정대인(碧亭待人)」은 다음과 같다. 원제(原題)는 「十三日到碧亭待人)」이다.
曉月共將一影行 | 새벽달이 그림자 하나를 함께 데리고 가는데 |
黃花赤葉政含情 | 국화꽃 단풍잎이 잔뜩 정을 머금었네. |
雲沙目斷無人問 | 모래밭 저 끝까지에도 물어볼 사람 없어 |
依遍津樓八九楹 | 기둥에 기대어 빙글빙글 돌아보네. |
위의 대표작 두 편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벽정대인(碧亭待人)」은 소재(蘇齋)에게 또다른 시세계가 엄존(嚴存)하고 있음을 사실로써 보여준 것이다.
노두(老杜)의 격력(格力) 못지않게 황진(黃陳)의 기굴(奇崛)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새벽녘에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효월공장일영행(曉月共將一影行)’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정(江亭) 주변의 분위기를 ‘운사목단무인문(雲沙目斷無人問)’이라하여 강서파(江西派)의 기발(奇拔)을 스스로 시범(示範)하고 있다. 이는 곧 이 때의 우리나라 한시가 송대(宋代)의 강서파(江西派)를 시험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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