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분위기
왕국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왕과 신민이다【서양식 왕국이라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요소로서 영토를 들어야겠지만, 일찍부터 영토국가의 개념이 발달했던 동양식 왕국에서 영토란 나라가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므로 굳이 왕국의 구성 요소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문명의 발생기부터 동양에서는 지리적 중심이 튼튼했던 탓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영토국가가 발생했다. 그에 비해 서양에서는 왕과 신민의 역사는 오래지만 영토국가의 면모를 갖춘 왕국이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절대주의 시대의 일이다. 중세 유럽의 왕국들은 ‘선 개념’의 국가가 아니라 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서양사와 동양사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이 지리적 차이는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은 왕국 내에서 절대 권력자의 지위를 누리지만 그 권력과 지위는 바로 신민들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아무리 왕에게 신적인 권위가 부여된 고대적인 전제 체제라 해도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신민들을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왕국은 특수한 데가 있다. 조선의 왕에게 신민이라면 곧 사대부[臣]와 백성[民]이다. 조선이 명실상부한 왕국이던 초기에는 왕이 신민을 다스리는 정상적인 왕국의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왕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이 사대부 국가로 변질된 중종(中宗) 때 이후로는 왕이 신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신’이 왕의 이름을 빌려 민을 다스리는 기형적인 왕정이 행해졌다. 그런 탓에 백성들의 삶이 온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왕국을 꿈꾸는 영조(英祖)는 군주가 신민을 다스리는 정상적인 경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신문고다. 태종 때 왕과 백성을 직접 연결하는 고리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설치되었던 신문고는 그 후 수백 년 동안 사라졌다가 영조에 의해 다시 부활된다. 비록 태종 때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기능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신문고는 당시 왕정복고의 의지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좋은 상징이다. 즉 이제야 왕은 신민을 위한 정치를 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과연 영조가 가장 먼저 개혁의 메스를 대는 곳도 백성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분야다. 영조(英祖)는 먼저 지나치게 잔혹한 형벌인 압슬형(壓膝刑, 무릎을 으깨는 형벌)을 없애고, 사형수에 관해서는 세 번 다시 판단하도록 하는 삼복법(三復法)을 제도화한다. 나아가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되었던 서얼 차별을 완화해서 서자 출신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여기에는 아마도 영조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느끼고 있었던 ‘신분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터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건국의 분위기 속에서 1746년에는 『속대전』이 간행된다. 무엇의 후속편이기에 이름이 『속대전』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국대전』의 후속편이다. 『속대전』은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에 공표된 각종 법령들을 총정리한 새 법전이다. 그런데 『경국대전』이라면 15세기 중반 세조(世祖) 때, 바꿔 말하면 조선이 왕국이었을 때 만들어진 법전이 아닌가? 그 뒤 무려 300년 동안 법전의 개정판이 없다가 영조(英祖) 때에야 비로소 개수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말해준다(숙종肅宗 때인 1688년에 법전을 편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소폭의 개정만 이루어졌다).
하나는 지난 3세기 동안 사대부(士大夫) 정치가 판을 치면서 새 법전조차 마련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영조가 조선 초기의 왕국 이념을 계승하겠다는 각오를 분명히 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영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속대전』의 편찬을 지휘했는데, 아마 형벌제도를 손볼 때부터 새 법전 편찬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영조가 이룬 가장 큰 개혁의 성과는 1750년에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한 것이다. 균역법이란 말뜻 그대로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자는 취지를 가진 제도이다. 요역 중에서도 으뜸은 군역이었으니까 사실상의 군제(軍制)라고 봐도 되겠다.
오늘날에도 병역비리의 문제가 끊이지 않지만, 온 백성을 ‘인적 자원’ 으로 관리하는 기능이 지금보다 크게 뒤떨어진 조선사회에서는 병역으로 인한 문제와 폐단이 훨씬 심했다. 더욱이 지금은 국민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으므로 병역의 의무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쉽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병역이 의무적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의무는 양반과 천인 신분이 제외된 양인(良人)만의 몫이다. 원래 군역은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기본적인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가운데 용(庸)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앞에서 보았듯이 조용조란 각각 토지세, 요역, 특산물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백성들을 동원해서 부릴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징집된 병사들을 상시적으로 훈련시키는 기관이나 제도가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으므로 군역은 사실상 ‘돈’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였으므로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거의가 다 농민인 백성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국가에서 명령하는 시기와 장소에 맞춰 군역에 종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사람을 사서 자신의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방식이 성행했는데, 지금 같으면 병역기피에 해당하지만 현실적인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차츰 관습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중종(中宗) 때부터는 그 관습을 아예 제도로 만들어 국가가 백성들에게서 돈을 받고 그 일을 대행해주기에 이르렀다. 화폐경제가 없었던 당시의 돈이란 바로 베, 즉 포(布)를 가리킨다. 그래서 군역을 면하기 위해 바치는 베를 군포(軍布)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때워야 할 일을 돈으로 대신하는 격이니 아무래도 비리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상비군에 해당하는 5군영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군사 재정의 확충이 현안으로 떠오르자 그 제도는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우선 국가에서 군포의 양을 대폭 늘린 게 문제의 발단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사적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면 값싸게 군역을 해결하겠는데, 국가에서 군포 수납을 대행하니 그럴 수도 없다. 있는 자들이 더 쩨쩨하다고 했던가? 비록 내세에서는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는 낙타의 신세가 될지 모르지만, 현세에서는 힘있고 돈많은 부자일수록 국가의 의무에서 빠져나가는 구멍이 크다. 그나마 체면치레로 군포를 냈던 양반층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약삭빠르게 의무를 회피했고 백성들 중에서 돈푼깨나 번 자들도 역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당연히 그 부담은 모두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애오라지 백성들에게서 필요한 재정을 쥐어짜낼 수밖에 없는 국가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발명한다.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의 몫을 지우는 일신첩역(一身疊役), 한 가족 모두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일가개역(一家皆役)은 그나마 점잖은 사례다. 죽은 자에게서까지 군포를 거두는 백골징포(白骨徵布), 갓난아기에게까지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친척과 이웃에게 부담을 돌리는 족징(族徵)과 인징(隣徵) 등등 의 화려한 수탈 방법들을 보면 국가가 과연 무엇을 위해 군포를 거두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이렇듯 국가가 앞장서서 병역비리를 주도하는 형국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백성들에게는 군포가 다른 어떤 조세보다도 무서운 게 되어 버렸다(조선의 왕국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뒤 19세기부터는 군정을 포함한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런 사정 때문에 균역법(均役法)은 우선 군포의 양을 줄이는 조치로 실시한다. 16개월에 베 두 필씩 바치던 것을 한 필로 대폭 삭감한 것이다【영조(英祖)가 균역법을 시행한 것은 물론 그런 군정(軍政)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의도였지만, 때마침 개혁을 위한 배경도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肅宗) 때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고 양전사업이 완성된 게 그것이다. 대동법(大同法)에 따라 모든 조세가 대동미라는 단일한 형식으로 통일된 덕분에 국가에서 조세의 총량을 계산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작업이 쉬워졌으며, 양전이 완료된 덕분에 매년 국가의 세 수입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조선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로 인한 군사 재정의 손실분은 구조조정으로 커버한다. 즉 불필요한 군대를 축소하고, 중복된 군사 기지들을 통합하며, 과다한 지출을 절약하는 방식이다. 그래도 메우지 못한 부분은 다른 재정에서 일부 충당하고, 각 지방 관청에게도 손실분을 분담하도록 한다. 이런 조치들이 추진되면서 균역법의 취지(역의 부담을 고르게 한다는 것)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물론 균역법(均役法)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균역법이 시행되었어도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완화되지 않았고, 흐트러진 군정도 좀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랜 사대부(士大夫) 체제를 거치면서 관리들, 특히 지방관들의 부패가 관행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군포의 징수는 사람 단위가 아니라 촌락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제도에서는 웬만큼 청렴한 지방관이라 해도 자기 촌락에 할당된 군포의 총량을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기대만큼 효과가 따라주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은 조선이 왕국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다.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으로 일단 제도적으로나마 세제가 합리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정상적인 왕정의 행정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 신분제 사회 생산자가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은 농민들이 땀흘려 일하고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책을 읽는 사회였다. 더군다나 농민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르는 것은 무거운 세금과 무서운 군역이었다. 농민들은 유일한 생산자이면서도 양반들을 대신하여 모든 국역을 짊어져야 했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0) | 2021.06.21 |
---|---|
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새로운 학풍(호락논쟁, 진경산수화) (0) | 2021.06.21 |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왕국으로 가는 길(이인좌의 난, 탕평책) (0) | 2021.06.21 |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경종, 신임사화, 영조) (0) | 2021.06.21 |
10부 왕정복고 - 개요 (0) | 2021.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