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①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민가(民歌)를 끌어와 절창이 되다
雨歇長堤草色多 |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
送君南浦動悲歌 | 그대 보낸 남포엔 슬픈 노래 흐르네. |
大同江水何時盡 | 대동강의 물은 언제나 마를꼬 |
別淚年年添綠波 |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 걸. |
1. 평양 부벽루에 당당히 걸려 있는 작품으로 중국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는 자부심을 지님(성수시화).
2. 이별은 봄이 가장 극적인 효과를 냄(죽었던 만물의 소생↔멀쩡히 있던 이의 사라짐): 2구에서 봄날 남포의 이별은 더욱 서러움.
3. 강엄(江淹)이 지은 「별부(別賦)」의 ‘봄풀 푸른색이고 봄물 푸른 물결인데 그대 보낸 남포에서 속상하는 걸 어찌할꼬[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를 보고 지은 것임에도, 3ㆍ4구(句)가 절창이라 불린 이유?
1) 강엄의 시에 ‘이별의 눈물로 대동강 마를 리 없다’는 유치한 구절을 덧붙여 놓아 좋은 작품이라 하긴 힘들다.
2) 2구의 동(動)은 봄바람에 노랫가락이 울려퍼지는 걸 나타냄과 동시에 사람 마음을 울렁이게 함. 즉 3ㆍ4구는 그 당시 울려퍼지던 임과 헤어진 여인들이 부르던 노랫가락으로 봐야 함.
3) 헤어진 연인이 당시에 유행한 민가로 아픔을 노래하는 건 당연하며 3ㆍ4구는 그 당시 유행하던 민가(民歌)였을 것임.
4. 당시 대동강엔 이별 노래가 많았을 것임.
1) 16세기에 남공철의 「선리요(船離謠)」가 유행함.
碇擧兮船離 | 포 소리 울리고 배 떠나가네. |
此時去兮何時來 |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
萬頃滄波去似廻 | 만경창파는 갔다가 돌아오는데. |
2) 18세기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평안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는 배가 떠난다는 뜻으로 그 곡조가 매우 슬퍼 애를 끊는 듯하다’고 말함.
故我東大樂府, 有所謂排打羅其曲, 方言如曰船離也. 其曲悽愴欲絶. 置畵船於筵上, 選童妓一雙, 扮小校, 衣紅衣, 朱笠貝纓, 揷虎鬚白羽箭, 左執弓弭, 右握鞭鞘. 前作軍禮, 唱初吹, 則庭中動鼓角, 船左右群妓, 皆羅裳繡裙, 齊唱「漁父辭」, 樂隨而作, 又唱二吹三吹, 如初禮, 又有童妓扮小校立船上, 唱發船砲. 因收碇擧航, 群妓齊歌且祝. 其歌曰: “碇擧兮船離, 此時去兮何時來, 萬頃滄波去似回.” 此吾東第一墮淚時也. |
3) 근대의 김동인 소설 『배따라기』엔 이와는 또 다른 배따라기를 기생이 노래함.
② 권필과 이안눌이 스승 정철을 추모하는 방식
1. 한시 속에 우리말 노래가 삽입될 때의 효과
1) 중국 한시에선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두드러짐.
2) 역대 절창으로 평가된 한시들이 이런 방법으로 지어짐.
작가 | 제목 | 삽입된 곡 |
정지상 | 송인(送人) | 당시 유행가 |
권필 |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 |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
이안눌 | 용산야월(龍山月夜) | 정철의 「속미인곡(續美人曲)」 |
최경창 | 기성(箕城) | 백광홍의 「관서별곡(關西別曲)」 |
2. 권필(權韠)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 감상하기
空山木落雨蕭蕭 | 빈 산 나뭇잎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
相國風流此寂寥 | 재상의 풍류 이로부터 적막하여졌네. |
怊悵一杯難更進 | 슬프구나, 한 잔 다시 올리기 어려우나 |
昔年歌曲卽今朝 | 옛 노랫가락은 곧 지금의 노랫가락이구나. |
1) 권필(權韠): 정철의 문인이며 벼슬길에 나서진 않았으나, 시재가 뛰어나 제술관(製述官)이 되었음.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을 풍자한 「궁유시(宮柳詩)」로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도중 사망함. (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 궁유: 사람들은 ‘유희분’이라 어겼지만, 유희분은 왕비를 칭한다고 말하여 권필을 축출함.(광해 3~4년)
2) 허균의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선 이 작품의 1구가 특히 아름다워 사람에게 눈물짓게 한다고 평가함.
3) 스승이 무덤 스산하고 술 한 잔 권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시인데 절창인 이유?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억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회오리바람 불제’를 1구에 담음.
-3구는 ‘뉘 한 잔 먹자 할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옛날에 호탕하게 술 마시던 정철과 현재 상황을 교차시킴
3. 이안눌(李安訥)의 「용산야월(龍山月夜)」 감상하기
江頭誰唱美人詞 | 강가에서 누가 「속미인곡」을 부르나, |
正是江頭月落時 | 바로 이때는 강가에 달이 질 때라네. |
惆悵戀君無限意 | 애달프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무한한 뜻이여 |
世間惟有女娘知 | 세상에서 오직 기녀만이 알아주고 있으니. |
1) 이안눌(李安訥)은 기세가 강하고 전고를 많이 사용함[近日李實之能詩文, 雖似冗雜而氣自昌大, 可謂作家. 然不逮汝章, 多矣. 實之眼高, 不許一世人, 獨稱余及汝章․子敏爲可, 其曰: “許飫, 權枯, 李滯.” 亦至當之論也. 『惺叟詩話』](↔전고를 싫어한 김창협과는 다름)
2) 한시 「속미인곡(續美人曲)」의 ‘차라리 스러지어 낙월(落月)이나 되어 있어 임 계신 창 안에 번듯이 비추리라’를 넣음.
3) 한시에 노랫가락을 넣어 노래가 연상되도록 하는 것은 당시(唐詩)의 스타일로 쓰려 하는 사람들은 이런 창작방법을 계승하고 있음.
4. 최경창(崔慶昌)의 시 「기성문백평사별곡(箕城聞白評事別曲)」에는 백광홍의 『관서별곡』의 가사인 ‘능라도 방초와 금수산 영화는 봄빛을 자랑한다’는 구절을 끌어와 울려 퍼지도록 했음.
③ 중국의 전통 가요를 삽입한 작품와 한국적 정서가 담긴 허구의 노래를 삽입한 작품
平湖日落大堤西 | 평평한 호수의 서쪽 큰 둑에서 해지고, |
花下遊人醉欲迷 | 꽃 아래서 놀던 사람 거나히 취해 해롱거리네. |
更出敎坊南畔路 | 곧 교방의 남쪽 언덕길로 나가니, |
家家門巷白銅鞮 | 집집마다 거리마다 신나는 백동제의 노랫소리. 『蓀谷詩集』 |
1) 이 작품에서는 골목마다 길게 울려 퍼지는 「백동시」라는 중국 노래의 울림을 들을 수 있음.
2) 중국 노래를 삽입했기 때문에 우리말 노랫가락을 삽입했을 때보다 음악적 효과가 약함.
3) 「백동시」는 가사 자체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위의 시를 읽을 때 「백동시」의 노랫가락이 구체적으로 전달되진 않음.
浿江兒女踏春陽 | 대동강의 계집 봄볕을 밟으니 |
江上垂楊政斷腸 | 강가의 수양버들이 틀림없이 애간장 끊는구나. |
無限煙絲若可織 | 무한한 아지랑이, 길쌈할 수 있다면, |
爲君裁作舞衣裳 | 그대 위해 무의상을 지으리. |
1) 임제(林悌): 세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시와 술로 울분 달래다가 요절함. 「수성지(愁城誌)」와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남김. 그가 죽기 전에 ‘오랑캐들이 모두 황제를 참칭하는데 오직 조선만이 들어가 중국을 주인 삼으니, 산들 죽은들 무엇하랴? 곡할 것도 없다[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함.
2) 1구ㆍ2구는 3인칭 시점으로 대동강에 봄나들이 나온 처녀의 춘심(春心)을 묘사하고 있음.
3) 3구ㆍ4구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란 생각으로 악부풍 노래 삽입함. 수양버들이 축축 늘어진 대동강, 끝없이 펼쳐진 아지랑이에 봄나들이 나온 처녀들은 마음이 들떠 좋은 인연을 맺고 싶기에 남정네를 유혹이나 하려는 듯 이런 노래를 부를 거라 가상하고 지은 것임. 이 노래를 통해 처녀들의 마음이 더욱 잘 전달됨.
4) 가락은 알지 못하나 내용은 알 수 있는 노래를 배경으로 한 것이 더욱 시의 맛을 높게 하며 잘 알려진 노래를 삽입했을 때에 비하면 음향효과는 덜하지만 중국노래를 넣는 것보단 훨씬 나음.
④ 노래의 삽입 없이 시적 여운만으로 울려 퍼지게 만든 작품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 뜰 앞에 한 잎사귀 떨어지니 평상 아래 온갖 벌레들이 구슬피 우네. |
忽忽不可止 悠悠何所之 | 가벼이 가셔 멈추게 할 수 없는데 유유하게 어디로 가시나요 |
片心山盡處 孤夢月明時 | 나의 마음 산 가는 곳까지 따라가 외로운 달 밝은 밤에 꿈을 꾸네. |
南浦春波綠 君休負後期 | 남포의 봄 물결 푸르러지면 그대 훗날의 기약 져버리지 마시오. |
1) 1구의 나무는 오동잎으로 ‘오동잎 한 번 떨어지니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山僧不解數甲子一葉落知天下秋]【落而知歲之將暮 覩甁中之氷而天下之寒 『淮南子』 / 一葉梧飛天下秋 秋風秋雨滿孤樓, 趙斗淳】’라는 이자경(李子卿)의 말이 있음. 커다란 오동잎 하나 툭 떨어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풀벌레들이 울어대기 시작함.
2) ‘오동잎이 마당에 떨어졌다=임을 보낸 내 마음에도 떨어졌다’는 것이고 ‘풀벌레 운다=임을 보낸 여인의 오열’이라는 것임.
3) 미련(尾聯)에선 여인의 간절한 외침을 넣어 4구의 ‘유유히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말과 호응하여 시는 끝났어도 여인의 외침은 끝나지 않는 여운을 만들어냄.
4) 시적 여운은 시각적 심상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이 오히려 여운을 길게 남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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