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난한 시인의 말
①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하는가? 궁한 사람이 시를 잘 쓰는가?
1.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1) 시인은 가난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옛 사람은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詩能窮人]”고 생각함.
2) 이규보(李奎報)는 『구시마문(驅詩魔文)』을 지어 시마의 다섯 가지 병폐 중 마지막에 “네가 사람에게 붙으면 염병에 걸린 듯 몸이 더러워지고 머리가 봉두난발이 되며 수염이 빠지고 외모가 초췌해진다. 너는 사람의 소리를 괴롭게 하고 사람의 이마를 찌푸리게 하며 사람의 정신을 소모시키고 사람의 가슴을 여위게 하니, 환란의 매개요 평화의 도적이다[汝著於人, 如病如疫, 體垢頭蓬, 鬚童形腊, 苦人之聲, 矉人之額, 耗人之精神, 剝人之胸膈, 惟患之媒, 惟和之賊].”라고 썼다.
2. 가난한 사람이 시를 잘 쓴다
1) 구양수(歐陽脩)가 가난했던 매성유에게 써준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에선 ‘세상에 전해지는 시들은 대개 곤궁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곤궁함이 심할수록 시가 더욱 아름답다[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 夫豈然哉? 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고 함.
2) 가난한 시인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가난 때문임.
3) 홍세태(洪世泰)가 쓴 「설초시집서(雪蕉詩集序)」에선 ‘시는 하나의 작은 기술이지만 명예와 이익을 벗어나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었다[詩者一小技也. 然非脫略名利, 無所累於心者, 不能也]’고 하여, 명예와 이익에 얽매이지 않아야 지을 수 있으며 시에 뛰어난 선비들은 산림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고 함.
3. 김극기(金克己)의 「고원역(高原驛)」에 드러난 기구한 운명
百歲浮生逼五旬 | 100년 뜬 삶 50세에 가까워져 |
奇區世路少通津 | 기구한 세상사 나루터로 통하는 길 적구나 |
三年去國成何事 | 3년 나라 떠나 어떤 일을 이루었나? |
萬里歸家只此身 | 만 리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만 이 몸뿐 |
林鳥有情啼向客 | 수풀의 새 정이 있어 나를 향해 울고 |
野花無語笑留人 | 들의 꽃 말없이 웃는 사람 머뭇거리게 하네 |
詩魔觸處來相惱 | 시마는 곳마다 나에게 와서 서로 고뇌케 하니 |
不待窮愁已苦辛 | 기다리지 않아도 곤궁한 근심 이미 괴롭고 괴로워「高原驛고원역에서」 |
1) 나그네로 떠돌던 시인이 고원역에서 묵으며 지은 작품임.
2) ‘문진(問津)’은 ‘학문의 처세나 방도’를 가리키는 말이나, 라말려초(羅末麗初)엔 ‘벼슬길에 나갈 방도가 없음’으로 쓰임.(최광유(崔匡裕)의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 임춘(林椿)의 「차우인운(次友人韻)」에도 이 말이 쓰임)
扁舟烟月思浮海 | 안개낀 달빛에 작은 배로 바다에 뜰 생각에 |
羸馬關河倦問津 | 지친 말로 관하에 나루터 묻기 고달프네. |
問津路遠槎難到 | 나루를 물으나 길은 멀어 뗏목으로는 다다르기 어렵기만 하고 |
燒藥功遲鼎不開 | 선단 만드는 것은 더디기만 한데 솥은 열리지 않네. |
3) 3년 벼슬길 끝내고 돌아서니 몸뚱아리 하나뿐이지만 아름다운 자연은 시인을 보고 반기며 들판의 꽃도 활짝 웃어주기에 시인은 외롭진 않음.
4) 시마가 시인에게 붙어 가난하게 만들고 나서도 놓아주지 않고 시를 짓도록 강요하는 통에 고달프기만 하다고 함.
② 고단하면 쓰여지는 시
地僻秋將盡 山寒菊未花 | 땅이 궁벽져 가을 장차 가려하는데 산은 추워 국화 피지도 않았네. |
病知詩愈苦 貧覺酒難賖 | 병드니 시 쓰기 더욱 괴로운 걸 알겠고 가난하니 술 어렵게 샀다는 걸 깨달았네. |
野路天容大 村墟日脚斜 | 들길에 하늘의 얼굴이 크고 마을 빈 터에 햇발이 비끼네. |
客懷無以遣 薄暮過田家 | 객의 회포 풀길 없으니, 저물녘 시골집 지나네. |
1) 사람이 가난하면 눈에 보이는 자연도 고단한 법이기에 꽃도 피지 않고 새도 울지 않는 법이다.
2) 정포(鄭誧)는 청주 정씨 명문가 후예로 충숙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으로 일시에 신세가 뒤바뀜.
3) 마음이 가난한 시인의 눈엔 피지 않은 꽃만 보임 –ex. 박은(朴誾)의 「재화택지(在和擇之)」도 같은 현상을 보임).
天應於我賦窮相 |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 주었으니 |
菊亦與人無好顔 | 국화조차도 사람에게 좋은 안색 보이지 않네 |
4) 가난하면 병마가 짙어지고 그럴수록 시마는 더욱 재촉하지만 돈조차 없어 술을 마실 수도 없음.
5) 이럴 때 바라보는 하늘은 더욱 휑하며 시인을 비춰주는 햇살도 석양빛일 뿐이다.
③ 영달을 꿈꾸며 시를 다듬는 가난한 시인들
1. 가난은 시를 아름답게 만든다.
1) 당대에는 시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고 나선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짐.
2) 시는 시인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시인을 영화롭게 만듦.
3)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정신을 짜내어 시를 지는 것임.
2. 장유(張維)의 「시능궁인변(詩能窮人辨)」에서 ‘빈한하고 고단한 선비들은 애간장을 짜내어 자구를 다듬는다’고 함.
1) 김극기(金克己)의 「고원역(高原驛)」에서의 ‘林鳥有情啼向客 野花無語笑留人’라는 구절과 박은(朴誾)의 「재화택지(在和擇之)」에서의 ‘天應於我賦窮相 菊亦與人無好顔’라는 구절은 명구 중의 명구라 할 만하며 가난한 이의 영혼을 소진시켜 나온 표현이라 할 만함.
2) 정포의 「계미중구(癸未重九)」에서의 ‘野路天容大 村墟日脚斜’라는 구절은 범상해 보이지만 애간장을 짜서 다듬은 구절이며 ‘하늘의 얼굴[天容]’에 ‘햇살의 발[日脚]’을 짝으로 만든 데서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엿볼 수 있음.
3. 성여학(成汝學)은 서얼신분으로 훈장이었으나 시벽이 있어 시를 지음. 출처-『어우야담(於于野談)』
1) 가난한 시인이 벗들의 도움을 자주 받아 낯이 알려져 있어 먹고사는 문제에 대장부가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하는 처지를 말함. 허자(虛字)로 대를 맞춘 솜씨를 볼 수 있음.
面惟其友識 食爲丈夫哀 | 얼굴은 오직 벗만이 알아보고 먹을 것에 장부는 슬프다네. |
2) 풀벌레와 새의 고달픔은 시인 자신의 고달픔을 이입하여 묘사함.
露草蟲聲濕 風枝鳥夢危 | 이슬 맺힌 풀엔 벌레 소리 젖어 있고 바람 부는 가지엔 새의 꿈이 위태롭네. |
3) 추적거리면서 내리는 빗소리에 시인의 비감이 어우러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시를 짓지 않을 수 없기에 아름다운 가을빛이 시를 재촉한다는 뜻을 말함.
雨意偏侵夢 秋光欲染詩 | 비의 뜻은 꿈에 치우쳐 침투하려 하고 가을빛은 시를 물들이려 하네. |
4. 그 외의 독특한 작가들
1) 이정면(李廷冕)이라는 이름 없는 가난한 시인의 아래의 시구도 공교로움. 평범한 시인의 눈엔 들어오지 않을 궁상맞은 소재를 다루었지만 정교한 묘사가 돋보임.
庭泥橫斷蚓 壁日聚寒蠅 | 뜰 진흙엔 잘린 지렁이 깔려 있고, 벽에 비친 햇볕엔 추운 파리들 모이네. |
2) 성중엄의 아래 시 공교로움이 최고임.
往事春泥鴻着爪 | 지난 일은 봄 진흙에 기러기 발자취 찍힌 듯, |
浮名滄海劍無痕 | 뜬 명예는 푸른 바다에 검이 빠져 흔적조차 없는 듯하네. |
3) 채진형의 아래 시도 공교로움이 최고임.
畏蛇防燕壘 憐蝶壞蛛絲 | 뱀을 두려워하여 제비는 둥지 지켜주고 제비 가여워하여 거미줄 제거해주네. |
5. 이런 구절은 『어우야담(於于野談)』, 『호곡시화(壺谷詩話)』, 『지봉유설(芝峯類說)』 등 시화집에 실려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음.
1) 명구가 없었던들 성여학, 이정면, 채진형, 성중엄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니 시가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할 만함.
2) 그러나 옛 사람들은 오히려 이러한 표현 때문에 인생이 고단하게 되었다고 말함.
④ 가난한 시인의 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많다
1. 『맹자(孟子)』 「만장(萬章)」에선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라고 하여 시를 보며 인생을 점쳤음.
1)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선 이정면의 시를 풀이하며 ‘정니단인(庭泥斷蚓)’가 시인을 천하게 만들었다고 보았고 ‘벽일한승[壁日寒蠅]’가 시인을 단명하게 했다고 보았다.
2. 가난한 시인의 말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1) 「귀천(歸天)」을 남기고 떠난 천상병 시인도 그러했듯이 가난한 시인들의 눈에는 꽃이 피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꽃이 지는 모습만 보임.
2) 윤계선(尹繼善)의 아래의 시구에서 꽃잎이 바삐 떨어진다고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고 죽음.
宦遊千里蔗甘盡 | 벼슬길에서 천 리 떠도느라 좋은 시기 다하고 |
世事一春花落忙 | 세상일 일장춘몽이라 낙화처럼 바삐하네. |
3) 홍명구는 ‘화락천지홍(花落天地紅)’라는 구절을 할머니가 보고 ‘화발천지홍(花發天地紅)’이라 했으면 복록을 누렸을 텐데 그러지 못해 요절할 것 같다고 했고 실제로 42세에 죽음(『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49)
3. 시에 담긴 부귀영달의 기운
1) 정태화는 여러 위기 속에서도 다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냄.
2) 후세 역사가는 세상에서 벼슬살이를 잘한 사람 중에 그를 으뜸으로 침.
3) 정태화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아래의 시를 썼고 『수촌만필(水村漫筆)』에서 ‘40년 재상의 부귀영달이 들어있다’고 평가함.
關西老伯閑無事 | 관서의 늙은 관리는 일 없이 한가로워 |
醉倚春風點粉紅 | 취해 봄바람에 기대니 붉은 꽃잎 점점이 흩뿌리네. |
시? | 재능 | 논의 | |
구양수 | 선비들이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펼 수 없게 되면 기괴함을 탐색하며 원망과 한탄이 나옴. |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건 아님. 곤궁해져야만 시가 공교해짐. |
매성유의 시가 좋다는 평판이 자자함 → 시를 그에게 배우려는 마음도 있음 → 하지만 그를 조정에 천거하는 사람은 없음. |
진사도 | ‘시능궁인’이 맞기도 하나, ‘시능달인’이기도 함 → 하지만 중요한 건 窮達이 아닌 후대까지 전해지느냐이기에 서문을 씀. | ||
차천로 | 사물을 모방하고 귀신의 정신을 빼앗기에 조물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 성정이 발현된 것. 시적 재능은 하늘이 부여해준 것으로 빼앗지 못한다. |
‘시능궁인’이란 논의는 얼핏 보면 맞는 것처럼 보임 → 그러나 시적 재능은 하늘이 부여해준 것임 → 그러니 주어진 재주를 받아들이고 운명을 즐기면 됨. |
장유 | 성정의 은미함을 드러내고 조화의 오묘함을 캐내는 것. | 작은 재주지만, 하늘이 부여해준 것으로 사람을 영달케 해준다. | 시란 작은 재주이지만 하늘이 부여준 것으로 사람을 영달하게 만들어준다 → 그러니 한 때의 榮達로 볼 게 아니라, 만세토록 榮達하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함. |
홍세태 | 시는 천기에 의해 지어지는 것으로 작은 재주가 아니다. | 명예와 이익을 벗어나 天機를 간직한 자가 지을 수 있음. | ‘시능궁인’은 맞지 않고 최자소는 곤궁함으로 시가 공교해졌다 → 위항인의 시는 정감이 담긴 것으로 『시경』과 같은 취지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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