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위
위감충(魏鑑忠)
위징(魏徵)은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상(名相)인데, 무슨 일을 만나면 서슴없이 간하여 태종이 매우 경외(敬畏)한 나머지 그가 죽은 뒤에 한탄하기를 “구리판으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옛날 역사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거울로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이제 위징이 죽어 거울 하나가 없어졌다.”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卷九十七 「위징전(魏徵傳)」
위강(魏絳)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진(晉) 나라 사람으로, 융적(戎狄)과 화친(和親)하면 다섯 가지의 이로움이 있다고 도공(悼公)에게 말하여 융적들과 맹서(盟誓)를 맺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襄公 4年
위강화융(魏絳和戎)
춘추 때 진(晉) 나라의 대부(大夫)로 도공(悼公) 때 산융(山戎)이 화친(和親)을 청하매, 강이 화친의 다섯 이(利)가 있음을 역설하여 여러 융(戎)과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위개(衛玠)
진(晋) 나라 때의 사람. 왕제(王濟)의 사위인데, 인물이 준수해서 장인 왕제는 사위가 옆에 있으면 마치 찬란한 구슬이 비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특히 현묘(玄妙)한 이치를 잘 담론(談論)했다고 한다.
위거(衛蘧)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백옥(蘧伯玉)을 가리키는 말로, 60세(혹은 50세)가 되도록 항상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언행을 고쳐 나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논어(論語)』 「헌문(憲問)」ㆍ「위령공(衛靈公)」
위곡(委曲)
① (곡조·도로 등이) 구불구불하다
② 위곡하다
③ 자세한 사정
④ 상세(詳細)하다 / 인용: 有客行(성해응)
위곡(韋曲)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명승지로, 당(唐) 나라 때의 망족(望族)이던 위씨(韋氏)들이 화수회(花樹會)를 결성하고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위곡언(爲谷言)
『노자(老子)』 28장에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며……천하의 골짜기처럼 되라[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라고 하였다.
위공(魏公)
송(宋) 나라의 명재상 한기(韓琦)의 자. 지식이 풍부하고 천성이 순박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송사(宋史)』 「한기전(韓琦傳)」
위공(衛公)
주(周) 나라의 제후(諸侯) 위 무공(衛武公)인데 나이 95세가 되었는데도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을 잘 하기 위해 의계(懿戒)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
위공녹학(衛公祿鶴)
춘추시대(春秋時代) 위 의공(衛懿公)이 학을 매우 좋아하여 대부(大夫)가 타는 수레에 태우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전쟁을 하려 할 적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학을 시켜 전쟁하게 하라. 학은 실지로 녹위(祿位)가 있지만 내야 어떻게 싸우겠는가.” 하였다. 『좌전(左傳)』 閔公二年
위공손(魏公孫)
송 나라 한위공의 손자 경무가 갑과에 올라 벼슬이 태상박사에까지 오르니, 그때의 사람들이 그를 ‘글광’이라 일렀다.
위곽(衛霍)
서한(西漢) 때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공적을 크게 세운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가리킨다. 변방의 장수, 또는 귀척(貴戚)을 말할 때 인용된다. 『사기(史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위굉(衛宏)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모시(毛詩)를 전수받고 시서(詩序)를 더 윤색하였다 한다.
위교(渭橋)
장안(長安) 부근의 위수(渭水)에 놓여진 다리라는 뜻으로, 서울을 가리킨다.
위구식복(委裘植腹)
임금이 나이 어려서 임금의 옷을 입을 수가 없으므로 황제의 자리를 거짓으로 설치한 다음 죽은 임금이 입던 옷을 놓아두고 조회를 받는다는 뜻이다.
위국공(衛國公)
당(唐) 나라 이정(李靖)의 작호(爵號)이다.
위국승헌(衛國乘軒)
자격 없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높은 지위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 의공(衛懿公)이 학을 좋아하여 수레에 학을 태우고 다녔는데 후에 전쟁이 나자 국인들이 모두 “학이 실로 녹과 지위를 가졌으니 학더러 싸우게 하라.” 하고는 싸우지 않아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좌전(左傳)』 민공(閔公) 二年
위국휴경책중시(魏國休輕簀中尸)
위 나라 범수(范睢)가 수가(須賈)의 참소에 의해 위 나라 승상 위제(魏齊)에게 매를 맞아 갈빗대가 꺾이고 이빨이 부러졌을 때, 그들은 범수가 죽은 줄 알고 그를 갈대자리에 싸서 측간에다 버려두었는데, 그때 범수는 그곳 문지기를 통하여 그곳을 빠져나와 성명을 장록(張祿)이라 바꾸고 진(秦) 나라로 망명하여 진 소왕(秦昭王)을 섬겨 끝내 진 나라의 승상이 되었던 고사이다. 『사기(史記)』 卷七十九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위궐(魏闕)
① 우뚝 높은 궁궐이다.
② 항상 대궐의 조정을 생각할 것이라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몸은 강과 바다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대궐에 있다[身在江海之上 心居乎魏闕之下].”는 말이 나온다.
위금(委禽)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기러기를 가지고서 초례상(醮禮床)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곧 장가가는 것을 이른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위기(圍棋)
바둑을 둠.
위기(爲己)
‘자기를 위한다’는 말로, 자신의 심신 수양을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위기일발(危機一髮)
위기가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천근의 무게를 견디는 듯하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 거의 여유가 없는 위급한 순간
위기지학(爲己之學)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는 공자의 말이 있다.
위기학(爲己學)
자신의 수양(修養)만을 목표로 하고 달리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학문.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 “子曰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이라 보인다.
위기후(魏其侯)
한 무제(漢武帝) 때의 승상이었던 두영(竇嬰)의 봉호(封號)이다. 유술(儒術)에 힘을 기울여 천하 선비들의 귀의를 받았는데 두태후(竇太后)의 뜻을 거슬러 면직된 뒤 관부(灌夫)를 구해 주려다 효경후(孝景后)의 노여움을 산 나머지 기시(棄市) 되었다. 『사기(史記)』 卷10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위기후(魏其后)
한 효문후(漢孝文后) 두씨(竇氏)의 조카인 두영(竇嬰)의 봉호이다. 두영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대장군을 거쳐 승상에 이르러 천하에 권위를 떨쳤으나, 뒤에 효경후(孝景后)의 노염을 사서 끝내 기시(棄市)되었다. 『사기(史記)』 卷一百七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위능가호(威能假虎)
여우가 범을 꾀어 제 뒤에 따르게 하고 앞장서서 나가매 뭇 짐승들이 달아나는지라, 범이 짐승들이 저를 무서워하는 줄을 모르고 여우를 무서워 하는 줄로 믿는다는 이야기. 윗 사람의 위엄을 빌어 남을 공갈함을 비유. 『국책(國策)』
위도질어(危途叱馭)
한 원제(漢元帝) 때 왕존(王尊)이 익주자사(益州刺史)로 관할 지방을 순시하던 중 험난하기로 이름난 공래(邛郲)의 구절판(九折坂)에 당도하여 전임 자사로 있었던 왕양(王陽)이 죽을까 무서워 그만 되돌아갔던 일을 상기하면서 그의 마부를 꾸짖기를 “말을 계속 몰아라. 왕양은 효자였지만 왕존은 충신이니라.”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청음 또한 그와 같이 왕명을 중히 여겨 험난한 산길을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서(漢書)』 卷七十六 「왕존전(王尊傳)」
위두(韋杜)
당 나라 때 장안성 남쪽에 위곡(韋曲)과 두곡(杜曲)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망족(望族)이었던 위씨(韋氏)와 두씨(杜氏)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세상에서는 이들을 위두(韋杜)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서 당시에 유람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위두(韋杜)
당 나라 때에 대대로 귀현(貴顯)했던 위씨와 두씨의 두 망족(望族)을 가리킨 말이다.
위려마도(爲礪磨刀)
‘숫돌을 위해 칼을 간다’는 뜻으로,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는 말이다.
위렴(違簾)
위렴(違廉)과 동의어로, 평성(平聲)과 측성(仄聲)의 배열이 틀리는 것을 말한다. 즉 이사부동이육동(二四不同二六同)에 위배되는 것이다.
위례성(慰禮城)
백제(百濟)가 웅진(熊津)으로 남천(南遷)하기까지 있었던 수도인데, 대체로 남한산(南漢山) 부근이다. / 직산에 있었다는 백제(百濟) 초기의 국도(國都)이다.
위례성십제(慰禮城十濟)
위례성은 성거산에 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에서 남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도읍하고서 열 사람의 신하로써 보필을 삼고 십제라 일컬었다가 뒤에 백제라 고쳤음.
위만(魏萬)
당(唐) 나라 사람인데 왕옥산(王屋山)에 살아 왕옥산인(王屋山人)이라 호(號)하였다. 이백(李白)의 글을 모아 『이한림집(李翰林集)』을 만들었다.
위매피의(魏妹被劓)
초왕(楚王)이 위미인(魏美人)을 새로 얻어서 매우 사랑하였는데, 첩 정수(鄭袖)가 질투하여 겉으로 사랑하는 척하며 속여서 말하기를, “왕이 너의 얼굴을 예쁘다고 하나 코가 조금 보기 싫다 하니, 왕의 앞에서는 손으로 코를 조금 가리라.” 하였다. 위미인이 속아서 매양 왕의 앞에서는 코를 가렸더니, 정수가 왕에게 말하기를, “위미인이 왕에게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코를 가리옵니다.” 하니, 왕이 곧이듣고 노하여 위미인의 코를 베어 버렸다.
위명(僞名)
‘어질지 못하다는 거짓 죄명을 덮어 쓰다’라는 말이다.
위명제(魏明帝)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제2대 황제. 성명은 조예(曹叡). 자는 원중(元仲). 문제(文帝)의 태자이다. 아버지의 유언에 의해 조진(曹眞)ㆍ조휴(曹休)ㆍ사마의(司馬懿)ㆍ진군(陳群) 등이 보좌하였다. 과단성 있는 인품으로, 부화(浮華)의 무리를 물리치고 스스로 정치를 행하였다. 즉위 초에 오(吳)ㆍ촉(蜀)이 연합하여 공략해오자, 사마의 등 무장을 파견하고 자신도 출전하여 오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에 빠졌고, 그가 죽자 양자로 삼은 제왕(齊王) 방(芳)을 보좌한 자들의 내분으로, 사마씨가 실권을 쥐었다.
위모(魏謨)
세가(世家)를 비유한 말이다. 위모는 당 태종(唐太宗)의 명신(名臣)인 위징(魏徵)의 5세손인데, 문종(文宗) 때 위징의 후손을 찾아 들일 적에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재상에 이르렀다. 『당서(唐書)』 卷九十七
위묘천죽(渭畝千竹)
중국에 있는 위천(渭川)은 대나무가 질이 좋고 많은 것으로 유명하여 대나무를 소유한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맞먹는다고 한다. 『사기(史記)』 卷129 「화식열전(貨殖列傳)」
위문(䦱門)
침문(寢門)을 반쯤만 여는 것을 이른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 공보문백(公父文伯)의 어머니는 계강자(季康子)의 종조숙모(從祖叔母)였는데, 계강자가 찾아가면 그녀가 침문을 반쯤만 열고서 그와 얘기를 나누고 서로 문턱을 넘지 않았던 데서 온 말로, 남녀간의 분별이 엄절했음을 의미한다. 『국어(國語)』 『노어(魯語)』
위미(危微)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의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얻는다[人心惟危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한 데서 온 말이다.
위미정일(危微精一)
순(舜)이 우(禹)에게 왕위를 전해 줄 때에 경계하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고(危) 도심(道心)은 미묘(微)하니, 정일(精一)히 하라.” 하였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위백양(魏伯陽)
한 나라 때 사람이다. 도수(道術)를 좋아하여 장생불사한다는 단약(丹藥)을 연구하였다. 제자 세 사람과 같이 산중에 들어가서 단약을 구워 만들어서 신선이 되었다 한다. 저서에 『주역(周易)』의 효상(爻象)을 빌어 수련 양생(修煉養生)의 뜻을 논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가 있다.
위봉(威鳳)
위의(威儀)를 갖춘 봉황이란 뜻이며, 조양(朝陽)은 산의 남쪽 혹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말한다.
위부불인(爲富不仁)
재산을 모으려면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게 된다. 부자가 되는 것과 어진 일을 함께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위부인(衛夫人)
진(晉) 나라 위항(衛恒)의 종녀이며 이구(李矩)의 아내로 이 부인(李夫人)이라고도 하는데, 종요(鍾繇)의 필법을 전수받아 예서(隸書)와 정서(正書)를 잘 써,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가 모두 그에게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글씨를 잘 쓰는 부인으로 칭하게 되었다.
위분류(渭分流)
위수(渭水)와 경수(涇水)가 합쳐져서 황하로 들어가는데, 옛 사람들이 위수는 맑고 경수는 흐리다 하였다.
위비언고(位卑言高)
지위가 낮으면서 드높이 정치에 대한 일을 거론하는 것은 죄이다[位卑而言高 罪也]. 『맹자(孟子)』 「만장(萬章)」 下
위빈로수치공수(渭濱老叟嗤空手)
늙은이란 곧 주(周) 나라 강 태공(姜太公)을 이른다. 강 태공이 일찍이 위수 가에서 낚시질을 할 적에 삼주야(三晝夜) 동안 물고기가 한 마리도 물지 않으므로 분이 나서 의관을 벗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注
위사(衛司)
익위사(翊衛司)의 약칭이다.
위산휴재궤(爲山虧在簣)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끝을 마쳐야 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아홉 길[九仞]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이 무너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 즉 한 삼태기만 모자라도 9인(仞)의 산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위상(魏相)
제음(濟陰) 정도(定陶) 사람으로 자는 약옹(弱翁)인데, 한 나라 선제(宣帝) 때 승상이 되어 병길과 함께 마음을 합쳐 국정을 보좌하였다.
위상(魏尙)
한(漢)나라 괴리(槐里) 사람으로 문제(文帝) 때 운중 태수(雲中太守)로 있으면서 개인 재산을 털어 군사들을 보살피고 흉노(匈奴)의 침입을 저지하는 등 정사를 잘하였으나, 조정에 전적을 보고하는 문서에 적군의 수급을 벤 숫자가 6명이 틀리다는 이유로 벼슬을 삭탈하고 1년간의 도형(徒刑)에 처해졌다가 풍당(馮唐)의 간청으로 풀려나 다시 운중 태수가 되었다. 『사기(史記)』 卷一百二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위상양응(渭上揚鷹)
주 나라 문왕(文王)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얻었는데, 뒷날 목야(牧野)에서 주(紂)와 싸울 때 여상이 매처럼 날쳤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
위서(魏書)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 북위(北魏) 일대(一代)의 기록.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칙명을 받아 찬술하였으며, 554년에 완성되었다. 제기(帝紀) 12, 열전(列傳) 92, 지(志) 10, 전(傳) 130권이다. 그 자료로는 위대(魏代)의 기거주(起居注), 국사(國史) 외에 여러 가문의 보상(譜狀)과 구기구문(舊記舊聞)을 이용했으나, 완성된 후 기술이 부실불공평한 것에 대한 비난이 많아 예사(穢史)라 불리었다. 위수는 뇌물이나 개인 감정에 의해 곡필(曲筆)했다고 『북사(北史)』 및 기타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위서의 기술을 동시대의 다른 역사서와 대비, 검토하면 북제(北齊)의 황실 고씨(高氏) 및 그 일족에 대해 직필(直筆)을 피하고 있는 점 외에 곡필이라 단정내릴 것이 거의 없다.
위석(熨石)
불에 구워 몸에 품고 자는 다리미처럼 생긴 돌.
위선최락(爲善最樂)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의 즐거움이다.
위성(渭城)
당(唐) 나라 왕유(王維)의 이별시(離別詩)인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 적시니, 객사의 푸르른 버들빛이 새로워라[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한 데서 온 말로, 즉 이별을 뜻한 것이다.
위성가(渭城歌)
송별의 노래를 말한다.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친구를 송별한 시인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 적시니 객사는 푸르르고 버들빛도 새로워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한 잔 술을 더 비우게나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은 친구가 없다오[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한 데서 온 말이다.
위성곡(渭城曲)
악부(樂府)의 곡 이름으로, 옛날에 이별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이다. 양관곡(陽關曲)이라고도 한다. 당(唐) 나라의 왕유(王維)가 벗을 위성(渭城)에서 작별하는 시인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는데.” 하는 구절이 있다.
위성삼첩(渭城三疊)
송별(送別)을 말한다. 위성곡은 바로 당(唐) 나라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을 적시니 객사의 푸르고 푸른 버들빛이 새롭구나 그대에게 다시 한잔 술 기울이라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친구가 없음일세[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한 것을 말하고, 삼첩이란 곧 이 시의 제2구(句)부터 제4구까지를 두 번 반복하여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위성섭고란(威聲讋皐蘭)
한 무제(漢武帝) 때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험준한 고란산 아래에서 오랑캐를 섬멸한 것처럼 위명(威名)이 떨쳐 청 나라가 겁을 먹게 되리라는 뜻이다. 『한서(漢書)』 「곽거병전(霍去病傳)
위성우가(渭城雨歌)
이별의 노래를 말한다. 당(唐) 나라 왕유(王維)가 친구를 송별한 시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 적시니 객사의 푸르른 버들빛이 새롭구나 그대에게 다시 한잔 다 기울이기를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친구가 없다오[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한 데서 온 말이다.
위성춘(渭城春)
왕유(王維)의 절창(絶唱)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위성의 아침비 말끔히 씻긴 길 먼지, 객사 주위 버들가지 더욱 푸르게 단장했네. 그대여 이별주 한 잔 더 마시게나, 서쪽 양관 나가면 벗 만나기 어려우리[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소랑(緯蕭郞)
어부(漁父)를 이른다. 위소는 쑥대를 엮는다는 뜻으로, 즉 게를 잡는 어부가 쑥대를 엮어 삼태기처럼 만들어서 게가 다니는 목을 막아 잡는 데서 온 말이다.
위쇄(餧殺)
상대를 형편없이 만듦을 말한다.
위수(渭水)
강태공(姜太公)이 나이 70이 되도록 위수(渭水)에서 낚시로 소일하다 주 문왕(周文王)을 만났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위수강운(渭樹江雲)
위수(渭水)에 있는 나무와 위수를 지나와 강수(江水) 위에 떠 있는 구름. 떨어져 있는 두 곳의 거리가 먼 것을 이르는 말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벗이 서로 그리워하는 말로 쓰인다.
위숙경(衛叔卿)
옛날의 신선 이름인데, 역시 신선인 홍애자(洪厓子)와 더불어 바둑을 두면서 놀았던 사람이며 그는 운거(雲車), 즉 구름을 타고 한(漢)나라 궁궐에 내려와 무제(武帝)를 만났다고 한다. 『신선전(神仙傳)』 2 「위숙경(衛叔卿)」 / 인용: 懊惱曲(신국빈)
위숙보(衛叔寶)
숙보(叔寶)는 진(晉) 나라 위개(衛玠)의 자(字)이다. 풍채가 준수하여 옥인(玉人)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한번 보려고 담장처럼 빙 둘러섰다는 고사가 전한다. 도가의 이치를 담론하길 좋아하였다. 『진서(晉書)』 卷三十六 「위개전(衛玠傳)」
위시(衛詩)
위 나라 시란 『시경(詩經)』 패풍(邶風) 「북풍(北風)」을 말한다. 북풍장은 원래 패풍(邶風)에 속하나 패(邶)와 용(鄘) 지역 모두 위 나라에 편입되어 위 나라의 일을 읊고 있다. 시의 내용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북풍(北風)과 눈보라에 비유하는 것으로 기상이 매우 참담하다.
위시보명철(危時保明哲)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명철(明哲)하여 그 몸을 보전한다.”는 글귀가 있는데, 위태로운 난세에 난 명사(名士) 중에 술에 빠진 것처럼 핑계하여 보신술(保身術)을 삼은 이가 많았다.
위씨경(韋氏鏡)
옛날 사람이 죽어 대렴(大殮)을 행할 때에 관 앞에 거울을 매달아 시체를 비치게 함으로써, 광명을 취하고 암흑을 깨뜨리려는 예속(禮俗)이 있었는데, 위씨와 관련된 고사는 미상(未詳)이다.
위씨춘추(魏氏春秋)
중국 동진(東晉)의 학자인 손성(孫盛)의 저서.
위야(魏野)
섬주(陝州) 동교(東郊)에 초당을 짓고 거문고와 시를 즐겼던 송 나라의 은자이다. 『송사(宋史)』 卷457
위약(萎約)
시들어 쪼그러 들다.
위언(韋偃)
당(唐) 나라 때 두릉(杜陵)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소나무와 돌을 잘 그렸다.
위언(韋偃)
두보(杜甫)와 동시대에 촉(蜀) 땅에서 활동했던 명화가이다. 산수(山水)와 죽수(竹樹), 인물과 말의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송석(松石)에 뛰어난 필법을 보였다. 고송노승도는 그의 이른바 ‘쌍송도(雙松圖)’를 지칭하는 듯하다. 두보의 ‘위언이 그린 쌍송도를 해학적으로 노래하다[戱韋偃爲雙松圖歌].’라는 시에 “소나무 뿌리엔 조용히 쉬는 서역승(西域僧), 흰 눈썹 흰머리에 집착이 하나도 안 보이네. 오른편 어깨 드러낸 살 두 발도 마냥 맨발, 솔잎 속의 솔방울 스님 앞에 떨어졌네[松根胡僧憩寂寞 龐眉皓首無住著 偏袒右肩露雙脚 葉裏松子僧前落]”라는 구절이 보인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9
위여조로(危如朝露)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듯이 위기가 임박해 있음을 말한다.
위오사섬(蔿敖蛇殲)
춘추(春秋) 시대 초(楚)의 위오(蔿敖)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양두사(兩頭蛇)를 만났는데, 그때 속언이, 양두사를 보면 그 사람은 죽는다고 되어 있었다. 이때 나이 어린 위오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왕 죽는 몸이지만 뒤에 다른 사람이나 보지 말게 해야겠다 하고서 그 뱀을 죽여 땅에다 묻었다 한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九 「순리열전(循吏列傳)」
위왕매(魏王梅)
위왕(魏王)은 조조(曹操)로,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다가 물이 떨어져 군사들이 목말라 하자, “앞에 있는 매화나무 숲에 매실이 달려 있으니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군사들이 입에 침을 흘리면서 물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
위외(嶎嵬)
평탄하지 아니한 모양
위요(魏姚)
‘요씨 집의 황색 모란과 위씨 집의 자색 모란’이라는 뜻의 ‘요황 위자(姚黃魏紫)’를 줄인 말로,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견문록(見聞錄)에 “낙양에서는 예전에 꽃을 바치지 않았는데, 이상적(李相迪)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처음으로 바치기 시작하였으나, 그때는 요황 위자 몇 송이에 불과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위요황자(魏姚黃紫)
희귀해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모란꽃의 품종이다.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의 「낙양모란기(洛陽牡丹記)」에 “서민인 요씨(姚氏)의 집 모란은 일천 개 이파리에 노란 꽃이 피고 위상 인부(魏相仁溥)의 집 모란은 일천 개 이파리에 붉은 꽃이 피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요황 위자(姚黃魏紫)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위우동(委羽洞)
절강성(浙江省) 황암현(黃巖縣)에 있는 위우산(委羽山)의 골짜기로 도가서(道家書)에서 말하는 동천(洞天)의 하나. 세상에서 선인(仙人) 유봉림(劉奉林)이 학(鶴)을 붙잡다가 깃을 떨어뜨린 곳이라 한다.
위원충(魏元忠)
당 나라 송성(宋城) 사람으로 중종(中宗) 때에 중서령(中書令)을 지냈음.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舊唐書)』 「위원충전(魏元忠傳)」
위위(暐暐)
빛이 환한 모양
위위(委委)
평온하고 아름다움
위유(韋柳)
당(唐) 나라의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킨다.
위육(位育)
하늘과 땅의 조화를 돕는다는 뜻이다. 모두 제자리에 편안히 있게 되고 만물이 충분히 길러지는 것을 말한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하늘과 땅도 자리를 정하고 만물도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다.
위의감주괴(威儀監酒蕢)
흙을 쌓아서 만든 북. 부고(拊鼓)라고도 하며, 괴초(蒯草)를 묶어서 만든 괴부(蕢桴)라는 북채로 연주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위이(逶迤)
깃발이 나부끼는 모양.
위이(委移)
침착하고 서두르지 아니한다. 물이 유유히 흘러한다.
위이불맹(威而不猛)
‘위엄(威嚴)은 있으나 결코 난폭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
증자(曾子)가 행한 일일삼성(一日三省) 중 한 가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도모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위자(魏紫)
아름다운 모란꽃의 종명(種名)이다.
위자요황(魏紫姚黃)
구양수(歐陽修) 목단보(牡丹譜)에 “전사(錢思)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란(牡丹)은 꽃 중의 왕이다.’ 하지만, 지금 요씨(姚氏)의 집에 있는 노랑꽃(姚黃)은 참으로 꽃 중의 왕이라 할 만하고 위씨(魏氏)의 집에 있는 자주꽃(魏紫)은 왕후라 할 만하다.’ 하였다.” 했다.
위정대부지(危鼎待扶持)
쇠운(衰運)이야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사직(社稷)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지(扶持)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제이수자(委諸二竪子)
병마(病魔)에 시달리게 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경공(景公)의 꿈에 질병이 두 명의 수자(竪子)로 변해 고황(膏肓) 사이로 숨어들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成公 10年
위제잉득평원류(魏齊仍得平原留)
위제(魏齊)가 수가(須賈)의 말을 듣고 범저(范雎)를 때려 갈비가 부러지고 이도 부러뜨리고 하여 죽은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후 범저는 장록(張祿)으로 변성명을 하고 정안평(鄭安平)의 주선으로 진 소왕(秦昭王)의 사자 왕계(王稽)를 따라 진 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제는 겁이 나서 조(趙) 나라로 도망가 평원군(平原君) 집에 숨어 있다가 결국 진 소왕이 범저의 원한을 갚아 주기 위해 그의 머리통을 요구했던 바람에 끝내 죽고야 말았음. 『사기(史記)』 卷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위족(衛足)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십칠년(十七年)에 “제(齊) 나라 대부(大夫) 포견(鮑牽)이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받자, 공자(孔子)는 이에 대하여 평하기를 ‘포장자(鮑莊子)의 지혜는 해바라기만도 못하다. 해바라기는 오히려 잎으로 태양을 가려 제 발인 뿌리 부분을 호위한다.’ 했다.” 하였다. 이 때문에 해바라기를 ‘발을 호위한다[衛足].’고 이르게 되었다.
위족불여규(衛足不如葵)
『좌전(左傳)』 성공(成公) 17년에 “경극(慶克)이 성맹자(聲孟子)와 간통한 사실을 안 포장자(鮑莊子)가 이를 국무자(國武子)에게 고하니 국무자가 경극을 꾸짖었다. 이를 안 경극의 부인이 국무자에게 참언을 올렸으므로 포장자가 다리를 끊기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에 대하여 공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만 못하다. 해바라기는 충성을 해도 오히려 그 뿌리(足)를 보호하니까. 했다.” 하였다.
위종석피양광발(危踪昔被佯狂髮)
은(殷) 나라의 임금인 주(紂)가 무도(無道)하자 기자는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이에 거짓 미쳐 머리털을 풀어뜨리고 종이 되었다. 『사기(史記)』 卷三十八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위주삼곡용(魏犨三曲踊)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8년 하 4월 조(條)에, “진 문공(晉文公)이 초 나라와 성복(城濮)에서 싸울 적에 조(曹)에 들어가서는 조에서 희부기(僖負羈)를 등용하지 않은 데 대한 죄를 따지고, 군사들에게 희부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서, 지난날에 희부기에게 받은 은혜를 갚았다. 그러자 위주와 전힐이 이에 노해 희부기의 집을 불태웠는데, 위주가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 진 문공이 위주와 전힐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위주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사신을 보내어서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 위주가 병들었으면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위주가 가슴의 상처를 싸매고는 사자를 만나서 ‘임금의 위령에 힘입었는데 어찌 편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삼백 번을 멀리 뛰고 삼백 번을 높이 뛰었다. 이에 진 문공이 위주는 죽이지 않고 전힐만 죽인 다음 군중에게 조리를 돌렸다.” 하였다.
위주환완적(爲酒宦阮籍)
진(晋)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완적이 매우 술을 좋아하여, 보병교위영(步兵校尉營)에는 술 3백 석을 저장해 두었다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보병교위가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晋書)』 卷四十九
위주환유치완적(爲酒宦遊嗤阮籍)
진(晋)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완적이 매우 술을 좋아하여, 보병교위영(步兵校尉營)에는 술 3백 석을 저장해 두었다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보병교위가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晋書)』 卷四十九
「위지(魏志)」
중국 晉나라 초기에 陳壽(진수)가 엮은 사서(史書)로, 삼국지(三國志)의 한 부분이다. 삼국지는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지 30권 중에 동이전(東夷傳)이 들어 있어 한국 고대사의 유일한 史料가 되고 있다.
위징(魏徵)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정치가. 자는 현성(玄成). 거록군(鉅鹿郡) 곡양(曲陽) 사람이다. 위징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가난하여, 출가해서 도사(道士)가 되었다. 617년 이밀(李密)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621년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어 이세민(李世民)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발탁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했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위징의 간언은 태종이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징비(魏徵碑)
원래 위징(魏徵)은 태자 건성(建成)을 섬겨 태종을 제거하려 하다가 도리어 당태종(唐太宗)의 세력에게 패하여 건성은 살해되고 위징은 잡혔었는데, 태종이 그의 어짊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위징이 태종의 재상으로 충간(忠諫)을 좋아하니 태종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위징이 죽자, 몹시 슬퍼하고 손수 비문(碑文)을 지어 세우기까지 하였으나 뒤에 그가 추천한 두정륜(杜正倫)ㆍ후군집(侯君集) 등이 죄를 짓자, 위징을 시기하던 간신들은 그가 아당했다고 모함하니 이것을 믿은 태종은 손수 써서 세운 비석을 넘어뜨리기까지 하였다. 그 후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지 말라던 위징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출정했다가 실패하자, 그제야 그의 어짊을 깨닫고 탄식하기를, “위징이 만일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위징에게 제사하고 다시 비석을 세웠다 한다.
위천(渭川)
① 여상(呂尙)이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났던 위수(渭水)를 말한다.
② 위수(渭水)를 말하는데, 주 효왕(周孝王)이 진(秦) 나라 비자(非子)를 시켜 위수와 견수(汧水) 사이에서 말을 기르게 하여 말이 크게 번식되었다. 『사기(史記)』 卷五 「진본기(秦本紀)」
위천조주인(渭川釣周人)
강 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주(周) 나라 때 강 태공이 위천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가 문왕(文王)을 만나서 세상에 나왔고, 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다.
위천죽(渭川竹)
위수(渭水)의 물가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사기(史記)』 卷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위천의 천묘죽(千畝竹)을 가진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대등하다.” 하였다.
위천지간도(渭川持竿圖)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주 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기 전 위수 가에서 낚시질하던 때의 광경을 그린 그림.
위천천무(渭川千畝)
위수(渭水)의 연안(沿岸)에 대가 많이 나는 곳이 있음을 이른 말이다. 『사기(史記)』 卷129 「화식열전(貨殖列傳)」
위천후(渭川侯)
위천(渭川)에 있는 대나무밭 천 이랑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위천은 대나무가 잘 자라기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의 대나무밭 천 이랑을 소유한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같다고 한다. 『사기(史記)』 卷129 「화식열전(貨殖列傳)」
위청(衛靑)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 흉노족을 정벌한 공으로 대장군에 제수되었고, 곽거병(霍去病)과 더불어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다. 『한서(漢書)』 卷五十五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위체시가별유재(僞體詩家別有裁)
진체(眞體)가 아닌 위체를 제거함을 말한 것이다.
위타(尉佗)
남월(南越)의 왕 조타(趙佗)를 가리킨다. 조타가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스스로 왕이 되어 무제(武帝)라고 칭하였는데, 문제가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어 타이르자 드디어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신(臣)이라 칭하였다. 『사기(史記)』 卷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위태(委蛻)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자식과 손자는 너의 소유가 아니고, 바로 천지의 기(氣)가 쌓이어 매미 허물처럼 너의 뒤를 남긴 것이다[孫子非汝有 是天地之委蛻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위편(韋編)
옛날에는 종이가 발명되지 아니하여 대(竹)쪽에다 써서 전하였던 것인데, 그 대쪽을 가죽으로 엮었다. 그래서 서적을 위편(韋編)이라고 한다. 공자는 늘그막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가죽으로 만든 책끈이 닳아서 세 번이나 끊어졌다 한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을 말한 것으로, 공자가 만년에 『주역(周易)』을 매우 많이 읽어 간책(簡冊)을 열심히 읽다보니 그 가죽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한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위평(韋平)
서한(西漢) 시대의 위현(韋賢), 위현성(韋玄成)과 평당(平當), 평안(平晏) 부자를 아울러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들 부자가 서로 계승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다. 『한서(漢書)』 卷七十一 「평당열전(平當列傳)」
위학(僞學)
정의에 어그러지는 학문.
위항(委巷)
서민들이 사는 거리.
위항(葦杭)
‘갈대 하나로 건널 수 있다’는 말로, 여기선 왜구가 곧 들이닥친다는 표현으로 쓰였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하광(河廣)」에 “누가 하수가 넓다고 말하는가? 한 갈대로도 건너갈 수 있다네.[誰謂河廣 一葦杭之.]”라고 하였다. /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위행언손(危行言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에는 말과 행동 모두 높고 곧게 해야 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행동은 높고 곧게 하되 말은 낮춰서 겸손하게 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遜].”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위현(韋弦)
스스로 몸가짐을 중도에 맞도록 경계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에 성질이 매우 급했던 서문표(西門豹)는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지녀서 성질을 느슨하게 하고, 마음이 매우 느슨했던 동안우(董安于)는 팽팽한 활시위(弦)를 몸에 지녀서 마음을 조금 급하게 하여, 각각 그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
위현성(韋玄成)
한(漢) 나라 때 사람. 그는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밝아 명망이 높았고 그의 아버지인 위현(韋賢)은 승상(丞相)을 지냈으며 역시 경학에 밝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문장으로는 현성이 오히려 아버지보다 훌륭했다고 한다. 『사기(史記)』 卷九十六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위호(魏瓠)
쓸모없는 물건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위왕(魏王)이 나에게 큰 박씨를 주므로, 심어서 큰 박이 열렸다. 이를 쪼개 표주박을 만들었는데 넓기는 하나 얕아서 물건을 담을 수 없었다. 텅 비고 크지 않은 것은 아니나 쓸모가 없으므로 깨버렸다.’하였다.[惠子謂莊子曰 “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擧也. 剖之以爲瓢, 則瓠落無所容. 非不呺然大也, 吾爲其無用而掊之.”]” 한 말이 있다.
위호(威弧)
① 위력있는 활, 즉 무위(武威)를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下의 “나무를 구부려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그 이로움을 활용해서 천하를 제압한다[弦木爲弧 剡木爲矢 弧矢之制 以威天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② 별 이름이다. 『문선(文選)』에 실려있는 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위호를 휘어지도록 당겨 파총산의 큰 이리를 쏘리라[彎威弧之拔剌兮 射幡冡之封狼].”하였다.
위혼인(爲婚姻)
친척이 되다.
위화(魏花)
모란(牡丹)의 이명(異名)인데, 곧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모란꽃에 비유한 말이다. 모란꽃을 본시 위씨(魏氏) 집에서 심었다 하여 위화라고 한다.
위환지시사(魏桓知時事)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다고 하였네[魏桓先我知時事]. 위환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로, 환제(桓帝) 때에 자주 부름을 받았는데, 향인(鄕人)들이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하자, 위환이 말하기를 “벼슬을 하는 것은 뜻을 실천하기 위함인데, 지금 천수(千數)의 후궁(後宮)을 줄일 수 있으며, 만필(萬匹)의 구마(廐馬)를 감할 수 있으며, 좌우(左右)의 권호(權豪)들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하니, 모두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위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위환이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다면 제자(諸子)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위황(萎黃)
말라서 누렇게 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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