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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37. 유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37. 유

건방진방랑자 2020. 4. 2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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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

사관하다(仕官--), 벼슬살이하다

유세하다

유람하다

 

()

전하여 비유적으로 도덕의 기초가 되는 것. 또 세계를 매달아 떨어지지 않게 하는바. 즉 기강, 원리 등을 말한다.

 

유가(儒家)

공자(孔子)맹자(孟子)순자(荀子) .

 

유가(劉家)

유씨(劉氏)인 한 나라 왕실을 말한다.

 

유가(劉賈)

전한(前漢) 때의 경학자(經學者)인 유향(劉向)과 후한 때의 경학자인 가규(賈逵)를 합칭한 말인데, 이들은 특히 좌씨전(左氏傳)을 매우 숭상하여 강론과 저술을 많이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유가임(類可任)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유각(劉閣)

한나라의 유향(劉向)이란 사람이 천록각(天祿閣)이라는 국가 도서실에서 여러 가지 고서를 교정하였다.

 

유각양춘(有脚陽春)

가는 곳마다 덕화(德化)가 나타내거나, 간 곳마다 은덕(恩德)을 베푸는 지방관을 말한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송경(宋璟)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은 다리가 있는 양춘이다[有脚陽春].’ 하였는데, 이는 곧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양춘(陽春)이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 주듯이 덕화가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하는 대목에서 나온 문자이다. / 유의어: 유각춘(有脚春)

 

유간일규(牖間一窺)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섭공자고(葉公子高)가 용을 몹시 좋아하여 집안 여기저기다 용을 그려놓고 보곤 하였으므로, 천룡(天龍)이 그 소식을 듣고 내려와서 머리는 들창으로 들이밀어 엿보고 꼬리는 마루에 내려놓으니, 섭공이 그것을 보고는 버리고 달아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신서(新序)』 「잡사(雜事)

 

유강(惟康)

만사의 온당함을 헤아리는 것으로서 임금이 정치를 신중히 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

 

유개유고의(帷蓋有古義)

공자가 기르던 개가 죽자 자공(子貢)에게 묻어 주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해어진 휘장을 버리지 않는 것은 말을 묻어 주기 위해서이며, 해어진 수레의 차일을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묻어 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敝帷不棄 爲埋馬也 敝蓋不棄 爲埋狗也]. 나는 가난해서 덮어줄 차일이 없으니, 묻을 때 거적을 충분히 덮어서 머리가 흙더미 속에 빠지지 않게 하라.”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유개필선(有開必先)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하고자 하는 바의 일이 장차 이르려면 반드시 먼저 징조가 있다[嗜欲將至 有開必先].”이라 하였는데 그 주에 유개필선이란 말은 성인(聖人)이 왕천하(王天下)를 하고자 할 적에는 신()이 길을 열어 반드시 먼저 그를 위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보좌를 미리 낳게 한다.” 하였다.

 

유갱생(劉更生)

갱생(更生)은 한() 나라의 학자 유향(劉向)의 본명(本名)이다. 밤에 성수(星宿)를 관찰하면서 음양(陰陽)의 휴구(休咎)를 가지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했다고 한다. 한서(漢書)36

 

유거(輶車)

사신이 타고 다니는 가벼운 수레이다.

 

유거(柳車)

장례식에 사용하는 상거(喪車)를 말한다. 여기에서의 유()는 모은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장식물로 장식한 수레를 말한다. 천거(輤車), 신거(蜃車), 진거(軫車)라고도 한다. /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유거적막사도공(幽居寂寞似逃空)

세상 소식을 듣지 못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텅 빈 골짜기로 도망친 자는 ……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도 기쁜 마음에 가슴이 뛴다[夫逃虛空者 …… 聞人足音跫然而喜矣].”공곡 족음(空谷足音)’의 고사가 실려 있다.

 

유검(遺劍)

전설에, “황제(黃帝)가 붕()할 제 몸은 하늘로 올라가고 활과 검만 남겼다.” 하는데, 임금의 승하함을 말한다.

 

유검석(遺劍舃)

임금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황제(黃帝)가 죽어 교산(橋山)에 장사지냈는데, 산이 무너지고 관()도 텅빈 채 칼과 신 두 가지만 관에 남아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열산전(列仙傳)

 

유게주남사자헌(留憩周南使者軒)

선정(善政)을 베푸는 지방관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감당 나무 그늘에서 쉬었던 관계로 그 감당 나무까지 대단히 여겨 감당시(甘棠詩)를 노래했던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당(甘棠)

 

유격(幽闃)

그윽하고 조용하다

 

유견(柔牽)

()한 도가 끌고서 나아간다는 뜻으로, 주역(周易)구괘(姤卦)의 단사(彖辭), “구리로 만든 수레 멈춤대에 매어 놓은 것은 유한 도가 끌고서 나아가기 때문이다[繫于金 柔道牽].”하였다.

 

유견쟁지타작훤(惟見爭枝墮雀喧)

두보(杜甫)의 시에 짹짹거리는 참새들 가지 다투다 떨어지고, 날아다니는 곤충들 마당 가득히 노니누나[掉雀爭枝墮 飛蟲滿院遊].”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0 落日

 

유경(遺經)

공자가 찬()주역(周易)을 말한다.

 

유경벽전(幽經僻典)

유경(幽經)은 인상(人相)이나 지상(地相)을 살펴 길흉을 점치는 상학경(相鶴經)으로 신선이나 풍수지리에 관련된 비서(祕書)를 의미하고 벽전(僻典)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전고(典故)를 싣고 있는 책을 말한다.

 

유경행(庾景行)

경행(景行)은 유고지(庾杲之)의 자

 

유고공(有故公)

노 정공(魯定公)을 이른다. 노 소공(魯昭公)이 건후(乾侯)에 있다가 지난해에 객사(客死)하여 금년 6월에야 시신이 노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춘추(春秋) 경문(經文)에서 정월 즉위(正月卽位)를 쓰지 않았는데, 곡량전(穀梁傳)에서 정공에게 정월 즉위를 쓰지 않은 것은 곧 소공의 상차가 아직 밖에 있어 유고(有故)한 임금이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한 데서 온 말이다. 자세한 것은 곡량전(穀梁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보인다.

 

유고피맹(襦袴疲氓)

한 나라 염범(廉範)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있을 때에 도시에, 집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었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나므로, 전의 태수는 영을 내려 밤에 불을 켜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여자들이 밤에 길쌈을 하지 못하여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염범이 와서는 다만 방화(防火)할 물만 준비하게 하고 불켜는 것을 허락하였더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노래를 부르기를, “전에는 홑옷도 없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 개 씩이나 되네.” 하였다.

 

유곤(留髠)

전국(戰國) 시대에 순우곤(淳于髡)이 제왕(齊王)에게 말하기를, “해가 저물고 술이 취했을 적에 남녀(男女)가 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당상(堂上)에는 촛불이 꺼지고 주인이 다른 손을 보내고 곤()을 유숙하게 할 적에 여인의 비단 옷에 끈이 풀어지고 향내가 나면 그 때가 제일 즐겁습니다.” 하였다.

 

유곤(劉琨)

좌사(左思)ㆍ곽박(郭璞)과 함께 동진(東晉)의 세 시걸(詩傑)로 일컬어지는데, 진이 남도(南渡)한 뒤 사직신(社稷臣)으로 자처하며 복수하기 위해 비통해하면서 피눈물로 시를 썼다고 한다.

 

유곤암하시(庾袞巖下尸)

유곤(庾袞)은 진() 나라 때 사람으로 근검(勤儉)하고 학문에 독실했으며, 특히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서 세인들이 그를 유이행(庾異行)’이라고 호칭하기까지 했는데, 뒤에 진 나라가 위태해짐을 보고는 대두산(大頭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현기증이 나서 잘못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던 고사이다. 진서(晉書)卷八十八

 

유곤자(劉琨紫)

() 나라 유곤(劉琨)의 눈이 자색(紫色)이었다.

 

유곤촉진멸(留髡燭盡滅)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제() 나라 순우곤(淳于髡)촛불이 다 꺼진 상태에서 다른 손님은 모두 내보내고 나만 남겨두고서 마음대로 마시게 하면 술 한 섬을 먹을 수 있다.”고 한 고사로서 기루(妓樓)에 머물며 즐기는 것을 말한다.

 

유공(庾公)

() 나라 유량(庾亮)을 가리킨다. 그가 무창(武昌)을 다스릴 때 부하 관원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남루(南樓)에서 달구경을 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

 

유공간(劉公幹)

공간(公幹)은 삼국 시대 위() 나라의 문인 유정(劉楨)의 자()이다.

 

유공객(遊邛客)

임공에 노는 손이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상여는 젊었을 때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문장이 뛰어났는데, 뒤에 임공에 와 있자 왕길은 무척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임공의 부호였던 탁왕손(卓王孫)의 연회에 함께 초대되었는데, 이때 마침 탁왕손의 딸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어 집에 있다가 상여에게 반하여 마침내 그를 따라 밤에 도망하였다. 한서(漢書)』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유공루(庾公樓)

중국 강주(江州)에 있던 누각 이름인데, () 나라의 유량(庾亮)이 강주ㆍ형주(荊州)ㆍ예주(豫州)의 자사가 되어 무창(武昌)을 다스릴 때 고을 관리 은호(殷浩)ㆍ왕호지(王胡之) 등과 남루(南樓)에 올라가 달구경을 하며 밤이 새도록 담소하였다 하여 나중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그곳에 누각을 세우고 유공루라 이름하였다 한다. 진서(晉書)卷七十三 유량전(庾亮傳)

 

유공은배(柳公銀杯)

유공(柳公)은 당() 나라 유공권(柳公權). 그는 일찍이 술잔 한 상자를 보관하여 두었는데, 포장하여 표지를 붙인 상자는 그대로 있으나 술잔은 다 없어져버렸다. 그런데 종들의 말이 요망하여 종잡을 수가 없자, 공권은 웃으면서 은술잔이 신선이 되어 가버렸는가 보다.” 하고, 다시는 힐문하지 않았다. 당서(唐書)』 「유공권전(柳公權傳)

 

유공진(庾公塵)

유공(庾公)은 곧 진() 나라 유량(庾亮)을 가리킨 말이다. 왕도(王導)는 유량의 권세가 너무 중한 것을 미워하여 항상 서쪽 바람이 불 때면 부채로 낯을 가리고 원규(元規)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힌다.” 하였다. 진서(晉書)卷六十五 왕도전(王導傳)

() 나라 왕도(王導)가 유량(庾亮)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유량은 무창(武昌)에 있었다. 서풍(西風)이 불 때마다 왕도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우며, “원규(元規)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히네.” 하였다. 무창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공흥(庾公興)

유공(庾公)은 진()의 유량(庾亮)을 말한다. 유량이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무창(武昌)에 있을 때 자기 부하 무리들이 가을 달밤에 남루(南樓)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유양이 거기를 오자 모두 일어나 피해가려고 하므로 유양이 나직이 말하기를 그대들 조금 있게. 늙은 이 사람도 여기 오니 흥이 보통이 아닐세.” 하고 함께 어울려 담소하였다고 한다. 진서(晉書)卷七十三

 

유과(유과)

연행사신(燕行使臣)이 연도(沿途) 및 사관에 머물 때 지급되던 물품을 사행이 소비하지 않고 수행하던 군뢰(軍牢)에게 주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뒤에 와서는 사행이 주던 물품을 호행통관(護行通官)이 가로채기 때문에 군뢰의 몫이 줄어들기도 하였다.

 

유관(劉寬)

후한 때 사람으로 성품이 본디 관후하여 그가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이민(吏民)들이 혹 과실이 있으면, 때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회초리로 때려서 수치심만 느끼게 했다 한다.

 

유관(劉冠)

한 고조(漢高祖)가 평민이었을 때 쓰고 다니던 관이다.

 

유관(楡關)

산해관(山海關)을 이름이니, 중국 하북성(河北省) 임유현(臨楡縣)에 있다. 투관(楡關)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오세가(楚世家)

 

유관오(儒冠誤)

유관은 유자(儒者)가 쓰는 갓인데, 유학(儒學)을 배웠기 때문에 궁하게 사는 것을 유관이 평생을 그르쳤다고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귀족이야 굶어 죽는 일이 없겠지만, 선비들은 잘못되는 경우가 많아[紈袴不餓死 儒冠多誤身].”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 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

 

유관오신(儒冠誤身)

두보(杜甫)의 시에, “선비의 관이 몸을 그르침이 많다.” 하였는데, 이것은 유자(儒者)가 공명(功名)과 처세를 잘 못한다는 뜻이다.

 

유광(劉光)

() 나라 때 사람. 자는 원휘(劉元).

 

유광(由光)

허유와 무광. 허유(許由)는 당요(唐堯) 때 은자(隱者), 무광은 은왕 탕(殷王湯) 때 은자.

 

유구(乳鳩)

새끼가 딸린 비둘기를 이른다.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거나 변명을 못하는 것을 이른다.

 

유군포(留軍布)

()을 서지 않는 정병(正兵)에게서 베를 거두어들인 것을 그 고을에 유치해 둔 것이다.

 

유궁(幽宮)

무덤의 별칭이다.

 

유궁(遺弓)

임금이 죽었다는 뜻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을 캐 형산(荊山)의 밑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수염을 드리운 용이 황제를 맞이하였으며, 황제가 신하와 후궁 70여 명과 함께 용을 타고 올라갔다. 나머지 신하들은 올라타지 못하고 용의 수염을 붙잡자 그 수염이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도 함께 땅에 떨어졌다. 황제가 하늘로 올라간 뒤에 백성들이 용 수염과 활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때문에 그 곳을 정호(鼎湖), 그 활을 오호(烏號)라 불렀다. 사기(史記)28 봉선서(封禪書)

 

유궁루(遺弓淚)

유궁(遺弓)은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신선이 되어 떠날 때 신하들이 붙잡고 함께 올라가려 하자, 황제의 활이 땅에 떨어졌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임금의 유물, 나아가서 임금의 죽음을 말한다.

 

유궁후예(有窮后羿)

() 나라 태강(太康) 시절 유궁(有窮) 땅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았는데,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羿)의 사정거리 안에 노닐면서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가 화살을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 然而不中者命也]].” 하였다.

 

유규(呦虯)

용이 꿈틀거리며 가는 모양.

 

유근(劉瑾)

() 나라 사람으로 시전통석(詩傳通釋)을 지었는데, 대전을 편찬할 당시 호광 등은 전적으로 타인이 만들어 놓은 것을 베꼈다. 이 중에 시경(詩經)시전통석(詩傳通釋)을 그대로 사용하고 다만 이 중의 우안(愚按)’이라고 한두 자만을 안성 유씨로 고쳤을 뿐이니,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전집주대전(詩傳集註大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집전(集傳)만을 기록하고 모시(毛詩) 등 제가(諸家)의 주해를 빠뜨렸으므로 이때부터 시의 본의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유근(柳根)

자는 회부(晦父)이고 호는 서경(西坰)이다.

 

유금목격(幽襟目擊)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그와 같은 사람은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도의 소재를 깨달으므로 또한 말이란 것이 불필요하다.” 하였다.

 

유금점슬(幽襟點瑟)

공자가 몇몇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소신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자로(子路)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는 다 정계에 진출하여 훌륭한 정사를 펴보겠다 하였으나, 증점은 조용히 거문고를 뜯고 있다가 일어나서 대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다는 뜻으로 대답하여 공자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유기(遊氣)

공중에 떠도는 운기(雲氣).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 “凡遊氣蔽天 日月失色이라 했다.

 

유기(猶記)

아직도 기억한다는 뜻이다.

 

유기(有氣)

월왕(越王)이 나갔다가 길에서 성낸 개구리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말하기를, “이 개구리가 기운이 있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하였다.

 

유기(幽期)

밀회(密會)의 약속으로, 곧 다시 만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을 말한다.

 

유기(柳旗)

유성(柳星)’을 말한다.

 

유기(由基)

춘추(春秋) 시대 초() 나라 대부(大夫)인데 활을 잘 쏘았다.

 

유기유강(惟幾惟康)

유기는 만사의 발단을 살피는 것이고, 유강은 만사의 온당함을 헤아리는 것으로서 임금이 정치를 신중히 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

 

유뇌(劉雷)

진대(晉代) 여산(盧山) 혜원사(慧遠師)의 주위에 모였던 백련사(白蓮社)의 인물들. 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ㆍ주속지(周續之)ㆍ종병(宗炳) .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어떤 상황에 대처할 때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이기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것에 당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도덕경(道德經)78, 육도삼략(六蹈三略)』 「상략(上略)/ 인용: 우리 모두의 문제인, ‘위안부문제 치열하되 여유롭게

 

유다(油茶)

수목의 이름이다. 산다화(山茶花)의 이칭이다. 한 해 동안에 꽃이 세 번 피고 결실을 두 번 맺는데 그 열매로는 기름을 짬. 검강현지(黔江縣志)

 

유담경양(劉惔傾釀)

하충(何充)이 술을 마시는 태도가 항상 온공(溫恭)하였으므로, 유담(劉惔)차도(次道)와 술을 마시다 보면 집에 있는 술동이를 모두 기울이고 싶어진다.”고 한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77 하충전(何充傳)

 

유당(油幢)

기름을 먹인 휘장으로, 배나 수레 위에 덮는 것이다.

빗물이나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기름을 먹인 휘장으로 흔히 진영의 막사에 이용한다.

 

유대(有待)

좋은 일을 만나다

 

유도(劉燾)

() 장흥(長興) 사람. 진형백(陳亨伯) 등 팔준(八俊) 중에 한 사람이며 당세 명필가로서 각첩(閣帖)을 속수(續修)하였다.

 

유도(幽都)

저승을 말한다. / 유의어: 황천(黃泉)

 

유동(劉董)

유향(劉向)과 동중서(董仲舒)’를 말한다.

 

유두일(流頭日)

음력 6월 보름으로, 이날에는 재앙을 털어버리기 위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풍속이 있다.

 

유득통전임진차(留得筒錢任盡叉)

긴 자루 끝에 철차(鐵叉)를 끼운 것이다. 소동파(蘇東坡)가 귀양가서 살 적에 매달 초하룻날 45백 전을 가져다가 30덩이로 잘라 대들보에 걸어두고 새벽에 화차로 당겨 취하여 썼다.

 

유란곡(幽蘭曲)

유란백설곡(幽蘭白雪曲)의 준말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송옥(宋玉)이 지었다 한다.

 

유랑(庾郞)

남제(南齊) 때의 유고지(庾杲之)를 말한다.

 

유랑(劉郞)

촉한의 소열황제 유비를 가리킨다.

후한 때 섬계(剡溪) 사람인 유신(劉晨)을 가리킨다. 영평(永平) 연간에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서 약을 캐다가 길을 잃어 헤매던 중에 아름다운 두 여인을 만나 함께 살며 정을 통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손이 이미 7대에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가려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나섰으나 찾지 못했다 한다. 흔히 여인의 곁을 떠났다가 다시 찾아간 사람을 가리킨다. 유명록(幽明錄)

() 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 그가 조정에서 쫓겨나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가 있다가 10년 만에 부름을 받고 입경(入京)하여 장안(長安)의 현도관(玄都觀)에서 노닐 적에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복사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는 현도관 속에 핀 일천 그루 복사꽃, 유랑이 떠난 뒤에 모두 새로 심었구려[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는 시를 지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랑가추풍(劉郞歌秋風)

유랑(劉郞)은 한 무제(漢武帝)를 가리킨다. 무제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봉선(封禪)을 자주 하였는데, 한번은 하동(河東)에 가서 후토(后土)에 제사한 다음 분하(汾河)를 건너다가 중류에서 술자리를 베풀고는 즐거워하여 추풍사(秋風辭)를 지었는데, 여기에 저 가인을 그리워하여 잊지 못한다. 누선을 띄우고 분하를 건너면서 중류를 가로지르니 흰 물결 일렁이누나. 퉁소와 북 울리며 뱃노래 부른다[懷佳人兮人能忘 汎樓船兮濟汾河 橫中流兮楊素波 簫鼓鳴兮發揚歌].”는 말이 있는바 가인이란 곧 신선을 가리킨 것이다.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

 

유랑거후재(劉郞去後栽)

유랑(劉郞)은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 () 나라 덕종(德宗) 말엽에 유우석이 상서 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으로 있으면서 탄핵을 받아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했다가 헌종(憲宗) 10년에 다시 서울로 불려들어와서 지은 현도관에 놀면서 꽃 구경하는 사람을 읊은 시(遊玄都觀看花君子詩)’자맥에 홍진을 떨치고 오니, 사람마다 꽃 보고 돌아온다 하네. 현도관의 천 그루 복숭아는 다 유랑이 떠난 후에 심었네.(紫陌紅塵拂而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 하였는데, 옛날에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 보게 됨을 읊은 시이다. 구당서(舊唐書)下 卷一百六十 유우석전(劉禹錫傳)

 

유랑거후화(劉郞去後花)

현도관(玄都觀)은 당()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도관(道觀)의 이름이고, 유랑(劉郞)은 바로 당 나라 때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을 이른다. 현도관에는 본디 아무런 꽃도 없었는데, 유우석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폄척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나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어느 도사(道士)가 현도관에 선도(仙桃)를 가득 심어 놓아서 꽃의 화려하기가 마치 붉은 놀(紅霞)과 같았으므로, 유우석이 꽃구경한 제군(諸君)에게 준 시에 장안 거리 붉은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마다 꽃구경하고 돌아온다 하누나. 현도관 안의 복숭아나무 일천 그루는, 모두가 유량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 한 데서 온 말이다.

 

유랑번행(劉郞番行)

유랑(劉郞)은 후한(後漢) 때의 유신(劉晨)을 가리킨다. 명제(明帝) 때 유신이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天台山) 도원동(桃源洞)으로 약을 캐러가서 선녀를 만나 함께 살다가 세상에 한번 나온 뒤에 다시 찾아갔다 한다. 유명록(幽明錄)

 

유랑삼구(庾郞三韭)

남조(南朝) () 나라 유고지(庾杲之)의 밥상에는 늘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三韭]만이 놓였는데, 삼구(三韭)가 삼구(三九)와 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유랑이 어디 청빈하던가, 어채 반찬이 이십칠이나 되는 걸[誰謂庾郞貧 食鮭常有二十七種].”이라고 놀린 고사가 있다. 남제서(南齊書)』 「유고지전(庾杲之傳)

 

유랑주측반(劉郞舟側畔)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의 시(), “파선된 배 옆에 일천 돛대가 지나가고, 늙은 나무 앞에 일만 나무 붐비네[沉舟側畔千帆過 老樹前頭萬木春].”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불행한 사람의 옆에 득의(得意)한 사람들이 지나간다는 말이다.

 

유랑현도공독래(劉郞玄都空獨來)

유랑은 곧 유우석(劉禹錫)을 말한다. 당서(唐書)』 「유우석전(劉禹錫傳)내가 둔전 원외랑(屯田員外郞)으로 있을 적에는 현도관(玄都觀)에 꽃이 없었는데, 낭주 사마(郞州司馬)로 좌천된 지 10년 만에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들으니, 도사(道士)가 현도관 주위에 선도(仙桃)를 잔뜩 심었다고 했다. 그 후 다시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있다가 14년이 지나서 다시 현도관을 찾아가 보니, 선도는 한 그루도 없고 아욱과 귀리만 봄바람에 흔들리더라.”고 하였다.

 

유량(庾亮)

()나라 사람. 자는 원규(元規). 풍골이 준수하고 흥취가 높았음.

 

유려(幽厲)

() 나라 때의 폭군인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을 가리킨다.

 

유령(庾嶺)

강서성(江西省) 대유현(大庾縣) 남쪽에 있는 대유령(大庾嶺)을 가리키는데, 산이 험하고 물이 맑으며 붉은 매화와 흰 매화(梅花)가 많기로 유명하여 매령(梅嶺)이라고도 한다. 중국 소주(韶州)에 있다. 문견근록(聞見近錄)유령이 험절하여 골물이 끊겼다 이어졌다 흐르고, 홍백매(紅白梅)가 길을 끼고 있어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한 선()과 같다.” 하였다.

 

유령(劉伶)

()의 패국(沛國) 사람. 자는 백륜(伯倫)이다. 완적(阮籍)ㆍ혜강(嵇康)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술을 지극히 좋아하여 항상 술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를 지어 술을 예찬하였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령매(庾嶺梅)

유령은 산명(山名)으로 특히 매화(梅花)의 명소라서 일명 매령(梅嶺)이라고도 하는데, 이 유령의 매화는 남쪽 가지에서는 지고 북쪽 가지에서는 피곤 한다고 한다.

 

유령부(劉伶婦)

진 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데 술을 몹시 즐겼다. 아내가 울면서, “술을 너무 마시면 몸을 보전할 수 없으니 술을 끊으시오.” 하니, 유령(劉伶), “내 스스로는 끊을 수 없다. 귀신에게 빌고 맹세를 해야겠으니 술과 고기를 준비하라.” 하므로 준비하였더니, 유령이 꿇어앉아 빌기를, “한꺼번에 한 섬을 마시고 닷 말(五斗)로 해정(解酲)하게 하소서. 여자의 말은 들을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유령삽수(劉伶鍤隨)

유령(劉伶)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술병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사람을 시켜 삽을 가지고 항상 따라다니게 하며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 묻으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령석막(劉伶席幕)

유령(劉伶)은 진()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 그는 술을 좋아하여 방안에서 옷을 벗고서 친구가 와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친구가 책하니 답하기를, “나는 천지(天地)를 막()과 자리()로 삼고 집을 옷으로 삼는데, 너는 왜 남의 옷 속에 들어와서 시비를 거느냐.” 하였다.

 

유령야학토청홍(猶令夜壑吐晴虹)

조식(曹植)칠계 팔수(七啓八首)’옷소매를 휘날리니 구주(九州)에 바람이 일고, 격앙(激昻)을 하니 그 의기(義氣)가 무지개로 비추도다[揮袂則九野生風 慷慨則氣成虹蜺].”라는 표현이 있다.

 

유령천(劉伶天)

유령은 진() 나라 패국(沛國) 사람으로 자는 백륜(伯倫)이다. 술을 즐겨하여 늘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자기 뒤를 따르게 하고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 묻으라 하였다. 그의 주덕송(酒德頌)하늘을 장막으로 삼고 땅을 돗자리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령휴삽(劉伶携鍤)

유령(劉伶)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특히 술을 대단히 좋아하였는데, 어디서나 자신이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 묻으라는 뜻에서 항상 종자(從者)에게 삽을 지고 따르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로(兪盧)

() 땅 사람인 편작(扁鵲)과 유부(兪跗)로서 모두 옛날의 명의(名醫)이다.

 

유로수반계(有路須攀桂)

깊은 산속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다.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계수나무 가지를 부여잡고서 그대로 주저앉아 머무른다[攀援桂枝兮聊淹留].”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자연에 조금도 인공을 가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유뢰진(洧雷震)

주역(周易)()가 중복됨이 진()이니, 군자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나니라[洧雷震 君子以消懼修省].”라는 말이 있다.

 

유룡(游龍)

좋은 수레가 호기 있게 구르는 것을 넘나들며 노는 용에 비한다.

너울거리는 홍초(여뀌)’를 의미한다. 시경(詩經)정풍(鄭風) 산유부소(山有扶蘇)산에는 부소가 있고, 습지에는 연꽃이 있거늘, 자도는 만나지 못하고, 미친놈만 만난단 말인가. 산에는 우뚝한 소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너울거리는 홍초(紅草)가 있거늘, 자충을 만나지 못하고, 마침내 교활한 아이를 만난단 말인가[山有扶蘇 隰有荷華 不見子都 乃見狂且 山有橋松 隰有游龍 不見子充 乃見狡童].”라고 말했다. / 인용: 記農夫語(김시습)

 

유룡(猶龍)

사람이 변화 무쌍함을 말한다. 공자는 노자(老子)를 만나본 다음 제자들에게 노자는 용과 같다[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하여 그의 변화 무쌍함을 칭찬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三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유루(劉累)

() 나라 때에 유루란 사람이 환룡씨(豢龍氏))에게서 용 길들이는 법을 배워서 하 나라 임금 공갑(孔甲)을 섬겼는데, 그는 용에게 먹이를 주어 잘 길렀으므로, 그에게 어룡씨(御龍氏)란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유루(庾樓)

유공루(庾公樓)라고도 한다. () 나라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을 다스리면서 관료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와 같이 남루(南樓)에 올라가 달을 구경하고 날이 새도록 시를 읊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후 문인(文人)들이 모여서 음영(吟咏)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5 용지(容止)

 

유루명월(庾樓明月)

() 나라의 유량(庾亮)이란 사람인데, 그는 무창(武昌)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달밤이면 남루(南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한다.

 

유류(溜溜)

물 흐르는 소리를 말한다.

 

유류겸약약(纍纍兼若若)

한서(漢書), “()이 어찌 그리 주렁주렁하며, 인끈이 어찌 그리 처렁처렁한고.”라는 말이 있다.

 

유륜유척(有倫有脊)

차례가 있고 이치가 있다는 말로, 법칙 또는 조리가 있는 뜻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정월(正月)부르짖는 이 말이 도리가 있고 조리가 있네. 오늘날 사람들 어찌하여 해독을 끼치는가[維號斯言, 有倫有脊. 哀今之人, 胡爲虺蜴]’라고 했다. / 인용: 原詩上(홍석주)

 

유리(留犁)

흉노(匈奴)들의 밥숟가락인데, 한 원제(漢元帝) 때에 거기도위(車騎都尉) 한창(韓昌)과 광록대부(光祿大夫) 장맹(張猛)이 흉노에 사신가서, 한 나라와 흉노 사이에 앞으로는 서로 침략하지 않고 한 집안처럼 서로 화친하자는 내용으로 맹약을 하였는데, 이때 흉노의 선우(單于)가 백마(白馬)를 잡아 피를 받아서 경로보도(徑路寶刀)와 금류리(金留犁)를 가지고 그 피에 술을 타 저어서 함께 마시며 맹약을 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卷九十四

 

유리(由吏)

수향리를 일컫는 별칭이다.

 

유리(羑里)

지명(地名)으로, ()의 주()가 이곳에 있는 감옥에다가 주 문왕(周文王)을 가두었다. 이때 문왕은 감옥에서 복희씨(伏羲氏)8()를 근본으로 하여 64()를 만들어내니 이것을 문왕후천(文王後天)’이라 하며, 이때문에 주 나라의 ()이란 뜻으로 주역(周易)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유리복닉(留犂服匿)

유리(留犂)는 흉노 선우(單于)가 쓰던 밥숟갈이고, 복닉(服匿)은 흉노의 술그릇이다.

 

유림(柳林)

하북성(河北省) 통현(通縣) 남쪽에 있었던 지명으로, 원 나라 때 이곳에서 사냥을 많이 하였다. 속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직예(直隸)순천부(順天府)

 

유마(流馬)

삼국 때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제작한 것인데 촉도(蜀道)가 험하기 때문에 식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기계로 목우(木牛)와 함께 유명하다. 수경(水經)면수주(沔水注),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제갈량전(諸葛亮傳)

 

유마(維摩)

유마는 석가(釋迦)와 동시대에 살면서 대승(大乘)의 불법을 수행했다는 거사(居士)의 이름으로, 유마힐(維摩詰)의 준말이다. 유마가 일부러 병을 칭탁하고 석가에게 나아가지 않자, 석가가 보살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는데, 병의 원인을 묻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질문에 중생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내가 병든 것이니,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다.[一切衆生病 是故我病 若一切衆生得不病者 則我病滅]”라고 대답한 유명한 고사가 전한다. 유마경(維摩經)文殊師利問疾品 / 석가와 동시대 사람으로 출가(出家)하지 않은 채 보살(菩薩)의 행업(行業)을 닦은 석가의 속제자(俗弟子). 일찍이 불제자인 사리불(舍利弗미륵(彌勒문수사리(文殊舍利) 등에게 대승(大乘)의 교리를 설법하였는데, 항상 병을 앓았다 한다.

 

유마거사(維摩居士)

유마 거사는 석가(釋迦)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석가의 교화를 도운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장자(長者)인데,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을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유마경(維摩經)를 설했다고 한다.

 

유마방장실(維摩方丈室)

유마 거사(維摩居士)가 중생의 병이 다 낫기 전에는 자신의 병도 나을 수 없다면서 드러눕자,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보내 문병(問病)케 하자 유마 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方便品 入不二法門品

 

유마병(維摩病)

자신의 도를 아껴 남과 가벼이 만나지 않으려는 고의적인 병. 유마(維摩)는 여래(如來)의 속제자(俗弟子)로 세속에 있으면서 여래의 교화를 도운 법신(法身)의 대사이다. 부처가 비야리성(毗耶離城)에 있었으므로 성안에 있는 5백 장자(長者)의 아들들이 여래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이때 유마는 고의로 병을 칭탁하자 여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여러 비구(比丘)들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니, 그는 여러 가지 신통력을 보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상을 보여줬다.

 

유마병신(維摩病身)

유마(維摩)는 석가와 동시대 사람인 유마힐(維摩詰)인데 고의로 병을 핑계한 고사가 있다.

 

유마식기(維摩息機)

유마(維摩)는 유마라힐(維摩羅詰)로 석가와 같은 시대 사람이고, 기심은 물아(物我)와 이해를 따지는 간사한 마음을 말한다.

 

유마실(維摩室)

유마방장실(維摩方丈室)의 준말이다. 즉 유마 거사의 방장(方丈)이란 말로 절[]을 이름인 듯한다.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의 주에 維摩詰三萬二千獅子座 高八萬四千由旬 高廣嚴淨 來入維摩方丈室 包容無所妨礙라고 보인다.

 

유마조(猶馬曹)

마조는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의 별칭. 왕휘지가 환충(桓沖)의 기병대 병참군(兵參軍)이 되었는데, ()경은 어느 부서에 있는가?”라고 하니, 휘지가 마조(馬曹)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찮은 벼슬을 말한다.

 

유마질(維摩疾)

중이 질병을 얻었음을 비유한 말. 유마경(維摩經)에 의하면, 고승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병이 있어, 국왕(國王대신(大臣) 등이 가서 문병을 하였는데, 이 때 문수(文殊)가 묻기를 거사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이 질병을 얻은 것입니까?”하니, 거사가 말하기를 일체 중생(一切衆生)이 병들었기 때문에 내가 병든 것이니, 일체 중생이 병들지 않을 수 있다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유막(油幕)

여자가 밖에 나갈 때에 타는 수레에 기름 바른 휘장을 두른다.

 

유만부동(類萬不同)

비슷한 것들은 수만 가지가 있어도 같지는 않다. 모든 무리가 서로 같지 않음. 많은 것이 있으나 모두 서로 같지 않음. 또는 정도를 벗어남. 분수에 맞지 않음을 이른다.

 

유말궁어(濡沫窮魚)

함께 곤경에 처하여 서로 구조를 기다리는 딱한 처지를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물이 바짝 마르자 …… 물고기들이 서로 물기를 적셔 주고 거품을 뿜어 주었다.[泉涸 …… 魚相呴以濕 相濡以沫]”라고 하였다.

 

유매(逾邁)

멀리 떠나가다. 성큼 나가다.

 

유명(幽明)

()는 죽음의 세계요, ()은 인간의 세계다. 그러므로 유명(幽明)을 달리하다란 말은 인간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갔다는 말로, 죽었다는 뜻이다.

 

유명무실(有名無實)

명목(名目)만 있고 실상(實相)은 없음. 이름만 있고 실제(실상·실속)가 없음. 평판과 실제가 같지 않음. / 유의어: 허명무실(虛名無實).

 

유모(帷帽)

부인이 쓰는 모자를 말한다.

 

유몽득(劉夢得)

몽득은 당() 나라 사람 유우석(劉禹錫)의 자()이다. 당 헌종(唐憲宗) 때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냈다.

 

유몽인(柳夢寅)

명종(明宗)~인조(仁祖) 연간의 문장가. 호는 어우당(於于堂). 광해군(光海君)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화를 면했으나, 뒤에 그가 지은 상부사(孀婦詞)로 해서 그의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다. 저서로 어우야담(於于野談)·어우집(於于集)등이 있다.

 

유묘(有苗)

남방에 사는 오랑캐의 이름이다.

 

유무(劉戊)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범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吳王) 유비(劉濞)와 함께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유문(留門)

열어둘 때가 아닌데도 대궐문을 열어두는 일. 대궐문은 으레 초혼(初昏)에 닫았다가 날이 새면 여는 것인데, 나갈 자가 다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열어둘 때가 아닌데도 계속 열어 두는 것을 이른다.

 

유미암(柳眉巖)

미암(眉巖)은 유희춘(柳希春)의 호이다. 그는 명종(明宗) 2(1547)에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는데, 종성에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는 유배에서 풀려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연관으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유민도(流民圖)

떠도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송 나라 희령(熙寧) 6년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현되자 진사(進士) 정협(鄭俠)이 수차 글월을 올려 그 피해를 지적했으나 답이 없었다. 그 후 정협은 고을을 맡아 나갔는데 때마침 가뭄이 심하여 많은 백성들이 수척할대로 수척한 몰골로 수심에 싸여 떠돌아다녔고, 자기 고을 백성들은 끼니 분별을 못하면서도 기와를 짊어지고 옷을 걷고 물을 건너와 관가의 빚 갚는 일에 땀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정협은 그것들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그 그림을 본 신종(神宗)은 크게 뉘우치고 드디어 자책(自責)의 조서를 내리고 청묘법(靑苗法)을 모두 폐지하였던바, 즉시 단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세상에서는 유민도(流民圖)라고 했다고 한다. 송사(宋史)卷三百二十一 / 인용: 母別子(김성일), 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정약용)

 

유박(帷箔)

유박불수(帷箔不修)의 준말로 남녀 관계가 문란한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

 

유반(洧盤)

전설 속에 나오는 물 이름으로, 엄자산(崦嵫山)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저녁에 궁석(窮石)으로 돌아가 머물고, 아침에 유반에서 머리를 감는다[夕歸次於窮石兮, 朝濯髮乎洧盤].”라 하였다.

 

유발속군전(遺鉢屬君傳)

불가(佛家) 승려의 밥그릇인 발우(鉢盂), 도를 전할 때 옷과 바리때[衣鉢]를 전하는 관습이 있었다.

 

유방(遺芳)

남겨 놓은 방초. 선인(先人)이 남긴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명예를 말한다.

 

유방(遊方)

사방에 여행하는 일. 불교(佛敎)의 용어로, 선종(禪宗)의 승려가 수행(修行)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유필유방(遊必有方)의 준말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부모가 생존해 계시거든 먼 데 나가 놀지 말며,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소재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고 하였다.

 

유방백세(流芳百世)

꽃다운 이름이 백세에 널리 알려짐. 명예로운 이름이 후세 길이 전한다. / 유의어: 遺臭萬年(유취만년).

 

유백륜(劉伯倫)

백륜은 유령(劉伶)의 자이다. 동진(東晉) 때 완적(阮籍), 혜강(嵇康)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그는 술을 아주 좋아하여 평소에는 1()씩을 마시고 5()로 해장을 하였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백타(劉白墮)

()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유벽거(油壁車)

옛날 부인(婦人)이 타던 수레로서, 벽에 기름칠을 하여 꾸민 수레를 말한다.

 

유병(幽幷)

연조(燕趙)의 땅인 유주(幽州병주(幷州) 지역의 풍속은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유협(游俠)을 장려하였다.

 

유병계(油餅計)

고려 인종(仁宗) 때 술승(術僧) 묘청(妙淸)은 음양도참설(陰陽圖讖說)로 민심(民心)을 현혹하여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떡을 크게 만들어서 그 속에 뜨거운 기름을 넣고 구멍을 뚫어 대동강(大同江) 속에 넣었다가 기름이 차츰 물 위에 떠올라 오색이 영롱하게 되자, 이는 용()이 침을 뱉는 것으로 서기(瑞氣)가 있다는 등 갖은 수단을 부려 태평한 고려를 혼란하게 한 것을 말한다. 고려사(高麗史)』 「묘청전(妙淸傳)

 

유보(乳保)

유소(幼少)한 아이를 말한다.

 

유부(楡柎)

옛날 황제(黃帝)시대의 명의(名醫).

 

유부(踰跗)

황제(黃帝) 때 전설적인 의원(醫員)을 말한다.

 

유부비(幼婦碑)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황견유부 외손해구(黃絹幼婦外孫虀臼)’에서 따온 말이다. 즉 조아비(曹娥碑) 가운데 이 여덟 글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절묘호사(絶妙好辭)’ 넉 자를 파자(破字)로 나타낸 것이라 한다.

 

유부비(幼婦碑)

유부의 비문. 기막히게 훌륭한 시문(詩文)을 뜻하는 말이다. 조아(曹娥)의 비()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조조(曹操)를 수행하던 양수(楊修)절묘호사(絶妙好辭)’라고 해석한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첩오(捷悟)

 

유부수(劉副守)

()의 명장 유기(劉錡)를 말한다. 그가 처음에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를 지냈었다. 송사(宋史)366

 

유분(黝賁)

북궁유(北宮黝)맹분(孟賁)으로 옛날에 힘과 용기가 대단했던 사람들이다.

 

유분(劉蕡)

() 나라 때 사람으로 본디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일찍이 그의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당시의 환관(宦官)들을 매우 신랄하게 배격했던 결과, 뒤에 환관의 무함에 의해 폄척되어 죽고 말았다. 당서(唐書)卷一百七十八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憂患)을 당하지 아니한다. 어떤 일에 미리 대비함이 있어야 근심이 없음을 이른다. 서경(書經)/ 유의어: 거안사위(居安思危). 망양보뢰(亡羊補牢). 십일지국(十日之菊).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유비수상례(孺悲受喪禮)

유비(孺悲)는 노 애공(魯哀公)의 신하 이름인데, 휼우(恤由)라는 사람의 초상 때에 애공이 유비를 시켜 공자(孔子)에게 가서 사상례(士喪禮)을 배워 오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잡기(雜記)

 

유빈(蕤賓)

5월을 가리킨다. 본디는 고악(古樂)12율 가운데 제7율인데, 일 년의 열두 달을 12율에 배치시켜 5월을 유빈이라 한다.

 

유빈객(劉賓客)

() 나라 때 시인으로 빈객을 지낸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

 

유빈철(㽔賓鐵)

유양잡조(酉陽雜俎)() 나라 장군 황보직(皇甫直)이 비파 타기를 좋아하여 항상 한 곡조를 만들어 서늘 바람을 타고 물가에 가서 탔는데 황종(黃鐘)에 근본을 두었는데도 소리는 유빈으로 들어갔다. 시험삼아 다른 곳에 가서 타자 황종이 나므로 밤에 다시 못 위에서 타니 가까운 언덕에 물결이 움직이고 무슨 물건이 물에 부딪치기를 마치 고기가 뛰듯 하다가 하현(下絃)에 미쳐서는 그 소리가 없어졌다. 황보직이 물이 바닥난 못에 가서 쇠 한 조각을 얻었는데 바로 유빈의 소리를 낸 물건이었다.”라 하였다.

 

유사(流沙)

모래가 흘러간다는 말이다. 상서(尙書)餘波入于流沙(여파입우유사)”라는 말이 보이는데, 서방의 땅에는 그 땅에 풀이 자라지 않아서 모래가 활활(滑滑)하게 주야를 그치지 않고 흐른다고 한다.

사막(沙漠)을 말한다. 우공(禹貢) 이후 역대 사지(史志)의 유사는 그 지점이 각기 다르나, 다 서역(西域)의 사막지대이다. 모래가 물처럼 유동(流動)하므로 유하(流河)라 했다.

중국 서방에 있는 사막 지대. 서경(書經) 우공(禹貢)약수(弱水)를 합여(合黎)에 이르게 하고 나머지는 유사(流沙)로 흘러들어가게 한다.”라 하였다. 지금의 내몽고 고비사막을 말한다.

 

유사(幽事)

산중의 여러 가지 그윽하고 조용한 일들을 말한다. 세상일과 무관한 자연 속의 조용한 일들을 이름.

 

유산(儒酸)

빈한한 선비를 지칭한다. 빈궁(貧窮)한 독서인(讀書人)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豪氣一洗儒生酸(호기일세유생산)”이라 하였다.

 

유삼(油衫)

천에 기름을 먹인 적삼으로 비옷을 말한다.

 

유삽(柳翣)

출빈(出殯)할 때 영구차 위의 관곽(棺槨)을 꾸미는 장식이다.

 

유삽수신매편가(有鍤隨身埋便可)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이 술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술병을 휴대하고 다녔는데, 언제나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바로 나를 묻으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상(流觴)흐르는 물을 뺑뺑 돌려 흐르게 만들어 놓고 그 물가에 둘러앉아서 술잔에 술을 부어 물에 띄우면, 각기 제 앞으로 오게 되어 그것을 마셨는데, 그것을 곡수유상(曲水流觴)이라고 이름지었다.

 

유상(有相)

()이나 심()의 모든 유()를 유상(有相)이라 한다. 금강경(金剛經)대개 유상(有相)은 모두 허망(虛妄)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이 아닌 것을 알면, 곧 여래(如來)를 보느니라.”라 하였다.

 

유상무상(有象無象)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 삼라만상(森羅萬象). 만상(萬象).

어중이떠중이라는 뜻이 있다.

 

유새(楡塞)

요새지. () 나라 장수 몽염(蒙恬)이 흉노의 지역 깊이 들어가 영토를 확장한 뒤 돌을 쌓아 성 모양을 갖추고 느릅나무를 심어 요새지를 삼자[樹楡爲塞] 흉노가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서(漢書)』 「한안국전(韓安國傳)

 

유새(楡塞)

() 나라 때 몽염(蒙恬)이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관()으로,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다. 변경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유림새(楡林塞).

 

유색(有色)

욕계(欲界)와 색계(色界)를 말한다.

 

유색청(柳色靑)

왕유(王維)위성곡(渭城曲)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셨는데, 객사에 푸릇푸릇 버들잎이 새로웠네.[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라고 하였다.

 

유생(婾生)

즐겁게 살다.

 

유생사천녀(柳生祠天女)

유생은 당() 나라 때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을 이른다. 유종원이 7칠석(七夕) 밤에 마을 사람들이 천녀(天女)에게 걸교제(乞巧祭)를 지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에게도 크게 졸렬한 것[大拙]이 있다 하여 걸교문(乞巧文)을 지어 제사한 데서 온 말이다. 유하동집(柳河東集)注 卷十八

 

유생절교(劉生絶交)

금방 사귀었다가 금방 절교하는 변덕. 북제(北齊)의 유적(劉逖)이 조정(祖珽)과 교의가 긴밀하고 조정의 딸을 자기 동생 아내로 맞기까지 하였는데, 뒤에 조정이 조언심(趙彦深)등을 몰아내려 할 때 유적과 동모한 일이 제대로 안 맞자 조정은 그를 오해하여 유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적이 자기 아우를 보내 이혼까지 하는데 이르렀다. 북제서(北齊書)卷四十五

 

유생주상(柳生肘上)

종기가 났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조금 있다가 그 왼팔뚝에 유()가 생겼다[俄而柳生其左肘].”고 하였는데, 주소(註疏)()는 류() 자와 음()이 같으므로, []으로 풀이한다라고 하였다.

 

유서(遺緖)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일을 말한다. / 유의어: 유업(遺業) / 인용: 與皇甫若水書(임춘)

 

유서무릉구(遺書茂陵求)

무릉은 한 무제(漢武帝)의 능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여기와 살고 있어, 무제가 말하되 상여가 병이 심하다 하니 가서 그가 저술한 글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니, 상여의 처인 탁문군이 상여가 남긴 봉선문(封禪文)을 바쳤다.

 

유서재(柳絮才)

유서는 버들개지인데 진()의 재상 사안(謝安)이 하루는 자녀들을 모아놓고 문장을 논하였다. 마침 눈이 내리므로 사안은 분분히 내리는 저 눈 무엇과 비슷한가?”라고 하고 물으니 조카 낭()공중에 소금 뿌리는 것과 비슷하네,[散鹽空中差可擬]”라고 하자, 질녀 도온(道蘊)버들개지 바람에 날린다는 표현만 못하오.[未若柳絮因風起]”라 하였다.

 

유서차색(有書借索)

옛날 이제옹(李濟翁)의 말에 책을 빌리는 것이 첫 번째 어리석음이요, 책을 안 빌려 주려는 것이 두 번째 어리석음이요, 빌려 준 책을 찾으려는 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이요, 빌린 책을 되돌려 주는 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예원자황(藝苑雌黃)

 

유서형용(柳絮形容)

사안(謝安)의 가족이 일찍이 한 자리에 모였을 적에 이윽고 눈이 갑자기 내리자, 사안이 자질(子姪)들을 향해 이것이 무엇 같으냐?”고 물으니, 사안의 종자(從子)인 사랑(謝朗)공중에서 소금을 뿌린다는 형용이 약간 근사하겠습니다.[散鹽空中差可擬]”라 하므로, 사도운(謝道韞)이 말하기를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린다는 형용만 못합니다.[未若柳絮因風起]”고 하니, 사안이 크게 기뻐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九十六

 

유선(儒仙)

신라(新羅) 말기의 유학자로서 만년에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은거했던 최치원(崔致遠)을 가리킨다. 청량산에는 최치원이 수도(修道)한 고운대(孤雲臺)와 독서대(讀書臺)가 있다.

 

유선(儒禪)

유교(儒敎)와 선교(禪敎)를 말한다.

 

유선가(儒仙歌)

최치원(崔致遠)이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중국 사람으로서 최치원과 동년인 고운(顧雲)유선가를 지어 송별한 것을 말한다. 석우는 정의가 금석과 같이 단단한 벗으로, 여기서는 고운을 가리킨다. 유선가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한 구절에 이르기를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 건너 와, 문장이 중화를 뒤흔들었네. 열여덟 살에 사원을 두루 누비며,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리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

 

유선군(留仙裙)

주름 잡힌 치마를 가리킨다.

 

유선진일몽(游仙眞一夢)

유선침(游仙枕)을 베고 자면 꿈속에서 신선들과 노닐 수가 있다고 한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유선침(游仙枕)

 

유설(柔舌)

노자(老子)가 상종(商樅)의 병을 위문하러 가서, 치아가 모두 없어진 것은 강하기 때문이요, 반면에 혀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설원(說苑)』 「경신(敬愼)

 

유성화(有聲畵)

()를 가리킨다.

 

유소(流蘇)

다섯 가지 채색의 새깃으로 수식하는 것인데, 수레·누대(樓臺)의 장막 등에 미관으로 장식한다. 후한서(後漢書)』 「여복지(輿服志)수오채석우류소(垂五采析羽流蘇)”라고 보인다.

 

유소(儒素)

유가(儒家)의 사상에 부합되는 고상한 품격과 덕행을 갖춘 것을 말한다.

 

유소사(有所思)

()의 군악(軍樂) 명칭이다. 18곡 중의 하나로, 마음이 변한 님을 다시는 생각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아야겠다는 슬픈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유소장(流蘇帳)

오색실로 수식(垂飾)을 만들어 그를 달아 장식한 장막이다.

 

유수고산적차회(流水高山積此懷)

옛날 백아(伯牙)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그 거문고 소리에서 흐르는 물의 기상이 드러나고, 높은 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높은 산의 기상이 드러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유수곡(流水曲)

유수고산(流水高山)으로 본래는 백아(伯牙종자기(鍾子期)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솜씨를 잘 알아주었는데 높은 산을 생각하고 타면 높은 산에 있는 것 같고, 흐르는 물을 생각하고 타면 흐르는 물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뒤에 지음(知音)을 만나기 어렵다는 뜻으로 쓰이며 또 오묘한 악곡을 말하기도 하므로 유수곡이라 하였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유수공장천(流水共長天)

흐르는 물은 길고 긴 하늘과 같이 한없이 흐른다는 뜻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제천정에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유수면소위(惟須勉素位)

중용(中庸)14군자는 지금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요,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는 말이 있다.

 

유수불부(流水不腐)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 항상 끊임없이 노력하면 진부(陳腐)하거나 쇠퇴하지 않음을 이른다.

 

유수억종기(流水憶鍾期)

춘추(春秋) 때 초() 나라 사람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며 뜻을 높은 산 혹 흐르는 물에 두니, 자기(子期)가 거문고를 듣고 백아의 뜻을 다 알았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세상에 다시 지음(知音)이 없음을 설워하여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 거문고를 치지 않았다 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효행람(孝行覽)

 

유수음(濡首飮)

술에 몹시 취하여 본성을 잃고 광태를 부린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미제괘(未濟卦)상구(上九)술을 마시고서 미더움이 있으면 허물이 없거니와, 머리를 적시면 미더움이 있다 해도 실수할 것이다.[有孚于飮酒 無咎 濡其首 有孚 失是]”라고 하였다.

 

유수행운(流水行雲)

종적이 일정하지 않음을 이른다. 행각승(行脚僧)의 이칭(異稱)으로도 쓰인다.

 

유순(由旬)

불가에서 말하는 거리의 단위.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유사나·유선나·유연이라고도 하며 30(), 40리 혹은 16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옛날 제왕(帝王)이 하룻동안 행군(行軍)하는 이정(里程)이다. 서역기(西域記)卷二

 

유시(柳市)

버드나무 그늘이 드리운 거리. 보통은 술집이 있는 거리를 말한다.

 

유시(侑尸)

제사할 때 시()에게 음식을 권하는 일이다.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음을 이른다. / 유의어: 유시유종(有始有終).

 

유시불망간(牖尸不忘諫)

() 나라의 대부 사추(史鰌)가 임금 영공(靈公)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사추가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전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죽거든 시체를 바라지문 밖에 두어라.”라 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듣고 뉘우쳤다고 한다.

 

유시여(猶時汝)

시여(時汝)는 사마표의 주에 처녀(處女)와 같다.”고 했고, 상수(尙秀)처녀와 같이 남에게 순종하기만 하고 앞장서서 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유시유종(有始有終)

시작도 있고 끝도 있다는 데서, 시작할 때부터 끝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 유의어: 유시무종(有始無終).

 

유식(游息)

정과(正課) 이외의 휴식 시간에도 항상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유신(有莘)

나라 이름.

 

유신(庾信)

남북조(南北朝) 때의 학자로서 자()는 자산(子山)이다. 처음에는 양()에 벼슬하여 태자서인(太子庶人)이 되었고 뒤에 북주(北周) 효민제(孝閔帝) 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지냈고 좌전(左傳)에 정통하였다. 그의 학문은 매우 해박하고 문장은 매우 아름다워 서능(徐陵)과 함께 서유체(徐庾體)라고 칭해진다. 그의 변려문(騈儷文)은 육조(六朝)의 집대성(集大成)이라 한다. 저서에는 유자산집(庾子山集)이 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주(北周) 사람. 서능(徐陵)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그들의 문체(文體)를 유서체(庾徐體)라고 한다. 저서에는 유개부집(庾開府集)이 있다.

 

유신경수(有莘耕叟)

들의 농사꾼이란 바로 유신국(有莘國)의 들에서 일찍이 농사를 지었던 이윤(伊尹)을 말하는데, 그는 () 임금에게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유신부(庾信賦)

애강남부(哀江南賦)를 말한다.

 

유신씨(有莘氏)

국명(國名). 맹자(孟子)』 「만장(萬章)伊尹耕於有莘之野라고 보인다.

 

유신완조(劉晨阮肇)

후한(後漢) 때 유신·완조가 천태산(天台山)으로 약을 캐러 갔다가 길을 잃고 13일 동안 복숭아를 따먹고 물을 마시는 사이에 무잎과 호마반(胡麻飯) 한 그릇이 물에 떠내려왔다. 그래서 멀지 않은 곳에 인가(人家)가 있음을 짐작하고 그 물을 건너 또 하나의 산을 넘어가니, 두 미녀가 나타나 두 사람을 친절히 맞이하여 반년 동안 동거하였다고 한다. 소오부지(紹奧府志)

 

유신유칙(有身有則)

시경(詩經)대아(大雅) 증민(蒸民)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내실 적에, 어떤 존재이든 간에 법도가 있게 하였도다. 그래서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라고 하였는데, 공자가 이 구절을 보고서는 이 시를 지은 이는 도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평한 말이 있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유신유환(有身有患)

도덕경(道德經)13우리에게 큰 환란이 있는 까닭은 우리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몸이 없어질 수만 있다면, 무슨 환란을 받을 까닭이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라는 말이 있다.

 

유심경(有心磬)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삼태기를 메고 지나가던 자가 공자가 경쇠 치는 소리를 듣고는 깊은 생각이 있구나, 경쇠를 치는 자여![有心哉 擊磬者]”하였다가, 다시 비루하구나, 띵띵거리는 소리여!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 아닌가!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잠뱅이 바람으로 건너고, 물이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널 일이다.”라 하였다.

 

유씨익(劉氏溺)

패공(沛公)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갓을 쓰고 찾아오는 선비가 있으면 다짜고짜 갓을 벗겨가지고 오줌을 누었다는 고사이다. 사기(史記)』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유아(儒兒)

아첨해서 웃는다는 뜻이다.

 

유아(唯阿)

()는 공손한 대답을 가리키고, ()는 공손치 못한 대답을 가리킨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상편(上篇) 20()학문을 끊어 버려야 근심이 없게 된다. ‘하는 대답과 하는 대답 사이에 도대체 차이가 얼마나 되겠는가.[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는 정중하게 대답하는 것, ()는 오만하게 대답하는 것. 근본인 도의 차원에서 보면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유아(兪兒)

임금이 거둥할 때에 어린아이가 궁문에서 외치는 소리. 대개 옛날의 준례가 임금의 수례가 궁문을 나서면 액례(掖隷)의 어린 아이들이 쌍향으로 앞에 서서 소매를 들어 유아(兪兒)를 외고 다음에 수레가 출발하였는데 이것은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 환공(齊桓公)이 오랑캐를 치러 갈 때 어린아이가 앞에 나타나자 관중(管仲)이 그것을 패()가 될 징조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오직 자기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데서, 불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서 나온 말이다.

 

유악(帷幄)

() 나라 장량(張良)이 고조(高祖)의 모사(謀士)로서 종용한 주획(籌畫)에 능하여, 장막[帷幄] 가운데서 계획을 결정하였다.

 

유악강재(維嶽降宰)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유악강신(維嶽降申)’이란 말이 있는데, 산악(山嶽)의 정기가 주선왕(周宣王)의 어진 신하인 신보(申甫)를 낳았다는 뜻이다.

 

유악생신(維嶽生申)

나라의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이라는 바람을 말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로 주() 나라의 신백(申伯)과 보후(甫侯)를 찬양한 이 시이다.

 

유악시연(瘤惡施姸)

유부는 목에 큰 혹이 난 제() 나라의 추녀(醜女)를 가리키는데, 그녀는 부덕(婦德)이 워낙 뛰어나서 제 민왕(齊閔王)이 그를 왕후로 맞이했다 한다. 서시(西施)는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총희(寵嬉)였던 월() 나라의 미인(美人)이다.

 

유악이무목(劉岳二武穆)

남송 명장 유기(劉錡)와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이들은 죽은 후 모두 무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유악조생현(維嶽早生賢)

()이라는 말은 큰 산이란 말이나, 중국에서 동서남북 중앙에 각기 큰 산 하나씩을 악이라 이름지어 국가적으로 숭배하였다. 그래서 그 악의 신령이 가끔 인간으로 태어나서 국가에 큰 공헌을 한다고 한다.

 

유안(劉晏)

() 나라 사람인데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다. 천보(天寶) 연간에 현량 방정(賢良方正)으로 뽑혔고 대종(代宗) 때에 탁지(度支)ㆍ염철(鹽鐵)ㆍ조용(租庸)ㆍ상평(常平)의 제사(諸使)가 되어 제도(諸道)의 조운(漕運)을 맡았는데, 백성들의 생활에 걱정이 없고 물가가 안정되었다 한다. 구당서(舊唐書)123 / 인용: 財用篇(신흠)

 

유안(幼安)

삼국(三國) 시대 위()의 고사(高士) 관영(管寧)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으로 가 살며 학문에만 열중하면서 위 문제(魏文帝)와 명제(明帝) 연간에 걸쳐 태중대부(太中大夫) 등 여러 차례 관직의 부름이 있었으나 전연 나가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卷十一

 

유안(遺安)

자손에게 편안한 것을 끼쳐 준다는 뜻이다. 관록(官祿)이란 몸을 망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에 반하여 초야에 은거하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준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逸民 龐公傳

 

유안(劉安)

회남왕 유장의 아들이다. 독서를 즐겨했고 거문고에 능했다. 문제 16년 기원전 166년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회남왕에 봉해졌다. 경제(景帝)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원래 그는 난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승상의 권유로 화를 면했다. 문제가 뛰어나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고, 유명한 회남자(淮南子)의 편찬자이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반란을 획책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자살했다.

 

유안계견(劉安鷄犬)

()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를 적에 정중(庭中)에 남겨 놓은 선약을 닭과 개가 먹고서 그들도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갔다 한다. 신선전(神仙傳)

 

유안난기전백서(有雁難期傳帛書)

백서(帛書)는 비단에 적은 글로, 옛날 기러기 발목에 백서를 전하여 소식을 알린 고사가 있다.

 

유안로요동(幼安老遼東)

유안은 위() 나라 관녕(管寧)의 자이다. () 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요동에서 살며 학생을 모아 가르치다가 3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안모(幼安帽)

검소함을 말한다. 유안(幼安)은 삼국(三國) 시대 위() 나라 관녕(管寧)의 자이다. 관녕이 소시에 화흠(華歆)과 한 자리에서 독서를 했는데 어느 날 고관의 행차가 그 앞을 지나갔다. 화흠이 곧 책을 덮고 구경을 나가자 그 행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글만 읽던 관녕은 자리를 잘라 서로 나눠 앉으며 절교를 하였고, 또 그의 성품이 검소하여 항상 검정 모자에 베 속옷을 착용하고 다녔다. 삼국지(三國志)』 「관녕전(管寧傳)

 

유안부(幼安浮)

유안은 삼국시대 위() 나라 관녕(管寧)의 자. 관녕은 젊어서부터 지조가 높기로 이름이 있었는데,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있었는데, 바다로 피난온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순월(旬月) 동안에 읍()을 이루었으므로, 그는 마침내 그들에게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예의(禮儀)를 강명하여 그곳의 민풍(民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삼국지(三國志)卷十一>

 

유안비조모(幼安悲皁帽)

유안(幼安)은 관영(管寧)의 자()니 피난하여 은거한 것이 슬프다는 뜻이다.

 

유안서(庾安西)

동진(東晉) 영천(潁川) 언릉(鄢陵) 사람으로, 동진의 원제(元帝명제(明帝성제(成帝) 세 조정에서 벼슬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안서장군(安西將軍) 유량(庾亮)이다. 진서(晉書)卷七十三 유량전(庾亮傳)

 

유안세(柳安世)

안세(安世)는 유시정(柳時定)의 자()이다.

 

유애(有涯)

끝 있는 것으로 인생살이를 말한다. 사람의 생()에는 가[]가 있다. 그러므로 생애(生涯)라 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유애(幼艾)

젊고 아름다운 사내아이를 이른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유의어: 미소년(未少年).

 

유애(遺愛)

지방에 어진 수령(守令)이 선정(善政)을 하면 그가 간 뒤에도 남은 사랑[遺愛]이 있는 일이다.

 

유야무야(有耶無耶)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희미한다.

 

유야좌(劉夜坐)

초한야좌(初寒夜坐)의 시를 맨 처음 지었던 유광(劉光)을 가리킨다.

 

유양(維楊)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의 속역(屬驛)이다.

 

유양낙고(酉陽諾皐)

기기괴괴한 얘기라는 뜻이다. ()의 단성식(段成式)이 저술한 유양잡조(酉陽雜俎)는 그 내용이 기괴망측하고 황당무계한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여러 편() 내에 낙고기(諾皐記)라는 편이 있다. 사고제요(四庫提要)子 小說家類

 

유어삼천추(留語三千秋)

요동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3천 년만에 학이 되어 돌아온 그 이야기이다.

 

유어예(游於藝)

공자의 말에 ()에 의지하고 예에 놀아라[依於仁 游於藝].”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유어전(遺魚筌)

고기를 잡고 나면 고기를 잡는 도구인 통발은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는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통발이란 것은 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유언(有言)

덕 있는 이가 남긴 훌륭한 언사를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명언(名言)을 남기게 마련이지만, 명언을 남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덕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유언비어(流言蜚語)

도무지 근거없이 널리 퍼진 소문. 근거 없이 흘러 다니는 좋지 못한 말. 유언(流言)흘러 다니는 말서경(書經), 비어(蜚語)날아다니는 말사기(史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유언비어는 곧 구설수(口舌數)를 낳는다.

 

유여(襦袽)

어려움이 닥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주역(周易)』 「기제(旣濟)육사(六四)물이 새는 곳에 옷과 헌옷을 장만해 두고 종일토록 경계한다.[繻有衣袽 終日戒]” 하였다. / 인용: 昆侖奴(신광하)

 

유연(幽燕)

유주(幽州)와 연국(燕國)이 위치한 하북성(何北省) 북부의 지역을 말한다. 유주(幽州)구주(九州)의 하나이고, 연주(燕州)는 중국의 지명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연() 나라, () 나라 이전의 유주(幽州), 중국의 요동(遼東) 및 하북(河北) 지방을 가리킨다.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과의 싸움이 많았던 곳이다.

 

유연(幽咽)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소리가 낮아지고 잠기다가 경미해지는 것이다[聲音低沉, 輕微].”라고 쓰여 있다. / 인용: 餓婦行(성간)

 

유염(擩染)

물이 들다는 뜻으로,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와 같게 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유영(柳營)

() 나라 때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군영(軍營)인 세류영(細柳營)의 준말로, 전하여 장군의 막부(幕府)를 이르는 말이다.

 

유영(遺榮)

부귀영화를 버린다는 뜻으로, 즉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유예(游藝)

육예(六藝) 속에서 놀거나 쉬는 것으로, 학예(學藝)를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유예수표극초염(遺裔誰飄克肖髥)

기자는 수염이 많았는데 그의 후손인 선우씨(鮮于氏)는 그를 닮아 수염이 많았다 한다.

 

유완(劉阮)

유령(劉伶)과 완적. 모두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든 사람들로서 다 노장(老莊)의 사상을 좋아하였고, 특히 호주가(好酒家)로 이름이 높았다.

 

유완도잠오(柳玩陶潛五)

()도잠(陶潛)의 저서. 오류 선생이란 그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자신을 자호(自號)한 것이다.

 

유왕(幽王)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라는 미인에게 탐닉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강융(羌戎)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점령하고 유왕은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나라는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겼다. /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平王)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유요(劉曜)

십육국(十六國) 시대의 흉노족 출신으로 한제(漢帝) 유연(劉淵)의 족자(族子)이다. 한제(漢帝) 유찬(劉粲)이 피살된 뒤에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후조(後趙)로 바꿨는데, 재위 9년 만에 석륵(石勒)에게 포로로 잡혀 이듬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유우(幽友)

고조 유방의 아들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 조왕(趙王)에 다시 봉해졌다. 혜제가 죽고 여태후(呂太后)의 전횡에 반대하다 살해되었다.

 

유우질(幽憂疾)

남모를 근심스런 병을 이른다.

 

유우풍(有虞風)

유우씨(有虞氏)는 순()이니, 오현금(五絃琴)을 타고 남풍곡(南風曲)를 불렀다.

 

유운(柳惲)

() 나라 때의 시인. 자는 문창(文暢). ·척독(尺牘바둑·거문고 등에 모두 능하였다.

 

유원둔(踰垣遯)

전국시대(戰國時代) 위 문후(魏文侯) 때의 현인(賢人) 단간목(段干木)이 위 문후가 그를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그는 문후를 만나지 않으려고 담장을 넘어 피해 버렸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유원주(踰垣走)

맹자의 말인데 숨어 사는 선비가 임금의 부름에 가기 싫어서 담을 뛰어 넘은 단간목(段干木)을 너무 지나치다 말하고 핍박하면 보는 것이 가하다[古者不爲臣不見. 段干木踰垣而辟之, 泄柳閉門而不內, 是皆已甚. , 斯可以見矣].”라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유원휘(劉元煇)

() 나라 때 사람으로 유광(劉光)을 말한다. 원휘는 자이다. 방회(方回)동강속집(桐江續集)에 의하면, 유광이 맨 처음 초한야좌(初寒夜坐)의 시를 지어 방회에게 보이자, 방회가 여기에 차운을 하였었다. 동강속집(桐江續集)卷二

 

유월궁(遊月宮)

당나라 도사(道士) 나공원(羅公遠)이 지팡이를 던져서 은교(銀橋)로 변화하여 명황(明皇)과 함께 월궁에 놀았다.

송 나라 휘종(徽宗)이 술객(術客) 임령소(林靈素)에게 혹하여 월궁(月宮)에 올라갔다가 왔다 한다.

 

유월석(劉越石)

월석(越石)은 진() 나라 때 유곤(劉琨)의 자이다. 환온(桓溫)이 젊었을 적에 유곤의 노기(老妓)가 환온을 보고 울면서 너무도 유사공(劉司空)을 닮았다.”고 하자, 환온은 대단히 기뻐하며 따라서 자세히 물으므로 노기는 다시 말하기를 얼굴은 똑같은데 엷은 것이 한이고, 눈도 똑같은데 작은 것이 한이고, 수염도 똑같은데 짧은 것이 한이고, 목소리도 똑같은데 약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유유(劉裕)

남조(南朝) 송 태조(宋太祖).

 

유유(愈愈)

걱정하는 모양, 더욱 심해짐.

 

유유(悠悠)

걱정하는 모양, 썩 먼 모양, 매우 한가한 모양, 느릿느릿한 모양, 널리 퍼지는 모양, 많은 모양, 생각하는 모양. 길고 긴. 그지없다.

 

유유(儒儒)

과단성 없이 주저하는 모양.

 

유유(幽幽)

그윽한 모양, 어둑어둑한 모양, 고요한 모양.

 

유유(怮怮)

근심하는 모양.

 

유유(油油)

물이 서서히 흐르는 모양, 태도가 부드럽고 삼가는 모양, 침착한 모양, 수수나물 등이 윤이 나고 힘있는 모양,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

 

유유(浟浟)

물이 철철 흐르는 모양.

 

유유(滺滺)

물이 흐르는 모양.

 

유유(呦呦)

사슴이 우는 소리.

 

유유(攸攸)

썩 먼 모양, 아득한 모양, 생각이 깊은 모양.

 

유유(愉愉)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기뻐하는 모양.

 

유유(惟惟)

예예.(대답하는 소리)

 

유유(冘冘)

천천히 걷는 모양.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왕래(往來)하며 상종(相從)한다. 같은 패끼리는 서로 따르고 쫓으며 왕래하여 사귐.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유유자적(悠悠自適)

한가로이 스스로 노닐며 즐김. 속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서 마음내키는 대로 마음껏 즐김. 세상사(世上事)의 구속을 벗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사는 것을 말한다.

 

유유주(柳柳州)

() 나라의 문호(文豪) 유종원(柳宗元)을 말한다.

 

유율축천호(有栗祝千戶)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의 천 그루 밤나무는 수입이 천호후(千戶侯)와 비등하다.”라고 하였다.

 

유응(劉應)

삼국 시대 위()의 유정(劉楨)과 응탕(應瑒)을 말한다. 문재(文才)가 대단하여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 중의 두 사람이다. 삼국지(三國志)卷二十一

 

유의(柳衣)

상을 치를 때 관 위에 덮는 보자기로, 상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유의신(留衣信)

헤어지면서 정표를 남긴다는 뜻이다. 한유(韓愈)가 조주(潮州)에 있을 적에 중 태전(太顚)과 친하게 지냈는데, 원주(袁州)로 떠나오면서 옷을 벗어 남겨 두어 이별의 정을 표하였다.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3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

 

유이(鰡鮧)

()와 이()는 모두 생선의 이름이다.

 

유이(逾弛)

점점 흐릿해지다. 나이 들어 점점 늙어지니 정신이 흐릿하다.

 

유이견(柳而見)

이견(而見)은 유성룡(柳成龍)의 자()이다.

 

유인(幽人)

깊이 숨어서 조용히 사는 사람을 말한다.

 

유인(游刃)

칼날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백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으니 문혜군이 잘한다고 감탄하였다. 이에 백정이 말하기를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곳에 밀어 넣으면, 공간이 널찍하여 칼날을 놀려도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습니다[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고 하였다.

②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에서 일을 함에 조용히 자여한 것을 비유한다[比喻做事從容自如].”라고 하여,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송신원외북상서(送辛員外北上序)글 짓는 곳에서 재주를 드날렸으며 공문서 작성하는 곳에서 의연하였다[揚鑣翰墨之塲, 游刃簿書之藪].”라고 썼다.

 

유인충종(纍印充宗)

충종(充宗)은 한 원제(漢元帝) 때의 환관 석현(石顯)의 당우(黨友)였던 오록충종(五鹿充宗)을 가리킨다. 오록충종은 석현이 한창 발호할 적에 그와 당우를 맺고 왕의 은총을 대단히 입어 겸관(兼官)을 많이 하였으므로, 당시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인은 어이 그리 겹겹으로 차며 인끈은 어이 그리 긴가.(印何纍纍 綬若若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九十三

 

유인파여지(游刃破餘地)

능수능란한 솜씨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곳에 밀어 넣으면, 공간이 널찍하여 칼날을 놀려도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습니다.[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는 백정의 말이 실려 있다.

 

유인협정길(幽人叶貞吉)

주역(周易)』 「이괘(履卦)평탄한 길을 밟는다. 그윽한 사람이라야 바르고 길하리라.”에서 나온 것으로, 은사의 생활이 바르고 아름다움을 말한다.

 

유일덕어치우(流一德於置郵)

치우는 문서와 소식을 전달하는 역참(驛站)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덕의 유행은 역의 파발마로 명령을 전달하는 것보다 빠르다[德之流行, 速於置郵而傳命].”고 하였다.

 

유일무이(唯一無二)

오직 하나 뿐으로 둘도 없다는 뜻으로 개성을 지닌 개체성이나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표현한 말이다. / 인용: 노래하는 사막 바르한,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준 선택권호칭 정하기,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가 되라

 

유잉(有仍)

나라 이름. () 나라 임금 상()이 유잉씨에게로 장가들어 소강(少康)을 낳았다.

 

유자(惟玆)

는 어기사이며, ‘이러한이란 뜻이다.

 

유자(兪子)

자가 극기(克己)인 유호인(兪好仁)을 가리킨다.

 

유자(孺子)

후한 때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의 자()이다. 그는 특히 남주(南州)의 고사로 일컬어졌고, 태수(太守) 진번(陳蕃)이 다른 손님은 일체 만나지 않고, 서치가 올 때에만 특별히 의자를 마련했다가 그가 떠나면 다시 치워 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서치전(徐穉傳)

 

유자가교(孺子可敎)

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는 것으로, 열심히 공부하려는 아이를 칭찬하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유자기유고무담(柳子記留鈷鉧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을 이른다. 그가 고무담기(鈷鉧潭記)를 지었으므로 한 말이다.

 

유자산(庾子山)

자산(子山)은 북주(北周)의 시인 유신(庾信)의 자(), 시풍(詩風)이 염려(艶麗)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세상에서 유개부(庾開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자선(兪子先)

자선(子先)은 유백증(兪伯曾)의 자()이다. 인조 3년 홍문관 부응교로 있으면서, 대사헌 남이공이 김류(金瑬)의 세도를 믿고서 불법을 자행한다고 탄핵했다가 이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유자음(遊子吟)

당 나라 맹교(孟郊)의 시인데, 그 시에 어머니가 손수 바느질한 것은 나그네가 입을 옷이로다. 떠남에 당하여 촘촘히 깁는 것은 더디 돌아올까 염려한 때문인데 촌초의 마음을 가져다가 삼춘의 봄볕에 보답하기 어려워라[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유자중석진(儒者重席珍)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儒者)의 고상한 도덕을 형용하여 유자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가지고 초빙을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유자탑(孺子榻)

환대를 극진히 하였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태수(太守) 진번(陳蕃)이 다른 사람의 면회는 일체 거절하고, 서치(徐穉)가 올 때에만 상탑(床榻)을 내려놓고 환담하다가 그가 가면 다시 올려놓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자(孺子)는 서치의 자()이다. 후한서(後漢書)83

 

유자후(柳子厚)

자후는 당() 나라 문인 유종원(柳宗元)의 자이다. 유주 자사(柳州刺史)를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유유주(柳柳州)라 부른다.

 

유작유소(維鵲有巢)

비둘기는 본디 집을 지을 줄 몰라서 까치의 둥지를 차지하고 산다하여, 시경(詩經)소남(召南) 작소(鵲巢)까치에게 둥지가 있는데 비둘기가 차지하고 살도다[維鵲有巢 維鳩居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장(劉璋)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송(張松)의 말을 믿고 조조(曹操)를 멀리하고 유비(劉備)를 익주로 맞아들였다가 뒤에 유비의 모사들 책략에 의해 유비와 싸움 끝에 패하여 결국 문을 열고 항복하고 말았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유장(劉長)

고조의 여덟 아들 중 7남으로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에 봉해졌다. 효문제 때 교만한 나머지 입조할 때는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지에 있을 때는 한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정해 다스렸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및 민월의 수령들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고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촉군(蜀郡)으로 유배 되었다. 유배를 가던 중 절식하여 굶어 죽었다. 시호는 려()이다.

유방의 막내아들이다. 고조 11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문제(文帝) 때 권세를 믿고 발호하여 입조할 때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국을 다스리는데 조정의 법을 따르지 않고 따로 법을 제정했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민월(閩越) 등의 이민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도모했으나 사전에 일이 발각되어 제후왕에서 쫓겨나 촉군으로 유배되는 형을 받았다. 촉군으로 가던 중 음식을 끊어 죽었다. 그의 아들 유안(劉安)이 후에 작위를 이어받아 회남왕(淮南王)이 되었다. 회남자(淮南子)는 유안의 저서이다.

 

유장(儒將)

유자(儒者)로서 장수가 된 사람. 학식이 고매하고 풍도가 유아(儒雅)한 장수를 말한다.

 

유적(褕翟)

꿩을 그린 왕후의 제복(祭服)을 말한다.

꿩의 깃으로 장식한 오채(五彩)가 찬란한 왕후(王后)의 옷을 이른 말로, 전하여 왕후를 말한다.

 

유절(有截)

상토께서 열렬하시자 해외의 사방 제후들이 일제히 귀의하였다.(相土烈烈 海外有截)”에서 나온 말로 구주(九州), 천하(天下), 해외(海外) 등을 뜻하게 되었다. 시경(詩經)상송(商頌) 장발(長發)

 

유주(幽州)

고을 이름. ()의 무제(武帝)때 설치한 십삼주(十三州) 중의 하나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부와 열하(熱河요녕성(遼寧省안동성(安東省)등지의 남부 그리고 조선(朝鮮)북부 일원에 걸친 주였다.

 

유주(柳州)

()유종원(柳宗元). 종원이 폄출되어 유주 자사(柳州刺史)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유 유주(柳柳州)라고 불렀다. 당서(唐書)』 「유종원전(柳宗元傳)

 

유주유자(柳州柳子)

유종원(柳宗元)한유(韓愈)와 동시대의 문인(文人)으로 이름이 한유와 같았으므로 한유(韓柳)라고 칭하였으며 그는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냈다.

 

유주이해(維州利害)

국가나 지역의 허구한 변천을 말한다. 한대(漢代)에 문산군(汶山郡) 위주(威州)였던 곳이 그 후 진((()을 거치는 동안 토번(吐蕃)에게 먹히기도 하고 또 금방 수복되기도 하면서 고을 이름도 유주(維州기미주(羈縻州정주(正州유천(維川)이 되었다가 다시 유주·위주로 되었다. 속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四川 成都府 威州

 

유죽능의(惟竹能醫)

[]가 사람의 속된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소식(蘇軾)녹균헌(綠筠軒)시에 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으나 대가 없이는 지낼 수 없네. 고기를 못 먹으면 사람이 파리해지고, 대가 없으면 사람이 속되어지는데, 파리해진 건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의 속됨은 치유할 수 없다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준대노인부지(有隼帶砮人不知)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有隼集于陳庭而死 楛矢貫之 石砮 矢長尺有咫 仲尼曰隼來遠矣 此肅愼之矢也라 하였다.

 

유준지위계(劉峻脂韋戒)

유준(劉峻)은 양()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지은 광절교론(廣絶交論)지위와 같이 편벽하여 남의 성심을 끌어낸다[脂韋便辟導其誠].”고 하였는데, 지위는 곧 기름과 가죽으로서 모두 매우 유연한 물질이고, 편벽은 곧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을 뜻함이니, 즉 처세하는 데 있어 유연한 태도로써 권세 있는 사람들로부터 성심을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유중(留中)

신민(臣民)이 올린 소장(疏章)에 계자(啓字)를 찍지 않고 정원에 내리면 정원에서 본인에게 통보하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원래의 뜻인데, 통상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유중(楡中)

지금의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 治州) 준격이기(準格爾旗) 부근에 있던 요새로 유림새(楡林塞) 혹은 유계구새(楡溪舊塞)로 불리었다.

 

유중(劉仲)

한고조 유방의 형이다. 한나라가 서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합양후(郃陽侯)에 봉해졌다.

 

유중영(柳中郢)

당 나라 사람. 그는 검소하여 평생에 의복에 향()을 풍기지 아니하였다.

 

유즙의(柳汁衣)

버드나무의 즙으로 옷을 물들인다는 뜻으로, 과거의 급제를 예시한 말이다. () 나라 때 이고언(李固言)이 오래된 버드나무 밑을 지나자,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누군가 말하기를 나는 버드나무 귀신 구렬군(九烈君)인데, 버드나무 즙으로 그대의 옷을 물들여 놓았으니, 과거 급제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가 장원급제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유지(柳枝)

백거이(白居易)의 기첩(妓妾) 이름이다.

당 나라 한유(韓愈)의 애기(愛妓) 이름이다.

 

유지가(柳枝歌)

백거이(白居易)가 노경에 풍만한 소만을 두고 양류지사(楊柳枝詞)를 지었다.

 

유지경성(有志竟成)

굳건한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낸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나라 때 부풍(扶風) 무릉(武陵) 사람 경엄(耿弇)은 유수(劉秀)의 휘하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유수가 동한(東漢)을 세우고 광무제(光武帝)로 즉위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유수(劉秀)는 경엄에게 장보를 칠 것을 명했다. 장보는 역하(歷下)와 축아(祝阿)에 병력을 배치하고 대항했다. 경엄은 황하를 건너 먼저 역하를 공략한 후, 축아까지 공략하고 임치(臨淄)로 진격했다. 하지만 경엄은 장보의 주력 부대를 만나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자신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그때 마침 유수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경엄은 황제께서 납시는데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융숭하게 환영해야지, 어찌 이런 적들을 황제께 남겨 둘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며 군사들을 독려하여 장보를 공격해 결국 임치를 함락시켰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광무제가 임치에 도착하여 군사들을 위로하는데, 군신이 다 모였다. 광무제가 경엄에게 말했다. “옛날 한신(韓信)이 역하를 공략해 나라의 터전을 열었는데, 오늘 장군은 축아를 공략해 나라를 흥기하게 했구려. 이곳들은 모두 제나라의 서쪽 경계로, 그 공은 서로 필적한다고 볼 수 있소. 하지만 한신은 이미 항복한 나라를 습격했고, 장군은 강적을 멸했으니 한신보다 더 어려운 공을 세운 것이오. ······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이 큰 계책을 건의했었는데, 실현되기 어렵다고 항상 생각했었소. 그런데 뜻을 가진 사람이 결국 일을 성공시키는구려.[後數日, 車駕至臨淄自勞軍, 群臣大會. 帝謂弇曰, 昔韓信破歷下以開基, 今將軍攻祝阿以發迹, 此皆齊之西界, 功足相方. 而韓信襲擊已降, 將軍獨拔勁敵, 其功乃難於信也. ······ 將軍前在南陽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 후한서(後漢書)』 「경엄전(耿弇傳)

 

유지반절(柳枝攀折)

이별한다는 뜻이다. 옛날의 악곡(樂曲) 가운데 이별의 아쉬운 정을 노래한 절양류곡(折楊柳曲)이 있다.

 

유지사성(有志事成)

목표를 두고 꾸준히 노력하면 마침내 뜻대로 이루어 냄. 뜻이 있으면 일이 이루어짐을 이른다.

 

유지수방내탐선(柳枝雖放柰耽禪)

유지는 백거이(白居易)가 데리고 다니던 기생으로, 그의 시 한거(閒居)금 굴레 검은 말도 근자에 팔고, 비단 옷소매 유지도 이윽고 돌려보냈네.”라 하였다. 백거이는 만년에 형부상서로 치사(致仕)하고 향산(香山)에 은거하여, 자호(自號)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면서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여 불법(佛法)에 탐닉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백거이전(白居易傳)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

뜻이 있는 자는 결국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유직(遺直)

옛사람의 풍도가 있는 곧은 사람을 말한다.

 

유진(遊秦)

당나라 시인(詩人)들이 유진(遊秦), 입진(入秦)이란 말을 간간이 쓰는데, 그것은 당나라 수도(首都)가 옛날의 진()인 장안(長安)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수도는 북경이나, 당나라 시인의 문구를 그대로 써서 중국에 가는 것을 유진(遊秦)이라 하였다.

 

유진(庾塵)

() 나라 때 왕도(王導)가 유량(庾亮)의 권세(權勢)를 미워하여, 서풍(西風)이 일어나서 먼지가 일면 스스로 부채를 들고 그 먼지를 가리면서 말하기를 유량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六十五 왕도전(王導傳)

 

유진흥(遊秦興)

전국시대(戰國時代) 변사(辯士) 소진(蘇秦)은 진 나라에 들어가 진왕(秦王)에게 글을 10차례나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검은 갖옷이 다 해진 채 크게 곤궁하여 돌아왔다.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

 

유체(留滯)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않는 한가한 처지를 말한다. ()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부친인 태사공(太史公) ()이 주남(周南) 땅에 유체(留滯)되어 조정의 정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분기(憤氣)가 치솟아 죽은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유체(由遞)

벼슬아치가 말미를 받아 집에 왔다가 환임(還任)하지 않음으로써 체직(遞職)되는 일을 이른다.

 

유체주남(留滯周南)

주남은 낙양(洛陽)을 이른 말인데,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주남에 유체해 왔다가 한 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로, 서울을 떠나 지방에 유체해 있음을 말한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태사공이 주남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바람에 국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太史公留滯周南 不得與從事]”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촉(諭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촉()땅 사람으로 중앙에 벼슬하였는데, 촉 지방이 반역하려 한다는 풍문이 있으므로, 황제의 명을 받아서 망동하지 말라는 뜻의 유초부로(渝蜀父老)라는 것을 지어서 미연에 방지하게 하였다.

 

유총(劉聰)

흉노의 종족으로 진()을 망쳤다.

 

유총(劉寵)

후한 때의 순리(循吏)이다.

 

유추향천금(有箒享千金)

내 집에 헌 비가 있으면 그것을 천금(千金)의 가치로 안다.[家有敝帚]”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유춘곡(遊春曲)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유충배사어(遺忠配史魚)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간하는 말을 남겼다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어(史魚), 현신(賢臣)거백옥(蘧伯玉) 대신 불초(不肖)한 미자하(彌子瑕)를 임금이 중용한 잘못에 대해, 시간(屍諫)하여 바로잡은 고사가 전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

 

유취만년(遺臭萬年)

더러운 이름을 만 년까지 남김.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 더러운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됨을 말한다.

 

유취부(遺臭夫)

악명을 남겼다는 것은 곧 진() 나라 환온(桓溫)이 위권(威權)이 극에 달하자, 반역 할 생각을 품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백세에 좋은 명성을 전하지 못할 바엔 또한 악명이라도 만 년에 남겨야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그는 끝내 은밀히 찬탈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환현(桓玄)은 또한 막대한 권력으로 안제(安帝)에게 선위(禪位)를 받고 제호(帝號)를 참칭(僭稱)했다가 유유(劉裕)에게 패하여 죽었다. 진서(晉書)』 「환온전(桓溫傳)

 

유취유방(流臭流芳)

() 나라 권신(權臣) 환온(桓溫)이 탄식하기를 대장부 꽃다운 이름을 백세(百世)에 전하지 못하면 또한 마땅히 더러운 냄새를 만년(萬年)까지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유취화(楡取火)

계절에 따라 다른 나무에서 불을 취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봄에는 유유(柳楡)의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조행(棗杏)의 불을 취하고, 계하(季夏)에는 상자(桑柘)의 불을 취하고, 가을에는 작유(柞槱)의 불을 취하고, 겨울에는 괴단(槐檀)의 불을 취한다 하였다. 주례(周禮)夏官 司爟

 

유칙(遺則)

남겨준 법도를 말한다.

 

유탕(流蕩)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유태(有邰)

시조(始祖)의 외가(外家)를 비유한 말. () 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모친 강원(姜嫄)이 유태에서 왔으므로 이른 말이다. 뒤에 후직을 그 나라에 봉하였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유택(劉澤)

한고조 유방의 사촌 형제이다. 유방 밑에서 낭중의 벼슬을 살다가 여태후(呂太后)에 의해 영릉후에 봉해졌다.

 

유팽조(劉彭祖)

가부인 사이에 난 경제의 아들이다. 경제 2년에 광천왕(廣川王)에 봉해지고 후에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되자 조왕으로 개봉되었다. 법률을 좋아했고 궤변에 능했으며 항상 조정의 승상을 모함하려고 시도했다. 정화 원년 기원전 92년에 죽었다.

 

유편(兪扁)

황제(黃帝) 때의 의원인 유부(兪蚹)와 주() 나라 때의 의원인 편작(扁鵲)을 합칭한 말로, 뛰어난 명의(名醫)를 말한다. 사기(史記)卷一百五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인용: 財賦論(정범조)

 

유피옹종장생목(瘤皮臃腫腫莊生木)

원래는 나무에 혹이 생기고 울퉁불퉁하여 소용되지 않는 나무라고 장자(壯子)가 말한 것이 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유필유방(遊必有方)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그 슬하에서 모셔야 하며 비록 유학(遊學)을 할지라도 부모가 알 수 있도록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유하(流霞)

한 잔만 마셔도 몇 달 동안 배고픔을 모른다는 신선의 술 이름이다. 논형(論衡)7 도허(道虛)

날아 움직이는 붉은 구름빛으로, 하늘의 정기를 말한다.

 

유하(游夏)

공자의 제자 가운데 특히 문학(文學)이 뛰어났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를 합칭한 말인데, 자유는 공자보다 45세 아래였고, 자하는 공자보다 44세 아래였다.

 

유하배(流霞杯)

유하(流霞)는 신선(神仙)의 술 이름이다. 유하배는 유하주(流霞酒)를 부은 술잔이다. 항만도(項曼都)라는 사람이 산중에 들어가서 신선을 배우고 있더니 10년 만에야 돌아왔다. 집안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선인(仙人)이 있어서 다만 유하주 한 잔을 나에게 주는 것을 마셨더니 문득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았다.” 하였다.

 

유하정(流霞亭)

광희문(光熙門)에서 10리 거리인 두모포(豆毛浦) 가에 있다.

 

유하주(流霞酒)

신선이 마시는 술. 곧 좋은 술을 말한다.

 

유하혜(柳下惠)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어진 대부로, 이름은 획()인데, 유하(柳下)에 살았으므로 유하혜라고 불렀다.

 

유한굉(劉漢宏)

?~886. () 나라 말기 무장(武將)으로 산동(山東) 연주(兖州)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6년에 도통(都統) 왕탁(王鐸)에게 투항하여 숙주자사(宿州刺史)가 되고 황소(黃巢)의 난에 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가 되었다. 그러다 항주자사(杭州刺史) 동창(董昌)을 공격하였다가 전류(錢鏐)에게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참수되었다. 오대사(五代史)』 「오월세가(吳越世家)/ 인용: 表忠觀碑(소식)

 

유항(有恒)

늘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가인괘(家人卦) 상사(象辭)군자는 이 괘를 보고서 신실하게 말하고 상도(常度)에 맞게 행동한다[君子 以 言有物而行有恒]”고 하였다.

 

유항건곤경일낙(劉項乾坤傾一諾)

유씨(劉氏)는 한()의 유방(劉邦), 항씨(項氏)는 초()항우(項羽)를 가리킨다. 한신(韓信)이 연전연승한 공으로 제왕(齊王)에 봉해지니, 항우는 점점 두려워하여 변사(辯士) 무섭(武涉)을 보내어 현재 두 임금의 일이 족하(足下)에게 달렸으니 족하가 한 나라를 돌보면 한이 이기고 초 나라를 돌보면 초가 이긴다.”고 하였으니 한신의 말 한마디에 초·한의 승부가 달렸음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 「한신전(韓信傳)

 

유행(儒行)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유향(劉向)

전한(前漢) 때의 경학자(經學者). 특히 좌씨전(左氏傳)을 매우 숭상하여 강론과 저술을 많이 하였다. ()나라 국족으로서 경술(經術)연구에 몰두하여 잠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우기가 일쑤였고 뒤에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열녀전(列女傳)·설원(說苑)등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다. 성제(成帝)때 외척 왕씨가 정권을 독단하고 큰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재변이 일어난 이유가 외척의 세력이 강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을 지어 천자에게 올림으로써 왕씨의 권력을 빼앗도록 유도하였는가 하면, 왕릉의 규모를 너무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잘못을 간하는 등 여러 번 충언을 올렸으나 천자가 나약하여 한 번도 그의 말을 시행하지 못했다. 한서(漢書)卷三十六 유향전(劉向傳)

 

유향(遺響)

여운(餘韻)과 같은 뜻이다.

 

유향연군(劉向戀君)

() 나라 원제(元帝) 때 학자인 유향(劉向)이 외척(外戚)을 견제하려 하다가 하옥되고 재이(災異)로 인하여 시정(時政)을 비판하다가 오랫동안 벼슬길에서 물러났던 것을 말한다.

 

유헌(輶軒)

천자(天子)의 사자(使者)가 타는 수레. 응소(應邵) 풍속통 서(風俗通 序)(()에서는 언제고 8월이면 유헌(輶軒)의 사자를 보내어 이대(異代)의 방언(方言)을 구()했다.”라 하였다.

 

유현(幽玄)

사물(事物)의 이치(理致)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을 이른다.

 

유혈생풍연복효(楡穴生風緣腹枵)

() 나라 때 양성(陽城)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느릅나무를 가루로 만들어 죽을 쑤어 먹으면서 강학(講學)을 그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서(唐書)一百九十四

 

유혈성천(流血成川)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룬다.

 

유협우(楡莢雨)

느릅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내리는 비로, 음력 3월경에 내리는 봄비의 대명사이다.

 

유호(牖戶)

사전에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빈풍(豳風) 치효(鴟鴞)장맛비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 가져다가, 창과 문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았나니, 너희 낮은 곳의 백성들이 감히 나를 깔보리요.[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爽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하였다.

 

유호(乳虎)

새끼 가진 범. 이때 성질이 가장 사납다. 한서(漢書)차라리 유호를 만날지언정 영성(寧成)의 노여움은 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유호(有扈)

유역. 나라이름.

유호씨의 여인. 유역(有易).

 

유화(流火)

가을이 되었다는 뜻이다. 음력으로 7월이 되면 화성(火星)이 흐른다고 한다. 시경(詩經)빈풍(豳風) 칠월(七月)란 구절이 있는데, 하늘에 있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칠월이 되면 아래로 흐르므로 칠월을 유화(流火)라 한다.

 

유화(楡火)

느릅나무에서 취한 불을 말하는데, 옛날에 봄철에는 느릅나무·버드나무의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살구나무의 불을 취하는 등 계절마다 나무를 바꾸어 불을 취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례(周禮)夏官 司爟

 

유화부평(柳花浮萍)

세상일에 얽매어 부자연스럽게 세속의 흐름을 따라가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柳花著水萬浮萍 荔實周天兩歲星이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7 재차운회중석여지(再次韻會仲錫荔枝)

 

유화촌점(柳花村店)

이백(李白)금릉주사유별(金陵酒肆留別)바람이 버들꽃을 날려 주막 가득 향기로운데, 오 나라 미희(美姬)는 술을 걸러 손님을 부르는구나.”라 하였다.

 

유황(流黃)

연회를 즐기며 미녀와 노니는 것을 말한다.

황견(黃繭)의 실로 짠 비단을 말한다.

 

유황부제(劉簧不第)

() 나라 유분이 현량대책(賢良對策)에 응시했을 때 그의 문리(文理)는 매우 준발(俊拔)하였으나 환자(宦者)들의 비방으로 인해 시험관이 환자를 두려워하여 그를 낙방시킨 고사가 있다. 당서(唐書)』 「유분전(劉蕡傳)

 

유효(游梟)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혀가 길고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유후(劉煦)

오대(五代) 후진(後晉)의 사람인데 당서(唐書)를 편찬하면서 당 태종(唐太宗)의 정치가 주() 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에 합한다고 칭찬하였다.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은 한() 나라에서 5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가문의 출신으로, () 나라가 조국을 멸하자, 창해 역사(蒼海力士)로 하여금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저격(狙擊)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케 하였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공신을 열후로 봉할 적에, 장량을 유후로 봉하였다.”고 하였다.

 

유후개벽곡(留侯豈辟穀)

유후(留侯)는 한() 나라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이 어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신선술(神仙術)이나 닦으려 했었겠느냐는 뜻이다. 벽곡(辟穀)은 신선술의 하나로서 곡식 대신 솔잎이나 대추·밤 등을 조금씩 먹고 사는 것이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를 보면, 장량이 벽곡하는 법을 배우며 도인(導引)과 경신술(輕身術)을 행하다가, 고조(高祖)가 죽은 뒤 여후(呂侯)의 간청에 못이겨 다시 곡식을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유후나용한승상(留侯那用漢丞相)

유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승상(丞相) 장량(張良)의 봉호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한() 나라의 대신(大臣)이었는데, () 나라에 의해 한 나라가 망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역사(力士)를 시켜 철퇴(鐵椎)진시황(秦始皇)을 저격했으나 실패했다가, 뒤에 한 고조를 도와 끝내 진 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업(漢業)을 일으킨 다음에는 은퇴하고 말았다. 즉 장량은 부귀영화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적이 다른 데에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卷四十

 

유후노경치(留侯老更癡)

() 나라 장량(張良)이 유후(留侯)로 봉하여졌다. 장량이 만년에 신선을 배운다고 벽곡(辟穀)을 하였다.

 

유후촌(劉後村)

후촌(後村)은 송() 나라 유극장(劉克莊)의 호이다. 그는 특이한 재질이 있어 문장을 잘했으며, 학문은 고금(古今)을 통하고 소아체(騷雅體)의 시사(詩詞)를 하였다. 저서로는 후촌거사집(後村居士集) (((()4()이 있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四十七

 

유흠(劉歆)

() 나라의 대학자 유향(劉向)의 아들로, 부친의 업을 계승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고문(古文)을 혹독히 좋아하여 금문(今文)의 학자들과 심한 갈등을 빚은 나머지 하내태수(河內太守)를 자청하여 몸을 피하기도 하였다.

 

유희(庾羲)

() 나라 사람으로 자는 의숙(義叔). 목제(穆帝)에게 풍간(諷諫)하는 시를 지어 올려 명망이 높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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