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234. 원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34. 원

건방진방랑자 2020. 4. 29. 18:16
728x90
반응형

234.

 

 

()

20()를 뜻하며 일설에는 30묘라고도 한다.

 

()

토지의 단위로서 즉 12(), 또는 30()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는데, 초사(楚辭)』 「이소(離騷)내가 이미 구원에 난초를 심었다[余旣滋蘭之九畹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원은 하늘을 말한다. 이아(爾雅)』 「석천(釋天)

 

()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 흔히 역()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 인용: 題深院(조신)

 

원가(袁家)

명말의 명장 원숭환(袁崇煥). 안찰사(按察使)로 영원(寧遠)에서 청병(淸兵)을 무찌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가 되었는데 청병이 계주(薊州)로 쳐들어오므로 경사(京師)를 수호하기 위하여 빨리 돌아왔다가 간신의 참소로 사형을 당하였다.

 

원가행(怨歌行)

악부 초조곡(楚調曲)의 이름으로, 원곡은, () 나라 때 반첩여(班倢伃)가 성제(成帝)로부터 사랑을 잃고 이를 원망하여 지은 노래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후로는 불우(不遇)함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전용되었다

 

원개(元凱)

()은 선()의 뜻이고, ()는 화()의 뜻으로, 이른바 팔원(八元)이라고 하는 고신씨(高辛氏)의 여덟 재자(才子)와 이른바 팔개(八凱)라고 하는 고양씨(高陽氏)의 여덟 재자를 합칭한 말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 옛날 고양씨(高陽氏) 아들 여덟이 다 어질고 재능이 있어 백성들이 그들을 일러 팔개(八凱)라고 하고, 고신씨(高辛氏)에게도 그러한 아들 여덟이 있었는데 그들은 팔원(八元)이라 했다는 것이다. 좌씨전(左氏傳)文公 18

서진(西晉) 때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오()를 쳐서 평정한 두예(杜預)의 자이다.

 

원개벽(元凱癖)

학문을 탐독하는 습성. 원개(元凱)는 진()나라 두예(杜預)의 자. 두예는 춘추 좌전(春秋左傳) 주해(註解)에 전력하여 자기 자신이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 진서(晉書)』 「두예열전(杜預列傳)

 

원객(園客)

신선을 이른다. 술이기(述異記)원객은 제음(濟陰) 사람인데, 얼굴이 예쁘면서도 장가를 들지 않고 항상 오색향초(五色香草)를 가꾸며 산 지 10여 년이 되던 어느 날 오색 나방이 향초 위로 모여들기에 그것을 베에다 받아놨더니, 거기에서 누에가 부화되었다. 그 때 마침 한 여인이 나타나 양잠을 도와 향초로 먹여 누에고치 120개를 땄는데, 크기가 항아리만 하였다. 이 여인은 그 고치실을 다 뽑은 뒤에 원객과 함께 신선이 되어 갔다.” 하였다.

 

원거(鶢鶋)

원거(爰居)라고도 하는데, 해조(海鳥)이며 크기가 새끼말 만하다 한다. 이아석조(爾雅釋鳥)

 

원거(爰居)

해조(海鳥)의 이름이다. 옛날 노() 나라 교외에 원거가 있었는데 노후(魯侯)가 그를 데려다가 구소(九韶)를 연주하여 즐겁게 해 주고, 태뢰(太牢)를 갖추어 먹게 하였으나, 원거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슬퍼만 하다가 3일 만에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

해조(海鳥)의 일종으로 크기가 망아지 정도 된다고 하는데, () 나라 동문(東門) 밖에 와서 이틀을 머물자 장문중(臧文仲)이 이 새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국어(國語)』 「노어(魯語)

 

원거원처(爰居爰處)

어디에 있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지 못한 채 사단(事端)을 일으켜 불행을 자초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사간(斯干)여기에서 편안히 거하고 저기에서 편안히 처하며 여기에서 즐거이 웃고 저기에서 즐거이 말하도다[爰居爰處 爰笑爰語],”라고 하였다.

 

원결(寃結)

사실이 없는 원통한 죄에 걸려서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리지 못한다.

 

원결(元結)

당 숙종(唐肅宗) 때 사람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번구(樊口)에 숨어서 호를 오수(聱叟)라 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四十三

 

원경(鶢驚)

원거가 놀라다는 뜻이다. 원거는 바다새인데, () 나라 서울에 나타났다가 잡혀서, 진수성찬과 종고(鐘鼓)의 연주를 대접받고 놀라서 지쳐 죽었다 한다.

 

원경(圓鏡)

대원경(大圓鏡)인데 불리사덕(佛理四德)의 하나이다. 대장법수(大藏法數)如來眞智本性淸淨 離諸塵念洞徹內外 無幽不燭 如大圓鏡洞照萬物無不明了라 하였다.

 

원공(園公)

상산사호(商山四皓)의 한 사람인 동원공(東園公)을 말한다. 성현군보록(聖賢群輔錄) ()동원공의 성은 원이고 이름은 병()이고 자는 선명(宣明)인데, 진류(陳留) 양읍(襄邑) 사람으로 늘 원중(園中)에 거처하였으므로 원공이라 불렀다.” 하였다.

 

원공(遠公)

() 나라 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었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루는 당대의 고사인 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때 이야기에 팔려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건너가 범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세 사람이 서로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다.

 

원공(猿公)

전국시대(戰國時代) 월 나라의 검술에 능했다는 전설 속의 인물. 구야자(歐冶子)가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위해 명검을 만들어 구천이 그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검술에 능한 어떤 처녀를 불렀는데, 그녀가 원공이라 자칭하는 한 노인을 만나 함께 칼을 시험하였다는 데서 나왔다. 오월춘추(吳越春秋)』 「구천음모외전(句踐陰謀外傳)

 

원공당(遠公堂)

원공(遠公)의 법당으로 곧 중이 있는 절간을 말한다. 원공은 동진(東晉) 때의 고승으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유유민(劉遺民)ㆍ종병(宗炳)ㆍ혜영(慧永) 18인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정토(淨土)의 불법을 닦았다.

 

원공재광산(遠公在匡山)

원공은 진() 나라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인데, 그가 광산에 있을 적에 도연명(陶淵明)ㆍ육수정(陸修靜)과 어울려 놀았다. 노산기(廬山記)

 

원관(園官)

농원(農園) 관리자를 말한다.

 

원관송채(園官送菜)

도독(都督)의 채소밭을 가꾸는 관리가 도독의 명으로 두보에게 야채를 가져다주면서 겨우 명목만 채울 뿐 성의 없이 대하는 것을 개탄하여 지은 원관송채(園官送菜)’라는 시가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9 / 완화당은 성도(成都) 완화계(浣花溪) 옆에 있던 두보(杜甫)의 초당(草堂)을 가리키고, 택풍당은 여강(驪江)에 있던 택당(澤堂)의 집 이름이다.

 

원광(圓光)

특히 불(), 보살(菩薩) 등의 이마 위에서 방사(放射)하는 원륜(圓輪)의 광명(光明)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굉(袁宏)

() 나라 원굉이 소싯적에 집이 가난하여 남의 집 세미(稅米)를 운반해 주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며 자기가 지은 영사시(詠史詩)를 읊었을 때, 마침 뱃놀이를 하며 달을 감상하던 진서 장군(鎭西將軍) 사상(謝尙)의 눈에 띄어 크게 인정을 받고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

 

원교(圓嶠)

전설 속의 선산(仙山),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 은사(隱士)나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원교근공(遠交近攻)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범수가 주장한 외교정책. 먼 곳에 있는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하나씩 쳐들어가는 일.

 

원교산(員嶠山)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다섯 선산(仙山) 중의 하나. 열자(列子)』 「탕문(湯問)

 

원구(轅駒)

멍에 메고 수레를 끄는 데 익숙하지 않은 망아지로, 맡은 일에 비하여 힘이 부족하거나 기국이 작은 사람을 말한다.

 

원구(元舅)

왕의 외척(外戚). 임금의 장인(丈人)을 말한다.

 

원군(元君)

여도사(女道士)의 칭호이다.

 

원규(元規)

유량(庾亮)의 자.

 

원규진(元規塵)

원규(元規)는 곧 진() 나라 유량(庾亮)을 자. 왕도(王導)는 유량의 권세가 너무 중한 것을 미워하여 항상 서쪽 바람이 불 때면 부채로 낯을 가리고 원규(元規)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힌다.” 하였다. 진서(晉書)卷六十五 왕도전(王導傳)

 

원금함석전해평(寃禽銜石塡海平)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은 뒤 정위(精衛)라는 새로 변해 그 원한을 풀려고 늘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입에다 물고서 동해에 빠뜨려 메우려고 했던 이야기가 전한다. 산해경(山海經)』 「북산경(北山經)

 

원기(圓機)

선가(禪家)의 설법에 관한 용어(用語). 원활(圓滑)한 기봉(機鋒)이란 말이다.

 

원기(元氣)

천지의 정기(精氣)로 만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원기(鴛機)

원래는 수놓는 제구를 말한 것이나, 여기서는 비단 짜는 베틀의 뜻으로 전용한 듯하다.

 

원기(猿騎)

원숭이가 말탄다는 말로 말타는 놀이의 한 가지이다. 업중기(鄴中記)기아(伎兒)에게 옷을 입혀 원숭이의 모양을 만들고, 달리는 말을 타고서 옆구리에도 붙었다 말머리에도 붙었다 말꼬리에도 붙으면서 말은 여전히 달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원기라 했다.” 하였다.

 

원기(園綺)

() 나라와 한() 나라가 교체될 무렵, 상산(商山)에 은거해 살았던 네 명의 노인 즉 상산사호(商山四皓) 가운데 동원공(東園公)과 기리계(綺里季)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원기활(圓機活)

선가(禪家)의 용어(用語)인데, 기봉(機鋒)이 원활(圓活)한다는 뜻이다.

 

원길(元吉)

역경(易經)곤괘(坤卦) 육오효사(六五爻辭)누른 치마를 입은 형상이니 크게 길하다.” 하였는데, 황은 중앙 토()의 빛으로 중도(中道)를 뜻하고 치마는 하체의 옷으로 겸손을 말한다.

 

원낭만(元浪慢)

후위(後魏)의 원열(元悅)을 이르는 듯하다.

 

원노산(元魯山)

() 나라 때의 고사(高士)로서 노산령(魯山令)을 지냈던 원덕수(元德秀)를 이른다. 원덕수는 본디 지극한 효자로서 평소에 명리(名利)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산수(山水)를 사랑하고 거문고나 타며 스스로 즐기었으므로, 천하에서 그의 행실을 고상하게 여기어 원 노산이라 칭했다 한다. 당서(唐書)卷一百九十四

 

원덕태후(元德太后)

고려 강종(康宗)의 비 유씨(柳氏). 고종(高宗)의 어머니. 고종 26년에 훙()했다.

 

원도(原道)

당대의 문호(文豪) 한유(韓愈)가 유도(儒道)의 근본을 논구(論究)하고, 노불(老佛) 등 이단(異端)이 시세와 영합하고 인정에 어그러짐을 논술한 글.

 

원도주(元道州)

당 나라 문장가 원결(元結)을 가리킨다. 그가 도주 자사(道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원락(宛洛)

중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원읍(宛邑)과 낙양(洛陽)을 말한다.

 

원란(鵷鸞)

조정의 반열에 서 있는 백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추새와 난새는 의용(儀容)이 한아(閑雅)하다 하여 이에 비유하는 것이다.

 

원랑고와(袁郞高臥)

() 나라 원안(袁安)이 눈()이 온 날에 집안에 누워서 나오지 않았더니, 낙양령(洛陽令)이 순시하다가 다른 집에는 모두 문 앞에 눈을 쓸고 사람들이 나오는데, 원안의 집 문 앞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으므로 죽은 줄 알고 눈을 헤치고 들어가니, 원안이 말하기를,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는 때에 남을 간섭할 것이 없다.” 하니 낙양령이 그가 어진 사람인 줄 알고 조정에 천거하였다.

 

원량(元亮)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살면서 시와 술로 낙을 삼았던 진()나라 도잠(陶潛)을 말한 것으로, 원량(元亮)이 이름이라고도 하고, ()라고도 한다.

 

원량나무종출전(元亮那無種秫田)

원량은 도잠(陶潛)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을 때, ()의 공전(公田)에다 모두 차조[]만 심으라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항상 차조술에 취하기만 한다면 족하겠다.” 하였는데, 처자(妻子)들이 메벼[] 심기를 굳이 청하자, 이에 1() 50()에는 차조를 심고, 50묘에는 메벼를 심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九十四

 

원량소(元亮笑)

원량은 진() 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다. 그는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으로 갔었는데, 그 봉급이 쌀 닷말이었다. 그 닷말 쌀로 하여 매이는 것이 싫다고 하여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나도 그 현령의 봉급에 맛들여서 돌아가지 아니하면 도연명에게 웃음을 당한다는 말이다.

 

원량오희황(元亮傲羲皇)

도연명(陶淵明)이 여름에 북창(北窓)에 누어서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스스로 희황(戱皇) 이상의 태고적 사람이라 칭하였다. 진서(晉書)卷九十四

 

원량증수배독우(元亮曾羞拜督郵)

원량은 진() 나라 때의 고사 도잠(陶潛)의 자. 도잠이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을 때. ()에서 독우(督郵)를 팽현에서 보내자, 현의 아전이 도잠에게 응당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므로, 도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팽택현을 떠났던 것을 이른 말이다. 진서(晉書)卷九十四

 

원령(圓靈)

하늘. 사장(謝莊)의 월부(月賦), “柔祇雪凝 圓靈水鏡이라 하고 이선(李善)의 주에, ‘圓靈 天也라 하였다.

 

원례(元禮)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인 이응(李膺)의 자이다. 그의 인정을 한번 받으면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좋아할 만큼 높은 풍도와 명성을 떨쳤다. 후한서(後漢書)97

 

원례객(元禮客)

고사(高士)를 방문하였음을 비유한 말이다. 원례는 후한 때의 고사 이응(李膺)의 자인데, 당시에 그의 접견(接見)을 받은 선비를 대단히 영광스럽게 여기어 등용문(登龍門)이라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六十七

 

원로(鵷鷺)

원추새와 백로는 질서 있게 날므로 조관(朝官)의 항렬에 비유된다.

원추새와 백로인데, 이 두 새의 의용(儀容)이 한아하여 조정에 늘어선 백관의 질서 정연함에 비유한다. 곧 조정의 관원을 가리킨다. 수서(隋書)』 「음악지(音樂志)원로가 항렬을 이루었다.” 하였다.

 

원룡(元龍)

삼국시대 위() 나라 진등(陳登)의 자다. 지모가 출중하고 해박한 지식을 지녔으며 광릉태수(廣陵太守)와 동성태수(東城太守)를 역임하면서 남다른 치적을 이루었다. 뜻이 원대하고 호방하여 개인적인 세상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허사(許汜)가 유비(劉備)를 만나, 원룡이 호해의 기상만 넘친 나머지 자기를 대접해 주지 않고 무시했다면서 불평하자, 유비가 당신은 국사(國士)의 명성을 지닌 사람인 만큼 세상을 구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그저 밭이나 집을 구하려고만 하는 등 취할 말이 없었으므로 원룡이 꺼린 것이다[君求田問舍 言無可采 是元龍所諱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삼국지(三國志)7 魏書 진등전(陳登傳)

 

원룡객례(元龍客禮)

원룡(元龍)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사 진등(陳登)의 자이고, 객례는 주인으로서 손님을 깍듯이 접대한다는 말이다. 당시의 명사 허사(許汜)가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에 있는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은 그와 한참 동안 대화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큰 침상에 드러눕고 허사는 밑에 있는 침상에 눕게 하는 등, 손님을 대하는 예의가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상촌 자신이 진등처럼 뜻이 크고 호쾌하여 잡다한 예절 따위는 대범하게 여긴다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卷七 진등전(陳登傳)

 

원룡고와(元龍高臥)

후한(後漢) 진등(陳登)의 자()이다. 세상을 붙들고 백성을 구할 큰 뜻이 있었다. 허사(許汜)가 유비(劉備)와 천하의 인물을 논할 때 사가 말하기를, “전에 하비(下邳)를 지나며 진원룡을 찾아가니 그가 주객(主客)의 예가 없이 저는 큰 침상에 올라가 자고 객을 아랫 상에 눕히더군[無主客禮 自上大狀似 使客以下床].”하니, 비가 말하기를, “자네가 국사(國士)의 이름을 가지고 나라를 구함에는 유의치 않고, 밭을 구()하고 집이나 물으니 들을 가치가 없는지라 마땅히 백척 다락 위에 눕고 그대를 땅에 눕히리니, 어찌 다만 높은 평상, 낮은 평상 사이 뿐일 것이냐.” 하였다.

 

원룡백척루(元龍百尺樓)

원룡(元龍)은 삼국 시대위() 나라 진등(陳登)의 자. 백척루는 곧 좌석의 높은 것을 비유한 말로, 진등은 본디 호기가 많아서 손님이 찾아와도 공경하는 뜻이 없어 자신은 높은 와상에 올라가 눕고 손님은 낮은 와상에 눕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원룡최상두(元龍最上頭)

원룡(元龍)은 삼국 시대 진등(陳登)의 자()이다. 허사(許汜)가 진등에게 찾아와 집안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진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는 위에 있는 큰 침상에 눕고 허사는 아래의 침상에 눕게 하였는데, 허사가 푸대접을 받았다면서 원룡의 호기(豪氣)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유비(劉備)에게 하소연을 하자, 유비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에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다.”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삼국지(三國志)7 위지(魏志)」 「진등전(陳登傳)

 

원룡호기(元龍豪氣)

원룡(元龍)은 동한(東漢) 진등(陳登)의 자()이다. 당시 국사(國士)의 이름이 있는 허사(許汜)가 찾아와 신변에 대한 일만 이야기하자 아예 상대를 하지 않고 깔보며 무시해 버렸는데, 이에 분개한 허사가 유비(劉備)에게 원룡은 호해지사(湖海之士)라서 호기(豪氣)가 여전하였다.”고 투덜거린 고사가 전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진등전(陳登傳)

 

원류(源流)

물이 처음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곳. 물이 흐르는 원천. 사물이 일어난 근원ㆍ기원ㆍ시작

 

원륜(願輪)

보살(菩薩)의 몸이 언제나 자기가 서원(誓願)하는 대로 굴러다닌다고 하여 원륜(願輪)이라 한다.

 

원릉(元陵)

영조(英祖)의 능호이다.

 

원릉(園陵)

()은 임금이나 왕후의 묘소를 말하고, ()은 세자나 세자빈이나 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말한다. 광주(廣州)에는 지금은 서울의 강남으로 편입된 곳(조선시대엔 한강 이남이 광주였음)으로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헌릉(獻陵)3개 릉이 있고 양주(楊州)에는 지금의 구리시에 편입된 곳으로 태조 건원릉(健元陵)ㆍ목릉(穆陵)ㆍ현릉(顯陵)ㆍ휘릉(徽陵)ㆍ숭릉(崇陵)ㆍ혜릉(惠陵)ㆍ원릉(元陵)ㆍ경릉(景陵)ㆍ수릉(綏陵)9개 릉이 있다. / 인용: 詰楊吏(허격)

 

원명(元明)

본각(本覺)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본명(本明)이라고도 한다. 능엄경(楞嚴經)

 

원묘(原廟)

정묘(正廟)가 있는데도 다시 세운 사당을 말한다. 사기(史記)』 「고조기(高祖紀)고조(高祖)의 원묘를 세우다.” 했다.

종묘(宗廟)와는 별도로 경복궁 안에 있던 문소전(文昭殿). 이소이목(二昭二穆)의 오묘제(五廟制)로서 생전에 섬기던 예()로 상식(上食)과 제사를 행하여 매일 두 차례의 상식과 한 차례의 다례(茶禮) 및 삭망(朔望)ㆍ속절(俗節)ㆍ사시(四時)의 제사를 행하였다.

한 혜제(漢惠帝)가 숙손통(叔孫通)의 말을 받아들여 원묘를 만들었다. ()은 재()의 뜻인데 고묘(高廟) 외에 다시 하나의 고묘를 세운 것이다. 사기(史記)』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원문(轅門)

수레에 멍에를 세워 만든 문. 전하여 군문(軍門)을 말한다. 주례(周禮)天官 掌舍 주에 수레를 세워 그 멍에로 문을 표하는데, 두 수레의 멍에를 마주 세워 문처럼 만들므로 원문이라 한다.” 하였다.

 

원반(鵷班)

조정 신하의 반열을 뜻하는 말이다. 봉황새의 일종인 원추새[]는 날아갈 때에도 상하의 질서를 지킨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원방(元方)

동한(東漢) 진식(陳寔)의 아들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의 자()가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이었는데, 난형난제(難兄難弟)의 뜻으로 쓰이는 원방계방(元方季方)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형()의 표현으로 통용하게 되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원방(元放)

신선전(神仙傳)후한(後漢) 사람 좌자(左慈)의 자는 원방(元放)인데, 도술을 배워 육갑(六甲)에 정통하여 귀신을 부렸다. 일찍이 조조(曹操)가 오강(吳江)의 농어(鱸魚)가 먹고 싶다고 하자, 즉시 쟁반에 물을 떠놓고 낚시질하여 농어를 낚아올렸다.” 하였다.

 

원방공교안수상(元放恐敎安樹上)

원방(元放)은 좌가(左慈)의 자()인데, 술법이 있어서 소()를 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게 한 일이 있다.

 

원방시태구(元方侍太丘)

학덕이 훌륭한 아비와 자식을 비유한 말이다. 원방은 후한(後漢) 때의 진기(陳紀)의 자이고, 태구(太丘)는 진기의 아버지로서 태구 현장(太丘縣長)을 지낸 진식(陳寔)을 가리킨다. 진기의 아우인 진심(陳諶)까지 합하여 이들 세 부자(父子)는 당시에 학덕(學德)이 높기로 모두 유명하였다.

 

원백(元白)

당 나라 때의 시인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두 사람의 교분이 두터워서 시()를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매우 많다. 백거이가 동도(東都) 이도리(履道里)에 향산루(香山樓)를 짓고 원진 등 당시의 명사들과 함께 모여 풍류를 즐겼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서 독특한 문체를 이루어 원백체(元白體)가 생기게 되었다.

 

원법사(遠法師)

() 나라 고승 혜원(慧遠)을 말한다.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정토(淨土) 수행을 할 때 사영운(謝靈運)도 그 풍도에 감복하여 함께 참여하였으며, 도연명(陶淵明)이 음주(飮酒)를 허락하면 찾아가겠다고 하자 이를 허락했던 고사도 전한다.

 

원보(元輔)

귀한 신분의 중신(重臣)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복(元服)

남자가 스무살이 되어 어른의 의관(衣冠)을 입는 의식. ()은 머리()를 뜻하고 복()은 착용(着用)을 뜻한 것으로, 즉 머리에 관()을 쓰는 것을 말한다.

 

원봉(元封)

한 무제(漢武帝)의 연호이다. 한 무제가 원봉 원년에 태산에 봉선제(封禪祭)를 지냈다.

 

원부(院夫)

원에 매여서 원의 관리를 맡아보는 사람으로, 곧 원주(院主) 혹은 원주인을 가리킨다. / 인용: 題深院(조신)

 

원부납극(院孚蠟屐)

납극(蠟屐)은 꿀밀을 발라 반들반들하게 만든 나막신. 동진(東晉) 때 고사 완부는 나막신을 매우 좋아하여 꿀밀을 발라서 광택(光澤)을 냈다 한다.

 

원비(猿臂)

원숭이 팔. 한 나라 때 장군 이광(李廣)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활을 잘 쏘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원비장(猿臂將)

한 무제(漢武帝) 때에 북평 태수(北平太守) 등 여러 변방의 태수를 지냈고, 특히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던 이광(李廣)을 가리킨다. 그는 키가 크고 특히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서 활을 더욱 잘 쏘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원비장군(猿臂將軍)

한 문제(漢文帝) 이광(李廣)이 팔이 길어 활을 잘 쏘아서 흉노가 두려워하여 감히 발호하지 못했다. 흉노와 70여 차례 싸워 이겼으나 끝내 후()에 봉해지지 못했고 뒤에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의 패배로 인해 견책당하자 자살하였다.

 

원빈(元賓)

당 나라 한유(韓愈)의 제자 이관(李觀)의 자이다.

 

원빈애(元賓愛)

원빈은 이관(李觀)의 자()이다. 그는 한유(韓愈)가 아끼는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유의 시집(詩集)에 수록되어 있는 중운(重雲)’, ‘북극(北極)’이란 시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이사석(李師錫)에게 보낸 답서(答書)에 보면, 짧은 글 속에 무려 아홉 번이나 원빈(元賓)을 언급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원빈은 누구보다도 한유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전한다. 한창려집(韓昌黎集)卷三 답이수재서(答李秀才書)

 

원사진인(遠徙秦人)

중국 사서(史書)엔 진()의 도망한 백성이 한()으로 왔다고 적혀 있다.

 

원사허음(遠師許飮)

()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서신을 보내 도잠(陶潛)을 초청했는데, 도잠이 초청을 받고 말하기를, “제자(弟子)는 술을 좋아하여 법사께서 술을 마셔도 좋다고 허락하면 곧 가겠습니다.” 하자, 혜원이 그를 허락하였다. 노부잡기(盧阜雜記)

 

원사혼박도(爰絲混博徒)

()는 한() 나라 원앙(爰盎)의 자()이다. 원앙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 박도(博徒 노름꾼)인 극맹(劇孟)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대우를 잘했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101

 

원상애객(原嘗愛客)

전국 때 조()의 평원군(平原君 勝)과 제()의 아들 맹상군(孟嘗君)이 다 문객 3천 명을 두었었다.

 

원서(爰書)

죄인(罪人)의 범죄 사실을 조사한 서류이다. ()은 교환한다는 뜻으로, 옛날에 재판관의 편파를 막기 위하여 서로 옥서(獄書)를 교환해서 심리했던 데서 온 말이다.

 

원섭전(原涉傳)

한서(漢書)유협전(游俠傳)에 속한 원섭(原涉)의 전기(傳記). 원섭은 한() 나라 적 사람이며, ()는 거선(巨先)이다.

 

원성(元聖)

주공을 가리킨다. 주공의 이름은 단()인데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이다.

큰 성인으로, 일반적으로 이윤(伊尹)이나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원만하게 이루어진 진실의 본성.

 

원성유충자(元聖惟沖子)

대성인은 주()나라의 주공(周公)을 말하고 어린 임금은 무왕(武王)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성왕(成王)을 말한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성왕을 주공이 도와 섭정을 했다.

 

원소(元宵)

정월 대보름을 말한다.

 

원소방수(遠紹旁搜)

당 나라 시대에 고문(古文)을 잘 짓는 한유(韓愈), “멀리 고대의 학통을 잇고 옆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더듬는다[遠紹旁搜].”는 구절을 지었다.

 

원속이(垣屬耳)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반(小弁)군자(君子)는 쉽게 남의 말을 하지 말라. 담에도 귀가 붙었나니[君子無易由言 耳屬于垣].” 하였다.

 

원수(沅水)

동정호(洞庭湖) 남 쪽에 있는 물의 이름

 

원수(洹水)

전국시대(戰國時代) 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의 장상(將相)을 모이게 하여 맹약을 맺었던 강물 이름이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옛날 맹약을 맺을 때에는 희생용(犧牲用) 소의 왼쪽 귀를 베어 그 피를 함께 돌려 가며 마시곤 하였는데 이때 주도하는 사람이 그 귀를 잡았던 고사가 있다. 좌전(左傳)定公 8, 哀公 17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멀리 있는 물은 가까운 불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위급할 때 멀리 있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원습(原濕)

높고 평평한 지대와 낮고 습한 지대, 즉 강역 전체를 말한다. 왕명을 받든 사신의 행로를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사신을 전송하는 시인 시경(詩經)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휘황한 꽃이여, 언덕과 습지에 피었도다[皇皇者華 于彼原隰].”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서 기인한다.

 

원습객(原隰客)

사신의 명을 받고 외방에 나도는 몸이라는 말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언덕이며 진펄의 꽃 화려하게 피었는데, 말을 모는 나그네는 자신의 능력 부족할까 늘상 걱정한다네[皇皇者華 于彼原隰 征夫 每懷靡及].”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른 노래이다.

 

원습로(原隰路)

사행(使行)을 말한다. 사신을 보낼 때의 노래인 시경(詩經)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화려한 꽃들이 언덕과 진펄에 피어 있네. 급히 말 모는 저 사람 언제나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네[皇皇者華 于彼原隰 駪駪征夫 每懷靡及].”라는 말이 나온다.

 

원습욕계주인적(原隰欲繼周人蹟)

주 나라의 충신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나가서는 높고 낮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다녀 왕의 명령을 봉행한 일을 뒤따라서 하고 싶다는 뜻이다. 원습은 높은 지역과 낮은 습지를 말한다.

 

원습자순(原隰咨詢)

왕명을 받은 사신이 사방을 다니면서 두루 자문(諮問)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화려한 온갖 꽃들은, 저 언덕과 습지에 피었도다. 부지런히 달리는 사신은, 행여 사명 못다 할까 걱정이로다.……말 달리며 채찍질하여, 두루 자문하도다.[皇皇者華 于彼原隰 駪駪征夫 每懷未及……載馳載驅 周爰咨詢]” 한 데서 온 말이다. / 인용: 皇華集序(이정구)

 

원식형주(願識荊州)

훌륭한 사람을 사모하는 말이다. 이태백(李太白)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한조종(韓朝宗)에게 보낸 편지에 만호후(萬戶侯)를 원치 않고, 다만 한 형주가 한 번 알아주기를 바란다.”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하여 식형지원(識荊之願)이라고도 한다.

 

원신(圓神)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시초대(筮竹)의 덕은 둥글어서 신통하고 괘효(卦爻)의 덕은 모나서 지혜롭다[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以知].”는 말이 있다.

 

원안(袁安)

() 나라 때 현사(賢士) 원안이 사는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 한 자 가량이나 쌓였다. 낙양 영(洛陽令)이 나가 시찰해 보니,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는 모두 눈을 쓸고 나와서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데, 원안이 사는 집에는 그런 기척이 없었다. 이에 원안이 이미 죽은 것이라고 여기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원안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낙양 영이 원안에게 어째서 나와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원안은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낙양 영은 원안을 어진 사람이라고 여겨 효렴(孝廉)으로 선발하였다. 후한서(後漢書)45 원안전(袁安傳)

 

원안강와구(袁安僵臥久)

폭설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문밖을 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몇 자나 폭설이 쏟아지자 낙양 영(洛陽令)이 순행을 하였는데 모두 나와 걸식을 하는데도 원안(袁安)의 문 앞에만 발자국이 나지 않았으므로 이상히 여겨 물어 보았더니, 원안이 쓰러져 누워 있다가[僵臥] 대답하기를 대설(大雪)에 사람들 모두가 굶주리고 있으니 남을 찾아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한다. 후한서(後漢書)75 원안전(袁安傳)

 

원안루(袁安淚)

원안(袁安)은 후한(後漢) 때 여남(汝南) 사람으로 명제(明帝)ㆍ화제(和帝)를 섬기어 삼공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때 외척(外戚)이었던 두헌(竇憲)과 그의 아들 두경(竇景)은 날로 횡포를 부려 부정 부패가 심하니 원안은 임외(任隗)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어 탄핵하였다. 그는 황제가 어리고 외척이 강성함을 보고 공경들과 함께 국사를 의론할 적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다. 후한서(後漢書)卷四十五 원안전(袁安傳)

 

원안불사(袁安不死)

한 길이 넘는 큰 눈이 와서 낙양 영(洛陽令)이 순찰차 나가보니, 모든 민가(民家)가 다 눈을 쳐서 길이 났는데 원안의 집 문 앞에는 길이 나 있지 않으므로 사람을 시켜 눈을 치게 하고 들어가 보니 원안이 죽지 않고 살아 있더라는 고사이다. 청이록(淸異錄)

 

원안와(袁安臥)

후한(後漢) 때 원안이 일찍이 한 길이 넘는 대설(大雪)이 내렸을 적에 문 앞의 눈도 치우지 않고 혼자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었으므로, 때마침 순시차(巡視次) 나온 낙양 영(洛陽令)이 원안의 집 앞에 이르러 눈이 치워지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들어가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안이 말하기를, “대설이 내려서 사람이 모두 굶어 죽는 판이니, 남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원안청(阮眼靑)

삼국 시대 위() 나라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흰 눈(白眼)을 치켜 뜨고, 반가운 인사를 만나면 푸른 눈(靑眼) 즉 검은 눈동자를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

 

원안피(袁安被)

후한(後漢) 때 낙양(洛陽)에 대설(大雪)이 내렸을 적에, 낙양령(洛陽令)이 순행을 돌다가 원안의 문 앞에 이르러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음을 보고는, 원안이 얼어죽은 줄 알고 사람을 시켜 눈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원안이 누워 있으므로, 어찌하여 나오지 않고 누웠느냐고 묻자 원안이 말하기를, “대설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판이니, 남을 간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원안흥미(袁安興味)

원안(袁安)은 후한(後漢) 때 여남(汝南) 사람으로 자는 소공(邵公)이다. 청이록(淸異錄)한 길이 넘는 큰 눈이 내려 낙양영(洛陽令)이 친히 나가 민가(民家)를 순시했는데, 이때 다른 집은 다 눈을 쳤으나, 원안의 집앞은 눈을 치지 않았으므로, 원안이 죽었다고 여기고 사람을 시켜 눈을 치고 들어가 보니, 원안이 방에 들어누워 있기에 왜 나오지 않고 누워 있느냐?” 묻자, 원안이 큰 눈이 내려 사람이 다 굶어 죽게 되었으니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한 고사가 있다.

 

원앙(鴛鴦)

물새의 일종으로 깃털이 아름답다. 늘 암수가 함께 붙어 다니기 때문에 흔히 금슬 좋은 부부를 비유한다.

 

원앙계수당(袁盎戒垂堂)

수당은 마루 끝에 앉아 있는 것. 한 문제가 장안(長安) 동쪽 패릉(霸陵)위에서 수레를 몰아 험난한 언덕을 내달려 내려가려 하자, 원앙이 말고삐를 잡고 간하기를 신은 듣건대 천금을 가진 집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를 않고 백금을 지닌 집 자식은 난간에 몸을 기대지 않으며, 성군은 위험한 것을 타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험한 산길을 고려치 않고 말을 달리려 하시니 만일 말이 놀라 수레가 넘어지는 날이면, 폐하 자신의 몸이야 하찮게 보신다 하더라도 고조(高祖)의 사당과 태후(太后)를 장차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四十九 원앙전(袁盎傳)

 

원앙기(鴛鴦機)

부녀자들의 자수(刺繡)하는 수틀을 말한다.

 

원앙루(鴛鴦樓)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누방(樓房)을 말한다.

 

원앙와(鴛鴦瓦)

부부간의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원앙 모양으로 짝을 이룬 암키와와 수키와를 말한다.

 

원앙지계(鴛鴦之契)

금슬(琴瑟)이 좋은 부부사이를 말한다.

 

원약허(元若虛)

약허(若虛)는 원유진(元有鎭)의 호이다.

 

원양(原壤)

() 나라 사람인데 공자의 친구이며 예법을 도외시한 사람. 그가 공자의 앞에 걸터앉아 기다리니, 공자가 지팡이로 그 정강이를 두드리며, “어려선 공손하지 않고 자라선 일컬어질 게 없으며 노쇠해선 죽지 않으니, 이것이 도둑이네[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원역(遠役)

국가의 임무를 띠고 먼 지방에 가는 것을 말한다.

 

원예(元禮)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인 이응(李膺)의 자()이다. 한서(漢書)』 「이응전(李膺傳)천하의 규범은 이원례다[天下模楷李元禮].” 하였다.

 

원예방참(圓枘方鏨)

네모난 끌 구멍에 넣으면 서로 어긋나 넣을 수 없다는 말이다.

 

원외(員外)

정한 관리 외의 직책을 맡은 사람을 말한다.

 

원우(元祐)

() 나라 철종(哲宗)의 연호로, 이 당시에 당론(黨論)이 아주 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顥),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파(舊派)와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신파(新派)가 심하게 대립하였으며, 그 뒤에 왕안석의 우익인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에 의하여 구파가 간당(奸黨)으로 몰려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치열했던 당쟁(黨爭)의 와중(渦中)을 말한다.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의 구당(舊黨)과 왕안석(王安石)의 신당(新黨)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는데, 이를 역사에서 원우 당인(元祐黨人)이라고 말한다.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

원우(元祐) 연간인 송 나라 철종(哲宗) 때 당론(黨論)이 아주 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顥),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파(舊派)와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의 신파(新派)가 심하게 대립하였는데,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 채경 등이 용사(用事)하면서 구파를 당인으로 몰아 태학문(太學門) 앞에다가 사마광 등 309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는 당인비(黨人碑)라고 하였다.

 

원우간비(元祐姦碑)

원우(元祐)는 송 철종(宋哲宗) 연호이다. 당시에 사마광(司馬光)을 필두로 하여 정이(程顥)ㆍ문언박(文彦博) 등 문인 학자 1백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당(新黨)과 격렬한 대립을 보여왔는데, 그 후 휘종(徽宗) 대에 와서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이상의 문인 학자들을 원우간당(元祐姦黨)으로 몰아 단례문(端禮門)에다 원우간당비를 돌에 새겨 세웠음. 원우당인전(元祐黨人傳)

 

원우죄인(元祐罪人)

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인데, 원우의 죄인이란 소식(蘇軾)을 말한다. 소식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으므로 숭령(崇寧) 원년에 채경(蔡京)이 사마광(司馬光)의 구당(舊黨) 12십 명을 간당(奸黨)이라 지목하고 비를 세웠다.

 

원우퇴설루(袁尤槌雪樓)

원굉도는 바로 명() 나라 때의 시인이고, 설루(雪樓)는 역시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원굉도는 본디 시문에 뛰어난 사람으로서 그의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모두 당대에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왕세정(往世貞)이반룡(李攀龍)의 시체(詩體)를 매우 강력히 배격하고 홀로 일가를 이룸으로써 당대에 많은 학자들이 왕세정ㆍ이반룡을 배제하고 그를 따르면서 그의 시체를 공안체(公安體)라 지목했던 데서 온 말이다. 명사(明史)卷二百八十八

 

원원(湲湲)

물고기가 기운을 잃고 넘어지는 모양

 

원원(源源)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양, 사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양

 

원원(晼晼)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양

 

원유(遠遊)

부모 곁을 떠나 멀리 나가 노니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이인(里仁)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 놀지 말 것이요,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원유(遠遊)

원래 초사(楚辭)의 편명으로, 굴원(屈原)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신선과 짝해서 천지 사방을 주유(周遊)하는 내용을 서술한 글이다. 초사(楚辭)卷五

 

원유(元瑜)

() 나라 때의 은사 곽우(郭瑀)의 자이다. 전량(前涼)의 장천석(張天錫)이 일찍이 예를 갖추어 징소(徵召)했으나, 곽우는 새를 어찌 새장에 가둘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깊이 은둔하여 자취를 끊었는데, 장천석이 마침내 곽우의 문인(門人)을 구속하자, 곽우가 말하기를 어찌 은거하여 의리를 행한다면서 문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잠시 나와서 부름에 응했다가 이내 다시 남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에 왕목(王穆)의 태부장사(太府長史)ㆍ군사장군(軍師將軍)을 잠시 지내다가 왕목이 그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자, 바로 그만두고 남산으로 돌아와 죽었다. 진서(晉書)卷九十四

 

원유가(遠遊歌)

굴원(屈原)초사(楚辭)편 이른다.

 

원유관(遠遊冠)

제후가 쓰는 관()의 이름으로, 위진(魏晉) 이후부터 원() 나라까지 이 관을 썼다. / 인용: 酒吃翁夢記(허균)

 

원유부(遠遊賦)

전국(戰國) 시대 초() 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참소를 입고 하소할 곳이 없자 신선(神仙)과 함께 놀려고 하여 지은 초사(楚辭)의 하나. 뒤에 위()의 조식(曹植)이 이를 본따 원유편을 지었는데 악곡(樂曲)으로 전한다.

 

원유산(元遺山)

금대(金代)의 시문가. 이름은 호문(好問), 자는 유지(裕之), 유산은 호이다. 당대의 종장(宗匠)이다.

 

원유산집(元遺山集)

() 나라 원호문(元好問)의 문집. 문인(文人)으로 시에 능하였으며, 벼슬은 상서성(尙書省)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을 지냈다.

 

원유의(遠遊意)

어버이가 살아 계시거든 멀리 나가 노닐지 말라[父母在 不遠遊]”고 공자가 경계한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원유편(遠遊篇)

선인(仙人)과 함께 천지를 두루 돌아다니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나라 굴원(屈原)이 참소를 입고 쫓겨난 이후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자, 선인들과 함께 유희하면서 천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뜻을 붙여 원유편을 지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초사(楚辭)』 「원유(遠遊)

 

원융(圓融)

원만과 융화의 뜻으로, 사물(事物)과 이치에 대하여 차별상(差別相)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상(平等相)을 주장하여 일체가 걸림이 없음[無礙]을 말한다.

 

원융(元戎)

원수(元帥)와 같은 말로, 도원수 권율(權慄)을 가리킨다.

 

원읍현(員泣峴)

강릉(江陵) 서쪽 41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관령(大關嶺) 중턱에 있는 고개. 옛날 어떤 관원 하나가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다가 갈려가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

 

원의석(圓議席)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이 각각 그 부(), ()의 청사(廳事)에 일제히 모이는 날에 당중(堂中)에 깔고 다 함께 앉아 의논하는 자리로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일과 탄핵하는 일이나 배직(拜職)한 사람의 서경(署經)을 의논하는 자리를 말한다. 완의석(完議席)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완석(完席)이라고도 한다. / 인용: 용재총화(성현)

 

원입골수(怨入骨髓)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 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원자(袁子)

() 나라 원탐(袁耽)을 가리킨다.

 

원자(元子)

천자(天子)의 적자(嫡子)를 말한다.

 

원자지(元紫芝)

() 나라 때의 고사(高士) 원덕수(元德秀)를 이른다. 자지는 그의 자이다. 원덕수가 일찍이 노산령(魯山令)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평소에 명리(名利)를 떠나 산수(山水)를 좋아하며 지냈으므로, 천하에서 그의 행의를 높여 원노산이라 칭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九十四

 

원장(院長)

승정원의 어른이라는 뜻으로 도승지(都承旨)를 가리킨다.

 

원장납배(元章納拜)

원장(元章)은 송() 나라 때의 서화가(書畵家) 미불(米芾)의 자인데, 그는 금석(金石)과 고기(古器)를 사랑하였으며, 특히 기석(奇石)을 좋아하여 세상에서, ‘원장은 돌에다 절을 한다는 말이 생겼다 한다.

 

원장단(猿腸斷)

죽은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비통한 심정을 말한 것이다. () 나라 사람이 산에 들어가서 새끼 원숭이를 잡아와 나무에 묶어 두었다가 마침내는 죽이고 말았는데, 그 나무 위에서 계속 하소연하는 듯 슬피 울다가 끝내는 나무 위에서 몸을 던져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니 애가 마디마디 끊겨져 있더라[腸皆寸寸斷]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

 

원재(袁齋)

동한(東漢)의 원안(袁安)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75낙양(洛陽)에 눈이 많이 내려 모두들 걸식(乞食)을 하였지만, 안은 태연히 누워 있었다.” 하였다.

 

원저(元佇)

거북 또는 귀갑(龜甲)을 지칭하는 말로, 장수(長壽)를 말한다.

 

원적궁(阮籍窮)

진의 완적(阮籍)이 마음이 내키면 수레를 몰고 정처 없이 가다가 길이 막다른 곳에 이르면 곧 통곡을 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원정(元正)

정월의 별칭이다.

 

원정(元精)

천지의 정기(精氣)를 말한다. 각 존재마다 하늘로부터 품부받는 고유의 정기(精氣)를 말한다.

 

원정사어도(元定死於道)

원정(元定)은 바로 남송(南宋)의 채원정(蔡元定)을 말하는데, 그는 주희(朱熹)의 문인으로서 당시 한탁주(韓侘冑)ㆍ심계조(沈繼祖) 등 간신들에 의해 위학(僞學)으로 몰려 마침내 도주(道州)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六十二

 

원조방예(圓鑿方枘)

각이 진 자루는 둥근 구멍에 끼우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물이 서로 맞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송옥(宋玉)구변(九辯)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 끼워 넣으려 함이여, 맞지 않아 들어가지 않음을 내가 물론 잘 알도다[圜鑿而方枘兮 吾固知其鉏鋙而難入].”라는 말이 있다.

 

원종적송유(願從赤松遊)

()이 도읍을 장안으로 옮길 때에 장량(張良)은 따라 가지 않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 하며 벽곡(辟穀)하였다. 그것은 몸을 보전하여 한신(韓信)과 같은 화()를 면하기 위함이었다는 뜻이다. 赤松子

 

원준(袁準)

()의 학자. 자는 효니(孝尼)이다.

 

원중랑(袁中郞)

명대의 시문가. 이름은 굉도(宏道), 호는 석공(石公). 형 종도(從道)ㆍ아우 중도(中道)와 재명(才名)을 날려 삼원(三袁)이라 불렸다. 명사(明史)卷二百八十八, 明詩宗 卷五十七

 

원중승(袁中丞)

중승(中丞)은 명대(明代)의 관직으로 순무(巡撫)를 말하는데, 요동 순무사(遼東巡撫使)로 재직했던 원숭환(袁崇煥)을 가리킨다. 명사(明史)259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25 모문룡주사(毛文龍誅死)

 

원중종죽개삼경(園中種竹開三逕)

은거한 것을 말한다. 삼보결록(三輔決錄)장허(蔣詡)의 자는 원경(元卿)인데 집안에 대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 세 갈래 길을 만들었으며, 오직 구중(求仲), 양중(羊仲)이 따라다니며 놀았다.” 하였다.

 

원지(遠志)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 환온(桓溫)이 원지 소초(遠志小草)라는 약초의 뜻을 묻자, 학륭(郝隆)산속에 있을 때는 원지라고 부르고 세상 속으로 나왔을 때는 소초라고 부른다.”고 대답하여, 사안(謝安)을 부끄럽게 한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調)

 

원진(元稹)

당 나라 시인.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를 잘 지었으므로 궁중(宮中)에서 원재자(元才子)라 했고, 백거이(白居易)와 같이 이름이 높아 원백(元白)이라 일컬어졌으며, 또 그들의 시체를 원백체(元白體)라 한다. 저서에는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이 있다.

송 나라 때의 충신 조정(趙鼎)의 자()이다. 과거의 책문(策文)에서 장돈(章惇)의 실정(失政)을 비판했고, 송 나라가 남천(南遷)한 뒤로는 나라의 부흥을 위해 진력하다가 간신 진회(秦檜)와 뜻이 맞지 않아 귀양가서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진회를 비롯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여러 차례 좌천되었다가 사직하는 표문(表文)에서 흰 머리 늙은 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서글픕니다. 단심(丹心)은 아직도 남았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변치 않으리라 맹서합니다.” 하였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四十四

 

원진단심(元鎭丹心)

원진(元鎭)은 송 나라 때의 충신 조정(趙鼎)의 자()이다. 과거의 책문(策文)에서 장돈(章惇)의 실정(失政)을 비판했고, 송 나라가 남천(南遷)한 뒤로는 나라의 부흥을 위해 진력하다가 간신 진회(秦檜)와 뜻이 맞지 않아 귀양가서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진회를 비롯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여러 차례 좌천되었다가 사직하는 표문(表文)에서 흰 머리 늙은 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서글픕니다. 단심(丹心)은 아직도 남았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변치 않으리라 맹서합니다.” 하였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四十四

 

원진사(蚖珍詞)

원진은 계절과 달에 따라 구분되는 여덟 종류의 누에치기 명칭 가운데 하나로, 3월에 치는 것을 말한다. ()자는 본디 두 잠을 잔 누에라는 뜻인데 원()자에 붙어 하나의 명사가 되었다.

 

원차산(元次山)

차산(次山)은 당() 나라 원결(元結)의 자()이다. 처음에 호를 의간자(猗玕子)로 하였다가 낭사(浪士), 또는 만랑(漫郞)으로 고쳤다. 당 대종(唐代宗) 때에 그의 어버이가 늙은 까닭으로 벼슬을 버리고 번상(樊上)으로 돌아가 책을 벗삼고 살았다. 당서(唐書)卷一百四十三 원결전(元結傳)

 

원차일장조(願借一長條)

출세하도록 도와달라는 뜻이다. () 나라 때 이의부(李義府)가 태종(太宗)에게 부름을 받고 들어가 까마귀()를 읊은 시에 햇볕 속엔 아침 빛을 날리고, 거문고에선 야제곡을 들었소. 상림엔 나무가 저리도 많은데, 한 가지 빌려주지 않으실는지.” 하였다.

 

원찰(願刹)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려고 복을 비는 정성으로 절을 세우는 것이다.

 

원천우인(怨天尤人)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원충갑(元衷甲)

충렬왕(忠烈王) 때 진사로 원주 별초(別抄). 합단적(哈丹賊)의 침공을 막아 큰 공을 세웠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원취(鴛翠)

눈썹 모양의 하나인데, 당 현종(唐玄宗)이 화공을 시켜 미인들의 눈썹을 열 가지로 그렸다 한다.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

멀리 있는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는 뜻이다 .

 

원침(園寢)

예전에, 왕세자나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산소를 이르던 말이다. / 인용: 財用篇(신흠)

 

원침(圓枕)

둥근 나무로 만든 베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문견전록(聞見前錄), “富公未第時 讀書於水南天宮寺三學院 夜枕圓枕 庶睡不能久 欲有所思 其勤苦如此라고 보인다.

 

원타(圓楕)

타원(楕圓)과 같은 말이다.

 

원탐(袁耽)

() 나라 사람. 진서(晉書)』 「원탐전(袁耽傳)탐은 도박을 매우 잘했는데, 환온(桓溫)이 재산을 탕진하고 탐에게 요청하자 날렸던 재산을 다 찾아주었다.” 하였다.

 

원택(圓澤)

() 나라 때 이원(李源)이 중 원택(圓澤)과 교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일찍이 함께 삼협(三峽)에 이르렀을 때 원택이 하는 말이, 자신이 지금 죽으면 12년 뒤에 항주(杭州)의 천축사(天竺寺) 뒤 삼생석(三生石)에서 다시 서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던 바, 과연 이날 저녁에 원택이 죽었고, 그로부터 12년 뒤에 이원이 그 약속대로 그 곳에 나가보니, 과연 원택이 그 곳에 나와있어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원토방쇠경(猿兎妨衰境)

원숭이와 토끼 따위의 동물들도 늘그막에 자연으로 돌아오는 사람을 반기지 않으므로 일찌감치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에 은둔하였다는 것이다.

 

원통(圓通)

능엄경(楞嚴經)의 게송(偈頌)육근(六根) 가운데 원통의 성품 잘 추슬러, 점점 흘러들어 정각을 이루노라[根選擇圓通 入流成正覺].”라고 하였는데, 능엄정맥소(楞嚴正脈疏)에서 육근(六根) 가운데 이근(耳根)을 예로 들면, 듣는 것이 바로 그 속성인데, 이것은 사람마다 본디 원통(圓通)한 것이다. 가령 북을 칠 때 일시에 모두 듣는 것이 원()이요, 모든 곳에서 다 알아듣는 것이 통()이다. …… 이 원통의 성품은 담연(湛然)히 상주(常住)하여 생멸(生滅)이 전혀 없으니, 소리에만 좇아 유전(流轉)하지 말고 자성(自性)을 반조(反照)하게 되면 …… 마침내 궁극적인 원통의 경지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포(援枹)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전에 외적이 침입해 오거나 군대를 진격시킬 때에 북을 울려서 알렸다.

 

원표반(袁豹半)

독서를 많이 하였다는 뜻이다. ()의 사영운(謝靈運)이 은중문(殷仲文)이란 사람을 평하기를 은중문이 만일 원표가 읽은 책의 반만 보았다면 반고(班固)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진서(晉書)卷五十九 은중문전(殷仲文傳)

 

원풍태사(元豐太史)

황산곡(黃山谷)의 성명은 황정견(黃庭堅)이요, 산곡은 그의 호이다. 그는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시대 사람인데, 역사 편찬에 관계되는 벼슬을 하였으므로 태사(太史)라고 말한 것이다.

 

원하구(轅下駒)

멍에 멘 망아지. 사람이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함을 비유하기도 한다. 사기(史記)』 「위기무안후전(魏其武安侯傳)수레를 작은 망아지에 매면 멍에 아래로 들어가 쭈그린 모양을 한다.” 하였다.

수레 끌채 밑의 망아지. 망아지는 힘이 약하여 수레를 끌 수 없으므로, 전하여 사람이 힘이 모자라서 망설이고 있는 모양을 비유한 말이다.

 

원학(猿鶴)

원학사충(猿鶴沙蟲)의 준말로, ‘전사한 일반 장사(將士)을 말한다. 예문유취(藝文類聚)93 ()주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했을 때 군대가 전멸하였는데 장사들은 원숭이와 학이 되고 일반 백성들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 하였다. / 인용: 哀魚將軍(이희풍)

 

원학상호(猿鶴相呼)

남조 제()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은자(隱者)가 떠나고 난 뒤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향기로운 장막이 텅 비자 밤에 학이 원망하고, 산사람이 떠나가자 새벽에 원숭이가 놀라 우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하였다.

 

원헌(原憲)

공자(孔子)의 제자. 원헌이 노()에 살면서 너무 가난하여 토담집에 거적을 치고 문짝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 비만 오면 지붕이 새어 방안이 젖곤 하였는데, 동문인 자공(子貢)이 큰 말을 타고 호화로운 차림으로 찾아와 그의 험한 꼴을 보고, 무슨 병이 들었느냐고 묻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재물이 없는 자를 일러 가난하다고 하고, 학문을 하고도 그대로 실천을 못하는 자를 일러 병들었다고 한다는데,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니라오.” 하여 자공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장자(莊子)』 「양왕(讓王)

 

원헌(原憲)

원헌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 사람. 자는 자사(子思)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궁벽한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을 때 위()나라 재상으로 있던 자공(子貢)이 그를 찾아가니 남루한 옷차림으로 만나주었다. 자공은 그의 행색이 수치스러워 말하기를 혹시 병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들으니, 재물이 없는 자를 가난하다 말하고 도를 배우고서도 능히 행하지 못하는 자를 병들었다고 말한다 하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닙니다.” 하자, 죽을 때까지 자공이 자기의 실언을 부끄럽게 여겼다 한다. 사기(史記)卷六十七 仲尼弟子列傳禮記 단궁(檀弓)

 

원헌씨(原憲氏)

원헌은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가 되었는데, 특히 청빈(淸貧)하기로 유명하였다. 장자(莊子)』 「양왕(讓王)

 

원헌치(原憲恥)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 부끄러움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씀하기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녹만 먹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만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라[邦有道, ; 邦無道, , 恥也].”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원현천(元玄川)

현천(玄川)은 조선 영조(英祖) 때의 학자 원중거(元重擧)의 호이다. 중거는 시로 당세에 유명하였다. 영조 39년 계미(1763)에 영호(永湖) 조암(趙曮)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갈 적에 중거가 수행(隨行)하였다.

 

원호(袁戶)

원안(袁安)이 사는 집의 대문이다. 후한서(後漢書)45원안전(袁安傳), “이때 마침 큰 눈이 내려서 한 자 가량이나 쌓였다. 낙양 영(洛陽令)이 직접 나가 시찰하면서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는 모두 눈을 쓸고 나와서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데, 원안이 사는 집의 문 앞에 이르니,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었다. 이에 원안이 이미 죽은 것이라고 여기고 사람들을 시켜서 눈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원안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낙양 영이 원안에게 어째서 나와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원안이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낙양 영이 원안을 어진 사람이라고 여겨 효렴(孝廉)으로 선발하였다.” 하였다.

 

원호(元豪)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일찍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는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시켰고, 또 이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서 적병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패주하는 왜적들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했었다.

 

원호(猿號)

초왕(楚王)에게 흰 원숭이가 있었는데, 왕이 스스로 그를 쏘려고 할 때는 원숭이가 화살을 빼앗아 장난을 하더니, 활의 명수인 양유기(養由基)에게 쏘도록 하자, 양유기가 활을 고르고 화살을 바로잡기만 해도 원숭이가 기둥을 안고 울부짖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설산훈(說山訓)

 

원호문(元好問)

금ㆍ원(金元) 양대의 시인이자 학자. 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遺山). 특히 오언시에 능했다. 7세부터 시에 능해 시문으로 일대 종장이 되었다. 저서에는 유산집(遺山集)중주집(中州集)속이견지(續夷堅志)당시고취급전주(唐詩鼓吹及箋注)등이 있다.

 

원홍렬(鵷鴻列)

가지런히 줄을 서서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자유스럽게 행동하지 못하는 조정 백관의 반열(班列)을 말한다.

 

원화(元和)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年號)이다. 당 나라 헌종(憲宗)이 발호(跋扈)하는 번진(藩鎭)들을 소탕하였다.

 

원화(元化)

조화로서 대자연의 발전과 변화를 말한다.

 

원화각(元和脚)

() 나라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가리킨 말이다. 당 나라 원화 연간에 유공권(柳公權)이 글씨로 이름이 났었는데 그 글씨를 일컬어 원화각이라 하였다. 천중기(天中記)유공권이 원화 연간에 글씨가 가장 유명하였으므로 유우석(劉禹錫)의 시에 유씨 집 새 양식은 원화각일레[柳家新樣元和脚]’이라 했다.” 하였다.

 

원화백사인(元和白舍人)

원화(元和)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 백사인(白舍人)은 곧 당 헌종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원화소복(遠禍召福)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원회(元會)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준말로서 자연계 일체 사물의 시종(始終)ㆍ생사(生死)ㆍ유무(有無)를 말한다.

 

원회운세(元會運世)

30년을 1세라 하고 12세를 1운이라 하며 30운을 1회라 하고 12회를 1원이라 한다. 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내편(觀物內篇)

우주의 흥망성쇠에 관해 소 강절(邵康節)이 만들어 낸 이론인데, 1()12(), 1회는 30(), 1운은 12()로 되는 등 총 129600년을 1주기로 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요()의 시대는 총 360() 가운데 180운에 속하고 그 속에서도 제9()에 속하며 회()로 보면 즉 월오(月午)로서 양()이 가장 성()한 때인데 이 시기는 총 18백년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원효니(袁孝尼)

효니(孝尼)는 진()의 학자 원준(袁準)의 자. 그는 충신공정(忠信公正)하였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였으며, 정치에 관한 저서가 10여만 자에 이르렀다. 진서(晉書)』 「원준전(袁準傳)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어휘놀이터 > 어휘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휘사전 - 236. 위  (0) 2020.04.29
어휘사전 - 235. 월  (0) 2020.04.29
어휘사전 - 233. 웅  (0) 2020.04.29
어휘사전 - 232. 울  (0) 2020.04.29
어휘사전 - 231. 운  (0) 2020.04.2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