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 1569 선조2~1612 광해군4, 자 汝章, 호 石洲)은 권근(權近)의 후손이자 권벽(權擘)의 오자(五子)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한 글자의 오서(誤書)로 축방(黜榜)당한 이후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고 방랑하면서 시작에 진력하였다. 그의 시는 두보(杜甫)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를 배워 시어(詩語)의 뜻이 지극함에 이르고 구법이 아름다워서 당대 및 후세의 대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유(張維)는 「석주집서(石洲集序)」에서 ‘그 문장이 이루어짐에 정경이 알맞고 성률이 모두 조화로와 대개 천기가 흘러 움직이지 않은 것이 없다[及其章成也, 情境妥適, 律呂諧協, 蓋無往而非天機之流動也]’고 하여 천기의 유동함과 정경의 교융을 높이 평가하였고 허균(許筠)도 그의 시사(詩詞)의 아름다움과 시의 유장한 여운을 칭송하였다.
김득신(金得臣)은 『종남총지(終南叢志)』 24에서 관각의 대가인 정사룡(鄭士龍)도 고시 장편에는 공교롭지 못했으나 ‘오직 석주 권필(權韠)만이 고시체에 깊이 밝아 그의 「충주석(忠州石)」과 「송호수재((送胡秀才)」 등의 시편은 빼어난 가작[唯權石洲深曉古詩體, 其「忠州石」ㆍ「送胡秀才」等篇, 絶佳]’이라고 칭송하여 그의 장처가 장편고시에 있음을 말하였다.
그의 대표작 증의 하나인 「충주석(忠州石)」을 보기로 한다.
忠州美石如琉璃 | 충주의 좋은 돌 유리와 같아서 |
千人劚出萬牛移 | 천 사람이 캐내어 만 마리 소로 옮기네. |
爲問移石向何處 | 묻노니 어디로 이 돌을 옮기는가? |
去作勢家神道碑 | 가져다가 세도가의 신도비를 만든다네. |
神道之碑誰所銘 | 신도비 쓰는 이 그 누구인가? |
筆力倔強文法奇 | 필력도 굳세고 문체도 기이하네. |
皆言此公在世日 | 모두들 말하네, “이 분은 살아계실 적에 |
天姿學業超等夷 | 높은 자질과 학문은 무리보다 뛰어났고, |
事君忠且直 居家孝且慈 | 임금을 섬김에 충직하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자애로왔네. |
門前絶賄賂 庫裏無財資 | 문전에는 뇌물이 끊기고 창고에는 재물도 없었다네. |
言能爲世法 行足爲人師 | 말은 능히 세상의 법도 되고 행실은 남들의 사표가 되었네. |
平生進退間 無一不合宜 | 살아 생전 나아가고 물러남에 한 가지도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네. |
所以垂顯刻 永永無磷緇 | 비석에 이름을 크게 새긴 까닭은 영원토록 아니 닳게 함이라네.” |
此語信不信 他人知不知 | 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남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
遂令忠州山上石 | 부질없이 충주의 산돌을 |
日銷月鑠今無遺 | 날로 깎고 달로 녹여 이제는 없다네. |
天生頑物幸無口 | 천생으로 저 돌은 입이 없어 다행이지, |
使石有口應有辭 | 만약 입이 있었다면 응당 말이 있었으리. |
「충주석(忠州石)」은 장편고시의 형식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의 「청석(淸石)」을 본받아 지은 것으로 당시 부패한 사대부들의 위선과 가식적인 생활의 이면을 폭로한 대표적인 시작이다. 이 외에 「고의(古意)」, 「행로난(行路難)」 등도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권필(權韠)이 장편에 특장이 있다고 한 제가들의 평가도 권필(權韠)의 높은 풍자성과 예술성에 공감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당대 현실에 대하여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는 것은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별집(別集)을 편찬하면서 풍자가 너무 심한 것과 승려들과 화답한 시 500여수를 산삭(刪削)하고 문집에 싣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권필(權韠)이 이처럼 장편고시의 형식을 이용하여 현실 풍자를 일삼은 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과 스승 정철(鄭澈)의 유배, 광해군의 폭정과 인목대비의 유폐 등 당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품이 본래 올곧고 세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외척 유씨(柳氏)들의 전횡을 비판하다. 유배의 고초를 겪는 등 순탄치 않은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명한 「궁류(宮柳)」【原題는 「聞任叔英削科」】 시도 이러한 기질과 유관한 것임은 물론이다.
권필(權韠)이 스승인 송강 정철(鄭澈)의 무덤에 쓴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은 정철(鄭澈)의 사설시조인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사의(辭意)를 따서 인생의 무상함을 피력한 절창(絶唱)으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와 비견되곤 한다. 이 시는 정경(情境)이 혼융되고 여운이 오래도록 가는 수작으로 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들에 의하여 널리 구송되기도 하였다.
空山木落雨蕭蕭 | 빈 산에 낙엽지고 부슬부슬 비내리니 |
相國風流此寂寥 | 상국의 풍류도 이처럼 쓸쓸하구려. |
惆悵一杯難更進 | 애달퍼라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렵건만 |
昔年歌曲卽今朝 | 지난 날의 그 노래 오늘을 두고 지었음이라. |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21에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와 이 시를 비교하여 석주의 수구(首句)는 마치 옹문(雍門)의 거문고 소리가 홀연히 귀를 놀라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하고[盖權之首句, 有如雍門琴聲忽然驚耳] 이어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와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격조는 권필(權韠)의 시가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雖難優劣, 然格調則權勝].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통하여 그의 탁월한 시재(詩才)를 과시하고 있거니와, 석주(石洲) 권필(權韠)도 그가 제작한 「주생전(周生傳)」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보지 못한 사(詞)의 솜씨를 시범함으로써 시인(詩人)은 소설류(小說類) 작품을 제조할 때에도 시의 기능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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