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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275. 종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75. 종

건방진방랑자 2020. 5. 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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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종각가장풍(宗慤駕長風)

장쾌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 나라 때 종각의 숙부(叔父) 종병(宗炳)이 고상한 뜻을 가져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종각이 어렸을 적에 종병이 그의 뜻을 물으니, 종각이 답하기를, “저는 큰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큰 파도를 깨뜨리고 싶습니다[願從乘長風 破萬里浪破萬里浪].” 하였다. 송서(宋書)76 종각열전(宗慤列傳)

 

종각지(宗慤志)

종각(宗慤)은 남조(南朝) 때 송() 나라 사람으로 자()는 원간(元幹). 어릴 적에 그의 숙부가 뜻을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고 싶습니다[願從乘長風 破萬里浪破萬里浪]” 하였다.

 

종각초승파랑풍(宗慤初乘破浪風)

웅혼한 기백과 원대한 뜻을 지니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의 종각(宗慤)이 소년 시절에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부수고 싶다[願承長風破萬里浪].”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76

 

종개(悰愷)

()의 두종(杜悰)과 진()의 왕개(王愷)를 가리킨다.

 

종거(鍾簴)

종묘에 설치한 악기(樂器). 당 나라 장수 이성(李晟)이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한 뒤에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에, “종거가 놀라지 않고 종묘의 모양이 전과 같습니다[鍾簴不驚 廟貌如故].” 하는 구절이 있었다. / 인용: 鞍峴歌(김창흡)

 

종거삼유재(鍾簴森猶在)

()는 종()을 받치는 기구이니 종 받침대가 수북하다는 말은 예악이 예전과 같이 태평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종경릉(鐘竟陵)

명나라 경릉(竟陵) 사람 종성(鍾惺)인데 자는 백경(伯敬)이다. 만력 연간에 진사(進士)로 벼슬은 복건제학(福建提學)에 이르렀으며, 그 시가 유심(幽深)하고 고초(古峭)하여 담원춘(譚元春)과 제명(齊名)하여 경릉체(竟陵體)라 불렀음.

 

종계(宗系)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말한다. 고려 말 윤이(尹彝)가 중국에 가서 이성계는 고려의 역신(逆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며, 연달아 네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았다.”라고 하자, 대명회전(大明會典)등에 그 내용이 실려, 조선 초부터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선조대(宣祖代)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 인용: 題自庵詩帖(윤근수)

 

종고비양조(鐘鼓非養鳥)

종고는 종과 북 등의 악기를 이른다. 옛날에 해조(海鳥)가 노() 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노 나라 임금은 그를 모셔다가 종묘에서 잔치를 베풀어 순() 임금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고기 등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눈이 부시고 근심 걱정이 생기어 한 점의 고기와 한 잔의 술도 먹지 못한 채로 3일만에 죽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

 

종고향(鍾鼓饗)

종고(鍾鼓)는 쇠북과 가죽북으로, ‘풍악을 울리며 호사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종공(宗工)

존관(尊官)을 말한다. 서경(書經)주고(酒誥)백료와 서윤과 아복과 종공이다[百僚庶尹惟亞惟服宗工].”이라 보인다.

 

종과(種瓜)

()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候)가 되었다가 전 나라가 망하자 청문(靑門)에 참외를 심어 생활하였다.

 

종군(終軍)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 18세에 무제(武帝)에게 상소하여 알자급사중(謁者給事中)이 되었고, 문학과 언변이 매우 뛰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발탁되었고, 나중에는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남월왕(南越王)을 설득하여 한()의 내속(內屬)이 되기를 허락받음으로써 천자로부터 큰 은총을 받고 명성이 천하에 떨쳤으나, 이윽고 남월왕의 재상인 여가(呂嘉)의 반란으로 그곳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때 나이 20세였다. 한서(漢書)卷六十四

 

종군소(終軍少)

한 나라 무제 때 종군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소를 올려서 갓끈 하나를 주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하였다. 한서(漢書)64종군전(終軍傳)

 

종군소다기(終軍少多氣)

한 무제(漢武帝)때에 종군은 나이 18세로 박사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었고, 20여 세에는 간대부(諫大夫)에 발탁되었는데, 이때 한 나라에서 남월(南越)과 화친하기 위해 남월에 사신을 보내려고 하자, 종군이 천자에게 긴 밧줄을 내려주면 반드시 남월왕(南越王)을 묶어서 궐하(闕下)에 끌어오겠다며 사신 가기를 자청하여, 마침내 그것에 사신으로 가서는 남월왕을 잘 설득하여 한 나라에 내속(內屬)하겠다는 허락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남월의 정승 여가(呂嘉)의 반역에 의하여 그 곳에서 남월왕와 함께 살해되고 말았다. 한서(漢書)卷六十四

 

종군약관청장영(終軍弱冠請長纓)

()나라 종군(終軍)20세의 나이에 무제(武帝)에게 글을 올리기를, “긴 올가미 하나를 주면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와 남월왕(南越王)의 머리를 베어다가 바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종금시부고(從今矢不告)

시골에 내려와 사는 즐거움을 혼자서 온전히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考槃)그릇 두드리며 언덕에서 노래하니 대인이 은거하여 사는 곳이로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생활이지만 길이 맹세코 남에게 알리지 않으리라[考槃在陸 碩人之軸 獨寐寤宿 永矢弗告].”라고 하였다.

 

종기(鍾期)

종자기(鍾子期)인데 백아(伯牙)와 종자기의 고사를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춘추시대(春秋時代) 거문고의 명인 유백아(兪伯牙)의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를 말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이 없다고 하면서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孝行覽 본미(本味)

 

종기사(鍾期死)

종자기와 백아(伯牙)는 모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람인데,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그 소리를 듣고서 백아의 심정을 환히 알았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종남경(終南逕)

종남첩경(終南捷逕)의 준말로, () 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이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자 세상 사람들이 그를 경모(敬慕)하여 그의 이름이 높이 알려져서 벼슬길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종남산 속에 있는 것이 벼슬길의 첩경이 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당서(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

 

종남산(終南山)

당나라 서울의 남산이 종남산이다.

목멱산(木覓山) 즉 서울의 남산을 가리킨다.

장안(長安)의 남산이다.

 

종남엄로(終南儼老)

당나라 종남산에 지엄(智儼)이란 고승(高僧)이 있었다.

 

종남첩경(終南捷徑)

출세(出世)와 영달(榮達)의 지름길. 목적 달성의 지름길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종남홍동(終南澒洞)

근심이 끝없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종남은 종남산을 이른 말이고, 홍동(鴻洞)은 연속된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 시에 근심의 끝이 종남산과 가지런하여, 연속되는 근심을 걷을 수가 없네[憂端齊終南 鴻洞不可掇].”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陸詩集)卷四

 

종담(鍾譚)

종성(鍾惺)과 담원춘(譚元春)을 말하는데, 다같이 명() 나라 경릉(竟陵) 사람으로, ()에 조예가 깊어 고시귀(古詩歸)ㆍ당시선(唐詩選) 등을 평선(評選)하였다.

 

종대사분(宗岱祠汾)

한 무제(漢武帝) 때 분음에서 보정(寶鼎)을 얻고 나서는 감천궁(甘泉宮)에 분음사(汾陰祠)를 세워 제사를 지낸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천자의 의식을 말한다.

 

종동기수거(鱐腒棄繻去)

() 나라 종군(終軍)이 시골서 서울로 가는데 관()에 들어갈 때에 지키는 관원이 백부(帛符)를 주면서, “이것을 가져야 뒷날 관에 나올 때에 증명이 된다.” 하였다. 종군은 그것을 집어 던지며, “내가 나올 때에 임금의 명령으로 절()을 가지고 올 터인데 이것은 필요 없다.” 하였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콩을 심으면 콩을 얻음. 원인에 따라 그에 맞는 결과가 생김

 

종랑(縱浪)

방랑(放浪)과 같음. 도잠(陶潛)신석시(神釋詩),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라고 보인다.

 

종래분욕폐양지(從來忿欲蔽良知)

원래 위징(魏徵)은 태자 건성(建成)을 섬겨 태종을 제거하려 하다가 도리어 태종의 세력에게 패하여 건성은 살해되고 위징은 잡혔었는데, 태종이 그의 어짊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그러나 위징에 대한 구원(舊冤)이 남아 있다가 지혜가 가려져 만년에 위징을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종려(種蠡)

춘추시대(春秋時代) ()의 대부 문종(文種)범려(范蠡).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를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들이다.

 

종령초격문(鍾靈草檄文)

일단 은둔생활을 끝내고 산을 나간 사람은 그 산의 신령이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옛날 주언륜(周彦倫)이 북산(北山)에 숨어 있다가 천자의 부름을 받고 산을 나가 해염 현령(海鹽縣令)이 되었는데, 뒤에 그 산을 또 찾으려하자 공치규(孔稚珪)가 북산 신령의 뜻을 빌려 주언륜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 역로에다 공문을 발송했다는 뜻의 북산이문(北山移文)를 쓰면서 그리 말하였다. 문선(文選)

 

종뢰(宗雷)

남조 송(南朝宋) 때에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각각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에 은거하였던 은사 종병(宗炳)과 뇌차종(雷次宗)을 합칭한 말이다.

 

종률(鍾律)

황종(黃鍾)의 율()을 말한다. () 나라 사람 예복(倪復)의 종률통고(鍾律通考)가 있다.

 

종리춘(鍾離春)

제 선왕(齊宣王)의 부인인 무염읍의 여자. 그는 둘도 없는 추녀(醜女)였다고 한다. 열녀전(列女傳)』 「종리춘전(鍾離春傳)

 

종맹(宗盟)

천자와 제후(諸侯)와의 회맹(會盟)’을 말한다.

 

종명정식(鐘鳴鼎食)

종을 울려 가족을 모으고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해먹는 집. 부하고 귀한 사람들의 생활을 말한다.

 

종백(宗伯)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별칭이다.

 

종변객관어(縱辯客觀魚)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다리 위에 놀면서 한가롭게 노는 고기, 이것은 고기의 즐거움이다.” 하니, 혜자가 그대가 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하자, 장자(莊子)그대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하였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종병(宗炳)

남조 송(南朝宋)의 은자(隱者)로 서(), (), ()의 명인이었으며 노장학(老莊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연사(蓮社)의 고현(高賢) 중의 한 사람으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고승(高僧) 혜원(慧遠)과 노닐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형산(衡山)에다 초막을 짓고 살다가 병이 들어 강릉(江陵)으로 돌아온 뒤,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방 안에 가득 걸어 놓고 감상했던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93 종병전(宗炳傳)

 

종병사(宗炳社)

남조(南朝) () 나라 종병이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은거하여 산수를 찾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일찍이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뇌차종(雷次宗)ㆍ혜원(慧遠)ㆍ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 18인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함께 염불하였다. 곧 은거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풍월을 즐기는 청아한 모임을 말한다.

 

종부(鍾阜)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에 있는 금릉산(金陵山). 전설 속의 산으로 북쪽의 추운 지방에 있으며 종산(鍾山)이라고 한다.

 

종사(宗師)

존숭할 만한 스승이란 뜻이다. / 인용: 五學論(정약용)

 

종사(從事)

술의 별명이다. () 나라 환온(桓溫)의 주부(主簿)가 술을 잘 분별했는데, 좋은 술을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고, 나쁜 술을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였다 한다. 사문유츼(事文類聚)』 「연음부(燕飮部)

 

종사도청제(從事到靑齊)

좋은 술을 먹고 취해서 울적한 기분을 달래 보라는 말이다. () 나라 환온(桓溫)이 술을 마실 때마다 품평을 잘 하는 주부(主簿)가 먼저 술을 맛보고는, 좋은 술에 대해서는 靑州從事라 하고 시원찮은 술에 대해서는 平原督郵라고 했다 하는데, 그 이유는 청주(靑州)에 제군(齊郡)이 있고 평원(平原)에 격현(隔縣)이 있는 것에 빗대어, 좋은 술은 배꼽 아래(臍下)에까지 이르고 나쁜 술은 그저 격막(膈膜) 근처까지만 간다는 뜻에서였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술해(術解)소식(蘇軾)의 시에 更向靑齊覓消息 要知從事是何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7 和錢穆父送別 幷求頓遞酒

 

종사복(螽斯福)

종사는 메뚜기인데 한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 하여, 왕후(王后)가 궁녀들과 화목하여 자손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주남(周南) 종사(螽斯)

 

종산(鍾山)

곤륜산(崑崙山)의 별칭이다. 중국 섬서(陝西)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아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그곳에서 산다고 하여 신선 세계의 대명사로도 쓴다.

중국 강소(江蘇)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육조(六朝) ()나라 때 주옹(周顒)과 공치규(孔稚圭)가 은거하던 곳이다. 주옹은 나중에 세상에 나가 회계군(會稽郡)의 해염현령(海鹽縣令)으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도성으로 가는 길에 종산에 들르려고 하자 공치규가 북산이문(北山移文)를 지어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종산괴유령(鍾山愧有靈)

남조 제()의 주옹(周顒)이 북산(北山), 즉 종산에 잠깐 은거했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산신령이 노했다는 내용으로 풍자한 공치규(孔稚珪)북산이문(北山移文)이 있다.

 

종산이문(鍾山移文)

종산은 남경(南京)에 있는 북산(北山)으로, 은자(隱者)가 은거하여 사는 산을 말한다. 육조(六朝) 때 송()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주옹(周顒)이 자신과 함께 종산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산에다가 이문을 새겨 주옹으로 하여금 다시는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後集 북산이문(北山移文)

 

종삼(從三)

의례(儀禮) 상복(喪服) 편에, “부인(婦人)은 삼종(三從)의 의()가 있고 전제(專制)의 도()가 없으므로, 출가(出嫁)하지 않았을 때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하였다.

 

종생계로(終生繫虜)

() 나라 때 사람인 종군(終軍)을 가리킨다. 무제(武帝) 때 종군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소를 올려 갓끈 하나를 주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하였다. 한서(漢書)64종군전(終軍傳)

 

종서(粽黍)

갈대 잎에다 쌀가루를 싸서 쪄 만든 떡. 음력 55일이면 만들어 먹었음. ()의 사람들이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대통에다 쌀을 담아 멱라수(汨羅水)에 던졌던 데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속제해기(績齊諧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종서(終徐)

한 무제(漢武帝)에게 직간(直諫)을 올린 종군(終軍)과 서악(徐樂)을 가리킨다. 흰 기린(白麟)이 잡혔을 때 종군이 상소한 글과,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위험성을 논한 서악의 상소문이 한서(漢書)65권 하()와 상()에 각각 실려 있다.

 

종선여등(從善如登)

착한 일을 쫓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말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말이다.

 

종선여류(從善如流)

()을 쫓는 태도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서슴지 않음. 서슴지 않고 착한 일을 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성우풍(從星雨風)

서경(書經)』 「홍범(洪範)서민은 별과 같다.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도 있다.” 했는데, 그 주에 기성(箕星)은 바람을 좋아하고 필성(畢星)은 비를 좋아한다.” 하였다.

 

종소(終宵)

밤새도록.

 

종소문(宗少文)

남조 송 때의 은사 종소문(宗少文)은 본디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일찍이 서쪽으로 형산(荊山)ㆍ무산(巫山)을 다 올라 구경하고, 남쪽으로 형산(衡山)에 올랐다가 인하여 형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뒤에 병이 들자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탄식하기를 늙고 병들어서 명산(名山)을 두루 구경하기 어려울 듯하니, 오직 누워서 유람을 하리라.” 하고는, 자신이 일찍이 유람했던 산들을 모두 방 안에 그려놓고 구경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남사(南史)卷七十五

 

종수(嵕岫)

장안(長安) 가까이 있는 명산인 구종산(九嵕山)인데, 광릉(光陵)이 있는 양주(楊州) 주엽산(注葉山)을 말하기도 한다.

 

종수탁타전(種樹槖駝傳)

유자후(柳子厚)가 지은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 “곽탁타라는 사람이 나무를 잘 가꿔 그 이치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옮겨 심을 때에 뿌리를 펴고 본 땅의 흙을 가져오고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하게 심어놓은 뒤에는 손대지 않아서 식물의 천성(天性)을 그대로 보존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이와 반대이므로 옮겨 심은 나무가 잘 살고 번성하지 못하는데, 이 이치를 정치에 옮긴다면 관리가 백성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자주 나와 간섭하니 백성이 관리의 명령을 전하고 접대하기에도 바쁜데 어느 겨를에 농사짓고 일하겠는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종신국륜(宗臣國倫)

종신(宗臣)은 명() 나라 때 문장가(文章家)이고 오국륜도 명 나라 때의 시인으로, 이들은 다 가정(嘉靖) 연간의 칠자(七子)로 유명하다.

 

종신모(終身慕)

맹자(孟子)의 말에, “종신토록 부모를 생각하는 이는 오직 순()이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 하였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종심(從心)

70. 마음을 따르다.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70세의 나이에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결코 정도(正道, 법도, 도덕적 규범)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종씨시품(鍾氏詩品)

종씨(鍾氏)는 양() 나라 사람 종영(鍾嶸), 자는 중위(仲偉). 시품(詩品)은 그가 한()ㆍ위() 이래의 시인 13인의 작품을 상ㆍ중ㆍ하로 우열을 논해 놓은 것. 양서(梁書)卷四十九남사(南史)卷七十二

 

종아채(從我蔡)

논어(論語)』 「선진(先進)진채(陳蔡)의 땅에서 나를 따르던 이들이 다 문하(門下)에 있지 않다[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종야(終夜)

밤을 마치다는 뜻으로 밤을 지새우다는 의미이다.

 

종어(鍾魚)

풍경(風磬)을 말한다.

 

종얼(宗孽)

종자는 큰아들의 뜻으로 학문의 정통에 비하고 얼자는 서자라는 뜻으로 학문의 분열된 가지를 비한 것이다.

 

종영(宗英)

종실(宗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의 뜻으로 쓰인다.

 

종영륵이(鍾英勒移)

종산은 남경(南京) 동쪽에 있는 북산(北山)을 달리 이른 것이고, 이문(移文)은 공문(公文)의 일종이다. 남조 송(南朝宋) 때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는데, 뒤에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다시 북산을 들르려고 하자, 그의 친구인 공치규(孔稚圭)가 그의 벼슬길에 나간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그를 거절하는 뜻으로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은 역로에 연기를 달려 보내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 한 데서 온 말이다.

 

종옥(種玉)

양백옹(楊伯雍)이라는 사람이 3년 동안 목마른 행인들에게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해 준 결과, 선인(仙人)으로부터 한 말의 옥 씨를 받아 수많은 옥나무를 길러 부유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수신기(搜神記)11

() 나라의 종요(鍾繇)와 진() 나라의 왕희지(王羲之)를 말하는데, 두 사람은 모두 서예(書藝)에 능한 사람이다.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희지의 자()는 일소(逸少)인데, 그는 늘 자칭하기를 내 글씨를 종요에게 비기면 항행(抗行)이 될 만하고, 장지초(張芝草)에게 비기면 안항(雁行)이 될 만하다.’ 하였다.” 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뜻이다.

 

종왕(鍾王)

중국의 명필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종요(鍾繇)

삼국 시대 위() 나라 사람. 자는 원상(元常). 서예가이자 정치가. 벼슬이 태부(太傅)에 이르렀고 조비(曹丕)가 황제가 된 다음 정릉후(定陵侯)에 봉해졌다. 팔분체(八分體)에 능했다. 호소(胡昭)와 함께 유덕승(劉德升)에게 글씨를 배웠다. 특이한 필체를 구사한 그는 특히 초서(草書)와 행서(行書)에 능하였으며, 예세(隸勢)라는 글을 지어 예서(隸書)를 쓰는 방법과 자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진서(晉書)卷三十六 위환열전(衛瓘列傳)

 

종용(從容)

유희. 노닐다. 즐기다. 조용한 모양, 말이나 또는 하는 것이 왁자지껄하지 않고 매우 얌전한 모양.

 

종용유상(從容有常)

안색, 행동 등을 바꾸지 않고 소신대로 행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종우방(鍾于房)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방성(房星)의 네 별을 천사(天駟)라고 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종유(鍾繇)

삼국 때 위나라 사람. 예서(隸書)의 명가(名家)이다.

 

종유금채(鐘乳金釵)

설원(說苑)우승유(牛僧孺)‘1천금을 주고 종유를 사서 복용하였더니 힘이 샘솟고, 또 노래 부르며 춤추는 기생이 많다.’고 자랑하므로 백거이(白居易)종유는 삼천 냥이요 금비녀가 열두 줄이라[鐘乳三千兩 金釵十二行].’ 한 시를 지어 보냈다.” 하였는데, 금비녀가 열두 줄이란 처첩(妻妾)이 많다는 뜻이다.

 

종응래대하(種應來大夏)

() 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하국(大夏國)에서 처음으로 포도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다.

 

종입수문(縱入脩門)

부고(訃告)를 받고 황급히 조정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종종(縱縱)은 총총(摠摠)과 같은 말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상사(喪事)에는 종종히 하고 길사(吉事)에는 절절(折折)히 한다.” 하였다. 수문(脩門)은 도성 문 혹은 대궐 문을 말한다.

 

종자(宗子)

왕자를 말한다. 장재(張載)서명(西銘)대군(大君)은 우리 부모의 종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종자(鍾子)

춘추시대(春秋時代)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의 연주를 가장 잘 이해했던 종자기(鍾子期)를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종자가남음(鍾子歌南音)

이 말은 좌전(左傳),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시찰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서, 유사(有司)에게 묻되, ‘남관을 쓰고서 얽매어 있는 자는 누구냐하니, 대답이, () 나라에서 바친 초() 나라 죄수입니다.’ 하였다.” 한 데 보인다. 종의는 진()에 있으면서 남음(南音)을 노래하였다.

 

종자기(鍾子期)

음률(音律)을 잘 아는 사람. 전하여 상대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 종자기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험준함(峩峩)이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말하기를 좋다! 양양(洋洋)함이 마치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급제를 말한다.

 

종장(鍾張)

삼국 때 위나라 종유(鍾繇)와 한() 나라 장지(張芝). ()은 예서(隸書)의 명가(名家), ()은 비백(飛白),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종장(宗丈)

집안 어른이라는 말이다.

 

종재번(種梓樊)

번중(樊重)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온후한 천성에 법도가 있었다. 기물(器物)을 만들기 위하여 가래나무와 옻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으나 세월이 흐르자 그것을 이용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번중전(樊重傳)

 

종적(蹤迹)

발자취를 말한다.

 

종정(鐘鼎)

종명정식(鐘鳴鼎食), 종을 울려 가족을 모으고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해먹는 집.

종정문자의 준말로 은()ㆍ주() 시대의 종정의 명()에 쓰인 대전(大篆) 등의 자체(字體)를 말한다.

 

종정고문(鍾鼎古文)

중국의 은ㆍ주(殷周) 때 종()과 솥 등의 철기(鐵器)에 씌어진 고문(古文)ㆍ주문(籒文)을 말한다.

 

종정기(鍾鼎紀)

공신의 기록을 말한다.

 

종정불증귀두소(鐘鼎不曾歸斗筲)

종정(鐘鼎)은 옛날 큰 종()이나 솥()을 만들어, 거기에다 국가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므로 훈공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그런 국가의 큰 훈공이 두소(斗筲)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탄식한 말이다.

 

종정운림(鍾鼎雲林)

종정은 벼슬아치이고 운림은 산림처사. 두보(杜甫)의 시에 鐘鼎山林各天性 濁醪麤飯任吾年이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종종(樅樅)

무뭇잎이 우거진 모양. 톱니처럼 깔쭉갈쭉한 모양

 

종종(淙淙)

물이 흐르는 모양, 금석의 소리

 

종종(從從)

수레의 방울소리, 여섯발 달린 개, 총총(從從) 총총이(從從爾)

 

종종상(種種相)

불교에서 쓰는 말인데 세상의 온갖 가지가지의 사물(事物)을 말한다.

 

종주(宗周)

주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데, 처음에는 호경(鎬京)이었으나 평왕(平王)이 천도(遷都)한 뒤에는 낙읍(洛邑)으로 바뀌었다.

 

종죽의속(種竹醫俗)

소식(蘇軾)녹균헌(綠筠軒)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으나 집에 대가 없게 할 수는 없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파리하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하나니 파리한 사람은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의 속됨을 다스릴 수 없다오[可使食無肉 不可使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九

 

종지(宗之)

정도전(鄭道傳)의 자이다.

 

종직(從直)

성은 구(), 자는 정보(正甫), 본관은 평해(平海), 양선(揚善)의 아들이다. 세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 세조 때 공조 판서 등을 지냈고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易學)ㆍ경학(經學)에 밝았다.

 

종체(終遞)

벼슬아치가 관직에서 죽음으로써 벼슬이 갈리는 일을 말한다.

 

종축(宗祝)

종묘(宗廟)의 제사를 맡은 관원인데, 전하여 예관(禮官)을 말한다.

 

종출(種秫)

고량(高粱) 씨를 뿌려 가꾼다는 말로, 술을 담가 먹는 것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화곽주부(和郭主簿)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이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종출요도무(種秫饒陶畝)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나가서 술을 담글 수 있도록 공전(公田)에다 모두 기장을 심도록 했던 유명한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93 은일전(隱逸傳)陶潛

 

종출흥(種秫興)

술을 담아 먹는 흥취를 말한다. ()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교관(敎官)에 취임하여 술을 담기 위하여 차조를 심었던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의 화곽주부시(화곽주부(和郭主簿))’에도 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이라는 구절이 있다.

 

종치장후등(種致將侯等)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ㆍ한()ㆍ강릉(江陵) 지방의 귤나무 천 그루를 가진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맞먹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천호후는 천호나 있는 넓은 땅을 영유한 제후를 말한다.

 

종파도(宗派圖)

황정견(黃庭堅)의 시파인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말한다.

 

종팽(宗祊)

나라 사당을 말한다.

 

종편거처(從便居處)

죄 지은 사람을 사면(赦免)하여 주고 서울 밖의 편리한 곳에 가서 살게 하던 일.

 

종풍(宗風)

선종(禪宗)의 교리. 불가의 용어로 일종(一宗)의 특유한 풍을 말하는데 선종(禪宗)에서 흔히 이 말을 쓴다. 이를테면 임제종풍(臨濟宗風), 조동종풍(曹洞宗風)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종형제(從兄弟)

사촌 형제를 말한다.

 

종혜(棕鞵)

은사(隱士)가 신는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신을 말한다.

 

종혜(椶鞵)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신을 이르는데, 옛날 은자(隱者)가 착용했다고 한다.

 

종회(鍾會)

삼국 시대 위() 나라 사람. 위말(魏末)에 진서 장군(鎭西將軍)이 되어 등애(鄧艾)와 함께 촉() 나라를 멸()하는 데 공이 커서 사도(司徒)가 되었으나, 등애를 모함하여 가둔 다음, 촉 나라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켰다가 부하의 손에 죽었음.

 

종횡가(縱橫家)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국(諸國)의 군주(君主)들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정책을 유세(遊說)하여 그들 여러 나라를 종()()으로 묶어서 경륜(經綸)하려던 외교가(外交家)책사(策士)모사(謀士)의 총칭. 합종책을 설()소진(蘇秦), 소진이 피살된 후 합종책을 깨기 위한 연횡책(蓮衡策)을 펴 성공한 장의(張儀)가 그 대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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