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사마천의 「여불위열전」을 비판함
청대 필원(畢元)의 교정본으로 재발굴된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제 우리가 감행해야 할 작업은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누가 왜 썼는가?
중국은 선진고경 중에서 『여씨춘추(呂氏春秋)』처럼 저작연대가 확실하고【‘유진팔년(維秦八年)’의 해석을 놓고 BC 239년이냐, BC 241년이야 하는 정도의 논란만 있을 뿐】, 또 직접적인 집필자는 아니더라도 그 책을 편찬하게 만든 인물의 역사성이 확실한 서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의 의식에서 소원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 서물이 방치된 채로 있었으며 청나라 때의 고증학자가 손을 대기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읽지 않았으며 따라서 별로 인용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원(畢沅 삐 위앤, Bi Yuan, 1730~1797)의 교정본, 『여씨춘추신교정(呂氏春秋新校正)』(건륭 54년, 1789)이야말로 『여씨춘추(呂氏春秋)』 재발굴의 효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렇게 냉대를 받았을까? 그 냉대에 관한 원인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매우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의 편찬사업을 주도한 여불위(呂不韋, ?~BC 235)란 인물에 대한 혐오감이나 천시에서 우리는 그 일차적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불위(呂不韋)라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사마천 『사기』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의존하고 있다. 사마천은 여불위(呂不韋)라는 인간의 생애와 행적을 디테일까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우리는 그 붓길의 문학적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력의 자유를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술은 한(漢) 무제(武帝) 때의 사건이며, 당시는 이미 진나라에 대한 가치관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진제국 창업의 적통을 세우는 어떠한 위업을 평가하는 사마천의 붓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100여년 밖에는 되지 않은 사건이라서 사마천은 매우 풍부한 정보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큼 사마천의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드라마틱한 문학적 상상력은 정교한 날조의 날개를 달 수 있었다.
위대한 비젼의 기업인과 색마의 야누스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과 미국을 무대로 해서 활약하는 거대한 기업인이 한 사람 있다고 하자! 그 기업인이 미국시민권을 소유한 어떤 탁월한 재능있는 교포가 한국에 와서 살면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 재능의 미래적 가능성이 탐나 그에게 막대한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엄청난 로비활동을 벌여 그를 로스앤젤레스 시장에 당선시킨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투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 시장의 아들이 원대한 포부가 있는 큰 인물임을 발견하고 대를 물려 그 아들에게 또 투자를 한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오바마와 같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아들이 대통령으로서 미국을 재건해 나가는 데 필요한 방대한 정치 백과사전을 선거 이전에 이미 완성한다. 그는 이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하여 하바드대학에 기금과 센터를 설치하고 전 세계의 위대한 학자들 3천여 명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편찬작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그 아들과 미국의 위상을 동시에 높여 놓았다. 이러한 행적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과연 이 거대한 기업인을 간통을 일삼는 하찮은 색마(色魔)로 동시에 기술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역사서술방법일까?
당대의 국제적 호상(豪商)인 여불위(呂不韋)가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에서 볼모로 와있던 진나라 왕손 자초(子楚)를 발견하고 쓸모있는 재목이라 생각되어 그에게 재정지원을 하고, 또 진나라 정비 화양부인(華陽夫人: 자초의 의붓엄마인데 후사가 없다)에게 로비활동하여 그 마음을 움직여 자초를 후사로 삼게 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자초가 여불위(呂不韋)가 사랑하던 한단의 절세미인 애첩을 탐내자, 그 애첩이 여불위(呂不韋)의 애를 밴 상황이라는 것을 속이고 자초의 정실로 맞이하게 한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임의성과 모략이 개재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선 자초가 눈치챌 수가 없었다면 거의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며칠상관의 사건일 텐데 과연 누구의 아이인지를 확언할 길이 없다. 결국 자초와 한단의 미녀 사이에서 난 아이가 정(政)이요, 그가 후세의 진시황이라고 한다면, 사마천은 「여불위열전」의 드라마를 통해 진시황이라는 역사적 거물의 정통성을 일거에 무너뜨린 셈이다. 진나라 왕실의 핏줄을 이은 적통이 아니요, 당시 여러 나라를 떠돌던 한 상인이 조나라 여자와의 사이에서 난 호로자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마천이 날조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한나라의 항담(巷談)을 지어내는 이야기꾼(說話人)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곽말약(郭沫若)은 한고조의 부인 여후(呂后)가 천하를 취하면서 여씨를 정통의 핏줄로 높이기 위한 전설로서 조작되었다고 주장】. 따라서 여불위(呂不韋)는 진왕(秦王) 정(政)의 실부(實父)가 된다.
이 실부인 상국(相國) 여불위(呂不韋)와 진왕 정(政), 훗날의 진시황제와의 관계는 끊임없이 긴장감이 감돌 수밖에 없다. 그 애증의 드라마 속에서 결국 자결로써 생을 마감하는 여불위(呂不韋)의 비감어린 생애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스토리를 흠상하는 것보다도 더 애절한 감흥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사기』 열전이라는 대하드라마의 저자로서 사마천은 대 히트작을 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진시황과 여불위의 관계가 그런 수준의 것이었을까?
더구나 진시황의 실모인 한단 미녀가 태후가 된 후에도 여불위(呂不韋)와 계속 간통하고, 끊임없는 색정을 밝혀 그러한 불륜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한 여불위(呂不韋)가 ‘자지’ 하나의 꼴리는 힘으로 큰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는[以其陰關桐輪而行] 노애(嫪毐)라는 황당한 놈을 환관으로 둔갑시켜, 진시황의 엄마이자 자기 옛 애첩이었던 태후의 섹스 파트너로서 집어넣어준 이야기, 그로 인하여 온갖 추행이 전개되고 그러한 드라마로 인하여 여불위(呂不韋)에게 몰락의 비극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 설화(說話) 결구(結構)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것은 한나라 장안(長安)의 시장에서 떠드는 약장수의 이야기일 수는 있겠으나 정사(正史)의 사료로서 우리가 그대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
이러한 이야기 때문에 여불위(呂不韋)라는 인간의 가치가 코믹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가치마저 코믹하게 하락되고 말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그토록 권위가 있었고, 사마천의 붓길은 『여씨춘추(呂氏春秋)』를 2천 년간 인간의 무지 속에 파묻어 두는 데 진실로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제10장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논함
모든 다양성을 포용하는 일(一)
『한서』 「예문지」는 『여씨춘추(呂氏春秋)』 26편(二十六篇)을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名家), 묵가, 종횡가 등 그 어느 분류에도 끼지 못하는 잡가자류(雜家者流)로 규정하고 있다. 그 바람에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일정한 견해나 사상의 족보가 박약한 잡서(雜書)로서 인상 지워지는 경향이 강했다. ‘잡(雜)’이라는 어휘 속에는 분명 천시하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곽말약도 『십비판서(十批判書)』 속에서 ‘잡(雜)’이라는 명칭 속에는 악의가 숨겨져 있다고 지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서』 「예문지」의 분류로써 일논(一論)하자면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유가’로써 들어갔어야 한다. 중국문명의 정통의 위치를 확보했어야만 했을 서물이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당대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있는 것은 잡(雜)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잡 속에서 어떤 통일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그 위대한 측면을 간파해야 한다. 그것은 시대적 분위기의 정직한 반영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통일제국의 비젼이 있었다. 그 비젼을 위해서는 여하한 사상경향도 가릴 여가가 없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잡한 성격이야말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강점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 스스로가 변론하고 있는 대목을 한번 살펴보자. 「심분람(審分覽)」 「불이(不二)」편에 쓰여 있다.
많은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의견을 다 좇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나라는 며칠이 안 가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聽羣衆人議以治國, 國危無日矣.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노담(老聃)은 유(柔: 노자가 말하는 부드러움)를 귀하게 여기고, 공자는 인(仁)을 귀하게 여기고, 묵적(墨翟)은 렴(廉: 물질적 생활의 검약)을 귀하게 여기고, 관윤(關尹: 전설적 도가사상가)은 청(淸: 삶의 깨끗한 소박성)을 귀하게 여기고, 자열자(子列子)는 허(虛)를 귀하게 여기고, 진병(陳騈: 전병田騈이라고도 한다)은 제(齊: 생ㆍ사의 한 이치, 제물齊物의 제)를 귀하게 여기고, 양생(陽生: 양주楊朱)은 기(己: 위아爲我의 이기적 주장)를 귀하게 여기고, 손빈(孫矉)은 세(勢)를 귀하게 여기고, 왕료(王廖: 병권모가兵權謀家, 진목공秦穆公을 섬긴 내사료內史廖)는 선(先: 실전에 앞선 계략이 중요하다)을 귀하게 여기고, 아량(兒良: 전국시대의 병가兵家)은 후(後: 계략보다 실전이 중요하다)를 귀하게 여겼다. 이 열 사람을 보라! 모두 제각기 일가를 이룬 천하의 호걸들이다.
何以知其然也? 老耽貴柔, 孔子貴仁, 墨翟貴廉, 關尹貴淸, 子列子貴虛, 陳騈貴齊, 陽生貴己, 孫臏貴勢, 王廖貴先, 兒良貴後. 此十人者, 皆天下之豪士也.
그러나 생각해보자! 싸움에서 왜 징과 북을 두드리는가? 그것은 전투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귀를 통일시켜 행동의 질서를 주기 위함이다. 나라가 법령을 제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기교를 발휘하도록 하지 않으며,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도 아둔한 상태로 두지 않는 것은 대중의 지력을 하나로 모으려 하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자라고 함부로 나서지 않게 하며 두려워하는 자를 쳐지지 않게 하는 것은 힘을 하나로 모으려 하기 때문이다.
有金鼓, 所以一耳, 必同法令, 所以一心也, 智者不得巧, 愚者不得拙, 所以一衆也, 勇者不得先, 懼者不得後, 所以一力也.
그러므로 하나로 모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하나로 모아지면 나라가 편안해지고,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대저 만 가지로 다른 다양한 것들을 가지런히 하나로 모으고,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정교한 자나 거친 자나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하나의 원천(구멍)에서 나온 것 같이 만드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故一則治, 異則亂, 一則安, 異則危. 夫能齊萬不同, 愚智工拙, 皆盡力竭能, 如出乎一穴者, 其唯聖人矣乎!
지혜는 있으나 아랫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술(術)이 없고, 능력은 있으나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는 가르침의 방책이 부족한 채, 강압적인 수단으로 속성(速成)만을 강요하고, 관행으로 내려오는 구습(舊習)에만 의지한다면 국가통치의 성공이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無術之智, 不敎之能, 而恃彊速貫習, 不足以成也.
춘추전국시대의 제자(諸子)들은 모두 자가(自家)의 학설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것을 고집하고 타설을 배척하는 것을 논쟁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놀라웁게도 학설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있다. 십가(十家)의 학설을 한 큐에 꿰어 말하는 품새도 이전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각 학파의 학설의 주요테마를 하나의 단어로 요약해서 말하는 것도 이미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시대에는 각 학파의 주장이 명료하게 하나의 특징적 개념으로 정리될 만큼 담론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자(荀子)에게도 「비십이자(非十二子)」라는 편이 있지만 이것은 열두 사상가를 비난하기 위하여 나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각가의 특징을 비난하기 위하여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주장을 제각기 특색있는 학설로서 관용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학설을 그들의 주장대로 다 쫓아가는 것은 위국(危國: 나라를 위태롭게 함)의 첩경이다. 문제는 이 다양한 학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종합하여 하나의 구심체로 끌어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多) 속에서 일(一)을 끄집어 내는 것이요, 잡(雜)을 전일(專一)한 그 무엇에로 통합시키는 것이다. 일(一)은 타를 배척하는 일이 아니요, 타를 포용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다(多)를 다 소화하여 일(一)로 묶어내는 것, 그것을 ‘제만부동(齊萬不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지공졸(愚智工拙)’이 모두 ‘진력갈능(盡力竭能)’하게 만드는 것, 그 모든 다양한 재능과 사상이 하나의 광원에서 프리즘을 투과하여 나온 무지개처럼 창공에 펼쳐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구습(舊習)의 강압(强壓)에 의하여 세계를 지배해서는 새로운 통일제국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주(周)나라는 진(秦) 소왕(昭王) 말년, BC 256년에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으며, 주나라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이 이미 진나라로 귀속되었다.
그리고 진왕 정(政)은 확고한 통일기반을 마련했으며 육국(六國: 초楚ㆍ연燕ㆍ제齊ㆍ한韓ㆍ위魏ㆍ조趙)의 멸절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가냘픈 운명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대제국의 탄생을 임박케 하는 진왕 정의 말발굽이 중원의 대지를 뒤흔들기 직전, 진나라의 중부(仲父) 여불위(呂不韋)는 바로 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불위(呂不韋)는 이미 진제국의 탄생을, 정이 태어나기 전부터 예상했고 마스터 플랜을 짰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꿈대로 실현되어 갔고, 그 최종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거대한 서물을 편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력으로 인한 통일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세를 통찰할 줄 아는 그랜드한 비젼의 사나이 여불위는 지금 춘추ㆍ전국의 제자백가의 외침 속에 전승되어온 다양한 사상의 통일이 없이는, 무력에만 의존하는 제국의 성립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냘픈 풍전등화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
『여씨춘추(呂氏春秋)』의 편찬상황에 관한 사마천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의 기록을 한번 훑어보자!
이 시기에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 위나라 안리왕安釐王의 아우),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초나라의 귀족),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아우),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제선왕齊宣王의 이복동생 전영田嬰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의 선비들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았고 빈객(賓客) 좋아하기를 서로 경쟁하였다. 여불위(呂不韋)는 진나라가 강성하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 그 여타 나라와 같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었다. 그래서 또한 선비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후대하였는데 식객(食客)이 3천 명에 달하였다.
當是時, 魏有信陵君, 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 齊有孟嘗君, 皆下士喜賓客以相傾. 呂不韋以秦之彊, 羞不如, 亦招致士, 厚遇之, 至食客三千人.
이 시기에 제후국들에는 변론을 잘하는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순경(荀卿)【순자를 일컫는다. 『여씨춘추』가 편찬될 당시 제나라 직하학파의 총장을 지낸 바 있는 순자는 생존해 있었다. 초나라 재상인 춘신군(春中君)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있다가 춘신군이 죽자[BC 238] 관직을 물러난 뒤 계속 난릉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저작에 몰두하였다. 아마 순자의 제자들(직하학파계열) 중 상당수가 여불위의 식객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의 무리들은 글을 지어 천하에 유포하였다【순자계열의 사상가들이 여불위 집단에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是時諸侯多辯士, 如荀卿之徒, 著書布天下.
여불위(呂不韋)는 이에 자기에게 모여든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식견을 집필케 하였다. 이들의 논문을 모아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편집했는데, 모두 20여 만 언이나 되었다. 여불위(呂不韋)는 이로써 천지만물에 관한 고금(古今)의 일이 다 구비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이 책을 이름 지어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자 그것을 함양(咸陽)의 성문에 진열해놓고 그 위에 천금을 놓았다. 그리고 제후국의 유사(游士)나 빈객(賓客) 중에 여기에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널리 포고하였다.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爲「八覽」ㆍ「六論」ㆍ「十二紀」, 二十餘萬言. 以爲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布鹹陽市門, 懸千金其上, 延諸侯遊士賓客, 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
이 기사로써 우리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편찬의 실제정황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 | 『여씨춘추(呂氏春秋)』는 한 사람의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라, 당시 중원 각국에 포진되어 있던 다양한 사상가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다. |
2) | 다양한 사상가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사상에 대한 존중이 있다. |
3) | 이들 사상가들에게 일정한 테마를 주고 각기 집필케 한 후에 따로따로 집필된 논문들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이다. |
4) | 편집의 체계가 치밀하여 한 글자의 가감도 있을 수 없다고 자랑할 정도의 전체 틀을 갖추었다. |
이상의 정황은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텍스트의 실상과 그대로 부합된다. 「십이기(十二紀)」는 12권이며 각 권마다 5편씩 할당되어 총 60편이 있으나 마지막에 「서의(序意)」 편이 삽입되어 61편이고, 「팔람(八覽)」은 8권이며 각 권마다 8편씩 할당되어 64편이 될 텐데, 「서의(序意)」 편이 삽입되는 바람에 「유시람(有始覽)」에서 한 편을 감하여 63편이 되었고, 「육론(六論)」은 6권이며 각 권마다 6편씩 할당되어 36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전체가 26권 160편인데, 이 숫자에도 편집의도가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 각 편마다 대강의 균일한 분량이 정해져 있어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상가들의 논의를 하나의 서물로서 결집시키는 어떤 특수한 체계를 갖춘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잡가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어떤 내면적 통일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명의 유래
그런데 『사기』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편집체계가 「팔람」, 「육론」, 「십이기」의 순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본서의 편집체계의 원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중요한 언급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십이기」, 「팔람」, 「육론」의 순서이다. 즉 「십이기」가 앞으로 와있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보통 『여람(呂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팔람(八覽)」이 가장 앞으로 와있는 상황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팔람」의 제1람이 「유시람(有始覽)」으로 되어 있는데, 「유시람(有始覽)」의 내용이 전체 서물의 총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것을 경(經)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일곱 람과 육론(六論)이 전(傳)에 해당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역시 「팔람(八覽)」이 맨 처음에 오는 것이 이 책의 본면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텍스트의 문제에 관하여 이 자리에서 상론(詳論)하기는 어려우나, 「십이기」와 「팔람」, 「육론」은 좀 성격을 달리하는 서물이다. 「육론」은 「팔람」을 만들고 난 후에 거기에 편입되지 못한 논문들을 가지고 만든 속편과도 같은 성격의 서물이기 때문에 「팔람」과 「육론」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십이기(十二紀)」라는 것은 춘ㆍ하ㆍ추ㆍ동을 다시 맹(孟)ㆍ중(仲)ㆍ계(季)로 세분하여 일년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맹춘ㆍ중춘ㆍ계춘ㆍ맹하ㆍ중하ㆍ계하ㆍ맹추ㆍ중추ㆍ계추ㆍ맹동ㆍ중동ㆍ계동의 12달에 일어나는 일, 그리고 있어야 할 일들을 기록한 시령(時令)의 서물로서 매우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 이름은 바로 십이기(十二紀)가 춘추(春秋: 시간의 흐름)를 의미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국은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운영된다. 이러한 말이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시간과 인간사회의 사이에 너무도 시령을 무시하는 인위적 시스템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에게는 한 나라의 운영도 반드시 열두 달의 시령에 따라 움직여야 그 효율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전쟁을 농경이 시작되는 봄에 일으킬 수 없는 것이요, 죄인의 처형 또한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질 때 죄인의 목도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노 전 대통령의 서세(逝世) 소식을 접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 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마는 그는 적절한 시의에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릇 인도되어가는 민심을 바로잡고 역사의 정의로운 대세를 새삼 각인시켰다. 그리고 권좌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아무도 우리사회의 죄악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반성의 염을 촉구시켰다. 구한말에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의 의열지사(義烈之士)들이 있었으나 근자에는 자신의 업(業)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치인들이 너무도 없었다.
지공(至公)한 거사(去私)의 제국
여기 『여씨춘추(呂氏春秋)』 「십이기」의 시령사상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정치는 근본적으로 타이밍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시령의 사상은 천지자연(天地自然)과 인간(人間)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하늘의 기가 하강하고 땅의 기가 상등(上騰)하면서 생물이 맹동(萌動)하는 맹춘(孟春)의 달에는 시생(始生)하는 천지의 기운에 맞추어 전성(全性: 본성을 온전하게 함)하고 전덕(全德: 덕을 온전하게 함)해야 하며(「본생本生」 편), 욕망을 조절하여 장생의 길을 터득해야 하며(「중기重己」 편), 무편무당(無偏無黨)의 공도(公道)를 실천함으로써 천하를 한 사람의 사심으로써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천하가 되게 하며(「귀공貴公편), 사심(私心)을 버려야 한다(「거사去私」 편).
하늘은 사적인 마음으로 만물을 덮지는 않는다[天無私覆也]. 땅은 사적인 마음으로 만물을 품지 않는다[地無私載也]. 해와 달은 사적인 마음으로 불을 밝히지 않는다[日月無私燭也]. 사계절은 사적인 마음으로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四時無私行也]. 그 자연스러운 덕을 골고루 베풀어 만물이 다 같이 성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行其德而萬物得遂長焉].
황제(黃帝)가 일찌기 말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화려한 색채라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가볍고 따스한 옷이라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향기를 흠상해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쾌적한 주거라도 그 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된다고, 요(堯) 임금에게 아들이 열이나 있었어도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아니 하고 순(舜)에게 주었고, 순 임금에게 아들이 아홉이나 있었어도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아니 하고 우(禹)에게 주었다. 이 모든 것이 지공(至公)의 존중이다!
겉으로는 자연(Nature)과 인간(Human Society)의 합일을 말하고 있는 시령(時令)의 자연철학 같이 들리지만 그것이 소기하고 있는 바는 지공무사(公無私)한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설파하고 있다는 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위대한 소이연이 있다. 과거의 정치체제와는 다른 사적 권력의 개입이 없는 새로운 질서, 사유(私有)가 없는 제국의 질서, 그렇지만 이러한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를 필요로 한다는 현실적 요청은 하나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일인(一人)이 소유하는 천하가 아닌, 천하가 소유하는 천하[天下非一人之天下也, 天下之天下也], 과연 이러한 천하를 어떻게 일인(一人)이 없이 창조한단 말인가?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성립할 즈음에는 이미 강력한 진왕 정(政) 한 사람[一人]에 의한 제국의 제패가 눈앞의 현실로서 그려지고 있었다. 강력한 군주와 지공무사한 정치체제의 결합은 결국 군주의 무위(無爲)라는 도ㆍ법적 사유로 귀착된다. 이것이 후대에 황로사상(黃老思想)이라고 부르게 되지만 그 원형, 그 생생하고 진실한 요청의 실상을 우리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군주론: 집권의 요청과 견제
『여씨춘추(呂氏春秋)』가 말하는 군주론은 새롭게 중국문명에 등장하는 훗날의 진시황 정(政)에 대한 인정과 견제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군주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군주는 국정의 개별적 사안에 관여해서는 아니 된다. 정무의 만단(萬端)을 능력있는 신하들에게 맡겨야 한다.
2)
군도(君道)는 ‘정(靜)’, 신도(臣道)는 ‘동(動)’, 군도는 ‘인(因)’, 신도는 ‘위(爲)’. 군주된 자는 군ㆍ신의 구별을 확실하게 하고, 자신은 ‘무지무능(無知無能)’의 철학을 실천하면서 신하의 ‘유지유능(有知有能)’에 철저히 의거할 것.
3)
군주는 천박한 이목(耳目)의 시청(視聽)을 버리고, 번잡한 사려(思慮)를 중단하고(‘에포케epokhế’에 집어 넣는다), 성명(性命)의 정(情)을 따르고 오직 허정무위(虛靜無爲)의 양생(養生)만을 힘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주는 마음을 비울 수 있고, 마음을 비울 수 있기에 만기(萬機)를 총람(總覽)할 수 있으며, 또 신하들의 명(직분)과 실(실적)이 상부한가, 상부하지 아니 한가를 정확히 따져 그들을 통어(統御) 함으로써 실권을
유지한다.
이러한 군주의 무위론에서 상대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유능한 사 계급의 부상이다. 그리고 정치는 얼마나 유능하고 정직한 사(士)를 확보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결국 여불위(呂不韋)가 꿈꾼 새로운 제국의 질서는 편협한 법가의 좌파무리들에 의하여 망가져 갔다.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성립하면서 진시황은 새로운 진제국의 탄생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진시황은 여불위(呂不韋)의 품을 떠난다. 그리고 여불위(呂不韋)는 실각한다. 여불위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유언장으로 남기고, 권력의 암투 속에서 구구하게 생존할 생각을 하지 않고 깨끗하게 짐독(鴆毒)의 잔을 들이킨다. 결국 여불위(呂不韋)의 자결과 함께 진제국의 단명(短命)은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이상(理想)은 한제국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무위(無爲)의 제왕과 능력있는 사(士)의 유위(有爲) 질서는 실상 송대에나 내려와 그 청사진이 제대로 그려진다. 그러나 송대에도 그러한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과제 상황은 오늘의 동아시아문명의 정치현실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했다고 한들, 정치적 리더들이 만물을 사심 없이 휘덮는 하늘과도 같은, 만물을 사심 없이 품에 안는 대지와도 같은, 지공무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여불위(呂不韋)의 외침은 결코 공허한 울림은 아닐 것이다.
여불위의 비젼과 효 담론
여불위(呂不韋) 자신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평범한 사람이 여불위(呂不韋)에게 「십이기(十二紀)」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문신후(文信侯)【장양왕(莊襄王)으로 여불위가 자금을 댄 자초(子楚)를 말한다】 원년(元年)에 여불위는 승상(丞相)이 되었고 문신후에 봉하여졌다)가 이와 같이 대답했다.
나는 일찌기 황제(黃帝)가 그의 손자인 전욱(顓頊)을 교육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저 둥근 거대한 하늘이 있고 너의 발 아래는 저 네모난 거대한 땅이 있다. 너는 저 하늘과 땅을 본받아라. 그리하면 너는 백성들의 부모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嘗得學黃帝之所以誨顓頊矣, 爰有大圜在上, 大矩在下, 汝能法之, 爲民父母.
그리고 내가 또 듣기로도, 옛날의 깨끗한 치세에는 모두가 천지의 큰마음을 본받았다고 한다. 대저 십이기라고 하는 것은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를 밝힌 것이며, 장수와 요절, 길조와 흉조의 분별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십이기로써 위로는 하늘을 엿볼 수 있고, 아래로는 땅의 현실을 증험하며, 가운데로는 인간세를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면, 옳고 그름, 가(可)함과 불가(不可)함이 숨을 곳이 없어진다.
蓋聞古之淸世, 是法天地. 凡十二紀者, 所以紀治亂存亡也, 所以知壽夭吉凶也. 上揆之天, 下驗之地, 中審之人, 若此則是非可不可無所遁矣.
하늘의 본질은 순조로운 질서이다. 순조롭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할 수 있다. 땅의 본질은 확고한 떠받침이다. 확고하기 때문에 만물이 편안함을 얻는다. 사람의 본질은 거짓을 모르는 신험이다. 신험이 있기에 사람들이 서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천지인 삼자가 다 같이 마땅한 바를 얻으면 모든 것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도 절로 행하여진다[無爲而行]. 행하여진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법칙을 행하는 것이다. 객관적 법칙을 행하게 되면, 합리적 질서(理)를 따르게 되고, 인간의 사사로운 정욕을 평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의(序意)」
天曰順, 順維生, 地曰固, 固維寧, 人曰信, 信維聽. 三者咸當, 無爲而行. 行也者, 行其理也. 行數, 循其理, 平其私.
여기서 이미 우리는 여불위(呂不韋)라는 탁월한 비져너리(visionary)의 사심 없는 요청을 들을 수 있다. 군주에게는 무위를 요청하고, 신하에게는 합리(合理)와 거사(去私)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특기할 일은 『여씨춘추(呂氏春秋)』 본래 모습의 최초의 머릿권인 「유시람(有始覽)」 다음 권이 「효행람(孝行覽)」으로 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전 체계에서 ‘효(孝)’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효행람」의 「효행(孝行)」 편을 일별해보면 그것은 거의 현행 『효경』의 날개(翼: 주석의 의미를 포함)와도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여람(呂覽)』의 제1람 총론에 해당되는 「유시람(有始覽)」의 경문(經文)이 끝나고, 그것의 전(傳)에 해당되는 제2람의 첫머리를 「효행(孝行)」 편이 장식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라! 여불위(呂不韋)가 갈구한 새로운 제국의 사상질서의 실현을 위하여 ‘효(孝)’만큼 유용한 사회적 담론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불위(呂不韋)가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의 상응질서라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전제로 할 때, 효처럼 인간에게서 천지(天地)와 호흡하는 자연의 질서에서 출발한 구체적 덕성을 찾기도 어렵다.
‘대저 효라는 것은 하늘의 벼리요, 땅의 마땅함이요, 백성이 행하여야 할 바이다[夫孝, 天之經也, 地之誼也, 民之行也].’라는 『효경』의 메시지는 ‘위로는 하늘을 헤아리며, 아래로는 땅을 증험하며, 가운데로는 인간세를 살핀다[上揆之天, 下驗之地, 中審之人].’라는 여불위(呂不韋)의 「서의(序意)」의 메시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효’의 특징은 명백한 보편주의적 패러다임(universalistic paradigm)을 항상 과시한다는 것이다. 효는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인지될 수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든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예외적 상황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보편적 덕성의 면모를 지닌다. 이러한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보편주의적인 덕성이야말로 치세(治世)의 제1원리가 될 수가 있다.
그리고 효는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추구하는 무위론적 세계관과 합치한다. 효를 보편적 질서로서 한 국가가 실천하게 될 때 그 국가는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효경』에서는 ‘불숙이성(不肅而成)’ ‘불엄이치(不嚴而治)’라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것은 백성의 교화가 엄숙주의에 의존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고, 정교나 법령이 엄형주의에 의존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불위(呂不韋)는 ‘효’를 과거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적 치세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위지치(無爲之治)의 한 전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효경』과 진(秦)제국의 탄생, 저자는 여불위의 식객이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추상적 가치로써 인욕을 절제시키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간세의 새로운 보편주의적 질서를 설파함으로써 로마제국을 압도하는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효경』의 저자는 인간의 생리적 본능으로부터 고도로 추상화된 상징계의 도덕적ㆍ인문적 원리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효’라는 개념 하나로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효경』의 저자, 그 엑스(x)는 누구일까? 나는 감히 단언한다. 아니, 단언할 수밖에 없다. 그 엑스는 여불위(呂不韋)의 식객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간백(簡帛)자료가 출토된 이후 중국 고경의 상한선을 마구 올려잡는 경향이 있으나 『효경』의 경우, 그런 방식으로 올리기에는 너무도 명백한 양식의 한계가 있다. 최근 곽점에서 출토된 죽간 중에 현행 『예기』 속에 보존되어 있는 「치의」 편의 부동전본(不同傳本)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치의」편은 어떤 간략 주제를 전개하고 그 논리를 『시』나 『서』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마감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러한 양식이 『효경』과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효경』과 「치의」가 동시대의 작품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효경』은 「치의」의 양식은 취했으나, 「치의」의 잡다한 성격에 비해 아주 전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전체가 어떤 의도된 결구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치의」보다는 후대에 성립한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치의」에는 현실정치적 효과라는 것이 전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으나 『효경』은 효라는 일관된 주제를 ‘위정(爲政)’과 결합하여 ‘효치(孝治)’라는 정치적 개념을 창출해내고 있다.
『효경』은 분명 새로운 제국질서의 태동을 감지하면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앞서 어떠한 사상가가 집필한 작품이며,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서물로서 인용되었다는 것은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집한 학자군 속에 그 엑스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엑스가 증자학파 계열의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아사노 유우이찌(淺野裕一)는 증자문하의 사람이 전국말기에 공자의 ‘르쌍띠망(ressentiment, 막연한 분노)’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자에게 왕자(王者)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위장공작의 일환으로 『효경』을 썼다고 말한다. 공자를 허구적인 공자왕조의 개종(開宗)으로서 떠받들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공자 해원(解寃)의 선전 작품이라고 혹평하고 있다(『공자신화孔子神話』 제6장).
그러나 그의 시각은 너무 편협하다. 내가 『논어한글역주』에서 설파했듯이(1-147~156), 아사노는 ‘르쌍띠망’이라는 개념 자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부적절한 개념을 공자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그리고 공자와 『효경』이 르쌍띠망이라는 주제로 연결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효경』은 증자(曾子) - 맹자(孟子) 계열의 유교를 적통으로 하면서, 순자(荀子), 법가, 도가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한 엑스가 시세의 풍운을 감지하면서 만든 걸작품이고, 그것이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성립의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한 대에 까지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나 그 후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효경』만이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결국 동아시아문명을 효의 제국문명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효경』의 저자가 산 시대가, 에피쿠로스(Epikuros, BC 341~270) 나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Zenon, BC 336~264)과 같은 사상가들이 산 헬레니즘의 시대와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더대제로 인하여 제국이 출현하면서 폴리스가 코스모폴리스로 확대되고, 동서문명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견유학파(Cynics), 스토아학파(Stoics), 에피큐로스학파(Epicurean), 회의학파(Sceptics) 등의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다양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이들의 아타락시아(ataraxia, 안정)와 같은 양생의 논리, 선악의 초월, 그리고 이성과 절제를 가르치는 로고스적 세계관은 서구사상사에서 최초로 인생론과 우주론이 본격적 결합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신흥 로마문명의 새로운 정신질서의 바탕이 되었다.
여불위(呂不韋)의 비견과 더불어 진제국문명이 탄생되어가는 과정이나,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결국 카르타고를 제압, 지중해 제해권을 거머쥐면서 새로운 제국을 형성해가는 과정은 맞물려있다. 『효경』의 탄생과 바울의 서한문(書翰文)을 동차원에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둘 다 가장 지속적인 동·서문명의 제국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아니 비교될 수 없다. 효(Xiao)에도 부활(Resurrection)에도 다 신화적 측면이 있고, 다 인문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부활은 건강한 인문의 기준이 흔들리면 항상 신화로 퇴행한다. 그러나 효에 있어서의 신화는 강요된 정치적 세뇌일 뿐이며, 그러한 세뇌가 쇠퇴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세기에 있어서는 가장 비폭력적이고 자발적이며 상식적인 인문질서를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보다 안전하게 지속적일 수 있는 의식형태라고 사료된다. 광명천지에서 부활의 신화는 호박꽃처럼 한 철일 뿐 견지되기 어렵다. 그것은 우신(愚信)이다. 종교의 제도나 경전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 합리적인 도덕질서를 창조하는 데는 효 이상의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에게 너무도 상식화되어 있고,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 실체로서 감지하지 않을 뿐이다.
▲ ‘오년상방여불위(五年相邦呂不韋)’ 청동과(靑銅戈)
청동시대가 시작된 후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무기는 과(戈)였다. 은말주초(殷末周初)로부터 진한(秦漢)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병기(兵器)가 과였다. 우리가 쓰는 ‘전(戰)’이라는 글자에 ‘과(戈)’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도 과거 전쟁의 주무기가 과였음을 알 수 있다.
찌르는 용도만을 지닌 창모양의 것은 ‘모(矛)’라고 하는데 모에 비하여 과의 용도는 다양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돌출되어 있는 부분을 ‘원(援)’이라고 부르고 자루 역할을 하는 부분을 ‘호(胡)’라고 한다. 원의 반대편에 직각으로 나와있는 것을 ‘내(內)’라고 하는데, 내도 3면이 칼날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호부분에 구멍이 4개 나 있는데 내를 자루속으로 집어 넣고 그 구멍에 가죽끈을 통과시켜 단단하게 묶는다. 호와 원의 각도가 100°일때 가장 사람 목을 정확하게 벨 수 있다는 법칙을 고대인들은 발견했다.
지금 이 과의 배면에 ‘오년상방여불위조조사도승즙공인(五年相邦呂不韋造詔事圖丞蕺工寅)’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이것이 여불위가 실제로 사용하던 과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오년(五年)’이라는 것은 진왕(秦王) 정(政)의 5년(BC 242)이며, ‘상방(相邦)’은 상국(相國), 즉 재상이라는 뜻이다. ‘조사(詔事)’는 과를 제조한 무기제조창의 이름이며, ‘즙(蕺)’과 ‘인(寅)’은 제조한 사람의 이름이다. ‘승(丞)’과 ‘공(工)’은 이 두 사람의 직위를 나타낸다.
전문을 번역하면 이와같다: “BC 242년 재상 여불위께서 만드신 과, 조사도의 승 즙과 공 인이 들었다[五年相邦呂不韋, 造詔事圖丞蕺工寅].”
병기제조에 상국(相國)이 직접 관여하는 것만 보아도 진나라가 얼마나 무력에 힘쓴 나라인지 알 수 있다. 병기의 질도 탁월하다. 중국의 역사는 이와같이 사실(史實)을 전하는 유물들이 남아있어 그 실존성을 우리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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