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
공안국 (孔安國, 콩 안꾸어, Kong An-quo)
1. 효경자~부전야(孝經者~不傳也)
『효경』이라는 서물은 무엇을 뜻하는가? ‘효(孝)’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지고한 행위이며,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孝經者何也? 孝者, 人之高行; 經, 常也. |
이 첫마디는 역시 『효경』이라는 서물의 명호(名號)에 대한 해설로 보여진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經)’을 경전(canon)의 경으로 해석하고 있질 않다는 것이다. ‘경’이란 효가 항상스러운 인간세의 원리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반명사로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행의 근본[百行之本]으로서의 효(孝)는 더 없이 지고한 인간의 행위(高行)이며, 항상스러운 원칙이요 원리이다.
하늘과 땅이 있고, 그 속에서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래, 효도(孝道)라는 것은 자연히 생겨나게 마련인 것이다. 때마침 위로 명철한 군주가 있게 되면 거대한 교화가 마치 홍수가 범람하듯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철한 군주가 없게 되면 사도(斯道)는 멸절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게 되는 것이다. 自有天地人民以來, 而孝道著矣. 上有明王, 則大化滂流, 充塞六合. 若其無也, 則斯道滅息. |
여기 ‘대화(大化)’라고 하는 것은 풍속에 의한 사회의 교화를 의미한다.
‘육합(六合)’은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의 방위를 말하며 온 천하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 논조는 효라는 덕행의 교화(敎化)가 정치적 리더십(political leadership)의 유ㆍ무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미 효를 파악하는 관점이 매우 정치적이고 하이어라칼(hierarchical, 계급제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서(孔序)」가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전한 시기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미 전한대(前漢代)에 효의 파악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한대의 가족윤리나 일반적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단지 효도의 방류(滂流)를 군주의 효도의 실천이라는 좁은 인과에 국한해서 말하지 않고 ‘명왕(明王)’이라고 말한 것은, 명철한 리더십이 확보되어야 효도가 방행(滂行)하는 훈훈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일반적 논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명철한 리더십이 확보되어야 민중의 가족윤리도 명철하게 된다는 것은 정치의 기본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사도(斯道)’라는 표현도 선진고경의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감상 유교적 정통성을 의식한 표현이며 좀 후대의 용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의 선조인 공자의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주나라 왕실이 천하를 통제하는 집권적 권력을 이미 상실하여, 지방의 제후들이 무력으로 천하를 다투어, 도덕(道德)이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예의(禮誼, 禮義와 같다) 또한 폐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난역(亂逆)함이 도를 지나치지만 그것을 바르게 잡을 길이 없었다. 當吾先君孔子之世, 周失其柄, 諸侯力爭, 道德旣隱, 禮誼又廢. 至乃臣弑其君, 子弑其父, 亂逆無紀, 莫之能正. 그러므로 공부자께서는 늘 냉정하게 거처하시면서도, 세태를 탄하며 옛 효도의 훌륭함을 술회하시었다. 이에 부자께서는 선왕(先王: 중국문명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을 노나라의 수사(洙泗)【곡부 지역의 두 개 천 이름, 공자가 태어나고 가르치고 서거한 지역】에 펼치니, 문도(門徒)가 3천 명이나 모여들었고, 그 중에 경지에 달한 인물들만 해도 72명이나 된다. 是以夫子每於閒居, 而歎述古之孝道也. 夫子敷先王之敎於魯之洙泗, 門徒三千, 而達者七十有二也. 그 중에 수제자격인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등이 있지만 이들은 본성이 스스로 그러한 대로 지효(至孝)의 덕성을 발현하고, 모두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깨달을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 나머지 제자들은 입에 맴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가슴에 초조함이 서린 채, 효도를 체현한 듯, 못한 듯 애매한 상태로 있었다. 貫首弟子, 顔回閔子騫冉伯牛仲弓, 性也至孝之自然, 皆不待諭而寤者也. 其餘則悱悱憤憤, 若存若亡. 그 중 오직 증삼(曾參)【제자 그룹에서 어린 사람으로 공자 생애 말년에 공문에 들어왔다. ‘증자(曾子)’라 하지 않고 ‘증삼’이라고 한 표현은 공자 생시의 사태이므로 그를 낮춘 것이다. 뒤에는 ‘증자’로도 표현】만이 보통 서민들의 효를 몸소 실천하기는 하였으나, 천자ㆍ제후 이하 양명(揚名: 자신의 이름을 날림) 현친(顯親: 부모님을 빛나게 함)의 일에는 미치지 못하여【좀 표현이 어색하지만 『효경』 본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효경』에는 효가 천자 - 제후 – 경대부 – 사 - 서인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증자가 서인의 효도는 실천하였지만 그 이상의 효도는 잘 몰랐기에 공자에게 묻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를 한가히 시좌(侍坐)할 수 있는 틈을 타서 공자께 효도에 관하여 여쭙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공부자께서 효의 마땅한 대목들을 일러주시었다. 이에 증자는 탄복하면서 효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증자는 곧 들은 것을 모아 기록하고 그것을 이름하여 『효경』이라 하였다. 증자가 기록하여 만든 『효경』은 오경(五經)과 더불어 세상에 나란히 행하여지게 되었다. 唯曾參躬行匹夫之孝, 而未達天子諸侯以下揚名顯親之事. 因侍坐而諮問焉. 故夫子告其誼, 於是曾子喟然知孝之爲大也. 遂集而錄之, 名曰孝經. 與五經竝行於世. |
공안국(孔安國)은 생몰연대는 잘 모르지만 대대로 박사를 지낸 집안 사람이며, 전한의 무제(武帝)와 소제(昭帝)의 시기에 걸쳐 살았다. 무제 때에 박사였으며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천자의 과실을 간諫하는 역役)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임회군(臨淮郡)【지금의 안휘성 우이현(盱眙縣) 서북 80리】의 태수(太守: 군의 장관)가 되었다. 노나라 곡부의 사람이며 자(字)는 자국(子國)이다. 그의 형 공연년(孔延年)도 무제시기의 박사였으며 태부(太傅)ㆍ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다. 여기 ‘오선군공자(吾先君孔子)’라는 표현은 공안국 자신이 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쓴 표현인데, 공안국은 공자의 직계 장손은 아니고 방계의 사람인데 공자의 12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공안국의 「상서서(尙書序)」에도 ‘선군공자(先君孔子), 생우주말(生于周末)’이라는 표현이 있다.
『효경』」이라는 책의 성립경위를 매우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내용인즉 다 『효경』에 들어있는 것이며 새로울 것은 없다. 자세하게 논하고 있지만 자세한 만큼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제일 마지막에 ‘여오경병행어세(與五經竝行於世)’라고 한 것은 무제 당대에 말하기에는 좀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다. ‘오경(五經)’은 한 무제 때 비로소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생겨나면서 보편화된 개념이며, 당대에 곧바로 오경과 『효경』이 병행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할 수도 있으나 좀 성급한 표현이다.
전국(戰國)의 육국(六國)【제(齊)ㆍ초(楚)ㆍ연(燕)ㆍ한(韓)ㆍ위(衛)ㆍ조(趙)】이 각축(角逐)을 벌이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서울의 국학이나 지방의 향학이 모두 쇠퇴하여 폐(廢)하게 되었다. 逮乎六國, 學校衰廢. 게다가 진나라의 시황제가 서적을 불사르고(시황제 34년, BC 213), 지식인들을 생매장하는【분서령 다음 해, 35년, C 212, 주변 사람들이 황제의 행차동선을 일체 발설하지 못하게 한 법령을 어긴 제생(諸生) 460여 인을 매장한 구체적 범법처리 사건이며, 실제로 지식인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사태에까지 이르렀으니 『효경』은 이로 인하여 멸절되고 세상에 전하지 않게 되었다. 及秦始皇焚書坑儒, 孝經由是絶而不傳也. |
『효경』의 전승이 단절된 역사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쇠폐(學校衰廢)’를 그 한 이유로 드는 것은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 이 「서」의 저자는 『효경』을 관학의 전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교(學校)는 쇠폐(衰廢)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시기에 제자백가의 학풍은 더욱 크게 발흥하였던 것이다.
2. 지한흥~금문효경야(至漢興~今文孝經也)
한(漢)나라가 흥하는데 이르러 무제(武帝)의 건원(建元) 초에 하간왕(河間王)이 안지(顔芝)의 아들 안정(顔貞)이 봉(奉)한 『효경』 1권을 입수하여 이것을 무제에게 헌상(獻上)하였다. 이것이 금문으로 쓰여진 18장본 『효경』인데, 문자에 오류가 많았다. 그러나 박사들이 퍽으나 이것을 좋아하여 교수(敎授)의 교재로 활용하였다. 至漢興, 建元之初, 河間王得而獻之. 凡十八章, 文字多誤. 博士頗以敎授. |
‘건원(建元)’은 한무제가 제정한 연호인데 중국역사에서 연호제도의 시작을 의미한다. 건원 원년이 BC 140년이다.
하간왕(河間王)이란 제6대 경제(景帝)의 제3자 유덕(劉德, ?~ BC 130)을 가리킨다. 한나라 종실의 사람들을 봉(封)하여 왕(王: 그러니까 지방의 영주 같은 개념)으로 삼는데, 유덕은 경제 2년(BC 155)에 분봉되어 하간왕(河間王)이 되었다. 하간은 현재 뻬이징(北京市)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남쪽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다. 현재 하북성(河北省) 하간현(河間縣) 서남의 땅이다. 사람이 총명예지(聰明叡知)하며 수학호고(修學好古)하고, 민간에서 좋은 책들을 구하기를 좋아했는데, 좋은 책이 오면 반드시 여러 부를 필사하여 되돌려 주고, 또 진본은 비싼값을 주고 구입했다.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접하니까 사방에서 소장자들이 좋은 책들을 그에게 가지고 왔다. 그의 라이브러리에는 고문으로 된 선진구서(先秦舊書)들이 쌓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견지했으며 산동(山東)의 제유(諸儒)들이 그에게 몰려와 교유(交遊)하였다. 그가 죽자 그에게는 헌(獻)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그는 위대한 중국문화 스폰서였던 셈이다【안정이 『효경』을 세상에 내놓은 것과 하간왕의 입수는 50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하간왕이 헌상한 『금문효경』 18장본이 오류가 많다고 지적함으로써 고문효경의 등장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후에 노나라 공왕(恭王)이 궁실을 개축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시켜 공부자께서 강의하시던 강당(講堂)을 헐게 했는데, 그 벽 속에서 돌로 된 함이 나왔고, 그 함을 열어 보니 그 속에 『고문효경』 22장본이 들어 있었다. 글씨들이 죽간에 쓰여져 있었는데, 죽간은 대략 길이가 1척 2촌이었고, 글씨의 자형은 올챙이(科斗: 과두蝌蚪) 모양이었다. 後魯共王使人壞夫子講堂, 於壁中石函, 得古文孝經二十二章. 載在竹牒, 其長尺有二寸, 字科斗形. |
노나라 공왕(魯恭王: 본문의 ‘共王’은 ‘恭王’을 의미함)이란 역시 노나라 지역에 분봉된 한나라 황실의 사람을 가리킨다. 경제(景帝)의 제5자로서 한 무제의 동생이다. 성은 유(劉), 이름은 여(余), 시호가 공(恭)이다. 노왕(魯王)에 봉하여졌다. 이 사람이 공자집을 고의로 허물은 것은 아니고 궁실이나 정원을 보수하고 가꾸는 데 취미가 있어, 공자집을 좋게 만들려고 일을 벌였을 것이다.
노나라의 삼로(三老)【주나라의 제도로서 천자가 대우한 지방의 원로인데, 진ㆍ한시대에는 지방의 교화를 담당한 관리였다】인 공자혜(孔子慧)【자혜(子惠)가 바른 이름이다. 뒤에 ‘子惠’로 나온다. 이력은 미상】란 인물이 이 죽간을 가지고 경사(京師)【서울을 의미하는데 당시는 장안(長安)】로 와서, 그것을 천자(天子)【당시의 천자는 소제(昭帝)였다】에게 헌상하였다. 천자(소제)는 금마문(金馬門) 대조학사(待詔學士)와 박사(博士) 등, 군유(群儒)로 하여금 과두문자의 고문을 당시에 알기 쉬운 예서 자체(字體)로 옮겨 쓰도록 하였다. 소제는 한 통을 공자혜에게 돌려 주었고, 또 한 통을 자기가 신뢰하는 시중(侍中)【황제의 최측근 요직】 곽광(霍光)【무제(武帝)ㆍ소제(昭帝)로부터 선제(宣帝)에 걸친 당대 최고의 권력 실세】에게 주었다. 곽광은 이 『고문효경』을 심히 사랑하여 말끝마다 이 『고문효경』을 화제로 삼았다. 魯三老孔子惠抱詣京師, 獻之天子. 天子使金馬門待詔學士, 與博士羣儒, 從隸字寫之. 還子惠一通, 以一通賜所幸侍中霍光, 光甚好之, 言爲口實. |
삼로(三老)란 주나라의 관제에 의하면 천자(天子)가 삼로(三老)ㆍ오경(五更)을 설치하여 부형(父兄)의 예로써 봉양하였다고 했는데, 삼로ㆍ오경이 각각 한 사람씩이었다는 설과 3인ㆍ5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진나라 때에는 교화(敎化)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향삼로(鄕三老)를 두었다. 서한 때에도 향삼로(鄕三老)와 현삼로(縣三老)를 두었다. 모두 1인씩이었다.
시중(侍中)은 진(秦)나라 때부터 생겨난 관명(官名)이다. 여기 ‘중(中)’이란 궁중을 마음대로 왕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원래 승상(丞相)의 사(史)였는데 전내동상(殿內東廂)을 왕래하면서 나라 일을 주상(奏上)하는 일을 관장했다. 서한시대에 들어와 가관(加官: 관위가 높아짐) 되어, 승여복물(乘輿服物)을 분장(分掌)하면서 중관(中官: 환관)들과 궐내에서 머물렀으며, 무제(武帝) 때부터는 점차 국사(國事)에 관여하고 황제 좌우에서 고문응대(顧問應對)의 일을 도맡아 중조(中朝: 조정 안)의 요직이 되었다.
‘금마문대조학사(金馬門待詔學士)’란 한대 미앙궁(未央宮)의 문이름에서 왔다. 문의 원래 이름은 노반문(魯般門)인데 문밖에 동마(銅馬)가 서있었기 때문에 금마문(金馬門)이라 불렀다. 문학의 선비들이 출사(出仕)하는 곳이다. 이 문에서 천자의 조(詔)를 기다려 고문에 응하였다.
곽광(崔光, ?~BC 68)은 평양(平陽)의 사람이며 한 무제가 가장 신임하였던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 ?~BC 117)의 이복 동생이다. 자는 자맹(子孟), 시호가 선성(宣成), 관은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소제(昭帝)ㆍ선제(宣帝) 시기에 대권을 휘두른 인물이며 전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다.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중국역사서에 상세히 나온다. 그의 삶은 그 시대의 투영이므로 독자들이 자세히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
당시의 왕공귀인(王公貴人)들이 모두 『고문효경』을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고, 절묘한 묘약의 비방에 비유하여 숨기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천하의 사람들이 다투어 『고문효경』을 구하여 배우려고 하였지만 그것을 손에 쥘 길이 없었다. 뭇 나라로부터 사신이 노나라에 오게 되면, 곧 사람들과의 인연을 구실삼아 『고문효경』을 얻는 일을 청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호사가(好事家)들 중에는 금전과 비단으로 예서체로 필사한 『고문효경』을 많이 매입하여 그것으로 안부를 물으며 선물로 보내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나라의 관리가 제도(帝都)에 올 일이 있으면, 『고문효경』을 보따리 짐 속에 넣어 노잣돈으로 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고문효경』이 공씨집안에서 나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時王公貴人, 咸神祕焉, 比於禁方. 天下競欲求學, 莫能得者. 每使者至魯, 輒以人事請索. 或好事者, 募以錢帛, 用相問遺. 魯吏有至帝都者, 無不齎持以爲行路之資. 故古文孝經, 初出於孔氏. |
이 단에서는 『고문효경』이 세상에 유포된 경위를 말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좀 극화된 느낌이 있다.
그런데 금문 18장에 관해서는 제유(諸儒)들이 각각 제멋대로 다양한 교설(巧說: 말만 그럴싸하게 꾸며대는 설)을 펼쳐, 주장이 나뉘어져서 수가(數家: 여러 학파)를 이루었다. 이에 천박한 학자들이 『효경』 한 권이 육경(六經) 전체에 필적한다는 등, 그 허황된 설을 편 것이 너무도 방대한 분량에 이르러 거대한 수레에도 담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금문효경 신봉가들이 오히려 쓰잘데없이 뇌까리기를, 공씨집안에는 본시 『고문효경』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여 당시 사람들의 안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설 됨을 헤아려보니 사실무근의 낭설일 뿐이었다. 而今文十八章, 諸儒各任意巧說, 分爲數家之誼. 淺學者, 以當六經, 其大車, 載不勝. 反云孔氏無古文孝經, 欲矇時人, 度其爲說, 誣亦甚矣. |
이 단에서는 『금문효경』이 상당히 유행하여 많은 주석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금문효경 학파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고문효경』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안국은 『고문효경』의 가치는 사라질 수 없는 것임을 디펜드하고 있다. 즉 『금문효경』」이 현학(顯學)으로서 설치고 있는 상황에서 외롭게 『고문효경』에 대한 주석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공안국은 이와 같은 사태를 어엿비 여겨 발분정사(發憤精思: 분노를 발하고 사유를 정밀하게 함)하여 『고문효경』에 대한 주석[訓傳]을 쓰게 되었다. 『고문효경』의 본문을 완벽하게 빠짐없이 다 실었는데, 그 경문과 주석문의 글자를 다 합치면 1만여 자가 되었다. 경문(經文)은 빨간 주사(朱砂)로 쓰고, 전문(傳文)은 검은 먹[墨]으로 썼다. 이렇게 양자를 혼동치 않도록 확연히 구분함으로써 후세의 학자들이 『효경』의 올바른 경문텍스트와 정통의 주석이 모두 공벽의 고문에 있다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바라마지 않았다. 吾愍其如此, 發憤精思, 爲之訓傳. 悉載本文, 萬有餘言. 朱以發經, 墨以起傳. 庶後學者, 覩正誼之有在也. |
공안국이 『고문효경』의 전(傳)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경(經: 주서朱書)과 전(傳: 묵서墨書)의 모습에 관해서는 실제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 컴퓨터 ‘자료찾기(Data Search)’에 들어가 ‘청가정본(淸家正本)’을 찾아볼 것. 색은 구분 안 되어도 경과 전이 구분되는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궁중에서 도서를 관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나라 삼로, 공자혜(孔子惠)가 헌상한 『고문효경』을 정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하간왕(河間王)이 헌상한 『금문효경』은 비록 오류가 많아도 그것이 먼저 제출된 연고로 제국(諸國)에서 왕왕(往往) 유행하고 있다. 한나라의 선제(先帝: 여기서는 문제文帝ㆍ경제景帝ㆍ무제武帝)께서 조칙(詔勅)을 발표하실 때에 『효경』의 자구를 인용하실 경우가 있는데 모두 ‘전왈傳曰’이라고 하시면서 경문을 인용하시는데, 그 자구를 살펴보면 그것은 실로 금문효경(今文孝經)일 뿐이다. 今中祕書, 皆以魯三老所獻古文爲正. 河間王所上, 雖多誤, 然以先出之故, 諸國往往有之. 漢先帝發詔, 稱其辭者, 皆言 ‘傳曰’, 其實今文孝經也. |
이 단은 조정의 라이브러리 체계 속에서는 『고문효경』이 이미 정본으로서 그 권위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諸國)의 민간에서 아직도 『금문효경』이 설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금ㆍ고문 경전의 대립의식이 전한기에 이미 이토록 선명하게 개념화되어 부각되어 있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더구나 ‘한선제(漢先帝)’라는 표현도 약간 이상하다. 한나라 때의 공안국이 썼다면 당대의 나라를 객관화시켜 ‘한(漢)’이라고 표현하는 용례는 가당치 않다. 위진시대에나 와서 가능한 용법이라 하겠다.
우선 ‘중비서(中秘書)’는 궁중 속에 서적을 수장하는 서각(書閣)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적을 관리하는 관원을 말한다.
다음 ‘전왈(傳曰)’이라고 말했을 때의 ‘전’은 주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만 해도 선왕의 서(書)만을 경(經)이라 했고, 『논어(論語)』나 『효경』 류는 전(傳)이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의 무제가 동방삭(東方朔)【무제 때의 명신(名臣)으로 뼈있는 골계가 뛰어났다】에게 일러 말하기를, ‘전왈 시연후언, 인불염기언(傳曰 時然後言 人不厭其言)’이라고 하여 『논어(論語)』 「헌문」【공명가(公明賈)의 공숙문자에 대한 평어】을 인용하였고, 성제(成帝)의 조서(詔書)에 ‘전왈 고이불위 소이장수귀야(傳曰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라고 하여 『효경』 「제후장」을 인용하는 사례가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한나라 ‘선제(先帝)’라고 하면 주로 문제(文帝)ㆍ경제(景帝)를 가리키는데, ‘전’이라고 하여 『효경』을 인용한 용례는 『사기』나 『전한서』에 보이지 않는다. 성제 때 단 한번 용례가 있는 것을 가지고 ‘개언(皆言)’ 운운하는 것도 뻥이 쎄다는 이야기다. 이것으로 ‘공전위작설’을 입증하는 학자도 많으나, 공안국이 실제로 이 「서」를 지었다면 우리가 모르는 선제(先帝)들의 조칙의 인용례를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3. 석오~이악화지(昔吾~以樂化之)
나 공안국은 일찍이 복생(伏生)【진(秦)나라의 박사로서 협서율이 해제된 후에 최초로 『상서(尙書)』를 복원한 사람】을 좇아 『고문상서(古文尙書)』의 마땅한 모습을 논구하는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昔吾逮從伏生論古文尙書誼, |
‘복생(伏生)’은 통속적인 세칭이며, 그 이름은 ‘복승(伏勝)’이다. 자는 자천(子賤)이다. 제남(齊南)사람이다. 진나라에서 박사【오경박사(五經博士)는 무제 때 비로소 생겨났지만, 박사(博士)라는 관직은 이미 전국말기부터 있었다】를 지냈고, 특히 『상서』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다. 분서 이후 한 문제(文帝) 때에 『상서』에 능통한 자를 구했는데 복승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가 90세를 넘었기 때문에 먼 곳에서 제도(帝都)로 오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제는 문학과 변재(辯才)가 출중했던 정치가 조조(鼂錯: ? ~ BC 154)【영천(潁川)사람, 신상형명(申商刑名)의 학(學)을 배웠고 문학으로 태상장고(太常掌故)의 관직을 얻음. 경제(景帝)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제후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정치를 폈다가 오초칠국(五楚七國)이 반(反)하여 참수됨. 우리말로 조착이라 읽지 않고 조조라고 읽는다】를 복생에게 파견하여 복생에게 『상서』 29편을 얻었다. 이것이 곧 『금문상서』라는 것이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이라는 책이 복생의 작품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복생 하면 금문의 대가인데, 여기 공안국이 복생을 따라 『고문상서』의 바른 모습을 배웠다고 운운하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어찌 금문의 대가에게 고문을 배웠다고 하는가? 이것이 공안국 「서」가 엉터리 날조이며 근본적으로 『고문상서』가 무엇인지, 『금문상서』가 무엇인지, 그 계통도 모르는 자가 날조하였다고 열불을 올리면서 비난하는 자가 많다.
그런데 실제적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다. 금ㆍ고문에 대한 근원적 이해가 부족한 발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종복생(從伏生)’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판단하기가 어렵다. 공안국이 활약할 시기에는 이미 복생이 죽고 없었을 수도 있다. 문제(文帝) 때 이미 복생의 나이 90여 세였다면 공안국은 그 뒤에 활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안국이 곡부의 사람이고 복생이 제남의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한 지역의 학자들이라 일찍이 직접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또 복생이 『금문상서』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곧 여기 금ㆍ고문의 문제와 결부될 수는 없다. 『사기』 「유림전(儒林傳)」이나 『한서』 「예문지」의 기록에 의하면 복생은 이미 진나라 때의 『상서』 대가였기 때문에 진나라의 분서사건 때, 스스로 『상서』를 벽에 파묻어 두었다가, 한나라가 들어서고 난 후에 다시 자기 스스로 벽을 허물어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벽상서(孔壁尙書)가 파묻은 자와 캐낸 자가 상이한 경우와는 다르다. 파묻은 자와 캐낸 자가 다 복생 자신인 것이다. 복생이 캐낼 때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얻었으며 그것을 가지고 다시 제로(齊魯) 지역에서 교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생의 『상서』도 복생의 암기에 의존하여 새로 쓴 것이 아니고, 문헌의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고 한다면 복생벽장(伏生壁藏)의 『상서』도 당연히 고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고문을 복생이 역사적 문헌에 밝은 대가이기 때문에 한나라 때 문제(文帝)의 사자 조조가 찾았을 때 금문으로 고쳐 써서 주었을 것이고, 그것이 최초로 발견된 『상서』이기 때문에 『금문상서』라고 규정되었을 뿐이다【「태서(太誓)」 편이 후대에 발견된 것이라 하여 복생의 『금문상서』는 본시 28편이라 하는데 그것도 낭설이다. 「태서」 편을 포함하여 당초부터 29편이었다】.
후에【기록에 따라 혹은 경제(景帝) 때, 혹은 무제(武帝) 때】 노공왕(魯恭王)이 공자 교수실을 허물어 그 벽에서 나왔다는 『상서』가 복생상서 29편보다 16편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더 많은 16편을 ‘증대16편(增大十六篇)’이라고 한다】 이것이 모두 과두문자로 쓰여졌으며 『고문상서』의 원형인 『공벽고문상서(孔壁古文尙書)』이다.
후에 공안국이 『공벽상서』를 얻어 그것을 당대에 통용되는 금문으로 읽어내었다는 것이다. 공안국은 기존의 29편을 34편으로 재편집하였고 ‘증대16편’ 중에서 「구공(九共)」을 9편으로 계산하여 24편으로 만들었다. 합계 46권 58편(「서」를 합치면 59편)이 되는데 이것이 『공안국상서』이다. 그러니까 공안국을 고문상서의 대가라고만 볼 수는 없다. 복생이나 공안국이나 다 고문을 아는 사람들이며, 고문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고문을 금문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고문ㆍ금문으로만 말한다면 복생이 고문의 대가일 수도 있고, 공안국이 금문의 대가일 수도 있다. 즉 공안국은 공벽상서 중에서 복생이 이미 작업해놓은 금문상서와 일치하는 29편은, 복생을 따라 금문으로 읽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공벽고문 45편 중에서 복생금문과 일치되는 29편을 빼놓은 나머지 16편이 소위 『고문상서』일 뿐이다. 더 이상 자세한 논의는 회피하겠으나 여기 공안국이 복생을 따라 『고문상서』를 배웠다는 말은 오히려 역사적 실상에 맞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말하려 하는 것이다.
다음 『고문효경』의 해석의 한 예를 밝히는데 숙손통(叔孫通)의 문인(門人)을 끌어들인 것은 이 「서」의 저자가 역사적 정황에 탁월하게 밝은 인물임을 입증하는 예라고 하겠다. 숙손통은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한고조 유방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탁월한 지략가였으며 대학자였다. 설(薛) 땅 사람으로서 노나라ㆍ제나라의 학통을 이은 사람이었다. 진시황ㆍ이세ㆍ항량(項梁)ㆍ초회왕(楚懷王)ㆍ항우ㆍ유방을 차례로 섬겼으니 참으로 배알이 없는 변절자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지략이 뛰어나고 격동의 세월을 현명하게 넘길 줄 아는 대학자였다. 원래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을 지낸 명문가 항씨집안의 사람으로서【하남성 남부에 항(項)이라는 봉지(封地)가 있었다】 학문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강소성 북부의 패현(沛縣) 사람으로 부모의 이름도 잘 알지 못할 정도의 시골 ‘양아치’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용모가 출중했고 덕의가 있었고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질 않고 의리를 지킬 줄 알았다. 결국 이러한 미덕 때문에 유방은 천하를 제패했지만 천자가 되었어도 전혀 학문이나 예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공신들도 양아치 집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뭇 신하들과 술을 마시면 공신 양아치들이 서로 공을 다투고 함부로 고함을 지르고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치곤 하였다[群臣飮酒爭功, 酔或妄呼, 拔劍擊柱, 高帝患之], 한마디로 도적떼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숙손통이 한고조를 섬기게 되었을 때 숙손통을 따르는 출중한 선비들과 제자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숙손통은 이들을 천거하지 않고 과거의 도적 중에서 힘센 자들만을 골라 추천하였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였다. 양아치집단의 무끼(武氣)가 아직 성할 때에 노나라ㆍ제나라의 훌륭한 문인들이 가담해봐야 목숨만 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숙손통은 공신들에게 예절과 의법을 가르쳤다. 멋드러진 의식을 찬연하게 진행하고 나중에 법주(法酒)를 거행하고 황제에게 축수하자, 한고조는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황제의 고귀함을 알았다[吾迺今日知爲皇帝之貴也]”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고조는 기분이 좋아 숙손통을 태상(太常)에 임명하고 황금 500근을 하사하였다. 이 틈에 숙손통은 자기의 제자들이 의법을 만들었다 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고조는 그들을 모두 낭관에 임명한다. 숙손통은 궁을 물러나와 자기가 받은 500근의 황금을 주변의 선비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숙손통은 실제로 한나라의 의식과 제식을 만들어 정권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질서있게 만들었으며, 태자계승의 권위를 확립시켰으며 종묘의 의례도 만들었다. 실제로 한제국의 문아(文雅)의 꽃을 피우게 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제로(齊魯)의 유생들이 한제국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 복생이 주관하는 세미나에 숙손통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공안국에게 『효경』의 사법(師法)을 강론하였다는 이 장면의 설정은 실로 그 사실여부를 떠나 『효경』의 권위를 높이는 기발한 착상이라 할 것이다. 숙손통에 관한 것은 『사기』 권9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을 보라.
당시, 그 자리에 참집(參集)한 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숙손통(叔孫通)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기 때문에, 『효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숙손통 선생님께서 전수하신 사법(師法)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時學士會云出叔孫氏之門, 自道知孝經有師法. 그들은 『고문효경』 「광요도장(廣要道章)」에 나오는 ‘백성들의 기풍을 변화시키고 그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처럼 좋은 것이 없다[移風易俗, 莫善於樂]’라고 한 구절을 해설하는 데 있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천자는 음악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에도, 그 음악을 발생시킨 만방의 기풍을 잘 성찰하고 그 성쇠의 역사를 파악하여, 쇠한 역사의 단계에 있는 나라는 정성(貞盛: 아주 착실하게 북돋아 줌)의 가르침으로써 그 풍속을 변화시키고, 음란한 역사의 단계에 있는 나라는 정고(貞固: 음란한 것을 단단하게 가라앉힘)의 풍조를 일으킴으로써 그 풍속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역사의 진단은 모두 그 악성(樂聲: 음악의 느낌)으로써 하게 되는 것이다. 바르게 진단할 수 있으면 반드시 그 역사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고문효경』에서 ‘백성들의 기풍을 변화시키고 그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처럼 좋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其說 “移風易俗, 莫善於樂.” 謂爲天子用樂, 省萬邦之風, 以知其盛衰, 衰則移之, 以貞盛之敎, 淫則移之, 以貞固之風, 皆以樂聲知之, 知則移之, 故云: “移風易俗, 莫善於樂也.” |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공안국의 논지를 살펴보면 숙손통의 문인들이 『효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하여 공안국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풍역속(移風易俗)’의 동력으로서 음악을 활용하는 주체를 천자에게 국한시켰다는 것이다. 너무 음악을 천자중심의 하달체계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효의 이해도 너무 상층에서 하층으로 하달되는 것으로만 해석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음악이나 효나 모두 ‘종적 하달’의 문제를 떠나 ‘횡적 연대’로 이해되는 것이 더 건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숙손통 문인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해석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는 수법은 확실히 고단수의 기법이다.
그리고 여기 ‘만방(萬邦)’과도 같이 한고조의 휘(諱)를 그대로 쓰고 있다. 그리고 혜제(惠帝)의 휘인 ‘영(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이것도 한대의 작품이 아니라는 고증의 한 이유에 속한다.
또한 진(晉)나라 평공(平公)의 악사인 사광(師曠)【성이 사(師), 이름이 광(曠), 자가 자야(子野), 장님으로서 소리를 듣고 길흉을 점치기로 이름이 높았다】이 초(楚)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정(鄭)나라를 치는 길에 진(晋)까지 치려고 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북방노래도 잘 부르지만 자주 남쪽나라(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남쪽나라 노래를 불러보면 활기가 없고 죽어가는 음색이 짙습니다. 요번에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에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좌전』 양공襄公 18년).” 이런 예는 앞서 숙손통 문인들의 관점을 방증하는 예에 속한다. 又師曠云: “吾驟歌南風, 多死聲, 楚必無功.” 卽其類也. 숙손 문인들은 또 말한다: “어리석은 서민(庶民)들이 어찌 음을 식별한단 말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음악을 활용하여 세상의 풍속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뭇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숙손가의 관점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且曰: “庶民之愚, 安能識音, 而可以樂移之乎!” 當時衆人僉以爲善, 그러나 나는 음악을 활용하는 것은 서민들도 할 수 있는 일이므로 그들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대놓고 그들을 비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고문효경』의 전을 쓰려고 그들의 관점을 다시 검토해보니, 정말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吾嫌其說迂. 然無以難之. 後推尋其意, 殊不得爾也. |
음악과 효는 민중들 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공서」에 깔려있다. ‘첨(僉)’은 ‘모두’, ‘다’의 뜻이다. 사광에 대한 언급은 『맹자(孟子)』 「이루(離婁)」, 「고자(告子)」에도 있다.
『논어(論語)』 「양화」 편에 나오는 일례를 들어보자!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언언(言偃), 자하(子夏)와 더불어 문학과에 꼽힘】가 무성(武城)의 읍재가 되어,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예술적으로 통치를 행하면서 백성들의 풍속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무성이라 하면 뭐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대단한 곳도 아니요, 단지 노나라 영내의 작은 읍이다. 그런데도 음악으로써 교화의 기풍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子游爲武城宰, 作絃歌以化民. 武城之下邑, 而猶化之以樂. 그래서 전(傳)【여기서는 『국어(國語)』 권14 「진어(晋語)」 8을 가리킨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앞서 말한 사광이 진나라 평공에게 말함】. ‘대저 음악이란 산천의 기운을 소통시켜, 그 자연의 덕을 넓히고 먼 지역에까지 미치게 하는 찬란한 힘이 있습니다. 음악이란 덕을 바람화시켜 넓히고, 사물들을 바람화시켜 들리게 하고, 시(詩)를 가다듬어 음영케 하고, 예(禮)를 가다듬어 절도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故傳曰: “夫樂以關山川之風, 以曜德於廣遠. 風德以廣之, 風物以聽之, 修詩以詠之, 修禮以節之.” 또 『시경』의 「관저(關雎)」 앞에 있는 「대서(大序)」【작자 미상, 후한 광무제 때의 위굉(衛宏)의 작으로 추정】에 이르기를, ‘『시』의 노래들은 제후들의 여러 나라에서 즐겨 불렀던 것이며, 또 작은 향촌의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즐겨 불렀던 것이다’라고 한 것만 보아도, 음악이란 오직 천자만이 홀로 활용하는 그런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又曰: “用之邦國焉, 用之鄕人焉.” 此非唯天子用樂明矣. 『역』의 건괘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는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고 했듯이 구름이 모여들면 용(龍)이 일어나고, 호랑이가 포효하면 바람[風]이 이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대중의 마음이 서로 감응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사회적 현상을 상징한 것이다. 대저 사물의 상감(相感)이란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어려운 것이며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어리석은 서민들이 어찌 음악을 알리오 라고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구슬픈 호가(胡流) 젓대소리가 울려퍼지면 말이 히이잉 앞발을 구르며, 풍상에 얼굴이 바랜 동네 노인이 금(琴)을 타도 영아들이 일어나 춤을 춘다. 서민의 어리석음이라 할지라도 호마(胡馬)나 영아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어찌 풍악으로써 서민들 스스로 교화된다 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夫雲集而龍興, 虎嘯而風起. 物之相感, 有自然者, 不可謂毋也. 胡笳吟動, 馬蹀而悲. 黄老之彈, 嬰兒起舞. 庶民之愚, 愈於胡馬與嬰兒也. 何爲不可以樂化之? |
공안국의 논지는 이 단에서 매우 명료하다. 음악의 자발적인 상호감응, 그 감응체계가 센세이션을 일으켜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시키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생각, 바람과 노래와 문화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생각하는 발상은 참신하다. 그리고 그것이 천자(天子) 일인에 의하여 독점되는 체계가 아니라 그래스루츠(grassroots, 민중의) 레벨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참신하다. 다시 말해서 옛사람들은 효(孝)를 노래[風]로서 생각했다는 것의 한 예증이다. 노래가 한 사회의 바람을 형성하듯이 효도 노래처럼 한 사회의 바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지가 숙손가의 『효경』 해석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숙손가의 주장은 반드시 천자(天子)의 용악(用藥)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음악을 통하여, 그 음악을 생산한 사회의 상태를 진단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사회의 상태가 정확하게 진단되기만 하면 그 사회에 대한 정확한 대응책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안국의 논지는 이러한 숙손가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맥락을 정확하게 밟고 있질 않다. 옛사람들이 누구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비판의 전제로서 내건 테제들이 전혀 비판 논리의 대자적 전제가 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두리뭉실하게 한 건을 이야기해놓고 논리적 필연성의 연관이 없이 자기 논리만에 몰두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숙손가에서는 사회진단의 방편으로서의 노래만을 이야기하고, 교화수단을 곧바로 노래로써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공안국은 줄곧 교화의 수단으로서의 노래의 정당성만을 이야기하고, 그 교화의 방법이 천자 한 사람으로부터의 하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안국의 논리는 다음 단에서 예기치 못한 ‘빵꾸’를 내고 있다.
4. 경우운~부지종언야(經又云~弗之從焉也)
또한 『효경』의 「광요도장」 본문에, “사회적 풍조가【혹은 ‘천자가’라고 말해도 좋다. 맥락상 ‘아버지보다 더 높은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해주어야’라는 뜻이 있다】 그 아버지를 존경해주어야 아들이 기뻐 아버지를 따르고, 그 임금을 존경해주어야 신하가 기뻐 임금을 따른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숙손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설(新說)을 세우는 자들이 많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임금과 아버지가 스스로 각자 임금과 아버지의 도를 실천해야만, 신하나 아들된 사람들이 비로소 기뻐 따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經又云: “敬其父則子悅, 敬其君則臣悅.” 而說者以爲各自敬其爲君父之道, 臣子乃悅也. 그러나 나 공안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임금이 비록 임금답지 못하다 하더라도 신하는 신하됨을 끝내 포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요,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답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은 자식됨을 끝내 포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만약 임금과 아버지가 임금과 아버지 됨의 도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하와 자식이 곧 반란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터뜨려서 되겠는가? 이런 설은 도대체 통용될 수 없다. 나는 전(傳: 주석)을 짓는 데 일체 이 따위 속설들은 따르지 않는다. 余謂不然. 君雖不君, 臣不可以不臣; 父雖不父, 子不可以不子. 若君父不敬其爲君父之道, 則臣子便可以忿之邪? 此說不通矣. 吾爲傳, 皆弗之從焉也. |
앞에서부터 전개해온 논지는, 위로부터의 부과나 강요나 세뇌가 아니라 노래가 유행하듯이 민간레벨에서의 효문화의 자발적 소통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여기 논지도 형식상으로는 그러한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신하된 자, 아들된 자의 효도가 윗사람에 대한 상대적ㆍ공리적 관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 자발성ㆍ촉발성을 궁극적으로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귀결시키고 있다는 데 「공서」의 논리의 결함이 엿보일 뿐 아니라, 그 논리를 지배하는 가치관의 보수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순자(荀子)의 합리주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철저한 효의 충화(忠化)만 남게 되는 것이다.
「공서」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우리나라 작금의 보수 언론의 논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겉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고 보편적이고 점잖은 듯이 보이다가 나중에는 결국 ‘빨갱이 새끼들’ 아니면 ‘체제에 충성할 줄 모르는 새끼들’에 대한 욕지거리로 끝나고 만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봐도 똑같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고상하고 훌륭한 듯한데 전인적(全人的)인 합리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 대부분이 빨갱이에게 당한 쓰라린 가족력이 있다든가, 종교적 이념에 세뇌당하여 있다든가, 권력에 아부하여 출세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든가 하는 실존적 상황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빨갱이들’이 잘하는 짓은 없다 해도 그 빨갱이가 나의 실존으로부터 객화될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대자대비의 마음이 없이 어찌 이 시대의 지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까지 벗어주라 했는데, 그토록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지언정 나와 이념이나 비젼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포용하여 이 민족의 미래를 전체적으로 관망할 수 없다면 어찌 그런 자들이 신문의 논설을 쓸 수 있으리오!
「공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서(諸書)를 인용하여 무리하게 논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출전의 횟수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예기』 55, 『관자』 51, 『주역』 16, 『좌전』 16, 『상서』 11, 『논어(論語)』 11, 『모시(毛詩)』 4, 『주례』 4, 『국어(國語)』 4, 『공자가어』 4, 『공양전』 3, 『대대례기』 2, 『노자』 2 정도이다. 그런데 『예기』와 『관자』의 인용이 특별히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예기』를 통하여 유가의 효치주의ㆍ예치주의(禮治主義)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관자』를 통하여 유가정통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법치주의ㆍ공리주의적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예기』와 『관자』와 같은 잡다한 서물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한대의 분위기는 벗어났다는 느낌을 준다.
후한말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친 전란의 계속,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 권신의 발호, 관기(官紀)의 문란 등으로 사회적ㆍ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점점 개인주의ㆍ자유주의ㆍ허무주의ㆍ향락주의에 빠져가는 민심의 향배를 걱정하며, 민간에서 효제예악(孝弟禮樂)의 센세이셔날(sensational)한 자발적 풍조를 일으켜, 그것을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권력에의 충성으로 연결시키고 유교의 도덕사상에 의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어떤 비젼의 사나이가 날조한 작품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다. 그러나 날조라도 ‘인사동 스캔들’보다는 더 정밀한 날조라고 보여지며, 『고문효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이라는 의미에서 그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 「공전」이 간단명료한 훈고에 그치지 않고 구질구질한 의리(義理)를 부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설명 안 해도 될 것을 불필요하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 등등으로 보아 한대의 주(注)라는 느낌보다는 그 후대의 소(疏)의 양식을 밟고 있다고 사료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공서」를 공안국 본인의 작품이라고 강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상으로 「공서」를 마치겠으나 본문에 대해서도 기존의 주석을 나열하는 번쇄함에 빠지지 않고 간결하게 나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 스스로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게 만드는 데만 주력할 것이다. 한 한국사상가의 독자적인 주석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판본은 인치본(仁治本, 1241년)과 청가정본(淸家正本, 1781),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을 절충하였다【전술하였듯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중 조선총독부고서 청구기호 ‘古古1-29-72’로 되어 있는 공안국전(孔安國傳) 『고문효경(古文孝經)』이 인치본에 가장 가깝다】.
나의 한글번역에 관해서는 『논어한글역주』 제1권에 있는 ‘번역론’을 참고해주었으면 한다.
▲ 봉혜의 효심은 가이없어라!
삼소(三蘇)라 하면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 소식(동파)ㆍ소철을 가리키지만 우리나라 최근세에도 삼소에 맞먹는 삼변(三卞)이 있었다. 변영만ㆍ변영태ㆍ변영로 삼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주(樹州) 변영로선생의 외손자되시는 분이 나와 평소 왕래가 있는데 어느 날 글 쓰는데 너무 수척해 보인다 하며 당신이 양평시골에서 키우시는 토종 암탉 한마리를 과먹으라고 가져오셨다. 그런데 상자를 열자마자 이놈이 훨훨 날아가더니만 나흘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나흘 후에 다시 마당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고양이에게 쫓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닭이 하늘 높이 봉황처럼 나르는 것이 아닌가? 집마당 10m나 되는 측백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버렸다. 그곳에서 수행승처럼 꼼짝 않고 단식하며 사흘을 버티더니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강렬한 기운을 발하며 고양이까지 제압해 버리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하도 그의 행동이 당당하고 기이하여, 나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탄식을 본떠 ‘봉혜(鳳兮)’라 이름지었다.
나는 봉혜를 기르면서 대자연 생생지리(生生之理)를 터득했다. 봄이 되어 대지가 준동(蠢動)키 시작하자 봉혜는 알을 품었다. 열두 알을 품었는데 스무 하루동안 꼼짝 않고 내가 손수 지푸라기로 만들어준 둥지를 지켰다. 나는 『주역』 복괘(復卦)에 나오는 ‘복기견천지지심호(復其見天地之心乎)’의 의미를 되새겼다. 천지대자연의 생물지심(生物之心)이 봉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생명을 잉태하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기는 천지의 마음이여! 열 두개 알 중 하나는 초기에 깨졌고 다섯은 본시 무정란이었다. 하나는 껍질을 깨지 못하고 막판에 죽었으나 드디어 다섯마리가 부화되는데 성공했다.
이 책의 원고가 무르익어갈 무렵이었고 나는 봉혜와 마지막 출산의 씨름을 같이 했다. 봉혜의 따사로운 체온이 삐악삐악 병아리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줄 즈음 나도 『효경』을 탈고했다. 다섯 마리의 새생명이 이 드넓은 천지간에 모습을 드러낸 그 최초의, 감격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봉혜의 효심은 가이 없어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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