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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에피큐로스학파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에피큐로스학파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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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큐로스학파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는 쾌락(pleasure)이 유일한 선이라고 주장한다. 쾌락은 축복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학문이건, 도덕이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영어로 에피큐어’(epicure)라 하면 식도락가라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모든 선의 근원은 위()의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탐식(貪食)을 하면 위에 고통이 올 것이다. 따라서 위의 쾌락을 위해선 절식(節食)이 요구될 것이다. 참다운 미식가들은 먹는 것을 잘 조절해야 한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내적 본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쾌락의 강도와 지속에 있다.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결국 쾌락의 추구는 결국 고통의 회피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동적인 쾌락(dynamic pleasures)보다는 정적인 쾌락(static pleasures)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얼핏보면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Stoicism)는 각각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라는 상반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피큐리안들의 쾌락주의도 결국 금욕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쾌락의 지속을 위해서는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신중함에 의하여 조절되는 이성적 삶을 통하여 몸과 마음의 평정(equilibrium)을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기쁨은 격렬한 쾌락이다. 그러나 그러한 쾌락은 위장의 고통을 수반한다. 항상 먹는둥 마는둥 소식과 절제로 신체적 평정을 유지해야만 정적 쾌락이 유지된다. 이러한 경지를 그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에피큐로스(Epicurus, BC 341~270)는 공포를 피하는 문제로부터 그의 사변철학을 출발시켰다. 인간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가장 큰 두 근원이 있으니, 그 하나가 종교이고 또 하나가 죽음이다. 그런데 이 두 원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고취하는 것으로써 그 존재이유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은 인간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영혼은 육신과 함께 멸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수립했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위안으로 생각하지만 에피큐로스는 종교야말로 공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물론자였다. 따라서 영혼도 물질이다. 죽음은 걱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은 영원히 감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감각의 종료를 의미할 뿐이다. 영혼불멸에 관한 모든 교설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야비한 이론일 뿐이다.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의 이론은 인도의 차르바카(cãrvãka)철학과 매우 유사하다. 하여튼 헬레니즘시대의 동서교류는 구체적으로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사상들의 융합을 가져왔다. 이것은 매우 개명한 생각들이며 달관한 인본주의의 사유체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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