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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4장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4장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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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아타나시우스 이후

 

 

우선 이 기구한 운명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만 한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권위가 있다고 해도 그가 부활절에서 발한 메시지 하나로 전 로마기독교세계가 27서성경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기실 아타나시우스는 단지 목록만을 확정했을 뿐이다. 그는 평생의 에너지를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의 저작도 이단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 변호)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엄밀한 서지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라는 텍스트를 크리틱(Critique, 비평)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질 않았다. 그는 27서정경을 물리적으로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27서를 확정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서지학적 안목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선정한 27서의 수준이 타 경전에 비해 정경 속에 편집될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문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단지 요한계시록이 편입된 것은 향후 1700년의 인류사를 위하여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이지만 요한계시록만 해도 이단과 배교에 대한 위협적 묵시로 가득 차 있어 이단과 배교와 평생을 싸워온 아타나시우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문헌이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에 대한 현세적ㆍ실존적 해석을 거부하는 모든 무지한 성령파들의 몽매한 영감의 원천으로 끊임없는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희랍교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27서를 발표했을 때도 요한계시록만은 사도저작성이 의심될 뿐만 아니라 정경의 자격을 근본적으로 결하고 있으므로 정경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반박성명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리아교회들은 5세기말까지 디아테사론을 계속 선호했다. 그리고 시리아지역에서는 에데사의 주교(bishop of Edessa)인 라불라(Rabbula)가 만들었다고 하는 22서짜리 정경이 쓰였는데 이것을 보통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페쉬타에는 베드로후서, 요한2, 요한3, 유다서, 요한계시록이 빠져있다.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1세기 초대교회로부터 매우 주류적 감각을 지니고 내려온 뼈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소한 상기의 5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다 합리적 결단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67세기에 수정판으로 등장한 필록세니안 판(the Philoxenian version)과 하르클리안 판(the Harklian version)부터는 동방희랍교회ㆍ라틴서방교회에서 사용하는 27서 체제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을 주도했지만 일차적으로 성서학자요 언어학자였던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정경의 기준을 사도저작성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was Christum treibet)이라는 두 항목 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기준에서 볼 때,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정경의 자격이 없다고 규탄했다. 그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이 4서를 빼버렸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성서개념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루터는 전통의 하중에 굴복하고 이 4서를 그냥 신약의 말미에 덧붙였다.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27서성서의 목록을 제시했다 할지라도 27서체제는 인류사를 통하여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우리는 성서라는 문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공포감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 공포감이란 그것이 성령의 계시에 의한 절대적인 말씀이라서 일점일획도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세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성서는 한 글자도 변동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신앙 세계를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성서는 절대불가침의 신성한 말씀이며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절대불가침의 성서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교보나 동네책방, 대한기독교서회나 분도출판사책방 같은 곳에 가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책방에 꽂혀있는 성서는 한두 종류가 아니다. 이 글을 쓰다가 바람도 쉴 겸해서 나는 시내에 나가 눈에 뜨이는 성서는 모두 사가지고 돌아왔다. 요한복음 11만 가지고 생각해보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개역한글판)

 

2.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공동번역판)

 

3.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판)

 

4.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한국천주교회 창립200주년기념 개정보급판)

 

5.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현대인의 성경판)

 

6. 천지가 창조되기 전, 아무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현대어 성경판)

 

내가 오늘 구한 성경은 이것이 다인데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판본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일점일획도 변경할 수 없는 성경이란 말인가? 문제는 어휘의 선택부터 심지어 신택스(syntax, 구문론), 세맨틱스(semantics, 어의론)까지 모조리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의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할 수가 없다. 어떤 다른 문장을 예를 들자면 전혀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상황이 한둘이 아니다. 과연 성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느 판본, 어느 책이 진짜 성경이란 말인가?

 

유식한 독자들은 이 우리말성서의 문제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이며,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희랍어텍스트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말씀은 하나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희랍어성경을 보고 말하시오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희랍어성경도 하나의 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희랍어성경 고사본은 약 5천 개 정도나 되는데, 5천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또다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은 4세기의 것인데 양피지에 흘림체로 쓴 것이다. 1844, 1859, 두 차례에 걸쳐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수도원에서 콘스탄틴 폰 티엔도르프(Konstantin von Tischendorf)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신ㆍ구약의 완정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을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라고 한다. 이것을 성서판본학에서는 알레프(aleph)라고 부른다. 히브리 알파벳의 첫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르고 또 그 글자로 표기한다.

 

이 판본을 효시로 하여, 1475년 이전부터 바티칸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었던 코우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 보통 B, 03이라고 약어 표시한다) 등 수없는 판본이 발견되었다. 그 유명한 화란의 휴매니스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도 희랍어성경을 편찬하여(1515), 인류사상 최초로 그것을 인쇄출판하였다. 151631일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의 손에는 몇 개의 희랍어사본 단편이 있었으나 하나도 완정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모자라는 부분은 라틴어성경에서 그가 손수 희랍어로 역번역해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희랍어성경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기 전통에 항거하고 당대 기성교회의 타성적인 형식주의를 비판하여 희랍 고전의 후마니타스(humanitas)를 부활시킨다는 르네상스 휴매니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환영을 받았다. 1519년에 재판이 나왔고, 15223, 15274, 1535년에 5판이 나왔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희랍어성서의 유포에 자극되어 말틴 루터의 독일어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말틴 루터는 에라스무스 희랍성경 제2판을 번역의 저본으로 썼다. 에라스무스의 이 불완전한 판본은 거의 300년 동안 반복적으로 출판되면서 텍스투스 리세프투스(Textus Receptus)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받아들여진 텍스트’(Received Text)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뒤로 많은 새로운 고판본이 발견되면서 희랍어성경 자체도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발견한 티쉔도르프는 시나이티쿠스를 최초로 활용하여 1831년에 나온 칼 라흐만(Karl Lachmann, 1793~1851)의 희랍어신약성경의 제8판 두 권을 내었다. 첫 권은 1869년에 둘째 권은 1872년에 나왔다. 이 티쉔도르프 판본을 기점으로 희랍어성경도 비로소 엄밀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웨스트코트(Westcott, 1825~1901)와 호르트(Hort, 1828~1892)가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와 코우덱스 바티카누스에 기초하여 희랍어원본 신약(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을 낸 것이 1881년의 사건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텍스투스 리세프투스가 매우 불완전한 엉터리 판본임을 엄밀한 비평을 통해 밝혔다. 그리고 그 뒤에 에버하르트 네슬(Eberhard Nestle, D.D., 1851~1913)이 티쉔도르프 판과 웨스트코트ㆍ호르트 판을 비교하여 가장 완정하고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희랍어신약(Novum Testamentum Graece)을 출간했는데 그것은 1898년의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희랍어성경이라는 것도 1898년에나 와서 비로소 기준이 될만한 성경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희랍어성경의 절대적 기준을 운운하는 것도 가소로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킹 제임스 바이블의 경우

 

 

스튜어트왕조의 시조인 영국왕 제임스1세가 명령하여 54인으로 구성된 학자그룹에 의하여 7년 동안 고생 끝에 1611년에 출판된 소위 흠정역 킹 제임스 바이블(King James Version)도 에라스무스의 희랍어성경을 조금 발전시킨 테오도르 베짜(Theodore Beza)1588~1589년 판본과 1598년 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따라서 킹 제임스 바이블도 1611년판을 우리가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수차례의 개정을 거쳐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보통 흠정판’(the Authorized Version)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벤자민 블레이니(Benjamin Blayney) 박사가 4년간의 노고 끝에 1769년 개정한 것이며, 그 뒤로도 킹 제임스 바이블은 1901년의 미국 표준판(American Standard Version)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수정을 거친 것이다. 여기서 개정’ ‘수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표현을 다듬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원문 자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어성경이든 희랍어성경이든 라틴어 성경이든 영어성경이든 어떠한 성경도 고정된 판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성서가 절대적인 하나의 문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죄송한 말이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도 절대적 기준이 되는 그 하나의 성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제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27서정경목록 선포와 더불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동시대의 인물이 제롬(Jerome, c.347~419/420, 라틴 풀네임은 Eusebius Hieronymus)이라는 당대까지 가장 유식하고, 수도원의 리더로서 성자적 삶을 영위한 탁월한 성서번역가이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27서정경의 권위를 수용하고 그것이 기독교세계에 전파되도록 그 체제에 따라 라틴어성서번역을 시도했다. 그는 한때 교황 다마수스(Pope Damasus)의 비서(요새로 말하면 추기경 이상의 지위였다. 382~385)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식과 신념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기독교성서를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성서의 모습이나 내용에 관하여 매우 실제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이 제롬이라는 인물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제롬이라는 인물이 중세기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제롬에 관해서 르네상스 이후의 가치관에 따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대로서는 제롬의 노력은 매우 창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소위 라틴 벌게이트판 성서’(Latin Vulgate)의 창시자였다. 벌게이트란 원래 상스럽고 속되다는 의미인데, 당시에는 희랍어에 비하면 라틴어는 통속어였다.

 

제롬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스트리돈(Stridon)에 사는 매우 부유한 크리스챤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정교사들로부터 라틴문학의 소양을 몸에 익혔고 12살 때는 로마로 유학을 가서 문법, 수사학, 철학을 배웠고 366년경 그는 교황 리베리우스(Pope Liber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20년간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여행을 했다. 현재의 독일 트리에르(Trier) 지방의 수도승들로부터 수도사적 삶(monasticism)에 관해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이태리의 아킬레이아(Aquileia)에서 루피누스(Rufinus)라는 탁월한 학자를 만나 금욕주의적 사상에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동방으로 동방으로 여행을 했는데 워낙 연약한 몸으로 긴 여정을 걸어다니다보니 지치고 허기져서 안티옥에서는 거의 생사의 기로를 헤매도록 심한 몸살과 열병을 앓는다.

 

375년 봄 어느날 그는 그의 생애의 진로를 결정케 되는 꿈을 꾼다. 그는 주님께서 배석하고 계신 재판정(tribunal)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이놈,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구나!”하고 주님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는다. 신실한 크리스챤이 아니라 BC 1세기의 로마 철학자며 웅변가며 정치가며 로마 공화정의 지지자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의 추종자라고 고소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극심하게 살갗이 다 터지도록 채찍질을 당한다. 제롬은 주님께 맹세한다. “주여! 오 나의 주님이시여! 이제부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방인의 문학작품은 읽지도 만지지도 않겠나이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두 손 모아 비는 가운데 그는 눈을 떴다. 땀이 비오듯 몸을 적셨고 열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꿈의 계시로 위대한 번역자의 생애

 

 

친구 루피누스는 그따위 꿈 같은 환상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미신이라고 제롬을 질책했지만, 이 꿈의 계시는 제롬의 생애를 지배했다. 그는 그 후로 한가롭게 그레코ㆍ로망의 고전을 손에 잡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로지 성서의 연구와 주석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 후 375년에 칼키스(Chalcis)의 사막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홀로 2년 동안 생활한다. 그는 로마말만 잘했고 시리아말과 희랍어를 몰랐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컸기 때문에 식욕이 까다로웠고 위장이 약했다. 사막에서 사는 것은 심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의 정욕에 시달렸다. 거친 음식은 그의 고해성사였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사막의 고적과 미풍 속에서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며 기도와 단식에 매달렸다.

 

그리고 유식한 유대인 기독교도로부터 히브리말과 희랍어를 배웠다. 그리고 희랍어성서 수고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위일체 논쟁이 불붙었을 때도 그는 로마주교의 입장이 정통이라고만 주장했다. 그런데도 교황 다마수스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사막을 떠나 안티옥으로 갔다. 안티옥의 파울리누스 주교(Bishop Paulinus)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파울리누스 주교는 그를 사제로 임명하려했다. 378년 제롬은 사제직은 다음의 두 조건을 걸고 수락한다. 1)그의 수도사적 삶을 방해하지 말 것. 2)교구사제의 잡무를 일체 강요하지 말 것.

 

그 뒤 그는 마태복음 원본을 히브리말로 옮겨쓴 사본을 구하기도 하고 다양한 당대의 성서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희랍어의 소양을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오리겐(Origen)의 성서주석에도 찬미의 눈을 떴다. 오리겐이 구약에 관하여 설교한 14개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유세비우스교회사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378).

 

 

 

 

제롬의 바이블 클라스

 

 

교황 다마수스는 그를 비서로 부르면서 기존의 라틴역 성서들이 충돌을 일으키므로 가장 온전한 라틴어 정본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382년에 로마 시노드에서 다마수스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다음과 같다. ‘보편적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구분하여 우리는 성경을 취급해야 한다.’ 라틴어 번역이란 원래 희랍어 성경들이 희랍어를 모르는 당대의 로마사람들에게 구어로 번역되어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들인데 2세기 후반부터는 그것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지역, 스페인 지역, 현재 프랑스지역에서부터 다양하게 라틴사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롬도 이 사본들이 얼마나 내용이 제각기 달랐는지 사본의 개수만큼 성서의 개수가 있다고 불평했다. 이 시대의 수고 텍스트가 92종이나 현존하고 있다. 제롬은 희랍어원본에 대한 치밀한 비평을 가한 후 우선 4복음서를 번역하여 교황에게 바쳤다(384). 4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23서에 대해서는 제롬이 얼마나 정밀하게 손을 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나머지 성서들은 매우 조잡한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롬은 기존해있던 구약의 시편을 셉츄아진트 사본에 의거하여 새롭게 교정했다.

 

제롬은 로마에 있는 동안에 로마의 귀족계급의 과부들과 신실한 처녀들 중에서 수도원적 기질이 있는 핵심적 인사들을 뽑아 바이블 클라스를 열었다. 마르첼라(Marcella), 파울라(Paula), 그리고 파울라의 딸 블레실라(Blesilla), 유스토키움(Eustochium) 등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돈많고 고상하고 홀가분하고 헌신적인 보살들이야말로 종교발전의 토대가 된다. 이들에게 제롬은 아름다운 구약의 시편을 히브리어로 강의하고 성서전반의 궁금한 문제에 관해서 요즈음 통신 강의 같은 것을 열어 서신으로도 답해주었다. 그는 그들의 영성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롬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극찬하였고, 처녀성(독신성)과 결혼성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일체의 견해를 반박했다. 사실 평생을 처녀나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은, 말이 그렇지 범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러한 고행을 실천하는 자들을 우리는 존경해주어야 한다. 제롬은 금욕과 경건한 독신생활을 주창하면서 로마사회의 성직자계급들의 태만과 위선과 부패, 그리고 거짓말 처녀ㆍ총각들의 추태를 맹렬히 비난했다.

 

교황 다마수스가 죽자(38412) 그는 수세에 몰렸고 이듬해(385) 8월 그는 로마라 불리우는 바빌론을 떠나 성지로 다시 돌아간다. 그의 마음은 비분강개로 차있었다고 한다. 독실한 파울라가 이끄는 처녀수행단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팔레스타인 전지역의 성서와 관련된 지역을 세밀히 돌면서 고고학적 탐색을 하고 성지순례를 한다. 그리고 이집트 나일강변의 수도원 센터들을 방문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그 유명한 주석가 디디무스(Didymus the Blind, 313~398)와 한 달을 같이 머물며 토론했다. 디디무스는 4살 때 장님이 되었는데 놀라운 기억력으로 당대 최고의 학식의 소유자가 되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그를 알렉산드리아 교리학원장(head of the catechetical school of Alexandria)으로 임명했다. 제롬은 나중에 그의 성령론(On the Holy Spinit)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제롬은 386년 여름 베들레헴에 안착했다. 389년 파울라는 남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하나 지었다. 3개의 여자들을 위한 수녀원도 지었고, 또 순례자들을 위한 여인숙도 운영했다. 제롬은 그곳에서 성서번역에만 전념하면서 34년을 머물렀다. 그리고 평온하게 그의 마지막 숨을, 예수가 태어나신 그곳에서 거두었다.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

 

 

내가 제롬과 같은 사람들의 생애를 간략하나마 소개하는 뜻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성서의 모습이 거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그 황량했던 시절에 이미 팔레스타인 각지를 순례하면서 역사적 상황과 분위기를 익히고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유려한 라틴어로 번역을 감행했던 사막의 수도승 제롬과 같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삶의 헌신과 천로 역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성서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서를 성령의 계시라고만 주장하는 성령파들은 이러한 기나긴 인간의 노력, 성경으로 인도된 위대한 문명의 축적을 망각하고 성서에 대해 모독적 발언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지가 성서를 파괴하고, 성서를 마치 무당ㆍ점쟁이들의 예언서나 부적 수준으로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자그마치 2천년의 인간의 노력의 축적으로 인하여 그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제롬은 베들레헴에서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 전체를 히브리텍스트를 비교해가면서 다시 번역했다(405년경 완성), 그는 셉츄아진트번역이 오역이 많고 표현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롬으로 인하여 신ㆍ구약성서의 라틴 벌게이트의 초기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롬ㆍ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와 동시대의 거대사상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 키케로와 마니케이즘에 빠져있다가 네오플라토니즘과 해후하면서 그 틀 속에서 신의 존재성과 악의 기원에 관한 이원적 해석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열렬한 정통기독교신자로 개종하게 된 히포의 주교(bishop of Hippo),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유명한 신국론(De Civitate Dei, the City of God)이나 참회록(Confessione, Confessions)에서 제롬의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라틴역들이 더 친숙했고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의 27서체제는 수용했다. 나는 고대 철학과 시절에 펭귄판 신국론을 읽으면서 거기에 인용되고 있는 성구가 때때로 내가 알고 있는 성구와 달라 곤혹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성서의 축자(逐字) 완벽주의는 나의 삶의 많은 계기를 통하여 이렇게 물음표를 던졌던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성서의 출현 이후에도 라틴번역판의 우열에 관하여 끊임없이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하나의 정본으로 고착된 것은 루터의 독일말 성서번역 등에 충격을 받고 시작된 카운터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시대의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티롤지방의 도시 트렌트에서 바울 3세에 의하여 소집된 이 공의회는 1546484번째 회의에서 제롬의 번역을 토대로 한 신ㆍ구약성경 전체의 라틴 벌게이트판(the Latin Vulgate version)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일한 권위로서 선포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판본에 대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출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1592년 교황 클레멘트 8(Pope Clement V)에 의하여 소위 클레멘트 벌게이트(Clement Vulgate)가 출판되기에 이르렀고 일체의 다른 판본들은 회수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모든 신도들이 확실하게 인지해야 할 사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일통(一統)의 성서개념은 1592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27서목록이 물리적으로 고착된 것은 16세기말에나 이루어진 사건이다. 더구나 1963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교리헌장’(Dogmatic Constitution on Divine Revelation) 속에서 벌게이트판 성경이 기여한 바는 지대하지만 그것이 유일무이한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허용하는 유연성을 과시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교회는 계시된 모든 것에 관한 확실성의 근거를 오직 성서 하나로부터만 끄집어내지는 않는다.’(Walter M. Abbott, S.J., The Documents of Vatican II, 117),

 

 

 

 

성서 대중보급은 주자의 사서집주보다도 후대

 

 

그리고 성서라는 것이 실제로 일반에게 유포된 것은 인쇄술발달 이후의 사건이며, 인쇄라는 대량출판의 방식이 나오기 전에는 획일적인 성서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킹 제임스 바이블(KJV) 이후부터나 영어문화권에서 성서가 보편화되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성서대중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서양은 우리 동양에 비해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이 늦다. 그러니까 송대(宋代)에 이미 출판문화가 고도화되고 또 대중화되었던 동양의 사정에 비교해본다면 기독교성서의 보급은 주자(朱子)사서(四書) 보급보다도 뒤늦은 사태라는 세계사적 안목도 다시 한번 상기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367년 부활절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7서정경목록 발표
384 제롬(Jerome)4복음서 라틴 벌게이트 번역
405 제롬(Jerome)의 구약성서 라틴 벌게이트 완역
400년경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코우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 성립
151631 에라스무스(Erasmus)의 희랍어성경 초판본 출간
15229 말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역 신약성서 출간
154648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제롬의 신ㆍ구약성경
라틴 벌게이트를 유일한 성경으로 선포
1592 성서의 유일한 권위
클레멘트 벌게이트(Clement Vulgate) 성립
1611 영어성경 킹 제임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성립
1872 티쉔도르프 희랍어신약성경 완간
1883 최초의 한국말성경 소격난 장로교회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의 누가복음 성립
1898 에버하르트 네슬의 희랍어신약 성립
1901 미국표준판(American Standard Version) 성립
1952 미국의 개정표준판(Revised Standard Version) 성립
19376 우리말 개역성서 성립
195210 개역한글판 성립
19715 공동번역신약성서(외경 포함) 성립
1977 공동번역신구약성서 완간
2005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경 성립
1963 2차 바티칸 공의회 라틴 벌게이트가 유일한 권위는 아니라고 선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칼 바르트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같이 수업, 20세기 신학의 거봉이 되었다. 영지주의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비신화화 논리에 의해 비신화적 합리적 세계관에 걸맞는 성서 해석의 신기원을 수립했다. 그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그의 논리와 언어의 실존적 심오함에 있다.

 

 

명제와 말씀

 

 

성서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자! 다음의 문장을 보라!

 

1) 나는 학교에 간다. (한국말)

2) I go to school. (영어)

3) 学校きます. (일본어)

4) 我去學校. (중국어)

 

아주 간단한 예이지만, 동일한 의미구조라 할까, 하여튼 통사론적 결구도 다르고 선택한 어휘도 다르지만, 같은 말을 나라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표현에 따라 병렬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4개의 문장 속에는 동일한 하나의 명제(proposition)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명제라는 것은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다. 그 명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Logos)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여기 쓰여져 있는 문자형상체계에 갇혀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성서라는 종이 위에 쓰여있는 문자형상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그 종이 위의 형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고귀한 능력을 모독하는 것이다. 상기의 표에 나타난 모든 성서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느 것도 원본은 아니다. 쿰란 사해문서 중에서 아람어 사본들이 발견되면서 요즈음은 Q자료가 단순히 한 권의 희랍어자료가 아니라, 아람어로 된 예수말씀집이 있었으며 그것의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데까지 성서신학은 발전해가고 있다모리스 캐시의 Q자료에 관한 아람어적 접근을 보라. 최근에 내가 읽은 책으로서 매우 감명 깊었던 책이다. Maurice Casey, An Aramaic Approach to Q,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상기의 나는 학교에 간다라는 명제의 의미의 지평을 또 따져 들어가 보면, 과연 그 말이 학교건물을 구경하러 가는 것인지, 학교에 비즈니스하러 가는 것인지,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것인지, 학교에 가르치러 가는 것인지, 학교에 학점 따러 가는 것인지, 학교에 테니스치러 가는 것인지, 도무지 그 의미의 지평은 확정지을 길이 없다. 이토록 간단한 말씀의 명제를 놓고도 이토록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의 지평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분들 스스로 고민해보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문서이다. 이것은 도마복음서가 들어있는 제2 코우덱스의 한 부분이다. 파피루스가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책 모양으로 제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제본된 것을 다시 겉에서 가죽으로 싸서 끈으로 묶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문서의 발견 경로는 제17장에서 자세히 나온다. 20세기 최대의 문서발견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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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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