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도전
사도 바울은 우선 다신론적인 아테네의 분위기를 지적한다. 신상으로 가득 차 있는 아테네의 거리를 보고 우선 헬라스 사람들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준다. 그러나 신들이 하도 잡다하게 많아, ‘미처 알 수도 없는 신’들에게까지 제사지내고 있는 그들 신앙의 그릇된 현황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배하는 신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의 협애한 상상력 속에서 제조된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들을 초월하는 이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 살지 않는 구체화시키기 어려운 단 하나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든 형상은 아니지만 모든 개개인의 삶 속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존재라는 역설을 말한다. 우리는 그 하나님, 그 분 안에서 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특유한 종말론적 교설을 선포한다. 그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사람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종말론적 구원의 증거를 보이셨다. 바울의 테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며,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다. 이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령한다.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람들에게 하등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언사가 아니다. 당대 헬레니즘시대는 이미 우주에 대한 법칙적 사고가 성숙했으며, 인생의 궁극적 진리에 관하여서도 종말론적 선포가 하등의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인간 심성(心性)에 관한 인본주의적 해석이 난숙해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부활을 근거로 회개를 명령하는 바울의 논리가 아테네에서 먹혔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상황에 관해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매우 담담한 필치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바울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훗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 17:32. 공동번역),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역사적으로 실존한 하나의 인간이, 아무리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를 이론적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육신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종말론적 회개의 근거로서 선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케리그마로써 인본주의적 정신이 성숙한 헬레니즘세계를 공략해 들어갔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특이한 자기 자신의 비젼에 미쳐버린 광적인 지식인의 독백에 그친 사태가 아니라, 실제로 바울의 생애 당대에 이미 그러한 교설과 믿음이 헬레니즘세계에 광범하게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의 죽음과 부활의 미스터리를 푸는 것보다 더 난해한 사태일지도 모르겠다. 사도 바울은 동학의 케리그마를 유포시킨 해월(海月)의 이야기보다는 더 성공적인 족적을 인류사에 남겼던 것이다.
인용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성서고고학의 양대 사건: 쿰란과 나그 함마디 (0) | 2022.02.27 |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헬레니즘의 로고스를 격파한 기독교 (0) | 2022.02.27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회의학파 (0) | 2022.02.27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에피큐로스학파 (0) | 2022.02.27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 스토아학파의 사상 (0) | 2022.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