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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6장 나일강 유역의 수도원 문화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16장 나일강 유역의 수도원 문화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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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나일강 유역의 수도원 문화

안토니와 파코미우스

 

 

모나스티시즘의 발생동기

 

 

이 나일강 주변으로 소위 모나스티시즘(monasticism), 즉 수도사 생활이라든가 수도원 제도가 성행케 된 그 원조가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c.251~356)라는 인물이다.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이 안토니라는 인물의 전기를 썼다. 성 안토니의 생애(Life of St. Anthony)가 그것이다.

 

수도원제도가 반드시 고독이나 명상을 즐기는 제한된 극소수의 상층민이나 지식인들에 의하여 선호된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AD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자 기독교는 갑자기 허전해졌다. 즉 순교의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순교를 전제로 하고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은 세속에 대한 철저한 거부가 있었다. 교회의 평화가 길어지게 되자, 신도들의 삶은 자연히 도덕적으로 해이하게 되고 기대하던 재림은 지연되면서 신앙생활의 긴박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되면 순교에 대한 열정, 그러한 열렬한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이세간적(離世間的) 금욕주의 (asceticism)로 전환하게 된다.

 

 

 

 

착취당하는 팔레스타인 농부와 예수

 

 

예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그에게도 세속적 가치에 대한 부정이 있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현세종교로서만 생각하고 교회를 현세적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친교의 장, 그러니까 일종의 소셜클럽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초기기독교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마태복음 19에 실려있는 유대 계명을 잘 지키는 어느 청년과 예수의 유명한 대화를 대부분의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19:21~22)

 

 

지금 이러한 성경구절을 놓고 교회에서는 추상적인 해석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 목사님들 입장에서 본다면 부자신도들의 존재가 조직운영상 매우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경구절을 문자 그대로 강요하면 교회가 빈한해져서 교회공동체 성립 자체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는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정황으로 볼 때는 매우 리얼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는 것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일부로서 농경이 가능한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도 농부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였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국가에서 부과하는 세금 이외로, 십일조(the tithes)라는 종교적 조세가 있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들, 성전, 그리고 레위파 성전 스탭들, 그리고 명목상의 빈한층구제사업을 지원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이것만 해도 이 명목 저 명목 다 합치면 소출의 20%를 거두어갔다. 그런데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로마조세제도가 이 위에 가중하여 부과되었다. 토지세 1%, 소출세 12.5%, 그리고 다양한 공물, 관세, 통행세를 다 합치면 약 35%가 되었다. 게다가 로마관청은 이것을 직접 거두기가 힘드니까, 지역마다 부유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수세농민’(tax farmers)제도를 만들어 그들을 통해 거두어갔다. 이들은 항상 덧붙여 받는 특권이 있어 그 차액을 착취했다. 이것을 다 합치면 소출의 60% 이상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은 강우량이 적어 비옥하질 못하다. 우리나라의 김제평야전군가도나 풍산뜰 같은 너른 들을 보기 어렵다.

 

고려조에도 자작농의 경우 국가에게 소출 10%의 수조권(收租權)이 있었다. 그런데 국가는 이 수조권을 녹봉개념으로 고급관리들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국가는 한 관리가 임기가 끝나면 그 수조권을 다른 관리에게 넘긴다. 그러나 소출의 10% 세금을 받아먹던 관리집안에서는 대대로 그 수조권을 클레임(claim)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역사가 흐르다보면 한 땅에 주인이 7, 8명이 생긴다. 농민은 자기 땅을 가지고 죽으라고 농사지어봐야 심할 때는 그 귀한 싸락의 90%를 다 빼앗기고 만다.

 

이 토지겸병과 차경제(借耕制)의 불합리성을 근원적으로 혁파하여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균산주의(均産主義)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 고려말 신흥유생들의 움직임이었고 그 열기를 역성혁명으로 집약시킨 것이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정도전과 같은 정치혁명의 길을 거부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12:17, 22:21, 20:25)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조세거부운동에 정치적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따르려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라! 그래야 나를 따를 자격이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는 철저히 조세제도의 착취에 시달려 신음하던 농민, 그래서 땅 잃고 부랑하는 천민들과 운명을 같이 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식색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곤혹스럽고 가장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이 맹자(孟子)의 말대로 ()ㆍ색()이다. 식에 대해서는 부자에 대한 거부가 예수의 모든 메시지에 깔려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19:23), 그런데 색()의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는 비슷한 입장이 있었다.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결혼했던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요한복음 2에 나오는 포도주 이적의 가나 혼인잔치가 예수 자신의 결혼식 설화가 변형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최소한 공생애를 통하여 독신이었다. 그리고 독신생활의 고귀함에 대해 긍정적 가치관을 내비쳤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로 아내를 내쳐버리고 새 장가를 드는 자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들이 아내에게 이와 같이 할진대 아예 장가를 들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나 다 이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이 실천할 수 있다.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사람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고, 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내 말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알아듣고 실천하여라.” (19:9~12)

 

 

선천적인 태생의 고자(eunuch)가 있고, 환관 같은 후천적 고자가 있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예수는 그의 주변의 제자나 추종인들이 대부분 결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독신생활의 절제, 성욕의 억제를 권장했던 것이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바울도 천국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권장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 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 7:8)

 

내 뜻에는 그냥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전 7:40)

 

 

 

 

세속적 가치의 부정: 불교와 기독교

 

 

천국의 강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구질구질하게 결혼하여 몸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것(고전 7:35)이 더 낫다는 바울의 권장이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분위기는 오늘날의 시중 기독교를 생각나게 하기보다는, 비하라(석굴 승방)를 찾아다니는 초기불교교단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기실 부귀와 같은 세속적 가치의 거부, 그리고 초세간적(超世間的)ㆍ이세간적(離世間的) 해탈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동시대의 동 언어권의 인도유러피안 문화권의 패러다임에 속해 있다. 기독교는 그 해탈을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으로 완성하려 했고 불교는 그 해탈을 자기 마음의 각성(Enlightenment)으로 달성하려 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헬라스ㆍ로마의 신화적 문명권으로 진입하였고 불교는 중국ㆍ한국의 인문주의적 문명권으로 진입하여 제각기 다른 역사적 양상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헬라ㆍ로마 신화문명   중동ㆍ인도 문명 패러다임   중국ㆍ한국 인문문명
Hellenistic-Roman Mythological Civilization   기독교ㆍ불교
ChristianityBuddhism
  Sino-Korean Humanistic Civilization

<세계문명사의 대세 흐름>

 

 

나일강 유역의 수도원 문화의 융성은 초기에는 기독교 교회내의 만연되어가는 부패현상, 관습적 예배, 제한된 봉사에서 떠나려는 평신도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점점 가중하는 조세제도로 세리나 토지관리인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러한 고통스러운 현세로부터 근원적으로 떠나가려는 각성된 농부들의 움직임도 수도원문화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영어로는 이들을 앵코라이트(anchorite, 은둔자)라고 부르는데 은둔을 의미하는 희랍어 아나코레시스(anachorēsis)에서 왔다. 빈한(貧寒), 독신(獨身), 명상(冥想)은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다. 기독교 도덕을 위협하는 부패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유롭게 1:1로 신을 만나려는 명상의 열정에 이들은 헌신했다.

 

 

 

 

안토니의 생애

 

 

이러한 모든 움직임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는 안토니(Anthony, c.251~356)는 중부 이집트 헤프타노미스 코마(Koma)의 콥틱어를 쓰는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대로 실천했다. 나이 20세 때 부모에게서 받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동네의 가장 편벽한 곳에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전념했다. 테베의 바울(Paul of Thebes)이라고 하는 노승의 지도를 받으며 금욕생활을 실천했다.

 

그렇게 15년을 하다가 더 완벽한 고독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사막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피스피르(Pispir, 현재 Dayr al-Maymūn)라고 불리는 나일강변의 산에서 절해고도의 절대고독과 싸우며 자그마치 20년간(286~305)을 홀로 수행했다. 안토니의 전기를 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악마의 형상들과 투쟁하면서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영적 순결성(spiritual purity)의 거의 완벽한 상태에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안토니의 고행과정을 엿보면 꼭 욕계의 주인 마라(Mara), 마왕 파피야스의 다양한 변신들과 투쟁하며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들어간 싯달타(Siddhartha)의 모습이 떠오른다. 안토니에게도 악마는 다양한 비젼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떤 때는 요염하고 달콤하게, 어떤 때는 징그러운 공포로, 그가 단식중에는 노승이 빵을 가지고 찾아와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날짐승이 덮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리따운 여인이 유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인이 창을 들고 나타나 찌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안토니를 휘갈기는데 거의 죽음의 직전까지 휘몰아가기도 했다. 사탄에 의하여 나타나는 이 모든 환영을 그는 열렬한 기도와 참회의 행동으로 물리쳤다. 안토니의 이러한 항마성도(降魔成道)의 고행과정은 후대 문학과 회화의 끊임없는 주제가 되었다(in the painting of Hiëronymus Bosch, Mattia Grünewald, Max Ernst). 이러한 심적 투쟁을 겪고 안토니는 기독교 수행운동의 매우 건전하고도 합리적인 조사(祖師)가 되었다.

 

그는 30520년 만에 그 항마성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산한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같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성자의 모습으로 지도하고 가르쳤다. 313밀라노칙령이 발표되면서 기독교인의 박해가 종식되고 오히려 그들이 우쭐대는 세상이 오자, 그는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동부사막(Eastern Desert)의 한적한 한 산으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는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머물렀던 곳에 지금도 다이르 마리 안토니오스(Dayr Māri Antonios) 수도원이 건재하고 있다.

 

그를 본받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 남서부 니트리 아사막지역에서 시작하여, 나일 델타, 그리고 인도의 아잔타지역을 방불케 하는 수행토굴로 가득찬 스케테사막(Scete)으로 뻗쳐나갔다.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105세에 죽었는데(365117), 그가 죽었을 당시 수천 명의 토굴 수행승이 있었다고 한다. 안토니의 수행방식을 보통 에레미티즘(eremitis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이며 은둔적인 수행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성령파나 수도승들이 세속적 판단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이 있다. 안토니(Anthony, c.251~356)는 알렉산드리아에 두번을 방문했는데(두 번째 방문은 350년경), 모두 아리아니즘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안토니는 철저하게 아타나시우스파였다. 아니, 이들은 본질적으로 파벌의식이나 도그마의식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나 아타나시우스가 이들을 매우 현명하게 활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생애와 밀착되어 있고, 우리가 논의해야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의 성과와 관련되어 있는 또 하나의 수도승이 있다. 이제 우리는 파코미우스(Pachomius, c. 290~346)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인류사상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

 

 

우리는 앞에서 잠깐 파코미우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알렉산더 주교의 뒤를 이어 주교직을 승계했을 때(328), 그는 이집트와 리비아 전역을 샅샅이 심방했다. 이때 그는 체노보스 키온 부근의 콥틱 승려들을 방문하였고 당시 그들의 리더이며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파코미우스를 만나 깊은 우정을 맺는다. 파코미우스는 아타나시우스 주교보다 약간 연상이었다(8세 혹은 3세 위).

 

파코미우스는 바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체노보스키온 문서가 대량 발견된 바로 그 지역, 체노보스키온(Chenoboskion, 콥틱어로는 슈네세트, Schneset)의 콥틱어를 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북아프리카 로마군대의 병정으로 징집을 당해 끌려나가 현재의 이스나(Isna) 지역 라토폴리스(Latopolis, 아스완댐 아래)에 주둔한다. 그런데 같은 동료장병 중에 콥틱 크리스챤들이 있었고 그들의 삶의 진지함에 감명을 받고 그 지역 크리스챤들의 덕성스러운 삶의 자세,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분 계급을 초월한 개방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314년경 제대 후에 그는 그의 고향 체노보스키온으로 귀향하여 곧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팔레몬(Palemon)이라는 은둔자를 만나 그의 영적 지도 아래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실천한다. 그 지역은 이미 안토니(Anthony, c.251~356)의 영향 아래 수없는 에레미티즘의 수도승들이 토굴 속에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코미우스는 개인적인 수도(修道)의 한계를 절감하고, 단체적인 규칙생활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수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 이르게 된다. 덴데라(Dendera) 가까운 곳, 나일강 동편의 버려진 동네에 수도원을 짓고 담을 높게 둘러 쌓았다. 그는 이곳을 타벤니스(Tabennis)라고 불렀다(318), 이것이 아마도 인류사상 최초로 본격적으로 시도된 기독교 수도원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타벤니스 수도원이 유명하게 된 것은 집단수도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율이 문서로 기록되었고 그 문서가 제롬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파코미우스는 그 수도승을 위한 규율(the Rule)을 콥틱어로 썼는데, 제롬은 그 콥틱어본의 희랍어역본을 구하여 라틴어로 번역했다. 제롬의 번역은 서양의 수도원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모든 수도원이 기실 파코미우스의 규율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파코미우스는 이 규율을 한 천사가 계속 나타나 말해주었고 그는 그 천사의 말을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 규율집은 성서와 동일한 권위를 갖게 되었고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헤구멘

 

 

타벤니스의 높은 담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엄격한 공동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동(koinos) 생활(bios)이라는 희랍어원에 따라 영어로는 세노비티즘(cenobitism, coenobitism)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공동생활 수도승을 세노바이트(cenobite)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안토니(Anthony, c.251~356) 계열의 개별적 은둔수도승 앵코라이트(anchorite)와 대별된다. 앵코라이트는 혼자 자유롭게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반면, 세노바이트는 완벽하게 규정된 공동규율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 일어나는 시간, 낮에 사는 생활 스케쥴, 자는 시간이 모두 결정되어 있으며, 공동기도, 공동식사, 공동경작, 공동복장, 공동다이어트규칙, 공동사용이 결정되어 있다. 이 모두에 엄격한 공동매너가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는 수도승들의 영적 지도자가 있어, 그를 헤구멘(hegummen)이라고 부르는데, 헤구민은 영적 스승일 뿐 아니라 수도승들이 아무 생각없이 수도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해야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판 주지와 조실 스님의 양면을 다 구비해야 한다. 파코미우스는 매우 유능한 헤구멘이었다.

 

타벤니스의 수도원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자 그는 수도원을 주변지역에 개척했다. 남자를 위해 9개를 지었고, 여자를 위해 2개를 지었다. 그는 이 11개의 수도원을 관할하기 위해 근거지를 타벤니스에서 파바우(Pabau, 현재 Faw Qibli)로 옮겼다. 파바우 수도원은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운동(monastic movement)의 행정센터였다.

 

여기서 그는 헤구멘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파바우의 폐허를 가보면 상당히 우람찬 돌기둥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꽤 훌륭한 수도원이었던 것 같다. 수도원 교회가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데 건물이 계속 증축된 흔적을 보이고 붉은 화강암 기둥들, 석회석의 주춧돌들, 수없는 질그릇 파편, 올리브기름을 짜는 화강암 맷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 화강암 기둥이나 파편에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고 예술적 조각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기존의 이집트 신전 건물의 파편들을 재활용한 것 같다.

 

그의 여동생 마리아(Mary)도 여성수도원의 첫 헤구멘되었고, 아주 부유했던 페트로니우스(Petronius)라는 승려가 파코미우스를 계속 도왔기 때문에 파코미우스는 수도원의 헤구멘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 조직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346년에 열병이 휩쓸어 약 100여 명의 수도승이 희생되었는데 파코미우스도 34659일 열병 속에 그들과 함께 영면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할하에 약 7,000명의 남녀수도승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파코미우스 수도원운동의 행정센터였던 파바우 수도원이다. 이 사진에서 뒤에 뿌옇게 보이는 고원모양의 산이 바로 게벨 에트 타리프(Gebel et Tarif)이다. 그곳에서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체노보스키은 문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수도원과 문서 발견지는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콘스탄티우스의 아타나시우스 탄압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를 지원하는 로마의 콘스탄스 황제가 암살되고(350),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가 독존의 황제가 되면서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콘스탄티우스는 선제가 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삼위일체에 관한 결정을 취소해버리고 동방교회의 대다수 주류파인 아리우스의 이념에 따라 새로운 가톨릭 통일정책을 세우려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동방교회의 일반정서를 존중하여 동방교회를 주축으로 가톨릭의 서방로마중심축을 전환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아리아니즘을 이단으로 휘몰면서 목숨걸고 투쟁해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러나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직을 박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시켜야 했는지는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 너무도 상세히 보고되어 있다. 아타나시우스를 파멸시키기 위한 예비조치로서 그를 지원하던 서방의 정통파 주교들이 모두 불명예스럽게 추방되었다. 이집트의 행정당국은 도저히 자체의 힘으로써는 아타나시우스가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할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급기야 북부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동원할 것을 이집트의 대공(大公) 시리아누스(Syrianus, duke of Egypt)에게 비밀리에 명한다. 3562월 어느날 밤, 지중해에 상륙한 5,000명의 군대는 완전무장한 채 알렉산드리아 시내 중심가로 신속히 입성한다. 아타나시우스가 성직자와 일반민중과 함께 야간미사를 행하고 있던 성 테오나스 교회(the church of St. Theonas)를 습격한다. 맹렬한 공격으로 성당 문이 열리고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주교와 사제들은 잔인한 모욕을 당했고, 봉헌된 성()처녀들이 발가벗겨져 채찍질 당했고, 또 욕정에 굶주린 우악스러운 병사들은 여린 처녀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해버렸다. 부유한 시민들의 집이 약탈되었다. 종교적 열정이라는 가면 아래,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심지어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온갖 탐욕과 욕정, 그리고 사적인 원한을 마음껏 충족하였던 것이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3).

 

 

성 테오나스 교회가 시리아누스의 군대에게 습격받던 바로 그 긴 밤, 아타나시우스는 대주교의 의자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침착, 담대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노의 함성과 공포의 절규로 예배를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벌벌 떨고 있는 회중에게, 거만하고 믿음 없는 이집트의 폭군을 징벌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 하나(아마도 136: ‘에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을 치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를 암송케 하여, 그들의 종교적 확신을 표현케 함으로써 그들을 북돋았다. 마침내 문이 깨져 열리고 시편을 암송하던 회중들에게 화살이 구름처럼 쏟아졌다. 로마 병정들이 칼을 뽑아들고, 성소로 몰려갔고, 제단 주변에서 타고 있던 성스러운 촛불에 반사되어 군인들의 갑옷이 공포스럽게 번쩍거렸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사제들과 장로들의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경건한 간구를 아직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중의 최후 1인까지 안전하게 대피할 때까지 그의 교구의 책임있는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밤의 어둠과 소란이 그의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그는 허둥대는 인파에 밀려 땅바닥에 넘어진 채 의식과 행동력을 잃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불굴의 용기를 되찾아, 자신의 짤린 대가리를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가장 좋아하는 선물로서 바치고 싶어하는, 아리우스파 앞잡이들에 의하여 사주되고 있는 군인들의 맹렬한 수색을 용케 피해나갔다. 이 순간부터 이집트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적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막의 꿰뚫어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4~ 5).

 

 

나는 60년대 대학시절에 데모한다고 도바리치는 생활을 해본 적도 있고, 80년대 교수시절에 도바리치며 도망 다니는 학생들을 도와준 적도 있지만, 향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6년간의 삶은 박정희전두환 아래서의 민주투사들의 도바리역정과 비슷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전 군ㆍ민이 그를 추적했고 산 채로나 죽은 채로 그를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보상금이 약속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국가의 적이었으며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파코미우스의 보호

 

 

바로 그를 보호해준 것은 체노보스키온 근처에 산재해있던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과 그 수도승집단이었다. 이때 이미 파코미우스는 저승으로 떠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스승 파코미우스와 젊은 날에 우정을 맺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를 그들의 헤구멘 이상으로 보호하고 성심껏 섬겼다. 성스러운 뿔피리로 나팔을 불면 수천 명의 건장하고 신념에 찬 수도승들이 모여 아타나시우스를 보호했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 근처의 순박한 농민출신들이었으며 자기들이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밀면서 사형집행인의 팔만 아프게 했다. 어떠한 고문을 통해서도 이 훈련된 수도승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신속히 여기저기로 몸을 숨겨 다닐 수 있었다. 무협영화의 스릴있는 장면보다 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많은 로맨스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빈 큰 수조에 숨어 살다가 여자 노예의 배반으로 발각되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기상천외의 은신처에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그곳은 섬세한 미모로 온 도시에서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20세의 소문난 처녀의 집이었다.

몇 년 후에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한밤중에 거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황망히 문을 두드린 대주교의 모습에 그녀는 경악했다. 대주교는 그녀의 감싸주는 지붕 아래서 거처를 구하라는 하늘의 계시에 인도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하면서 보호해줄 것을 간구했다. 이 신앙심 깊은 처녀는 자기를 믿고 찾아온 이 성스러운 인질을 받아들이고 보호했으며 용기와 신중함으로 신의 계시에 보답했다. 그녀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즉시 아타나시우스를 그녀의 가장 비밀스러운 챔버로 안내하여 다정한 친구처럼, 그리고 부지런한 하녀처럼 그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위험이 계속되는 동안 그에게 책과 음식을 가져다주고, 발을 씻어주고, 서신 연락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간의 너무도 친근하고 고독한 교제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도록 매우 적절하게 은폐시켰다. 한 사람은 흠집없는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자였고, 한 사람은 열화와 같은 위험한 감정을 도발시킬 수 있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7).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승리했다. 그리고 367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정경체제를 발표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니케아 종교회의 결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로마제국을 로마가톨릭중심의 기독교체제로 일원화시키는 반석을 공고하게 닦은 것이다. 여기서 아타나시우스와 파코미우스 승려들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외경을 없애버려라

 

 

혹자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에 협력하는 파코미우스와 파코미우스 승려들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단적인 영지주의 문서들이 유포될 수 있었는가 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것은 후대의 역사적 가치관을 가지고 초기전승사의 실상을 왜곡하는 매우 기초적인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 이미 누누이 강조했듯이 영지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에 관하여 깊은 연구를 한 하바드 신학대학의 여류신학자 카렌 킹(Karen L. King)의 말대로 영지주의라는 것은 결코 실체화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수사학적 구성물이었을 뿐이다. 영지주의라는 술어 자체가 이단을 규정하기 위하여 만든 수사학적 허구가 하나의 실제적 현상인 것처럼 그 나름대로 존재화(실체화)되어버린 것이다(Karen L, King, What is Gonosticism? 189).

 

다시 말해서 파코미우스의 승려들에게는 당시 오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도라는 삶의 과제만 있었고 사상적인 통제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도 이 파코미우스 승려들과 함께 은둔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아리아니즘의 배면에는 광막한, 소위 영지주의로 규정된 헬라ㆍ로마ㆍ이집트의 창조적인 사상의 홍류가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홍류를 방치하면 기독교는 일정한 방향이 없이 표류하리라는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파코미우스의 파바우 수도원에는 방대한 콥틱기독교 파피루스 문헌들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었으며 이 문헌들은 공동기도나 공동챈팅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정경ㆍ외경의 구분이 없었고, 27서 성경의 기준적 개념이 없을 때였다. 물론 불교식의 대장경결집으로 말한다면 모두 당연히 경장(經藏) 속에 편집되어야 할 수트라(sūtra, 正經, 修多羅)들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대주교서한이 체노보스키온지역 파바우 수도원에도 전달되었다. AD 3673월말이었다. “외경적 텍스트들은 이단자들의 날조에 불과하다. 사도의 이름을 팔기도 하고, 마치 고문서인 것처럼 집필시기를 위장하기도 하여 순박한 영혼들을 타락시킨다. 이제 27서 이외의 문헌은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되어서도 아니 된다. 이제 정경과 외경을 확연히 구분하는 신중한 분별심을 가지고 외경은 없애버려야 한다.”

 

 

 

 

라이브러리의 은폐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 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 대주교의 서한에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을까? 아타나시우스의 생명의 은인인 이 수도승들에게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서한이 도착한 후 이들은 계속해서 회의를 열었다. 혹자는 이제 외경이 되어 버린 서적들은 불살라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이 서물들을 보관할 수는 없으되 태워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서물들은 후대를 위하여 항아리에 밀봉되어 저 바위절벽 동굴 속에 은폐되는 것이 마땅하다. 성스러운 문헌들은 인간이 처리하는 것보다는 신의 의지에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바미얀 대불을 폭파시키는(200131일 폭파 시작) 21세기의 탈레반 미치광이들보다는 훨씬 더 온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이 그 항아리를 묻은 곳은 파바우 파코미우스 수도원에서 보이는 한 10리 밖의 자발 알 타리프(Jabal al-Tarif, or Gebel et Tarif) 바위산 절벽기슭이었다. 항아리를 땅에 파묻고 둥근 바위로 눌러놓은 것을 보아, 그것을 파묻은 사람은 언젠가 그것을 다시 가져갈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그리고 157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조선 땅에서는 이런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다. 손때묻은 책이 항아리 속에서 16세기 동안을 온전하게 버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너무 축복받은 삼천리금수강산의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곰팡이도 그 신의 혜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습기는 치명적이다. 쿰란이나 체노보스키온에서 고고학적 기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삶의 환경이 너무도 각박하기 때문이다. 습기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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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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