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록의 뒤에 쓰다
제천마록후(題天磨錄後)
이행(李荇)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권리천마색 의의상안개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사인금이의 고도일유재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세우령통사 사양만월대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사생증계활 쇠백독배회 『容齋先生集』 卷之二
해석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 책 속 천마의 산색 흐리나 오히려 눈앞에 펼쳐지네. |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 이 사람 지금은 없어졌고 옛길 날로 아득해지리라. |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 가랑비 영통사에 내리고, 비낀 해 만월대에 비치네. |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 죽고 살아 일찍이 보질 못하니【계활(契闊): ‘삶을 위하여 애쓰고 고생함’ 또는 ‘오래 만나지 않음’ 또는 ‘서로 연락이 끊어짐.’을 뜻한다.】, 쇠한 백발로 홀로 배회하네. 『容齋先生集』 卷之二 |
해설
이 시는 박은(朴誾)이 죽고 난 후 함께 천마산을 올랐던 기록인 「천마록』 뒤에 쓴 회고시(懷古詩)이다.
「천마록」을 꺼내 읽어 보니, 책 속에 천마산에서 함께 노닐던 일들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박은은 죽고 없어 함께 걷던 옛길이 나날이 아득해진다.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 석양이 비껴 있는 만월대를 함께 거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죽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박은은 죽고 쇠약한 백발의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아 배회하고 있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90번에서 위 시와 관련하여 시(詩)에 지명(地名)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중국의 지명은 모두 문자로서 시에 들어가면 아름답다. 예를 들면, ‘봄풀 너머 구강이 흐르고, 저녁 배 앞에 삼협이 놓여 있네(杜甫의 「遊子」)’, ‘물기운은 운몽택을 찌고, 파도는 악양루를 흔드네(孟浩然의 「臨洞庭」)’는 지명에 단지 몇 자를 더했을 뿐인데도 시가 빛을 낸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지명이 모두 방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용재 이행의
「천마록』에 ……의 구절이나, 소재 노수신의 「한강」에 ‘저자도(뚝섬)에 봄이 깊어 가고, 제천정(보광동 언덕 한강변에 있던 정자 이름)에 달 오르네’가 있는데, 아름답지 않는가? 시의 아름다움은 오직 단련을 오묘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지 중국 지명과 우리나라 지명의 차이에 있지 않다[世謂: “中國地名皆文字, 入詩便佳. 如‘九江春草外, 三峽暮帆前.’ ‘氣蒸雲夢澤, 波撼岳陽樓.’等句, 只加數字而能生色. 我東方皆以方言成地名, 不合於詩.”云. 余以爲不然, 李容齋「天磨錄」詩: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蘇齋「漢江」詩云: ‘春深楮子島, 月出濟川亭.’ 詩豈不佳? 惟在鑪錘之妙而已].”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행(李荇)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ㆍ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ㆍ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ㆍ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ㆍ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ㆍ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康海)ㆍ이몽양(李夢陽: 明의 前七子로 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 唐以上文獻邈如. 雖乙支, 眞德之詩, 彙在史家,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 及羅季, 孤雲學士始大厥譽. 以今觀之, 文菲以萎; 詩粗以弱. 使在許ㆍ鄭間, 亦形其醜, 乃欲使盛唐爭其工耶? 麗代知常, 足窺一斑, 亦晩李中穠麗者. 仁老ㆍ奎報, 或淸或奇, 陳澕ㆍ洪侃, 亦腴艶, 而俱不出長公度內耳. 及至益齋倡始, 稼ㆍ牧繼躅, 圃ㆍ陶ㆍ惕, 爲季葉名家. 逮國初, 三峯ㆍ陽村, 獨擅其名, 文章至是, 始可稱達. 追琢炳烺, 足曰丕變, 而中興之功, 文靖爲鉅焉. 中間金文簡得圃ㆍ陽之緖, 人謂大家. 只恨文竅之透不高. 其後容齋相詩入神, 申ㆍ鄭亦瞠乎其後. 蘇相又力振之, 玆數公, 使生中國, 則詎盡下於康ㆍ李二公乎? 當今之業,, 文推崔東皐, 詩推李益之, 俱是千年以來絶調.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 此外則不能知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214~21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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