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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왕가의 기원 서유럽 왕가의 기원 합스부르크와 서유럽 왕가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1부 씨앗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최초의 국제사회 아리아인의 등장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
합스부르크와 서유럽 왕가 위 그림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동안 복잡한 혼맥을 통해 형성되는 서유럽 왕가를 보여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비롯해 에스파냐(합스부르크, 부르봉), 영국(튜더, 스튜어트), 프랑스(부르봉)의 여러 왕실이 어지러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통혼으로 부르고뉴와 밀라노 일대의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으며, 이사벨 부부는 에스파냐를 통합했다. 이 결과를 송두리째 상속받은 사람이 바로 카를 5세다. 그러나 그는 당대에만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했고, 결국 동생(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아들(벨리페 2세)에게 에스파냐를 물려주고 물러난다. 한편 이사벨 부부의 또 다른 딸 캐서린은 영국..
2. 서양 문명의 끊임없는 이동 후엔 그보다 더 직접적인 사례는 은행과 신용의 개념이다. 12세기 북이탈리아에서는 중세 자치도시들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환전상이 생겨났고, 이들이 근대 은행의 맹아를 이루게 되었다. 알다시피 은행이란 돈을 맡겨두는 곳이다. 무엇을 믿고 자신의 귀중한 재산을 맡길까? 그것은 바로 신용이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은행의 탄생과 동시에 신용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는 상인들 간에 어음을 사용한 지는 오래되었어도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 은행은 매우 생소했다. 장사꾼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신용의 관념이 없지 않았으나 도덕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을 뿐 경제의 개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상인들이 필요에 따라 자체로 금융과 은행 ..
에필로그 서양 문명의 전 지구적 이동, ‘글로벌 문명’ 다음은 ‘로컬 문명’으로 1. 명령과 계약 서양사의 길고 거친 탐색이 끝났다. 보통 서양사라고 하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고, 그다음은 역사라기보다 시사에 속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대, 즉 현대는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역사로 분류될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서양이나 동양이라는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사가 된다. 서양사와 동양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맨 끝장(7장)에서는 전후 지금까지 세계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1만 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했으니 아무래도 거칠 수밖에 없다. 역사 읽기를 ..
미국의 지위와 역할② 이유는 간단하다. 냉전 시대가 과도기였다는 점에 있다. 냉전 시대에 한 진영의 우두머리였던 미국은 그 시대가 지나자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럼 원래의 위치는 무엇일까? 미국은 서양 문명의 ‘훌륭한’ 후손이지만 관리자나 지배자의 지위는 아니었다. 학급으로 비유하면 미국은 학급을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교사가 아니라 반장의 역할이다. 반장은 반을 통솔하고 관리할 뿐 총책임을 지는 위치는 아니다. 급우들도 반장을 급우 대표라고는 인정해도 교사에게처럼 복종하지는 않는다. 반장은 명령을 내리는 지위가 아니고, 급우들도 반장의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다. 반장은 이해관계가 다양한 급우들의 의견을 총괄하고 급우들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지위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면서도 국제연합에서 ..
미국의 지위와 역할 숲의 호랑이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남은 한 마리가 숲의 단독 주인이 되어 모든 동물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산 호랑이도 바로 그렇게 하려 했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숲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모든 신민 위에서 군림하려 했다. 1991년 미국에서 멀고 먼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해묵은 영토 분쟁에 끼어든 게 그 예다. 이 문제의 뿌리는 30년 전인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사태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미국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태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서아시아의 석유 이권을 노린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 냉전 ..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③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사회주의권을 블록화하려 한 것은 반대 진영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과거의 유제인 제국 체제의 ‘본능’에서 탈피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동유럽 지역은 제국의 속주‘에 해당한다). 그래도 전선이 둘로 갈려 매우 단순했던 냉전 시대에는 그런 체제가 어느 정도 통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다원화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그런 낡은 발상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그런 점에서도 냉전 체제는 역시 과도적이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소련의 코앞에서부터 붕괴되었다. 1980년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Lech Watesa)가 공산당과 무관한 자유노조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 소련 ..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② 앞서 본 것처럼 사회주의 신생국인 소련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신경제정책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단계의 생략을 뒤늦게 만회하려는 노력이었다. 정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로 진입하려면 자본주의 단계를 통한 생산력의 발전이 필요한데, 그 단계가 생략되었기에 인위적으로 공백을 메우려 한 것이다. 혁명이 끝난 뒤에 비로소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행정이 거꾸로 되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일단 즉각적인 효과는 있었다. 혁명 직후 붕괴 직전에 놓였던 소련 경제는 신 경제정책이 끝날 무렵 상당히 건강을 되찾았다. 신생국 ..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1917년 레닌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은 사회주의의 실현인 동시에 변질이었다. 사회주의 이론을 구성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의 ‘태내에서’ 생겨나야 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사회에서 그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본주의가 자동 붕괴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해야 했다. 그 계기가 사회혁명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지만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혁명이 될 수 없었다【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특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이전까지 적합했던 소유관계와 갈등을 빚게 된다.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힘이었..
다원화를 향한 추세② 묘한 것은 냉전 체제를 이루는 두 진영의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에서는 냉전 시대를 거치며 다원화의 논리가 점차 관철되는 추세를 보였다. 소련이 아무리 국제주의 원칙과 인위적 블록 체제로 결속을 다지려 해도 우두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대오의 이탈은 막을 수 없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1947년에 코민포름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 본부도 베오그라드에 유치했으나, 금세 180도 태도를 바꾸어 바로 이듬해에 코민포름을 탈퇴하고(실은 축출이지만)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대대적인 반소비에트 대중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소련이 직접 개입해 정권을 교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
다원화를 향한 추세 냉전 체제는 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다원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한 차례의 국제전이 끝나면 신흥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전통을 가진 유럽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천 년의 중앙집권적 제국사를 전개해온 중국 사회에서도 근대에 접어들어 사회 계층의 분화가 뚜렷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체제는 다원화의 무의식적 흐름을 의식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우선 체제는 양대 진영으로 단순해졌어도 국가의 수는 급증했다.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1951)가 이탈리아로부터, 수단(1956)이 영국으로부터, 콩고(1960)와 알제리(1962)가 프랑스로부..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② 싸우지 않고서 상대방을 제압하려면 덩치를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 양 진영은 각자 똘마니들을 끌어들여 세 불리기에 매진한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유럽 주요 국가와 캐나다를 동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시아 지역에도 그런 장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1954년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이에 맞서 소련은 1947년에 동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코민포름을 결성했으며, 19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조직해 본격적인 냉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디 우두머리의 임무는 뭐니 뭐니 해도 조직을 관리하는 데 있고 이를 ..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첫째, 앞으로 유럽 세계에는 국제전이 없을 것이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 공산주의 진영의 두 체제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답은 하나다. 즉 이제부터는 유럽 지역이 아닌 곳에서 유럽 세계의 체제 모순이 대리전 혹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은 세계사적 필연성의 소산이다. 당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필 한반도에서 그런 전쟁이 터졌다는 게 억울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 체제 대립을 국지전으로 표출할 만한 ‘마당’은 한반도 이외에 없었다. 우선 유럽은 제외해야 했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열외다. 남은 곳은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인데, 실은 서아시..
전혀 다른 전후 처리② 그러나 현실이 변화하는 속도는 그들이 대처하는 속도를 앞질렀다. 장차 등장할 새 국제 질서가 전 지구적 체제 대립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은 이미 전쟁 중에 감지되었으나 그것이 냉전 체제로 현실화된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변화의 속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패전국과 식민지에서 하나씩 찾을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분단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패전국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이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만큼 연합국이 독일을 온전히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응징이 분단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 분단이 그토록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종전이 되기 전에 죽은 루스벨트는 물론이고 처칠과 스탈린조차 예상하지 ..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기..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② 그 긴장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잠시 국제 파시즘이 지배한 동유럽 국가들은 불행하게도 전통적인 지배층이 대부분 파시즘과 결탁하고 있었다. 독립을 이루면서 국내의 반파시즘 세력이 지배층을 쫓아내고 집권했는데, 그 중심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전후에도 여전히 약소국의 신세인 탓에 서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그 나라들은 전후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소련으로 붙었다(물론 소련도 적극적으로 손짓을 보냈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유럽 국가들의 지배 세력이 파시즘에 붙은 이유는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오스트리아는 항상 동유럽을 노렸고, 동유럽의 지배층도 오스트리아와 자주 야합했다.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붕괴한 이후 동유럽은 늘 여..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2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세계는 사상 처음 겪은 엄청난 전쟁의 규모에 경악했다. 또 그런 만큼 이것으로 전쟁은 끝인 줄 알았다. 이보다 더 큰 전쟁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한 번만으로 족할 줄 알았던 세계대전은 겨우 20년 뒤에, 그것도 더욱 큰 규모로 터져 나왔다(사망자의 수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의 두 배가 넘었다). 그제야 세계는 얼마든지 더 큰 전쟁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 그럴 경우 세계는 공멸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유럽인들은 중세에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이유를 새삼 생각해 보았다(십자군 전쟁이야 오래 질질 끌었을 뿐이지 대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들어온 뒤부터 대형 국제전들이 연이어 벌어..
변수는 미국③ 진주만 기습부터 1942년 봄까지 몇 개월간은 추축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원래 공격자는 속전속결이 유리한 법이므로 장기전이 되면서 불리해지는 쪽은 그들이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에는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것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승산이 희박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과연 역전의 계기는 태평양에서 먼저 생겨났다. 1942년 2월에 영국 동북아시아군의 항복을 받아 제해권을 장악하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손에 넣을 때까지 일본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로써 그들이 구호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달성된 듯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신을 차리면서 전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5월 남태평양의 코랄 해전에서 일본군은 개전 후 첫 패배..
변수는 미국② 그러나 문제는 영국이다. 서유럽을 손에 넣었어도 영국이 존재하는 한 유럽의 패권은 없다. 루이 14세의 시대나 나폴레옹의 시대나 늘 그랬고, 히틀러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던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즉시 영국과 타협을 모색했다. 사실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부터 영국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강화를 이루려 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경파인 처칠이 버티고 있었으니 다시 거절당한 것은 당연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7월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노선을 바꾸고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의 공군기지와 전투기들에 대한 공습에 나섰다. 9월에는 런던 시내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에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전 세계 파시즘은 한 몸..
변수는 미국 처칠 내각이 성립한 바로 그날(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공군과의 긴밀한 공조 체제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는 손쉽게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프랑스 국경에 다가섰다. 그러나 코앞에까지 접근한 독일군을 두고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믿은 것은 육군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건의에 따라 1938년에 완공한 마지노선이었다. 독일과의 접경지대를 따라 두꺼운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고 중화력을 구비하고 공기 조절 장치와 주거 시설, 휴게 시설, 보급 창고까지 갖춘 마지노선, 그러나 이 완벽한 요새에 대한 독일의 대응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효과적이었다. 강하면 피하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굳이 정면 돌..
준비된 전쟁② 그러는 동안 히틀러의 행보는 갈수록 빨라졌다. 1939년 5월에는 파시즘 형제인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어 추축을 완성하고(베를린과 로마가 같은 경도상에 위치했기에 ‘추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8월 23일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의 중립을 약속 받았다는 것은 곧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독일은 불과 며칠 뒤인 9월 1일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노골적인 군대의 이동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개전 2주일 만에 폴란드 주력군을 격파하자 동쪽의 소련도 러시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공격했다(또 다시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야합했다). ..
준비된 전쟁 국제 파시즘의 위협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세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은 ‘파시즘의 총수’ 히틀러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불과 20여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작성된 모든 기록을 깨고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신기록들을 세우게 될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같은 세계대전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성격이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한 것이고 ‘정상적인 힘의 대결’로 기존의 판도를 깨려 한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 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파시즘이 주도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출발점부터 제1차 세계대전과 달랐..
파시즘의 힘② 프랑코는 단기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나, 무력하고 불안하게만 보이던 인민전선 정부는 막상 위기에 처하자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사실 맨 먼저 쿠데타에 대응한 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 들이었다. 이들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무기고와 총포점을 습격해 무장하고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의 활약으로 국내의 파시즘 세력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로코에 주둔해 있는 프랑코의 반란군의 본산이었다. 해군이 반란군을 지지하지 않는 바람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프랑코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비행기를 모로코로 보낸 것이다. 게다가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에 경제원조와..
파시즘의 힘 19세기 말 미국에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긴 뒤 에스파냐에 남은 식민지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 모로코의 해안 지대와 대서양의 몇몇 섬들뿐이었다. 비록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은 이미 오래전에 영국에 넘겨주었지만, 어느새 유럽의 최후진국이 되어버린 에스파냐를 보면 언제 그런 영광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17세기부터 보수와 수구의 대명사가 된 가톨릭은 여전히 에스파냐를 총본산으로 삼고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공화국 실험’을 진압하면서 실력자로 나선 군부는 기톨릭과 결탁해 에스파냐의 부패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전통적으로 지방색이 강한 탓에 제대로 된 국민국가의 모습조차 취하기 어려웠다(에스파냐 특유의 지역 분리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
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애초부터 큰 힘을 쓰지 못한 베르사유 체제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신생국들만 빼고는 1930년대부터 일제히 약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적인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은 신생국답지 않은 노련한 국가 운영을 선보였다.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한 소련은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합하고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레닌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를 누르고 승리한 스탈린(losif Stalin..
파시즘이라는 신무기② 공화국이 사라졌으니 이제 독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점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명쾌했다. 그는 독일을 ‘제3제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굳이 제국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문을 닫은 독일제국에 이어 두 번째일 텐데 왜 세 번째라고 했을까? 그는 역사적 근거를 들었다.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제국은 첫 번째가 아니다.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히틀러는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통을 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칭은 총통이었지만 그는 황제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것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로마 황제를. 그래도 거기까지는 특별히 탓할 게 없고 굳이 미화하자면 독일식 민족주의의 발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기로 나..
파시즘이라는 신무기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치에 입당하던 1919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지도자가 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한 무솔리니는 파시즘(fascism)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모든 이탈리아 국민의 결속을 주장했는데, 파시즘이란 ‘결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왔으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오늘날 파시즘의 원흉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사회주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게다가 소련식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거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상..
암흑의 목요일② 하지만 독주에는 제동이 걸리게 마련이다.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지속될 수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국 경제의 큰 문제는 과잉생산이라는 점이었다. 자본 과잉에다 생산 과잉, 세계 전체가 가난해졌는데 미국만이 부자라는 것은 결국 수요의 부족을 낳을 테고, 그 결과는 세계의 단독 자본가이자 생산자인 미국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그 문제점이 드러나는 과정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너무도 순간적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가인 월스트리트에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주가가 사상 최대로 폭락했다. 사상 최초의 대공황이 시작된 이날은 목요일이었기에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고 부른다. 대공황의 물결은 몇 개월 만에 전 미국을 초토화시켰다. 직..
암흑의 목요일 19세기에 미국은 지리적인 조건을 십분 활용해, 유럽의 복잡한 정세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산업혁명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9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은 오히려 영국보다 미국이 주도했다). 말하자면 단물만 빼먹은 셈이다. 그 당분은 미국을 급속도로 살찌웠고, 뒤늦게 나선 식민지 경쟁에서도 미국은 유럽 열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과를 올렸다. 1867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 황실로부터 헐값으로 알래스카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264쪽의 주 참조. 그런데 20세기 초에 알래스카와 비슷한 운명을 겪을 뻔한 지역이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생겨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 쑨원(孫文, 1866~1925)은 혁명정부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를 일본에 팔아넘길 구상을 하고 일본의 가쓰라..
평화의 모순② 극단적 좌파를 배제하고 온건 좌파의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새 공화국은 개혁 의지가 충만했다. 정부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했고, 노동자의 각종 권리를 보장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여 유럽의 국제사회 속에서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였다. 독일이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갚지 못할 금액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그때까지 유럽 열강과 미국은 독일의 신생 공화국을 지원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경험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그에 따라 물가..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만..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② 8월 말, 코르닐로프는 휘하 군대에게 수도 진격을 명령했다. 임시정부마저도 무시한 반란 행위였다. 볼셰비키는 이제 합법적인 자격으로 반란군을 막았다【볼셰비키는 이미 적군(赤軍)이라는 자체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레닌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이론가였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는 1917년 4월에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로 적군을 편성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적군은 러시아의 정규군이 된다】. 코르닐로프가 체포됨으로써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제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10월 23일, 껍데기만 남은 임시정부는 뒤늦게 볼셰비키를 공격하는 데 나섰으나 볼셰비키는 간단히 맞받아쳐 손쉽게 임시정부를 타도했다. 이것이 러시아에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성립시킨 10월 ..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차르가 물러나자 일단 러시아의 정권은 의회에 넘겨졌다. 의회는 서둘러 임시정부를 구성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은 이번 혁명을 12년 전처럼 불발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혁명을 완성하려면 혁명정부가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참여하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새로운 권력체를 만들었다.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와 민중이 구성한 소비에트 정부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1905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소비에트가 생긴 것만이 아니다. 혁명적 대중 외에 볼셰비키라는 혁명의 지도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1917년 4월에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
혁명의 러시아② 일본은 이미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만주에서 육군이 연패하고 황해에서 해군이 궤멸당하는 지경에까지 간 뒤에야 차르 정부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바로 그때 ‘피의 일요일’ 사태가 터졌다.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으로는 1월 9일)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5만 명의 수많은 군중이 차르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해 운집했다. 멀리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판에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그런 소요 사태를 차르 정부가 반가워할 리는 없었다. 친위대는 궁전으로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사망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이후 수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나라 밖보다 안이 급해진 니콜라이는 일본에 만주와..
혁명의 러시아 1918년 4월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전후 연합국이 러시아에 거의 전범처럼 취급하고 특히 가혹하게 나온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그전까지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것은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고, 전선에서 철수한 것은 새로 생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니 이렇게 본다면 러시아는 ‘배신자’도 아닌 셈이었다. 국가의 위상으로 따진다면 러시아는 전쟁에서 연합국이 아니라 동맹국 측이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선진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서유럽 국가도 아닌, 후발 제국주의 국가에다 슬라브족..
다시 온 수습의 계절②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의 주요 세력이던 오스만 제국은 원래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케말 파사(Kemal Pasha, 1881~1938)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이 반정부군을 구성하더니 유명무실해진 제국을 대신해 연합국의 간섭에 거세게 저항했다. 분할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어차피 이교도 세계인 소아시아를 영토적으로 지배할 자신이 없던 연합국은 결국 그들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케말 파샤는 연합국 측과 로잔 조약을 맺고 새로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한때 동유럽을 호령하며 서유럽 세계까지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은 6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나라들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따라 교통정리만 해주면 되었다. ..
다시 온 수습의 계절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세계 분할이 완료되면서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일단 완성되었다. 어지러운 유럽의 국제 정세는 대립하는 두 개의 축으로 단순화되었다. 남은 것은 전쟁이든 외교든 양측의 이해관계를 정산하는 절차였다. 여기서 현실의 역사는 전쟁을 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양대 제국주의 세력이 맞붙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질서의 완료이자 새로운 재편을 향한 진통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득권층은 신흥 세력을 누르고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참전국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후 질서를 수립했고,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위트레흐트..
신구 열강의 대결② 장기전이 되자 새삼스럽게 중요해진 것은 보급로였다. 특히 해외 식민지로부터 필요한 군수물자를 수송해 올 수 있는 해상 보급로가 중요했다. 장기전의 양상으로 1917년까지 전선이 교착되면서 팽팽하게 맞서던 전황이 깨지게 된 계기는 바로 바다에서 발생한다. 독일 해군은 전통에 빛나는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해권을 빼앗긴 독일은 물자 수송은커녕 그동안 획득한 해외 식민지마저 차츰 잃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독일은 비상 카드를 빼어들었는데, 이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인 잠수함 U보트는 북해를 장악한 영국 해군만이 아니라 민간 상선들에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으며, 나아가 중립국의 상선과 여객선마저도 침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뜩이나 동맹국 측에 불리한 ..
신구 열강의 대결 전선은 예상한 것처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으로 갈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한편으로는 명분을 쌓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을 늘리기 위해 각자 중립국들을 영입하려는 활발한 외교전을 병행했다. 그 결과로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체질상’으로 일본은 동맹국에 속해야 하지만 영일동맹 때문에 본색을 숨겼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측으로 참전했고, 이듬해인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배반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며【이탈리아는 삼국동맹 소속이지만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여섯 나라 가운데 국력에서나 군사력에서 가장 약했으므로 어느 쪽으로 가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전쟁과 더불어 전개된 어지러운 외교전에서 이탈리아의 거취가 가지는..
최초의 세계대전② 비록 황태자가 죽었지만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에 큰 손실이 아니었다. 왕조시대 같으면 왕위 계승이 걸린 문제지만 이제는 정치적 구실로만 이용될 뿐이다. 오히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세르비아의 야심을 꺾고 발칸을 쉽게 장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 달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양측은 서로 외교 통로를 동원하면서 비교적 점잖게 사태를 이끌었다. 그러나 양측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는 외교 카드로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월 말부터 사태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드디어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가 그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소식은 곧바로 유..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드..
태풍의 눈이 된 독일② 어쨌든 1871년 이후 2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유럽에서는 작은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비스마르크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노련했던 그도 젊은 패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88년 스물아홉 살에 독일 황제가 된 빌헬름 2세(1859~1941, 재위 1888~1918)는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와 달리 비스마르크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비스마르크처럼 프랑스 공포증에 걸리지도 않은 데다 독일을 강대국으로 키우려면 해외 식민지 경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빌헬름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옳았으나 문제는 역시 프랑스였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프랑스는..
태풍의 눈이 된 독일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정복지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유럽이 해외 진출을 처음 시작했던 15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어 타협을 이루었고 그 타협을 주재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28~29쪽 참조). 이제 그런 주재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열강은 어떻게 서로의 식민지를 승인하고 타협을 이루었을까? 더구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을 불사했으면서도 묘하게도 그 다툼을 유럽으로 연장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모처럼 짜놓은 유럽의 판도를 깨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과 타협이 어우러지는 이런 고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축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개척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또 한..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③ 한편 영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긴장한 프랑스는 알제리 기지의 영토화를 서둘렀다. 알제리 남쪽은 사하라 사막이므로 프랑스가 아프리카 영토를 개척하려면 동서 방향밖에 없었다. 1883년 알제리 동쪽의 튀니지가 프랑스령이 되었고, 뒤이어 알제리 서남부에는 방대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들어섰다. 이에 맞서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점령하고 중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남하를 막았다. 서로의 식민지가 가까워지자 양측은 어떤 식으로든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875년 이집트 왕실이 재정난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내놓자 이를 재빨리 사들였다. 어차피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라는 영국이었으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도 별로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②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아프리카를 영토화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무역에 대한 프랑스의 욕심은 한 가지 기발한 발상을 낳았다. 1832년 이집트에 근무하던 프랑스 외교관 레스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있는 수에즈 운하를 구상했다. 20여 년 뒤 그는 외교관을 그만둔 다음 1858년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1869년 운하를 완공하게 된다. 그와 비슷한 무렵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서 아프리카의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었다. 대항해시대에 발견된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가 건설한 케이프 식민지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은 종교 분쟁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들을 보어(Boer)인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이..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유럽의 판도가 정해지고 유럽에서 더 이상 영토 분쟁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제부터 유럽 국가들이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영토를 놓고 다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해외 식민지 개척에 분주했던 유럽 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가 잡히자 1870년대부터 곧바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에 유럽의 모든 나라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구가 없는 지리적 여건상 해외 진출이 불가능할뿐더러 전통적으로 공을 들인 곳이 동유럽이었으므로 해외 진출에 나설 의지도 약했다. 또 러시아는 유럽에서 항구를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스칸디나비아와 에스파냐 역시 해외 진출에 나설 힘이 부족했다. ..
폭풍 전야의 유럽④ 그래도 좁은 지역에 여러 나라가 들어선 만큼 발칸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19세기 후반 서유럽 세계에서 독립국으로 승인한 나라는 그리스·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였으나 그 밖에도 발칸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등이 사실상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지역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늘 ‘동쪽’에 관심이 컸는데, 독일제국이 성립한 뒤부터는 더욱 이곳에 매달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개입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한 이 지역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고, 결국에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무대가 된다. 미국은 서유럽 문명권이면서도 지리적으로 떨어져..
폭풍 전야의 유럽③ 19세기 중반 자유주의의 물결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에스파나도 뒤흔들었다.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 2세(1830~1904, 재위 1833~1868)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1868년에 혁명으로 쫓겨났다(앞에서 본 것처럼 이 왕위 계승 문제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듬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에스파냐에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군대가 실력자로 대두되면서 1874년에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이후 정정 불안으로 에스파냐는 내내 유럽의 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1866년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즉각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오스트리아에 복속되어 있던 헝가리에서 거센 독..
폭풍 전야의 유럽②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유럽 문명의 심장이었으면서도 뒤늦게 통일 국가를 이룸으로써 장차 커다란 문제로 자라날 씨앗을 품게 되었다. 곧이어 보겠지만,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와 신흥국인 미국까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이 부문의 경쟁에 뛰어든 독일과 이탈리아는 자연히 판을 깨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20세기 들어 대규모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게다가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시민사회의 전통과 역사가 짧기 때문에 쉽게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는 20세기에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스칸디나비아 3국(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은 어떤 의미에서 유럽의 오지이기 때문에 행복했던..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통일에 몸 바친 두 사람② 그러나 카보우르의 모든 작업은 터를 닦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무엇을 위한 터일까? 물론 이탈리아의 통일이다. 카보우르의 정책은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 육성은 장차 통일 전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그림 전쟁에 참전한 것은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우방으로 삼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을 밑천으로 카보우르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와 밀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사르데나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롬바르디아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복은 화를 부르는 법, 사르데냐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경계심을 품은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휴전을 맺었다. 다 된 밥에 프랑스..
통일에 몸 바친 두 사람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이 통일을 이루면서 대륙 중심부의 국제 질서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프랑스는 패전의 충격으로, 또 독일은 ‘신생국’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으로 내부가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비화할 만한 국제적 분쟁거리는 사라졌다. 이제 교통정리가 필요한 곳은 르네상스 이후 내내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서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한 이탈리아다. 빈 회의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복귀하면서 이탈리아는 예전처럼 다시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인 북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는 남이탈리아로 나뉘었다(중부에는 여전히 교황령이 있었으나 교황의 권력과 더불어 추락해 약간의 영토만 남아 있을 뿐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
대륙의 서열 짓기④ 황제가 항복했다는 비보가 파리에 전해지자 프랑스 측은 그제야 비로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고,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역사상 세 번째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기울어졌고, 프랑스로서는 공격전이 아니라 ‘항전’을 벌이는 처지였다. 이미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한 프로이센군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10월까지 메스와 스트라스부르 등 프랑스 동부 지역 요새는 전부 프로이센에 함락되었고, 곧이어 수도 파리도 포위되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프랑스 혁명기 외국의 간섭을 막아낸 프랑스 국민들은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자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대륙의 서열 짓기③ 그러고 나서야 비스마르크는 4년간 무시해온 의회에 출두해 추후 승인을 요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성과에 할 말이 없었다(비스마르크가 의회와 정면 대결을 벌인 ‘철혈정책’이라고 하는데,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센에서는 이제 의회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비스마르크를 지지게 되었다. 이로써 안의 장애물은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남은 은 바깥의 대적, 프랑스다. 한편 프랑스의 상황은 프로이센과 정반대였다. 프로이센와 달리 혁명적인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과시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는 제정으로 바뀌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의 입김이 워낙 강해 는 거의 입헌군주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프로이센의 진출을 한 나폴레옹 3세는..
대륙의 서열 짓기② 보수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면 배타적 호전적 민족주의가 된다【근대국가를 먼저 이룬 게 영국과 프랑스인 만큼 이런 민족주의를 뜻하는 말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모두 있는데, 둘 다 19세기에 생겼다. “We don‘t want to fight but by Jingo if we do(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워야 한다면 결단코 싸우겠다)!”는 말에서 영어의 징고이즘(jingoism)이 나왔고, 나폴레옹을 신처럼 숭배한 프랑스 병사 쇼뱅의 이름에서 프랑스어의 쇼비니즘(chauvinism)이 나왔다. 둘 다 호전적 민족주의를 가리키는 용어다. 애국심은 좋은 것이고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실은 한 끗 차이다. 그래서 현대 독일의 어느 정치인은 양자를 이렇게 구분했다. “애국심은 자기 나라를 ..
대륙의 서열 짓기 대내 안정과 대외 팽창이 순조롭게 연결된 영국과 달리 대륙에서는 여전히 진통이 계속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똑같이 1848년의 혁명을 겪었다. 두 나라는 혁명이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지배층이 자유주의 개혁의 숙제를 떠안게 된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은 서로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나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특성은 바로 그 무렵에 뚜렷이 나타난다. 단적으로 말해 두 나라의 차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부터 힘이 약한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실패하자 곧바로 몰락했고, 자유주의 개혁의 총대는 자연스럽게 프로이센 정부가 매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바치는 제관을 거절했지만, 두 가지 ..
드러나지 않은 제국③ 노동자들은 이미 1832년 선거법 개정부터 불만이었다. 유권자의 자격이 확대되어도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산자야말로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래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으로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1839년 무려 128만 명의 서명으로 의회에 보통선거권을 구하는 국민청원을 보냈다. 당시 그들이 제출한 청원 문서는 헌장(People‘s Charter)이었으므로 여기서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이 나왔다(charter의 라틴어는 카르타 carta인데, 13세기의 마그나카르타영어로 Great Charter가 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정작으로 부르주아지의 힘을 늘려준 것은 노동자들인데, 막상 권력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
드러나지 않은 제국②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 사회는 단기간에 큰 변화를 겪었다. 1780년에 약 1300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인 1831년에는 2400만 명으로 거의 두 배가 되었으며, 특히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도시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의회 선거법은 이러한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여기서 터무니없는 문제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유권자가 349명인 버킹엄 선거구나 4772명인 리즈 선거구나 선출하는 의원의 수는 서로 같았는가 하면, 심지어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유권자가 격감해 거의 선거구의 구실도 못하는 지역(이것을 부패선거 구라고 불렀다)에서도 버젓이 대표를 선출했다. 당연히 선거법은 일찍부터 개정 대상이었지만 휘그당과 토리당 간의 당리당략 때문에 질질 끌어오..
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릴 ..
변방의 성장: 미국③ 이제 미국은 두 개의 국호·헌법·대통령이 존재하는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석에 몰렸다고 생각한 남부가 먼저 도발했다. 1861년 남군이 섬터에 주둔하던 북군의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측의 전력으로 보면 이 전쟁의 승부는 보나 마나 뻔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북부는 남부의 도발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전황은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미리 전쟁을 준비해 온 남부는 리(Robert Lee)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조직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반면 북부는 애초부터 남부를 얕잡아본 데다 수시로 총사령관이 바뀌는 등 지리멸렬했다. 처음에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던..
변방의 성장: 미국② 때마침 유럽에서 불어닥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미국은 영토만이 아니라 공업도 크게 발달했다. 미국의 철도와 운하, 각종 공업은 단기간에 크게 성장했다. 막상 산업혁명의 주역인 영국은 혜택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그 혜택만 누렸다. 후발 주자의 이득이었을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풍부한 노동력이 없으면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북부의 산업 노동력은 유럽 이주민들이 충당했지만, 남부의 넓은 평야를 경작하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노동 수요를 충당해준 것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였다. 이들은 남부의 대농장에서 식량 생산과 면화 재배에 투입되었는데,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북부의 공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인 노..
변방의 성장: 미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가 농노 해방령을 내린 1861년에 멀리 대서양 서쪽에서도 노예해방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노예해방을 내세우는 북부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미국의 역사는 마치 유럽의 근대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독립을 이룬 미국은 이제 유럽 각국과 동등한 선상에서 근대국가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 각국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 종교전쟁과 같은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유럽에서 종교전쟁은 각개약진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했을 뿐이고 본격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
변방의 성장: 러시아③ 후진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가 서유럽의 두 강국을 상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최악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더욱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1856년 파리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의 중립을 약속하고 더 이상 남하를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내부 모순이 산적해 있는 러시아로서는 대외 진출을 통해 그 모순을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면 안에서 곪아터지는 길밖에 없었다. 전쟁 직후 죽은 니콜라이(패전에 좌절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에 이어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 재위 1855~1881)는 아버지에 비해 훨씬 ‘계몽된 군주’였다. 최소한 그는 내부의 문제를 바깥으로 옮기려 한 니콜라이의 정책을 계승하지는 않았다. 1861년 그는 오랜 숙제..
변방의 성장: 러시아② 그런데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각성한 것은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똑같았어도 차르 정부의 답안은 인텔리겐치아와 정반대였다. 니콜라이는 자유주의마저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르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상과 활동이 불법화되었고(물론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인텔리겐치아들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의 비밀 조직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은 차르의 수족인 비밀경찰이 맡았다. 16세기 후반 이반 4세가 발동을 건 러시아 차리즘은 니콜라이의 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물론 니콜라이도 러시아가 후진국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원인을 러시아 내부의 탓으로 돌리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을 뿐이다(그렇다면 차르 체제 자체가 문제될 테니까)...
변방의 성장: 러시아 러시아 지식인들이 새로운 이념인 사회주의 사상을 특히 환영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해가던 19세기 초반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후진국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제국이라는 낡은 체제【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 세계에서 제국은 오스만과 러시아 둘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후진국이었다. 이제 제국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이 점은 제국 체제가 수천 년간 존속해온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청 제국은 18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세기 초반부터는 서양 세력의 본격적인 침탈을 받게 되었다】에다 여전히 중세적 신분제가 존속하고 있었다(농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워낙 덩치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② 6월에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가 패배한 것은 독일 영방군주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었다. 그다음 10월에 오스트리아에서 2차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반혁명 세력에게 이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일정대로 이듬해 3월에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격상시켰으나, 사태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영악하게도 의회를 인정할 수 없으니 제위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그는 로마 교황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황제도 아닌 ‘일개 의회’ 따위가 황제를 임명하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제관을 받는다면 의회에 굴복하는 게 되니까). 이것을 신호탄으로 영방군주들은 혁명 시기에 자유주의 세력에게 내주었던 양보를 일제히 철회..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또 1830년의 7월 혁명이 그랬듯이, 1848년 2월 혁명도 프랑스보다는 인접한 이웃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 혁명이 수출된 곳은 독일이다. 빈 체제가 들어선 이래 오스트리아가 힘에도 부치는 유럽 세계의 조정자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프로이센은 착실히 영토와 세력을 확장해 남독일까지 아우르면서 명실상부한 독일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남독일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지역보다 중부 유럽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더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 세계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주된 ‘투자 지역’은 그쪽이 아니라 북쪽의 독일이라는 것을 쉽..
다시 온 혁명의 시대③ 그러나 그의 권력을 승계한 것은 그의 손자가 아니라 임시였다.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곧바로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에도 의회야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 의회는 아주 특별했다. 랑스 사상 처음으로, 유럽 사상 처음으로,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성인 남자가 투표에 참여하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그전까지 프랑스의 의회 선거에서는 정한 재산을 소유해야만 유권자의 자격이 주어졌다(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200프랑의 세금을 내야만 가능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은 처음으로 보통선거 제도를 입안한 적이 있었으나 사정상 실시가 보류된 바 있었으므로 보통선거는 이것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성은 제외되었다. 여성의 참정권은 세계 최초인 뉴질랜드(1..
다시 온 혁명의 시대② 제2의 프랑스 혁명일까? 그러나 그건 아니다. 우선 샤를의 ‘새로운 구체제’는 불과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7월 30일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부르봉 왕조의 문을 닫았다【프랑스에서 사라진 부르봉 왕조는 이후 에스파냐에만 남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조는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대체로 1931년 프랑코의 공화정 독재가 성립할 때까지 존속했고, 1975년 공화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다시 에스파냐 왕실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중세 이후 유럽 최대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나 성장했다가 결국은 에스파냐로 와서 몰락하는 같은 길을 걸었다】. 결과도 프랑스 혁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권을 타도한 세력은 하층 부르..
다시 온 혁명의 시대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의 독립은 빈 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아직은 변방의 사건들이었으므로 빈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변방의 바람은 곧이어 중심에도 밀어닥쳤다. 그 무대는 또다시 프랑스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1755~1824, 재위 1814~1824)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프랑스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은 무너졌어도 혁명이 이룬 변화는 망각되지 않았다. 새 헌법은 개인의 권리와 평등권, 재산권 등 혁명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의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현명한 왕이었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려 했으나, 혁명..
200년 만의 외교④ 사실 독립의 물결은 떨리 가야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신생국은 아니지만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서도 오랜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15세기 이후 동유럽의 주인 노릇을 한 오스만튀르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대프랑스 동맹에도 참여했지만, 서유럽 국가들은 이제 늙고 병든 튀르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새삼 이교도 국가와 행동을 같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300년 가까이 튀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그리스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유럽 국가들이 어디를 지원할 것인지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테르니히의 태도다. 이제까지 유럽의 국제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해 온 그가 그리스에 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
200년 만의 외교③ 전후의 리더로 떠오른 영국은 독일 지역이야 어차피 관할권이 아니니까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독일 자유주의 운동이 가혹하게 진압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가 옛 가톨릭권이자 보수의 한 축을 이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나폴리의 자유주의 운동까지 진압하려 들자 영국은 내정간섭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소극적 반대인 탓에 그 지역에서도 메테르니히의 무력 진압이 성공했지만, 뒤이어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의 물결이 일자 영국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독립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은 식민지 미국이 ‘세계 최강의 본국’과 싸워 승리한 데서 큰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유럽의 대서양 상선들을 타고 멀리 이곳까지 전해졌다. 유럽에..
200년 만의 외교②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독일이다. 아무리 회의의 모토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해도 나폴레옹이 문을 닫은 신성 로마 제국까지 부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독일 지역에는 북부에 프로이센, 남부에 오스트리아라는 중심이 있으므로, 회의에서는 이 두 나라를 축으로 많은 소국가를 어느 정도 교통정리하기로 했다. 마침 18세기까지 독일 지역에 300여 개나 난립한 영방국가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서로 이합집산을 이룬 결과 10분의 1로 줄어들어 있어 통합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는 35개 영방국가와 4개 자유시를 승인하고 그들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한데 묶어 새로 독일연방‘을 구성하도록 했다. 비록 느슨한 연방체이긴 하지만 이제 비로소 ‘독일’ 이라는 이름을 ..
200년 만의 외교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1814년 9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실로 오랜만의 외교 테이블이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이렇게 대규모의 국제회의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큰 전쟁이 끝났으니 당연히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어야 했다. 전후 질서와 논공행상, 그것이 빈 회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유럽의 상황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던 17세기 중반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영토 국가의 초창기였던 170년 전에는 일찍 영토의 중요성을 깨우친 나라들이 패전국들의 영토를 적당히 나누어 먹는 식으로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영토 문제라면 유럽의 어느 나라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판이었으..
36장(CHAPTER 36) 킹제임스 1 And the chief fathers of the families of the children of Gilead, the son of Machir, the son of Manasseh, of the families of the sons of Joseph, came near, and spake before Moses, and before the princes, the chief fathers of the children of Israel:2 And they said, The LORD commanded my lord to give the land for an inheritance by lot 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my lord wa..
35장(CHAPTER 35)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in the plains of Moab by Jordan [near] Jericho, saying,2 Command the children of Israel, that they give unto the Levites of the inheritance of their possession cities to dwell in; and ye shall give [also] unto the Levites suburbs for the cities round about them.3 And the cities shall they have to dwell in; and the suburbs of them shall be for ..
34장(CHAPTER 34)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Command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When ye come into the land of Canaan; (this [is] the land that shall fall unto you for an inheritance, [even] the land of Canaan with the coasts thereof:)3 Then your south quarter shall be from the wilderness of Zin along by the coast of Edom, and your south border shall be the outmo..
33장(CHAPTER 33) 킹제임스 1 These [are] the journeys of the children of Israel, which went forth out of the land of Egypt with their armies under the hand of Moses and Aaron.2 And Moses wrote their goings out according to their journeys by the commandment of the LORD: and these [are]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ir goings out.3 And they departed from Rameses in the first month, on the fifteenth day..
32장(CHAPTER 32) 킹제임스 1 Now the children of Reuben and the children of Gad had a very great multitude of cattle: and when they saw the land of Jazer, and the land of Gilead, that, behold, the place [was] a place for cattle;2 The children of Gad and the children of Reuben came and spake unto Moses, and to Eleazar the priest, and unto the princes of the congregation, saying,3 Ataroth, and Dibon, an..
31장(CHAPTER 31)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Avenge the children of Israel of the Midianites: afterward shalt thou be gathered unto thy people.3 And Moses spake unto the people, saying, Arm some of yourselves unto the war, and let them go against the Midianites, and avenge the LORD of Midian.4 Of every tribe a thousand, throughout all the tribes of Israel, shall ye send to the ..
30장(CHAPTER 30) 킹제임스 1 And Moses spake unto the heads of the tribes concerning the children of Israel, saying, This [is] the thing which the LORD hath commanded.2 If a man vow a vow unto the LORD, or swear an oath to bind his soul with a bond; he shall not break his word, he shall do according to all that proceedeth out of his mouth.3 If a woman also vow a vow unto the LORD, and bind herself by ..
29장(CHAPTER 29) 킹제임스 1 And in the seventh month,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ye shall have an holy convocation; ye shall do no servile work: it is a day of blowing the trumpets unto you.2 And ye shall offer a burnt offering for a sweet savour unto the LORD; one young bullock, one ram, [and] seven lambs of the first year without blemish:3 And their meat offering [shall be of] flour mingled w..
28장(CHAPTER 28)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Command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My offering, [and] my bread for my sacrifices made by fire, [for] a sweet savour unto me, shall ye observe to offer unto me in their due season.3 And thou shalt say unto them, This [is] the offering made by fire which ye shall offer unto the LORD; two lambs of the first year without ..
27장(CHAPTER 27) 킹제임스 1 Then came the daughters of Zelophehad, the son of Hepher, the son of Gilead, the son of Machir, the son of Manasseh, of the families of Manasseh the son of Joseph: and these [are] the names of his daughters; Mahlah, Noah, and Hoglah, and Milcah, and Tirzah.2 And they stood before Moses, and before Eleazar the priest, and before the princes and all the congregation, [by] th..
26장(CHAPTER 26) 킹제임스 1 And it came to pass after the plague, that the LORD spake unto Moses and unto Eleazar the son of Aaron the priest, saying,2 Take the sum of all the congregation of the children of Israel, from twenty years old and upward, throughout their fathers' house, all that are able to go to war in Israel.3 And Moses and Eleazar the priest spake with them in the plains of Moab by Jor..
25장(CHAPTER 25) 킹제임스 1 And Israel abode in Shittim, and the people began to commit whoredom with the daughters of Moab.2 And they called the people unto the sacrifices of their gods: and the people did eat, and bowed down to their gods.3 And Israel joined himself unto Baal-peor: and the anger of the LORD was kindled against Israel.4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Take all the heads of the people,..
24장(CHAPTER 24) 킹제임스 1 And when Balaam saw that it pleased the LORD to bless Israel, he went not, as at other times, to seek for enchantments, but he set his face toward the wilderness.2 And Balaam lifted up his eyes, and he saw Israel abiding [in his tents] according to their tribes; and the spirit of God came upon him.3 And he took up his parable,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th said, an..
23장(CHAPTER 23) 킹제임스 1 And Balaam said unto Balak, Build me here seven altars, and prepare me here seven oxen and seven rams.2 And Balak did as Balaam had spoken; and Balak and Balaam offered on [every] altar a bullock and a ram.3 And Balaam said unto Balak, Stand by thy burnt offering, and I will go: peradventure the LORD will come to meet me: and whatsoever he sheweth me I will tell thee. And ..
22장(CHAPTER 22) 킹제임스 1 And the children of Israel set forward, and pitched in the plains of Moab on this side Jordan [by] Jericho.2 # And Balak the son of Zippor saw all that Israel had done to the Amorites.3 And Moab was sore afraid of the people, because they [were] many: and Moab was distressed because of the children of Israel.4 And Moab said unto the elders of Midian, Now shall this company..
21장(CHAPTER 21) 킹제임스 1 And [when] king Arad the Canaanite, which dwelt in the south, heard tell that Israel came by the way of the spies; then he fought against Israel, and took [some] of them prisoners.2 And Israel vowed a vow unto the LORD, and said, If thou wilt indeed deliver this people into my hand, then I will utterly destroy their cities.3 And the LORD hearkened to the voice of Israel, a..
20장(CHAPTER 20) 킹제임스 1 Then came the children of Israel, [even] the whole congregation, into the desert of Zin in the first month: and the people abode in Kadesh; and Miriam died there, and was buried there.2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congregation: and they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against Moses and against Aaron.3 And the people chode with Moses, and spake, saying, Would God that we ha..
19장(CHAPTER 19)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and unto Aaron, saying,2 This [is] the ordinance of the law which the LORD hath commanded, saying,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that they bring thee a red heifer without spot, wherein [is] no blemish, [and] upon which never came yoke:3 And ye shall give her unto Eleazar the priest, that he may bring her forth without the camp, and [one] ..
18장(CHAPTER 18)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aid unto Aaron, Thou and thy sons and thy father's house with thee shall bear the iniquity of the sanctuary: and thou and thy sons with thee shall bear the iniquity of your priesthood.2 And thy brethren also of the tribe of Levi, the tribe of thy father, bring thou with thee, that they may be joined unto thee, and minister unto thee: but thou and thy sons wit..
17장(CHAPTER 17)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take of every one of them a rod according to the house of [their] fathers, of all their princes according to the house of their fathers twelve rods: write thou every man's name upon his rod.3 And thou shalt write Aaron's name upon the rod of Levi: for one rod [shall be] for the head of the house..
16장(CHAPTER 16) 킹제임스 1 Now Korah, the son of Izhar, the son of Kohath, the son of Levi, and Dathan and Abiram, the sons of Eliab, and On, the son of Peleth, sons of Reuben, took [men]:2 And they rose up before Moses, with certain of the children of Israel, two hundred and fifty princes of the assembly, famous in the congregation, men of renown:3 And they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against Mose..
15장(CHAPTER 15)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When ye be come into the land of your habitations, which I give unto you,3 And will make an offering by fire unto the LORD, a burnt offering, or a sacrifice in performing a vow, or in a freewill offering, or in your solemn feasts, to make a sweet savour unto the LORD, of the herd,..
14장(CHAPTER 14) 킹제임스 1 And all the congregation lifted up their voice, and cried; and the people wept that night.2 And all the children of Israel murmured against Moses and against Aaron: and the whole congregation said unto them, Would God that we had died in the land of Egypt! or would God we had died in this wilderness!3 And wherefore hath the LORD brought us unto this land, to fall by the sw..
13장(CHAPTER 13) 킹제임스 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saying,2 Send thou men, that they may search the land of Canaan, which I give unto the children of Israel: of every tribe of their fathers shall ye send a man, every one a ruler among them.3 And Moses by the commandment of the LORD sent them from the wilderness of Paran: all those men [were] heads of the children of Israel.4 And these [were] ..
12장(CHAPTER 12) 킹제임스 1 And Miriam and Aaron spake against Moses because of the Ethiopian woman whom he had married: for he had married an Ethiopian woman.2 And they said, Hath the LORD indeed spoken only by Moses? hath he not spoken also by us? And the LORD heard [it].3 (Now the man Moses [was] very meek, above all the men which [were] upon the face of the earth.)4 And the LORD spake suddenly un..
11장(CHAPTER 11) 킹제임스 1 And [when] the people complained, it displeased the LORD: and the LORD heard [it]; and his anger was kindled; and the fire of the LORD burnt among them, and consumed [them that were] in the uttermost parts of the camp.2 And the people cried unto Moses; and when Moses prayed unto the LORD, the fire was quenched.3 And he called the name of the place Taberah: because the f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