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남
남가(南柯)
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자기 집 남쪽에 있는 늙은 괴나무 밑에서 술 취하여 자다가,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에 가서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가 되어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깨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잠자고 꿈꾸는 것을 비유한다.
남가몽(南柯夢)
① 남가의 꿈은 당(唐) 나라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기(南柯記)에서 나온 말이다. 그 주요 내용은,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당도하여 공주에게 장가들고 남가군(南柯郡) 태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패배하고 공주도 죽었으며 끝내는 국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 돌아오다가 꿈을 깨고 보니, 마당 앞 회나무 밑에 있는 개미굴이 곧 괴안국이었고 남가군은 회나무의 남쪽 가지의 또 다른 개미굴이었다고 하였다. 덧없는 인간 세상의 부귀 득실에 대한 우언으로, 이를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말한다.
② 덧없는 꿈, 또는 허무한 한때의 부귀영화. 꿈같은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말한다. 『이문록(異聞錄)』에 “순우분(淳于棼)이 괴수(槐樹)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웠는데, 꿈에 구멍 속으로 들어가니 괴안국(槐安國)이 있었다. 왕은 순우분을 임명하여 남가 군수(南柯郡守)를 삼으므로 놀라 깨어보니 묵은 괴나무 아래 구멍이 뚫려 사람이 드나들 만하고 그 속에 큰 개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 개미가 왕이었고, 구멍이 남지(南枝)로 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남가군이었다.”라고 하였다.
③ 한 때의 헛된 부귀. 한 사람이 홰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 왕의 사위가 되어 남가군(南柯郡)을 20년 동안 다스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꿈을 깨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당(唐)나라 때의 소설 남가기(南柯記)에서 유래한 말이다. / 유의어: 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일몽(南柯一夢), 여생지몽(盧生之夢), 여몽지침(呂翁之枕), 한단침(邯鄲枕), 한단지몽(邯鄲之夢), 황양몽(黃梁夢), 일취지몽(一炊之夢), 황양지침지몽(黃粱一炊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정의(南柯庭蟻)
‘남가군의 개미’란 말로, 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괴수(槐樹)의 남쪽 가지(南柯)밑에서 잠을 자다가 꿈에 괴안국(槐安國)이란 곳에 이르러 국왕의 딸과 결혼하고 남가군의 태수(太守)가 되어 대단한 영달(榮達)을 누렸는데, 깨고 나서 괴수의 밑을 보니 큰 개미 한 마리가 있어 그것이 바로 꿈에 본 괴안국의 임금이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남간(藍澗)
두보(杜甫)의 시 ‘9일 남전(藍田) 최씨장(崔氏莊)’의 셋째 연(聯)에 “남수는 멀리 천 시내를 쫓아 떨어지고[藍水遠從千澗落]”라 하였다.
남건(濫巾)
함부로 은사(隱士)를 흉내내어 은사의 두건(頭巾)을 쓴다는 뜻으로, 은사가 아니면서 은사인 체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남견(南犬)
남월(南越) 지방의 개는 눈(雪)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 한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의 호인데 초명은 지범(持範)이다. 자는 이서(彝敍), 본관은 해남(海南), 선도(善道)의 손자이며 다산보다 10세 연상이다.
남고자(南皐子)
윤지범(尹持範)을 가리킨다.
남곽궤(南郭几)
은자(隱者)의 안석(案席)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子綦 隱几而坐 仰天而噓 荅焉似喪其耦”라 하였다.
남곽궤전문지뢰(南郭几前聞地籟)
수양이 높은 경지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안석에 기대앉아서 멍하니 마치 자신조차도 잊어버린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짓고 있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너는 사람들의 피리 소리는 들었지만 땅의 퉁소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남곽자기는 천지의 대기(大氣)로 불어내는 바람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땅의 퉁소 소리란 곧 대지(大地)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이다.
남곽남취(南郭濫吹)
학문과 기예에 전문적 지식과 체계나 조리도 없이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남곽남우(南郭濫釪)
남곽이 함부로 우(대나무로 만든 악기로 피리의 일종이다)를 분다는 말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제나라의 선왕이 사람을 시켜 우를 불도록 할 때는 반드시 3백명이 불도록 하였다. 남곽 처사도 왕을 위해 우를 불기를 원했다. 선왕이 기뻐하였다.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했다. 민왕은 독주를 좋아하였다. 그러자 그 처사는 달아나버렸다. 일설에 한의 소후가 이런 말을 했다. ‘우를 부는 자가 많으므로 나는 그들 가운데 뛰어난 자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자 전엄이 대답하여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도록 하여 들어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남곽목(南郭木)
고목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에 기대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자기 몸을 잊은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다가 ‘형상을 고목(枯木)과 같이 할 수 있으며 마음을 재(灰)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고 하였다.
남곽병수(南郭病叟)
호가 남곽인 박동열(朴東說)을 말한다.
남곽선생만념회(南郭先生萬念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先生 …… 心固可使如死灰乎”라는 말이 있다.
남곽충금망물아(南郭冲襟忘物我)
남곽자기(南郭子綦)처럼 주객(主客)을 초월한 경지를 지녔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子綦 隱几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라 하였고 “今者 吾喪我”라 하였는데, ‘耦’와 ‘我’가 바로 물아(物我) 즉 주객(主客)을 표현하는 말이다.
남곽취우(南郭吹竽)
재주가 없으면서 지위에 거하여 자리만 채운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부는 사람 3백인을 모으려 했는데 남곽 처사가 자기도 피리를 불겠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특대우를 하였다. 그 후 선왕(宣王)이 죽고 민왕(湣王)이 임금이 되어 일일이 피리를 듣고자 하니 남곽 처사는 도망갔다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관(南冠)
고국(故國)을 그리워함을 비유한 말이다. 남관(南冠)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의 관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초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포로로 갇혀 있으면서도 항상 고국을 그리워하여 초나라의 관을 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 成公 九年
남관객마집(藍關客馬縶)
한유(韓愈)가 좌천되어 지방으로 가다가 남전관에 이르러 지은 시에 “구름 가린 진령에 집은 어디 있는가? 남전관(藍田關)에 눈이 쌓여 말이 길을 멎어라.”라 하였다.
남관북교(南冠北窖)
남쪽과 북쪽으로 몸이 묶여 사로잡혀 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 나라 악공인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잡혀가서도 계속 남관(南冠)을 쓰고 있었다는 고사와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억류된 채 땅속 움집(窖)에 갇혀 있었던 고사가 있다. 『좌전(左傳)』 成公 9年·『한서(漢書)』 卷54 「소무전(蘇建傳)」
남관설(藍關雪)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드리고 멀리 조주(潮州) 8천 리를 귀양가서 지은 시의 한 연(聯)에 “구름이 진령(秦嶺)에 비꼈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눈이 남관(藍關)에 쌓였는데 말도 걸음을 못 걷는다[橫泰嶺家佈佐 雪藍關馬不前]”라고 하였다.
남관설옹(藍關雪擁)
남관(藍關)은 남전관(藍田關)의 준말이다.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서 질손 상에게 보여 준 시[左遷至藍關示姪孫湘詩]’에 “…… 구름은 진령을 가로질러라 집은 어디 있는가, 눈은 남관을 가로막아 말이 가지를 못하네. …… [雪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 卷十
남관수(南冠囚)
좌씨(左氏) 성구(成九)에 “진후(晉侯)가 ‘남관(南冠)을 쓰고 포로가 된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유사(有司)가 ‘정(鄭) 나라 사람이 바친 초(楚) 나라 죄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라 한 데서 나온 말로, 본래 포로의 신세를 말한다.
남관영(藍關詠)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내려가다가 남관에 이르러서 지은 칠언 율시를 말하는데, 참고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封朝秦九重天 夕貶潮州路八千 欲爲聖明除弊事 肯將衰朽惜殘年 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知汝遠來應有意 好收吾骨瘴江邊” 『한창려집(韓昌黎集)』 卷10 左遷至藍關 示姪孫湘
남관집자동(南冠縶自同)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는 말이다. 원의는 포로라는 말인데, 『좌전(左傳)』 성공(成公) 9년(九年)에 “초(楚) 나라의 종의(鍾儀)가 남관을 쓰고 포로로 잡혔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남관은 남쪽 지방 초(楚)나라에서 쓰던 관을 말한다.
남관초수(南冠楚囚)
남관(南冠)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에서 쓰던 관이고, 초수(楚囚)는 초 나라의 죄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9년의 “진후(晉侯)가 군영을 순시하던 중에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묻기를 ‘남관을 쓰고 구속된 저자는 누구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정(鄭) 나라 사람이 바친 초 나라 죄수입니다.’라고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죄를 짓고 구류된 것을 말한다.
남괴(南蒯)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인 남괴(南蒯)가 노 나라의 실권자인 계평자(季平子)를 배반했을 때, 당초에 그의 힘에 눌려 동조하던 자들이 백성들이 남괴를 싫어함을 알고 남괴를 협박하기를 “우리는 옛 임금을 잊지 못한다. 그러니 살고 싶거든 도망가라.”라고 하여 드디어 제(齊) 나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春秋』 佐傳 昭公 三年
남교경장(藍橋瓊漿)
남교는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동남쪽의 남계(藍溪)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거기에는 선굴(仙窟)이 있는데, 당나라의 배항(裵航)이 이곳을 지나다가 선녀인 운영(雲英)을 만나서 선인들이 마시는 음료인 경장(瓊漿)을 얻어마셨다고 한다. 『전기(傳奇)』 「배항(裵航)」
남교도약(藍橋擣藥)
당(唐) 나라 때 배항(裵航)이 선녀인 운교부인(雲翹夫人)을 만났을 때, 운교부인이 배항에게 시(詩)를 주어 “경장을 한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고, 현상을 다 찧고 나면 운영을 만나리라. 남교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하필이면 기구하게 옥경을 오르려 하나[一飮瓊漿百感生 玄霜搗盡見雲英 藍橋便是神仙窟 何必崎嶇上玉京]”라 하였는데, 뒤에 배항이 남교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한 노구(老嫗)의 집에 들어가 물을 요구하자, 노구가 처녀 운영(雲英)을 시켜 물을 갖다 주었다. 그래서 배항이 그 물을 마시고는 앞서 운교부인의 예언을 생각하여 운영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자, 노구가 “옥저구(玉杵臼)를 얻어 오면 들어 주겠다.”라 하므로, 뒤에 배항이 옥저구를 얻어서 마침내 운영에게 장가들어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남국(南國)
강남(江南)을 말한다.
남궁(南宮)
①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② 예조(禮曹)의 별칭이다.
③ 제후의 학궁(學宮)‘을 말한다. / 유의어: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남궁리성(南宮履聲)
한(漢) 나라의 정숭(鄭崇)이 상서 복야(尙書僕射)로 발탁된 뒤 아무도 못 하는 말을 감히 직간하곤 하였는데, 그가 가죽 신발을 끌고 오는 소리를 들으면 애제(哀帝)가 “정 상서가 또 오는구나.”라 하고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정숭전(鄭崇傳)」
남궁성(南宮星)
남쪽에 있는 성좌로 적제(赤帝)의 궁이며, 주조(朱鳥)·권형(權衡)·태미(太微)의 삼광지정(三光之庭)이라 한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남궁언(南宮彦)
문장이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다. 남궁은 당(唐) 나라 때의 예부(禮部)로, 예부의 낭관(郞官)은 백관의 전표(牋表)를 맡고 있었다.
남귤북지(南橘北枳)
강남(江南)의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한다. 곧 사람은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착하게 되고 악하게도 된다는 말이다.
남극노인(南極老人)
남극 노인성을 의인화(擬人化)한 말이다. 남극 노인성은 곧 남극성(南極星)인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기 때문에,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한다.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하늘의 남극(南極)에 노인성(老人星)이 있는데, 그 별이 비치면 보는 사람이 오래 산다 한다.
남극성(南極星)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남극일성(南極一星)
노인성(老人星)을 말한다.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남금(南金)
‘품질이 가장 높은 금’을 말한다.
남기(南箕)
유명무실함을 비유한 말이다. 기(箕)는 ‘키’라는 뜻이므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남쪽엔 키라는 별이 있으나 곡식을 까부르지 못하고 북쪽엔 말이라는 별이 있으나 주장을 뜰 수가 없도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把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남기북두(南箕北斗)
이름만 있고 실제 내용은 없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의 “남쪽 하늘에 기성이 떠 있어도, 나락을 까부를 수 없고, 북쪽 하늘에 북두성이 있어도, 술을 떠 마실 수 없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挹酒漿]”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남기패금(南箕貝錦)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얼룩덜룩 조개 무늬 비단을 잘도 짜내었네, 참소하는 저 사람 해도 너무 하는구나. 입 딱 벌려 말 잘하는 남기성(南箕星)을 이루었네, 참소하는 저 사람 누구와 주로 모의하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讒人者 亦已大甚 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는 말이 나온다.
남남(喃喃)
① 수다스럽게 말하는 소리. 이용휴(李用休)의 「송신사군지임연천(送申使君之任漣川)」라는 시에 “어린아이의 재잘대는 소리 어미는 모두 알 수 있지[嬰兒喃喃語 其母皆能知].”라는 구절이 있다.
② 새가 지저귀는 소리.
③ 글 읽는 소리.
남남북녀(南南北女)
남자는 남쪽 지방, 여자는 북쪽 지방의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남내(南內)
당대(唐代) 장안(長安)에 있던 흥경궁(興慶宮)의 별칭으로, 대비의 거처를 말한다. 의안태후(懿安太后)가 흥경궁에 거처할 때, 황제가 닷새마다 문안 인사를 올리고 세시(歲時)에 축하 인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后妃傳下 「목종정헌소황후穆宗貞獻蕭皇后」
남녀노소(男女老少)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모든 사람.
남능(南能)
남종(南宗)을 이룩한 육조(六祖) 혜능(惠能)대사를 말한다.
남능북수(南能北秀)
당(唐) 나라 선사(禪師)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 모두 중국 선종(禪宗)의 제5조(祖)인 홍인(弘忍)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혜능은 영남(嶺南)에 있으면서 홍인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아 제6조(祖)가 되었고, 신수는 북쪽에서 활약하면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귀의를 받는 등 교화를 펼쳤다. 『전등록(傳燈錄)』 「송고승전(宋高僧傳)」 卷8
남대(南臺)
① 남행(南行)인 대관(臺官). 즉 과거를 거치지 않고 대관이 된 자를 일컬었다.
②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다.
남대문입납(南大門入納)
주소도 모르는 채 집을 찾거나, 또는 주소 불명의 편지를 이른다. / 유의어: 오리무중(五里霧中)
남대폐우(楠大蔽牛)
『본초(本草)』에 “남나무는 남방(南方)에서 나는데, 잎이 예장(豫章) 잎을 닮았으며 크기는 소 귀만하다.”라고 하였다.
남돈북점(南頓北漸)
당나라 때에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신수(神秀)의 교가 소칭 북종(北宗)이, 광주를 중심으로 혜능(慧能)의 교가 속칭 남종(南宗)이 번성했다. 북종은 점오(漸悟; 점차로 깨달음)를, 남종은 돈오(頓悟; 별안간 깨달음)를 주장하였기에 ‘남돈북점’이라한다.
남두(南斗)
별(星)의 이름이다. 남쪽에 있어 그 형체가 두(斗)와 같기 때문에 남두라 한다.
남령(南靈)
차[茶]끓이기에 제일 좋다는 물이다. 『전다수기(煎茶水記)』에 “차 끓이기에 적합한 물이 7등급이 있는데, 양자강(揚子江)의 남령수가 제일 좋다.”라고 하였다.
남루거호상(南樓踞胡床)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을 관할하고 있을 적에 남루(南樓)의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부하 관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술자리를 벌이고 달구경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
남루풍월(南樓風月)
남루(南樓)는 유루(庾樓)라고도 한다.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자사(刺史)로 나가 무창(武昌)을 다스릴 적에, 달 밝은 밤에 부하들이 풍월을 즐기고 있는 남루에 올라가서 자리를 함께하며 마음껏 회포를 풀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
남류예(柟瘤譽)남류(柟瘤)는 옹이가 많은 남나무를 말한다.
남류침부(枏瘤枕賦)
삼국(三國) 오(吳) 나라의 장굉(張紘)은 남류로 만든 목침의 아름다운 무늬를 사랑하여 부(賦)를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이때 하북(河北)에 있던 진임(陳琳)은 “이 부는 나의 고향 사람 장굉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하북에는 문장이 많지 않아 오직 진임 자신만을 알아주므로 장굉을 빌어 하북에도 자신보다 나은 문장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卷五十三 張紘傳 註
남륙(南陸)
여름철을 이른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해가 북륙(北陸)으로 가는 때를 겨울이라 하고, 해가 남륙(南陸)으로 가는 때를 여름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남림(南林)
산림에 은거한다. 도연명(陶淵明)의 「한정부(閑情賦)」에 “가득한 시름 하소연할 길 없어 나 홀로 남쪽 숲속에서 배회하네[擁勞情而罔訴 步容與于南林]”라고 하였다.
남만(南蠻)
지금 운남성(雲南省)이다.
남망유백운(南望有白雲)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남면(南面)
①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순(舜)은 몸을 공경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② 『장자(莊子)』 「지락(至樂)」의 장자와 해골의 대화 가운데 “위로 임금도 없고 아래로 신하도 없으며, 사시(四時)도 없는 가운데 「천지(天地)」를 춘추(春秋)로 삼고 있으니,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남면하는 임금과 같은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수고로운 인간 세상에 되돌아갈까 보냐[無君於上, 無臣於下, 亦無四時之事, 從然以天地爲春秋, 雖南面王樂, 不能過也].”라고 한 해골의 대답이 실려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호이다.
남명시원유(南冥是遠遊)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의 붕새[鵬]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적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는 말이 있다.
남모(南膜)
불가(佛家)의 말로서 ‘중생들이 부처를 향하여 진심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남목(南牧)
남북쪽 오랑캐가 남쪽으로 내려와 말을 먹인다는 뜻인데,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북쪽으로 장성(長城)을 쌓아 흉노(匈奴)들을 7백여 리 밖으로 물리치니, 오랑캐가 감히 남으로 내려와 말을 먹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남목(南牧)
한 무제(漢武帝)가 흉노(匈奴)를 쳐서 물리치니, 흉노가 감히 남으로 내려와 말을 먹이지 못하였다. 북방 민족이 중국에 침입하는 것을 남목(南牧)이라 한다.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무성(武城)으로 춘추 때 노나라의 성읍으로 계손씨의 봉지였다.
남묵(婪墨)
매우 탐욕스런 관리이다. ‘묵(墨)’은 좌전 소공 14년(左傳 昭公十四年)에서 “탐욕스럽고 부패한 관리가 ‘묵’이다[貪以敗官爲墨]”라고 하였다.
남미주(藍尾酒)
최후에 마신 술잔을 말한다. 또는 말석(末席)에 앉은 사람이 삼배(三杯)를 연속해서 마시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남민원차(南民願借)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이 재차 그 고을에 부임해 줄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구순(寇恂)이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영천(潁川)의 도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려 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1년 동안만 구순을 우리 고을의 수령으로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구순전(寇恂傳)」
남복(南服)
복(服)은 서울 밖 500리 되는 지역을 말한다.
남부여대(男負女戴)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는 뜻으로,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피난 행렬을 말한다. / 유의어: 주옥지탄(柱玉之歎), 삼순구식(三旬九食).
남북순타(南北順橢)
‘남북이 타원형이다’라는 뜻이다.
남비(攬轡)
한 지방의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맑게 하려는 방백(方伯)의 포부를 말한다.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할 즈음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변화시키겠다는 개연한 뜻[登車攬轡慨然有澄淸天下之志]을 보였는데, 범방이 기주에 이르자 탐관오리들이 지레 겁을 먹고는 인끈을 자진해서 풀어놓고 달아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卷67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전(范滂傳)」
남비지청징(攬轡志淸澄)
후한(後漢) 때 범방(范滂)이 난리가 일어난 기주(冀州)의 정정(政情)을 안찰(案察)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가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고서 개연히 천하를 깨끗이 맑히려는 뜻을 가졌었던 데서 온 말이다.
남비징청(攬轡澄淸)
천하를 정화시키려는 지방 장관의 강개(慷慨)한 뜻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冀州)의 청조사(請詔使)로 안찰(按察)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서는 천하를 정화시킬 뜻을 개연히 품었다[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난세에 혁신적으로 정치를 행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뜻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黨錮傳)」 范滂
남비행(攬轡行)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마침 기주(冀州) 일대에 흉년이 들어 도적떼가 일어나므로 조정에서 그를 청조사(淸詔使)로 삼아 순찰케 하였다. 그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 천하를 한번 쇄신시켜 보겠다는 뜻을 다지며 기주 지방에 당도하니 수령들이 모두 자신의 잘못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다.”라고 하였다.
남빈팔영(南賓八詠)
남조(南朝)의 심약(沈約)이 누각에 올라서 여덟 가지 경치를 읊은 팔영(八詠)이 있다.
남산(南山)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하남성(河南省) 서쪽은 감숙성(甘肅省)까지 뻗쳐 있으며, 주봉(主峯)은 장안현(長安縣)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중국의 서부인 옹주(雍州)에 해당하며 서도(西都)인 장안(長安) 지방으로서 옛날 주(周) 나라의 옛터이며, 진(秦) 나라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일명은 종남산(終南山), 또는 귤산(橘山)·진산(秦山)·주남산(周南山)·지폐산(地肺山)이라고도 한다.
남산가(南山歌)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제(齊) 나라에 가서 환공(桓公)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쇠뿔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의 이름인데, 영척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남산은 채색이 아름답고 백석은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 가운데 잉어가 있어 길이가 한 자 반이 되도다. 세상에 나서 요순 같은 임금 만나지 못해, 짧은 홑옷이 겨우 정강이만 가릴 뿐이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소를 먹이노니, 기나긴 밤 지루해라 언제나 날이 밝을꼬[南山粲粲 白石爛爛 中有鯉魚 長尺有半 生不遭堯與舜 短布單衣纔至骭 從昏飯牛至夜半 長夜漫漫何時旦].”
남산간(南山骭)
간(骭)은 정강이를 말한다.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남산가(南山歌)를 불렀는데, 그 노래에 “남산은 선명하고 흰 돌은 찬란하도다…… 세상에 나서 요순을 만나지 못하여 짧은 베로 지은 홑옷이 겨우 정강이에 이르네[南山粲粲 白石爛爛 …… 生不遭堯與舜 短布單衣纔至骭]”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남산계(南山桂)
이백(李白)의 시에 “남산의 계수나무가 푸른 잎이 꽃다운 뿌리에 드리움을 어이 알랴.”라고 하였다. 계수나무는 절조를 상징하며, 경박한 도리(桃李)와는 대비된다.
남산무(南山霧)
‘남산무표(南山霧豹)’의 준말로, 은둔생활을 의미한다. 서주(西周) 때 도(陶) 땅의 대부(大夫) 답자(答子)가 3년 동안 도 땅을 다스렸으나 명예는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안만 세 배로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답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들으니 남산에 검은 표범이 있는데 안개비 속에서 이레 동안이나 가만히 있으면서 산을 내려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문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나지 않아야 해를 멀리 할 수 있는 법이니, 개나 돼지도 먹을 것을 가리지 않고 제 살만 찌우면 앉은 자리에서 잡아먹힐 뿐입니다.〔妾聞南山有玄豹, 霧雨七日而不下食者, 何也? 欲以澤其毛而成文章也. 故藏而遠害, 犬彘不擇食以肥其身, 坐而須死耳.〕”라고 하였다. 이에 그 시어머니가 노하여 답자의 아내를 내쳐버렸는데, 과연 일년 만에 도적이 들어 주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남산무표’ 또는 ‘‘표은(豹隱)’이라 하여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고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몸을 깨끗이 닦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이 고사를 원용하여 한 말이다. 『열녀전(列女傳)』 卷2 「도답자처(陶答子妻)」
남산백석(南山白石)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 나라 영척(甯戚)이 소(牛)를 기르고 있을 때 소뿔을 두드리면서 “남산은 선명하고 백석은 찬란하도다. 태어나서 요순 세상 만나지 못하니 긴 밤이 아득하다, 어느 때 밝아질까[南山矸 白石爛 生不逢堯舜也 長夜漫漫何時旦]”라고 노래한 것을 말한다. 『몽구(蒙求)』 中 「영척구각(甯戚扣角)」
남산석(南山石)
가난한 영척(寗戚)이 소를 치면서 불렀다는 노래이다.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그 노래를 듣고 불러서 재상을 삼았다 한다. 『사기(史記)』 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남산수(南山壽)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남산(南山)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오래 사시오[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栢之茂, 無不爾或承].”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남산시(南山詩)
총 2백 4구로 일대(一代)의 일을 서술한 한유(韓愈)의 시이다. 왕안석(王安石) 같은 사람은 남산시가 두보(杜甫)의 북정시(北征詩)보다 좋다고 하였다.
남산은표(南山隱豹)
남산(南山)의 흑표범이 자신의 아름다운 무늬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비 내리고 안개 낀 일주일 동안 배고픔도 참고 전혀 밖에 나가서 사냥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통 현사(賢士)가 산속에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열녀전(列女傳)』 「현명도답자처전(賢明陶答子妻傳)」
남산종두희(南山種豆稀)
한(漢) 나라 양운(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이른 나이에 현달(顯達)했다가 파직을 당한 뒤 시골에 돌아와서 불만스러운 뜻을 시로 표현하기를 “남산의 저 밭, 황무지로 놔두었네. 1백 묘(畝)에 심은 콩, 콩깍지만 남았네[田彼南山 蕪穢不治 種一頃豆 落而爲萁]”라고 하였는데, 남산(南山)은 임금을, 불치(不治)는 어지러운 조정을, 일경(一頃)은 백관을, 두(豆)는 재야(在野)에 버려진 자기 자신을, 기(萁)는 아첨하는 조관(朝官)들을 말한다고 한다. 『한서(漢書)』 卷66
남산풍발발(南山風發發)
효성을 다 바치지 못하는 자식의 심경을 표현한 말이다. 어버이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효자의 심정을 읊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남산은 높다랗고, 회오리바람은 거세도다. 사람들 모두 잘 지내는데, 나만 왜 해를 입나[南山烈烈 飄風發發 民莫不穀 我獨何害]”라고 하였다.
남상(濫觴)
사물의 처음. 기원, 시작. 양자강 같은 대하(大河)도 근원은 잔을 채울 만한 세류(細流)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즉 사물의 처음, 시작, 기원을 말한다. “강이 처음 민산에서 시작될 때 그 근원은 잔에 넘칠 만큼이다[江始出於岷山 其源可以濫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삼서(三恕)」 / 유의어: 효시(嚆矢), 원조(元祖), 비조(鼻祖)
남상(南床)
홍문관원의 별칭이다.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전한(典翰)·응교(應敎)·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저작(著作)·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남선북마(南船北馬)
남쪽은 배로 북쪽은 말로.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님을 이른다.
남성(南省)
예조(禮曹)의 별칭이다. 남궁(南宮)이라고도 한다.
남소(南巢)
남방의 봉황이 깃든 곳이라 한다.
남수(柟樹)
매화나무. 두보(杜甫)가 남수라는 제목으로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초당 앞에 강을 의지한 남수는, 2백 년이 되었다고 말로서 전해 오네[依江柟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
남수(灆水)
진주(晉州) 청천(淸川)의 일명이다.
남수초당(楠樹草堂)
두보(杜甫) 시에 “依江楠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이란 어구가 있다.
남숙북홀(南儵北忽)
숙(儵)과 홀은 신(神)의 이름으로, 남해(南海)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北海)의 임금을 홀이라 한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남순장(南巡仗)
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말한다.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여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남신구(南汛口)
우리나라 사신이 해로(海路)로 북경에 가는 도중에 거치는 곳으로, 여순구(旅順口)의 철산취(鐵山觜)와 영원(寧遠)의 사이에 있다.
남아(南衙)
대내(大內)의 남쪽에 있는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 등 이른바 재상부(宰相府)를 말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정도의 많은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남자의 말 한 마디는 천금의 무게가 있다는 말’로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남악표(南嶽豹)
옛날 도대부 답자(陶大夫 答子)가 질그릇을 3년동안 구워냈는데도 명예는 하나도 나지 않고 가산만 전에 비해 3배가 불었다. 이에 답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면서 하는 말이 “남산에 있는 표범이 이레씩이나 내려와 먹이를 구하지 않고 안개만 먹고 있는 것은 제 털과 가죽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아야 해를 멀리 할 수 있지 개나 돼지도 살이 쪄보이면 잡아먹히는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남산의 표범은 은둔자(隱遁者)를 의미한다. 『열녀전(列女傳)』 賢明
남양(南陽)
① 남양천(南陽阡)으로 무덤을 말한다.
② 서천(舒川)의 옛 이름이다.
③ 전국 때 남양의 지명은 세 곳이 있었다. 태항산 남쪽의 위나라와 한나라 령, 하남성 남양시 일대의 초나라 령, 그리고 지금의 산동성 문양과 태산 일대의 제나라 령으로 여기서는 제나라 령을 가르킨다.
④ 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사(出仕) 전에 살던 곳으로 제갈량(諸葛亮)을 일컫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그대로,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섯 차례나 중원(中原)을 수복시키려 했으나 끝내 오장원(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남양삼고(南陽三顧)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남양의 초려로 세 번이나 찾았다 한다. / 유의어: 삼고초려(三顧草廬)
남양옹(南陽翁)
남양(南陽)의 늙은이란 바로 촉한(蜀漢) 때 남양에 살았던 제갈량(諸葛亮)을 말하는데, 그는 촉한의 유비(劉備)에게 역시 승상(丞相)으로 등용되었다. 『삼국지(三國志)』 卷三十五
남양지세(南陽之世)
광무제(光武帝)의 치세와 같이 ‘학문이 흥성한 시대’를 가리킨다. / 인용: 與人(박지원)
남녀(藍輿)
‘병자가 타는 대를 엮어서 만든 가마’이다.
남녀수(南汝修)
여수(汝修)는 남홍래(南鴻來)의 자(字)이다.
남연년(南延年)
자는 수백(壽伯), 본관은 의령(宜寧)인데 청주 영장(淸州營將)으로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이인좌의 반란군과 싸우다가 청주성이 함락되어 잡혀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청주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었다.
남영주(南榮趎)
경상초(庚桑楚)의 제자로서 도(道)를 듣기 위해 식량을 싸지고 이레 낮 이레 밤을 걸어 노자(老子)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한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남와(南訛)
염제(炎帝)에 속한 여름철 담당 불 귀신의 이름이다.
남와장양(南訛長養)
와(訛)는 변화(變化)의 뜻으로서, 즉 여름철에 시물(時物)이 장성(長盛)하여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
남완(南阮)
위진(魏晉) 시대의 명사인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이 남쪽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칠월 칠석(七夕) 부유한 완씨(阮氏)들이 살고 있는 북쪽 동네를 찾아가서 잠방이를 대나무 막대기에 꿰어들고 다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남완정응경북완(南阮定應輕北阮)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은 길 남쪽에 살고, 다른 여러 완씨는 길 북쪽에 사는데, 북완은 부(富)하고 남완은 가난하였다.
남완탐주(南阮耽酒)
남완(南阮)은 도남(道南)에 살았던 진(晉) 나라 완적(阮籍)과 완함(阮咸) 등을 가리키는데, 도북(道北)의 북완(北阮)이 부유했던 데 반해 매우 가난했다 한다. 완적이 술을 탐내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자청하고, 완함이 돼지와 술을 마셨던 고사는 유명하다. 『진서(晉書)』 卷49
남우(濫竽)
남(濫)은 실제로는 능력이 없으면서 함부로 한다는 뜻이다. 우(竽)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이다. 즉, ‘우(竽)를 함부로 분다’는 뜻이다.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 제 선왕(齊宣王)이 우(竽)라는 피리를 좋아하여 악인(樂人) 3백 명을 불러 이 피리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남곽(南廓)이라는 처사(處士)가 원래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끼어서 함부로 피리를 불어 한때는 속여 넘겼으나, 민왕(湣王) 때에 이르러 한 사람씩 불러서 불어보게 한 결과, 남곽이 드디어 도망가고 말았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上
남운(南雲)
남쪽 구름은 고향의 정 또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한다.
남운북몽(南雲北夢)
강남(江南)에 위치한 운몽(雲夢)이라는 늪지대가 강의 남북으로 뻗어 있어 한 곳은 지대가 높고 한 곳은 낮기 때문에 물이 잦는 시기도 다르고, 경작 시기 역시 조만이 달라 합해서 말하면 물론 하나의 운몽택(雲夢澤)이지만 운택·몽택 둘로 분리해서 말하기도 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남원북철(南轅北轍)
수레의 긴 채는 남쪽으로 가고 바퀴는 북쪽으로 간다는 말로, 행동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 왕이 조(趙)의 도읍 한단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계량(季梁)이 간하길 “어떤 사람이 남방의 초나라로 향해 가고 있다고 하면서 북쪽을 향해 마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나라로 간다면서 북쪽으로 가는 연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이 말은 아주 잘 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다시 ‘말이 아무리 잘 달려도 이쪽은 초나라로 가는 길 아니오?’라고 하자, 그는 ‘나는 돈도 넉넉히 가지고 있고, 마부가 마차를 잘 몰지요’라고 엉뚱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은 초나라와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왕께서는 항상 패왕이 되어 천하가 복속하도록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나라가 큰 것만을 믿고 한단을 공격하면 영토와 명성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목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제가 만난 사람처럼 마음은 초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마차는 북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나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백거이(白居易), 『신악부(新樂府)』 입부기시(立部伎詩)
남월(南越)
중국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사이에 있던 나라인데 미개한 나라여서 맨상투에 갓을 쓰지 않았다 한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三 「남월열전(南越列傳)」
남월금(南越金)
한(漢) 나라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사신(使臣)으로 갔다 올 때에 남월왕 조타(趙佗)에게서 황금을 많이 얻어 왔다.
남월도강(攬月倒江)
이태백(李太白)이 술이 취하여 강을 건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남위(南威)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의 미녀(美女)로, 진문공(晉文公)이 일찍이 남위를 얻은 뒤 3일 동안 정사를 게을리 하고 나서는 마침내 남위를 멀리하면서 “후세에 반드시 여색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後世必有以酒亡其國者].”라고 하였다.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남음(南音)
① 남방 초국(楚國)의 음악을 이른 말로, 즉 비속한 음조를 말한다.
② 남쪽 초(楚) 나라의 음악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고향을 그리워함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사로잡혀가 있을 적에 진후(晉侯)가 그에게 음악을 할 줄 아느냐고 묻자, 할 줄 안다고 대답하므로, 그에게 거문고를 주니, 그는 자기 고향인 초 나라의 음악을 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 成公 九年
남의(南疑)
‘남방의 구의산(九疑山)’을 말한다.
남의비로의(藍衣非虜意)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 오랑캐 쪽으로부터 푸른 복장에 널을 싣고 오라는 말은 없었는데, 최명길이 밤에 남의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남이흥(南以興)
?~1627. 인조 때의 무신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정묘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가 자결했다. / 인용: 鞍峴歌(김창흡)
남인역록(南人轣轆)
육운(陸雲)의 소림(笑林)에 “한(漢) 나라 사람이 오(吳) 나라에 가니 오 나라 사람이 죽순나물을 차려 주었다. 그래서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대[竹]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상책(床簀; 살평상의 대)을 아무리 삶아도 익지 않으니 하는 말이 ‘오 나라 놈이 나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였다.’라고 하였다.” 원문에 ‘轣轆’은 은어(隱語)인데 본디 수레의 궤도(軌道)를 역록이라 이르므로 빌려서 궤도(詭道)로 쓴 것이다.
남장(男粧)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교방(敎坊)에 두었던 창기(娼妓)의 하나이다. 재인(才人)이 부족하자 지방에서 예쁘고 기예(技藝)가 있는 자와 경사(京師)의 무당·관비(官婢) 중에서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들을 뽑아 궁중에 두고 한 악대(樂隊)를 편성하여 이를 ‘남장’이라 하였다.
남장(嵐瘴)
열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산천에서 생기는 나쁜 기운이다.
남적만(南敵萬)
적만(敵萬)은 남이웅(南以雄)의 자(字)이다.
남전(藍田)
산명(山名)인데, 아름다운 옥(玉)이 생산된다고 한다.
남전생옥(藍田生玉)
남전(藍田)은 산사성에 있는 산 이름으로 옥의 명산지이다. 남전이 예로부터 명옥(名玉)을 산출하듯 명문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남전옥자(藍田玉子)
양백옹(楊伯雍)이라는 사람이 선행을 쌓은 끝에 선인(仙人)으로부터 돌멩이 씨앗[石子] 한 섬을 받아 남전(藍田)에 뿌렸더니 거기에서 모두 옥(玉)이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데, 보통 훌륭한 부친에 걸맞는 자식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수신기(搜神記)』 卷11
남전이경(南田二頃)
전국시대(戰國時代) 동주(東周)의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이 연(燕)·조(趙)·한(韓)·위(魏)·제(齊)·초(楚)등 여섯 나라의 왕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 진(秦)나라에 대항하게 하고 그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뒤에 말하기를 “만약 나에게 낙양의 성곽 남쪽에 밭 두 뙈기라도 있었다면 어찌 여섯 나라의 상인(相印)을 찰 수 있었겠느냐[且使我有雒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卷六十九 「소진열전(蘇秦列傳)」
남전지약(藍田之約)
남전은 오늘날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이다.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대방(大防)·대균(大鈞)·대림(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주로 “덕과 업으로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다운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과 어려운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는 등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남정(南正)
전욱(顓頊)이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늘과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남제운(南霽雲)
당 나라 때의 충신인 남제운(南霽雲)을 가리킨다. 남제운은 활을 잘 쏘았으며, 처음에는 주사(舟師)로 있다가 장순(張巡)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수양성(睢陽城)을 사수하던 중 성이 함락되었는데, 적이 투항하라고 위협하였다. 이때 장순이 남제운에게 “남팔(南八)아, 남아는 죽음이 있을 뿐으로, 의롭지 못하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남제운은 “공께서 절 알아주었으니, 어찌 감히 죽지 않겠습니까.”라 하고,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신당서(新唐書)』 卷192 「남제운열전(南霽雲列傳)」
남조(南朝)
① 임안(臨安)으로 도읍을 옮긴 남송(南宋)의 조정이다.
② 불교 선가(禪家)에 있어서의 남종(南宗)의 조(祖)이다. 즉 혜능선사(慧能禪師)를 말한 것으로 신수(神秀)를 북종(北宗)이라 한 데 대한 말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 八
남조옥수(南朝玉樹)
옥수(玉樹)는 사람의 풍채(風采)가 준수하고 고결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여러 자질(子侄)들에게 “대체 무엇 때문에 자제(子弟)들에게 늘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냐?”라고 묻자, 조카인 현(玄)이 “비유컨대, 지란옥수(芝蘭玉樹)가 가까이 뜨락에 나면 보기 좋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남조 시대에 이르러 사영운(謝靈運) 같은 명사(名士)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인용한 것이다.
남조화축(南朝畫軸)
남조(南朝)는 송(宋)·제(齊)·양(梁)·진(陳) 네 나라로 불교를 숭상하여 곳곳에 절이 많았다. 절(寺)에 그려진 단청(丹靑)을 말한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적 지위가 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는 말이다.
남종(南宗)
달마(達摩)의 뒤에 영남(嶺南)의 혜능(慧能)이 전한 선종(禪宗)의 일파(一派)를 말한다.
남주탑(南州榻)
빈객(賓客)을 공경히 대우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말기에 진번(陳蕃)이 특별히 탑(榻) 하나를 걸어두었다가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내방하면 이를 내려서 우대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남지(南枝)
매화를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나의 소원은 매화꽃 질 무렵에, 일찍 북쪽 기러기 따라 날개짓 해 보는 것[願及南枝謝 早隨北雁翩]”이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35 次韻蘇伯高遊蜀岡途李孝博奉使嶺表
남지(南至)
태양이 남쪽 극점(極點)에 이르는 시기, 즉 동지(冬至)를 말한다.
남지서(南枝棲)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데 비유한 말이다. 월조(越鳥)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남쪽 가지에 둥우리를 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남지일양생(南至一陽生)
남지는 동지(冬至)의 별칭이다. 일양은 양(陽)이 처음 생긴다는 뜻으로, 1년 12월을 양월(陽月)과 음월(陰月)로 나누어 동짓달은 일양, 섣달은 이양, 정월은 삼양, 2월은 사양, 3월은 오양, 4월은 육양, 5월은 일음(一陰), 6월은 이음, 7월은 삼음, 8월은 사음, 9월은 오음, 10월은 육음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징청비(攬澄淸轡)
난세(亂世)에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제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范滂)에 “이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게 되었다. 범방은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곧추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다.”라고 하였다.
남창위(南昌尉)
남창은 오늘날 중국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지명인데, 한(漢) 나라 때 구강(九江) 수춘(壽春) 사람인 매복(梅福)이 남창위를 지냈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왕망(王莽)이 권력을 독단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는 성명을 고치고 오현(吳縣) 저자의 문지기가 되었다 한다. 『한서(漢書)』 卷六十七 「매복전(梅福傳)」
남창장(南昌長)한신(韓信)이 남창정장(南昌亭長)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귀찮게 생각하여 밥을 일찍 지어먹고는 한신이 가면 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뒤에 한신이 초왕(楚王)이 되어 남창정장을 불러서 “자네는 소인(小人)이라 은혜를 끝까지 베풀지 못하였다.”고 책하고 백 금(百金)을 주었다.
남천(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별칭이다.
남천(南川)
여주(驪州)의 남한강(南漢江) 변을 가리킨다.
남천(南川)
이천(利川)의 고호이다.
남천주(南天柱)
중국 안휘(安徽) 잠산현(潛山縣)에 있는 남악(南嶽)으로 불리는 천주산이다.
남청(藍靑)
제자가 선생보다 더 뛰어났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푸른 물감이 남(藍)에서 나오지만 남보다 더 푸르다.”라고 하였다.
남초(南譙)
동진(東晉) 시대에 설치된 군(郡)으로, 지금 전초현(全椒縣) 서북쪽에 있다.
남취(濫吹)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체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제나라 때에 생황(笙簧)을 불 줄 모르는 자가, 악사 중(中)에 섞여 한때 속여 넘겼으나, 한 사람씩 불게 하자 도망(逃亡)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무능(無能)한 사람이 재능(才能)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 실력(實力) 없는 자가 어떤 지위(地位)에 붙어 있는 일을 비유한다.
남침(南琛)
남만(南蠻)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물을 말한다.
남침(覽寢)
혼례 치른 다음날 신랑의 친지들이 일제히 신부집을 방문하면, 그 집에서는 잔치를 베풀게 되니 이를 남침(覽寢)이라 이르고, 가례에 의해 혼사를 치르는 것을 진친영(眞親迎)이라 이르고, 혼례 치른 이튿날 신부가 시부모 뵙는 것을 반친영(半親迎)이라 이른다. 남침(覽寢)이란 이름은 고려말기에 생긴 듯하고, 진친영(眞親迎)과 반친영(半親迎)이란 말은 선조(宣祖)년간에 생기게 된 것이다.
남택지(南澤之)
택지(澤之)는 남선(南銑)의 자(字)이다.
남평(南平)
나주(羅州) 북쪽의 현읍(縣邑) 이름이다.
남포(南浦)남쪽 물가.
남풍(南豐)
송 나라 때의 증공(曾鞏)을 이르는 말이다. 증공은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남풍 지방 출신이므로 사람들이 남풍 선생이라 불렀다.
남풍(南風)
① 진 혜제(晉惠帝)의 후비인 가황후(賈皇后)의 이름이다. 가황후는 본디 황음하고 방자하여 간계를 써서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양황태후(楊皇太后)와 희회태자(熙懷太子)를 폐출하여 금용성에 안치시켰다가 끝내 모두 죽였는데, 이로 인해 결국 조왕 윤(趙王倫)에 의해 가황후는 폐해졌다가 사사(賜死)되었고, 혜제도 조왕 윤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금용성에 안치되었다. 이에 앞서 가황후의 비행을 두고 낙중(洛中)에 유행한 민요에는 “남풍이 맹렬하게 누런 모래 불어대니 …… 석 달 뒤에는 너의 집을 멸망시키리라[南風烈烈吹黃沙……前至三月滅汝家].”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卷三十一』
② 순(舜)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노래했다는 시이다. “남풍이 훈훈함이여, 내 백성의 노여움을 풀어 주리로다. 남풍이 철 맞춰 붊이여, 내 백성의 재물을 풍성하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남풍곡(南風曲)
순 임금이 지었다고 전하는 노래 이름이다. 옛날에 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뜯으면서 남풍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남풍이 솔솔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풀 수 있겠도다. 남풍이때맞추어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산을 늘릴 수 있겠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남풍불경(南風不競)
남방지역의 풍악은 미약하고 생기가 없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힘 또는 세력을 떨치지 못하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 제후들은 진(晉)나라를 맹주로 강포(强暴)한 제(齊)나라를 치려고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 정(鄭)나라의 자공(子孔)은 국권을 휘두를 욕심으로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자경(子庚)에게 사자를 보낸 대응해주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자경은 초의 강황(康王)의 권유에 못 이겨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로 쳐 들어갔다. 정나라는 정백(鄭伯)이 제나라를 정벌(征伐)하러 가고 없었기 때문에 자공, 자전(子展)과 자서(子西)가 남아서 지키고 있었다. 자전과 자서는 쳐들어오는 자경의 계략을 미리 알고 방비를 튼튼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경은 이틀간 싸우다 물러가게 되었는데 불운하게도 큰비가 내리고, 또한 한겨울이어서 얼어죽는 말과 병사가 속출하여 전멸상태였다. 초나라 군대가 출동하였다는 소식이 진(晉)나라에 전해지자, 악관(樂官)인 사광(師曠)이 말하였다.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자주 북풍을 노래하고, 또 남풍을 노래했지만, 남풍은 생기가 없고 죽음의 소리가 많다. 초나라는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다[不害 吾驟歌北風 又歌南風 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남풍시(南風詩)」
우순(虞舜)이 지었다는 시이다.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 걱정 풀리겠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溫兮].”라고 한 시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남해(南陔)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생시(笙詩) 제목만 있고 가사는 없어진 시의 편명으로, 효자가 서로 경계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에 “從彼南陔 言採其蘭”의 구가 있다.
남해자(南海子)
북경의 영정문(永定門) 밖에 있던 곳으로 명나라 영력(永曆) 연간에 원유(園囿)로 만든 것이다. 청나라 때에는 총위방어(總尉防御) 등을 두어 지켰으며, 그 안에서 동물들을 기르고, 이곳에서 수렵(狩獵)과 열병(閱兵)을 하였다고 한다. 남원(南苑)이라고도 불렀다.
남해조운탑(南海朝雲塔)
애첩(愛妾)과 정다운 한때를 보낸 것을 말한다. 초왕(楚王)과 무산(巫山)의 신녀(神女)가 운몽(雲夢)의 누각 위에서 만나 남녀간의 지극한 환락(歡樂)을 나누었는데, 그 신녀가 떠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로 내리면서[旦爲朝雲 暮爲行雨] 언제나 이 누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온다. 『문선(文選)』 卷19
남해편(南陔篇)
생시(笙詩)의 편명으로, 효자(孝子)가 부모 봉양할 일을 서로 경계하는 노래인데, 본시(本詩)는 없어졌고 다만 진(晉) 나라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가 있을 뿐이다.
남행(南行)
남쪽 항렬(行列). 이 경우에는 ‘남항’이라 읽어야 할 터인데 ‘남행’이라 읽는 것은 관습이다. 제도상(制度上) 관용(慣用)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관·무관의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에 있는 사람들, 문과(文科)·무과(武科)에 급제하지 않고 부조(父祖)의 음덕(蔭德) 또는 본인의 학행(學行)때문에 벼슬이 오른 사람들, 회례(會禮)·회좌(會座) 때에 남쪽에 자리하는 사람들 등을 이르는 말로 쓰이며, 그 반열(班列)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그 반열에 속하는 개인 또는 전원을 뜻하기도 한다. 또 문·무의 반열을 동반(東班)·서반(西班)이라 칭하는 데에 대하여 잡직인 사람을 남반(南班)이라 칭하기도 하고, 회좌 때의 북벽(北壁)·동벽(東壁)·서벽(西壁)에 대하여 남쪽에 상(床)을 두고 앉는 좌차(座次)에 해당하는 사람을 남상(南床)이라 칭하기도 한다.
남헌(南軒)
송유(宋儒) 장식(張栻)에 대한 학자들의 존칭인 남헌 선생(南軒先生)의 약칭인데, 그의 『남헌집(南軒集)』 10권 「형주석고산제갈충무후사기(荊州石鼓山諸葛忠武侯祠記)」에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대한 곡진한 평가가 자세히 내려져 있다.
남혈괴의(南穴槐蟻)
인간 일생이 속절없음을 이른다. 당(唐)나라의 순우분(淳于棼)이 어느 날 남쪽으로 뻗은 홰나무 가지 아래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까지 되는 등 부귀를 누리다가 꿈을 깨고 보니 그 홰나무 아래에 큰 개미구멍만이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이문집(異聞集)』 / 유의어: 남가일몽(南柯一夢)
남화(南華)
① 남화진인(南華眞人)의 준말로 장자(莊子)를 말한다.
② 산명(山名)인데, 선종(禪宗)의 제육조(第六祖)인 혜능대사(慧能大師)가 여기에서 불법(佛法)을 전수(傳授)했다고 한다.
남화경(南華經)
장주(莊周)가 지은 것으로 『장자(莊子)』의 이칭이다. / 유의어: 남화진경(南華眞經).
남화생(南華生)
남화진인(南華眞人)에 추증된 장자(莊子)를 말한다.
남화서(南華書)
남화진경(南華眞經), 즉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남훈곡(南熏曲)
우순(虞舜)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불렀다는 「남풍시(南風詩)」라는 노래로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불평을 풀어주리로다. 남풍의 때맞춤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풍부히 하리로다.”라는 내용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남훈시(南薰詩)
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지었다는 “따사로운 남풍이여 우리 백성 불만을 풀어줄 만하여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라는 내용의 시인 「남풍시(南風詩)」를 말한다. 곧 성군의 정치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나 임금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남훈전(南薰殿)
당(唐) 나라 때에 있었던 대궐 이름으로 순(舜)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의 ‘남풍지훈(南風之薰)’에서 따온 명칭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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