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시단까지도 황량하게 하였다. 흔히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지만,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는 오로지 전 시대의 안정에 힘입은 결과이며 병란 때문에 인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이후 숙종(肅宗)대에 이르는 70여년간의 시단은 문자 그대로 황량과 적막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정두경(鄭斗卿)과 이민구(李敏求)가 적막에서 일어나 우뚝하게 시단을 돋보이게 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모처럼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왕조 건국으로부터 300년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사대부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중간계층의 시인들이 등장하여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당시의 정치참여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산림에서 시업(詩業)에만 침잠한 일부 사대부 시인들에 의하여 조선시의 진경(眞境)을 보여주는 이른바 진시운동(眞詩運動)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인왕산(仁旺山)과 북악산(北嶽山) 사이의 산록에 시단을 만들고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모여들면서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진시운동(眞詩運動)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새로운 시세계의 지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진시운동(眞詩運動)이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중심이 되고, 이들의 문하에서 이병연(李秉淵)ㆍ김시민(金時敏)ㆍ유척기(兪拓基)ㆍ홍세태(洪世泰) 등이 호응하여 조선후기 시단에 참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런가 하면 낭만적인 악부시 풍으로 비범한 시작(詩作)을 시범한 신유한(申維翰)ㆍ최성대(崔成大)ㆍ신광수(申光洙)ㆍ홍양호(洪良浩)ㆍ이학규(李學逵) 등 기속시인(紀俗詩人)의 등장도 이 시기 문학사에서 중요한 사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후사가(後四家) 가운데서도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 등이 젊은 시절의 정열로써 이룩한 죽지사(竹枝詞) 등의 풍류시(風流詩)는 서류출신(庶流出身)의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독자적인 시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도 이름 높은 신위(申緯)의 시는 천정만상(千情萬狀)이 자유자재로 표현되어 조선조 제일대가로 불리기도 하였거니와 민족의 애환을 시로써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소식(蘇軾) 특히 사숙하였지마는 그가 이룩한 독특한 시체(詩體) 때문에 그의 시는 흔히 변조(變調)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이로써 보면 조선후기는 사대부의 시업이 침체해진 반면에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홍세태(洪世泰)의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필두로 위항시인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이 60년 간격으로 간행되어 그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려는 위항인의 피맺힌 소망이 이들 시집 속에 응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작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조수삼(趙秀三)ㆍ이상적(李尙迪)ㆍ정지윤(鄭芝潤)ㆍ현기(玄錡)ㆍ장지완(張之琬)ㆍ변종운(卞鍾運)ㆍ황오(黃五) 등의 작품은 평범과 진솔을 통하여 그들의 불평음(不平音)을 온전하게 토로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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