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직
진(陣)
권세가들이 사사로이 설치한 농장의 일종이다. 광해군 때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등의 권세가들이 전토를 광점(廣占)하고, 역(役)을 피하여 도망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 의방에 사사로이 설치한 농장으로서, 그 폐단이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진(塵)
불교에서는 겁(劫)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진(塵)이라 하는데, 「천지(天地)」의 시종(始終)을 말한다.
진가(秦家)
혼란스러웠던 진(秦) 나라 궁가(宮家)라는 뜻이다.
진가도적(秦家圖籍)
소하(蕭何)가 한 패공(漢沛公)을 따라 함양(咸陽)에 들어가서 율령도서(律令圖書)를 먼저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후일에 한 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 큰 공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卷五十三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진가병(陳家餠)
진가(陳家)는 곧 당(唐) 나라 때 진경선(陳敬瑄)을 이른다. 그가 젊어서 떡장사를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진갈(秦碣)
진 나라 시대에 세운 수많은 석갈(石碣)에 새겨진 옛 서체(書體)를 가리킨 말이다.
진갑(進甲)
62세 환갑(還甲)보다 한 해 더 나아간(進) 나이라는 뜻이다.
진강초도마(晉江初渡馬)
동진(東晉)이 강동(江東)으로 천도(遷都)했음을 말한다. 말(馬)은 진 나라의 성이 사마(司馬)였으므로 한 말인데, 진 나라는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난에 시달려 원제(元帝) 때에 결국 강을 건너 강동으로 천도한 때문에 동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진강후(晉康侯)
최충헌(崔忠獻)이니, 고려 때 권신(權臣)으로서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진갱지사(秦硎之士)
갱(硎)은 갱(阬)과 같은 뜻으로, 진갱의 선비란 곧 진시황(秦始皇) 때 함양(咸陽)에 생매장된 3백 60여 인의 선비를 말한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갱한고(秦坑漢錮)
진(秦) 나라에서는 선비들이 소용없이 떠들기만 한다 하여 큰 구덩이를 파고 460여 명의 선비들을 산채로 쓸어 묻었었다. 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진건(震愆)
‘두려움과 허물’을 말한다.
진경(秦瓊)
수(隋) 나라 말기에 당 고조(唐高祖)에 귀부(歸附)한 뒤 진왕(秦王; 太宗)을 도와 왕세충(王世充) 등을 토벌한 공로로 익국공(翼國公)에 봉해졌다. 『구당서(舊唐書)』 卷68
진경(晉卿)
원(元) 나라 때의 문신인 황진(黃溍)의 호이다.
진경(秦京)
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을 말한다.
진경(眞經)
『노자(老子)』ㆍ『장자(莊子)』ㆍ『열자(列子)』 등 도교(道敎)의 책을 가리킨다.
진경외일(晉卿畏日)
진경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晋) 나라의 정경(正卿)이었던 조순(趙盾)을 가리키는데, 『좌전(左傳)』 문공(文公) 7년에 “조최(趙衰)는 겨울날의 태양이요, 조순은 여름날의 태양이다.” 한 주에 “겨울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의 태양은 두렵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진계경(陳季卿)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이문실록(異聞實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강남(江南) 지방에 살았던 진계경이 일찍이 진사(進士)에 응시했으나 낙제하고는 10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청룡사(靑龍寺)에서 종남산옹(終南山翁)을 만났다. 그런데 마침 동각(東閣)의 벽(壁)에 환영도(寰瀛圖)가 있는 것을 보고 진계경이 자기 고향 강남 길을 찾으면서 길게 탄식하며, “어떻게 하면 배를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꼬.” 하자, 종남산옹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집에 가기는 어렵지 않다.” 하고, 즉시 댓잎(竹葉)으로 배를 만들어 환영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진계경이 이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점차 위수(渭水)에 물결이 일고 그 죽엽선(竹葉船)이 점점 커지므로, 이에 그 배를 타고 10여 일 만에 자기 집에 당도하였다. 그랬다가 하룻밤에는 다시 그 배를 타고 옛 길을 따라 가서 다시 청룡사에 들르니, 종남산옹이 아직껏 그대로 앉아 있으므로, 진계경이 종남산옹에게 이것이 꿈이 아니냐고 묻자, 종남산옹이 말하기를, “60일 뒤에 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과연 진계경의 처자(妻子)가 강남에서 달려와 진계경이 세상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또 “아무 날 밤에 집에 돌아와서 서재(西齋)에 시(詩)를 써 놓았다.”고 하므로, 진계경이 그제서야 비로소 꿈이 아닌 줄을 알았다고 한다.
진계유(陳繼儒)
명(明) 나라 사람. 호는 미공(眉公)은. 어려서부터 영오하고 문장에 능하여 그 명성이 동기창(董其昌)과 막상막하였고, 왕세정(王世貞)으로부터도 매우 인정을 받았다. 후에는 오직 저술에만 몰두하여 경사제자(經史諸子)는 물론, 술기(術伎)ㆍ패관(稗官)과 노ㆍ불(老佛)의 설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비교 핵실하였으며, 심지어 쇄언(瑣言) 벽사(僻事)에 이르러서도 그를 모두 추려 기록으로 남겨 이른바 진미공정정비급(陳眉公訂正祕笈)이라는 총서(叢書)를 내놓기에 이르렀음. 『명사(明史)』 卷二百九十八
진공(晉公)
당 헌종(唐憲宗) 때 현상(賢相) 배도(裵度)의 봉호(封號).
진공(眞空)
① 불교 용어로서 일체의 실상(實相)은 다 공허(空虛)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② 불교의 용어로, 일체의 색상(色相)과 의식을 초월한 진실된 경지를 가리킨다.
진공자(晉公子)
진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오패(五霸)의 하나인 문공(文公)을 가리킨다.
진공차락장송고(陳公差樂張竦苦)
진공(陳公)은 한(漢)나라 때 진준(陳遵)을 말하고, 장송(張竦)은 곧 진준의 친구이다. 이들은 친구 사이였지만, 진준은 무척 호방한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장송은 매우 법도 있는 선비였으므로, 진준이 장송에게 “자네는 몸을 괴롭게 해가며 조신을 하지만, 나는 예법에 구애하지 않고 마음대로 술 마시고 놀며 즐기니, 내가 낫지 않는가.”고 조롱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九十二 『진준전(陳遵傳)』
진과자미(秦瓜自美)
진과(秦瓜)는 진 나라 소평(邵平)이 장안(長安) 동쪽에 심었던 오이를 말한 것이다.
진관(眞官)
선인(仙人)으로서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 도사(道士)를 뜻하는 말이다. / 인용: 效謫仙體(임제)
진관(陳瓘)
송(宋) 나라 사람. 그는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당시 소인배였던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 된다고 극력 주장했다가 뒤에 채경의 미움을 사 자주 귀양살이를 하였다. 『송사(宋史)』 卷345
진관(秦關)
진(秦) 나라 때 설치한 관소(關所)를 말한다.
진관(秦觀)
송(宋) 나라 사람. 자는 소유(少游) 또는 태허(太虛). 소식(蘇軾)의 추천으로 태학박사(太學博士)가 되었다. 문사(文詞)에 능하여 소식이 굴송지재(屈宋之才)가 있다고 칭찬했다.
진광(眞光)
도가(道家)의 문자로 타고난 본성과 지혜를 말한다.
진교봉왕(陳橋奉王)
송(宋) 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기 전인 후주(後周) 현덕(顯德) 7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契丹)을 막으러 가다가 군사가 진교역(陳橋驛)에 주둔하였는데, 그날 점성가(占星家)인 묘훈(苗訓)이 해를 보니, 해 아래에 다른 해가 또 하나 있으면서 검은 광채가 들끓었다. 그날 밤 조광윤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군사들이 병란을 일으켜서 조광윤을 옹립해 황제로 삼고는 송(宋)이라고 국호를 고쳤다. 『송사(宋史)』 卷1 「태조본기(太祖本紀)」
진교일석서일승(陳橋一夕瑞日昇)
송(宋) 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즉위하였다는 뜻이다. 후주(後周) 현덕(顯德) 7년에 거란(契丹)이 침입해 오자 조광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러 가다가 군사가 진교역(陳橋驛)에 주둔하였는데, 그날 밤 부하들이 병란을 일으켜서 조광윤을 옹립해 황제로 삼고는 송(宋)이라고 국호를 고쳤다. 『송사(宋史)』 卷1 「태조본기(太祖本紀)」
진교편석(秦橋鞭石)
진시황(秦始皇)이 돌다리를 만들어 그것을 디디고 바다를 건너 해 뜨는 곳을 가 보려 하니, 신인(神人)이 나타나 돌을 몰아 바다로 내려가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으면 신(神)이 채찍으로 갈겨 돌에 피가 났다 한다.
진구(秦篝)
진(秦) 나라에서 만든 배롱(焙籠)이라는 말인데, 배롱은 화로 위에 씌워 놓고 젖은 옷 등을 말리는 기구로, 보통 대나 쇠붙이로 만들었다. 옛날에 「초혼(招魂)」할 때, 망자(亡者)의 옷을 배롱 위에 얹어 놓아 그의 혼이 그 속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던 풍속이 『초사(楚辭)』 「초혼(招魂)」에 실려 있다.
진국(殄國)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의 “사람이 없어지니 나라가 시들었네[人之云亡 邦國殄瘁].”를 말한다.
진군(眞君)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神仙)들의 존칭(尊稱)이다.
진군(眞君)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로, 나의 진짜 주인이라는 뜻이다.
진군(陳君)
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인 진림(陳臨)을 말한다.
진궁(秦宮)
후한(後漢) 때 왕실의 외척인 양기(梁冀)의 집 감노(監奴)의 이름인데, 그는 양기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태창령(太倉令)에 이르렀고, 위권(威權)을 크게 휘둘렀다. 『후한서(後漢書)』 卷三十四
진궁록위마(秦宮鹿爲馬)
진 나라의 승상(丞相) 조고(趙高)가 국정(國政)을 제맘대로 하고자 하나 군신(羣臣)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의 위권(威權)을 보이기 위해,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것이 말입니다.” 하자, 이세황제가 웃으면서 “승상이 잘못 안 게 아닌가?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 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혹자는 ‘말’이라고 말하여 조고의 뜻에 아종(阿從)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궁삼월홍염렬(秦宮三月紅焰烈)
아방궁은 진시황(秦始皇)이 지은 큰 궁궐이다. 항우(項羽)가 진 나라를 멸한 뒤 아방궁을 불살랐다는데 두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근(塵根)
불가의 말로 육진(六塵)ㆍ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진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으로 육근을 통하여 의식을 일으키는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근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여섯 가지 기관을 말한다.
진기(眞機)
우주의 근본 기틀. 현묘(玄妙)한 도리. 우주의 가장 본래적인 근본 도리는 워낙 은미하여 잘 알 수도 없고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마음이나 사물의 진정한 모습.
진길료(秦吉了)
새 이름이다.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는 새로 일명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한다.
진낙선옹(眞樂禪翁)
진락은 고려 이자현(李資玄)의 시호(諡號)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던 중에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가 선학(禪學)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진남(秦男)
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에게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보내면서 함께 보낸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가리킨다. 시황이 서복을 시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녀학소(秦女學簫)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음악을 좋아하여, 퉁소를 잘 부는 소사(蕭史)에게 시집을 가서 소사에게 퉁소를 배웠는데, 두 사람이 함께 퉁소를 불자 봉황(鳳凰)이 내려오므로, 마침내 함께 봉황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진녀를 곧 기녀(妓女)의 뜻으로 쓴 것이다.
진뇌(陳雷)
진ㆍ뇌는 후한(後漢) 때에 우의가 두텁기로 유명한 진중(陳重)과 뇌의(雷義)이다. 뇌의가 무재과(茂才科)에 급제하여 그 자격을 진중에게 양보하였으나 자사(刺使)가 들어주지 않자, 거짓으로 미쳐서 벼슬을 받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아교와 옻칠이 굳다고 하나 뇌의와 진중만은 못하리[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하였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一 「뇌의전(雷義傳)」
진누(秦樓)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과 사위 소사(蕭史)를 위해서 지어 준 화려한 저택 이름이다.
진단(陳摶)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도남(圖南)이다. 그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화산(華山)에 가 살면서 도(道)를 닦고 벽곡(辟穀)의 술을 익혀 몇 백 날이고 계속 잠을 잤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登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세상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송사(宋史)』 卷四百五十七
진단(震旦)
인도(印度)가 고대 중국(古代中國)을 이르던 말이다.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진대(賑貸)
봄철 보리고개 때나 흉년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꾸어주는 일.
진대(秦臺)
진대경(秦臺鏡)의 준말이다. 진(秦) 나라 때 광(廣) 4척(尺), 고(高) 5척 9촌(寸)의 네모난 거울이 있었는데, 오장 육부까지도 환하게 비췄다고 한다.
진대난봉성(秦臺鸞鳳聲)
진(秦)나라 때 왕자진(王子晋)과 소사(簫史)의 옥적(玉笛)이다.
진동(秦童)
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에게 동해 바다 삼신산(三神山)에 있다고 하는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하면서 함께 보낸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락(眞樂)
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의 시호이다. 고려조 선종(宣宗) 때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 중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진량(陳良)
전국시대(戰國時代) 문명이 미개한 초 나라 태생이었으나, 주공(周公)ㆍ중니(仲尼)의 도를 좋아하여 북으로 중국(中國)에 가서 유학하였는데, 중국의 선비들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정도로 대유(大儒)가 되었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上
진량(秦梁)
진시황(秦始皇)이 해 뜨는 곳을 보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돌다리를 가리킨다. 진시황(秦始皇)이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돌다리를 놓으려고 하였는데, 해신(海神)이 나타나서 다리 기둥을 세워 주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이를 고맙게 여겨 만나 보려고 하니, 해신이 말하기를, “내 모습이 추하니 내 모습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만나겠다.” 하였다. 이에 진시황(秦始皇)이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몰래 해신의 발을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성을 내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여 진시황(秦始皇)이 말을 타고 곧장 나왔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 「예문유취(藝文類聚)」 卷79
진령사(榛苓思)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의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엔 감초, 그 누가 그리운가 서쪽의 미인이로세(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에서 나온 것으로, 저물어가는 때에 서울에 계신 임금이 한결 더 그립다는 것이다.
진로(振鷺)
『시경(詩經)』 주송(周頌) 「진로(振鷺)」편이 있는데, 그것은 주(周)나라 종묘(宗廟)의 제사에 하(夏)나라의 후손과 상(商)의 후손이 와서 참예하였으므로, 그것이 마치 깨끗한 해오리가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것과 같다 하였다.
진로영옹(眞老靈翁)
진로(眞老)는 김윤겸(金允謙), 영옹은 이인상(李麟祥)을 가리킨다. 김윤겸의 자는 진재(眞宰)이며,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이므로 각각 높여서 칭한 것이다.
진로장(塵勞障)
불가의 말로 번뇌가 앞길을 막고 있는 것. 『금강경(金剛經)』 註
진뢰(陳雷)
동한(東漢)의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병칭(幷稱)이다. 뇌의와 진중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 두 사람은 우의가 돈독하여 고향 사람들이 이들 둘을 보고는 “아교풀이 스스로 잘 붙는다 말하지만 뇌의와 진중만은 못하리라.”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교의(交誼)가 아주 깊은 친구 사이를 이르게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一 「독행전(篤行傳)」
진뢰(陳雷)
한(漢) 나라 진중(陳重)이 한 고을에 사는 뇌의(雷義)와 친하게 지내었는데,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자 진중에게 양여(讓與)하니, 자사(刺史)가 듣지 아니 하였다. 뇌의는 진중을 위하여 거짓 미쳐 도망해 숨었다.
진루(秦樓)
① 왕의 부마가 사는 화려한 저택을 말한다.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과 사위 소사(蕭史)를 위해 멋진 누대를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을 봉루(鳳樓) 혹은 진루(秦樓)라고 하였다. 진 나라 목공의 딸 농옥이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서 봉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에 목공이 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이들 두 사람이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으며,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열산전(列仙傳)』
② 춘추시대(春秋時代) 진(秦) 나라의 봉대(鳳台)를 지칭한다.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피리의 명인 소사(蕭史)에게 시집을 가서 열심히 배운 결과 봉명곡(鳳鳴曲)을 지어 부르게 되자, 목공이 그들을 위해 봉대(鳳臺)를 지어 주고 거하게 하였는데, 뒤에 부부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후한서(後漢書)』 「교신전(矯愼傳)」 注 / 인용: 龍江詞(백광훈)
③ 기생집(妓館)을 말한다.
진루객(秦樓客)
진루의 나그네란, 바로 진 목공(秦穆公) 때 퉁소를 잘 불던 사람으로, 진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봉루(鳳樓)에서 함께 살다가 뒤에 부부가 함께 봉황(鳳凰)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소사(蕭史)를 가리키는데, 당(唐)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에 “어찌 알았으랴 하룻밤에 진루의 나그네가, 오왕의 원내의 꽃을 훔쳐 볼 줄을[豈知一夜秦樓客 偸看吳王苑內花].” 한 데서 온 말이다.
진루월(秦樓月)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달 아래서 퉁소를 불다가 자봉(紫鳳)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이다.
진루취봉(秦樓吹鳳)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악(樂)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목공이 소사에게 농옥을 아내로 삼아주고 봉루(鳳樓)를 지어 주었던 바 봉루에서 두 사람이 퉁소를 불자 봉황새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진류은(陳留隱)
어느 지명(地名)인데 진류 사람 장승(張升)이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붕당 싸움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류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친구를 만나 풀을 깔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그 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용이 비늘을 감추지 못하고 봉황이 날개를 감추지 못했으니 이 높이 쳐진 그물속에서 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비록 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하였다고 한다. 진류노부(陳留老父). 『후한서(後漢書)』 「진류노부전(陳留老父傳)」
진리(津吏)
나루터의 선박과 교량을 주관하는 아전을 말한다.
진린(陳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이다.
진림(陳琳)
동한 광릉(廣陵) 석양(射陽) 사람으로 자는 공장(孔璋)이다. 문장이 뛰어나 일찍이 원소(袁紹)를 위해 조조(曹操)의 죄상을 문책하는 격문을 지었는데, 원소가 패하여 조조에게 돌아가니 조조는 그 재주가 아까워 죄를 주지 않고 기실(記室)을 삼았다 한다. 『삼국지(三國志)』 卷二十一 「진림전(陳琳傳)」
진림(陳臨)
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이다. 진림이 창오 태수(蒼梧太守)로 있으면서 정성을 다해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렸고, 심지어는 살인한 사람이 자식이 없음을 알고는 그의 아내를 감옥으로 불러들여 남편과 동침을 하게 해서 끝내 자식을 얻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뒤,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5월 5일이면 동성문(東城門) 위에서 그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진마표륜(陣馬飆輪)
진마(陣馬)는 풍장진마(風牆陣馬)의 준말이고 표륜은 표거(飆車)인데 문장의 기세가 웅후(雄厚)함을 비유한 것이다. 두목의 이하시 서(李賀詩序)에 “風飆陣厚不足爲其勇也” 라 하였다.
진망(塵網)
세속의 그물로, 주로 벼슬살이를 가리킨다.
진망(蓁莽)
초목이 무성하다.
진맹공(陳孟公)
맹공(孟公)은 한(漢) 나라 진준(陳遵)의 자(字)이다. 벼슬이 가위후(嘉威侯)에 이르렀으며 술을 즐겨하여 늘 손님들이 집에 꽉 찼었는데, 그때마다 대문의 열쇠를 잠그고 손님 수레의 비녀장을 샘에 던져 넣었으므로 손님이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한다.
진맹투할(陳孟投轄)
맹공(孟公)은 서한(西漢) 진준(陳遵)의 자(字)이다. 진준이 술을 좋아하여 주연을 곧잘 열곤 하였는데, 빈객이 모여들면 그들이 타고 온 수레의 비녀장(수레바퀴가 굴대에서 빠지지 않도록 굴대머리에 지르는 큰 못)을 우물속에 던져 놓고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가지 못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유협준(游俠傳)」 진준(陳遵)
진목(瞋目)
‘눈을 부라리다’의 뜻이다.
진목공(秦穆公)
춘추 때 오패(五霸)의 하나. 그는 훌륭한 신하 백리해(百里奚)를 얻어 옹주(雍州) 지방을 차지하고 패업(霸業)을 이룩하였다.
진목루(秦穆樓)
진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음악을 좋아했는데, 소사(簫史)는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진 목공이 농옥을 소사에게 시집보내어 둘이서 거처하도록 지어 준 봉루(鳳樓)를 가리킨다.
진목창창계우개(震木蒼蒼桂又開)
진괘(震卦)는 목(木)과 장남(長男)에 해당하므로, 즉 큰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음을 이른 말이다.
진무(眞武)
한(漢) 나라 때 정락국왕(淨樂國王)의 태자이다. 동해를 건너다 천신(天神)을 만나 보검을 수여받고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수련한 끝에 42년만에 공을 이루어 백일승천(白日昇天)하였으며 상제의 명을 받들고 북방을 진압하였다 한다.
진무기(陳無己)
무기(無己)는 진사도(陳師道)의 자이다. 진사도는 호가 후산(后山)이며, 송(宋) 나라의 시인이다.
진문(晉門)
당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매승의 칠발을 모방하여 지은 문체의 명칭.
진물(鎭物)
‘모든 사물이 다 안정되게 하는 것’이다.
진미공(陳眉公)
명(明) 나라 진계유(陳繼儒)로, 미공(眉公)은 그의 호이다.
진박(陳搏)
오대(五代) 말 북송(北宋) 초의 인물로, 도가(道家) 사상가이다. 호북성(湖北省)의 무당산(武當山)에서 선술(仙術)을 닦았는데, 한 번 잠을 자면 100일을 내리 잤다고 한다.
진번(陳蕃)
동한(東漢) 때 사람. 그의 친구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평상을 내려앉게 하고 그가 떠나면 달아매어 다른 사람에게는 앉게 하지 않았다 한다.
진번일실무(陳蕃一室蕪)
『후한서(後漢書)』 권 16에 “진번이 15세 때 집에서 한가히 지내고 있었는데 풀이 무성하여도 그대로 두었었다. 아버지의 벗 설근(薛勤)이 찾아왔다가 진번에게 ‘그대는 어째서 뜰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손님을 맞지 않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을 살면서 마땅히 천하를 청소하여야지 한 집의 청소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진번일탑(陳蕃一榻)
후한(後漢) 때 진번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한 탑(榻)을 마련하여 대접했던 고사이다.
진번탑(陳蕃榻)
① 동한(東漢)의 진번(陳蕃)이 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되었을 때,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깔아 놓고 접대하였다가 서치가 돌아가면 그 자리를 다시 걸어 놓았다. 후세에 특별히 손님을 대우하는 것을 하탑(下榻)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 53 「서리전(徐摛傳)」
② 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만 탑상을 내려놓았다가 그가 가고 나면 다시 올려놓고는 다른 사람은 무시했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진번전(陳蕃傳)」
진번하탑(陳蕃下榻)
‘현자를 특별 예우한 일’을 말한다. 후한(後漢) 시절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별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다가도 그 고을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서치(徐穉)라는 선비만 오면 특별히 자리를 내려 깔아주고 그가 가면 즉시 말아서 다시 제자리에다 매달았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고사전(高士傳)』
진벌자능통(津筏自能通)
직언(直言)을 하여 임금을 바른길로 유도하였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上에 “만약 큰 강을 건널 때에는 그대가 배가 되어 나를 건너게 하라.”고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부탁하는 말이 나온다.
진법(秦法)
진(秦) 나라의 법은 가혹하고 각박하고 번다하기로 유명하였다.
진변(辰弁)
옛날 경상도 지방에 위치했던 나라로서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합칭한 말이다.
진변문(晉卞門)
부자와 형제들이 모두 국가에 충성을 바치다 순절한 진나라 변호(卞壺)의 집안을 말한다.
진봉(進奉)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침.
진부(眞符)
도참(圖讖)을 가리킨다.
진부귀정통(眞符歸正統)
제왕(帝王)이 처음에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부명(符命)이라 한다. 여기서는 진부(참부명)가 정통의 임금에게 돌아왔다는 뜻이다.
진부조슬(秦缶趙瑟)
진왕(秦王)과 조왕(趙王)이 우호를 다지기 위해 민지(澠池)에서 회동했을 때 술이 거나하자 진왕이 일부러 조왕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조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직접 퉁기게 했다. 이때 조왕을 배종했던 인상여(藺相如)가 역시 진왕으로 하여금 진의 고유 악기인 장군(缶)을 치게 하여 보복하였다. 『사기(史記)』 卷八十一
진북계(陳北溪)
송(宋) 나라 때 주자(朱子)의 문인이며 도학자인 진순(陳淳)의 호가 북계(北溪)인데, 주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오도(吾道)에 진순을 얻은 것이 기쁘다.”고 하였다. 『송사(宋史)』 卷四百三十
진사왕(陳思王)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조식(曹植)이 진왕(陳王)에 봉해지고 시호(諡號)가 사(思)이므로 그를 가리킨 말이다.
진사차(辰巳嗟)
현인(賢人)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꿈속에서 공자(孔子)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이고 내년은 사년이다[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일러 주는 말을 듣고는, ‘용사의 해에 현인이 탄식한다[歲至龍蛇賢人嗟].’는 참어(讖語)에 비추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는데, 과연 얼마 뒤에 병에 걸려 죽은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卷35 「정현열전(鄭玄列傳)」
진삼(陳三)
송 나라 때의 문인 학자이자 절의가 높았던 진사도(陳師道)의 별칭인데, 매우 가난하였으나 그의 재주를 탐낸 권세가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였고 끝내는 매우 추운 겨울에 솜옷이 없어 얇은 옷을 입고 교제사(郊祀)에 참여하였다가 병이 들어 49세로 죽었다. 문(文)은 증공(曾鞏)을, 시는 황정견(黃庭堅)을 스승으로 삼았다. 『송사(宋史)』 卷四百四十四 「진사도전(陳師道傳)」
진상(眞常)
‘진실되고 항상 존재한다’는 말로 여여(如如)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진상곶천인정만태(進上串穿人情滿駄)
진상품이 겨우 산적 궤미에 꿸 만하면 이에 따르는 인정물(人情物)은 말바리에 가득하다는 속담. 정식으로 바치는 물건보다 뇌물이 휠씬 많음을 풍자하는 말이다.
진상자존녕사송(晉相自尊寧仕宋)
도연명(陶淵明)은 진(晋) 나라 재상 도간(陶侃)의 자손으로서 진(晋)을 빼앗은 송(宋)에 몸을 굽히기를 부끄러워하였다.
진색(震索)
『주역(周易)』에 진괘(震卦)는 장남(長男)인데, 곤(鯀)이 건(乾)에서 양효(陽爻)를 하니 빌려오면 진괘가 된다.
진서(趁瑞)
연산군 때 악인(樂人)의 의복을 일컫던 말이다.
진서(陳徐)
진번(陳蕃) 서치(徐穉). 동한(東漢) 때 예장 태수(豫章太守) 진번이 다른 빈객들은 일절 접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가 올 때만 매달아 놓았던 의자를 내려놓았다가 서치가 떠난 뒤에는 도로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66 「진번열전(陳蕃列傳)」
진서루(鎭西樓)
장연(長淵) 객관(客館) 동쪽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진서산(眞西山)
서산(西山)은 송 나라 때 학자 진덕수(眞德秀)의 호이다. 자는 경원(景元)이다..
진선(晉宣)
진(晉) 나라 선제(宣帝)로 추존(追尊)된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진선진미(盡善盡美)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아름다움. 완전 무결한다.
진성(辰星)
수성(水星)이어서, 오행설로 보아 흑(黑)에 해당한다. 《天官占
진성(秦城)
혼란했던 진(秦) 나라의 궁중처럼 권력의 암투가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당시의 조정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다.
진성운조차어린(陣成雲鳥次魚鱗)
고대의 진법(陣法)에 의하면 운문진(雲門陣), 조상진(鳥翔陣), 어린진(魚鱗陣) 등이 있다.
진소(秦蕭)
진 나라 소사(蕭史)의 피리 소리라는 뜻이다.
진소경(陳少卿)
소경은 벼슬 이른다. 진 소경은 곧 진화(陳澕)를 가리키는데,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우사간(右司諫) 등을 지냈고 시와 문장에 뛰어나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진소유(秦少游)
소식(蘇軾)의 제자인 송(宋) 나라의 문인 진관(秦觀)으로, 소유는 그의 자(字)이다. 시문에 능했으며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짐. 저서에는 『회해집(淮海集)』이 있다.
진수미인정(溱水美人情)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진수와 유수 한창 넘실넘실 …… 남정네와 여인네 서로들 노닥이며 작약을 선물로 주고 받는구나[溱與洧方渙渙 …… 維士與女 伊其相謔 贈之以勺藥].”라고 하였다.
진수성찬(珍羞盛饌)
진귀한 맛있는 음식(羞)이 성대하게(盛) 차려짐(饌). 맛이 좋은 음식을 푸짐하게 잘 차림. 보기 드물게 맛이 좋고 푸짐하게 잘 차린 음식
진수숭운(秦樹嵩雲)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른다. 이상은(李商隱) 시에, “숭산 구름 진 나라 나무로 오래도록 떨어져 사네[嵩雲秦樹久離居]”라는 구절이 있다.
진수옹(陳壽翁)
수옹(壽翁)은 원(元) 나라 학자인 진역(陳櫟)의 자. 그는 송(宋) 나라가 망하자 은거하여 출사치 않았음. 저서에 『정우집(定宇集)』ㆍ『상서전찬소(尙書傳纂疏)』ㆍ『근유당수록(勤有堂隨錄)』 등이 있다.
진승(眞乘)
불교(佛敎)의 용어로, 즉 진실한 교법(敎法)을 말한다.
진승(陳勝)
진(秦)나라 양성(陽城) 사람. 이세(二世) 원년에 양하(陽夏) 사람 오광(吳廣)과 함께 어양(漁陽)에서 수자리살면서 제 기간을 대지 못해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곳 도위(都尉)를 죽이고 함께 수자리살던 졸도들과 기치를 들고 진(秦)과 맞서 싸우면서 공자(公子) 부소(扶蘇)와 초장(楚將) 항연(項燕)을 사칭하니 여러 군현(郡縣)이 진(秦)의 가혹한 법을 괴롭게 여겨 모두 귀부(歸附)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초왕(楚王)이라 하고 형세가 매우 성했는데, 뒤에 어자(御者) 장가(莊賈)에게 살해되었다.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사기(史記)』 편명으로, 진평(陳平)의 열전이다.
진시명사(晉時名士)
중국 진(晉) 나라 때 노자를 숭상하던 일곱 선비들 즉, 죽림칠현을 일컬음.
진시화중귀(秦時火中歸)
진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우민(愚民) 정책을 따라, 천하의 시서(詩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찾아내어 함양(咸陽)에 모아 놓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식위(陳寔位)
동한(東漢)의 진식이 성덕 군자(盛德君子)로서 벼슬이 태구장(太丘長)에 머물렀으므로, 태위(太尉) 양사(楊賜)와 사도(司徒) 진탐(陳耽) 등이 공경(公卿) 지위에 오르고는 늘 탄식하기를 “그분이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먼저 차지하다니 부끄럽다[寔大位未登 愧于先之].”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
진신아(縉紳衙)
온 조정을 통털어 진신아라고 말하고, 이것을 거느렸다고 함은 수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신월(眞身月)
하늘에 있는 달(月)은 진신(眞身)이요, 여러 군데 물속에 비치는 달 그림자는 달의 분신(分身) 또는 환신(幻身)・화신(化身)이 된다.
진신처사(搢紳處士)
높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진안(眞贋)
‘진짜와 가짜’를 말한다.
진암(晋菴)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천보(李天輔)의 호이다.
진양(辰陽)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진주(辰州) 부근의 지명이다.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옛 이름이다.
진양공(晉羊公)
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의 자사로 있을 때, 가벼운 갖옷 느슨한 띠(輕裘緩帶)로 현산(峴山)에서 놀았다.
진양공(晉陽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우(瑀), 고친 이름은 이(怡). 강화 천도 뒤 고종(高宗) 21년 진양후(晉陽後)에 봉하였다.
진양공자(晉陽公子)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진양은 고을 이른다. 현 산서성 태원현(太原縣) 치(治). 옛날의 당국(唐國) 뒤에 진(晉)으로 고침.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진 양공(晉陽公)이므로 그 아들 태종이 진양공자이다.
진양사(秦良死)
『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黃鳥)」에 의하면 진(秦)의 목공(穆公)이 죽었을 때 그의 유명(遺命)에 의하여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인 엄식(奄息)ㆍ중항(仲行)ㆍ침호(鍼虎)가 본의 아니게 순사(殉死)하였는데, 그때 나라 사람들은 그 세 양인(良人)이 까닭 없이 죽은 것이 슬퍼서, “만약 그들 목숨을 구제할 수만 있다면 딴 사람 백 명과도 그 목숨을 바꾸겠다.”라는 시를 썼던 것이다.
진양절도사(晉陽節度使)
진양(晉陽)은 진주(晉州)의 옛 이름으로 진양절도사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별칭이다.
진여(眞如)
① 불교 철학(佛敎哲學)에서 본체를 진여(眞如)라 하는데, 진(眞)은 허망(虛妄)하지 않다는 것이요, 여(如)는 평등(平等)인데.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는 말이다. 본체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심(自心)이라 한다. 《起信論
② 우리의 이지(理智)로는 파악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모두 실체와 자성이 없다는 공(空)한 이치를 체득할 때에 나타나는 것. 그러나 이는 공에 의하여 나타나는 실성(實性)이므로 공성이라 하는 것이요 진여 자체가 공이라는 것은 아니다.
③ 대승 불교(大乘佛敎)의 이상 개념의 하나인데, 우주 만유에 퍼져 있는 상주 불변하는 본체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 개념으로 미칠 수 없는 진실한 경계로서 오직 성품을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 아닌 진실, 변천하지 않아 여상(如常)함을 말한다.
진여삼매(眞如三昧)
일체의 번뇌 망상을 제거한 본연(本然)의 경지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진역(陳櫟)
원(元) 나라 학자. 자는 수옹(壽翁), 호는 정우(定宇). 저서에는 『상서집전찬소(尙書集傳纂疏)』ㆍ『정우집(定宇集)』ㆍ『역사통략(歷史通略)』 등이 있다. 『원사(元史)』 「진역전(陳櫟傳)」
진역(秦譯)
『불경(佛經)』를 말한다. 후진(後秦) 때에 서역(西域)의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경론(經論) 380여 권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진영탁(塵纓濯)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만하네.” 하는 노래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있다.
진완(陳完)
진 공자 완(陳公子完)으로서 처음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환공(桓公)을 섬겨 경(卿)이 되고 뒤에 전(田)으로 성을 바꾸었는데, 그의 11세손인 전화(田和)가 끝내 제 나라를 찬탈하였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卷一
진왕(陳王)
진왕(陳王)에 봉해졌던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문장가 조식(曹植)의 봉호(封號)이다.
진왕지부(秦王之缶)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진왕과 민지(澠池)에서 모였을 때 인상여가 왕을 따라갔더니, 오만한 진왕이 조왕에게 비파를 타게 하였다. 상여는 진왕을 꺾어 장구를 치게 하였다.
진왕철경거(陳王輟耕耟)
진왕은 진승(陳勝)을 가리킨다. 그는 품팔이꾼으로 농사일을 하다가 “이 다음 부귀하게 되면 잊지 않겠다.” 하니 사람들은 품팔이 주제에 무슨 부귀냐고 비웃었다. 진승은 “작은 새야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하며 농사일을 걷어치웠다. 뒤에 오광(吳廣)과 함께 군중을 모아 폭정을 자행하던 진(秦)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
진용양(晉龍驤)
진 나라의 장군인 용양대장(龍驤大將) 왕준(王濬)을 가리킨다. 왕준이 큰 누선(樓船)을 만들어 타고 오(吳) 나라를 정벌하러 갔는데, 오 나라 군사들이 철쇄(鐵鎖)를 설치해 가로막았다. 그러자 다시 큰 뗏목을 만들어 불에 태워 철쇄를 녹인 다음 진격하여 오 나라를 멸망시켰다. 『진서(晉書)』 卷42
진운(秦雲)
‘진(秦) 나라 서울 장안(長安)의 하늘에 뜬 구름’을 말한다.
진운(縉雲)
황제(黃帝) 때의 관명(官名)인데, 하관(夏官) 즉 병부(兵部)에 해당한다.
진원(眞源)
선도(仙道)의 본원(本源)을 이른 말이다.
진원룡(陳元龍)
원룡(元龍)은 진등(陳登)의 자(字)이다.
진월(秦粵)
월(粤)은 월(越)로도 쓰는데 진(秦)은 중국의 서북쪽에 있고 월은 동남쪽에 있어서 거리가 멀므로 떨어져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한다.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
연산군이 죄인을 절도(絶島)에 정배시키고 그들을 감독하도록 보내던 서신을 말한다.
진유아곡(溱洧雅曲)
연인끼리 음란하게 희희덕거리며 작약꽃을 꺾어서 주고받는 것을 읊은 시 역시 품위 있는 노래가 못 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사내와 계집이 희희덕거리며 장난치고, 작약을 꺾어 주며 서로들 헤어지네[維士與女 伊其將謔 贈之以芍藥].”라는 말이 나온다. 상장(相將)은 서로 전송한다는 말이다.
진유풍정(溱洧風情)
청춘 남녀가 작약을 꺾어 주며 장난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남녀 히히거리며 장난치다 작약을 꺾어 주며 헤어지네[維士與女 伊其相謔 贈之以勺藥].”라는 구절이 있다.
진유화표(眞遊華表)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도를 닦고, 뒤에 학(鶴)으로 화(化)하여 고향을 떠난 지 천 년 만에 고향인 요동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 앉았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의(振衣)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 입는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는 말이 나온다.
진이세(秦二世)
진시황(秦始皇)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말한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이사(李斯)와 조고(趙高)가 유조(遺詔)를 위조하여 장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호해를 세웠고, 조고가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관동(關東)에서 도적이 일어나게 되매 이세가 조고를 책망하자, 조고가 시해(弑害)하였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인(眞人)
‘도득(道得)한 사람’을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 후는 천명에 맡기는 것이다. / 인용: 10년 임용마지막 시험에 임하는 자세
진인설언(秦人設言)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이 뿔이 났다는 말이다. 진왕(秦王)이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을 옥에 가두어 놓았는데, 그가 보내달라고 하자, 진왕이 그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통이 희어지고 말이 뿔이 나면 그때 보내주리라.” 하였다. 단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더니 그 후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말도 뿔이 나서 진왕이 깜짝 놀라 그를 풀어줬다고 한다. 『사문유취(事文類聚)』
진인종식(眞人踵息)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진인(眞人)의 호흡(呼吸)은 대지를 딛고 서서 발뒤꿈치로부터 쉬어 나오고, 보통 사람의 호흡은 목구멍으로부터 나온다[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인책(秦人策)
진(晉) 나라 대부(大夫) 사회(士會)가 진(秦) 나라에 도망가 있을 적에, 진(晉) 나라에서 진(秦) 나라가 사회를 등용할까 염려한 나머지, 위(魏)의 수여(壽餘)를 시켜 사회를 꾀어서 진(秦) 나라를 탈출시킬 때에 진(秦) 나라 대부 요조(繞朝)가 사회에게 자기 말채찍을 주면서 말하기를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꾀를 마침 쓰지 않았을 뿐이다.”고 하여,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주의시킨 데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 文公十三年
진인척(秦人瘠)
월(越) 나라는 진(秦) 나라와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의 살찌고 파리함을 하등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서로 소원하여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越人視秦人之肥瘠]. 한유(韓愈), 「쟁신론(爭臣論)」
진일(眞逸)
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릉(秣陵) 사람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구용현(句容縣)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화양은거(華陽隱居)라 호하였다가 뒤에 화양진일이라 호하였다.
진일주(眞一酒)
술 이름이다. 송(宋)의 소식(蘇軾)이 만든 술. 『주사(酒史)』
진자앙(陳子昂)
초당(初唐)의 시인. 자는 백옥(伯玉). 형식에 치우친 제ㆍ양(齊梁)의 귀족적 시풍(詩風)을 일소하고, 한ㆍ위(漢魏)의 고아(高雅)한 시풍으로 복고할 것을 주창, 성당(盛唐) 시인의 선구가 됨. 저서에는 『진습유집(陳拾遺集)』이 있다.
진재(眞宰)
우주 만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참 주인을 말한다. 하늘은 만물의 주재(主宰)이기 때문에 진재라고 한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필시 진재가 있을 터인데 다만 그 단서를 얻지 못하였을 뿐이다[若有眞宰, 而特不得其眹].” 하였다.
진쟁(秦箏)
진(秦) 나라 사람들이 타던 쟁을 말하는데, 이 가락은 매우 강개(慷慨)하다고 한다.
진적위산(塵積爲山)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다. 『순자(荀子)』 「권학(勸學)」
진전(眞殿)
승하한 왕과 왕후의 어진(御眞)을 모셔 놓은 곳. 진전이 곧 선원전의 별칭은 아니다.
진전(眞詮)
속제(俗諦)에 대한 진제(眞諦) 즉 불교 최상의 경지를 가리킨다.
진전전(秦前殿)
진시황(秦始皇)의 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은 그 규모가 동서로 5백 보(步)가 되고, 남북은 50장(丈)이나 되어 그 위에 사람 1만 명이 앉을 수가 있었고, 두루 복도를 놓아 궁전 아래서 곧바로 남산(南山)에 다다를 수 있게 꾸몄음.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정계사(晉亭禊事)
진정(晉亭)은 진(晉) 나라 때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 있었던 난정(蘭亭)을 이르는데, 당시 명사(名士)들로 왕희지(王羲之)ㆍ사안(謝安) 등 41인이 3월 3일에 이곳에 모여 계사(禊事)를 치르고 시부(詩賦)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겼었다. 『난정집서(蘭亭集序)』
진정곡(秦庭哭)
춘추 때 오(吳) 나라의 군사가 초 나라를 쳐 수도(首都)에 들어오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여 뜰에서 7일 동안 울음소리를 끊지 않으니, 진 나라에서 그 정성에 감동되어 군사를 내어 초 나라를 구하였다.
진정리(眞定梨)
진정(眞定)은 지명이다. 이 지방에는 배(梨)가 특산물인데 크고 맛 좋기로도 유명하다. 위 문제(魏文帝)의 조서(詔書)에 “진정의 배는 크기가 마치 주먹만하고 달기는 마치 꿀과 같다.” 하였다.
진정민우(秦政民愚)
진시황(秦始皇)의 이름은 정(政)인데, 책을 모두 불살라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진정수사(秦政收司)
‘연좌되어 검거한다’는 말이다. 진정(秦政)은 이름이 정(政)인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키는데, 이에 앞서 진 효공(秦孝公) 때에 상앙(商鞅)이 백성들 사이에 서로 규찰하게 하고 연좌시키는 수사연좌법(收司連坐法)을 만들었던바, 이 법이 진시황 때에 이르러서는 결국 천하의 서적(書籍)을 다 불태우고, 협서율(狹書律)을 만들어 민간에서 시서(詩書)를 논하거나 또는 의약(醫藥)ㆍ복서(卜筮) 이외의 서적을 소장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게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유의어: 수사(收司) / 인용: 有客行(성해응)
진정표(陳情表)
권근(權近) 자신이 새 왕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 대열에서 빠지자 자기도 문장으로서 이씨 개국에 일익을 담당한 공로가 있음을 밝힌 진정전(陳情箋)과, 83세인 자기 아버지에게 봉작(封爵)을 해달라고 간청한 진정차자(陳情箚子)가 있다. 『양촌집(陽村集)』
진제(振祭)
옛사람이 음식을 대할 적에 반드시 제(祭)하는데 그것을 진제라 이른다. 『주례(周禮)』 「변구제(辨九祭)」의 제5제이다.
진제(眞諦)
불교 용어로서 현상계의 미(迷)한 세계를 말하는 속제(俗諦)에 대해, 진지(眞智)에 의하여 터득하는 궁극적인 진여(眞如)의 세계를 진제(眞諦)라 한다.
진제궁송(秦帝宮松)
진제는 곧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 말인데, 진시황이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할 적에 폭풍우(暴風雨)가 몰아치자 다섯 그루의 소나무 밑에서 이를 피하였으므로 뒤에 이 소나무들을 다섯 대부(大夫)로 봉(封)한 고사이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조여(陳趙予)
진이상(陳履常)과 조경황(趙景貺)과 동파(東坡) 자신을 가리킨다. 동파의 시에 “꿈길에서 돌아오자 발소리 들려오며, 누군가 조진여를 불러 대누나[夢回聞剝啄 誰呼趙陳予].”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34 與趙陳同過歐陽叔弼新治小齋戲作
진종욕도자응미(塵蹤欲到自應迷)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 땅의 어부가 시내를 따라 올라가며 고기를 잡다가 홀연히 복사꽃이 만발한 별천지(別天地)에 들어가서 노닐었는데, 그곳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다시 찾아가 보려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주(晉晝)
『주역(周易)』 「진괘(晋卦)」에, “낮에 세 번 접함이라[畫日三接].”는 구절이 있다. 소(疏)에 “이 괘(卦)는 신하의 승진(昇進)을 밝히는 것이므로, ‘晋’이라 이른다. 천자(天子)가 의(義)롭게 여겨 거마(車馬)를 줌이 번다(蕃多)하고 숱하며, 또 자주 총애를 입어 하루 낮 사이에 세 번 접견함이라.” 하였다.
진주(眞珠)
강원도 삼척의 별호이다. 삼척이 예로부터 선향(仙鄕)으로 이름이 났다.
진주결사(陳朱結社)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만 살아서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이들은 대대로 서로 혼인했다 한다. 한편 무릉도원에도 진씨와 주씨 두 성이 피난 가서 살았다고 하는데, 두 집안의 연인(聯姻)의 정분을 주진지호(朱陳之好)라 한다.
진주삼장사(晉州三壯士)
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9주야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황진(黃進)을 가리킨다.
진주성(眞珠城)
강원도 삼척(三陟)의 옛 이름이 진주(眞珠)이다.
진준(陳隼)
공자가 진(陳) 나라에 있을 때 새매가 진후(陳侯)의 뜨락에 날아와서 죽었는데 돌촉의 싸리나무 화살에 관통된 것이 길이가 한 자가 넘었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새매를 가지고 공자에게 가서 물으니 공자가 이르기를 “이 새매가 멀리 왔다. 이 화살은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이다.” 했다 한다. 『국어(國語)』 『노어(魯語)』 숙신씨는 동이족(東夷族)으로서 공자가 관심을 두었음을 말한다.
진중(秦中)
① 섬서(陝西) 중부의 평원, 즉 관중(關中) 땅을 말하는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진(秦) 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② 중국의 함곡관(函谷關)을 말한 것이다.
진중자(陳仲子)
제(齊) 나라의 청렴한 처사(處士). 귀족의 자제로 지나치게 청렴결백하여 자기 형이 받은 녹을 의롭지 않은 것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자기 어머니가 만든 음식도 먹지 않고, 국왕(國王)이 백금(百金)의 폐백으로 초청(招請)하였으나 그의 처(妻) 또한 진중자와 뜻이 같아서 그것을 한 말로 사절하였다. 아내와 함께 오릉현으로 가서 자기는 신을 삼고 아내는 길쌈을 하면서 살아갔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진중자는 어찌 청렴한 선비가 아니리오. 오릉(於陵) 땅에 있을 때 3일 동안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굼벵이가 반이나 먹은 우물 위의 오얏을 기어가서 주워 먹으니 세 번 삼킨 후에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물건이 보였다.”는 말이 있다.
진지(進止)
① 나아감과 물러섬[進退]
② 행동함과 멈춤[舉止]
③ 명령[意旨]
④ 임금의 뜻[聖旨] / 인용: 哀魚將軍(이희풍)
진지(秦地)
장안, 즉 서울을 가리킨다.
진진(津津)
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는 모양, 악한 모양, 맛 또는 재미가 썩 좋은 모양
진진(眞眞)
당나라 조안(趙顔)이 화공(畵工)에게서 미인(美人)의 화상을 한 폭 얻으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이런 미인(美人)이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아내로 삼겠다.” 하니, 화공이 답하기를, “나의 그림은 신화(神畵)인데 이 미인의 이름은 진진(眞眞)이라 한다. 그 이름을 백일(百日) 동안 밤낮으로 부르면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것이니 술에다 백가(百家)의 채회(綵灰)를 타서 부으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하므로 조안은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미인이 살아나서 1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뒤에 조안의 친구가 알고, “이것은 요물(妖物)이다. 내가 신검(神劍)이 있으니 요물을 죽이라.” 하고 칼을 주었다. 조안이 방에 들어가니 미인이 울면서, “나는 남악(男岳)의 신선인데 지금 그대가 나를 의심하니 더 머물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안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술을 토해 내니 본 그림에 어린이 하나가 더 그려져 있었다.
진진(塵塵)
대대로, 누그러지는 모양
진진(振振)
마음이 인후한 모양, 성대한 모양, 신의심이 두터운 모양, 떼지어 나는 모양, 혼자 잘난 체하여 우쭐거리는 모양.
진진(溱溱)
많은 모양, 성한 모양, 펴지는 모양, 미한이 계속되는 모양
진진(振振)
문왕(文王) 후비(后妃)의 덕을 기렸다는 『시경(詩經)』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에 “아, 기린의 발이여, 무럭무럭 자라난 뛰어난 공자들은 모두가 바로 기린이로세[麟之趾 振振公子 于嗟麟兮].”라는 말이 있는데, 기린은 성격이 인후(仁厚)해서 발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는다고 한다.
진진(蓁蓁)
적취(積聚)된 모양이다.
진진(榛榛)
초목이 무성한 모양
진진약(秦晉約)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진(秦)나라와 진(晉)나라 두 나라가 대대로 혼인한 것을 말하는데, 후대에는 두 집안이 연혼(聯婚)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진진찰(塵塵刹)
『불경(佛經)』에 많은 세계를 한 티끌(塵) 중에 각각 한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진착(珍錯)
산진해착(山珍海錯)을 말하는데 찬의 아름답고 귀한 것을 말한다. 위응물(韋應物)의 시에 “山珍海錯棄藩籬”의 구가 있다.
진천(秦川)
①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진령(秦嶺) 이북에 있는 평원지대로, 옛날에 진 나라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는 들판을 가리킨다.
② 청수현에 있는 강 이름이다.
진첩(晉帖)
진(晉) 나라 서예가들의 글씨를 탁본하거나 모사한 서첩(書帖)을 말한다.
진청(秦靑)
옛날에 노래를 잘하던 사람의 이름이다.
진체(眞諦)
불가의 용어로 진실무망(眞實無妄)을 말한다. 이를테면 세간법(世間法)은 속체(俗諦)라 하고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진체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最上) 구경(究竟)의 진리를 말한다.
진초(眞草)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말한다.
진초경(晉楚卿)
국가 운명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무책임한다. 진(晉)과 초(楚)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칠국(七國) 중에서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였으므로 각국의 유환자(遊宦者)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가 자기의 영달(榮達)을 추구하는 객경(客卿)들이었기에 그들의 출처 거취는 그 나라 국익(國益)에 관계없이 매우 임의적이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초대흥(晉楚代興)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는 모두 패업(霸業)을 이룩한 강대국들인데,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평왕 말년에 이르러 진, 진, 제, 초가 교대로 일어났다[及平王之末 而秦晉齊楚代興].”라는 말이 나온다.
진초불납(秦初不臘)
진 혜문군(秦惠文君) 12년에 처음으로 납제(臘祭)를 거행하여 그 후로 여러 대(代)를 이어 오다가 진시황(秦始皇) 31년 12월에 이르러서는 이름을 가평(嘉平)으로 바꾸었다. 『사기(史記)』 「진본기(秦本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춘추(晋春秋)
진(晋) 나라 때 손성(孫盛)이 찬(撰)한 진양추(晋陽秋)를 이르는데, 말이 바르고 사리가 정당하여 대단히 양사(良史)로 일컬어졌다 한다. 『진서(晋書)』 卷八十二
진췌(秦贅)
가난한 남자가 데릴사위로 처가살이하는 것을 이른다. 이 풍속이 진(秦) 나라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른 말인데,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 “진 나라 사람들은 가난한 집 자식이 장성하면 데릴사위로 나간다.” 하였다.
진췌(殄瘁)
병들고 시달리어 망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어진 신하가 가고 없으니, 나라는 망하겠네[人之云亡 邦國殄瘁].”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췌시(殄瘁詩)
아까운 인물의 죽음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현인이 사라짐이여, 나라가 병들어 야위게 되었도다[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이 있다.
진췌탄(殄瘁歎)
훌륭한 사람이 죽어서 나라가 병들 것을 탄식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훌륭한 사람이 없으매 나라가 끊기고 병이 들리라[人之云亡 邦國殄瘁].” 하였다.
진췌한(殄瘁恨)
현인이 사라지면서 나라의 형세 또한 기울어지는 한스러움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人之云亡 邦國殄瘁”라 하였다.
진침난위제(陳諶難爲弟)
진침(陳諶)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형 기(紀)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기의 아들 군(群)과 그의 아들 충(忠)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높다고 우기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고 조부 식(寔)에게 묻자, “원방(元方 기의 자)은 형 되기 어렵고 계방(季方; 침의 자)은 아우 되기 어렵다.” 대답하였다.
진탑(陳榻)
진번(陳蕃)이 마련했던 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때 진번은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빈객(賓客)을 접견하지 않았는데, 오직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가 깔아주고 그가 떠나면 자리를 걷어 벽에 매달아 두었는데, 서치가 오지 않으면 먼지가 수북히 쌓이도록 그냥 놔 두었다는(穉不至則灰塵積于榻) 고사가 전해 온다. 후세에 특별히 손님을 대우하는 것을 하탑(下榻)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서리전(徐摛傳)」
진탑불요현(陳榻不要懸)
빈객을 공경히 대우함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 때 진번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른 빈객은 전혀 접대하지 않았고, 오직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비치하여 접대하고 그가 간 뒤에는 그 걸상을 걸어놓았던 데서 온 말이다.
진탕(震盪)
떨리고 울렁거림.
진택선(震澤仙)
술 좋아하는 호걸. 진택(震澤)은 태호(太湖)를 말하는데, 당(唐)의 장욱(張旭)이 술을 좋아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태호정(太湖精)이라고 하였다. 이기(李頎), 「증장욱(贈張旭)」
진퇴격(進退格)
일종의 율시 격식으로 진퇴운(進退韻)이라고도 한다. 한 수의 시에 두 개의 서로 비슷한 운부(韻部)인 운자(韻字)를 가지고 격구(隔句)로 압운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1구(句)와 3구에서는 우운(虞韻)을 쓰고 2구와 4구에서는 어운(魚韻)을 쓰는 식이다.
진퇴체(進退體)
율시(律詩)에서 운자(韻字)를 쓰는 격식 가운데 하나로, 한 수의 시에서 두 개의 비슷한 운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격구(隔句)마다 운자를 전환하는 시체(詩體)를 말한다.
진편석혈(秦鞭石血)
진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서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돌다리를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바다로 돌을 내몰자 돌들이 저절로 바다로 달려갔다. 돌이 빨리 가지 않자 신인이 돌을 채찍질을 하니 돌에서 피가 흘렀는데, 지금도 그 돌들은 모두 붉다고 한다. 「예문유취(藝文類聚)」 卷79
진평(陳平)
전한(前漢)의 양무(陽武)사람으로 고조(高祖)를 도와 한(漢)나라 왕실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혜제(惠帝)때는 우승상(右丞相)으로서 주발(周勃)과 함께 여씨(呂氏)의 난을 미연에 진압하고 한 나라 왕실을 안정시켰음. 일찍이 이중사(里中社)에 재(宰; 고기를 썰어 나누어주는 사람)가 되어 분배하기를 매우 고르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재(宰; 재상)가 되어도 이 고기처럼 고루 나눌 수 있다.” 하였다.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진평육출기(陳平六出奇)
한(漢) 나라 진평(陳平)이 평생에 국가와 전쟁에 대해서 여섯 가지 기특한 꾀를 내었다.
진평재육균(陳平宰肉均)
한(漢) 나라 진평이 미천했을 때에 향리(鄕里)의 요리인(料理人)이 되어 손들에게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진평화태(眞平禍胎)
신라(新羅) 제26대 왕인 진평왕(眞平王)이 자기 딸인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진함불출가(陳咸不出家)
한(漢) 나라의 진함(陳咸)이 율령에 밝았는데, 왕망(王莽)이 왕권을 찬탈한 뒤 그에게 제도를 새로 고칠 것을 명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율령에 관한 문서들을 벽장 속에 봉함하고는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진해제척공분분(秦奚齊戚空紛紛)
백리해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우(虞) 나라 사람으로 우 나라가 망하게 되자, 망명하여 초(楚) 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오고양피(五羖羊皮)를 그의 몸값으로 주고 그를 신하로 삼아 국정(國政)을 맡겼던 인물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곧 만장(萬章)이 맹자(孟子)에게 “혹자의 말에 의하면, 백리해가 진(秦) 나라 목축업자(牧畜業者)에게 오양(五羊)의 가죽을 받기로 고용(雇傭)이 되어 소를 먹여주고 오양의 가죽을 받아서 이것을 진 목공에게 바치고 쓰이기를 요구했다고 하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하고 물은 데서 온 말이다. 그러나 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영척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품팔이를 해서 먹고 살다가, 제(齊) 나라에 가서는 남의 소를 기르면서, 환공(桓公)이 자신을 등용해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자, 환공이 그 노래를 듣고 끝내 그를 등용했다고 한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회남자(淮南子)』 「도덕훈(道應訓)」
진향원(趁香院)
연산군이 견성군(甄城君; 성종 제7남 惇)의 집에 가흥청(假興淸)을 처하게 하고 부르던 이름이다.
진현(陳玄)
먹(墨)의 이칭(異稱)이다. 『고사성어고(故事成語考)』 「기용(器用)」에 “먹을 진현 또는 용제(龍劑)라 한다.” 하였다.
진현(晋賢)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말한다.
진현관(進賢冠)
한(漢) 나라 때 문관(文官) 또는 유자(儒子)가 쓰던 관 이름이다.
진현례(陳玄禮)
당 현종(唐玄宗) 때 좌용무대장군(左龍武大將軍)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양귀비(楊貴妃)를 죽일 것을 주창(主唱)하였다. 그 공으로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舊唐書)』 「진현례전(陳玄禮傳)」
진홍(眞紅)
옛 제도에 4품(品)은 홍정(紅鞓)을 띠나 가홍(假紅)이라 이르고, 3품을 진홍이라 이른다.
진홍멱부처(眞汞覓夫妻)
도가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한 방법이다. 진홍(眞汞)은 주사(硃砂)에서 나오는 수은으로 단약(丹藥)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라고 하며, 부처는 남편과 아내로 곧 음양을 뜻한 듯하다. 참동계(參同契) 주(注)에 “납과 수은이 서로 교제하여 부부를 맺는다.” 하였다.
진화(秦火)
진(秦) 나라 때 책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말한다. 진시황(秦始皇) 때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천하의 시서(詩書) 및 백가(百家)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웠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사기(史記)』 卷7 「항우본기(項羽本紀)」
진화(陳澕)
호는 매호(梅湖)로 뛰어난 문장가인데,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벼슬은 지공주사(知公州事)에 이르렀다.
진황(秦黃)
황정견(黃庭堅)과 진관(秦觀)은 북송(北宋) 말의 시인인데, 황은 이른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개창한 자이며 진관, 장뢰(張耒), 조보지(晁補之), 진사도(陳師道)와 더불어 소동파(蘇東坡)의 시법을 이었다 하여 소문(蘇門)이라 불렸다.
진회(軫懷)
애통하다. 가슴아프다.
진회(秦灰)
진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와 백가어(百家語)들의 책을 모두 불살랐으므로, 그 재(灰)를 말한 것이다.
진효부(陳孝婦)
남편이 전장으로 나가게 되자, 효부에게 부탁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내가 만약 못 돌아오는 날이면 그대가 내 어머니를 잘 봉양해 달라.’ 하니, 효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남편이 과연 죽으니, 효부는 시어머니를 더욱 잘 봉양하였다. 효부의 친정 부모가 민망히 여기어 개가(改嫁)하기를 권하니, 효부는 자살하려고 하므로 두려워서 감히 권하지 못했다.
진후유비(陳后幽悲)
한 무제(漢武帝)의 비(妃) 진황후(陳皇后)인데, 무제의 사랑을 잃어 장문궁(長門宮)에 별거하였다.
진훤(陳暄)
진 후주(陳後主) 때 사람으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절제 없이 많이 마셨는데 한번은 그의 조카가 진훤의 친구를 통해 그의 무절제한 음주를 풍간하자 진훤이 자기 조카에게 “너는 간섭하지 말라. 나는 술이나 먹으면서 늙으리라.”고까지 하였다. 『남사(南史)』 卷六十一 「진훤전(陳暄傳)」
진희(陳狶)
한 고조(漢高祖) 때 낭중(郞中)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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