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23 (15)
건빵이랑 놀자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지만, 데카르트가 열었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 뒷편에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대해 스피노자는 명확하게 반대의 깃발을 내건 셈입니다. 또한 주체를 대상에서 분리해내며, 그 ‘주체’를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체철학적인’ 문제설정에서 애시당초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럼으로써 주체-객체(대상)의 일치라는 문제 자체가 스피노자에겐 제기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이 진리를 제공하리라는 근대철학적 신념과 달리 차라리 진리가 인식에 앞서, 판단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윤리학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이 점에 관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한편 스피노자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로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
코나투스 다음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보겠습니다. 윤리학은 스피노자에게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해서 어떻게 대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어떻게 감정을 갖거나 감정에 매이게 되고, 어떻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지, 나아가서 그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인 거지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제목이 『에티카』( ‘윤리학’이란 뜻입니다)인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문제설정에서는 근대철학의 꽃이었던 인..
진리와 공리 이는 사실 과학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뉴턴 시대에 누가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 질량이 늘어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거짓이요, 그 사람은 물리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속도가 빨라지면 질량이 늘어난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 겁니다. 상대성이론이 새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라면 사정은 정반대가 되겠지요. 요컨대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문제, 즉 근대철학의 중심이 되는 문제를 애초부터 피해 갑니다. 그런 문제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제기조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적인..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반지름 5인 원의 면적을 ‘25π다’. 혹은 ‘27π다’라고 상이하게 판단했을 때, 즉 하나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와 단련해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그는 『에티카』의 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합니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빛이 ‘있다’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되지,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있다’ / ‘없다’ 역시 존재가 ‘부재’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기준은 존..
스피노자의 진리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와 ‘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겁니다. 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합시다.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상반됩니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거죠.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자기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substantia)와 ‘양태’(modus)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실체란 개념에 대해선 앞서 말씀 드린 바 있지요. 물론 사상가마다 그 개념에 부여하는 내용에 차이는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둡시다. 실체와 양태에 대해 다시 한번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터미네이터 T-1000이란 친구를 전체 세계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실체는 ‘터미네이터’로서 수행할 임무가 그것인데, 이 친구가 숱하게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그러한 바꿈(변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그가 그처럼 수없이 모습을 바꾸는 것은 오직 ‘터미네이터’로서의 임무를..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니다..
근대철학의 딜레마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체’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그렇다면 독립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됩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능력이 어디까지 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도덕론’)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지금까지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음 또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컨대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조금 우회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가운..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앞서 우리는 주체를 독립시키자마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데카르트에게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런데, 우선 이 문제가 그의 철학에선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심각했고, 다음으론 그 문제의 해결이 그의 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 극히 중요했다는 점에서 심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연장’(延長)과 ‘사유’(思惟)가 그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못 보신 분은 별로 없겠지요? 거기 보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나옵니다. 이름은 T-1000이라고 하던가요?..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요)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 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분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이 확실한 기초에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 자신이 확실하지 못한 기초에 서 있다면 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자명한 기초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됩니다. 즉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