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15 (30)
건빵이랑 놀자
부록 6. 붓다가 사랑한 도시 바이샬리 싯달타의 시대는 종족사회와 국가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 종족사회의 이념을 살려 공화제 국가를 성립시킨 최초의 종족이 릿챠비종족(Licchavi)이며, 그 수도가 바이샬리(Vaiśāli or Vesāli)이다. 바이샬리는 붓다 시대에 가장 화려했고 부유했던 미도였으며 교통ㆍ문화ㆍ경제의 중심지였다. 6세기 공화정을 성립시켰으며 마가다. 굽타 제국시대에까지 천여년간 그 아이덴티티를 지속시켰다. 고대 로마와 상통한다. 싯달타가 속한 샤캬족도 릿챠비족의 지배영역에 속해 있었다. 인도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공화국이었다. 지금도 인도 공화국 중앙 정부의 국회가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카르(Kharauna Pokhar) 연못의 물을 성수로 사용하여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
싯달타가 살았던 시대 싯달타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과 격동의 시기였다. 간지스강 중류 지역의, 혈연유대관계를 중심으로 지극히 사적이고 토착적인 에토스를 유지해오던 소규모의 종족사회(=씨족공동체)가 아리안계 종족들의 침공을 받으면서 점점 붕괴되어 갔다. 씨족공동체는 노예제를 전제로 하지 않은 목가적인 평등사회였으나 본시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안계 종족들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영토 국가를 건설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아리안계와 비아리안계의 이름 대립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종족시회와 국가가 대립적 개념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싯달타는 태어났던 것이다. 붓다의 시대에는 이미 간지스강 중류지역의 크고 작은 많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성립하여 있었다..
우리 삶 속의 삼학(三學) 결국 이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라는 삼학(三學)은 저 시타림에서 나이란쟈나강을 건너 저 핍팔라나무 밑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해놓은 언사인 것이다. 싯달타가 고행(苦行)을 했다는 것도 일종의 계요, 그가 고행을 중단하고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얻어먹고 32호상을 회복했다고 하는 것도 계(戒, sīla)다. 진정한 선정(禪定)이란 건강한 신체(정신을 포괄)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몸이 불건강한 상태에서는 집중력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싯달타가 유미죽을 먹으면서 정갈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32상을 회복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좌도밀교의 수행을 한답시고 우루벨라 마을에 쑤셔 박혀 수자타..
혜와 반야에 대해 혜(慧, pañña)란 무엇인가? 혜는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은 앎이다. 이 세계와 이 우주,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것에 관한 바른 통찰이다. 이미 지식과 지혜가 이분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내 이미 설진(說盡)하였다. 나는 참으로 아는 자치고 지혜롭지 못한 자를 보지 못했다. 알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을 통하지 않는 지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체험도 앎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앎이 아니요, 혀로 아는 것도 앎이요, 귀로 아는 것도 앎이요, 코로 아는 것도 앎이요, 피부의 느낌으로 아는 것도 앎이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앎이다. 그런데 어찌 앎을 통하지 않고서 지혜롭다함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계와 정과 삼매에 대해 계(戒, sīla)란 무엇인가? 계는 계율을 말하는 것이다. 계율이란 무엇인가? 계율이란 번쇄한 타부가 아니요, 우리 몸의 디시플린(discipline)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계가 없이는 건강할 수가 없다. 부처님처럼 정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불건강과 타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정(定, samādhi)이라 하면 우리는 선정(禪定)이나, 좌선, 혹은 요가수행이나, 갖가지 명상법 등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러한 말들이 정과 결코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은 정의 방편이지 정 그 자체가 아니다. 선(禪)이란 본시 다나(dhyāna, 禪那)의 음사로 생겨난 말인데, 그것은 정려(靜慮)라고 의역되는 것이다. 즉..
사성제와 팔정도 붓다는 처음에 이 십이지연기를 무식한 일반대중에게 설하는 데 무서운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의 내면적 사유과정을 타인이 깊게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해 낸 것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성제는 연기설을 일반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변모시킨 것이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유전연기(流轉緣起)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환멸연기를 말한 것이다. 집(集)이 인(因)이라면 고(苦)는 과(果)다. 도(道)가 인(因)이라면 멸(滅)은 과(果)다. 유전연기(流轉緣起) 환멸연기(還滅緣起) 고제(苦諦) 과(果) 멸제(滅諦) 과(果) 집제(集諦) 인(因) 도제(道諦) 인(因) 연기설..
생한 것은 멸한다 a『마하박가』의 초전법륜 장면, 그러니까 부처의 최초의 설법의 장면에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법안(法眼, dhamma-cakkhu)을 얻은 자들의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로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정형구로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콘단냐(Koṇḍañña) 장로가 깨달았을 때, 밥파(Vappa)장로와 밧디야(Bhaddiya)장로가 깨달았을 때, 마하나마(Mahānāma)장로와 앗사지(Assaji)장로가 깨달았을 때, 그리고 야사(Yasa)라는 젊은이가 법안을 얻었을 때를 마하박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 ‘생하는..
부록 5.3. 연기는 시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러나 아누로마의 원래 의미는 그러한 사고의 방향성을 말한다기보다는 12지연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로서 해석되는 것이다. 즉 아누로마는 생하는 것을 따르는 순서라는 의미일 뿐이며, 파티로마는 그러한 아누로마의 생성의 순서에 대하여 역으로 소멸하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역이라는 의미는 사고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순서에 대한 소멸의 순서라는 역전(逆轉)의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즉 A가 B를 생성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A가 소멸되면 B도 또한 소멸될 수 있다고 하는 소멸의 역전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역(逆)은 역설의 역이다. 아누로마의 아누는 오직 팟차야(paccayā, 연하여, 기대어)의 맥락에서, 파티..
부록 5.2. 순관과 아누로마, 역관과 파티로마 그러나 원시불교의 연구가들, 특히 팔리어장경의 원전에 입각하여 사고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순(順)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의 사고의 방향성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지를 않다. 사실 인간의 사유추리과정에 있어서의 방향성이란 그렇게 근원적인 문제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그러한 부차적인 사고의 방향성의 의미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사고의 내용성과 관계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12지연기설의 가장 프로토타입으로 꼽는 『마하박가』 초송품(初誦品) 첫머리에서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연기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라는 구절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 인용된 최봉수의 ..
부록 5.1. 순관과 역관의 왜곡 여기 논의되고 있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에 관하여서는 불교학계의 상이한 이해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정확하게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독립술어로서 규정되고 있는 개념은 한역(漢譯)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원시불교경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불교경전에는 순(順)ㆍ역(逆)이라는 말이 형용사나 부사적 용법으로서 맥락적으로 주어지고는 있을지언정,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하는 술어가 명사적 독립개념으로서 잇슈화 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선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가 12지연기를 추론해 들어간 사고의 방향성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논의들이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 제사(第四..
역관 그런데 이러한 순관은 순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역관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역관(逆觀)이란 ‘A에 연하여 B가 생한다’는 순관의 명제에 대하여, 동시에 ‘A가 멸하면 B가 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관이란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싯달타의 인과성의 통찰이 근대자연과학의 인과성 통찰과 다른 어떤 차원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인과적 통찰은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또 한 원인이 있으면 미래에 어떠한 사태가 결과되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싯달타에게 있어서나 인과는 동시..
순관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무명이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연기의 실상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무명조차도 끊임없는 연기의 고리 속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인과 밖에 있는 어떤 실재는 아닌 것이다. 다시 한번 『마하박가』에서 싯달타의 최초의 깨달음의 순간을 전달하는 문구를 되씹어보자! 그러던 중 밤이 시작될 무렵에 연기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 여기 ‘발생하는 대로’라는 것은 흔히 순관(順觀)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A에 연하여 B가 생한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싯달타의 사유의 출발은 늙음[老]ㆍ죽음[死]ㆍ슬픔[愁]ㆍ눈물[悲]ㆍ괴로움[苦]ㆍ근심[憂]ㆍ갈등[惱]이었다..
부록 4.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 힌두이즘(Hinduisin)을 일본학자들은 인도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도인의 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특정한 제도종교라고 부르기 어려운 인도인의 생활관습에 대한 일반명사인 것이다. 힌두이즘이 하나의 종교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브라흐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성립하자 그 불교의 승가집단에 대하여 힌두이즘이라는 새로운 반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불교가 쇠퇴한 후 인도의 역사는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도에 있어서 이슬람의 역사는 정복왕조의 역사와 일치한다. 이슬람 정복왕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북쪽의 터키ㆍ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이야기 해야 한다. 가즈니의 마흐무드..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싯달타가 연기를 추적한 방식으로 꼭 연기를 추적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싯달타라는 한 개인의 추리방식이요, 사물의 연결고리의 이해방식이다. 나는 왜 늙고 죽어 가는가? 그것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는 왜 결합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가 교합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는 왜 교합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서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싯달타의 합리적인 사유과정 그런데 싯달타의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전혀 이와 같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있을 수가 없다. 싯달타의 명상은 바로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세계관, 그 합리적 법칙체계를 앞지른 선구적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그냥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은 인류역사를 통해 싯달타와 같은 수없는 붓다들, 이 우주와 인간에 대하여 남다른 통찰을 한, 수 없는 각자들이 발견한 연기적 법칙들의 축적에 의하여 형성되어온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를 붓다라 아니 부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붓다(각자)였다. 아인슈타인이라는 독일의 한 청년이 골방에 쑤셔박혀 명상한 연기법칙의 내용으로 인류를 수억겁년 동안 지배해온 공간과 시간의 개념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를 ..
과학적 연기와 종교적 사실 연기ㆍ인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매우 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인과)라는 말이 우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의 케리그마로 들리지 않고 진부한 속언처럼 시시하게 들리는 데는 크나큰 원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말하는 ‘우리’는 역사적 우리다. 그 우리는 항상 시간성 속에 있는 우리다. 그것은 연기된 우리인 것이다. 이 역사적 우리를 특징지우는 것은 근대적 시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암암리 교육을 통해서 받은 공통된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이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방법에 관한 것이..
설법하지 않기로 작심하다 싯달타가 보리수 아래서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내용은 내가 확언하는 바대로 ‘연기’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며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홀로 증득한 것이다. 그래서 싯달타는 ‘스스로 깨달았으니 그 누구를 따르리오?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외쳤던 것이다. 스승이 없다고 외치는 인간이라면, 사실 그 정직한 논리에 따라 자신 또한 제자를 두면 안 된다. 홀로 증득한 것은 홀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자각의 내용은 특별히 말할 것이 없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며 남에게 특별히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싯달타는 대각 후에 설법하지 않기로 ..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반드시 연(緣)하여 기(起)한다는 것이다. ‘연(緣)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한다’는 뜻이요, ‘기(起)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란, ‘A로 연하여 B가 기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A를 원인으로 하여 B라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뜻이다. 요새 말로 하며는 ‘연기’란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을 축약하여 인과(因果, causation) 또는 인과관계(causational relation)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연(緣)은 원인이요, 기(起)는 결과라 말해도 대차가 없다. 보통 인연(因緣)이라 말할때, 그것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인데, 보통 인(hetu)은 직접적 원인을 지칭하고 연(pratyaya)은..
연기론이 아닌 연기적 사유로 감히 일갈하건대 12연기설은 개똥이다. 아니 소똥이다. 아니 개똥도 소똥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장자(莊子)의 말대로 싯달타의 생각 그 자체가 아니요, 싯달타의 생각의 족적이요 조백(糟魄)일 뿐이다. 그것은 고인의 똥찌꺼기 불과한 것이다(『莊子』「天道」)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만나봐야 밥먹고 똥싸는 천지간의 미물일 뿐이요 범인의 자태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볼품없는 혈혈단신이다. 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나를 만날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붓다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또 다시 싯달타라는 어느 역사적 인물의 실체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로서 가..
12연기설이 만든 혼란 그렇다면 과연 이 연기(緣起, pațiccasamuppāda)란 무엇인가?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연기하면 곧 12지연기론(十二支緣起論)이니, 12지연기설이니, 12인연이니 하여 12개의 고리를 좌악 늘어놓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① 노사(老死, jarā-maraṇa) → ② 생(生, jāti) → ③ 유(有, bhava) → ④ 취(取, upādāna) → ⑤ 애(愛, taṇhā)→ ⑥ 수(受, vedharā) ⑦ 촉(觸, phassa) → ⑧ 육처(六處, saḷāyatana) → ⑨명색(名色, nāma-rūpa) → ⑩ 식(識, viññāṇa) → ⑪ 행(行, saṅkhāra) → ⑫ 무명(無明, avijjā) 운운…. 그리고 삼세양중(三世兩重..
싯달타가 깨달은 것 나는 일찌기 말했다. 붓다는 엉터리로 안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안 사람이다. 무얼 어떻게 알았나?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얇은 삼법인(三法印)으로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붓다의 얇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가? 나는 이 어려운 질문에 또 다시 매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연기였다. 나는 근본불교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으로 실존한 X가 있었고, 그 X가 싯달타였으며,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 끝에 득도하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즉 역사적 붓다(the historical Buddha)의 실존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붓다의 사유과정을 추론하는 데 있어서 이 ‘연기’라는 한마디처럼 유용한 실마리..
무아와 비아 기실 이 삼법인(三法印)의 언어 중에서 우리가 근본불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단 한마디의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아’(無我. anātman), 이 한 마디 밖에는 없다. 그런데 무아(無我)는 궁극적으로 비아(非我)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 싯달타의 사유의 세계, 그가 깨달은 세계, 그의 앎의 세계를 접근해 들어가려고 할 때, 내가 계속해서 ‘해탈’(解脫, mokṣa)이니, ‘열반’(涅槃, nirvāṇa)이니 하는 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뜻은, 바로 이런 방식의 사유체계가 반드시 무아론이 아닌 비아론과 연결되기 때문인 것이다. 무아론(無我論)에서는 아 즉 아트만(ātman)의 존재근거가 상실되고 해소된다.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실체적으로..
부록 3. 비아에 대한 보충설명 나의 ‘무아와 비아’라는 말은 인도철학계의 원시불교에 관한 논쟁인 ‘비아설’(非我說)과 관련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나카무라(中村元)박사가 『원시불교의 사상(原始佛敎の思想)』에서 초기불교에는 ‘비아설(非我說)’만 있었을 뿐, ‘무아설(無我說)’은 설파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의 ‘비아(非我)’는 아(我)와 대립되는 비아(非我)로서의 실체개념이 아니라, 오온(五蘊)의 가합태와 같은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소박한 윤리적 맥락을 드러내는 비아(非我)인 것이다. 즉 ‘아(我)가 아니다’라고 하는 술부적 부정태의 의미맥락이 일차적인 설법의 내용이었으며, 후대의 부파불교에서 이론화한 존재론적ㆍ우주론적 무아(無我)의 논설(論說)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아(無我)가 ..
삼법인의 허구 여기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원시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과히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법인’(法印, dharmoddāna)이란 문자 그대로 ‘불법(佛法)이 되는 인증(印證)’이라는 뜻이다. 즉 불법과 타법이 혼동될 경우 어떠한 일자가 불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 그것을 곧 ‘법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법인이라는 말 자체가, 불타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불타의 말씀을 변호하기 위한 호교론(apologetics)적 색채를 강하지 띠면서 후대에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 설법이 아닌 아폴로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법인으로서의 이 삼 개 조항, 그러니까 불교헌법 3대 총강령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조항의 내용은 직접ㆍ간접으로 성도 후의 세존이 설한 ..
번뇌가 끊어지니 마음이 시원해지다 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증득하고 카시 사르나트에 있는 다섯 비구들을 향해 떠나면서 싯달타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이것은 참으로 내가 접한 한 인간의 지적 자신감의 표현으로서는 극상의 포효다【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Ⅰ, pp.55–6. 『南傳大藏經』 3-15. T. W. Rhys Davids and Hermann Oldenberg, The Mahāvagga, in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edited by F. Max Müller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4), Vol. XIII, p.91. 상기의 세 번역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이 세존의 ..
대각은 앎이다 그런데 원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라는 것은 ‘더 없는 최상의 바른 앎’이라는 뜻이다. 붓다의 어원인 ‘buddhi’는 ‘지능’(intellectual capacity)이며, ‘지성’(intelligence)이며 ‘이성’(reason)이며, ‘식별’(discermment)이며, ‘이해’(understanding), ‘합리적 견해’(rational opinion)를 의미한다. 보리와 관련된 ‘bodha’도 ‘이해한다,’ ‘안다’는 뜻이다.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의 원초적 의미는 ‘앎’일 뿐이다. 우주와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릇된 앎이 아니라, 바른 앎이다. 그것이 곧 지혜요, 깨달음이다. 싯달타가 6년 동안의 선..
깨달음에 대해 그렇다면 우리가 소박한 의미맥락에서 해탈과 열반이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핍팔라나무 밑에서 정진하고 있는 싯달타의 정신세계를 접근해 들어간다면, 싯달타에게 있어서 마라(魔王)의 퇴치는 곧 해탈과 열반을 달성하는 첩경을 확보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처럼, 그가 일생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의 가능성을 압축적으로 받았고, 그 욕망의 불길을 껐다고 한다면 그는 곧 열반을 달성했을 것이고, 열반을 통하여 그는 자유로움을 획득하고 해탈(mokṣa, 解脫)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보통 싯달타의 보리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싯달타의 득도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 그 자체의 이해방식을 극도로 폄하시키는 편벽한 소치라고 생각한다. 욕망의 제어라는 것은 동서고..
해탈과 열반 이 고통스러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그 ‘벗어남’이라는 말을 ‘해탈’이라는 말로 바꾸어보자! 해탈이라는 말은 인도사상(베다/우파니샤드)에 있어서는 분명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우주론적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초기불교경전들에서 이 ‘해탈’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그러한 엄밀한 의미맥락에서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우리를 묶고 있는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의미며, 그것은 번뇌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심경, 즉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해탈은 우주론적인 맥락에서 보다도 그러한 소박한 심리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맥락에서 흔히 쓰였음을 초기경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해탈의 본래적 뜻은 이 윤회의 세계로 다시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
사문유관과 출가 자아! 이제 마라의 패배로 과연 싯달타는 붓다가 된 것일까? 여기 우리는 또 다시 싯달타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선정(禪定)을 했으며, 고행(苦行)을 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 부모의 철저한 보호 속에 세상의 고뇌를 한번도 경험치 못하고 성장하였다가 소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하는 충격적 사건에 접하게 된다. 사문유관이란 그가 어느날 우연히 동문으로 나갔다가 백발에 등이 굽은 초라한 노인을 만났고, 또 어느날 남문 밖에서 두 사람에게 부축되어 가는 병자를 보았으며, 또 어느날 서문 밖에서 장례식을 목격했던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노(老)ㆍ병(病)ㆍ사(死)’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최초로 충격적으로 직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
욕망이여! 마라여! 물론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다. 인간세의 모든 죄악이 이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생겨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욕계(欲界)의 주인인 마라(Mara)와 우리는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따라서 욕망의 주체인 마라의 항복은 대단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마라의 항복만으로 인간에게 대각이 찾아오는 것일까? 핍팔라나무 밑의 싯달타에게 있어서 ‘선정’(禪定)이라든가 ‘항마’(降魔)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고행과 선정을 통하여 몸에 충분히 익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수행자로서는 최고도의 달통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그였다. 그가 우선 새로운 선정에 필요한 충분한 영양을 우루벨라 마을에서 보급 받고 떠났다고 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