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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내가 처음 본 인도 아라비아 바다 그 후로 약 한달 동안 서울과 동경 사이에 전화가 오갔는데, 정말 성하의 시간을 뽑아내기가 어렵다는 전갈만 다람살라의 각료들에게서 오고있다는 것이었다. 자툴 린포체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는 내 편지를 가지고 직접 성하를 알현키 위하여 다람살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인도로 떠나기 직전에 인도로부터 실낱 같은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도저히 약속시간을 미리 정할 수는 없으나 성하께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 내가 1월 8일까지 보드가야에 도착해있으면 9일부터 15일 사이 어느 시간에 적당한 알현의 기회를 나에게 통보하겠다는 것이었다. ▲ 내가 처음 본 아라비아해, 인도대륙의 서쪽, 아프리카대륙과 연하여 있다. 뭄바이(Mumbai)는 인도의 경제중심이며 영화산업의 심장부..
대담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다 나는 인도를 떠나기 전날 뭄바이의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삐라를 보았다. 때마침 주 르옹지(朱鎔基) 총리가 인도를 방문하고 있었다. 문제는 독립이다! 백만여명이 학살되었다! 육천여개의 사원이 파괴되었다! 수천명이 감옥에! 수백명이 아직도 실종중! The Issue is Independence! More than a million killed! More than 6,000 monasteries destroyed! Thousands in Prison! Hundreds still missing! 자툴 대사는 티벹민중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나의 양심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나에게 달라이라마에게 보내는 친서를 직접 써달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으로 장문의 편..
티벹의 비극 나는 평생을, 중국문명의 전도사라고 한다면 정말 자격있는 전도사로서 살아왔다. 나는 중국문명이 자체로 함장(함장)하고 있는 문화적 가치의 보편성, 그리고 그 위대함에 대하여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중국문명의 정신적 가치는 참으로 인류에게 고귀한 삶의 지혜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이상의 발현은 국가주의를 초월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논어』를, 『노자』를, 그리고 수없는 중국의 고전을 오늘 우리 삶의 가치로서 해석하고 발양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 가치의 진실된 모습과는 상반되게, 중국문명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명료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지성인들의 광정(匡正)의 요구는 반드시 관철되어..
티벹과 중국 나는 달라이라마방한준비위원회의 사람들을 접촉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동아시아 스케쥴을 담당하는 망명정부의 대사가 토오쿄오에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자툴 린포체(Zatul Rinpoche)라는 인물이었다. 린포체라는 명명은 티벹의 고승이나 고위관직자들의 이름에서 자주 발견이 되는데, 그것은 영적 스승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며, ‘고귀한 분’이라는 뜻이다【Dalai Lama, Freedom in Exile (New York : Harper Collins, 1991), pp.8 passim.】. 그리고 린포체가 가끔 순방길에 한국에도 들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서울의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나를 알아볼 뿐 아니라 오래 ..
인도에 망명정부를 연 달라이라마 나는 귀국하는 대로 달라이라마를 만날 길을 모색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달라이라마 방한을 추진하는 운동이 있었으나 중국정부의 입김이 너무 거센 탓인지 우리 정부는 많은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방한의 기회를 허락치 않았다. 현재의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 )는 제14대 계승자이며【‘달라이’(Dalai)는 ‘큰바다’(Ocean)라는 뜻을 가진 몽고어이고, ‘라마’(Lama)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인도어 ‘구루’(guru)에 해당되는 티벹어이다. 그래서 달라이와 라마를 합하여 ‘지혜의 바다’(Ocean of Wisdom)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달라이라마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이해방식은 역사적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데서 비롯..
쫑카파와 겔룩파 나는 뉴욕에서 3개월을 머무는 동안, 뉴욕의 지성가에 새롭게 번지고 있는 많은 새로운 사조의 물결에 접했다. 그 중에서 나의 주목을 끈 것 중의 하나가 티벹불교였다. 소승과 대승과 밀교의 모든 것이 구비된 듯이 보이는 티벹불교는 매우 정교한 이론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단계적인 수행론을 나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나는 티벹장경과 팔리어장경에 새롭게 눈을 떴다. 서양사람들이 원시경전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모습과 내가 한역불전만에 의존하여 이해해온 불교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새롭게 조화되지 않으면 안 될 괴리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괴리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탐색과정에서 인도문명의 전체를 다시 한번 조망하는 위대한 기회를 가졌다. 나는 짧은 시..
부록 7.2. 쫑카파 연구에 참고한 문헌들 쫑카파에 관하여 손쉽게 그 개략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책으로 우선 하기서를 꼽을 수 있다. 御牧克己ㆍ森山淸徹ㆍ苦米地等流 共譯, 『大乘佛典 第十五卷, ツォンカパ」, 東京 :中央公論社, 1996. 쫑카파의 대표작은 그가 46세(1402) 때 집필했다는 『菩提道次第大論』(람림첸모, Lam rim chen mo; 『菩提道次第廣論』으로도 한역된다)이다. 이 작품은 크게 하사(下士)ㆍ중사(中士)ㆍ상사(上士)의 도차제(道次第)로 나뉘어 있는데, 상사(上士)의 도차제(道次第)가 보살(菩薩)=대승(大乘)의 도차제(道次第)이다. 이 대승(大乘)의 학습(學習)은 다시 총론(總論)과 각론(各論)으로 나뉘어 있다. 총론(總論)에는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사섭사(四攝事)가 다루어..
부록 7.1. 중관학을 토착화하여 탄생한 쫑카파 쫑카파(Tsong-kha-pa, 1357~1419)는 티벹 4대종파의 하나인 겔룩파의 개종자이다. 그가 개종한 겔룩파 계보에서 달라이라마제도가 확립되었다. 달라이라마가 티벹의 정치적ㆍ종교적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확립됨에 따라 쫑카파는 티벹 최대의 사상가로서 추앙되었고 그 부동의 권위가 확보되었다. 그는 중국역사로 이야기하면 원나라가 쇠망하고 명나라가 새왕조의 터전을 닦아가고 있던 전환기의 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포은 정몽주나 삼봉 정도전과 대략 동시대의 사람이다. 보조 지눌에 비하면 2세기 후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티벹불교의 역사는 연대적으로 같은 시기에 발전한 우리나라 조선조의 유교역사와 비교되면 그 문화사적 이해가 용이하다. 쫑카파 이후 ..
인도라는 판타지 아유타에서 온 허왕후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인도는 결코 우리의 심층의식 속에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보드가야’라는 지명은 붓다의 보리수나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지역을 우리는 그냥 ‘가야’(Gaya)라고 부른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드(bodhi)를 떼어내면 가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야라는 지명이 우리나라의 ‘가야’(伽耶)국의 이름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설도 단순한 발음의 일치를 넘어서는 어떤 역사적 교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관 가야국의 개조(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부인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남쪽바다로부터 배타고 오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전설은 단순한 전설이상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
꿈만 같던 인도에 가다 나에게 있어서 인도는 하나의 판타지였다. 우리가 자라날 때만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내손으로 자동차 한번 몰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티』의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창공을 날으는 것과도 같은 그런 보름달의 판타지였다. 그랬던 내가 인도를 간다는 것은 기억도 없는 머나먼 옛날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더듬는 인디아나 죤스의 탐험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도 변했다. 변해도 변해도 너무도 변했다. 인도가 이제는 바로 지척지간에 있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인도였지만 나에겐 아직도 너무도 멀기만 한 인도였다. 인도하면 왠지 피리소리에 춤을 추는 코브라의 모습이나 공중에 붕 떠있는 요기들의 황홀경, 깡마른 나족의 ..
돌과 인도문명 단순하고 건장한, 질박하고 강인한 느낌이 드는 그의 침실 속에서 나는 그의 문ㆍ무를 겸비한 질소한 인품을 흠끽했지만, 난 정말 돌구뎅이 속에서 자기는 싫었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이러한 환경에 완벽하게 무감각한 듯했다. 내가 인도에서 본 모든 것이 돌이었다. 인도의 문명이란 곧 돌의 가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본 모든 건축물이 돌이었고, 모든 조각품ㆍ공예품이 돌이었고, 대부분의 생활도구가 돌이었다. 아잔타(Ajanta)에서 본 모든 비하라(vihara, 僧房), 그리고 차이띠야(caitya, 法堂)가 그냥 돌절벽을 쌩으로 파고 들어간 돌구멍들일 뿐이었다. 엘로라(Ellora)의 거대한 카일라사 사원(Kailasa Temple),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 건물면적의 두배나 되고 높이도 그보다..
돌방 속 돌침대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은 정확하게 이 유언을 지켰다. 샤 자한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그 자신이 당대 최상의 건축가였다. 샤 자한은 2년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화려한 의상이나 음악, 모든 방종을 자제했다. 그리고 오직 죽은 자기부인만을 생각하면서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며 복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생애를 따즈 마할의 건축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실정을 거듭하였고, 당현종처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태상황으로 유폐되어 8년의 고적한 세월을 보내다 죽었다. 1666년 1월 22일 야무나강 건너 그가 지은 따즈 마할 무덤이 보이는 아그라성(Agra Fort)의 8각형 옥탑에서 그는 『꾸란의 구절을 들으며 평화롭게 눈..
샤 자한과 뭄따즈 오랫만에 다시 정박한 곳은 수자타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다. 보드가야에서는 가장 최신의 가장 좋은 호텔로 꼽히는 곳이었지만 나에겐 좀 낯선 곳이었다. 아니, 좀 지겨웁게 느껴지도록 끔찍한 곳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219호실, 방금 칠한 페인트냄새가 풀풀 나는 아주 깨끗한 방이었지만 나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돌의 한기였다. 인도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구별이 없는 듯했다. 인도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아그라(Agra)의 따즈 마할(Taj Mahal)도 단순한 한 여자의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다섯번째 왕인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자기를 위해 14번째 아기를 낳다가 객사한 부인, 뭄따즈 마할(Mumtaj Ma..
예수와 싯달타의 모습 미켈란제로는 이태리의 어느 거지를 모델로 삼아 예수를 그렸다고 한다. 그가 프로렌스의 자기동네 거지를 모델로 삼아 예수의 모습을 그린 것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초로 싯달타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쿠샨왕조(Kushān Dynasty) 간다라(Gandhāra)의 예술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이미 조각화되어버린 희랍의 신상을 불타의 모습에 덮어 씌웠다. 붓다의 최초의 모습은 아름답게 생긴 청년 아폴로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실상은 희랍의 직접적 영향이 아니다. 간다라에 전달된 당대의 미술양식은 전적으로 로마의 것이라 해야 옳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동단에서 발생한 로마미술의 지역적..
비하르의 묵상 인간의 역사는 삶의 흐름이다. 우리 삶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예술, 어느 한 가지 디시플린의 소산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과과학의 시각이 합쳐질 때만이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희론(戱論)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의 유희가 아니다.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그 화살을 어떻게 뽑냐는 것에 관한 이론을 나열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우선 화살을 뽑고 생명의 부식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왜 싯달타가 연기(緣起)를 말했고 무아(無我)를 말했어야 했는지 항상 그 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기의 실상은 무아론으로 귀착된다. 무아론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바로 무아행(無我行)에 있는 것이다. 무아행이란 자비(慈悲)의 실천이다. 무아의 연기적 실상 그것이 바로 공..
무기와 안티노미 싯달타는 기존의 형이상학(metaphysics)적 명제들을 요약하여 십무기(十無記)라고 불렀다. 십무기는 열 가지의 무기(無記)라는 뜻이다. 무기(avyākata)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술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형이상학적 실체라고 상정하는 것들은 시공간의 현상계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거나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에 관하여 옳다 그르다 라는 시비의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을 열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水野弘元, 『原始佛敎』, pp.85~102를 참고하였다.】. A) 자아 및 세계는 시간적으로 1. 무한하다. 2. 유한하다. 3. 무한하면서 또 유한하다. 4. 무한하지도 유한하지도 않다. B) 세계는 공간적으로 ..
무아와 연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은 큰 창문을 마주보고 있고, 그 창문 밖에는 4각의 담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한구석에 있는 자그맣고 어여쁜 잔디밭이 있다. 우리는 이 잔디밭을 항상 ‘잔디밭’이라고 부른다. ‘나의 책상 앞에는 잔디밭이 있다’라는 명제는 항상 불변적으로 우리집을 기술하는 말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잔디밭은 그 실상을 들어가 보면, 그것은 흙과 여러 가지 풀의 종류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체들의 군집으로 형성되어 있다. 개미ㆍ지렁이ㆍ지네ㆍ모기ㆍ파리ㆍ나비ㆍ진드기ㆍ딱정벌레ㆍ풀강아지ㆍ바퀴벌레ㆍ송장벌레ㆍ톡토기ㆍ짚신벌레ㆍ개미살이ㆍ노래기ㆍ솔진드기ㆍ풍뎅이ㆍ애벌레ㆍ매미 애벌레…… 이러한 식물과 동물의 군집형태를 우리가 막연히 ‘잔디밭’이라 부르는 이..
연기를 부정하는 다섯가지 생각 싯달타의 연기에 대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매우 리얼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반드시 합리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에 대한 약물의 처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산출하고 있는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원인은 인간의 무명(無明)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무지에서 해방시켜야만 하는 고독한 혁명이다. 약물의 처방은 대체적으로 의원성질병(醫原性疾病, iatrogenic disease)을 산출시킨다. 우리나라의 질병의 절반 이상이 병원이나 치료, 의사와의 만남 그 자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의사나 병원으로부터 생기는 병을 우리는 의원성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인간문제는 복잡한 연기 속에 있다 우선 환자의 고통 그 자체의 기술이 명료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때가 많다. 환자 자신이 그냥 지끈지끈 아프다든가, 아리아리 하다든가, 우리우리 하다든가 하는 말로써 표현할 때는 그것이 과연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를 기술하기가 난감한 것이다. 기술이 불가능하면 추적도 불가능해진다. 엑스레이를 찍고, 씨티를 찍고, 엠알아이를 찍어도 아무런 물리적 증거를 포착할 수가 없을 때가 많다. 그리고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셨습니까? 왜 그런 증상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벌받아서 그래요’라든가,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래요’라든가, ‘그것은 운명이었어요’라든가 하는 식으로 황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환자 자신이 참으로 자신의..
진단과 치료 나 도올은 매일 클리닉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현직 의사다. 환자란 몸에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강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구체적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의사인 나 도올을 찾아오는 목적은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나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고통을 그들로 하여금 기술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나 의사인 도올은 진단이라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환자들은 대뜸, 정확한 증상을 말하지 않고 병명을 말하거나, 또 나에게 병명을 알으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기실 병명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병명은 X래도 좋고 Y..
인과성을 철저히 긍정하다 이 때에 등장한 것이 소피스트(sophist)다. 우리가 보통 소피스트를 궤변론자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인상은 대체로 이들이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인식의 극단적 상대성을 조장하고,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적 논리가 모두 궁극적으로 실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종교적 독단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판단 유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성향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피스트들은 모두가 박학다식한 사람들이었으며 대부분이 심오한 경지의 석학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에나 의문을 품었으며 종교나 정치상의 모든 핫잇슈들을 거침없이 이성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폴리스의 유지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거부했다. 우리는 보통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
사문과 소피스트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당시에는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난립하였다. 팔리장경 장부니까야(Dīgha-Nikāya)에 속하는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sutta)에는 소위 6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불리우는 당시의 자유로운 사상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의 사상을 아는 데 충분한 자료라 할 수는 없다. 여기 사문(沙門, śrāmaṇa, samaṇa)이라 하는 것은 종래의 전통적 바라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를 전전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지도자, 출가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