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04 (49)
건빵이랑 놀자
3. 13명의 유학자들로 살펴본 가능성과 한계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중국의 입장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호응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07년 공영방송인 KBS에서 아시아 문명기획 ‘인사이트 아시아’라는 기치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 제목은 유교, 2500년의 여행이었지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을 것입니다. 방송뿐만 아니라 그 기획은 곧바로 책으로도 출간되어 나왔습니다. 『유교, 아시아의 힘』(예담, 2007)이라는 책입니다. 물론 KBS 측에서 방영한 은 최근에 일고 있는 한류 분위기에 편승하여 단순히 상업적 이윤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심각한 정치적 의..
2. 화려하게 되살아난 공자 2002년 11월 30일은 공자(孔子)와 관련해 상징적인 날로 기억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날, 중국 명문대학의 하나인 중국인민대학에서 중국 인민대학 의 창립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기념식에는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등에서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창립된 이날, 중국공산당의 이론지라고 할 수 있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가 사상은 2000여 년 동안 발전하면서 중화민족의 정신을 배양했고, 민족 주체 정신을 창조하는 중임을 담당했으며, 그 자체의 생명과 지혜로 중화민족의 영원한 독립과 발전을 수호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보면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960..
프롤로그 1. 창시자가 아닌 인간으로 공자(孔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하긴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수차례 등장하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을 보니, 공자라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단지 이름만 알려진 2500여 년 전의 중국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그는 예수, 부처와 함께 세계 3대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인물이긴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사랑(love)’을 말했다면, 부처는 ‘자비 (karuṇā)’를 이야기했고, 공자는 ‘인(仁)’을..
책을 시작하며 유(儒)라는 글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앞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글자의 뜻이 옳다면, 유학은 일종의 종교적 예식을 배우는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공자(孔子)라는 유학자가 등장하면서 유학(儒學)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바뀝니다. 초월적인 신에게 향했던 공경이 이제 인간에게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공자가 동아시아 최초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자를 통해 유학은 마침내 종교라는 외양을 벗고 인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학(儒學)은 보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또는 봉건적인 남성중심주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언제부터 생겼던 것일까요? 나는 그것을 서양 문명의 도래에서부터 찾고자 합니다. 압도적인 서양 문명..
기독교 성서의 이해 목차 제1장 예수의 이적 아니 땐 굴뚝에 나는 연기 그대로의 성서 수용 과학적 세계관의 고뇌 예수 이적 행함의 특징 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제2장 신화와 철학 희랍인들의 신화적 세계관 기독교사상에 스민 윤회론 오르페우스와 바카스 피타고라스와 싯달타 알렉산더 세계정복의 의미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아타락시아 견유학파의 가치관 스토아학파의 사상 에피큐로스학파 회의학파 사도 바울의 도전 헬레니즘의 로고스를 격파한 기독교 제4장 성서고고학의 양대 사건: 쿰란과 나그 함마디 세례요한과 쿰란공동체 쿰란과 엣세네 쿰란 발굴의 역사적 의미 알렉산드리아 예수의 현대사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셉츄아진트와 쿰란텍스트 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순교의 자원(自願) 황제교화된 기독교 밀라노칙령 황제교와 ..
시온성의 처녀 우리 어머니는 평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교회를 다니셨다. 천안 대흥동 231번지에서 중앙장로교회에 이르는 길의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가 새벽에 콧소리로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시고 가는 소리를 듣고 이부자리를 거두었고 쌀뜨물을 버렸다.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산보 시간보다도 더 정확했다. 당시 천안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겨울철 눈이 소복이 쌓인 신작로에 엄마의 고무신이 꼬드득 꼬드득 소리를 낼 때도 나는 꼭 따라나섰다. 여섯일곱 살 때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때 우리 엄마가 제일 많이 부른 찬송이 64장(당시 찬송가)이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내가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제4절이다...
나의 부모 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ㆍ어머니 모두 개화기 때 기독교에 헌신한 청년ㆍ처녀로서 짝지어졌다. 한국기독교의 오늘의 모습이 있기까지 일각에서 혼신의 기여를 다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태신앙을 거쳐 유아세례를 받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나를 동양철학자, 한문고전의 학자로만 알고있지만 나는 1967년 한국신학대학 전교수석 입학생이다. 수석 발표를 보고 나는 천안 부모님께 ‘신대톱금일하천’이라는 전보를 쳤다. 그때는 전보의 글자수가 10자 이내라야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가까운 수유리 우체국에서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앞의 세 글자를 해독하지 못했다. 아마도 성은 신씨고 이름은 대톱인 사람이 오늘 천안에 내려온다고 고개를..
이 책은 『요한복음강해』의 서문 본서 『기독교 성서의 이해』는 본래 『요한복음강해』라는 나의 책의 서문으로 기획되었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에서 인터넷방송을 나에게 의뢰했는데, 그것은 도올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아니 영어뿐만 아니라, 도올 선생의 어학실력이 좋으니까, 영어, 중국어, 일본어 이런 것의 강독시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발상이 매우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어학은 결코 어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학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문명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재가 영 마땅하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불쑥 했다. “영어성경을 강독하면 어떨까? 우리 어려서부터 영어는 바이블로부터 시작한다..
도마복음서의 중요성 상기 나열한 52서 중에서 가장 소중한 문헌을 나보고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도마복음서 1서를 주저없이 선택할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현 우리가 알고있는 4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많은 생각의 실마리와 기준을 제공하는 순수한 예수의 말씀집이다. 그것은 114개의 내러티브가 없는 로기온(log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마복음서 속의 상당 부분의 자료는 Q자료보다도 더 오리지날한 성격이 있다. 현재,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의 신학계에서는 도마복음서와 Q자료와 4복음서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수백 편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Q자료의 연구를 보다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도마복음서는 기독교나 예수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잡스러운 언어가 하나도 없다. 도..
제18장 에필로그 절차탁마 대기만성: 쿰란과 나그 함마디의 연속성 나는 사실 1982년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절차탁마대기만성』이라는 책을 통해 이 나그 함마디 도서관 문헌을 소개했다. 그때 나의 이 작은 책자는 이미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런데도 2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의 신학계는 상기의 체노보스키온 문서에 관한 연구성과를 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마도 단순한 느낌에서 출발하고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 이단의 서’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마치 상기의 책을 깊게 연구하면 2천 년을 버티어온 기독교 교회의 정통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부지불식간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매우 단순한 무지의 소산이다. 체노보스키온 문서는 결코 영..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전체목록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으나 이 체노보스키온 문서라고 하기도 하고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라고 하기도 하는 이 문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죽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문헌을 둘러싼 인간들은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와 탐욕과 영예가 그들을 지배했다. 결국 다타리-타노 컬렉션은 낫세르 대통령에 의하여 국유화되었고 융 코우덱스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유네스코와 많은 뜻 있는 기관의 협력으로 1977년에는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전체가 영역되어 출판되었다. 지금은 누구든지 쉽게 볼 수가 있다. 이 나그함마디 도서관을 인간세의 공적인 자산으..
제1 코우덱스의 경우 이 제1 코우덱스는 어떻게 돌고 돌아 카이로에 있는 벨기에 출신의 골동상인 알버트 에이드(Albert Eid)에게로 굴러들어 갔다. 그런데 이 에이드는 내가 생각키에 유능한 골동상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돈을 밝히는 질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에이드는 박물관장 토고 미나가 국외로 반출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했어도, 그것을 밀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공항에서 세관원들에게 동전 몇 개와 구부러진 쇳조각 몇 개하고 같이 보여주면서 국외 나가 팔 생각이라고 했어도 아무 말 않고 통과시키더라는 것이다. 물론 세관원들을 몇 푼 주고 매수했을 것이다. 에이드는 제1 코우덱스를 가지고 미국시장으로 갔다. 처음에 미시간대학 도서관에 가서 2만 불을 요구했다. 미시간대학 도서관은 너무 비싸다고 구입을..
타노와 다타리 카이로에는 우리나라 인사동이나 장안동의 대표적인 골동상과도 같은 유명한 가게로서 사이프러스섬 출신의 타노(Phocion J. Tano)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골동품가게가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 부근의 기자(Giza)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던 알 카스르의 농부 하나가 자기네 동네에서 옛 코우덱스 사본들이 발견되어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타노에게 귀뜸해주었다. 그래서 타노는 나그 함마디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키나(Qinā) 지역의 지방골동상인 자키 바스타(Zaki Basta)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정보가 있으니 한번 조사해보라고 일러주었다. 타노는 자키 바스타와 이런 식으로 계속 거래를 해온 터이었다. 자키 바스타는 알 카스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깡패두목을 수배했다. 바히즈 알리(Ba..
제3 코우덱스의 경우 알리 집안 사람들이 이 코우덱스가 골동이라는 것은 알았는지라, 사람들에게 팔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한 코우덱스에 만 원 정도만 달라고 했는데 만 원은커녕 천 원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담배와 귤과 바꿔치기로 몇 개가 빠져나갔다. 왜냐하면 복수극 때문에 경찰이 알리집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또 코우덱스를 뺏기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제3 코우덱스(Codex Ⅲ)의 경우, 알리는 그것을 자기네 알 카스르 동네에 있는 콥틱 크리스챤교회로 가지고 갔다. 코우덱스를 어떤 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사람이 그 책이 아랍어가 아니라 콥틱어로 쓰여있다는 것을 아르켜 주었고 콥틱교회에 가져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귀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야만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제아무리 순종과 평화를 의미한다 해도 하여튼 중동지역은 피의 복수가 너무 심하다. 엘리야 선지자도 분단시대의 이스라엘 왕 아합의 바알숭배를 징벌하기 위해, 황소의 번제 제단을 하나는 바알을 위한 것, 하나는 야훼를 위한 것, 두 개를 만들어놓고 시험을 한다. 불을 안 붙이고도 저절로 타오르는 제단이 진정한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것을 증명하자는 것이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되었고 야훼의 예언자는 엘리야 선지자 단 한 명이었다. 바알의 예언자 450명은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 소식도 응답도 기척도 없었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에는 기름을 붓고 기도하자 야훼의 불길이 내려와 장작과 돌과 흙,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린..
불쏘시개 알리는 집에 돌아오자 등에 메고 있던 파피루스더미를 소죽 쑤는 곳간방 지푸라기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이것은 너무도 끔찍한 참극이었다. 그 고귀한 문헌을, 이제 1578년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공기변동이 없는 암흑 속에서 보낸 이 고고학적 유물은 함부로 다루면 변색되고 퇴색되고 바스러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대로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카본입자물감은 용케 새환경을 견디었던 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토용들이 열자마자 색깔이 날아가버린 것에 비하면 그래도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잉크물감의 강력성은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비극은 그런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날 밤 무지막지한 알리의 엄마가 화덕 오븐에 불을 때려고 나갔다가 헛간에 파피루스가 보이니까 죽죽 찢어서 지푸라기와 함께 불쏘시개로 썼다..
패밀리 퓨드 그의 아버지는 알 카스르 동네의 수리조합에서 경비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독일에서 수입해온 비싼 관개시설(기껏해야 좋은 모터 수준이었을 것이다)의 밤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알 카스르 동네와 바로 문서가 발견된 절벽에서 멀지 않은 함라 둠(Hamrah Dum) 동네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카퓨렛 집안과 몽테그 집안의 패밀리 퓨드처럼 누대로 반목하는 관계였다. 함라 둠의 하우와리스 집안(The Hawwaris of Hamrah Dum)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직계손이라는 자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함라 둠 마을에서 그 관개시설을 훔치려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알리의 아버지는 그 침입자를 죽여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그 마을에서 사람들이 와서 알리의 아버지 머..
터번을 풀어 둘둘 말다 알리는 순간 진(jinn)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지만 또 들은 바가 있었거니, 이런 항아리 속에는 금이 가득 들어있을 수도 있다는 탐욕스러운 생각이 갑자기 엄습해온 것이다. 순간 이 무지스러운 인간은 곡괭이를 번쩍들어 항아리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1578년만에 로마가톨릭의 정경화작업으로 억눌려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린 인류의 지혜가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되는 그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 항아리에는 정말 금이 가득차있었다. 아마도 코우덱스에 입힌 금박이 햇빛에 반사되었거나 그 금가루가 하늘로 날아가는 몇 조각의 환상적 찬란함이 확대되어 느껴졌을 것이다. 모두가 너무 실망하고 말았다. 그 항아리 속에는 13개의 코우덱스가 들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코우덱스(codex)라는 것은 ..
제17장 사바크의 저주와 축복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 사바크 헌팅 1945년 12월이었다. 나일강 상류 유역에서 12월은 사바크(sabakh)를 캐기 좋은 시절이다. 사바크란 질소가 풍부히 들은 천연비료로서 땅에서 캐는 것이다. 여름에는 땅이 너무 딱딱해서 캐기 어렵지만 12월이 되면 땅이 연해져서 캐기 좋기 때문에 농한기에 많은 농부들이 캐러 나간다. 낙타를 타고 사바크헌팅을 나가는 것이다. 체노보스키온의 한 동네 알 카스르(al-Qasr)에 사는 일곱 아이들이 사바크를 캐기 위해 자기 동네에서 약 20리 떨어져 있는(5마일) 자발 알 타리프지역으로 원정을 나갔다. 때는 아직 이스라엘 국가가 성립(1948. 5.16.)하기 전이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난 넉 달 후였으니까 모처럼만의 평화로운 휴식기였다...
라이브러리의 은폐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 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 대주교의 서한에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을까? 아타나시우스의 생명의 은인인 이 수도승들에게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서한이 도착한 후 이들은 계속해서 회의를 열었다. 혹자는 이제 외경이 되어 버린 서적들은 불살라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이 서물들을 보관할 수는 없으되 태워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서물들은 후대를 위하여 항아리에 밀봉되어 저 바위절벽 동굴 속에 은폐되는 것이 마땅하다. 성스러운 문헌들은 인간이 처리하는 것보다는 신의 의지에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바미얀 대불을 폭파시키..
외경을 없애버려라 혹자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에 협력하는 파코미우스와 파코미우스 승려들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단적인 영지주의 문서들이 유포될 수 있었는가 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것은 후대의 역사적 가치관을 가지고 초기전승사의 실상을 왜곡하는 매우 기초적인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 이미 누누이 강조했듯이 영지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에 관하여 깊은 연구를 한 하바드 신학대학의 여류신학자 카렌 킹(Karen L. King)의 말대로 ‘영지주의’라는 것은 결코 실체화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수사학적 구성물이었을 뿐이다. 영지주의라는 술어 자체가 ‘이단’을 규정하기 위하여 만든 수..
파코미우스의 보호 바로 그를 보호해준 것은 체노보스키온 근처에 산재해있던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과 그 수도승집단이었다. 이때 이미 파코미우스는 저승으로 떠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스승 파코미우스와 젊은 날에 우정을 맺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를 그들의 헤구멘 이상으로 보호하고 성심껏 섬겼다. 성스러운 뿔피리로 나팔을 불면 수천 명의 건장하고 신념에 찬 수도승들이 모여 아타나시우스를 보호했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 근처의 순박한 농민출신들이었으며 자기들이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밀면서 사형집행인의 팔만 아프게 했다. 어떠한 고문을 통해서도 이 훈련된 수도승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신속히 여기저기로 몸을 숨겨 다닐 ..
콘스탄티우스의 아타나시우스 탄압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를 지원하는 로마의 콘스탄스 황제가 암살되고(350),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가 독존의 황제가 되면서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콘스탄티우스는 선제가 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의 삼위일체에 관한 결정을 취소해버리고 동방교회의 대다수 주류파인 아리우스의 이념에 따라 새로운 가톨릭 통일정책을 세우려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동방교회의 일반정서를 존중하여 동방교회를 주축으로 가톨릭의 서방로마중심축을 전환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아리아니즘을 이단으로 휘몰면서 목숨걸고 투쟁해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러나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
헤구멘 타벤니스의 높은 담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엄격한 공동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동(koinos) 생활(bios)이라는 희랍어원에 따라 영어로는 세노비티즘(cenobitism, coenobitism)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공동생활 수도승을 세노바이트(cenobite)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안토니(Anthony, c.251~356) 계열의 개별적 은둔수도승 앵코라이트(anchorite)와 대별된다. 앵코라이트는 혼자 자유롭게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반면, 세노바이트는 완벽하게 규정된 공동규율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 일어나는 시간, 낮에 사는 생활 스케쥴, 자는 시간이 모두 결정되어 있으며, 공동기도, 공동식사, 공동경작, 공동복장, 공동다이어트규칙, 공동사용이 결정되어 있다. 이 모두에 엄격한 ..
인류사상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 우리는 앞에서 잠깐 파코미우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알렉산더 주교의 뒤를 이어 주교직을 승계했을 때(328), 그는 이집트와 리비아 전역을 샅샅이 심방했다. 이때 그는 체노보스 키온 부근의 콥틱 승려들을 방문하였고 당시 그들의 리더이며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파코미우스를 만나 깊은 우정을 맺는다. 파코미우스는 아타나시우스 주교보다 약간 연상이었다(8세 혹은 3세 위). 파코미우스는 바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체노보스키온 문서가 대량 발견된 바로 그 지역, 체노보스키온(Chenoboskion, 콥틱어로는 슈네세트, Schneset)의 콥틱어를 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북아프리카 로마군대의 병정으로 징..
안토니의 생애 이러한 모든 움직임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는 안토니(Anthony, c.251~356)는 중부 이집트 헤프타노미스 코마(Koma)의 콥틱어를 쓰는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대로 실천했다. 나이 20세 때 부모에게서 받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동네의 가장 편벽한 곳에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전념했다. 테베의 바울(Paul of Thebes)이라고 하는 노승의 지도를 받으며 금욕생활을 실천했다. 그렇게 15년을 하다가 더 완벽한 고독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사막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피스피르(Pispir, 현재 Dayr al-Maymūn)라고 불리는 나일강변의 산에서 절해고도의 절대고독과 싸..
세속적 가치의 부정: 불교와 기독교 천국의 강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구질구질하게 결혼하여 몸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것(고전 7:35)이 더 낫다는 바울의 권장이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분위기는 오늘날의 시중 기독교를 생각나게 하기보다는, 비하라(석굴 승방)를 찾아다니는 초기불교교단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기실 부귀와 같은 세속적 가치의 거부, 그리고 초세간적(超世間的)ㆍ이세간적(離世間的) 해탈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동시대의 동 언어권의 인도유러피안 문화권의 패러다임에 속해 있다. 기독교는 그 해탈을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으로 완성하려 했고 불교는 그 해탈을 자기 마음의 각성(Enlightenment)으로 달성하려 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
예수의 식색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곤혹스럽고 가장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이 맹자(孟子)의 말대로 식(食)ㆍ색(色)이다. 식에 대해서는 부자에 대한 거부가 예수의 모든 메시지에 깔려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그런데 색(色)의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는 비슷한 입장이 있었다.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결혼했던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포도주 이적의 가나 혼인잔치가 예수 자신의 결혼식 설화가 변형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최소한 공생애를 통하여 독신이었다. 그리고 독신생활의 고귀함에 대해 긍정적 가치관을 내비쳤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로 아내를 내쳐..
착취당하는 팔레스타인 농부와 예수 예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그에게도 세속적 가치에 대한 부정이 있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현세종교로서만 생각하고 교회를 현세적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친교의 장, 그러니까 일종의 소셜클럽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초기기독교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마태복음 19장에 실려있는 유대 계명을 잘 지키는 어느 청년과 예수의 유명한 대화를 대부분의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마 19:21~22) 지금 이러한 성경구절을 놓고 교회에서는 추상적인 해석..
제16장 나일강 유역의 수도원 문화 안토니와 파코미우스 모나스티시즘의 발생동기 이 나일강 주변으로 소위 모나스티시즘(monasticism), 즉 수도사 생활이라든가 수도원 제도가 성행케 된 그 원조가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c.251~356)라는 인물이다.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이 안토니라는 인물의 전기를 썼다. 『성 안토니의 생애(Life of St. Anthony)』가 그것이다. 수도원제도가 반드시 고독이나 명상을 즐기는 제한된 극소수의 상층민이나 지식인들에 의하여 선호된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AD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자 기독교는 갑자기 허전해졌다. 즉 순교의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순교..
야훼교의 창시자 모세는 이집트종교전통속에서 성장 한마디로 유대교전통은 이집트종교전통과의 교섭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것이다. 모세는 어떤 의미에서 이집트인이었다. 이방의 사도인 바울이 이방에서 성장한 것이나, 애굽(이집트)으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지도자가 애굽인으로서 성장한 것이나 다 그 나름대로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의 유일신앙은 오로지 모세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모세는 야훼교의 창시자라 해도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모세 이전에는 야훼에게만 예배해야 한다는 관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근원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대한기독교서회, 『그리스도교大事典』, 323). 모세의 야훼교 창시는 어떤 의미에서 이집트종교전통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이집트종교사상의 뿌..
아크 이집트인들에게는 종교의 존재이유가 바로 혼돈으로부터 우주의 질서를 보호하는 데 있었다. 모든 종교적 행위는 우주에 내재하는 마아트(Maat, 질서,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 이 마아트는 우주의 창조신화와 직결되어 있으며 종교적 행위는 의료적 행위와 거의 구분되질 않았다. 인간의 모든 질병이야말로 혼돈의 침입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악한 행동의 결과라고 보았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아크(akh)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동아시아문화권의 기(氣, ch'i)와 거의 동일한 개념이었다. 어떻게 사기(邪氣)의 침범으로부터 정기(正氣)를 지키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의학이었고, 마술(magic)이었고, 종교적 제식이었다. 이 3자는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예수의 선교행위의 대부분이 병든 자를 고친 것이다. 예..
콥틱말 쓰는 크리스챤들 사후세계의 진실성과 마아트 7. 사후세계의 진실성 이집트인들의 종교적 관념에 있어서는 인도인들에게 나타나는 ‘윤회’(transmigration)의 사상은 없다. 오시리스 신앙을 잘 살펴보아도 그것은 오시리스가 살아있는 우리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부활은 ‘죽음의 세계에로의 부활’이었다. 피라미드의 위용도 사후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미이라가 우리와 같은 삶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후의 세계의 진실성을 믿었으며 죽은 후에도 삶의 영화를 계속 지속할 수 있다는 매우 소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후의 세계를 공포스러운 긴장감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삶이라는 것 자체를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생각했고, 삶의 모든 윤리 자체..
콥틱말 쓰는 크리스챤들 혼돈과 질서 6. 혼돈과 질서 이집트의 우주론에 있어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혼돈과 질서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혼돈을 자료로 하여 그것을 분화시키면서 질서로 만들어간 것이다. 헬리오폴리스의 위대한 아홉 신(the Great Ennead of Heliopolis)이 여기에 관여하는데 그중 으뜸가는 신이 ‘완전’(completeness)을 의미하는 아툼(Atum)이다. 그리고 눈(Nun)이라는 원초적 물의 신으로부터 태양신 라(Ra)가 태어난다. 그리고 이 태양신 라(Ra)는 지하의 오시리스(Osiris)와 항상 동일시되곤 했는데 결국 이집트의 태양신은 만물 위에서 군림하고 주재하는 빛나는 이미지라기보다는, 항상 밤이면..
콥틱말 쓰는 크리스챤들 오시리스 신앙 5. 오시리스 신앙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이집트 종교문화의 매우 보편적인 믿음 형태였으며, 그것은 또 농경사회의 토양의 퍼틸리티 컬트(fertility cult, 생산성 예찬)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유례가 오시리스(Osiris) 신앙이다. 오시리스의 유래는 매우 모호하지만, 나일강 하류의 부시리스(Busiris) 지역의 지역신이 격상된 것이라 하기도 하고, 땅속의 생산성이 의인화된 것일 수도 있고, BC 3000년경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며 영웅이었던 한 인간, 오시리스가 신격화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시리스는 지상의 훌륭하고 영특한 군주였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질투심이 강한 사악한 동생, 세트(Seth)가 있었다. 이 세트는 ..
콥틱말 쓰는 크리스챤들 절충주의적 격의와 태양신 숭배의 관용성 3. 절충주의적 격의 이 절충주의(syncretism)란 말은 이집트 본래의 전통 속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신들이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 결합된다. 시대에 따라 다른 신들이 발생해도 하나의 컬트의 대상으로 융합되는 것이 보통이고, 공간에 따라 지역의 신이 국가의 신과 연합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제우스와 같은 우두머리신 아문(Amun)과 태양신 라(Ra)가 결합하여 아문라(Amun-Ra)가 된다. 프타(Ptha), 소카르(Sokar), 오시리스(Osiris)가 프타소카르오시리스가 되기도 하고, 태양신 라(Ra)가 지하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하나로 동일시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집트에서는 옛 전통과 새 전통이 항..
콥틱말 쓰는 크리스챤들 수도사 중심과 문화전통의 혼합 마르시온정경 성립(150년경) 이후부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 27서정경 성립(367년)까지 이 나일강지역에는 콥틱말을 쓰는 크리스챤이 많았는데, 이 크리스챤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몇 가지 리버럴한 경향성이 있었다. 1. 수도사 중심 모세도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시내(시나이) 광야에서 살다가 호렙산 떨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엘리야 선지자도 광야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도 광야에서 시험을 거쳤고, 바울도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이방전도여행을 할 수 있는 영감을 얻었다. 광야는 사막이다. 로스앤젤레스지역의 데쓰밸리에 며칠을 가 있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사막은 ‘버림’이다. 사막에서는 돈도 명예도 권..
제15장 이집트인들의 종교관념 주혈흡충 나는 1990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1월에 걸쳐 아프리카대륙을 대우 김우중 회장단과 여행한 적이 있다. 화이트 나일과 블루 나일이 카르툼에서 만나 낫세르 호수로 들어가고 그곳 아스완 댐에서 신 아문의 도시 룩소르, 왕들의 계곡, 나그 함마디를 거쳐 카이로, 알렉산드리아까지 뻗쳐있는 나일강 상공을 김회장의 전세기를 타고 유유히 날아가 본 적이 있다. 어여쁜 불란서 스튜어디스가 시중을 드는 가운데 라면을 끓여먹으며 머리를 맞대고 인류문명의 대세를 논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김우중 회장님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한기(寒氣)에도 일신(一身)의 편안함조차도 구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내 가슴이 쓰리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이 나일강 지역을 생각하면 ..
명제와 말씀 성서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자! 다음의 문장을 보라! 1) 나는 학교에 간다. (한국말) 2) I go to school. (영어) 3) 私は学校へ行きます. (일본어) 4) 我去學校. (중국어) 아주 간단한 예이지만, 동일한 의미구조라 할까, 하여튼 통사론적 결구도 다르고 선택한 어휘도 다르지만, 같은 말을 나라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표현에 따라 병렬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4개의 문장 속에는 동일한 하나의 명제(proposition)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명제라는 것은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다. 그 명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Logos)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여기 쓰여져 있는..
성서 대중보급은 주자의 『사서집주』보다도 후대 그리고 성서라는 것이 실제로 일반에게 유포된 것은 인쇄술발달 이후의 사건이며, 인쇄라는 대량출판의 방식이 나오기 전에는 획일적인 성서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킹 제임스 바이블(KJV) 이후부터나 영어문화권에서 성서가 보편화되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성서대중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서양은 우리 동양에 비해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이 늦다. 그러니까 송대(宋代)에 이미 출판문화가 고도화되고 또 대중화되었던 동양의 사정에 비교해본다면 기독교성서의 보급은 주자(朱子)의 사서(四書) 보급보다도 뒤늦은 사태라는 세계사적 안목도 다시 한번 상기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367년 부활절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7서정경목록 발표 384년 제롬..
트렌트 공의회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성서의 출현 이후에도 라틴번역판의 우열에 관하여 끊임없이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하나의 정본으로 고착된 것은 루터의 독일말 성서번역 등에 충격을 받고 시작된 카운터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시대의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티롤지방의 도시 트렌트에서 바울 3세에 의하여 소집된 이 공의회는 1546년 4월 8일 4번째 회의에서 제롬의 번역을 토대로 한 신ㆍ구약성경 전체의 라틴 벌게이트판(the Latin Vulgate version)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일한 권위로서 선포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판본에 대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출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1592년 교황 클레멘트 8세(..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 내가 제롬과 같은 사람들의 생애를 간략하나마 소개하는 뜻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성서의 모습이 거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그 황량했던 시절에 이미 팔레스타인 각지를 순례하면서 역사적 상황과 분위기를 익히고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유려한 라틴어로 번역을 감행했던 사막의 수도승 제롬과 같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삶의 헌신과 천로 역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성서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서를 성령의 계시라고만 주장하는 성령파들은 이러한 기나긴 인간의 노력, 성경으로 인도된 위대한 문명의 축적을 망각하고 성서에 대해 모독적 발언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지가 성서를 파괴하고, 성서를 마치 무당ㆍ점쟁이들의 예언서나 부적 수준으로..
제롬의 바이블 클라스 교황 다마수스는 그를 비서로 부르면서 기존의 라틴역 성서들이 충돌을 일으키므로 가장 온전한 라틴어 정본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382년에 로마 시노드에서 다마수스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다음과 같다. ‘보편적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구분하여 우리는 성경을 취급해야 한다.’ 라틴어 번역이란 원래 희랍어 성경들이 희랍어를 모르는 당대의 로마사람들에게 구어로 번역되어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들인데 2세기 후반부터는 그것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지역, 스페인 지역, 현재 프랑스지역에서부터 다양하게 라틴사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롬도 이 사본들이 얼마나 내용이 제각기 달랐는지 사본의 개수만큼 성서의 개수가 있다고 불평했다. 이 시대의 수고 텍스트가 92종이나 현존..
꿈의 계시로 위대한 번역자의 생애 친구 루피누스는 그따위 꿈 같은 환상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미신이라고 제롬을 질책했지만, 이 꿈의 계시는 제롬의 생애를 지배했다. 그는 그 후로 한가롭게 그레코ㆍ로망의 고전을 손에 잡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로지 성서의 연구와 주석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 후 375년에 칼키스(Chalcis)의 사막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홀로 2년 동안 생활한다. 그는 로마말만 잘했고 시리아말과 희랍어를 몰랐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컸기 때문에 식욕이 까다로웠고 위장이 약했다. 사막에서 사는 것은 심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의 정욕에 시달렸다. 거친 음식은 그의 고해성사였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사막의 고적과 미풍 속에서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며 기도와 단식에 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제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27서정경목록 선포와 더불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동시대의 인물이 제롬(Jerome, c.347~419/420, 라틴 풀네임은 Eusebius Hieronymus)이라는 당대까지 가장 유식하고, 수도원의 리더로서 성자적 삶을 영위한 탁월한 성서번역가이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27서정경의 권위를 수용하고 그것이 기독교세계에 전파되도록 그 체제에 따라 라틴어성서번역을 시도했다. 그는 한때 교황 다마수스(Pope Damasus)의 비서(요새로 말하면 추기경 이상의 지위였다. 382~385)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식과 신념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기독교성서를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성서의 모습이나 ..
킹 제임스 바이블의 경우 스튜어트왕조의 시조인 영국왕 제임스1세가 명령하여 54인으로 구성된 학자그룹에 의하여 7년 동안 고생 끝에 1611년에 출판된 소위 흠정역 킹 제임스 바이블(King James Version)도 에라스무스의 희랍어성경을 조금 발전시킨 테오도르 베짜(Theodore Beza)의 1588~1589년 판본과 1598년 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따라서 킹 제임스 바이블도 1611년판을 우리가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수차례의 개정을 거쳐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보통 ‘흠정판’(the Authorized Version)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벤자민 블레이니(Benjamin Blayney) 박사가 4년간의 노고 끝에 176..
희랍어성경도 하나의 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희랍어성경 고사본은 약 5천 개 정도나 되는데, 이 5천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또다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은 4세기의 것인데 양피지에 흘림체로 쓴 것이다. 1844년, 1859년, 두 차례에 걸쳐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수도원에서 콘스탄틴 폰 티엔도르프(Konstantin von Tischendorf)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신ㆍ구약의 완정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을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라고 한다. 이것을 성서판본학에서는 알레프(aleph)라고 부른다. 히브리 알파벳의 첫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르고 또 그 글자로 표기한다. 이 판본을 효시로 하여, 1475..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우리는 성서라는 문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공포감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 공포감이란 그것이 성령의 계시에 의한 절대적인 말씀이라서 일점일획도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세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성서는 한 글자도 변동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신앙 세계를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성서는 절대불가침의 신성한 말씀이며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절대불가침의 성서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교보나 동네책방, 대한기독교서회나 분도출판사책방 같은 곳에 가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책방에 꽂혀있는 성서는 한두 종류가 아니다. 이..
제14장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아타나시우스 이후 우선 이 기구한 운명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만 한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권위가 있다고 해도 그가 부활절에서 발한 메시지 하나로 전 로마기독교세계가 27서성경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기실 아타나시우스는 단지 목록만을 확정했을 뿐이다. 그는 평생의 에너지를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의 저작도 이단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 변호)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엄밀한 서지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라는 텍스트를 크리틱(Critique, 비평)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질 않았다. 그는 27서정경을 물리적으로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27서를 확정 지을 수 있을 정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