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25 (27)
건빵이랑 놀자
4. 근대철학 해체의 양상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합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니체는 의미와 가치, 힘과 권력의지란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해체시킵니다. 근대적 문제설정의 지반이었던 주체와 진리를, 그리고 그에 기반한 윤리학을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 니체는 그 결과 새로운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체 작업은 맑스나 프로이트의 그것과 달리 지극히 공격적이었습니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이어바흐나 헤겔에 대한 비판은 그런 한에서 필요한 최소한으로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근대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근대사회에..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다른 한편 자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 퍼붓는 니체의 공격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진리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주체뿐만 아니라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진리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예컨대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욕망..
자명한 것이란 애초에 없다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자명한 것’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그게 있는 건지가 문제되고 있는데, 따라서 자명한 것이란 말 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데, 그 자명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 확실한 것에 어떻게 도달하겠냐는 것이고, ..
계보학의 문제설정 한편 ‘힘’에는 능동적인(active) 힘과 반동적인(reactive) 힘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반동적이라는 것은 진보에 반대되는 ‘반동’이란 뜻이 아니라, active에 대한 반대를 말합니다. 즉 active란 ‘작용적인 힘’이란 뜻이고, reactive란 ‘반작용적인 힘’이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어떤 힘에 대해 반응하여 반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 의지에는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긍정적인 의지이고, 반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부정적인 의지입니다. 대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니체..
권력에의 의지 니체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칩시다.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요컨대 꽃이나 노을, 몸매 같은 것들은 가상이고 그 근저에는..
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극단적 평가의 철학자 니체만큼 극단적인 평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니체 지지자들은 그의 사상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고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랄하며 시적인 경구들에서 새로운 사상의 징후를 느끼고 찬탄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니체 비판가들은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사상의 원천이요 집약이라는 지독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적인 문구들이 만들어내는 ‘초인’의 사상에서 파시즘의 심증을 굳히곤 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평가가 어떤 것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증폭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의 모..
무의식과 주체철학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근대철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지요.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며, 통일성과 투명성ㆍ중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칸트에게 세..
무의식의 분열 셋째 단계, 무의식 자체 내에 분열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프로이트는 의식/무의식이라는 이론적 틀(위상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 개념은 상반되는 두 가지 것으로 분할됩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욕망이나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무의식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것을 억압하는 것 또한 의식된 행동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그것이 억압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억압되는 욕망이나 억압하는 기제 모두 무의식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두 가지 개념으로 분할합니다. 억압되는 욕망과 충동을 ‘거시기’(이드id)라고 하며, 억압하는 기제를 초자아(Super-ego)라고 합니다. 거시기는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며, 초자아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사..
보편적인 무의식 둘째 단계, 무의식이 우연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임을 발견합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브로이어와 싸우고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가 선택한 주제는 바로 꿈이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지요. 그는 이 연구를 통해 무의식이 최면이나 히스테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보편적인 거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꿈에는 잠재몽(潛在夢)과 현재몽(顯在夢)이 있는데, ‘현재몽’은 흔히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고, 잠재몽은 그 꿈에 왜곡된 모습으로 잠재해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꿈의 작업’을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잠재몽이 도덕적으로 받아들..
무의식의 발견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를 철학자로 다루는 철학사 책을 만나기도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에, 특히 근대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한 단 하나의 개념 때문입니다. ‘무의식’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개념 말입니다. 이 개념은 근대철학의 기초였던 ‘주체’를 그리하여 주체철학 전체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트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파괴 효과는 사실 무의식이란 개념 하나만으론 이루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다양한 증거와 임상적 사례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창출해낸 체계적이고 강력한 개념들과 이론들이 있었..
맑스철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요약합시다.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철학적 사고의 틀을 변환시킵니다. 우선 주체와 대상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해체합니다. 주체도, 대상도, 인식도, 진리도 모두 실천이란 개념에 의거해 새로이 정의내리죠. 진리 개념의 변환을 통해서 그는 근대철학이 추구하던 확고하고 불변적인 진리라는 목적 자체를 해체합니다. 또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자명한 주체 역시 해체해 버립니다. 이제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이란 것이 명확해지고, 그 결과 주체 진리라는 짝에 의해 형성되었던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가 해체됩니다. 나아가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사회 역사적 요인을 다루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합니다...
주체철학의 전복 이러한 주장은 근대철학의 출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 항구적인 기초인 주체’가 따로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체’란, ‘인간’이 그렇듯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요 결과물이란 겁니다. 동일한 사람이 20세기에 호텔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체가 ‘사고’하는 내용이나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의 성을 사서 호텔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증세로 날아간 시종의 후손에게 과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반면 20세기의 자유로운 공기를 맛본 시종은 이게 더 이상 영주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되돌..
역사유물론 맑스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된 철학적 지반의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근대철학의 목표는 물론, 대상 자체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파괴하는 데 머문 것만은 아닙니다. 물질 개념조차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역사유물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역사유물론으로 진전됨에 따라 이제 맑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는 인간)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맑스는 ‘인간’이란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포이어바흐처럼 사랑이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으며,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정념’을 가진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특성 중 몇 가지..
계몽주의 비판 넷째로 계몽주의 비판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세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교육과 환경’에 의해 인간이 바뀐다는 생각(이게 바로 ‘계몽주의’지요)을 비판합니다. ‘사회를 우월한 부분과 열등한 부분으로 양분’하는 것, 가르치는 부분과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부분으로 나누는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계몽주의의 근본 관점인 이분법 자체를 비판합니다. 이는 계몽주의의 지반 자체를 해체하는 비판입니다. 전위와 대중을 갈라놓고 전위는 교육하는 자, 대중은 그 교육을 따라가면 되는 자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대해, 이미 맑스는 계몽주의적 윤리학이라며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스의 이러한 비판은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 모두를 떠나 계몽주의적 이분법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
진위는 실천을 통해서 셋째는 진리의 문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이 대상적 진리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오해가 많이 되는 구절입니다. 흔히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참인가 아닌가는 실천해 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유물론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 개념은 사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검증 개념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그러나 맑스 말대로 대상이나 지각이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혹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물도 다른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길고..
실천 속에서의 지각 둘째, 맑스는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이 ‘지각이나 감성, 즉 대상을 단순히 지각ㆍ직관ㆍ감각으로만 파악했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각을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관조하는 행위로만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제시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관념론자들은 대상을 주체의 관념 속에서 정의합니다.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들은 사물을 더욱더 잘 보기 위해 인간의 육체에서 눈을 빼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그대로 뒤집어 “좀더 잘 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눈을 갖고 개념을 없애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 대상을 눈에 비치는 대상, 직관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지각이나 ..
대상으로서의 실천 첫째는 ‘대상’으로서의 실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첫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 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을 객체의 형식으로만 파악했고 그것을 실천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대상, 현실을 실천이란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포이어바흐는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단백질 덩어리란 말이죠. 이 극단적인 문장에서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유물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의 유물론을 흔히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하지요. 맑스가 보기에 이런 유물론은 대상이나 현실을 단백질처럼,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고정적인 객체로..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의 ‘유물론 비판’ 맑스가 관념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물론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물론자’ 맑스가 사실은 유물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근대철학과 근본적인 구획선을 그으면서 달라지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입니다. 또한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맑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맑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섭니다. ▲ 빈약한 부엌 브뤼겔(Brueghel/Bruegel)의 그림 「빈약한 부엌」(Die magere Kiche)이다. 브뤼겔은 장애인이나 아이들의..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지금까지 초기 대륙의 이성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그리고 독일 고전철학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무엇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난점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과 연관해서 근대철학자들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이 그 근본적인 딜레마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는 과정과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의해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출현하는 과정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역동적 과정을 통해 근대철학의 역사가 어떻게 풍부하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듯이 근대철학 내부에 있는 그 딜레마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그렇지만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있었던 헤겔로선 또 다른 딜레마를 절감하게 됩니다. 진리란 스스로 돌아보며 자기가 갖고 있는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헤겔이 생각해낸 이 진리의 기준 역시 이후 정정되고 폐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헤겔 자신이 제시한 진리의 기준은 초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순간, 진리의 기준이 정정되어 가는 과정을 통찰한 헤겔 자신의 진리 개념은 장벽에 부닥칩니다. 이는 논리적인 난점이지만, 사실 진리 개념에 대한 입론을 제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난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기준 자체의 정정 과정을 파악하는 입론의 현실성이요 효과니까요. 그러나 확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적 문제..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리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스피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우선 셸링의 자연철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연을 정신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자연을 실체의 양태로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헤겔에게 절대자(절대정신)란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화되어 만들어내는 자연, 사회, 역사는 스피노자 개념에서 ‘양태’에 해당되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개념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목적론적 과정에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지식과 진리에 대한 변증법 역시 그렇습니다. 헤겔은 진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진리의 기준을 미리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받아들여..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은 진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 현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 인식의 대상은 주체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의식 내부에 있는 거라고 표현하지요. 이러한 사고법은 피히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모르는 것을 먹을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지식을 “대상에 대한 주체의 연관”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식 내에서 만들어지는 연관입니다. 그렇지만 피히테와 달리 헤겔은 대상을 정립하는..
‘절대정신’의 변증법 헤겔 역시 사물 자체와 주관, 현실과 주체를 분리시키지 않기 위해선 근원적인 통일을 처음부터 설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피히테는 이 근원적인 통일을 ‘자아’를 절대화해서 만들어냈지요. 하지만 헤겔이 주목하는 건 오히려 친구였던 셸링의 방법입니다. 셸링 역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절대자’라고 생각하며, 그런 절대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히테의 생각처럼 자아가 비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비아가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피히테와 달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아를 근거로 자연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주체-객체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자연을 주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즉 자연이 곧 주..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비판철학과 헤겔 헤겔은 ‘변증법’이란 이름이 살아 있는 한 그 이름을 잊기는 어려울 정도로 변증법적 사고를 체계화한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특히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했던 맑스를 통해서, 그리고 맑스주의 내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통해서 헤겔은 헤겔철학의 영역 밖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20세기의 중반기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지금까지도 헤겔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헤겔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며 걸쳐 있는 범위가 방대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제대로 요약하는 것은 능력을 떠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런 무리한 욕심은 애초부터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헤겔의 입론을 가능..
자아철학의 봉쇄장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피히테는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즉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히테는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로 말입니다. 이 자아가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아는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자아를, 데카르트처럼 사유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습니다. 그 각각은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흔히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지요.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定立)’이라고 요약됩니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거지요.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
2. 피히테 : 근대철학과 자아 ‘자아’의 복권 피히테는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하며, 주체(피히테 용어로는 자아)의 활동과 무관하게 정의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입니다. 피히테는 일단 ‘사물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고 피히테는 반문합니다. 무언가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