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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목차 이진경 책 머리에 제2증보판에 부쳐 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철학의 경계 경계읽기와 ‘문제설정’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은폐된 공세 중세 너머의 철학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근대철학의 딜레마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스피노자의 진리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진리와 공리 코나투스 ‘무의식’의 윤리학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제2부 유명론과 ..
철학 자체의 한계 뛰어넘기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근대철학은 단순히 시간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된 것이어서, 그 말과 동시에 ‘전근대 → 근대 → 탈근대’의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에서 지배적인 문제 설정이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순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곤란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변화의 계열을 필연성을 갖는 ‘발전’으로 간주해선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아도르노(Th. Adorno)의 말을 빌리면, 근대는 시간적인 범주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대철학’이란 말보다는 ‘근대적 문제설정’이란 말이 좀더 잘 보여주듯이, 근대철학이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
현대철학의 두 가지 방향 다른 한편 언어학을 경유해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으려는 태도 역시 오늘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주체의 작용으로 이해되던 의미나 판단이 사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이란 명제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소쉬르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1세기 전에 훔볼트는 칸트주의의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입론을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는 언어학적 구조주의가 사실은 칸트주의라는 근대적 틀 속에 포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야콥슨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말 그대로의 ‘구조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려는 흐름들을 전반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가족유사성’이 있다면..
결론 : 근대철학의 경계들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린 헤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합시다. 주체와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은 신학과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을, 그 중심을 ‘나’라는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중세 전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철학적 근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문제설정은, 주체의 통일성과 중심성을 가정하며 그것을 개념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란 특징, 모든 지식을 오직 ‘참된 지식’ ‘과학’이란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점에서 ‘과학주의’란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성..
기계주의 반복하자면, 노마디즘에서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즉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를 긍정하라고 요구하는 차이의 철학에 잇닿아 있다는 걸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특정한 양상의 계열화가 반복될 때 배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역시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배치라는 개념이 언제나 탈영토화의 첨점이라는 차이화의 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반복이 ‘구조’와 달리 차이에 대해 열려 있고 차이의 개념이 작동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의 철학,..
노마디즘 정착민은 정해진 한 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붙박히지 않고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이지요.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야, 저건 나의 전공영역(영토!)이 아니니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하는 식의 태도는 하나의 영토에 머물러 살아가는 전형적인 정착민의 태도지요. 반면 반 고흐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토 안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거기서조차 인상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스타일을 변형시켜 사용하지요. 인상주의자들의 점묘적인 터치는 이제 색채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에 힘차게 운동하..
탈주의 철학 이처럼 배치 내지 관계는 그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특정한 욕망으로 ‘끌어들입니다’(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territorialization 한다’고 표현합니다), 자본의 배치는 착한 사람이든 계산에 밝은 사람이든 증식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사랑의 배치는 쑥맥인 사람도 열정적인 구애의 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이 영토화하는 성분이 계속 작동하는 한, 그 배치는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겠지요. 배치를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 욕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특정한 양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증식 욕망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화폐에 눈이 먼 사람들로, ‘자본가’로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권력이 되어 작동합니다. 사랑에 눈 먼 사람이..
욕망과 배치 68년 혁명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것은 라캉이나 푸코, 알튀세르 같은 사상가는 물론, 유럽의 좌파운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상생활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대한 전복, 욕망을 죄악시하고 억압하는 금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던 이 혁명에 대해서 공산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좌파’들은 ‘소부르주아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좌파들이 대중들로부터 신망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거꾸로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권력 주변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 전반으..
의미의 논리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여자를 둘러싼 결투도, 모욕적 시선에 대한 분노도, 배신에 대한 절망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원한에 의한 살인, 유산을 노린 존속살인, 강도들의 뜻하지 않은 살인 등등, 여기서 어떤 살인이 가령 유산을 노린 살인이라고 하려면, 그에 고유한 사물들의 최소한의 계열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신은 가족이나 배우자, 혹은 친족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유산이라는 재물이 계열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열이 발견된다면, 그게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본에서 일어나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든 미래에 일어날 것이든 모두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런 사..
라쇼몬을 통해 본 사건의 철학 공 얘기로는 ‘사건’이란 개념을 납득하기 어렵나요? 좀더 재미있는 예를 들어봅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몬」(羅生門)은 사실과 다른 사건의 개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뭇꾼이 사람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그저 죽은 사람의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몸의 주변에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가슴에 꽂힌 칼, 남자의 망건, 끊어진 포승줄, 망사천을 둘러친 여자의 큰 모자 등등. 여기서 우리는 나뭇꾼처럼 질문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사물을 사건화하는 질문입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살인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던지는 질문이고 또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
사건의 철학 『차이와 반복』에서 생성, 접속, 변이로서 차이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했다면, 이제 들뢰즈는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의 논리’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의미란 통상 기호학이나 언어학 혹은 언어철학에서 다루거나, 그게 아니면 현상학에서 다루지요. 소쉬르는 의미란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청각 영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의미를 어떤 기호나 기표에 대응되는 어떤 것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구조주의자들은 의미를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변경될 수 없는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다룹니다.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물질성’이란 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의미는 언제나 봉합된 채 고정될 뿐이어서, 봉합된 부분이 튿어지고 다른 고정점에 정박하면 의미의 망 전체가 변하게 된다고 하지만,..
차이와 반복 갈릴레이의 유명한 자유낙하 법칙도 마찬가집니다. 두 개의 물체는 질량이나 형태와 상관없이 동일한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 낙하속도는 다만 시간의 함수라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쇳덩어리와 종이가 동일한 속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공기의 저항 등이 관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편적 법칙을 얻기 위해 갈릴레이는 공기의 저항을, 아니 공기 자체를 제거해 버립니다. ‘진공’이라고 가정하는 거지요. 그게 실제로 있든 없든 간에. 결과에서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제거하여 동일한 법칙으로 표시되는 동일한 결과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카오스 이론 혹은 복잡계 이론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이론들은 이런 식으로 제거해 버린 것들이 사실은 법칙 자체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만들..
차이의 반복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 역시 ‘동일성’이란 개념을, 우리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들뢰즈는 여기서 양자의 관계를 전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것을 모으곤 거기서 다시 차이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마저 특정한 제한과 ‘조작’을 통해 동일화된 차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란 개념입니다. 반복이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며, 실험실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풍잎을 ‘단풍잎’이라는 동일성의 형식으로 포착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풍잎들에..
다른 것으로의 변이 다른 한편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차이를 제거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보는 동일자의 사유, 나아가 차이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할 것, 혹은 수용하고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는 그런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자의 사유,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가진, 대개는 문명이나 진리라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척도에 맞추어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척도에 맞추어 동일화하려고 합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흑인들의 행동을 ‘미개한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동일화하려는 서구인들의 오랜 시도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가장..
특이성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차이를 동일성에 포섭하거나 대립에 가두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동일성조차 차이를 통해서 해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차이의 철학이 묻는 것입니다. 먼거, 들뢰즈에 따를 때 차이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차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늦가을, 단풍이 한창 익어갈 때 단풍잎들을 본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혹시 거기서 빨강색을 보시나요? 나뭇잎만큼이나 다른(different) 수많은 빨강색들을 본 적은 없나요? 어쩔 수 없이 ‘빨강색’이란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정말 수많은 색들이 있지요.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 많은 색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나뭇잎이 갖고 있는, 혹은 한 잎의 각 부분이 갖는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
차이의 철학 들뢰즈의 철학을 특징짓는 많은 명칭들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 ‘사건의 철학’, ‘탈주의 철학’, ‘유목의 철학’, ‘생성의 철학’, 혹은 ‘욕망의 정치학’, ‘분열분석학’ 등등. 이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차이의 철학’이란 명칭입니다. 사실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벼리어내고 그것을 시유의 중심적인 고리로 만든 사람이 들뢰즈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데리다 역시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지만, 이를 지연시키다’와 결합하여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었지요. 불어에서 두 단어는 같은 발음을 갖지만, 우리는 사실 충분히 변별되는 개념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요. 그래서 ‘차연’이란 말이 데리다의 개념이라면, ‘차이’라는 개..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들뢰즈는 대학에서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고, 가타리는 의과대학을 나와 실험적인 정신분석을 하던 정신의학자였습니다. 들뢰즈가 니체와 스피노자, 베르그송, 에피쿠로스 등 생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여러 철학자들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니체주의자였다고 한다면,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68년 5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맑스주의자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68년 혁명을 전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 시기는 1960년대를 풍미하던 구조주의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푸코나 라캉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향’하던 시기였지요. 한편 1960년대는 또 소쉬르나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이 다양한 형태의 기호학으로 확장되던 시기..
해체의 철학, 철학의 해체 결국 니체의 계보학은 푸코에게 새로운 두 권력 개념을 제공한 셈입니다. 지식-권력과 생체권력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생체권력 개념은 또 하나의 변환을 야기합니다. 감시와 처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푸코가 도달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요, 기능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군대에서 생체권력을 통해 개개인은 사회적으로 받이들여질 수 있는 주체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인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푸코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체가 되는 데 권력의 작동이 필수적이라면, 이제 권력 없는..
경계선의 계보학 앞서 우리는 푸코의 기획이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뒤집으면, 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는 힘과 권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 동일자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입니다. 예컨대 광기와 이성 간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래서 광인을 가두거나 환자 취급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이 경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그은 경계선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은 그 경계선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에게 ‘의사’란 직책을 주며, 그것을 위한 담론(談論, discours; 여기서는 정신병리학이란 지식을 말합니다)에 ‘과학’이란 이름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이 담론을 통해 정신병이나 광인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주체’..
역사적 구조주의 다른 한편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는 고전주의 시대와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물 자체’처럼 표상이 닿지 못하는 외부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도 예전에는 분류학에 그쳤지만, 이제는 생명이라는 실체를 중심으로, 그것을 위해 기능하는 기관이나 특징을 근거로 새로 정리됩니다. 나아가 이 실체 자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그로 인해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이라는 범주가 바로 그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개념은 이 근대라는 시기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푸코는 서로 상이한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
타자의 역사 이와 같은 관점에서 푸코는 타자를 소통과 대화의 자리에 끌어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그 ‘타자의 역사’를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자의 역사’를 통한 것입니다. 전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말과 사물』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타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봅시다. 『광기의 역사』는 “미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자체도 하나의 광기인지도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가 어떻게 해서 정상 사회에서 배제되고 감금되며 결국은 치료되어야할 ‘병‘으로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시대, 근대’라는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이 구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