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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목차 책을 시작하며 프롤로그 1. 창시자가 아닌 인간으로 2. 화려하게 되살아난 공자 3. 13명의 유학자들로 살펴본 가능성과 한계 공자(孔子): 인의 이념과 예의 실천 좌절한 정치가 유학사상의 창시자로 군자와 소인의 조화로운 정치질서 군자는 바람, 소인은 풀과 같다 인자(仁者)의 이상과 인자가 되는 방법: 극기복례(克己復禮) 인자(仁者)의 이상과 인자가 되는 방법: 서(恕) 공자에 이르러 바뀐 군자의 의미 인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 예(禮)와 인(仁)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더 읽을 것들 맹자(孟子): 측은지심의 발견으로 유학의 수양론을 만들다 공자 사상을 지키려는 소명의식 자신의 본성을 확충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측은지심이 골고루 흘러가게 해주면 된다 성..
4. 동정심의 논리와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동정심의 논리’입니다. 근대 서양 윤리학은 칸트(I.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도덕형이상학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칸트는 윤리적 명령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 칸트의 이 말은,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행동이 누구나 수행해도 좋을 행동인지를 미리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려고 합니다. 칸트는 이럴 때 먼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
3. 가족의 논리 유학 사상은 사실 공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자가 창시했지만, 12인 아니 그 이상의 유학자들이 합류하여 풍성하게 만든 거대한 강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대한 강물은 서양 문명이라는 둑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둑을 넘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중국 인민대학의 이나 KBS 방송에서 예언했던 것처럼 이 거대한 강이 앞으로 계속 흘러나가 인류의 비전이 될 수 있을까요? 서양 문명을 넘어서 유학 사상이 미래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장점을 유학 사상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하나는 가장 원형적인 공동체의 모델로 가족을 강조했던 유학 특유의 ‘가족의 논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중요성을 강조..
2. 예절이란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를 확보하는 데서 빛이 난다 유학 사상은 공자라는 수원지로부터 발원되어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로 뻗어나간 거대한 강과도 같습니다. 이 거대한 강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지류들이 합류하지만, 여전히 유학 사상은 공자의 사상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로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은 어떤 힘이 있기에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도하게 흘러오고 있을까요? 나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공자의 긍정적인 희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인간에게서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타인과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수양이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서 모..
에필로그 1. 작은 단점 때문에 포기해선 이해를 안 된다 공자에서 시작하여 정약용에 이르는 13인의 유학자들 이야기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과연 유학이란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공자를 제외한 12인의 유학자들은 모두 자신만이 공자의 충실한 수제자라고 자부했던 사상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이전의 유학자들은 진정으로 공자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이 공자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주희는 자신이 공자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주희가 본 것은 공자의 진정한 면모가 아니라고 비판했지요. 뿐만 아니라 유학을 좋아하는 현대..
더 읽을 것들 1, 『다산 맹자요의』(정약용, 이지형 옮김, 현대실학사, 1994) 정약용의 저서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의 저술들이 실려 있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아직도 원문조차 모두 번역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히 중요한 그의 저서들 몇 권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도 정약용의 사상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아시아 철학의 집대성자였던 정약용의 유학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이지형이 번역한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번역서들 가운데 유독 이 책을 택한 이유는, 정약용의 『맹자요의(孟子要義)』가 유학자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 가장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지형의 번역서는 번역 상태가 매우 훌륭해서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읽기에도 손색이 없습니..
유학의 마음 이론을 새롭게 체계화하다 고독한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주희, 마테오 리치, 이토 진사이 등 다양한 경향의 사상가들과 오랫동안 씨름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약용이 어느 누구의 입장에도 쉽게 경도되지 않는 놀라운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희의 이기론을 치열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은 리치와 진사이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가 리치와 진사이의 사유를 맹목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리치와 진사이 등의 사상가에게서 합리적인 요소들을 수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공격했던 주희에게서도 많은 측면을 흡수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자 정약용은 이들 사상가들의 다양한 관점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 자리에 서 있었음을 ..
자유의지의 도입 그런데 이 자유의지론에 누구보다도 정약용이 강한 호기심과 관심을 표명했지요. 기존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의지라는 말을 본성을 따르려는 수양 공부에 적용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리치의 경우처럼, 자유의지 작용이 없으면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부를 수 없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유학에서 측은지심이란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선천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리치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저절로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은 결코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주체의 의지적 선택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학자들은 당연히 이 측은지심이야말로 선..
선을 결정하고 구성하는 자유의지를 천명한 리치 리치는 인간의 자유와 자유에 따른 선택 행위가 전제될 때에만 선과 악이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선악 개념이란 것 자체가 자유의지를 토대로 해야만 정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동양의 유학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천적 본성이 천명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절대적인 선이 이미 천명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리치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은 유학자들이 생각했던 본성과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리치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꼽았지만, 학자들은 선을 좋아하고 선을 하고픈 감성적 욕망을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리치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 추론 능력을 통해 옳고 그름을 변별하고,..
유학자들의 본성론과 신부의 자유의지론 정약용 철학의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한문으로 지은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입니다. 예수회 소속 신부인 그가 처음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명나라 말기, 정확히 말해서 1583년의 일입니다. 사실 그가 중국으로 들어간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천주교를 중국인의 내면에 심기 위한 선교의 일환이었지요. 그런데 리치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당시 중국인들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중국의 전통 철학, 특히 주희의 신유학적 사유와 먼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희의 사유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천주교의 교리를 중국인들에게 그..
이토 진사이의 견해를 따르다 한편 정약용은 인의예지의 내용을 새롭게 이해함과 아울러 구체적인 공부 방법에서도 주희와는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주희는 네 가지 덕목이 모두 나의 본성 안에 들어 있으므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라고 권고합니다. 곧 미발의 함양 공부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공부는 공맹(孔孟) 같은 성인들의 자세가 결코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인의예지가 행사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그 덕을 이루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의예지가 본심(本心)의 완전한 덕이라고 알면, 사람의 일은 다만 벽을 향하고 마음을 들여다보고서 빛을 돌려 내면으로 비추도록 하여, 이 마음의 본체를 텅 빈 듯이 밝고 또렷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마치..
인의예지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 네 가지 단서야말로 내가 처음 깨닫게 되는 윤리적 욕구라고 이해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네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삼아 조금씩 확충해가면, 마침내 언젠가는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덕목들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곧 그 순서가 사단에서부터 사덕으로 나아간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정약용은 이런 관점에 따라 인의예지 덕목들은 구체적인 행동, 즉 행사(行事) 이후에 성립될 수 있는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 이후에 성립된다. 어린애가 우물에 빠질 때 측은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없다. 若其仁義禮智之名 必成於行事之後 赤子入井 惻隱而不往救則不可原其心而曰仁也 약기인의예지..
형이상학적 유학을 넘어 실천적 유학으로 정약용은 주희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매우 좋아했지만, 주희가 말한 미발의 함양 공부나 내면에 깃든 인의예지 본성에 대한 설명은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정약용이 공자와 맹자의 인의예지 개념을 다르게 해석했음을 말해주지요. 그는 공자가 말한 인(仁)을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인이란 한자는 사람 인(人)과 두 이(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정약용은 바로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지요. 옛 전서에 따르면 인(仁)이란 글자는 인(人)과 인(人)이 중첩된 문자였다. 아버지와 자식은 두 사람이고 형과 동생도 두 사람이며, 군주와 신하도 두 사람이고 목..
선을 알고 선을 실천하려는 윤리적 욕망 정약용은 타고난 본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마음 상태를 곧 도심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윤리적 행동이란 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지요. 성(性)이 드러난 것을 도심이라고 한다. 도심은 항상 선을 하고자 하고, 또한 선을 선택할 수 있다. 한결같이 도심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들으면 이것을 성을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성을 따른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다. 불의(不義)한 음식이 앞에 있을 때 입과 배의 욕구가 넘쳐나겠지만 마음이 고하길 “먹지 마라! 이것은 불의한 음식이다”라고 하면, 나는 그 고함에 따라서 음식을 물리치고 먹지 않는다. 이것을 성을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성을 따른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다. 『중용자잠(中庸自箴)』 1:3 性之所發 謂..
본성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다 인심도심(人心道心)의 공부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지요. 무릇 하나의 생각이 발동하면 곧바로 두려워하고 맹렬히 반성하면서 말한다. “이 생각은 공적인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인가, 사적인 인욕(人欲)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은 도심(道心)인가, 인심(人心)인가?” 세밀하고 절실하게 연구하여 이것이 과연 공적인 천리라면 배양하고 확충하며, 혹여 사사로운 인욕에서 나왔다면 막고 꺾어서 극복한다. 군자가 입술이 타고 혀가 닳도록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변론을 열심히 전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퇴계는 일생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에 힘썼다. 그러므로 이발과 기발을 나누어 말하면서 이 구분에 밝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학자가 이런 뜻을 ..
주희의 인심도심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다 그러나 정약용은 주희가 만년에 집필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보자 마음이 달라집니다. 정적인 함양 공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태 속에서 드러난 인심과 도심의 싸움으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한 주희의 관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급기야 주자학을 비판해왔던 정약용은 주희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만은 유학의 도를 잇는 핵심적인 관건이라고 극찬합니다. 맹자가 죽은 뒤 도(道)의 흐름이 드디어 끊어졌다. 전적들은 전국시대에 소멸되고 경전들은 진시황과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다. (…) 한나라 유학자들이 경전을 설명할 때 모두 문자상에서 훈고했을 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 소체(小體)와 대체(大體)의 구별에서는 어떤 것이 인성(人..
반주자학자, 탈주자학자 정약용은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해체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불교적 관념을 비판하면서 주자학, 곧 성리학을 왕조의 정통 이념으로 채택했지요. 그런데 이 주자학이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매우 경색됩니다. 다시 말해, 현실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사변적인 논쟁 수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변적인 논쟁을 통해서 불가피한 현실의 변화와 개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회 내부적으로 정통 이념인 주자학의 아성과 권위에 도전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이 매우 무력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터라, 주자학의 유..
경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은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바로 유명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입니다. 이 묘지명에서 정약용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 자신의 몸을 닦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다”고 역설했습니다. 정약용 본인의 포부를 들어보면, 그는 자기 수양을 위한 경학(經學)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경세학(經世學)을 모두 중시했음을 알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경세학은 근본으로서의 경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경학과 경세학을 본말(本末)의 관계, 다시 말해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했으니까요. 여기서 경학이란 유학 경전들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수많은 유학자들은 기존과 ..
경세학의 집대성자 정조(正祖)가 사망하고 노론(老論)이 다시 정국을 지배하게 된 1801년부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뜻하지 않은 유배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유배 기간이 18년 넘게 지속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고독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치권에서 망각되어 홀로 늙어갔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고독한 유배자였지요. 하지만 사상가로서 책을 통해 위대한 대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그는 절대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18년이 넘게 지속된 그의 유배 기간은 오히려 학문적으로 행운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이때 정약용은 기존의 사유 전통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자신의 사유를 가다듬고 숙고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로써 우리..
정약용(丁若鏞) 새로운 유학 체계를 꿈꾼 마지막 대가 조선의 가장 남쪽에 강진이란 마을이 있다. 그곳에 어느 유배자가 18년 동안이나 머물게 된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이다. 표면적으로 그의 유배 생활은 무척 고독하고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고달픈 유배 시기는 정약용이라는 조선의 한 유학자를 19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탁월한 유학 사상가로 만드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이곳 강진에 머물면서 정약용은 19세기 동아시아 사상계에 유행했던 여러 종류의 사유 경향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희의 신유학, 마테오 리치의 서학, 청나라의 고증학 그리고 일본의 고학 등 다양한 사유와 치열하게 논쟁한 끝에, 마침내 정약용은 자신만의 고유한 유학 체계를 집대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
더 읽을 것들 1. 『일본정치사상사연구』(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불행히도 일본의 탁월한 유학자 오규 소라이의 저술이 번역된 것은 아직 국내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아직까지는 매우 얕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간접적으로라도 소라이 유학 사상의 윤곽을 알려주는 책이 하나 있어 다행입니다. 그 책은 바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입니다. 물론 이 책은 저자가 일본의 근대성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만 소라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라이의 저술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까지 이 책은 소라이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할 것입니다. 2. 『도와 덕: 다산과 오규 소라이의 「중용」 「대학 해석』(..
정신적 스승 진사이를 비판하다 한편 성인이 만든 문명 제도를 따름으로써 덕의 개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소라이는 이제 선배 고학자인 이토 진사이마저 공격합니다. 공자까지도 선왕의 아류라고 생각했던 그가 공자를 성인으로 생각했던 진사이를 비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토 진사이 선생의 경우도 자신이 덕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주희와 진사이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본성과 덕이라는 개념의 명칭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진사이 선생은 『맹자』를 오독하여 사단을 확충하여 덕을 이룬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진사이 선생과 주희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변명(弁名)』 「덕육칙(德六則)」 如仁齋先生知德自負, 乃爭性與德之名耳. 亦誤讀孟子而至謂擴充四端以成德, 則與朱子何別? 여인재선생지..
자신의 기질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소라이는 공자를 윤리적인 완성자라기보다 좌절한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의 『논어』 독해가 다분히 정치철학적인 색채를 띤 것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라이는 『논어』 「양화(陽貨)」 편에 등장하는 공자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그의 정치철학적 구미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본성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은 서로 멀다. 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길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는 구절에서 상지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하우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지요. 이에 대한 소라이의 입장을 들어보겠습니다. 공자는 또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길 수 없다”고 했으니, 이것은 상지와 하우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모두 선으로 옮길 수 ..
오규 소라이는 공자까지도 넘어섰을까 모든 유학자들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며 동시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은 바로 공자입니다. 이런 공자를 부정하는 순간, 그 누구도 더 이상 유학자라고 자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라이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이 내세우는 선왕(先王)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라이가 말한 선왕이란 공자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리키지요. 소라이가 볼 때 공자는 문명 제도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잘 살리려고 노력한 정도의 인물이지요. 더구나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문명 제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군주의 자리나 대신의 자리에 오를 수 ..
각자의 덕이 있다 그런데 소라이의 선왕은 도를 제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도를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제력, 다시 말해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선왕은 문명의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최고 통치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이 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라이가 사용한 덕(道)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덕은 얻었다는 뜻이며, 사람마다 각각 도로부터 얻은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성으로부터 얻고 어떤 사람은 배움으로부터 얻으니, 모두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성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덕 또한 사람마다 다르게 된다. 도는 위대한 것이니, 성인이 아니라면 어찌 위대한 도와 자신이 합치될 수 있겠는가! 『변..
도(道)란 고대 선왕이 창안한 것 『태평책』에서 소라이는 성인(聖人)의 도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소라이가 여타의 신유학자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여러분, 유학자 정이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는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을 쓰면서 신유학 이념을 정초했던 유학자입니다. 그는 누구나 배우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우리의 내면에 선한 본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본성을 확충하기만 하면 모두 성인이 된다고 보았지요. 그런데 만약 맹자나 정이의 이야기가 옳다면,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성인들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소라이는 성인이라는 존재는 ..
내면에 갇히게 될 위험한 수양론 비판 소라이가 주희의 함양 공부만을 비판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희가 제안한 모든 종류의 수양론은 불교의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주관적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태평책(太平策)』이라는 소라이의 유명한 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구절씩 꼼꼼하게 읽어보도록 하지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의만 번거롭게 되어버려, 마침내 성인의 도(道)가 세상에서 정치를 하는 도(道)와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 유학자 무리들은 성인의 도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도라는 것을 제쳐두고, 천리, 인욕, 이기, 음양, 오행 등과 같은 신비한 주장들을 앞세웠으며, 지경, 주정, 격물, 치지, 성의, 성심 등과 같은 스님들에..
신유학의 수양론을 해체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주희가 제안한 성인이 되는 방법, 즉 그의 수양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지요. 외부 사물들에 내재하는 이(理)를 계속 탐구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단지 하나의 초월적인 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통찰하게 됩니다. 주희는 이러한 과정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강물 속에 있는 달그림자를 보면, 강물이 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강물들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러한 달그림자들이 결국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고 표현했던 정신 상태이지요. 그런데 주희를 포함한 신유학자들은 모두 인..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긍정 그러나 소라이는 주희가 제안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도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는 단지 개체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기질만을 긍정할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뒤에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지요. 기질이란 하늘의 성(性)이다. 인력으로 하늘을 이겨서 타고난 것을 바꾸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없는 일을 사람들에게 하도록 강요한다면, 마침내 그 사람들이 하늘과 부모를 원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성인의 도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매 경우마다 그들의 재질에 따라서 완성시켜주었다. 『변도』 14 氣質者, 天之性也. 欲以人力勝天而反之, 必不能焉. 强人以人之所不能, 其究必至於怨天尤其父母矣. 聖人之道必不爾矣. 孔門之敎弟子, 各因其材以..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희의 주장 주희는 인간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모두 동일한 이(理), 즉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이런 주희의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한 개의 달, 천 개의 강물, 그리고 천 개의 강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 이것들은 각각 초월적인 하나의 이와 다양한 개체들, 그리고 개체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를 상징합니다. 또한 천 개의 강물에 비유되는 다양한 개체들을 기(氣)라는 개념으로 불렀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주희는 이러한 초월적인 이를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부르고, 개체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유학의 기원으로 올라간 유학자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였습니다. 쓰나요시의 총애하는 가신(家臣) 가운데 야나기자와 요시야스(柳澤吉保, 1658~1714)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신 요시야스가 관할하던 영지에 해결하기 난감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농민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과 전답, 게다가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나마 그 농민은 어머니만은 버리지 않고 함께 동행했다고 합니다. 물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해야 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곧 병이 깊이 들었고, 농민은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東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요시야스의 영지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측은지심의 발견으로 유학의 수양론을 만들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라는 유명한 현대 사상가는 일본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을 어느 유학자로부터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바로 이토 진사이를 비판했던 오규 소라이라는 또 다른 고학파의 한 인물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오규 소라이를 중시했던 이유는, 그가 정치와 윤리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규 소라이는 유학 사상의 핵심을 윤리가 아닌 정치에서 찾았던 사상가이다. 그는 성인을 윤리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문명 제도를 창조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본 근대성의 문제를 규명한 학자들이, 오규 소라이의 생각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이라는 제도 개혁을 단행했던 메이지 천황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
더 읽을 것들 1. 『이또오 진사이』(이기동, 성균관대출판부, 2000) 주희의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을 넘어서 고학(古學)이라는 새로운 기풍을 탄생시킨 일본의 유학자는 바로 이토 진사이입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이토 진사이에 대한 연구서나 평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이토 진사이의 사상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 이토 진사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어맹자의(語孟字義)』가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원문도 부록으로 함께 실려 있습니다. 2.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와타나베 히로시, 박홍규 옮김, 예문서원, 2007) 이토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출현하게 된 이유로 일본 특유..
이토 진사이의 선견지명 진사이가 타자에 대한 인식에 눈뜨게 된 계기를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이야기만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대대로 교토에서 상인으로 지내온 진사이의 집안에서는 그가 주자학을 공부하려는 것을 보고 상인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실용적인 의사가 되라고 강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사이는 끝까지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큰 상처를 받았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를 사랑함이 더욱 깊은 사람은 나를 공격하는 것에 더욱 힘쓴다. 그 고초의 상황은 마치 죄인이 심문대에 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 1권 「송편강종순환류천서(送片岡宗純還柳川序)」.” 마치 심문대에 올라 죄를 반성해야 하는 죄인처럼..
충서에서 타자의 논리를 찾아내다 그러나 진사이는 ‘서’의 공부가 결국 타인의 고유한 욕망과 판단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공부는 자기 수양으로서의 충 공부를 통해서는 확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만 ‘서’의 공부가 실현되는 것이지요. 진사이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게 알지만, 남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하여 살필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남과 나 사이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마치 북쪽의 호(胡)와 남쪽의 월(越) 사이와도 같다. (…) 진실로 남을 대할 때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어떠하고, 그가 대처하고 행하는 것이 어떠한지를 살펴서,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그의..
공자의 충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진사이의 극찬에 따르면, 공자는 수많은 타자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 삶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최고의 성인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자가 ‘충서(忠恕)’라는 실천 방법의 가치를 설파했기 때문이지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진사이는 주희의 경 공부에서 공자의 충서의 방법으로 돌아섰고, 젊었을 때의 호 ‘교사이(敬齋)’를 공자의 인(仁)을 따라 ‘진사이(仁齋)’로 바꾸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가 중시했던 공자의 인은 충서의 방법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궁극적 가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서(恕)’이다. 『집주』는 정자를 인용하여 “자신을 다하는 것이 충이다”라고 했는..
맹자의 성선설을 다시 숙고하다 이제 진사이는 주희의 미발ㆍ이발 개념의 구조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해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어 너라고 모욕하면서 주는 음식도 받을 수 있고 동쪽 집의 처자를 유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수오지심이 있어 그것을 막기 때문에 그런 탐심을 함부로 풀어놓을 수 없다. 본성이 선하지 않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맹자가 성선(性善)을 논한 본래 취지이다. - 『어맹자의』 「성(性)」 人有嗜慾, 可以受嘑爾之食, 可以摟東家之處子. 然必有羞惡之心爲之阻隔, 不敢縱其貪心. 非性之善, 豈能然乎? 是孟子論性善之本也. 인유기욕, 가이수호이지식, 가이루동가지처자. 연필유수오지심위지조격, 불감종기탐심. 비성지선, 기능연호? 시맹자론성선지본야. 물의 본성은 아래로 흐..
맹자의 본성론을 다시 숙고하다 진사이는 주희의 경 공부와 그 공부를 통해 추구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리 상태를 비판했습니다. 그 비판은 주희가 인간의 마음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한 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희는 마음의 감정이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를 미발이라 하면서,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본성을 살펴보기 위한 경 공부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물론 주희는 마음의 감정이 이미 발동한 때를 의미하는 이발의 때에도 나름의 공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진사이는 애초에 공맹의 사유에는 미발과 이발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더구나 미발의 상태로 마음을 분석하면, 이는 마치 물이 땅속에 있는 경우를 논..
주희의 명경지수(明鏡止水)를 비판하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희의 내면적 경향의 공부법을 비판함과 동시에 진사이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유학에서는 이 표현을 쓸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는 불교와 노자(老子)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그 공부법이 바로 명경지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불교가 아무런 사유가 없는 맑디맑은 마음을 추구한다면, 노자는 무욕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모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추구한 점에서 동일한 관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진사이가 말한 내용을 살펴보지요. 불교와 노자의 가르침은 맑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무욕을 방법으로 삼는다. 공부가 무르익게 되면, 그 마음이 맑은 거울이 빈 것과 같고 잠잠한 물이 맑은 것과도 같..
주희의 경(敬) 공부를 비판하다 일본 고학파 유학을 창시한 이토 진사이는 먼저 주희의 경 공부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합니다. 주희가 강조했던 유명한 수양법의 하나인 경 공부는, 구체적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공부법이었습니다. 주희는 사적인 판단과 욕망을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을 응시하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비유를 든 것도 이런 상황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하게 그친 물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깃든 본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진사이는 주희의 이런 신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완전한 본성의 모습이 이미 내면..
의사의 길을 거부하고 유학자가 된 소년 어느 집안에 총명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온 가족은 장남으로 태어난 그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물론 그 아들이 출세하여 집안을 빛내주고 경제적으로도 지켜주길 원했지요. 가족은 아이가 당시 가장 안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던 의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가족의 바람을 충족시키는커녕 도리어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깊이 빠져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만 가까이합니다. 가족이 몹시 당황스러워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가족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까지도 아이를 불러 야단치고 훈계하면서 철학을 포기하고 의학으로 진로를 돌리라고 무던히도 타이릅니다.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자신이 원했던 철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로 1..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타자의 발견을 통해 공자를 되살리다 일본의 어느 시장 풍경이다. 혼잡한 시장을 거닐면서도 우리는 홀로 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사람들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데도 왜 고독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시장이라는 장소에서 우리가 다양한 타자들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낯선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들이 말을 걸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오직 그 경우에만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일본 고학파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는 바로 ‘타자’의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했던 보기 드문 유학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