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14 (27)
건빵이랑 놀자
싯달타와 예수의 유혹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원작소설을 기초로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감독이 연출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작자 카잔차키스는 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중적 실체성, 인성과 초인성의 갈등, 인간이면서 신이 되고자 했던 그 갈망, 그러한 것들은 항상 나에겐 풀 수 없는 심오한 신비였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신도였던 나에게 다가온 모든 기쁨과 슬픔의 근원과 원천적 고뇌는 영혼과 육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그리고 잔인한 싸움이었다. 나의 영혼은 이 두 개의 적진이 충돌하여 싸우는 각축장이었다. The dual substance of Christ ― the yearning, so human, so..
35세 청년이 붓다가 되다 자아! 내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하면 갑론을박은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此心卽佛]라는 선의 주장은 원시불교에는 해당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견성성불이니 차심즉불이니 하는 말은 곧 불성에 대한 논의들이 정립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싯달타가 부처가 되기 전의, 즉 불성이라는 개념조차 성립하기 이전의 사유를 소급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종의 모든 주장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이유’(historical reasons)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승의 번쇄한 논의들이 또 다시 불교의 본의를 가을 정도로 난립한 상태에서 생겨난 명쾌한 면도날..
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 셋째로 우리가 붓다라는 말을 쓸 때, 붓다는 이 모든 부처님들을 묶는 통일된 개념으로서의 추상적 속성, 즉 우리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불성(佛性, Buddha Nature, Buddhahood)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모든 붓다들은 불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특히 소승과 대승이 대립적으로 이해되면서 주로 대승계열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점점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어갔다. 그리고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든가 여래장(如來藏, thatāgata-garbha)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증폭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선종(禪宗)도 바로 이 불성에 대한 독특..
붓다인 싯달타 둘째, 붓다(Buddha)란 인도사상사에서 매우 넓은 함의를 지니는 일반명사로 쓰여진 말이었으며, 고타마 싯달타라는 역사적 개인이 독점한 칭호는 아니었다. 붓다란 표현은 예를 들면 쟈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Mahāvīra)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실 붓다의 사후 초기교단에 있어서는 싯달타를 부르는 칭호로서 ‘붓다’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제1차ㆍ제2차 결집 때까지만 해도 가장 넓게 쓰인 말은 ‘복스러운 성자’라는 의미의 바가바트(bhagavat, bhagavan)나 평범한 ‘선생님’이라는 의미의 샤스뜨리(śāstṛ)였다【Frank E. Reynolds and Charles Hallisey, ‘Buddha,’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New York :..
부록 2. 소승과 대승의 대반열반경 이상의 대화는 팔리어삼장 중 장부(長部, Dighanikāya)의 제16번째에 속하는 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nta)의 내용 중에서 발췌하여 그 순서를 바꾸어 윤색한 것이다. 독자들이 받는 느낌의 강화를 위하여 원전의 의미맥락이 손상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드라마타이즈시킨 것이다. 이 팔리 니까야의 『대반열반경』에 해당되는 한역장경으로는 『장아함경(長阿含經)』 卷二~四에 수록되어 있는 『유행경(遊行經)』을 들 수 있다(『大正』1-11~30). 후주(後奏)의 불타야사(佛陀耶舍)와 측불염(竺佛念)이 함께 번역했다. 『열반경』은 소승계열과 대승계열의 전승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의 편집 의도는 매우 다르다. 남방 상좌부의 전승인 이 팔리..
색신과 법신 우리말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속담이 하나 있다.“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붓다는 죽기 전에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평생 설하고 가르친 법(法)과 율(律)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죽은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그리고 또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서품」(序品)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스승 석가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세월은 극히 짧은 것이었다. 육체(肉體)는 비록 갔지만 그 법신(法身)은 살아 있다. 마땅히 그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하리…… 여래의 법신(法身)은 썩는 법이 없으니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끊어지지 않으리.釋師出世壽極短, 肉體雖逝法身在, 當令法本不斷絕…… 如來法身不敗壞, 永存於世不斷絕. 『增壹阿..
붓다의 세가지 의미 우리가 보통 ‘소’(cow)라고 하면 그 소는 대강 대별하여 다음의 세 가지 뜻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는 첫째 갑돌이네 집에 있는 그 소, 즉 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일 것이다(a particular cow). 둘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소,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일 것이다(all Cow). 그리고 셋째로는 모든 소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소됨, 그러니까 소의 모든 속성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cowness). a particular cow 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 all Cow 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 c..
길상과의 대화 자아! 이제 싯달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른편에서 풀을 베고 있던 아동은 싯달타에게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서있었다. 그가 들고 있었던 풀은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초록색에, 공작새의 꼬리와도 같이 부드럽고 연하여 그 사랑스럽기가 마치 카칠린다까(迦尸迦衣)새의 깃털로 만든 아름다운 비단결과도 같았다. 그 풍겨 나오는 그윽한 향기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감돌면서 자오록하였다. 그 미묘한 풀을 들고 있는 아동에게 싯달타는 다가갔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뇨?” “저의 이름은 길상(吉祥)이외다.” “그것 참 신묘롭구나! 나 자신 길상함을 얻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 길상함을 여기 그대로부터 얻는 것 같구나, 이름이 길상인 그대가 내 앞에 섰으니 이제 나는 틀림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
인도신화와 단군신화 이윽고 싯달타는 핍팔라나무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때 싯달타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과거의 보살들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아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였을꼬? 이때 우연찮게 옆에서 어느 아동이 싯달타의 우편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신화적 기술에 의하면 이 아동은 바로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석제환인의 원어는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Ṡakra-devānāṃ Indra, 釋迦提婆因陀羅)인데, 이때 샤크라(釋)는 ‘釋迦羅’라고도 음사하는데 ‘위용이 있다.’ ‘힘이 있다.’ ‘강하다’는 뜻으로 신에 대한 존칭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여기 ‘뎨환’(帝桓)은 ‘deva’에서 온 것으로 하늘을 말하는 것이요.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인 (因)은 인드라(In..
싯달타와 수자타 이때, 허기의 극도에 달한 고독한 싯달타에게 우루벨라(Uruvelā, 優留毘羅)【‘Uruvila-grama’로 불리기도 하고, ‘優婁頻螺’로 한역되기도 한다. 다양한 표기법이 있다】 마을로부터의 한 아리따운 처녀가 등장한다. 그 처녀가 우연히 강가나 강 주변의 수풀로 오게 되었는지, 싯달타가 우루벨라마을로 들어가 공양을 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의 기술도 경에 따라 복잡다단한 전승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녀의 이름은 불교도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수자타(Sujata, 須闍多)! 싯달타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을 이룰 수 있는 최초의 에너지를 제공한 유미(乳糜, madhupayasa) 죽을 공양할 수 있는..
고행 단념한 뒤 싯달타의 행동 고행을 중단하고 그는 우선 체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물을 좀 마시고 잠을 청하였다. 깊은 잠을 좀 자고 나니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약간의 힘이 생겼다. 그래서 싯달타는 생각하였다. ‘나의 육신은 너무도 피폐해 있다. 이 육신으로는 도저히 도를 성취할 수 없다. 비록 신통력으로 몸을 회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일체 중생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니 부처가 도를 구하는 법이 아니다. 이제 나는 육신의 힘을 얻기에 좋은 음식을 받아 체력을 회복하여 다시 무상의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리라!’ 이때 허공의 제신들이 싯달타가 마음 속으로 이와 같이 작정한 것을 알고 그에게 속삭였다. “존자이시여! 굳이 음식을 구하실 필요가 없습..
싯달타의 고독 그것은 고독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한 평범한 사나이의 서글픈 고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고독이 아니었다. 자신의 중도의 깨달음의 계기가 도저히 그 친구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소외된 느낌이 그 고독감의 출발이었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모든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궁극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홀로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던져주는 황량한 고존(孤存)의 고독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전기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다섯 친구들이 싯달타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몄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싯달타 자신이 중도의 깨달음을 득한 후에 주체적으로 그들을 멀리 했을 것이다. 최소한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을 이..
고행의 단념과 안아트만 그런데 내가 여기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든 미스티시즘의 갖가지 형태들이 표방하는 ‘합일’(合一)이라는 말의 무의미성, 신화성, 기만성에 관한 싯달타의 통찰이다. 도대체 ‘합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도를 통했다 하는 사람들이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비경 속에 주ㆍ객이 통합되는 합일의 경지를 체득했다’고 지껄이는 얘기들을 수없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합일이라는 말처럼 기만적인 말도 없다. 나는 우주와 합일되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신적 인간으로서, 전지전능한 인간으로서 경배해야할 것인가?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과 합일이 되었다. 그래 정말 합일이 되..
신비주의적 합일 최근, 프린스턴 수학자 죤 내쉬(John Nash)의 생애를 다룬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라는 영화가 말해주듯이, 수학적 환각과 노벨상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와도 같을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적법적 후계자이다. 플라톤 자신이 여기저기서 파르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에게 진 빚을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고백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희랍인들의 우주론적 구상을 추상적 사유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적 사유(abstract thought)는 외부의 사실에 관계없이 작동하는 마음의 원리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감관적 세계를 무시하고 사유적 세계만을 리얼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철학의 측면이 피타고라스의 수학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었고, 플라톤의..
합일과 피타고라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대한 철학이 이미 인도에 성숙되어 있었다면 도대체 싯달타라는 청년이 새롭게 얘기할 건덕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윤회와 해탈과 업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아니 한가? 과연 싯달타가 말하는 중도란 무엇이며, 새로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ātman)이 하나라는 이 명제 자체로도 기독교와 같이 신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복속이나 복종,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로만 설정된 의미맥락에서는 매우 이단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충분히 서구의 유일신관과는 다른 동방적 신비주의의 원융(圓融)한 냄새를 풍긴다. 삼위일체를 ..
브라흐만 브라흐만(Brahman)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 과학적 세계관에서 살고 있다. 신ㆍ불신을 막론하고, 즉 믿거나 말거나,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과학의 법칙 같은 것을 믿는다. 과학의 법칙이란 우주의 나타난 모습들의 배후에서 그것을 작동시키고 있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들은 막연하지만 어떤 전체적 통일성 속에서 연관되어 작동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것을 믿는 동시에 우리는 예외 없이 과학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도 이 우주가 우리의 감관(感官)에 나타난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관에 나타난 현상(phenomena, appearance)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 실재(ultimale reality)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궁..
아트만 아트만(ātman)이란 뭐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나’라는 말이다. 그것을 한역하여 ‘아’(我)라고 했는데 범아일여론의 ‘아’가 곧 이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본시 ‘숨’(息)을 의미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숨쉰다는 뜻이다. 그 숨, 그 기의 주체를 아리안계 고대인도인들은 아트만이라 불렀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의 서재에 있을 법한 아무런 『독한사전』을 하나 펼쳐서 ‘atmen’이라는 동사를 찾아보면, ‘숨쉬다, 호흡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독일어의 ‘아트멘’과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은 완전히 동근이다.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같은 계열의 단어이다. 히틀러가 자기네 게르만족만이 아리안의 적통을 이어받은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신..
신비주의 여기에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죽음도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우리 삶 속에 있다.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싯달타가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위하여 그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싯달타라는 한 인도청년이 깨달았던 것은 중도(madhyamá pratipad)였다. 안락의 방법으로도, 선정의 방법으로도, 고행의 방법으로도 접근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싯달타가 고행의 극한에서 고행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속했던 거대한 문명의 체계에 대한 일대 ..
고행이란 무엇인가? 그 다음에 고행이란 무엇인가? 여기 이 고행이라는 논의를 하기 전에,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문화적 벨트의 대세를 놓고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한 한자문명권의 사유 속에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육체(body)와 영혼(soul)이라는 이원론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논의가 우선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그 신화적 세계로부터 심층구조를 논구해 들어간다면 물론 영과 육에 해당되는 어떤 분별이 있기는 하겠지만, 중국적 사유의 대세는 애초로부터 영육의 문제를 중심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고전한문 자체가 영육이라는 이원론을 중심으로 어휘형성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또 문법적으로도 영육이원론을 뒷받침할 어떤 구조를 제시하지 않는다. (주어 중심의..
선정지상주의 그러나 이 중도란 것은 매우 단순한 일상적 통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선정(禪定)에 빠져있는 불자들, 특히 좌선을 적통으로 삼는 선불교(Zen Buddhism) 전통 속에서는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보리수 밑에서 대각ㆍ성도를 했다는 싯달타의 모습을 생각할 때, 항상 가부좌 틀고 눈을 지긋이 감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요가수행자적인 선정의 성자의 모습만을 중도의 요체의 구현태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후기 대승 불교의 아이코노그라피(iconography, 圖像學)가 만들어놓은 매우 불행한 오류 중의 하나이다. 즉 대각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있으면서 한(寒)ㆍ서(暑)를 인종(忍從)하고 버티어 내기만 하면 어느 결엔가 후딱 찾아오는 어떤 황..
중도와 뉴 웨이 중도란 무엇인가? 가운데 길인가? 가운데 길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위한 고통은 결국 목샤(mokṣa, 解脫)라고 하는 자신의 출가의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어리석은 소치였다. 고행이 나를 벗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윤회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의 기쁨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이를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이뇨? 하나는 모든 애욕에 탐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인 범부의 짓이다.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을 일삼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니, 이..
부록 1.5. 중도에 관한 인용부분 여기 ‘중도’(中道)에 관하여 인용된 부분은 붓다가 사르나트에 와서 다섯 비구를 만나 설법한 초전법륜 중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중도의 자각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팔리어삼장은 근세에 불교남전지역에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 손길이 뻗치면서 그들 유럽인학자들의 손에 의하여 새롭게 정리되고 그 유니크한 가치가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824년 클러프(B, Clough)에 의하여 최초의 팔리어문전이 출판되었고, 1826년 뷔르누프(E. Burnouf)와 랏센(Ch. Lassen)이 공동으로 『팔리어연구』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855년 파우스뵐(V. Fausböll)이 학술적 가치가 있는 최초의 원전으로서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을 출판함으로써 세계 학술계에..
부록 1.4. 한역대장경과 티벹장경 팔리삼장, 한역대장경, 티벹장경은 제각기 특색이 있다. 팔리삼장의 오리지날 한 가치는 아무리 부언하여도 그 위대성을 다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이 팔리삼장의 간결성과 오리지날리티에 비한다면 중국의 한역대장경은 초기불교를 넘어서서 대승경, 대승률, 대승론 등 그 외로도 잡다한 형식을 다 포괄했을 뿐 아니라 인도인의 저작뿐이 아닌 중국인, 한국인의 저작까지 포함하여 매우 잡다하고 번쇄하고 방대하다. 전기, 목록, 여행기 등의 장르까지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세기로부터 1천여 년에 걸친 번역이 중복되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들어가 있으므로 그 역사적 전개를 파악하는 데는 매우 중요하다. 대장경의 편찬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삼장(三藏)의 체계를 ..
부록 1.3. 팔리어삼장에 대해 소승의 상좌부계열에서 성립한 결집장경으로 삼장(三藏)을 갖춘 유일한 경전이 소위 ‘팔리어삼장’인 것이다. 보통 우리가 대장경을 영어로 ‘트라이피타카’(Tripitaka)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 개의 바구니라는 팔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세 개의 바구니란 무엇인가? 그것은 율(律)과 경(經)과 논(論)을 말하는 것이다. 율이란 승가를 유지하면서 생겨나는 여러 규칙이나 계율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경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설파한 내용들을 담아놓은 것이다. 논이란 부파불교시대로 들어가면서 이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후대의 제자들이 논구한 주석이나 독립논설이다. 물론 논은 경이나 율에 비해 그 권위가 떨어질 것이지만, 팔리경전의 특징은 삼장의 체제를 정확하게 유지했다는..
부록 1.2. 초기불교의 흐름 붓다의 사후 100년경 바이샬리(Vaiśalī)에서 소위 2차결집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불교교단 내의 사소한 규칙의 해석의 문제, 예를 들면 구걸해온 소금을 좀 축적해두어도 되느냐? 밥 먹는 시간을 좀 느슨하게 해도 되지 않느냐? 또는 깨달은 자라 해도 무지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보수적인 정통성을 그대로 고집하려는 상좌부(上座部)【그 회의에서 위에 앉은 원로들이었을 것이다. 팔리어로 Theravādins, 산스크리트어로 Sthaviravādins라고 한다】와 보다 대중적인 입장에서 느슨하게 해석하려는 승가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인 대중부(人衆部, Mahāsāṃghikas)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가 생겨나, 교단이 분열하게 되는데, 이 분..
부록 1.1. 암송작업의 체계화 붓다의 생애에 붓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경전에서 추적하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다. 예수가 아람어(Aramaic language)라는 당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속말을 한 사람이라면, 붓다 또한 지금의 비하르 지역(간지스강 중류지역)의 통속어인 마가다어(Magadha language)를 말했던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아람어 이야기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코이네(κοινὴ)라는, 고전 희랍어가 대중화되고 보편화되면서 생겨난 공공언어였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산스크리트어나 서북인도의 팔리어, 그리고 다양한 쁘라끄리뜨어(Prākrit languages, 통속어)로 전승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도는 양피지나 종이와 같은 필기도구가 발달하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