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03/17 (33)
건빵이랑 놀자
보드베가스의 세자매 보드베가스의 아침 겸 점심은 날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ㆍ국ㆍ김치였다. 너무도 단순한 식단이었지만, 너무도 행복한 식단이었다. 남군은 여행동안 보플거리는 남방의 알랑미를 아주 못견뎌 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기름기 없는 쌀의 묘미를 잘 안다. 그런데 남군은 계속 선 밥을 먹으니까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보드베가스의 딸들에게 쌀 물을 좀 많이 넣고 오래 푹 삶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알랑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쌀밥처럼 푹 익은 쌀밥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남군은 좀 진 듯한 밥을 먹으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나는 좀 게짐짐했지만 미역국을 실컷 들이키면서 목젖의 카랑한 기운을 쫓아내느라고 안깐힘을 썼다. 보드베가스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도여행 매..
찢겨진 돈뭉치 그런데 또 다시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에는 10루삐권이 있는가 하면, 20루삐권, 50루삐권, 100루삐권, 500루삐권이 있다. 인도인들은 ‘노’(No!)를 말하는 법이 없다. 무슨 부탁을 하든지 된다고만 하지 안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알아새겨야 한다. 안된 일에 대해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즉 그들이 말하는 ‘옛스’의 ‘노’적인 측면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놈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 인도사람들은 비율적으로 다리가 엄청 긴 편이다. 그래서인지 변기의 위치가 우리나라보다는 매우 높게 달려있다. 좋은 변소에서는 손을 씻고 나면 종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럼 돈을 주어야 한다. 피곤할 땐 그 사람은 변소바닥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인도인..
환전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군은 이 호텔을 델리에서 예약했어야 했고 이미 대금은 선불해놓은 상태였다. 칼라차크라 행사 때문에 숙박시설이 모두 만원이었던 것이다. 인도인의 수중에 어떤 돈이든 한번 들어가면, 그것이 다시 나오리라는 생각은 해서는 아니된다. 바라나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중에 인도돈이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서 미화 한 1500불 정도를 바꿀 요량으로 인도의 국립은행(State Bank of India)엘 들어갔다. 국립은행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수표를 카운터에 쓰고 있는데 갑자기 기관단총을 든 경찰들이 날 둘러싸고 어디로 가자는 것이다. 왜 그러냐니까 조사할 게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난 흉악한 도둑놈으로 몰린 느낌이었다. 영문을 알아보니 나의 여행자수표에 문제가 있었다..
사암 한기 속의 꿈 2002년 1월 8일이 드디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기나긴 사색의 하루였다. 주욱 사지를 뻗고 편안케 자려는데 예상했던 대로 한기가 엄습했다. 기분나쁜 사암의 한기가 살기(殺氣)로서 뼈 속까지 쑤시고 들어오는 것이다. 몸서리쳐지는 음산한 느낌이었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갑자기 엄마하고 마포에 새우젖을 사러갔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마포 어귀에 늘어선 새우젓 독… 뭔가 그런 몽롱한 느낌 속에 갑자기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달라이라마께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그의 발 밑에 두 번이나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서 엎드린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다. 난 얼굴을 치켜 들면서 달라이라마님께 여쭈었다. “제 편지를 받아 ..
라면이 살린 목숨 “최영애 선생님께 중국어를 들었어요.” 어딜 가나 한국여행객들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연대 인문학부 4학년의 여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도 남루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도올서원 10림입니다.” 남녀 커플로 온 젊은이들이 또 인사한다. 그 남학생이 도올서원에서 나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동안 도올서원에서 한 3천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내었다. 요즈음 내 인생의 보람이란 이들에게 거는 기대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젊은이들의 품성을 길러주고 지식을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혹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불교순례객들..
혜초스님의 감회 탑 주변으로 높게 쌓아올린 탑돌이를 할 수 있는 4각형의 길이 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해서였는지 어느 린포체가 무제한 촛불공양을 했다고 했다. 밤에 오는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양초를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초에 불을 붙여 사방에 켜놓는다. 영롱한 촛불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즉상입의 장엄한 인드라망의 화장세계(華藏世界)였다. 나는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을 방문했던 우리의 선조 혜초스님께서 남기신 5언 싯귀가 생각이 났다.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마하보리사를 내 이역만리가 멀다하지 않고 왔노라! 이제 저 카시에 있는 녹야원을 어찌 멀다 하리오?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단지 걸린 길들이 험한 것이 근심일 뿐, 가고자 하는 내 뜻은 바람에 휘날린 적이 없노..
아쇼카와 마하보디 스투파 싯달타가 앉아 있었던 그 보리수나무가 지금도 있는가? 아쇼카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분명 그 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아쇼카는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기 아들 마힌다(Mahinda 혹은 Mahendra)와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Saṅghamitta)를 팔리어삼장을 외우는 법사들과 함께 보낸다. 아쇼카는 이 보리수나무가 박해받을 운명을 직감하고 그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의 손에 이 보리수나무 묘목을 하나 쥐어주었다. 보리수나무에 담긴 지혜도 함께 전파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곳 보드가야 보리수가 이교도들의 박해로 잘려나가자, 상가밋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심은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또 다시 이 곳으로 옮겨다가 심었다는 것이다. 오..
싯달타의 체취를 간직한 아쇼카 나를 감동시킨 것은 4대성지 그 자체가 아니라 우뚝 우뚝 서 있는 아쇼카석주였다. 그것은 너무도 리얼했다. 그것은 너무도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런데 또 경악할 만한 사실은 이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조차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우리가 붓다의 생애의 연대를 고증할 때 현재 쓰고 있는 자료가 모두 아쇼카를 기준으로 해서 역산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디파왕사』(Dīpavaṃsa)와 마하왕사』 (Mahāvaṃsa)에 의하면, 붓다는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보다 298년 먼저 태어났고 218년 먼저 서거했다는 것이다.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는 326 BC로 되어 있으므로 붓다의 생몰은 624~544 BC가 된다. 그런데 희랍측의 자료에 의하면 아쇼카왕의..
아쇼카의 석주 인도는 역사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소위 연대, 크로놀로지(chronology)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가치관은 세속에 있질 않았다. 항상 이 세간을 벗어나는 해탈(解脫, mokṣa)에 있었으며 그것은 시간의 초월이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기의 생애를 무한한 억겁년의 윤회의 한 고리로 파악하기 때문에 지금 현 생애의 정확한 시점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연대나 저자(author)의 개념이 박약했다. 진리는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특정적으로 독점하여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거지들이 계속 따라붙으면 “다음에 보자!” “다음에 주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
스투파와 차이띠야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33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부처님 뼈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스투파라 부르고, 부처님 뼈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차이띠야라고 부른다.有舍利者名塔, 無舍利者名枝提. 『大正』22-498. 이러한 『마하상기카 비나야』(Mahāsāṃghika Vinaya, 摩訶僧祗律)의 언급이 정확한 구분기준으로 지켜졌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뼉다귀를 얻지 못한 많은 탑들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방증해 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탑의 성격이 부처님의 무덤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의미로부터 점점 추상화되고 형식화되고 상징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시 스투파(stūpa)는 승가와 특별한 관련이 없이,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독자적으로 유지된 오픈 스..
아이콘과 비아이콘 2002년 1월 8일밤, 나는 마하보디사원의 스투파(stūpa)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기나긴 논의의 결론은 이러하다. 소승ㆍ대승을 막론하고 원시불교의 모든 종교운동은 스투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투파란 무엇인가? 스투파는 탑이다. 탑이란 무엇인가? 탑이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처님의 무덤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향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스투파는 원시불교에 있어서 비아이콘적인 형상(aniconic imagery)으로서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물론 스투파 외로도 부처님 발자국(footprint)이라든가, 보리수나무(the Bodhi Tree)라든가,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금강보좌(the Adamantine Seat, ..
탑중심구조와 불상중심구조 감은사지의 가람배치는 향후의 모든 가람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탑의 순수조형성으로서의 전환은 동아시아문명에 상륙한 스투파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우선 스투파를 스투파이게 하는 그 핵심적 의미체인 싯달타 육신의 뼉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이미 대승불교 초기로부터 반야사상의 흥기는 스투파공양에만 집착하는 미신적 성향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켰다는 것, 그리고 중국인의 현실주의적 감각은 스투파라는 추상체보다는 인간중심적인 불상의 형상을 선호했다는 것,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권에 있어서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과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 등등의 이유로 스투파는 『대반열반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원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를 통해 쌍탑의 구..
한국 탑문화의 발전과정 이러한 석탑의 성격과 의미의 변화는 가람배치 전체에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초기부터는 이미 쌍탑식 가람배치가 모든 사찰의 디프 스트럭쳐로 자리잡게 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망덕사(望德寺)의 쌍목탑체제를 거쳐 감은사(感恩寺)의 쌍석탑체제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쌍탑의 존재와 더불어 3금당체제 또한 1금당체제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1탑1금당의 구도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탑이 두개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 1탑의 구조에 비하여 그 탑중심 배치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금당이라는 사실은 곧 1탑의 중심구조자리에 금당이 환치되면서 쌍탑은 그 금당을 보좌하는 순수한 조형적 건조물로서 개념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목탑을 본뜬 석탑의 출현이 만든 변화 미륵사지, 뒤의 삼각산이 곧 미륵하강의 용화산 금당이란 후대의 권위주의적인 대웅전과는 대비되는 소박한 불당의 개념인데, 당시에는 금동부처를 금인(金人)이라 불렀고, 그 금인이 앉아있는 집이라 해서 금당(金堂)이라 이름한 것이다. 금당의 존재는 이미 불상중심의 대승불교 건축개념이 도입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가람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탑이며,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금당은 탑의 부속건물적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탑중심의 체제가 아직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지었다 하는 미륵사는,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목탑중심체제에다가 양옆에 목탑의 복제양식인 석탑을 세움으로써 스투파 개념의..
탑중심의 가람배치 속리산 법주사에 가서 팔상전 5층목탑을 보면서 누가 산치대탑 스투파를 연상할 것인가? 팔상전 5층누각 꼭대기를 잘 살펴보면 그 정수리에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복발(覆鉢)이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의 장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꼭대기의 눈꼽만한 장식품들이 산치대탑같은 스투파가 퇴화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 왼쪽 사진이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인데 이것이 곧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이다. 이 팔상전을 미루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알 수 있고, 황룡사 9층탑을 미루어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의 원형인 9층 목탑의 구조를 알 수 있다. 황룡사(皇龍寺)의 가람배치를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9층목탑이 중심이고 그 위로 동(東)ㆍ서(西)ㆍ중(中)의 세 금당(金堂)이 자리잡고..
전탑, 목탑, 석탑 우리에게 친근한 예로써 이 스투파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 바로 경주 분황사(芬皇寺)탑이다. 우선 분황사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일반형태와는 달리 모전석(模塼石)이긴 하지만 작은 벽돌들을 쌓아올렸다는 것과, 그 형태가 중국에서 발전된 누각의 형태가 아닌 돌무덤 스투파의 원형에 가깝게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황사의 발굴터를 보면 그 전체 가람의 배치가 1탑중심이라는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어야할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하는 것은 석탑이지만, 그것은 실상 순수한 석탑이 아니고 목탑의 형태를 돌로 옮겨놓은 것이다. 목탑이 석탑화되는 가장 초기의 장중한 실례가 바로 익산의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이며, 이 석탑의 발전적 형태로서의 단..
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이러한 종교적 사상의 근원을 떠나 순수하게 건축학적으로 미륵사를 고찰하면, 황룡사의 일목탑삼금당(一木塔三金堂)의 체계를 일목탑이석탑삼금당(一木塔二石塔三金堂)의 체계로 변조시키면서 생기는 파격성을 회랑을 둘러침으로써 완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원(一院)의 구조는 탑일금당(塔一金堂)의 가장 보편적인 백제가람전통을 계승한 것이 된다(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정림사지가 모두 일탑일금당의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목탑이석탑(一木塔二石塔)의 삼탑(三塔)체제는 매우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목탑이 석탑화되는 최초의 계기를 형성함으로써 향후의 탑의 새로운 운명을 결정지었다. 목탑의 의제(擬製)로서의 석탑의..
부록 8.1. 미륵사에 세 개의 탑이 조성된 이유 익산의 미륵사는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r, 600~641) 때 창건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결과가 일치되므로 조성연대는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이 미륵사 두 개의 석탑 중의 서탑이다. 그리고 최근 1992년에는 현존하는 서탑에 준하여 남아있는 부재들을 활용하면서 9층의 동탑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최근의 발굴결과, 서탑과 동탑 사이에 거대한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중앙 1목탑 양쪽 2석탑의 뒤쪽에는 각기 3개의 금당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금당 사이로 회랑이 있어 1탑1금당이 하나의 독립된 사원을 이루고 있는 느낌을 준다..
스투파와 사당 스투파에 대한 의역(意譯)은 없었는가? 물론 있다. 그 뜻을 풀어 뭐라 했는가? 스투파를 의역한 예로써 ‘방분’(方墳), ‘대취’(大聚), ‘취상’(聚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무덤의 형태와 관련된 것이다. ‘대취’(大衆)라는 것은 벽돌을 크게 쌓아올렸다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에 관한 의역 외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스투파의 의역이 바로 『법경경』(法鏡經)에 나오는 ‘묘’(廟)라는 표현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는 아예 ‘부처님의 종묘[佛之宗廟]’라고 표현하고 있다【이러한 문제에 관한 매우 상세하고도 중요한 논의로서 우리가 꼭 봐야 할 논문은 사계의 대석학인 히라카와 아키라의 하기서를 들 수 있다. 여기 그 자세한 내용을 다 소개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스투파와 탑 원래 ‘탑’(塔)이라는 글자는 중국에 없었다. 선진(先秦)문헌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진(晉)나라 시대에 오직 ‘스투파’라는 말을 음사(音寫)하기 위하여 조자(造字)된 것이며, 남북조 시대의 제(齊)ㆍ양(梁) 간에 유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20세기 들어와서 ‘커피’라는 말 때문에 ‘가배’(咖啡, 카훼이)라는 요상한 글자가 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포박자』(抱朴子)를 쓴 갈홍(葛洪, 283~343)의 『자원』(字苑)에 그 첫 용례가 보인다. 『설문신부』(說文新附)에 ‘탑이란 서역의 부도(浮屠, 무덤)를 말하는 것이다[塔, 西域浮屠也].’라고 명료히 규정되어 있다. 중국문헌에 스투파는 솔탑파(率塔婆) 등, 다양한 음사가 있다【卒塔婆, 率都婆, 率都波, 窣覩波..
스투파와 무덤 매장이나 화장이나, 후대에 기념될 만한 훌륭한 인물의 경우, 봉분을 가진 분묘를 만든다고 하는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대로다. 다시 말해서 스투파란 단순히 화장의 결과로서 생기는 묘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시 묘는 지상의 봉분이 없었다. 봉분이 있는 묘는 산동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를 그 효시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파도 지상에 높고 큰 봉분을 만든다. 그런데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흙으로 만든 봉분은 그 형태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납작한 벽돌로 쌓아올린다. 그러나 그 외형적 형태는 우리나라 봉분의 묘와 대차 없다. 봉분(覆鉢, aṇḍa)을 기단(基壇, medhī) 위에 올려놓고, 봉분의 꼭대기에는 옛날에 귀인들에게 우산을..
사리 8분 종족 인간 싯달타의 화장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거행되었을까? 『대반열반경』에 묘사되고 있는 싯달타의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南傳』7-157~8.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 p.167.】 마하카사파 존자와 5백명의 비구들이 모두 세존의 유해에 예배하니, 세존의 유해를 안치한 화장나무는 저절로 불이 피어나 타올랐다. 이렇게 해서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유해의 겉살ㆍ속살근육ㆍ힘줄ㆍ관절즙이 모두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하게 타버리고 단지 유골만 남았던 것이다. 마치 버터나 참기름이 타고 난 다음 재나 그을음이 남지 않는 것처럼,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을 때도 겉살ㆍ속살ㆍ근육ㆍ힘줄ㆍ관절즙 등이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타버리고 오로지 유골만 남..
사리의 환상 우리나라 불자들간에 성행하는 묘한 습속이 하나 있는데, 다비식에서 사리를 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가 많이 나올수록 그 스님의 도력이 컸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사리가 많을수록 죽어서도 고승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정말 부끄러운 요습(妖習)이다. 다비의 본래적 의미는 시체를 완벽하게 무화(無化)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사리’에 대한 개념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사리라는 것은 뻑다귀까지 완벽하게 소진시키고 난 다음에 남은 어떤 미네랄의 결정체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의 몸이란 이러한 결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고승의 증표가 아니라, 살아서 병약했거나 울결이 심했거나 비평형의 치우친 상태가 심했다는 ..
인류 보편의 장례예식인 화장 고대로부터 이 화장이라고 하는 풍습은 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원전 1천여 년경부터 희랍인들은 정교한 화장의 예식을 개발시켰다. 『일리아드』에 보면 아킬레스에게 죽은 아들 헥터의 시신을 성대하게 화장하기 위해, 황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몰고 와서 아킬레스에게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이야기 등, 화장과 관련된 갖가지 이야기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 지상의 최대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켄타우로스의 속임수에 남편을 곤경에 빠트린 부인 데이아네이라가 자결하자, 헤라의 간계에 12가지 고난을 견디어냈어야만 했던 험준한 생애를 화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스스로 마감해 버린다. ▲ 대반열반사 주변의 휴지를 줍고 있을 때였다. 한 스리랑카의 스님이 나에게 말없이..
빈과 장, 화장과 매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적 습관에 화장(cremation)이라는 것이 없고, 매장(interment)만 있다고 생각하며, 화장은 불교를 통해서 들어온 매우 독특한 인도의 풍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념 속에 화장은 시신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타버려 한줌의 재가 되는 것이요, 또 봉분이라든가 무덤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화장과 매장의 가장 큰 차이는 무덤의 유ㆍ무로써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화장습관(modern cremations)에서 온 인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장례습속(funeral rites)으로서 화장과 매장은 일견 구분되는 것이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
4성지의 탄생 상기의 『대반열반경』의 붓다와 아난다 사이의 대화는 바로 이러한 원시불교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주는 경전의 근거인 것이다. 붓다는 자기의 신체적 죽음을 감지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다. 변해가는 것을 어찌 머물도록 하겠는가?”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진리에만 의존하여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살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이때 진리란 법(法)이며 앞서 말한 담마(팔리어, dhamma)라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따오(Tao), 즉 도(道)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담마라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증이 없다. 담마의 구현체로서 붓다라는 실존인물이 항상 곁에 있을 때는 좋았다. 그런데 이런 구현체가 갑자기 사라지면 ..
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붓다의 육신과 진리 남전 『대반열반경』 제5송품(第五誦品)에 보면, 붓다는 히란냐바티강(凞連禪河)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외곽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침상을 준비하고 죽음의 채비를 차린다. 이때 한쌍의 사라(沙羅)나무가 아직 꽃필 때가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온통 꽃을 피워 여래의 전신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 호곡하는 아난다. 쿠시나가르 열반상 하단 조각. 이때 아난다가 슬픈 눈빛으로 숨을 거두려하는 붓다를 쳐다본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애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아쇼카와 진시황 아쇼카가 지배한 인도는 현실적으로 당대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강성한 군주국가였다. 그리고 인도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의 정치는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마의 이상을 통해 다양한 인도대륙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새로운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진보적 생각은 브라흐만(Brahman) 사제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인도대륙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포용하는 정신적 담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아쇼카에 대하여 엇갈리는 기술도 적지 않지만 그가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헌신한 성군임에는 틀..
불교의 세계 종교화 오늘날 인도에서 소가 숭배되고 식용으로 도살되지 않는 이유는 당대 인도의 비옥한 농도의 개발을 위하여 소가 무한정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소의 번식은 당대의 당위였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이러한 평화로운 가치관에 부합되는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했을 뿐이며, 불교는 이러한 계기를 통해 크게 세력을 신장했을 뿐이다. 아쇼카 자신이 불법의 수호자라는 것을 공언하긴 했지만,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는 반드시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에 대한 특칭적인 언급이 그의 칙령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담마는 불교와는 달리 가족주의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다. 부모에 대한 복종, 형제 간의 우애, 노예와 하인에 대한 자비로운 대우, 그리고 가축과 새들에 이..
담마의 정치 불교사에서는 아쇼카를 싯달타의 수호자로서, 싯달타의 종교적 이상을 세속적으로 구현시킨 성왕으로서 그린다. 그러니까 붓다가 먼저고 최상이며, 붓다의 충실한 추종자, 불법의 구현자로서의 종속적인 이미지로서만 아쇼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나 아쇼카나 모두 인도역사에 등장한 각자(覺者)들이다. 깨달음의 방식과 위대함의 영역이 다를 뿐, 그들은 동등한 깨달음에 도달한 인도의 청년들이었다. 싯달타라는 청년은 보리수 밑에서의 정좌 속에서 냉철한 사유로써 깨달음을 얻었고, 아쇼카라는 청년은 피비린내 나는 인간욕망의 극한적 상황에서 몸서리치는 떨림의 체험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양자는 모두 자신의 깨달음의 실천에 충실했다. 그러니까 결코 아쇼카는..
아쇼카의 대각 인도최초의 전륜성왕인 아쇼카는 본시 잔인한 인물이었다. 웃자인(Ujjain)과 탁실라(Taxila, 옛 지명 Takṣaśila)지역에서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는 부왕 빈두사라의 신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 파탈리푸트라로 달려왔는데, 잔인하게도 99명의 형제들의 목아지를 피묻은 칼날에 휘날려야 했다. 그리고 늠름하게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치를 거부하며 그 권위를 경멸하고 비양거리는 칼링가왕국의 무자비한 침략에 착수하였다. BC 261년의 일이었다(혹은 BC 258이라고도 한다). 칼링가왕국은 인도의 동쪽 벵갈만(Bay of Bengal)의 해안을 따라 있는 현재의 오리싸(Orissa) 주의 크지 않은 나라였는데 지금 가봐도 느끼..
통일왕국 마가다부터 아쇼카까지 간지스강 유역에 산재한 도시국가들로부터 통일왕국인 마가다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전국의 칠웅(七雄)으로부터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의 진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아테네ㆍ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가 쇠퇴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제가 대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가 하면, 또 로마가 도시 공화국(Republican Rome)의 형태를 벗어나 대제국(Imperial Rome)의 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은 모두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인류사의 한 축이다. 인류문명들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따라 자체적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대세를 감지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의 내재적 보편성을 확인할 수..
싯달타부터 통일왕국 마가다까지 전술한 바와 같이 붓다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이 격변을 결정지운 가장 결정적 사건은 역시 철기의 보급이다. 웃따르 쁘라데쉬-비하르 주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한 대 평원이다. 이 지역은 본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으며 철제로 만들어진 연장이 없이는 개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리안족의 동진(東進)과 더불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울창한 밀림은 비옥한 농토로 개간되기 시작한다. 간지스강 유역으로 거대한 농경지가 무제한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상공업ㆍ무역의 발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발달은 도시상인을 주류로 하는 바이샤(vaiya) 계급의 급성장을 야기시켰고, 잦은 전쟁을 통한 강력한 왕권의 출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