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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국역 도올 김용옥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나라 이름】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2. 이 때에, 세존【世尊,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란 뜻이며 부처님의 10가지 이름 중의 하나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
대승불교 시작의 계기 현 파키스탄내의 페샤와르(Peshāwar)지역에서 이러한 불상이 대거 출토되는데 이 지역의 미술을 통칭하여 간다라미술(Gandhara Ar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간다라 미술과 더불어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지방의 마투라(Mathura) 불상들이 흥기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전의 초기불교의 금기를 깨고 인도전역으로 ‘불상 조각붐’이 열병처럼 번져나갔다. 한편 전륜성왕 아쇼카왕 이후 인도에는 스투파신앙이 보편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붓다의 돌무덤인 스투파(stūpa: 원래 분묘였는데 점점 우리가 알고있는 탑양식으로 발전해갔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붓다를 흠모하는 ‘탑돌이’ 문화가 생겨났다. 이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은 몇날 몇 달을 죽치고 계속하는 습속이 있..
예수의 법신과 색신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입적한 싯달타(Siddhartha)에 관하여 일체의 형상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 싯달타(예수에 비교) 즉 붓다(그리스도에 비교)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완벽하게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다시 말해서 일체의 색신의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해탈자(물질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육신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금기였고 불경(不敬)이었다. 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초기불전도(初期佛傳圖)에도 발자국 같은 것만 표현되어 있을 뿐 일체의 형상이 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바로 알렉산더가 뿌린 헬레니즘문화와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는 인도북부지역 중앙아시아까지 정복의 발길을 뻗치면서 그곳에..
신약성경의 저작연대 도표화 그냥 인상적으로, 상투적으로 현재의 27서 신약성경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편제(編制)에 의거하여 그것의 저작연대도 그냥 그 순서대로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일쑤다. 그런 문제에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4복음서의 성립연대가 뒤에 있는 바울의 서한보다 뒤늦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쯤은 항상 머리에 넣고 있어야 한다. 쓰여진 저작연대로만 말하면 27서 중에서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카전서가 제일 첫머리에 나와야 할 문헌이다【많은 학자들이 데살로니카전서야말로 신약성서 중에서 최고의 문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AD 50년 겨울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물론 AD 50년의 상한선을 소급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성에 관해서도 이론이 ..
마르시온의 11서 체제 마르시온(Marcion, ?~160)이 바울의 편지 10개와 누가복음 1서, 즉 11서의 체제로써 최초의 크리스챤운동의 정경을 창출한 행위는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효율적인 발상의 소치였다. 결국 그후의 모든 정경화작업이 이 체제의 심층구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의 일차적 해후는 바울의 편지였다. 바울의 편지는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율법과의 단절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위대한 논술이었다. 그러나 이 논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들이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논술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움직인 구체적인 예수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바울의 추상적인 예수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수가 곧 복음서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바울의 편지들은..
바울의 예수관 예수의 사도로서 글을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민족의 말인 히브리말에도 정통했으며 당대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인 희랍어(당대의 영어)에 통달했으며 로마시민권 소유자였으며 그레코ㆍ로망 수사학과 문학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이나 말씀에 관하여 일체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직전제자들을 만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기자료를 수집할 꿈도 꾸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역사적 색신(色身)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일 뿐이다. 그는 부활..
기독교는 경전종교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 4:13)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학문없는’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아그람마토이’(agrammatoi)인데 그것은 ‘글 쓸 줄 모르는’(illiterate)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은 외견상 무식한 촌무지랭이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문맹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거개 글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말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고(to teach, 마 28:20) 설파하라(to preach, 막 3:14)고 명령했지, 그의 말씀을 써놓으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말씀(구두)의 종교요 행위의 종..
불타와 예수 불타는 깨달음(大覺) 자체가 매우 지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매우 지적이었다. 그리고 아난(阿難陀, Ānanda)과 같은 다문(多聞)의 지적인 제자가 있어 그의 설법의 기록을 전담했다. 물론 아난의 기록은 암송의 형태였다. 그리고 불타가 입적한 직후에 이미 500명의 장로ㆍ비구가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에 모여 불타의 말씀을 결집하여 아함과 율장의 일정한 형태로 만들었다(물론 이것도 구송의 결집이었는데 제3차 결집 때에 문서화시켰다.) 그러니까 불교는 출발부터 경전불교였던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예수는 유대교전통 전체를 뒤엎을 만큼 대단한 지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강론의 내용은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불타의 깨달음 속에는 요즈음 말..
예수의 말 예수는 당대 아람어(Aramaic)라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 다른, 속화된 토속말(vernacular)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페니키아 알파벳(the Phoenician alphabet)으로 표기되었다. 요번에 발견된 쿰란문서에도 아람어 텍스트가 많이 나왔다. 아람어는 원래 히브리어와 계보를 달리하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였는데(아브라함도 아람어를 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 26:5),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속어로서 자리잡았다. 그것은 특히 갈릴리지방의 흔한 일상구어였다. 그러나 유대지방에서는 일상구어로서 히브리말이 통용되었다. 예수는 히브리말을 몰랐을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일반군중들은 물론(막 10:5..
가톨릭교회 정경화작업의 시작 마르시온(Marcion, ?~160)이 정경화작업을 이미 AD 150년경에는 완성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몰아친 바에야, 그리고 그의 교세가 날로 융성하여 마르시온 정경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판에 그것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 자체 내에서 정경을 따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도저작성(Apostolicity)을 기준으로 성경문헌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은 모두 AD 50년~150년 사이의 1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1세기 동안 쓰여진 책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중이떠중이가 쓴 책이 너무도 많다. 27서 정도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AD 150년 이후에는 계속해서 어중이떠중이가 쓴..
무라토리 정경 초대교회에는 성경이 없었다. 18세기의 발굴자이며 출판인이었던 무라토리(Lodovica Antonio Muratori, 1672~1750)가 AD 170~180년경에 로마에서 희랍어로 작성되었다고 하는 성경목록을 번역한 7ㆍ8세기 라틴어 단편원고를 발견했다(1740). 이것을 우리가 무라토리 단편이라고 부르고 이 무라토리 단편에 쓰여진 성경목록을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이라고 부른다. 이 무라토리 정경이야말로 정통파 신약의 최초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는 ‘4복음서’가 들어가 있는데 누가복음이 ‘복음서의 세 번째’로 지목되고 있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순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시온 정경: 정경화작업의 최초 계기 누가복음과 아포스톨리콘(the Apostolikon, 바울의 10개 서한)! 이것이 마르시온 교회의 최초의 정경이자 기독교역사에서 출현한 최초의 신약성경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르시온은 이 정경작업에 오늘날 문헌비평(벨하우젠, 홀츠만)이나 양식사학(궁켈, 디벨리우스로부터 불트만까지)의 선구적 작업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상기의 문헌에서 전반적으로 구약과 관계되는 부분을 삭제시켰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거나, 유대교의 예언의 성취에 관한 부분, 또는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문구들을 삭제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이나 예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약의 인용은 모두 빼버렸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유아시절..
아포스톨리콘과 누가복음의 선택 마르시온(Marcion, ?~160)의 ‘구약과의 단절’이라는 테제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케 만든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약에 대립되는 신약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마르시온은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성경에 비견할 수 있는 크리스찬들의 성경을 문헌적으로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헌들을 제한하여 교회 성경(ecclesiastical scriptures)으로 그 권위를 확립해야만 그의 신약사상을 확고히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우선 바울의 서한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경도된 것은 바울의 반율법사상(antinomianism)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시리아의 마르시온교회 2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까지 마르시온 교회는 300년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시리아에서는 마르시온파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끝까지 버티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둘러 비추어 개종케 되었다(행 9:3). 기독교 교회건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건물은 다마스커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교회다. 그 교회에 희랍어로 명백히 새겨져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레바논의 마을에서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처. 장로 바울의 리더십 아래 있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명문은 318~319년의 것으로 비정된다.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당..
파문의 결과 물론 당시의 파문이라는 것이 후대의 교황의 파문과도 같은 그러한 권위나 권세를 갖지 못했다. 황제의 정치권력의 백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Marcion, ?~160) 자신도 파문에 승복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르시온의 교설이 조금도 기독교의 정통교설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을 파문한 것은 교부들이었지 신도들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내에서 그의 인기는 열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요즈음의 분파주의자나, 사교(邪敎) 교단을 만들어 자기가 재림 예수라는 둥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둥 그따위 허탄(虛誕)한 말을 둘러대는 사기꾼과는 질이 달랐다. 마르시온은 자신을 ‘교양있는 평신도’로서만 생각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와 바울의 참된 가르침에 가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