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병수 (29)
건빵이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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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목차 민병수(閔丙秀) 1. 서설(序說)1) 한시연구의 과제2) 자료의 선택 문제⑴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⑵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⑶ 『기아(箕雅)』와 절충론⑷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⑸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3) 작품의 평가 문제⑴ 고려의 시화집⑵ 조선의 시화집 2. 한시의 초기 모습1) 대륙(大陸)의 노래⑴ 공후인(箜篌引)⑵ 황조가(黃鳥歌)⑶ 인삼찬(人蔘讚)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⑴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⑵ 정법사의 영고석(詠孤石)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⑴ 진덕여왕의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⑵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⑶ 설요의 반속요(返俗謠)⑷ 왕거인의 분원시(憤怨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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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당시(唐詩)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기본 성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시작품의 대부분은 시의 뜻이 넓고 깊은 개념(槪念)의 시(詩)를 써 왔으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의 시작(詩作)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시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곧 신위(申緯)이며, 이 시인에게 직접ㆍ간접으로 영향을 준 또다른 시인이 김정희(金正喜)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申緯)보다 17년 연하이지만, 신위 시의 창작에 직접 조언(助言)을 하는 등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위의 시적 성향은 율조(律調)를 중요시하는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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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ㆍ차좌일(車佐一)ㆍ최북(崔北)ㆍ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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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시단까지도 황량하게 하였다. 흔히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지만,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는 오로지 전 시대의 안정에 힘입은 결과이며 병란 때문에 인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이후 숙종(肅宗)대에 이르는 70여년간의 시단은 문자 그대로 황량과 적막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정두경(鄭斗卿)과 이민구(李敏求)가 적막에서 일어나 우뚝하게 시단을 돋보이게 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모처럼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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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숙종대(肅宗代)의 번영은 정치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여 명맥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시문(詩文)에 대한 논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문학의 전통이 사실상 끝장날 무렵에 김택영(金澤榮)이 『소호당집(韶護堂集)』 권8이란 잡언(雜言)을 남겨준 것이 고전비평의 마지막 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잡록(雜錄)이며, 문학을 논한 부분에 있어서도 문론(文論)이 시론(詩論)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 뒤늦게 나온 조긍섭(曹兢燮)이 김택영(金澤榮)과 주고 받은 『암서집(巖西集)』에서 나온 「여김창강(與金滄江)」란 왕복서(往復書)도 도학자(道學者)의 문장론(文章論)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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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평은 역시 문장가의 것이며 사장학(詞章學)의 부침(浮沈)과 기복(起伏)을 같이 한다. 서거정(徐居正)ㆍ성현(成俔) 이후에도 조선중기에 이르러 이수광(李睟光)ㆍ신흠(申欽)ㆍ허균(許筠) 등이 나타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면서 시학(詩學)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도 한 차례 호황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백과사전식으로 된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지만 그 문장부(文章部)에서 행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단순한 기문일사(奇聞逸事)의 채록 수준에서 뛰어넘어 일자일운(一字一韻)의 형식적인 기교에 이르기까지 높은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성운(聲韻)에 대한 그의 관심은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와 더불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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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태조(太祖)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므로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다. 성현(成俔)은 그 태평한 시대에 『용재총화(傭齋叢話)』를 썼다. 그의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文章)으로 진기(珍奇)한 풍물도(風物圖)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대의 문장(文章)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의 필하(筆下)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엄(森嚴)했다. 사자(四字)로 된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포(褒)와 폄(貶)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높은 조감(藻鑑)은 후대(後代)의 신흠(申欽)ㆍ허균(許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과 성현(成俔) 이후의 비평 양상도, 시(詩)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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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현을 가능케 하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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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시평의 단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천년래(三千年來)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앙받은 대수(大手)로서도 특정한 시인을 포폄(褒貶)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시풍(詩風)을 같이하는 일군의 시인들을 한데 묶어 그 장처(長處)를 추숭(推崇)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다. 시작법(詩作法)의 상식인 용사(用事)나 신의(新意) 따위를 논의하는 것도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점화(點化)의 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곳이기도 하지만, 이는 만상(萬象)을 구비한 이제현(李齊賢)의 시세계가 그렇게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전통이 정착의 단계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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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 있어서도 『파한집(破閑集)』을 보(補)한 것이거니와 시기적으로도 소단(騷壇)의 한 시대를 통관(通觀)할 수 있는 고려중ㆍ말엽의 산물이다. 그래서 최자(崔滋)는 위로는 정지상(鄭知常)으로부터 당세(當世)의 명가(名家)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詩作)에 품평(品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대해서는 일월(日月)로도 그 칭예(稱譽)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 세상에 행(行)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작(詩作)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보한집(補閑集)』 권중(卷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규보(李奎報)를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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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 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을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시(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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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필가(文筆家)의 시세계 소단(騷壇)에서도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각방면에서 뛰어난 시인이 나와 각각 제 몫을 다해준 결과라 할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저작한 유몽인(柳夢寅)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睟光), 그리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인 허균(許筠) 등은 그들이 제작한 시작(詩作)으로도 일정하게 시사(詩史)에 기여하고 있지만, 특히 이수광(李睟光)과 허균(許筠)은 뛰어난 조감(藻鑑)으로 후세의 기림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 1559 명종14~1623 인조1, 자 應文, 호 於于堂)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당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상투적인 표현을 거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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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豊饒)와 화미(華美) 조선 초기의 안정에 힘입어 풍요로운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이룩한 선조인조년간(宣祖仁祖年間)은 시단에 있어서도 또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성시를 이룬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도 풍격(風格)과 기상이 가장 뛰어난 노수신(盧守愼)은 선조(宣祖) 초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학두자(學杜者)로 알려져 있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 가장 후배인 황정욱(黃廷彧)은 많은 시를 쓰기보다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노수신(盧守愼)도 그의 시작(詩作)에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시험한 부분들이 보이지만, 특히 황정욱(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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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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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삼선(風謠三選)』은 속선(續選)의 속집(續集)이다. 직하사(稷下社)의 시동우(詩同友)인 유재건(劉在建)ㆍ최경흠(崔景欽) 등이 『풍요속선(風謠續選)』 이후의 위항시인 305가(家)의 시(詩)를 선집(選集)하여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만에 『풍요속선(風謠續選)』이 간행되었고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준비기간(準備期間)까지 합치면 12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위항시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삼선(三選)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이 대체로 수습되었으며 사실상 이것이 독자적인 위항시인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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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의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 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가(家)의 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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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풍요(昭代風謠)』는 162가(家)의 시편(詩篇)을 시체(詩體)에 따라 선집(選集)하여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 1737)에 간행되었으며, 원집(原集) 9권(卷)과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쳐 2책(冊)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뒷날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할 때(哲宗 8, 1857) 『소대풍요(昭代風謠)』가 산망(散亡)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이듬해(戊午)에 운각자(芸閣字)로 다시 인출(印出)한 중인본(重印本)이 널리 유행(流行)하고 있다. 편자는 고시언(高時彦, 1671~1734)으로 알려져 왔으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오광운(吳光運, 1698~1745)의 서문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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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다양한 전개(展開) 조선(朝鮮)은 그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학관념에 있어서도 주자학(朱子學, 思想儒敎)이 문학 위에 군림하는 재도관(載道觀)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용적인 문학관은 결코 문학의 생산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문학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김창협(金昌協)의 말과 같이 시를 보면 그 사람까지도 알게 하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다만 국초(國初)에는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지 모른다.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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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詩)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詩)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色)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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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 고려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하였지마는 충렬왕(忠烈王) 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유학(基本儒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유교(文學儒敎)로 일관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일찍이, 당시의 유사(儒士)들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만 익히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한 자가 없는 것을 개탄하여, 일경일사(一經一史)에 통한 사람을 국자감(國子監)에 교수(敎授)케 하라고 한 사실을 보면 이때까지도 국자감(國子監)에 경사(經史)에 통한 교수(敎授)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30년에 안향(安珦)이 양현고(養賢庫)가 탄갈(彈渴)하여 선비를 기를 수 없는 것을 걱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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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허균(許筠)의 성운(聲韻)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고려시대의 시작(詩作)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채(異彩)를 발하고 있다.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는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시(詩)에 대해서도 각각 그 음악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색(李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벽루(浮碧樓)」에 대하여 『성수시화(惺叟詩話)』 13번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꾸미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음조에 합치하여, 읊조린 것이 신묘하고 뛰어나다. 不雕飾, 不探索, 偶然而合於宮商, 詠之神逸. 스스로 격조(格調)에도 뛰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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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허균(許筠)이 비평가로서의 높은 조감(藻鑑)을 과시한 것은 성률(聲律)에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뿐만 아니라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학산초담(鶴山樵談)』의 도처에서 시(詩)의 음악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최경창(崔慶昌)과 이달(李達)의 시작(詩作)을 수십편이나 뽑아 넣으면서 그 경위를 『성수시화(惺叟詩話)』 63번과 64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시(詩)를 내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뽑아 넣은 것이 각각 수십편이나 되는데 음절(音節)은 정음(正音)에 들 만하지만 그 밖에는 뇌동(雷同)을 면치 못한다. 二家詩, 余選入於詩刪者, 各數十篇, 音節可入正音, 而其外不耐雷同也. 그가 이들의 시(詩)를 선발(選拔)한 기준이 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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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책에는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을, 역대의 시화(詩話)ㆍ만록(漫錄)에서 찾아 음각(陰刻)으로 보주(補注)를 붙이고 있다. 이는 아마 고본(稿本)을 재편집(再編輯)하는 과정에서 박태순(朴泰淳) 자신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에 널리 제본(諸本)을 구(求)하여 거기에 정정(訂定)을 가(加)하고, 또 제가(諸家)의 시화(詩話)에서 따서 같은 종류의 것을 보충하고 베껴서 몇권을 만들었다. 於是, 廣求諸本, 頗加證定, 又取諸家詩話, 以類補綴, 繕寫爲幾卷. 이 언급으로 보아 박태순(朴泰淳)이 한 일임에 틀림 없는 듯하다. 보주(補注) 가운데는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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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송시학(宋詩學)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1. 송시학(宋詩學)의 수용 한 시대(時代)에 한 문장(文章)이란 말은, 문장(文章)의 소상(所尙)이 시대(時代)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200년(年) 동안 문학유교(文學儒敎)에 힘입어 사장학(詞章學)이 크게 떨쳤으며 소단(騷壇)은 유미(柔靡) 경조(輕佻)한 만당풍(晩唐風)이 속상(俗尙)이 되어 버렸지만, 고려중기에 이르러 이러한 풍상(風尙)은 시대(時代)의 추이(趨移)에 따라 커다란 변혁(變革)의 국면(局面)을 맞이하게 된다.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표전장주(表箋章奏) 등이 이때까지도 사대문자(事大文字)로서 중요시(重要視)되고 있었으므로 변려문(騈儷文)의 전통(傳統)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운문(韻文)에 있어서는 전시대(前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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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소단(騷壇)이 아직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을 선관(選觀)의 편향성을 지적한 적평(適評)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시가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인의 비평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나 신흠(申欽)이 「선사사(仙槎寺)」의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학(鶴)은 신라시대의 일산에 번득이고 용(龍)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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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풍아(靑丘風雅)』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동문선(東文選)』이 간행되었으며,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大東詩林)』이 이보다 뒤에 나온 듯하나 이것은 함께 논할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은 방대한 관찬서(官撰書)로서, 또 시문(詩文)의 총집(總集)으로서 이것이 갖는 자료집(資料集)으로서의 의미는 막중하지만, 그러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동문수(東文粹)』(文選集)와 더불어 편자(編者)의 취향과 조감(藻鑑)에 따라 정선(精選)한 사찬서(私撰書)이고 또 이것은 시선집(詩選集)이라는 점에서 양자(兩者)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서(兩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제가(諸家)의 기록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 10)에서 다음과 같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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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성격과 만당(晚唐)의 영향 1.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일반적 성격 나말여초는 왕조사(王朝史)에서도 서로 겹치는 기간이 18년이나 되지만, 문학사의 현실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분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한시문학(漢詩文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역사 단계라는 점에서 한 데 묶여질 수 있는 공통성을 가진다. 신라말에 당(唐)에 들어가 직접 중국시를 체험하게 되는 고려 초기 일군의 시인들이 당시의 풍상(風尙)인 만당(晩唐)을 배운 것이 이 시기 한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동문선서(東文選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사실을 확인케 해주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詩)를 읽어보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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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시의 초기 모습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유입(流入)된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는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어 왔지만, 이는 연(燕) 위만(衛滿)의 동침(東侵)이나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역시 추정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한시(漢詩)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를 따지는 문제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다. 설사 문자(文字)의 유입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그릇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한시(漢詩)와 같은 고급 예술 문화를 양성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거쳐야 할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할 때에는 서책에 의존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을 광범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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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설(序說) 1. 한시(漢詩) 연구(硏究)의 과제(課題) 한시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삶을 있게 해주는 원천으로 소중한 것이 되고 있으며, 한시에서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해법(解法)조차도 이 자연을 통하여 구하려 한다. 그러나 한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과 자연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 물아(物我)가 한데 어우러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조화미(調和美)의 극치(極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漢詩)를 모르면서도 한시(漢詩)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학계의 현실은 지금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