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경우, 비평은 한문학의 전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설이 판을 치는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문학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것이 아니라 문어(文語)로 된 문장(文章)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시(詩)나 문(文)의 역사이며 실질적으로는 시(詩)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 비평의 현실은, 문학일반에 관한 이론이나 본격적인 시론(詩論)과 같은 것은 흔하지 아니하며, 대부분이 소박한 실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던 방식 그대로 개연적(蓋然的)인 평어(評語) 수준에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전비평 자체의 전통적인 체질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도 대체로 사실 확인에서 그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고전비평 자체의 역사적 체계화나 내적 질서의 파악에 기여하지 못한 취약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방면에서 한문학의 개별작품 연구에 중요한 준척(準尺)으로서 구실할 수 있다. 더욱이 단순한 예술적 환상이나 시적 충동만으로는 한시(漢詩)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사실상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이것이 오늘의 한시연구에 가져다줄 수 있는 자료사적 의미는 분명히 막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문학을 생산한 당시의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실천한 비평의 현장을 검토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역대 비평서의 실상을 파악하고 각종 시문집(詩文集)에 산재(散在)해 있는 비평관계 자료들을 탐색하여야 하며 이것들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도 함께 소구(溯究)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성실하게 수행되었을 때 고전비평 스스로의 연구는 물론 전시대(前時代)의 우리 시인(詩人)들이 추구하던 한시(漢詩)의 진실까지도 있었던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정제(整齊)된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 중엽의 일이며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시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의 견당유학생(遣唐遊學生)들에서 볼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ㆍ최승우(崔承祐)ㆍ최광유(崔匡裕)ㆍ박인범(朴仁範)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고려초에 들어 와서도 문학의 속상(俗尙)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과거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사장(詞章)에 더욱 열을 올리어 귀족적인 고려시대 문학의 성격이 형성된다. 박인량(朴寅亮)ㆍ김인존(金仁存)ㆍ고조기(高兆基)ㆍ정습명(鄭襲明)ㆍ정지상(鄭知常) 등 창시자(倡始者)들이 보여준 문학세계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시화류(詩話類)의 문학양식이 송대(宋代)에 와서 크게 일어났거니와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때까지는 중국의 한시(漢詩)를 배우고 익히는 초기 체험 단계다. 시(詩)에 대한 논설이나 기사(記事)ㆍ법칙 등을 기술하는 노력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시인들에 대한 고실(故實)을 기록하는 기도도 소단(騷壇)의 기반이 성숙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한 최초의 성과다. 그는 당시 소단(騷壇)의 거점이기도 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맹주(盟主)답게 자작시(自作詩)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원 상호간에 수응(酬應)한 시화(詩話)ㆍ문담(文談)ㆍ기사(記事) 등 사단(詞壇)의 소요담(逍遙談)을 보고하고 있으며, 명유(名儒)ㆍ운석(韻釋)의 제영(題詠)이 인멸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여 제가(諸家)의 글 가운데서 명장(名章)ㆍ수구(秀句)를 채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계림(鷄林)의 옛 풍속을 기술하고 평양(平壤)의 산하(山河)와 인물을 담론(談論)하며, 수도 개경(開京)의 궁정(宮廷)ㆍ사관(寺觀) 등 풍물을 기록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중요하게 값하고 있는 것은 이인로(李仁老) 자신의 체험적인 시작법(詩作法)을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점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세심하게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文章)은 천성(天性)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후천적인 용공(用功)을 특히 강조하였다. 타고난 일재(逸材)가 있더라도 마음을 태우는 연탁(鍊琢)의 노력이 있어야만 천고(千古)에 그 이름을 드리울 수 있다고 한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로써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스스로 시인하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하는 것이 시작(詩作)의 상승(上乘)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동파(東坡)나 산곡(山谷)과 같이 조어(造語)가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는 경지를 높이 칭예(稱譽)하였다. 신의(新意)는 작시(作詩)의 이상이요, 상식이기 때문에 그는 용사(用事)와 같은 시작(詩作)의 기술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기호(氣豪)ㆍ해박(該博)한 동파시(東坡詩)를 시(詩) 수업(修業)의 표준으로 삼고 있던 당시의 속상(俗尙)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인로(李仁老)의 시학(詩學)이 작시(作詩)의 상식인 신의(新意)를 논하는 수준에서 멀리 뛰어 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송시(宋詩) 가운데서도 특히 동파시(東坡詩)의 ‘해박(該博)’을 배워 수준 높은 시작(詩作)을 시범하려 한 이인로(李仁老)의 노력을 읽어내어야 한다. ‘기호(氣豪)’는 원래 천성(天性)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문제삼지 않았을 뿐이다.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 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을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시(詩)에 대해서 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나타내어야 할 것인가를 문제 삼은 것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그는 시(詩)는 의(意, 意境)가 주(主)가 되므로 의경(意境)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意境)은 또한 기(氣)를 위주(爲主)로 하기 때문에 기(氣)의 우열에 따라 의경(意境)의 심천(深淺)이 결정될 따름이다. 그러나 있는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시(詩)는 의경(意境)의 표현이며 그것은 외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식(修飾)과 같은 것은 후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이의위주(詩以意爲主)’는 원시주의적인 ‘시언지(詩言志)’를 다시 천명한 것이며 ‘의역이기위주(意亦以氣爲主)’는 조비(曹丕)의 문기론(文氣論) 이후 개성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표현론의 경향을 심화하여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의 기론(氣論)이다. 기(氣)의 청탁(淸濁)은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한 조비(曹丕)의 생각을 그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不可學得] 표현하고 있으며 조비(曹丕)가 막연한 개념으로 써 보았던 ‘문기(文氣)’를 그는 재기(才氣) 즉(卽) 개인(個人)의 개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시(詩)는 의(意)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은 외의 권능(權能)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와 『백운소설(白雲小說)』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체험적인 사실을 통하여 이를 간명(簡明)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같은 글도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옛 성현(聖賢)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한 옛 시인의 체(體)를 모방하기 부끄러워 창졸간에 시를 읊조릴 때라도 의사가 고갈하여 써먹을 말이 없으면 반드시 새로운 말을 만든다고 하였으며 때문에 말이 생소하고 난삽한 것이 많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옛시인들은 뜻만 창조하고 말은 창조하지 않았지만, 자기는 뜻과 말을 함께 창조하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자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천재(天才)를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신어(新語)를 만들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한다고 한 것이다. 겉으로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모방하기가 싫어서 부득이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스스로 자기 시의 개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합리화를 기도한 것이다. 동파(東坡)를 근대(近代)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어 올리면서도 그는 끝내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동파(東坡)를 모방하면 동파(東坡)와 비슷해지거나 동파(東坡)와 꼭 같아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파시(東坡詩)일 뿐 자신의 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그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ㆍ백거이(白居易) 등이 일시(一時)에 나와 천고(千古)에 높이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왕발(王勃)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구양수(歐陽修)ㆍ매성유(梅聖兪)ㆍ소식(蘇軾)이 일세(一世)에 이름을 빛내었지만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ㆍ백거이(白居易)를 본뜨지 않고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시(詩)로써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치고 빛내려 한 그의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다. 동파시(東坡詩)로 대표되는 중국시를 수용함에 있어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이규보(李奎報)는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당시의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동파(東坡)의 시세계를 우리 것으로 극복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동파(東坡)를 한갓 시수업(詩修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규보(李奎報)의 의기론(意氣論)은 일단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인로(李仁老)의 시학(詩學)이 점수돈오(漸修頓悟)의 점진적인 단련형 취향이라면 이규보(李奎報)의 그것은 천재(天才)로써 시(詩)를 깨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 있어서도 『파한집(破閑集)』을 보(補)한 것이거니와 시기적으로도 소단(騷壇)의 한 시대를 통관(通觀)할 수 있는 고려중ㆍ말엽의 산물이다. 그래서 최자(崔滋)는 위로는 정지상(鄭知常)으로부터 당세(當世)의 명가(名家)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詩作)에 품평(品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대해서는 일월(日月)로도 그 칭예(稱譽)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 세상에 행(行)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작(詩作)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보한집(補閑集)』 권중(卷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규보(李奎報)를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젊어서부터 붓을 달리면 다 신의(新意)를 창출해내고 문사(文辭)를 토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달리는 기운이 더욱 씩씩하여 비록 성률(聲律)의 구속을 받는 가운데서 세밀하게 조탁(雕琢)하고 공묘(工妙)하게 얽어 나가더라도 호기(豪氣)가 넘치고 기묘(奇妙)하게 우뚝하며…… 고조장편(古調長篇)을 하는 데 있어서 강운(强韻)과 험제(險題) 가운데서도 마음대로 분방하여 한꺼번에 100장을 써 내려가도 다 고인(古人)을 답습(踏襲)하지 아니하고 우뚝히 자연스럽게 만든다.
公自妙齡, 走筆皆創出新意, 吐辭漸多, 騁氣益壯, 雖入於聲律繩墨中,
細琢巧構猶豪肆奇峭, …… 盖以古調長篇, 强韻險題中, 縱意奔放, 一掃百紙, 皆不賤襲古人, 卓然天成也.-崔滋, 『補閑集』 卷中
여기서 그는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기교적인 요소를 완강하게 후퇴시킴으로써 최자(崔滋) 자신의 반기교적인 시관(詩觀)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문관(詩文觀)을 개진함에 있어서도 의(意)는 기(氣)에 힘입는 것이고 기(氣)는 천성(天性)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는 개성주의적 표현론의 전형이며 이규보(李奎報)의 시관(詩觀)을 그대로 계승하고 전개한 것이다.
그는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기교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言及)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그는 성병(聲病)을 배격(排擊)했다. ‘말은 다듬지 않았는데도 기상(氣象)이 호방(豪放)하고 의경(意境)이 넓은 시(詩)는 성병(聲病)이 없기 때문’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풍격비평(風格批評)에 있어서도 사어(辭語)나 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앞세우고 있다. ‘신기절묘(新奇絶妙)’, ‘일월함축(逸越含蓄)’, ‘험괴준매(險怪俊邁)’, ‘호장부귀(豪壯富貴)’, ‘웅심고아(雄深古雅)’ 등 기골의격(氣骨意格)의 표현인 이것들을 모두 상품(上品)으로 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로써 보면, 최자(崔滋)와 이규보(李奎報)가 그토록 요란하게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시(詩)로서 성취할 수 있는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임에 틀림 없다.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의 추구보다는 기호의활(氣豪意豁)한 내면세계의 사출(寫出)을 현실 문제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시평의 단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천년래(三千年來)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앙받은 대수(大手)로서도 특정한 시인을 포폄(褒貶)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시풍(詩風)을 같이하는 일군의 시인들을 한데 묶어 그 장처(長處)를 추숭(推崇)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다.
시작법(詩作法)의 상식인 용사(用事)나 신의(新意) 따위를 논의하는 것도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점화(點化)의 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곳이기도 하지만, 이는 만상(萬象)을 구비한 이제현(李齊賢)의 시세계가 그렇게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전통이 정착의 단계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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