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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8.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8.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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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당시(唐詩)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기본 성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시작품의 대부분은 시의 뜻이 넓고 깊은 개념(槪念)의 시()를 써 왔으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의 시작(詩作)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시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곧 신위(申緯)이며, 이 시인에게 직접ㆍ간접으로 영향을 준 또다른 시인이 김정희(金正喜). 김정희(金正喜)신위(申緯)보다 17년 연하이지만, 신위 시의 창작에 직접 조언(助言)을 하는 등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위의 시적 성향은 율조(律調)를 중요시하는 당시(唐詩)의 경우 에는 분명히 일탈(逸脫)하고 있는 것이므로 후세의 논자(論者) 중에는 이를 가리켜 변조(變調)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음율에 소원(疏遠)한 우리나라 시인들이 감수해야만 할 스스로의 한계를 그대로 시현(示顯)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우리나라 한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한 중요한 동인(動因)을 제공해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무렵 중국 소단(騷壇)의 풍상(風尙)도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사정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송시(宋詩) 이후 당시(唐詩)를 추숭(追崇)하던 습상(習尙)은 이미 퇴조(退潮)하고 있었으며, 특히 당()으로부터 1,000년이 지나고 있는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시작(詩作) 성향도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작한 개념의 시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신위(申緯, 1769 영조45~1845 헌종11, 漢叟, 紫霞警修堂)

는 시()ㆍ서()ㆍ화()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9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면서 환로에 올랐고, 10여년을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1812년에는 서장관 자격으로 연행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청()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후 병조참판(兵曹參知)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지만, 몇 차례의 유배와 탄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순탄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편은 김택영이 600여수를 정선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당대의 인물로는 우선 김정희(金正喜)와 옹방강(翁方綱)을 들 수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가 청의 사절단으로 떠나기에 앞서 옹방강을 만나보도록 권한 인물이면서 자신도 옹방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옹방강이 고증학에 밝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김정희(金正喜)와 신위 모두 고증학의 영향권 안에 있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위(申緯)가 시서화에 모두 승()하였다는 사실과 김정희(金正喜)가 고증학에 기초한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한 일들이 모두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옹방강은 소식(蘇軾)을 존숭하여 즉 그 자신이 소식의 시를 주석한 소시보주(蘇詩補注)를 펴내었으며 이 책이 바로 신위가 소식을 기초로 삼고 두보에 들어가다[由蘇入杜]’의 기치를 내세우는 데 준거를 제공하게 된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건창(李建昌)신자하시초발(申紫霞詩鈔跋)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하의 시는 처음엔 대체로 우리 집안 참봉군에서 나왔다. 그 후에 중국에 들어가 담계 옹방강(翁方綱)을 감복하여 섬겨 비로소 스스로 소식을 기초로 삼고 두보로 들어갔다.

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 其後入中國, 服事翁覃谿, 始自命由蘇入杜.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준 또다른 국내의 문인으로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를 들 수 있다. 중국 시인의 경우에는 국내의 여느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시인들을 학시(學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택영(金澤榮)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는 소식을 스승으로 삼고 곁으론 서릉과 왕유와 육유의 사이에 출입하였다.

其詩, 蘇子膽爲師, 旁出入于徐陵王摩詰陸務觀之間

 

 

소식(蘇軾) 외에도 서릉(徐陵)ㆍ왕유(王維)ㆍ육유(陸游)의 영향을 받았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그의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정견(黃庭堅)ㆍ원호문(元好問)ㆍ왕사정(王士禎)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후사가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실은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오직 신위만이 직접적으로 이서구 여러 학자들의 자취를 접했고 시서화 삼절로 천하에 이름 났다[惟申公之生, 直接薑山諸家之踵, 以詩書畵三絶, 聞於天下.”라 한 진술에서 증명되거니와 후사가가 이때까지도 천시되던 회화에 두루 관심을 가지면서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를 주장했던 사실 자체가 신위(申緯)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일차적인 영향관계를 설정해도 좋을 듯싶다.

 

이광려(李匡呂)의 경우 앞서 든 이건창(李建昌)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참봉군(參奉君) 이광려(李匡呂)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택영(金澤榮)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또다른 곳에서 공은 시에 있어서 처음엔 성당을 배웠지만 후엔 고쳐 소동파를 배워 전에 지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公於詩, 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 悉棄前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신위(申緯)의 초기시는 모두 없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단 이광려(李匡呂)의 당시풍에 크게 경도되었던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위(申緯)는 젊은 시절에는 당풍(唐風)을 숭상하다가 김정희(金正喜) 및 옹방강과의 교유 이후 차츰 송풍(宋風)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위(申緯)유소입두(由蘇入杜)’소식(蘇軾)을 거쳐 두보(杜甫)에로 귀착한 것이 아니라, 소식(蘇軾)을 바탕으로 두보(杜甫)를 수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옹방강으로 대표되는 당시 청 시단의 유소입두(由蘇入社)’도 당()과 송()을 절충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신위(申緯)의 시세계는 그 기조(基調)가 사실적(寫實的)이라는 사실 외에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그는 교유관계에 있어서도 신분계층이나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광범하게 사람을 사귀고 있어 이것이 묘하게도 그의 시세계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위(申緯)는 그렇게 다양한 경향을 보이면서 그토록 많은 시편을 제작하고서도 정작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히는 마땅한 산문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김택영(金澤榮)이 진술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려(豔麗)할 수 있고 소야(疎野)할 수 있으며 변환(變幻)할 수 있고 돈실(敦實)할 수 있으며 졸박(拙樸)할 수 있고 호방(豪放)할 수 있으며 평이(平易)할 수 있고 기험(崎險)할 수 있으며 천만 가지 정상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활발하고 생동하지 않음이 없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이에 독자에게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취하도록 하게 함이 마치 만무(萬舞)가 펼쳐지고 오제(五齊)가 무르익은 듯하니, 광세(曠世)의 특별한 재능을 갖추고 일대(一代)의 지극한 변화를 다하여 마음껏 기량을 떨친 말기의 대가라고 말할 만하니

能豔能野, 能幻能實, 能拙能豪, 能平能險, 千情萬狀, 隨意牢籠, 無不活動, 森在目前. 使讀者目眩神醉, 如萬舞之方張, 五齊之方醲, 可謂具曠世之奇才, 窮一代之極變, 而翩翩乎其衰晩之大家者矣.

 

 

신위(申緯)의 시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던가를 명증하고 있을 뿐이다.

 

신위(申緯)의 시는 스스로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일대(一代)의 극변(極變)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의 제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그는 시인 자신의 술회를 토로한 것에서부터 타인의 시에 차운한 시, 타인의 시를 의방한 시, 사회를 풍자한 시, 그리고 시를 통해 시인과 시를 논한 시, 민간의 풍속을 그려낸 시 등이 그에 해당한다. 즉 타인의 시를 의방한 것으로는 왕사정의 추류시(秋柳詩)를 따라 지은 후추류시(後秋柳詩)를 비롯하여, 남옥(南玉)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맥풍(貊風)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개작한 맥풍십이장(貊風十二章)등을 들 수 있고, 사회를 풍자한 시로는 잡서(雜書)50수를 거론할 수 있다. 또 전래의 시조를 7언절구로 한역한 소악부(小樂府) 40수가 있는가 하면,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배우(倡優)들의 연희를 보고서 지은 관극절구(觀劇絶句)12수가 남아 있고, 시흥(始興)의 자하산장(紫霞山莊)에 머물면서 그곳의 풍속을 읊은 시흥잡절(始興雜絶)20수가 전하는 바, 그의 민간 풍속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은 한시사라 할 수 있는 시로 시를 논하다[以詩論詩]’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35수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김상헌(金尙憲)에 이르는 51명의 작품과 특성을 논평한 귀중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위(申緯) 시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화남우촌유서시(和南雨村柳絮詩)를 읽어야 한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춘일산거(春日山居)(五絶), 차운하상낙엽시(次韻荷裳落葉詩, 사월팔일원정절구(四月八日園亭絶句), 녹파잡기제사(綠波雜記題辭)(이상 七絶), 우게검물원작(雨憩檢勿院作), 박연(朴淵)(이상 五律), 전춘(餞春), 임정견한(林亭遣閒), 회양(淮陽), 회녕령(會寧嶺), 옥선동(玉仙洞), 초하견흥(初夏遣興), 고열행(苦熱行)二首(이상 七律), 추우탄(秋雨歎)(五古) 10여편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위(申緯)춘일산거(春日山居)는 다음과 같다.

 

縣市人心惡 山村物性良 도시의 인심은 나쁘지만 산촌의 물성은 아름다워라.
茅柴四三屋 雞犬畫羲皇 초가집 서너채 모여 있는 곳, 개도 닭도 모두 태평성대라네.

 

변조(變調)로 알려진 자하 시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산 속에 사는 봄날의 정경(情景)을 그렸는데, 도무지 근체시답게 단련한 흔적이 없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 보이는 고졸(古拙)한 대구, 시어로서는 낯선 인심(人心)이나 물성(物性) 등의 구사가 시를 첨신(尖新)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계견진희황(鷄犬盡羲皇)’의 표현은 매우 희학적이기도 하다. “能豔能野, 能幻能實, 能拙能豪, 能平能險하여 천정만상(千情萬狀)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권능(權能)을 이에서 볼 수 있다.

 

 

신위(申緯)의 이 시와는 달리 의활(意豁)한 송시(宋詩)의 진수를 한눈으로 확인케 하는 서경차정지상운(西京次鄭知常韻)을 들어본다.

 

急管催觴離思多 빠른 곡조 권하는 잔 떠날 생각 많은데
不成沈醉不成歌 깊이 취하지도 아니하고 노래도 되지 않네.
天生江水西流去 천생으로 강물은 서쪽으로만 흘러
不爲情人東倒波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동쪽으로 물길을 돌리지 못하네.

 

정지상(鄭知常)송인(送人)에 차운한 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빼어난 시편이라 칭송되는 작품이다. 만당풍의 유려한 정지상(鄭知常)의 원시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송시(宋詩)의 깊은 듯이 물밑에서 일렁이고 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빠른 피리 소리가 이별을 재촉하는 상황에 어울리게 시의 호흡 역시 빠르고 격하다. 그러나 전구(轉句)에서는 시상을 반전시키면서 유장한 호흡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별에는 아랑곳없이 흐르는 물에 원망을 실어 아쉬운 여운을 더하면서 시를 마무리 하고 있다.

 

 

자하 신위(申緯)의 또 다른 명편으로 절찬을 받은 박연(朴淵)을 보기로 한다.

 

俯棧盤盤下 回看所歷懸 잔교를 굽어보며 구불구불 내려와 돌아보니 지나온 길 매달려 있구나.
巖飛山拔地 溪立瀑垂天 바위가 날아 온 듯 산은 땅에서 솟았고 시내가 서있는 듯 폭포는 하늘에 드리웠네.
空樂自生聽 衆喧遂寂然 공중의 음악소리 자생으로 들리는데 뭇 사람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네.
方知昨宿處 幽絶白雲巓 바야흐로 알겠노니 어제밤 자던 곳이 그윽한 곳 흰 구름 걸린 산마루였음을.

 

이 작품은 물론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를 보고 읊은 것이다. 자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자하의 시는 그림과 같은 정경이 갖추어져 있다. 보통 솜씨로는 그릴 수도 없는 그림을 율문(律文)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함련과 경련에서는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경치를 맑고 깨끗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10~1856 철종7, 元春, 秋史阮堂禮堂詩庵果坡老果)

역시 신위(申緯)와 마찬가지로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발군(拔群)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시인, 서도가, 화가, 정치가, 경학자로서 그 어느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과시했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이 상호 융화되어 그 폭이 끝간 데 없이 호한(浩澣)할 뿐만 아니라, 교유관계도 역시 그 폭이 넓었다. 당시 청대의 석학으로 추숭받던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으로부터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 및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계몽(啓蒙)을 입은 바 있고, 일찌기 스승으로 삼았던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역량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당대에 명망 높은 신위(申緯)ㆍ조인영(趙寅永)ㆍ권돈인(權敦仁)ㆍ신관호(申觀浩) 등과 시교(詩交)를 맺었으며, 나아가 불교적인 안목도 뛰어나 백파(白坡)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도 허물없는 시정(詩情)을 나누는 한편 호남 남종화의 맥을 틔운 허유(許維)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술ㆍ사학ㆍ철학계의 추사연구(秋史探究)와는 달리 정작 추사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문학의 영역은 아직까지 그 전모를 파악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우선 이런 현상은 추사 스스로 자신의 문학관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언술을 남기지 않았던 사정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추사의 관심 자체가 어느 특정 시풍에 기울지 않았던 데서도 연유한다 할 것이다. 학시(學詩) 과정에서 박학다식을 강조하였다거나 어느 한 입장에 기울어지는 태도를 경계했던 일들이 모두 추사의 문학관을 정리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백부 노영(魯永)의 양자로 자라났다. 왕가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나 24세에 생원시에 일등입제(一等入第)한 뒤 동지(冬至) () 사은부사(謝恩副使) 김노경(金魯敬)의 연행(燕行)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 연경(燕京)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은 일은 김정희(金正喜)의 일생에 일대전환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 연경의 학풍은 고증학의 수준이 난숙기에 이르러 종래 경학의 보조학문으로 치부되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지리학 등이 개별적 학문으로 진척되는 과정이었다. 또한 문학의 습상(習尙)에 있어서도 일종의 절충주의라 할 수 있는 유소입두(由蘇入杜)’의 주장이 청()의 시단을 풍미하던 때였으므로 추사는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하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통해 금석학, 실사구시학, 문학관에서 각각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사 후, 그는 벼슬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생부 노경(魯敬)이 배우조종자로 연루되었던 윤상도(尹尙度) 옥사사건에 재차 말려들어 제주도에 9년간 유배되었으며 헌종 말년 63세의 나이로 방환되었으나, 또 다시 함경도 북청(北淸)에서 2년간 적거했다가 말년에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학예를 닦던 중 생을 마쳤다. 네차례 문집이 간행되어 각각 전하고 있는데, 1934년에 보충ㆍ간행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이 추사(秋史)의 유고를 종합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소단(騷壇)모의(模擬)’를 배척하고 창신(創新)을 선호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강조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추사(秋史)자하(紫霞) 역시 선인(先人)의 시세계와는 다르게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야 할 임무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추사(秋史)의 경우, 실제로 법고(法古)’보다는 창신(創新)’에보다 관심을 보인 연암(燕巖) 및 후사가(後四家)와는 다르게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의 균형을 중시하였으므로, 후사가(後四家)가 주장한 창신(創新)에의 일방적 경도현상이 가져올 문제점을 예상하고 있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시를 평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것을 배우지 않고 마음대로 법도를 버리는 것은 자기만을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훌륭한 모범을 얻어보고 또 나아감에 정도가 있다면 그 하늘이 내려준 품성으로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於不學古而緣情棄道者, 殆似自道也. 若使得見善本, 又就有道, 以其天品, 豈局於是而已也? 書圓嶠筆訣後, 阮堂先生全集6

 

 

선본(善本)을 통해 학고(學古)한 바탕 위에서라야 자득(自得)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쉽게 간취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무조건적인 창신을 경계하고 선인의 다양한 경지를 맛보아 마침내 자가(自家)를 이루어야 한다는 논의로 귀결된다. 추사는 학시(學詩)의 모범으로 도연명(陶淵明)ㆍ왕유(王維)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육유(陸游)ㆍ원호문(元好問)ㆍ우집(虞集)ㆍ왕사정(王士禎)ㆍ주이존(朱彛尊)을 차례로 들고 있는 바, 이러한 태도는 바로 신위(申緯)의 유소입두(由蘇入杜)와 맥을 같이 한다. 추사 시에서 소재의 다양화 경향도 이미 후사가의 죽지사(竹枝詞)에서 그 싹을 틔웠거니와 추사는 시의 대상을 삶의 주변에서 골고루 취택함으로써 시세계의 다양화를 꾀하였다. 소재의 다양화는 이런 점에서 표현의 사실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주위의 사물을 빌어 관념적이거나 감정적인 흥취(興趣)를 담아내는 방법보다는 대상 자체의 특징과 속성을 중요시할 때, 시는 사실적인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대동시선에 선발된 작품만 하더라도 추사(秋史)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취우(驟雨)15편에 이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취우(驟雨)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樹樹薰風葉欲齊 나무마다 더운 바람 불어 잎은 가지런하려 하고
正濃黑雨數峰西 봉우리 서쪽에서 먹구름 밀려온다.
小蛙一種靑於艾 쑥보다 더 푸르른 개구리 한 마리,
跳上蕉梢效鵲啼 파초 가지에 뛰어올라 까치처럼 울고 있다.

 

추사(秋史) 시세계의 한 경향은 일상적인 경험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매우 자세하게 관찰하여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그가 학문적으로 고증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관찰과 실험의식이 시작(詩作)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된 것이라 하겠다. 여름날의 소나기 오는 풍경을 그린 이 시의 장처(長處)는 바로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이다. 쏟아지는 비 속에 파초 잎 위에 앉아 울고 있는 개구리의 모습이 청어애(靑於艾)’의 선명한 색채묘사와, ‘작제(鵲啼)’라는 청각적 묘사로 인해 시중유화(詩中有畵)를 실감케 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이 바로 이러한 시를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득공(柳得恭)장우(將雨)란 시의 수수훈풍벽낙제 정농운의수봉서 소와일종청어애 도상매초효작제(樹樹薰風碧葉齊 正濃雲意數峯西 小蛙一種靑於艾 跳上梅梢效鵲啼)’와 내용이 혹사(酷似)하여 그 진위(眞僞)를 가려야 할 것이다. 유득공(柳得恭)추사(秋史)보다 앞서기 때문에 완당전집(阮堂全集)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나게 한다.

 

 

대체로 추사(秋史)의 시는 일상적인 삶, 또는 일상적 삶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지만, 역으로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하여 삶의 아픔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인 것도 있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도망시(悼亡詩)가 그러한 것 중에 하나다. 다음이 그의 도망(悼亡)이다.

 

那將月姥訟冥司 어떻게 월하노인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
來世夫妻易地爲 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까?
我死君生千里外 내가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
使君知我此心悲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 알게 했으면,

 

이 작품은 도망시(悼亡詩) 가운데서도 절조(絶調)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제주도 배소(配所)에서 부인의 부음을 받고 쓴 것이다. 유배지에서 처의 죽음을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한시의 세계에서 보아도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작품이다. 역설적으로 죽은 부인을 위로하는 도망시를 통하여 부인에 대한 사랑을 간접으로 노래하는 우리나라 염정시(艶情詩)의 한 단면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8. 하대부(下大夫)의 방향(芳香)과 불평음(不平音)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단에도 새로운 경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의 진출이 상당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이다. 특히 하대부(下大夫) 일등지인(一等之人)으로 자처한 의()ㆍ역() 및 율과(律科) 출신의 중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의 굴레에서 일탈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향유하는데 성공한 시인들도 있다.

 

물론 역관 출신의 시인 가운데에도 회화시로 이름 높은 이상적(李尙迪)과 같이 이미 이들의 시작이 사대부의 권역(圈域)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남기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는 위항시인(委巷詩人)들도 있다.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에 이름을 전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처지에서, 거침없이 세상을 내달리면서 그들의 삶과 불평음(不平音)을 절제된 감정 처리로 토로한 시인들이 있다. 현기(玄錡)장지완(張之琬)변종운(卞鍾運)황오(黃五) 등이 그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상적(李尙迪, 1804 순조4~1865 고종2, 惠吉, 藕船)

은 역관이라는 중인계층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문집명이 은송당집(恩誦堂集)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로써 임금의 은우(恩遇)를 입었던 시인이다. 또한 이상적(李尙迪)은 역관으로 무려 12차례나 청에 드나들면서 청의 문사들과 수창하여 그의 시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상적(李尙迪)의 시는 대체로 서곤체(西崑體)의 염일(艷逸)한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한다. 김윤식(金允植)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에 있어서 어양 왕사진(王士禛)과 여상 송완(宋琬)의 남은 법칙을 얻어 골절이 여유롭고 풍신이 자재로워 불필요한 내용은 다듬고 정련해 구차한 뜻이 없으니 어찌 다르지 않으리오.

於詩, 深得王漁洋宋荔裳之遺則, 骨節姍姍, 風神翛然, 陶洗烹鍊, 無苟且之意, 豈不異哉.

 

 

이러한 지적은 이상적(李尙迪)의 시가 역관의 시답지 않게 시품에 있어서 도도함을 느끼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 기몽(記夢)을 보기로 한다.

 

坐擁貂裘小睡溫 갖옷을 여미고 앉은 채 깜빡 잠에 빠져
依依歸夢訪家園 어렴풋이 꿈길에 고향 집을 찾았다네.
雪晴溪館無人掃 눈이 개인 집일랑 길 쓰는 이 없고
一樹梅花鶴守門 오로지 매처학자(梅妻鶴子)만 문을 지킬 뿐.

 

위 시는 헌종 13(1847) 겨울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입연(入燕)할 때 계주(薊州)를 지나면서 지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수천리 먼 여행길의 수레에 앉아서 고향의 집을 꿈꾸는 시인의 정황이, 화려하지도 않고 억지로 다듬지도 않으면서 진솔하게 그려져 있어 감동적이다. 이 시를 통해 이상적(李尙迪)학수문(鶴守門)’이라는 별명을 청의 문사들에게 얻는 등 크게 명성을 얻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다음은 경상도 사천현의 한 포구를 지나며 지은 강주도중(江州途中)을 보기로 한다. 맑고 한가한 정취가 잘 들어난 시이다.

 

靑藜扶野老 黃犢守山家 촌로는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누런 송아지는 산골집을 지킨다.
樵徑穿林細 村容逐岸斜 나무하는 길은 숲을 뚫고 가늘게 뻗어 있고 마을의 모습은 언덕을 따라 비스듬히 누웠네.
鹿眠谿畔月 蠭釀石間花 사슴은 시냇가 달빛 아래 잠들고 벌은 돌사이 꽃에서 꿀을 딴다.
暫向松陰憩 淸泉手煮茶 잠시 소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맑은 샘물로 손수 차를 끓이노라.

 

 

 

정지윤(鄭芝潤, 1808 순조8~1858 철종9, 景顔, 壽銅)

은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며 벽오기굴(僻奧奇堀)’하였으나 문자(文字)에 매우 총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기이하게 여겨 정지윤(鄭芝潤)을 머물게 하여 소장한 도사(圖史)를 읽게 했다 한다. 최성환(崔瑆煥)이 그의 시고(詩藁)를 수집하여 하원시초(夏園詩抄) 1권을 간행하였다.

 

정지윤(鄭芝潤)의 문학론은 장지완(張之琬)과 마찬가지로 성령론적이다.

 

 

성령이 한번 붙으면 붓끝을 다할 따름이지 시체(時體)나 신풍(新風)을 좇거나 섬세한 것을 다투지 않는다

性靈一付央毫尖, 不遂時新競巧纖. 夏園詩草, 丁未臘月其一

 

 

여기서 보이는 성령 역시 인간이 지닌 영묘한 정신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젓한 길은 때로 혼자서 갈 수 있는 것이니, 그대 부디 대가의 울타리에 기대지 말게나

幽徑只堪時獨往, 勸君莫奇大家藩 夏園詩草1, 作詩有感)

 

 

위와 같은 명구(名句)를 남겼는데, 여기서도 역시 성령의 발휘가 곧 개성과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지윤(鄭芝潤)은 성령의 발휘를 중시하면서도 시의 단련 또한 중히 여겼는데, 그러한 시의 양상을 매화(梅花)에서 보기로 한다.

 

一任繁華與寂寥 번화한 곳이든 조용한 곳이든 가리지 않고
春頭臘尾也消搖 봄이 시작되는 섣달에 응당 나서기 시작하네.
纔於有意無情處 비로소 뜻은 있고 정은 없는 곳에
已壓千花不敢驕 이미 온갖 꽃들을 누르고도 감히 교만하지 않네.

 

감정의 움직임이 없이 시를 쓰기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한청(寒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윤기(潤氣)가 없다. 봄이 오면 매화(梅花)는 온갖 꽃보다 먼저 피기 마련이지만 조금도 교만하지 않다는 것이 이 시의 주지(主旨).

 

 

 

 

현기(玄錡, 1809 순조9~1860 철종11, 信汝, 希菴)

는 역관 출신이지만 시작(詩作)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시신(詩神)이라 불렀다. 그는 출신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자 가난과 음주와 시작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서로 세한붕(歲寒朋)으로 일컫던 정지윤(鄭芝潤) 이 죽자 풍악산에 들어가 스스로 추담선자(秋潭禪子)라 하고 선문(禪門)에 의탁하였다. 많지 않은 그의 시작들이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희암시략(希菴詩略)34수가 전하고 있다.

 

현기의 시세계는, 스스로 ()’를 좇지 않았지만 시상이 기발한 것이 특색이다. 차동파운시매은(次東坡韻示梅隱)을 보기로 한다.

 

飢時噉飯飽時眠 배고플 때 밥먹고 배부르면 잠드니
一粟人間寄渺然 창해에 좁쌀 같은 인간 아득함에 붙였네.
踪跡閒雲空出峀 구름같은 종적은 부질없이 산동굴에서 나오고
性情枯木已爲禪 고목같은 성정은 이미 선()이 되었네.
千秋滾滾非還是 흐르는 천 년 세월에 비()가 도리어 시()가 되고
萬象紛紛醜更好 어지러운 만상은 추()가 연()이 되네..
滿眼梅花今負汝 눈에 가득한 매화가 지금 너를 저버려
淸香不與入詩篇 맑은 향기 시편속에 넣지 못하네.

 

이 시는 동파시를 차운한 것이지만, 내용은 고백적인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동파(東坡)적벽부(赤壁賦)에서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을 빌려 스스로 한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약점을 확인하고, 세상(매화)으로 부터 버림받아 시업(詩業)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회한을 만안매화금부여 청향불여입시편(滿眼梅花今負汝, 淸香不與入詩篇)”으로 토로하고 있다. 위항인(委巷人)의 불평음(不平音)을 완곡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나 시어(詩語)를 단련한 흔적은 없지만, 이 미련(尾聯)에서 보여준 기발한 발상은 범용한 시인으로서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현기의 시작 중에는 선자적인 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많다.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삶은 줄곧 세상과 등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승복을 입고 산문(山門)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향사르며 선대 쪽으로 가서, 이로부터 번뇌의 뿌리를 끊고자 하네[焚香欲向禪臺去, 從此斷除煩惱根 玄菴詩略』 「偶題].”라든가, “황금으로 고운 꽃도장 만들려 하나, 색과 상이 어찌 다르랴 헛되고 헛되어라[黃金欲鑄芳菲印, 色相奈他空復空 玄菴詩略, 落花].” 등이 이러한 삶의 부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장지완(張之琬, 1806 순조6~1858 철종9, 玉山, 枕雨堂)

4대에 걸친 무변(武弁) 가계에서 율과(律科) 출신으로 변전(變轉)중인(中人)으로 처음에는 아버지 덕주(德冑)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학서(李鶴棲)의 문인이 되었고, 김초암(金初菴)과 홍직필(洪直弼)을 찾아가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장지완(張之琬)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전이나 행장 등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정은 알 수 없으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기술관(技術官)의 고뇌를 우회적으로 토로한 술회시(述懷詩)가 산견(散見)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간경애(人間境涯)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가 문학에 바친 열성은 비연시사(斐然詩社)의 결성과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한편 철종(哲宗) 2(1851) 4, 5월에 걸쳐 통예원(通禮院)ㆍ관상감(觀象監)ㆍ사역원(司譯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ㆍ율학(律學)ㆍ산학(算學)ㆍ도화서(圖畵署)ㆍ사자청(寫字廳)ㆍ검루청(檢漏廳)의 중인 1872여명이 집단 소청운동을 일으킬 때 장지완(張之琬)은 율관(律官) 출신으로 별유사(別有司)에 추천되어 상소문의 작성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중인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대사회적 활동에도 장지완(張之琬)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지완(張之琬)장혼(張混)의 문하에서 사귄 장효무(張孝懋)ㆍ임유(林瑜)ㆍ고진원(高晉遠)ㆍ박사유(朴士有)ㆍ한백섬(韓伯瞻) 등과 어울려 비연시사(斐然詩社)를 결성하고, 오직 시문에만 뜻을 두고 자연 속에 노닐었으며 현기(玄錡)ㆍ정지윤(鄭芝潤) 등과 어울리어 시교(詩交)를 맺기도 하였다.

 

장지완(張之琬)은 성령론적 시론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문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작 역시 성령의 자유로운 발로에 치중하고 있다. 그가 침우담초서(枕雨談艸序)에서 "시는 성령(性靈)陶寫하는 것이라 한 지적이나, 서자암화도소집(書自庵和陶邵集)에서 시가 성정에서 나오는데 세상에 성정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詩出性情, 世無無性情之人, 故無無詩之人]”라 한 말은, 원매(袁枚)에 바로 앞서 을 제창했던 청대 오뇌발(吳雷發)시로 성정을 말하고 사람은 각각 성정이 있으니 또한 사람은 각각 시가 있을 뿐이다[詩以道性情, 人各有性情, 則亦人各有詩耳].”와 같은 주장이다. 이는 결국 시인의 개성(個性), 시의 개성(個性)을 강조한 말로서, 곧 시에서 자성일가(自成一家)를 요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장지완(張之琬)의 시작들은 침우당집(沈雨堂集)비연상초(斐然箱抄)로 정리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기행시로 채워져 있다. 인정세태(人情世態)를 진솔하게 묘파한 남전도중기견(南甸途中記見)중 두 수를 보기로 한다.

 

官道城邊矗石危 도성 주변의 관도에는 쌓아놓은 돌이 위태롭고
粉墻新塑女郞祠 채색한 담장에는 새로 지은 성황당이 있네.
行人漫把金錢擲 지나는 사람들은 어지러이 쇠돈을 던지고
枯樹枝頭五色絲 마른 나무 가지 끝에는 오색실이 걸렸네.

 

山木蒼蒼鷄犬鳴 푸르른 숲에 개닭이 짖는데
拄筇斜日問前程 저물녘 지팡이 짚고 갈길을 묻네.
村中少女太羞澁 마을의 소녀는 너무 부끄러워
半掩紅裙背面行 붉은 치마로 반쯤 가린 채 등 돌리고 가네.

 

장지완(張之琬)이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단촐하게 그린 8수 가운데 두 수이다. 이와 같이 장지완(張之琬)의 기행시들은 대체로 직접 목도한 경관과 인정을 소박하게 그린 것이 특징적이다. 시작(詩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양죽지사(平壤竹枝詞)(20)와유편(臥游篇)(80)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구에서 우리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위항인(委巷人)의 피맺힌 호소를 생생하게 얻어 들을 수 있다.

 

良犬馬爲友 老忠猶可稱 좋은 개는 말과 가까워 충성을 하는 일은 칭송할 만하다.
下與彘爲比 共歸廚下烝 그러나 아래로 돼지꼴이 되면 다같이 부엌에서 삶기게 되나니. 枕雨堂集1, 閒居有感自然宗人22

 

부림을 당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지만, 버림을 받게 될 때에는 개돼지 신세로 돌아가는 중인(中人) 사회(社會)의 불평음(不平音)이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고 우회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변종운(卞鍾運, 1790 정조14~1866 고종3, 朋七, 肅欠齋)

은 역관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이유원(李裕元)ㆍ윤정현(尹定鉉)ㆍ김공철(金公轍) 등과 깊은 친분을 맺고, 이들이 사행(使行) 길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수행했다 한다. 이유원은 변종운(卞鍾運)의 시를 가리켜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편벽됨을 피했다[高古避僻].”이라 하였고, 이재원은 성정이 발하는 것에 수식의 화려함을 힘쓰지 않았고 음운과 격조는 고상하길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 고상했다[性情所發, 不務藻華, 其音韻格調不冀高而自高].”라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바로 변종운(卞鍾運)의 시가 대체로 평이하면서도 격조가 높음을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불평음(不平音)을 토로할 때에도 그 분위기는 안온하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완곡함을 잃지 않았다. 다음의 중야문금(中夜聞琴)을 본다.

 

中夜萬籟寂 何人弄淸琴 한 밤 온갖 소리 죽은 듯 고요한데 어떤 사람이 저렇게 거문고를 울리나?
摵摵庭前葉 西風吹古林 우수수 마당 앞에는 잎 떨어지고 서풍은 옛 숲에 부는구나.
幽人聽未半 愀然坐整㯲 은자는 듣기를 반나마도 못한 채 근심스레 앉아 옷깃을 여미네.
寒虫秋自語 豈盡不平音 귀뚜라미는 가을엔 절로 울지만 어찌 불평한 심사를 다 말하겠는가?
皎皎天上月 照人不照心 하늘 위 밝은 달은 사람만 비추고 마음은 비추지 않는구나.

 

오언고시로 된 이 작품은 평이한 표현 속에 절제된 시인의 서정이 녹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위항인의 불평한 심사를 가을 밤에 우는 귀뚜라미에 의탁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귀뚜라미는 저절로 우는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 어찌 불평한 심사를 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 위항시인(委巷詩人)이 노린 것이다. ‘추연좌정금(愀然坐整㯲)’은 소식의 추연정금위좌(愀然正㯲危坐)’에서 따왔으나, 변종운(卞鍾運)의 시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새로운 맛을 만들고 있다.

 

 

한편 변종운(卞鍾運)지기설(知己說)을 펴 지기(知己)의 의미를 지아심(知我心)’으로 푸는 등 지기(知己)를 구하는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다음의 시에서 보듯이,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토로하여 신분적 한계를 초월한 이해를 원하였음에도 이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이이의(而已矣)를 보인다.

 

我有數卷書 나에게 몇권의 책이 있건만
恨不同學鄒魯諸君子 공맹(孔孟) 제군자(諸君子)를 배우지 못해 한스럽네.
我有一壺酒 나에게 한 병 술이 있건만
恨不同飮燕趙悲歌士 ()과 조() 슬픈 노래 주인공 함께 마시지 못함이 서러워라.
一未能遂平生志 평생의 뜻 하나도 이룬 것 없는데
白髮數莖而已矣 백발만 몇 가닥 났을 뿐이네.
忽然一陣芭蕉葉上雨 홀연히 파초잎에 한바탕 비가 듣더니
胡爲乎滿庭樹木秋聲起 어찌하여 왼 뜰의 나무에 가을 소리 일어나는가?

 

여기서 초성(楚聲)은 나라의 슬픈 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때를 만나지 못한 한을 말한다. 연조비가사(燕趙悲歌士)한유(韓愈)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에 보이는 연조(燕趙)는 옛부터 감개비가지사(感慨悲歌之士)가 많다[燕趙古稱感慨悲歌之士]’에서 온 것이거니와 벼슬에 뜻을 얻지 못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박윤묵(朴允默)강개격절(慷慨激切)하여 비가격공(悲歌擊筇)의 풍()이 있다[慷慨激切 有悲歌擊筇之風者. 嚴氏三世稿序, 存齋集23]”라 한 것이라든가 최영년(崔永年)초소(楚騷)의 완측(惋側)과 조식(曹植)ㆍ사령운(謝靈運)의 침울(沈鬱)을 방불케 한다[楚騷之惋側, 曹子建謝靈運之沈鬱 四名子詩集, 四名子詩集序].”고 한 것과 정래교(鄭來僑)연조감개지음(燕趙感慨之音)이 있다[議歌詠者, 亦多有燕趙感慨之音也. 完巖集』 「金澤甫萬最墓誌銘]”고 한 비평도 이 때문이다.

 

 

 

황오(黃五, ?~?, 綠此)

는 그를 알게 해주는 어떤 문자(文字)에도 그의 신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한 신분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최영년(崔永年)이 쓴 황녹차선생시집서(黃綠此先生詩集序)에 의하면, 황오(黃五)가 불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가 없다[先生佛緣出世, 卓犖不羈, 寄托高風].

 

두둥실 거침없이 내닫기만 한 그의 삶의 방식은 그가 이룩한 시의 세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재가 광범할 뿐 아니라 꾸미는 일을 도무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세고 거칠고 힘찰 뿐이다. 다음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小姑十四大於余 아가씨는 열네살 나보다 큰데
學得秋千飛鷰如 그네를 배워서 제비처럼 나네.
隔窓未敢高聲語 창문 너머 감히 큰 소리로 말 못하고
柿葉題投數字書 감잎에 몇 글자 글을 써서 던진다.

 

추천(秋千)이라는 작품의 네번째 것이다. 황오(黃五)의 거칠고 진솔한 삶이 아니고서는 이와 같이 체험적인 염정시를 대담하게 생산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한선(寒蟬)이다. 이에서 과시한 그의 오만(傲慢)이 바로 그의 높은 풍도(風度)임을 알게 해 준다.

 

寒蟬曉脫去 殼在靑山中 쓰르라미가 새벽에 빠져 나가고 껍질이 청산에 남아 있다네.
樵童摘歸視 天下生秋風 초동이 주워서 집에 돌아와 보니 천하에 갑자기 가을 바람이 일어나네.

 

원제(原題)탈각(脫殼)이지만 한선(寒蟬)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초동적귀시(樵童摘歸視)”는 전혀 꾸밈을 고려하지 않은 무잡(蕪雜)과 오만(傲慢)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 이는 우리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천하생추풍(天下生秋風)”에 이르러 대인(大人)같은 그의 풍도(風度)를 절감케 한다. 이러한 기세(氣勢)로 사소한 불평음(不平音)을 초극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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