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2) 『국조시산』과 격조론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2) 『국조시산』과 격조론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6:19
728x90
반응형

 2)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格調論)

 

국조시산(國朝詩刪)의 기본 성격은 허균(許筠)이 초선(鈔選)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자신이 선발(選拔)한 작품에 스스로 비()와 평()을 함께 붙이고 있어 이는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그 유례가 없는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시대사적으로는,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이후 목릉성세(穆陵盛世)에 이르는 150년간은 조선 시대의 소단(騷壇)이 전에 없이 다양한 전개를 보이면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이것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 시대에 그 비평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무비(無比)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허균(許筠)당시(唐詩)를 표준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주로 취택(取擇)한 것은 성률(聲律)이 맑고 색택(色澤)이 현란한 것이고 보면,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시()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본격파(本格派) 비평가(批評家)에 의하여 이룩된 보기 드문 성과라 할 것이다.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시인ㆍ비평가들이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 소원(疏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나, 허균(許筠)은 이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하여 이러한 취약점을 스스로 극복하여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가장 높은 시학(詩學)의 수준을 과시하고 있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조선조 정도전(鄭道傳)에서부터 권필(權韠)에 이르는 35()의 각체시(各體詩) 888수를 선집(選輯)하고 권말(卷末)에 허씨(許氏) 일가(一家)허문세고(許門世藁)를 부재(附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선집(詩選集)은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다가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박태순(朴泰淳)에 의하여 다시 편집, 간행되었다. 서문(序文)에는 숙종(肅宗) 21()1695년의 간기(刊記)가 있으나 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여후 박태순은 광주에 부윤으로 재직할 때 허균이 엮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을 간행했다[朴汝厚泰淳, 尹廣州也. 刊行許筠所纂國朝詩刪].’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재직한 숙종(肅宗) 23(1697)이 간행 연대가 될 것이다.

 

그의 서문에 따르면, 허균(許筠)이 이미 피주(被誅)되자 이 선집(選集)과 그의 저술들은 거의 인망(湮亡)되기에 이르렀고 혹 호사가(好事家) 가운데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폐할지언정 그 소집(所集)은 폐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또 많지 않은 우리나라 시선집(詩選集)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이 선집(選集)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고 증정(證定)을 가하여 수권(數卷)으로 선집(選集), 간행한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박태순(朴泰淳)은 이로 인하여 그 뒤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1699)에 전라도 유생(儒生)들로부터 규탄을 받아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기까지 하였다 한다.

 

이 책은 9() 4()의 목판복(木版本)이다. 이 밖에도 수종(數種)의 이본(異本)필사본 51, 印本 21이 유전(流傳)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대개 집중(集中)의 고시(古詩)와 잡체시(雜體詩)를 수재(收載)하지 않았거나 권말(卷末)의 허문세고(許門世藁)가 빠져 있는 것들이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이전의 시선집(詩選集)으로는 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선(東文選)(詩文合集)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조선초기의 것들이며, 뒤에 다시 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선(東文選)은 각각 속편(續編)이 나오기까지 하였으나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그 소거(所據)가 불명(不明)하며 속동문선(續東文選)은 정편(正篇)이 간행된 지 불과 40년 뒤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동문선(東文選)이후 우리나라 시업(詩業)이 크게 떨친 조선중기의 시선집(詩選集)으로서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자료적 의미는 기록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집(選集)에는 금체(今體)는 물론이요 고조장편(古調長篇)과 잡체(雜體)에 이르기까지 가구(佳句) 절조(絶調)마다 편자의 비()와 평()을 붙이고 있어 이는 한갖 선시(選詩)의 작업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수시화(惺叟詩話)가 조선중기까지의 한시약사(漢詩略史)라 한다면,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 구체적인 실제비평이므로 이것들이 우리나라 시사(詩史)연구에 기여한 공업(功業)은 막중(莫重) 이상으로 값진 것이다.

 

한편 이 책에는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 역대의 시화(詩話)ㆍ만록(漫錄)에서 찾아 음각(陰刻)으로 보주(補注)를 붙이고 있다. 이는 아마 고본(稿本)을 재편집(再編輯)하는 과정에서 박태순(朴泰淳) 자신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에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여 거기에 정정(訂定)을 가()하고, 또 제가(諸家)의 시화(詩話)에서 따서 같은 종류의 것을 보충하고 베껴서 몇 권을 만들었다.

於是, 廣求諸本, 頗加證定, 又取諸家詩話, 以類補綴, 繕寫爲幾卷.

 

 

이 언급으로 보아 박태순(朴泰淳)이 한 일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보주(補注) 가운데는 양경우(梁慶遇)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峰類說), 차천로(車天輅)오산설림(五山說林)등도 보이는 바, 편자인 허균(許筠)이 동시대인의 저술까지 두루 섭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특히 양경우(梁慶遇)이수광(李睟光)유몽인(柳夢寅) 등은 허균(許筠)보다도 뒤에 죽었다. 그리고 전기(前記) 시화서(詩話書) 가운데서 간행 연대가 알려져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허균(許筠)이 죽기 4년 전에 간행되었으나, 성수시화(惺叟詩話)에 따르면 정미년(丁未年, 39)에 이미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완성(完成)된 것으로 보인다. 허균(許筠)의 태인은거(泰仁隱居) 이후의 시기이기 때문에 그가 득세(得勢)한 바쁜 생활 속에 저술을 할 여유는 없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허균(許筠)홍길동전(洪吉童傳), 은인(隱人)의 전기인 장산인전(張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등 서사체 문장(敍事體 文章)을 통하여 그의 산문(散文)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문학으로 영채(英彩)를 발한 것은 시와 비평이다. 박순(朴淳)에게 당()을 배운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이달(李達) 등이 등장함에 따라 조선중기 소단(騷壇)의 주류가 학당(學唐)으로 경도(傾倒)하게 되었거니와 이달(李達)로부터 당()을 배워 시인으로 성장하게 된 허균(許筠)은 맑고 고운 시로써 정평(定評)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비평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국조시산(國朝詩刪)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등의 저작을 통하여 격조 높은 당시(唐詩)의 성격과 학당(學唐)의 시사적(詩史的) 의미를 명쾌하게 개진함으로써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높은 경지를 모색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그 자료적 의미가 기록되어 마땅하다.

첫째, 당시(唐詩)에 근접하고 있는 조선 전기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일구일련(一句一聯)에 이르기까지 비평을 붙여 근당(近唐)의 사실을 증험(證驗)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唐詩)의 좋은 표준척(標準尺)으로 우리 시()의 성운(聲韻)을 점검하여 시에 있어서 형식적인 기교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른바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우는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의 시편(詩篇)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 근당(近唐)으로 알려진 이주(李胄)신광한(申光漢)김정(金淨)나식(羅湜) 등의 각체시(各體詩)에 대하여 그의 다양한 표현을 빌어 비()와 평()을 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세상에서 해동(海東)강서시파(江西詩派)로 불러 온 이행(李荇)의 시()에 대해서도 당시풍(唐詩風)이 깃든 작품에 대해서는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초기 송시권(宋詩圈)에서 사실상 일탈(逸脫)한 바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작품에 대해서도 유독 당()에 핍근(逼近)하다고 할 정도로 허균(許筠)의 당()에 대한 관심은 절실하다.

 

그러나 허균(許筠)이 비평가로서의 높은 조감(藻鑑)을 과시한 것은 성률(聲律)에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뿐만 아니라 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의 도처에서 시()의 음악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의 시작(詩作)을 수십편이나 뽑아 넣으면서 그 경위를 성수시화(惺叟詩話)6364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시()를 내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뽑아 넣은 것이 각각 수십편이나 되는데 음절(音節)은 정음(正音)에 들 만하지만 그 밖에는 뇌동(雷同)을 면치 못한다.

二家詩, 余選入於詩刪者, 各數十篇, 音節可入正音, 而其外不耐雷同也.

 

그가 이들의 시()를 선발(選拔)한 기준이 음절(音節)에 있었음을 사실대로 토로하고 있다. 계속하여 그는, 내 일찍이 고죽(孤竹)의 오언고시(五言古詩)와 율시(律詩), 망형(亡兄)의 가()ㆍ행(), 소재(蘇齋)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지천(芝川)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손곡(蓀谷)ㆍ옥봉(玉峯) 및 죽은 누이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한 책으로 만들어 보니 그 음절(音節)과 격률(格律)은 모두 옛 사람에 가까우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죄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아아! 누가 그 원래의 소리로 돌이키겠는가?

余嘗聚孤竹五言古詩, 亡兄古歌行, 蘇相五言律, 芝川七言律, 蓀谷玉峯及亡姊七言絶句, 爲一帙看之, 其音節格律, 悉逼古人, 而所恨氣不及焉. 嗚呼, 孰返其元聲耶.

 

 

라 하여 역시 선시(選詩)에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음절(音節)이나 격률(格律)과 같은 시()의 소리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개별 작품에 대한 실제비평을 행함에 있어서도 당()과 비당(非唐)은 엄격히 구별하고 있으며 특히 근당(近唐)의 시편(詩篇)에 대해서는 성운(聲韻)을 논하는 의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허균(許筠)의 성운(聲韻)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고려시대의 시작(詩作)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채(異彩)를 발하고 있다.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대해서도 각각 그 음악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색(李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벽루(浮碧樓)에 대하여 성수시화(惺叟詩話)13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꾸미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음조에 합치하여, 읊조린 것이 신묘하고 뛰어나다.

不雕飾, 不探索, 偶然而合於宮商, 詠之神逸.

 

 

스스로 격조(格調)에도 뛰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에 대해서도 성수시화(惺叟詩話)16에서 음절이 흥겨우니 성당의 풍격이 있다[音節跌宕, 有盛唐風格].’이라 하여 그 성당(盛唐)의 풍격(風格)을 특히 음절(音節)로써 조감(藻鑑)하고 있다. 그리고 강남녀(江南女)(七絶)에 있어서도 성수시화(惺叟詩話)16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풍류(風流)가 호굉(豪宕)하여 천고(千古)에 빛나며 시() 또한 악부(樂府)와 너무 닮았다.

風流豪宕, 輝映千古, 而詩亦酷似樂府.

 

 

이렇듯 악부(樂府)에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허균(許筠)의 높은 안목 때문에 국조시산(國朝詩刪)은 후대의 시인(詩人)과 묵객(墨客)들에게 널리 읽혀진 바 되었으며 특히 시화(詩話)와 비평서(批評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그의 종남총지(終南叢志)에서, 이수광(李睟光)정사룡(鄭士龍)후대야좌(後臺夜坐)시를 폄하(貶下)하여 논한 것을 허균(許筠)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균(許筠)이 편찬한 국조시산(國朝詩刪)가운데 이 시를 뽑아 넣고 하기를, “이 늙은이의 이 연()은 압권(壓卷)임에 틀림없다라 하였다. 허균(許筠)은 조감(藻鑑)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으니 마땅히 지봉(芝峰)의 이러한 폄론(貶論)이 있는 것을 깊이 이해하였을 것이다. 어찌 자세하게 궁구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겠는가?

許筠所撰國朝時刪中, 選入此詩而評之曰: “此老此聯, 當壓此卷.” 許筠以藻鑑名世, 則宜有所深解, 芝峰之有此貶論者, 豈未嘗細究而然耶?

 

 

허균(許筠)의 감식안(鑑識眼)에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으며,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택당(澤堂)과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잘 뽑은 것이라 칭도하고 있다. 시산(詩刪)이 세상에 성행(盛行)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惟許筠國朝詩刪, 澤堂諸公皆稱善揀, 詩刪之盛於世, 盖以此也.

 

 

다른 선집(選集)들은 모두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마는 오직 국조시산(國朝詩刪)만은 택당(澤堂)민을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모두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이 널리 세상에서 읽힌 까닭도 이 때문이라 하였다.

 

권말(卷末)에 부재(附載)허문세고(許門世藁)는 양천허씨(陽川許氏) 일문(一門) 가운데서도 이헌(頤軒) 허침(許琛)을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 초당(草堂, )과 형() 하곡(荷谷, ) 형자(兄姊) 난설헌(蘭雪軒) 6인의 시()를 시체(詩體)에 따라 편차(編次), 수록한 것이다. 여기서 허균(許筠)은 직접 부형(父兄)의 시편(詩篇)을 자선(自選)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가 가장 아끼던 시우(詩友) 권필(權韠)로 하여금 비선(批選)케 했다.

 

그러나 난설헌집(蘭雪軒集)의 시문(詩文)은 대부분이 허균(許筠)의 것이라고도 하며, 또는 허균(許筠)이 원()ㆍ명대(明代)의 가구(佳句) 가운데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골라 난설헌(蘭雪軒)의 작품이라 가칭(假稱)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에 첨입(添入), 전세(傳世)케 하였다는 세인(世人)의 기평(譏評)도 있는 바이수광(李睟光)남용익(南龍翼)김창협(金昌協) , 이는 농필(弄筆)의 여기(餘技)를 좋아하던 허균(許筠)의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