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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4.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4.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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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송시학(宋詩學)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1. 송시학(宋詩學)의 수용

 

 

한 시대(時代)에 한 문장(文章)이란 말은, 문장(文章)의 소상(所尙)이 시대(時代)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200() 동안 문학유교(文學儒敎)에 힘입어 사장학(詞章學)이 크게 떨쳤으며 소단(騷壇)은 유미(柔靡) 경조(輕佻)만당풍(晩唐風)이 속상(俗尙)이 되어 버렸지만, 고려중기에 이르러 이러한 풍상(風尙)은 시대(時代)의 추이(趨移)에 따라 커다란 변혁(變革)의 국면(局面)을 맞이하게 된다.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표전장주(表箋章奏) 등이 이때까지도 사대문자(事大文字)로서 중요시(重要視)되고 있었으므로 변려문(騈儷文)의 전통(傳統)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운문(韻文)에 있어서는 전시대(前時代)의 속상(俗尙)에 대하여 소단내부(騷壇內部)에서 이미 거부반응(拒否反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소식(蘇軾)으로 대표(代表)되는 송시학(宋詩學)의 유입(流入)으로 결정적인 국면(局面)이 전개(展開)된다.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청구풍아(靑丘風雅)서문(序文)에서 지적한 고려의 중엽엔 오로지 동파만을 배웠다[麗之中葉, 專學東坡].’가 바로 그것이다.

 

소단(騷壇)의 속상(俗尙)에 대하여 직접 그 폐해(廢害)를 토로(吐露)하고 나선 것은 임춘(林春)이 가장 심하다. 임춘(林春)은 그의 여조역락서(與趙亦樂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가서 이른바 장옥(場屋)의 글이라는 것을 칭하여 읽어 보니 공교하기는 공교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진실로 배우(俳優)들의 말과 같으니 스스로 생각컨대 이렇게 하고도 글을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비록 갑과(甲科)ㆍ을과(乙科)라도 가히 팔꿈치를 굽히고서도 차지하겠다.

故出而迺取時所謂塲屋之文者讀之, 工則工矣, 非有所謂甚難者, 誠類俳優者之說, 因自計曰如是, 而以爲文乎, 則雖甲乙, 可曲肱而有也.

 

 

당시의 과문(科文)이 부화(浮華)한 사장(詞章)을 위주(爲主)로 하기 때문에 마치 배우(俳優)들의 작희(作戱)와 다를 것이 없다고 불평(不平)하고 있다.

 

그는 또 조통(趙通)에게 주는 글에서, 근세(近世)의 과시(科試)가 성률(聲律)에 구애(拘碍)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장(文章)의 쇠퇴(衰退)함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으니 그대들 서너 사람이 서로 바꾸어 가며 창화(唱和)하여 진흥(振興)시킨다면 그 공()이 어찌 적으리오?

文章之衰, 未有甚於今日, 當賴足下輩三四人, 迭唱更和, 而振起之, 則其功豈細也哉?

 

 

새로운 문풍(文風)의 진작(振作)에 기대(期待)를 걸고 있다.

 

이에 앞서 최자(崔滋)의 증조부(曾祖父)인 최륜(崔崙)도 예종(叡宗)이 경박(輕薄)한 사신(詞臣)들과 더불어 풍월(風月)에만 힘쓰고 있는 현실(現實)을 간()하다가 다른 사신(詞臣)의 항변(抗辯)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춘주부사(春州副使)로 좌천(左遷)되기까지 한 사실이 보한집(補閑集)권상 18에 전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인 임춘(林春)의 글은 일단 과거제도(科擧制度)의 폐해(弊害)를 논()한 것이다. 두번이나 과거(科擧)에 실패(失敗)하고도 백발(白髮)이 된 몸으로 다시 과거(科擧)에 도전(挑戰)해야만 했던 자신의 불평(不平)한 심사(心事)를 토로(吐露)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과거(科擧)에 실패(失敗)한 원인(原因)을 전적으로 부화(浮華)한 사장(詞章)으로 시취(試取)하는 제도(制度)의 잘못에 돌리고 있을 뿐 정작 그의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른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황보항(皇甫沆)에게 술회(述懷)한 글 가운데서도 그에게 질박(質朴)서한(西漢)의 문장(文章)을 일으켜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가 그 글이다.

 

 

내 대강 보니 오늘날의 사대부로서 위대한 데 뜻을 둔 자는 매우 적고 다만 과거(科擧)를 부귀의 밑천으로 삼고 있을 뿐이니, 굳세게 그리고 힘차게 횡행(橫行)하여 저술(著述)의 마당에 크게 눈 떠 가히 서한(西漢)의 문장(文章)을 일으킬 사람이 그대를 두고 누구이겠는가?

僕略觀當世士大夫, 志於遠且大者甚少, 但以科第爲富貴之資而已. 其遒然霈然, 橫行闊視於綴述之場, 可以興西漢之文章者, 捨足下誰耶?

 

 

이는 박학(博學)과 문장(文章)을 겸유(兼有)해야 하는 유자(儒者)의 기본자세(基本姿勢)를 천명(闡明)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시대(時代)의 문장(文章)으로 유행(流行)하는 동파(東坡)의 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肯定的)인 반응(反應)을 보인다. 일찍이 그 글을 읽은 일은 없었지만, 구법(句法)에서 이미 서로 비슷하여 암암리에 부합하고 있음을 이인로(李仁老)에게 말하고 있다. 여미수논동파문서(與眉叟論東坡文書)가 그것이다.

 

 

내가 근세(近世)를 보니, 동파(東坡)의 글이 시대(時代)에 크게 행()하고 있다. 배우는 자 그 누가 마음속에 간직하여 몸살을 앓지 않으리오마는 그러나 한갓 그 글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다만 그 국량(局量)에 따라 편안한 대로 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억지로 본을 떠서 그 천질(天質)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점이다. 나와 그대는 일찍이 그 글을 읽은 일은 없지만 왕왕 구법(句法)이 이미 서로 비슷하니 어찌 마음 가운데서 얻은 것이 암암리에 서로 합치(合致)한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지은 몇 편이 자못 체()를 갖추었기로 오늘 부쳐 보내노니 받아 보고 가르침을 내려주면 다행이겠나이다. 이만 줄입니다.

僕觀近世, 東坡之文大行於時, 學者誰不伏膺呻吟? 然徒翫其文而已, 就令有撏撦竄竊, 自得其風骨者, 不亦遠乎. 然則學者但當隨其量以就所安而已. 不必牽強橫寫, 失其天質, 亦一要也. 唯僕與吾子雖未嘗讀其文, 往往句法已略相似矣, 豈非得於其中者闇與之合耶. 近有數篇, 頗爲其體, 今寄去, 幸觀之以賜指敎, 不具

 

 

이에 대하여 이인로(李仁老)가 직접 회시(回示)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파한집(破閑集)권하 3의 다음 글에서 보면 임춘(林春)동파(東坡)의 시세계를 추수(追隨)하고 있었음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난다.

 

 

시인(詩人)들이 시()를 지을 때 고사(故事)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점귀부(點鬼簿)라 한다. 이상은(李商隱)이 고사(故事)를 쓰는 것이 험벽(險僻)하여 이를 서곤체(西崑體)라 하거니와 이것들은 다 문장(文章)의 한 병폐(病幣). 근래에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이 우뚝하게 나타나 그 법()을 좇아서 숭상하고 있지만 말 만드는 것이 더욱 공교하고 조금도 도끼질한 흔적이 없으니 가히 출람(出藍)이라 할 만하다내 친구 임춘(林春)이 또한 그 묘리(妙理)를 얻었다.

詩家作詩多使事, 謂之點鬼薄. 李商隱用事險僻, 號西崑軆, 此皆文章一病. 近者蘇黃崛起, 雖追尙其法, 而造語益工, 了無斧鑿之痕, 可謂靑於藍矣 吾友耆之亦得其妙

 

 

파한집(破閑集)권하 3의 글은 물론 시작법(詩作法)에 있어서 용사(用事)의 묘()를 말하는 데서부터 비롯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시사(示唆)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이상은(李商隱)을 계승한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시()의 오묘(奧妙)한 경지(境地)임춘(林春)이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송시학(宋詩學)이 급속도(急速度)로 밀려 들어온 것은 전적으로 동파(東坡)의 영향(影響)이 그렇게 한 것이다. 소식(蘇軾)이 생존(生存)하고 있을 때 이미 그를 사모(思慕)하여 김부식(金富軾) 형제(兄弟)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兄弟)명자(名字)를 따서 그들의 이름으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소식(蘇軾)이 죽은 지 불과(不過) 수십 년에 임춘(林春)동파시(東坡詩)의 묘법(妙法)을 터득하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동파시(東坡詩)의 위세(威勢)가 고려중기(高麗中期)의 소단(騷壇)에 크게 떨치고 있었던 것을 증거(證據)해 준다.

 

이인로(李仁老)도 처음에는 두보(杜甫)의 시()에 깊은 관심(關心)을 보이어 그의 파한집(破閑集)권중(卷中) 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풍아(風雅)가 사라지고부터 시인(詩人)들 모두 두보(杜甫)를 독보(獨步)라 추어 올렸지만 어찌 오직 말 만드는 것이 정밀하고 굳세어 천지의 정화(精華)를 다 긁어내는 데서 그쳤겠는가? 비록 밥 한 그릇을 두고서도 일찍이 임금을 잊은 적이 없어, 의연히 충의(忠義)의 절개가 마음 속에 뿌리를 박아 밖으로 나타나니 구구(句句)마다 후직(后稷)과 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自雅缺風亡, 詩人皆推杜子美爲獨步, 豈唯立語精硬, 括盡天地菁華而已? 雖在一飯, 未嘗忘君, 毅然忠義之節, 根於中而發於外, 句句無非稷契口中流出.

 

 

이처럼 칭예(稱譽)하고 있다.

 

하지만 파한집(破閑集)권상(卷上) 21을 보면 점차 소황(蘇黃)에 경도(傾倒)하여 두보(杜甫)와 소황(蘇黃)을 동렬(同列))에 올려 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구(詩句)를 조탁하는 법()은 오직 두보(杜甫) 홀로 그 묘리(妙理)를 다 얻었지만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에 이르러서는 고사(故事)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빼어난 기운이 마구 쏟아져 나와 시구(詩句)를 조탁하는 묘법(妙法)에 있어서는 두보(杜甫)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琢句之法, 唯少陵獨盡其妙 及至蘇黃, 則使事益精, 逸氣橫出, 琢句之妙, 可以與少陵幷駕.

 

 

뿐만 아니라 최자(崔滋)이인로(李仁老)의 말을 직접 인용(引用)하여 이인로(李仁老)가 소황(蘇黃)의 시세계에 깊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인로(李仁老)가 말하기를 두문불출하고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두 문집(文集)을 읽은 뒤라야 말이 힘차고 성운(聲韻)이 쇠소리를 내어 작시(作詩)의 삼매경(三昧境)을 얻어낸다하였다.

李學士眉叟曰: “杜門讀蘇黃兩集, 然後語迺然韻鏘然得作詩三昧.”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소황(蘇黃)의 문집(文集)을 읽어 삼매경(三昧境)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의 시()7() 5()도 모두 동파집(東坡集)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이인로(李仁老)의 시작(詩作)이 그대로 동파(東坡)를 모방(模倣)하고 있음을 단정적(斷定的)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初期)의 사정을 당시의 대표적(代表的)인 시인(詩人)임춘(林春)이인로(李仁老)의 경우를 예로써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뒤에 있어서도 기호(氣豪) 해박(該博)동파시(東坡詩)는 시수업(詩修業)의 필수교양(必須敎養)일 뿐 아니라 과제(科第)에서도 위세(威勢)를 떨쳤다. 이규보(李奎報)가 그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처음엔 과문(科文)을 익히느라고 풍월(風月)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시()짓기를 배우며 더욱이 동파시(東坡詩)를 좋아하게 되어 매년 방이 나붙고 나면 사람들은 금년에도 30명의 동파(東坡)가 나왔다고들 한다.

世之學者, 初習場屋科擧之文, 不暇事風月, 及得科第然後, 方學爲詩, 則尤嗜讀東坡詩, 故每歲牓出之後, 人人以爲今年又三十東坡出矣.

 

 

 

1) 이인로(李仁老)와 죽고칠현(竹高七賢)의 등장

 

이인로(李仁老, 1152 毅宗6~1220 高宗, 眉叟, 雙明齋)

한문학사 책이나 인터넷엔 이인로의 호가 쌍명재(雙明齋)로 나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쌍명재는 동시대인인 최당(崔讜)의 호로, 최당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즐겼다. 이인로도 여기에 참여하여 시를 지어 쌍명재집(雙明齋集)이 만들어졌고, 최당은 또한 썅명재기(雙明齋記)를 지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발(破閑集跋)에서 잘 나와 있다는 고려중기(高麗中期)의 소단(騷壇)에서 가장 성실하게 시()를 배우고 익힌 대표적인 시인(詩人)이다.

 

그는 고려 초기의 최충(崔沖)ㆍ이자연(李子淵)ㆍ김근(金覲)을 정점(頂点)으로 하는 삼대(三大) 명문(名門)의 하나인 인주(仁州, 仁川) 이씨(李氏) 자상(子祥)의 현손(玄孫)으로 알려져 있다이만열(李萬烈), 고려경원이씨(高麗慶源李氏) 가문(家門)의 전개(展開), 한국학보(韓國學報)21, p.7.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화엄(華嚴) 승통(僧統) 요일(寥一)의 밑에서 자랐다. 정중부난(鄭仲夫亂) 때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뒤에 환속(還俗)하여 명종(明宗) 10()에 등과(登科)했다.

 

그는 성품(性品)이 편급(偏急)하여 시속(時俗)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크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그는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맹주(盟主)답게 당시의 소단(騷壇)을 주도하였다.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이른바 원순문 인로시(元淳文, 仁老詩)’가 이러한 이인로(李仁老)의 위치(位置)를 가장 잘 대변(代辯)해 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문장(文章)은 천성(天性)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후천적(後天的)인 용공(用工)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는 그의 파한집(破閑集)권하(卷下) 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적에 황산곡(黃山谷)이 시()를 논평(論評)하여 이르되, 옛 사람의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 말을 만드는 것을 환골(換骨)이라 하고, 옛 사람의 뜻을 본 떠서 형용(形容)하는 것을 탈태(奪胎)라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산 채로 긁어 먹고 날로 삼키는 것과는 그 차이가 천양지판(天壤之判)이지만, 그러나 표절하여 공교하게 만든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찌 이른바 옛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데서 신의(新意)를 내어 묘()하게 된 것이라 하겠는가?

昔山谷論詩 以謂不易古人之意 而造其語 謂之換骨 規模古人之意 而形容之 謂之奪胎 此雖與夫活剝生呑者 相去如天淵 然未免剽掠潛窃以爲之工 豈所謂出新意於古人所不到者之爲妙哉 ?

 

 

우리나라 비평사(批評史)에서 이른바 신의(新意)’를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로써 도달(到達)할 수 있는 한계(限界)를 스스로 시인(是認)하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하는 것이 시작(詩作)의 상승(上乘)임을 말하고 있지만, 동파(東坡)나 산곡(山谷)과 같이 조어(造語)가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는 경지(境地)를 높이 칭예(稱譽)하였다. 신의(新意)는 작시(作詩)의 이상(理想)이요 상식(常識)이기 때문에 그는 용사(用事)와 같은 시작(詩作)의 기술(技術)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타고난 일재(逸材)가 있더라도 마음을 태우는 연탁(鍊琢)의 노력이 있어야만 천고(千古)에 그 이름을 드리울 수 있다고 한 것이 그의 지론(至論)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대한 후대인(後代人)의 비평(批評)사사여신(使事如神)’ ‘단련불부(鍛鍊不敷)’ 등과 같이 그의 표현기법(表現技法)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있다【『보한집(補閑集)(卷中)용재총화(傭齋叢話)의 비평(批評)이 방향을 같이하고 있다.

 

그의 아들 세황(世黃)에 따르면 그의 평생 저술은 고부(古賦) 5(), 고율시(古律詩) 1,500 여수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저술(著述)로는 은대집(銀臺集)20(), 후집(後集)4(), 쌍명재집(雙明齋集)3(), 파한집(破閑集)3()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파한집(破閑集)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부문학(辭賦文學)에 있어서도 단연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선구(先驅)가 되고 있었으며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시범(示範)한 그의 시작(詩作)은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만도 80여편(餘篇)에 이르고 있다.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는 서천수승원벽(書天壽僧院璧)(五絶) 산거(山居)(五絶)을 비롯하여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七絶) 8수 가운데서 소상야우(瀟湘夜雨), 동정추월(洞庭秋月)등이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과어양(過漁陽)(七絶), 유지리산(遊智異山)(七律) 등이 시선집(詩選集)에 모두 뽑히고 있으며 고시(古詩)에 있어서도 증사우(贈四友)(五古), 속행로난(續行路難)(七古), 호종방방(扈從放榜)(七古) 등이 함께 뽑히고 있다.

 

 

산거(山居)소상야우(瀟湘夜雨)를 차례대로 보기로 하자.

 

산거(山居)는 다음과 같다.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봄은 가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 하늘은 개였지만 골까기는 절로 침침하네.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대낮에 두견이 우는 것을 보니 비로소 깨닫겠도다 내 사는 곳 깊은 것을.

 

말은 많지 않지만 산속에 숨어 사는 자신의 처지를 잘 그린 작품이다. 이규보(李奎報) 하일즉사(夏日卽事)나무잎이 꽃을 가려 꽃은 봄이 간 뒤에도 남아 있고[密葉翳花春後在]’와 이 산거(山居)봄은 가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春去花猶在]’는 모두 봄이 지난 뒤에까지 꽃이 피어 있는 정경(情景)을 읊은 것이지만 좋은 대조(對照)를 보인다.

 

전자(前者)()’이라면 후자(後者)()’에 가깝다. 박진감(迫眞感)이 없는 것을 탓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외형(外形)에 있어서는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정제(整齊)된 작품이다.

 

 

소상야우(瀟湘夜雨)는 다음과 같다.

 

一帶滄波兩岸秋 한 줄기 파란 물가 두 언덕 가을에
風吹細雨洒歸舟 바람이 가랑비를 불어 돌아가는 배에 뿌린다.
夜來泊近江邊竹 밤 사이 강변의 대나무 숲 가까이서 자니
葉葉寒聲揔是愁 잎마다 우수수 모두 다 수심일세.

 

() 송적(宋迪)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 작자가 시()를 붙인 것이다.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는 모두 8()로 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소상야우(瀟湘夜雨)동정추월(洞庭秋月)점화(點化)의 묘()를 살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서거정(徐居正)이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권상 11에서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가리켜 모사(模寫)에 공교(工巧)한 작품이라 칭도(稱道)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이 소상야우(瀟湘夜雨)이백(李白)자야오가(子夜吳歌), 전기(錢起)귀안(歸雁), 두목(杜牧)박진회(泊秦淮)등을 연상케 하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 부착(斧鑿)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한 탁구(琢句)의 솜씨는 바로 이인로(李仁老)의 해박(該博)을 그대로 입증(立證)해 준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이인로(李仁老)ㆍ오세재(吳世才)임춘(林春)ㆍ조통(趙通)ㆍ황보항(黃甫沆)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등이 진대(晉代)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풍류운사(風流韻事)를 사모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던 일곱 사람의 모임이다. 이들을 죽림칠현(竹林七賢, 江左七賢)과 구별(區別)하기 위하여 해좌칠현(海左七賢) 또는 죽림고회(竹林高會, 竹高七賢)이라 한 것이다. 그 명호(名號)고려사(高麗史)파한집(破閑集)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이인로(李仁老)를 맹주(盟主)로 한 이 죽림고회(竹林高會)는 당시 소단(騷壇)의 거점(據點)이었으며 그 구성원(構成員)들은 모두 세상에 뜻을 잃고 시주(詩酒)로써 소요자적(逍遙自適)한 문인(文人)이요 지식인(知識人)이다. 무신란(武臣亂) 이후 소단(騷壇)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제현(李齊賢)역옹패설(櫟翁稗說)전집(前集)에서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거니와,

 

 

불행하게도 의종(毅宗) 말년(末年)에 무인(武人)들이 변()을 갑자기 일으켜 향초(香草)와 독초(毒草)가 같은 향기가 되고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렸다. 호구(虎口)에서 몸을 빼쳐 나온 자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관대(冠帶)를 벗고 굴갓을 쓰고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不幸毅王季年, 武人變起所忽, 薰蕕同臭, 玉石俱焚, 其脫身虎口者, 遯逃窮山, 蛻冠帶而蒙伽梨, 以終餘年.

 

 

이들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낙척불우(落拓不遇)하여 그들의 시작(詩作)도 온전하게 전하지 못했다. 시서(詩書)에 무성(茂盛)한 가화(佳話)를 남기고 있는 데 비하여 그들의 시작(詩作)임춘(林春)20(), 오세재(吳世才)3(), 조통(趙通)1()을 각각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임춘(林春, ?~?, 者之, 西河)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탈신(脫身)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일세(一世)를 경동(驚動)케 했으나 세 번이나 과거(科擧)에 도전한 불운(不運)을 겪어야 했으며 30여세(餘歲)의 일생(一生)을 침울(沈鬱)하게 보냈다이인로(李仁老), 제임선생문(祭林先生文)」】.

 

그의 시문집(詩文集)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인로(李仁老)에 의하여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으므로 그를 알게 하는 자료(資料)로서는 충분하다. 특히 그는 수십 편에 이르는 서계(書啓)를 통하여 당시 사단(詞壇)의 속상(俗尙), 과거제도(科擧制度)의 폐해(弊害), 자신의 모든 것까지 직접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문(詩文)에 대한 비평(批評)은 조선초기 이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의 문집(文集)이 조선초기 이후 행방을 감추었다가 숙종(肅宗代)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게 된 것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의 시문(詩文)에 대해서는 이인로(李仁老)서하집(西河集)의 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초기의 발언(發言)이다.

 

 

그의 시문(詩文)은 우리나라에서 포의(布衣)의 몸으로 세상에 내노라 하기로는 이 한 사람 뿐이다.

其詩文, 自海以東, 以布衣雄世者, 一人而已.

 

 

성현(成俔)용재총화(傭齋叢話)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인로(李仁老)의 시()임춘(林春)의 문()을 합평(合評)하여, 이인로(李仁老)는 단련에 능했으나 펴지 못했고 임춘(林春)은 진밀(縝密)에 능했으나 통하지 못했다.

李仁老能鍛鍊而不敷, 林春能縝密而不關.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임춘(林春)의 문장(文章)을 깎아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격(氣格)이 그렇게 높지 못하고 조어(造語)에 있어서도 공교하고 정치(精緻)하지 못하여 한 시대의 시인(詩人)에 지나지 않을 뿐, 멀리 전하여 그 이름을 오래남길 만한 자는 아니다.

氣格未甚軒高, 造語未甚工緻, 不過一世之韻士, 非傳遠不朽者也.

 

 

그러나 임춘(林春)의 장처(長處)는 시()보다는 문()에 있었던 것 같다. 포의(布衣)로서 일생(一生)을 끝낸 그답지 않게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선발책자(選拔冊子)에 그만큼 많은 문장(文章)이 뽑힐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단 특기(特記)할 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文章) 구법(句法)동파(東坡)와 핍진(逼近)하다고 하여 스스로 기뻐 하였거니와 진밀(縝密)한 그의 문장(文章)을 칭도한 후대인의 비평도 모두 산문(散文)과 유관(有關)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문집(文集)30()이 넘는 장편(長篇) 고시(古詩)를 남기고 있는 사실도 그의 산문취향(散文趣向)과 무관(無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시는 180여수(餘首)가 문집(文集)에 수록되고 있으며 시선집(詩選集)에 뽑힌 것은 20()에 이른다. 이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는, 차우인운(次友人韻)(七絶)을 비롯하여 여이미수회담지가(與李眉叟會湛之家(七律), 모춘문앵(暮春聞鶯)(七絶), 다점주수(茶店書睡)(七絶) 등이 여러 시선집(詩選集)에 뽑히어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은 그의 시우(詩友)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권하(卷下) 1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가 재주는 있으나 쓰이지 못하여 하늘가에 유락하여 나그네 신세로 떠돌아다니던 모습이 똑똑히 다 몇 자 사이에 나타났으니 이른바 시()가 마음에서 발원한다는 것이 믿음직하다.

其有才不見用, 流落天涯羈遊旅泊之狀, 了了然皆見於數字間, 則所謂詩源乎心者信哉.

 

 

기세탄식(棄世歎息)하는 넋두리가 많아 그 품격비평(品格批評)에 있어서도 고한수담(枯寒瘦淡)한 것으로 정평(定評)되고 있다. 이는 시()도 사람을 닮아 그토록 궁한(窮寒)하다는 말과 통한다.

 

차우인운(次友人韻)은 다음과 같다.

 

十載崎嶇面撲埃 십년동안 기구한 신세 얼굴에 먼지 투성이
長遭造物小兒猜 오랫동안 조물주 녀석 나를 시기했다.
問津路遠槎難到 나루터도 길이 멀어 뱃길도 가기 어렵고
燒藥功遲鼎不開 선단(仙丹)을 다리는 일도 늦어 솥도 아직 안 열었네.
科第未消羅隱恨 과거(科擧)는 아직도 나은(羅隱)의 한 가시지 않고
離騷空寄屈平哀 이소(離騷)에 공연히 굴원(屈原)의 슬픔 부쳤네.
襄陽自是無知己 양양(襄陽) 맹호연(孟浩然)이 워낙 지기(知己)가 없은거지,
明主何曾棄不才 명황(明皇)이 어찌 일찌기 재주 없다 버렸던가?

 

이 작품은 당시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성실(誠實)하게 시()를 익힌 임춘(林春) 자신의 해박(該博)을 과시한 득의작(得意作)이며 동파시(東坡詩)를 배우던 소단(騷壇)의 속상(俗尙)을 사실로써 보여 준 것이다. 이인로(李仁老)가 그의 파한집(破閑集)권하 7에서 임춘(林春)희증성주졸(戱贈星州倅)【『동문선(東文選)에는 제목이 희증밀주졸(戱贈密州倅)로 되어 있다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칭도했다.

 

 

고사(故事)를 사용한 솜씨가 더욱 정교(精巧)하여, 이야말로 고인(古人)금실로써 수를 놓았지만 흔적이 없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其用事益精, 此古人所謂: “蹙金結繡 而無痕跡

 

 

이 작품의 경우에도 그대로 들어 맞는 말이다. 특히 미련(尾聯)양양자시무지기 명주하증기부재(襄陽自是無知己, 明主何曾棄不才)’는 유명한 맹호연(孟浩然)의 사실(史實)을 의모(擬模)하여 자신의 처지(處地)맹호연(孟浩然) 이상으로 돋보이게 한 곳이다. 맹호연(孟浩然)이 명황(明皇)에게 부재명주기 다병고인소(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라 하였다가 도리어 경불구아 아기기경(卿不求我, 我豈棄卿)?’라고 핀잔을 받은 고사(故事)를 원용(授用)하여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맹호연(孟浩然)을 타매(唾罵)하고 있다. 맹호연(孟浩然)은 워낙 친구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구사(求仕)도 해 보지 않고 버림받은 몸으로 자처(自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춘(林春) 자신은 재주도 있고 과거(科擧)에도 응()했지만 끝내 쓰임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 이 작품(作品)에 함축(含蓄)되어 있다

 

 

 

오세재(吳世才, ?~?, 德全)

는 고려 초기 유가(儒家)로서 현달(顯達)한 명문출생(名門出生)이다. 오학린(吳學麟)의 손자며 세문(世文)의 아우요 이지심(李知深)의 사위다.

 

명종(明宗) 때에 과거(科擧)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천성(天性)이 구속 받기 싫어 하여 세상에 용납(容納)되지 못했다 한다. 이인로(李仁老)도 삼차(三次)나 그를 천거(薦擧)하였다가 끝내 쓰이지 못하고 동경(東京)에서 궁곤(窮困)하게 지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가 이인로(李仁老)임춘(林春)과 더불어 금란계(金蘭契)를 맺고 있는 것을 보면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핵심(核心) 멤버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규보(李奎報)오선생덕전애사(吳先生德全哀詞)에 따르면 그의 시문(詩文)은 한두체(韓杜體)를 얻어 우동주졸(牛童走卒)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당로(當路)한 재상(宰相)에게 관록(官祿)을 한 편지가 애절비장(哀切悲壯)하여 고인(古人)의 풍도(風度)가 있었다고 한다.

 

그보다 35세 연하(年下)이규보(李奎報)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許諾)하여 이규보(李奎報)가 그에게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는 사()를 올린 바 있다. 오덕전극암시발미(吳德全戟巖詩跋尾)에 따르면, 그의 시()는 준매경준(遵邁勁俊)하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것만도 적지 않았다고 하나,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전하고 있는 그의 시작(詩作)3()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병목(病目)(五律)은 여러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으며 특히 험운(險韻)으로 시()를 쓴 극암(戟巖)(五律)은 김사(金使)로 하여금 재삼 탄미(歎美)케 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병목(病目)은 다음과 같다.

 

老與病相隨 窮年一布衣 늙음과 병이 서로 따라 한평생 베옷으로만 지냈네.
玄花多掩映 紫石少光輝 눈에 검은 꽃 피어 빛 많이 가리고 자석영처럼 모난 눈 광채가 적도다.
法照燈前字 羞承雪後陣 등불 앞에서 글자 보기 두렵고 눈 온 뒤에 눈부심이 부끄러워라.
待看金膀罷 閉目坐忘機 과방이 나붙는 것 기다려 보고 눈 감고 돌아앉아 세상 일 잊으리.

 

임춘(林春)차우인운(次友人韻)과 같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읊고 있으나, 직설적으로 자신을 토로하고 있어 토로(露出)함이 거세(去勢)되고 있다. 전편이 높고 낮은 데도 없이 의사를 운반하는 기운 또한 힘차다

 

 

 

 

조통(趙通, ?~?, 亦樂)

임춘(林春)보다도 선배(先輩)였던 것으로 보아 칠현중(七賢中)에서도 연장(年長)이었던 것 같다. 그는 명성(名聲)이 명종(明宗)에게 들리어 자주 부름을 받았으며, 등제후(登第後)에 금()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삼년간(三年間)이나 구류(拘留) 되었으나 금인(金人)이 그의 재주를 애석(愛惜)하게 여겨 환국(還國)할 수 있었다. 이인로(李仁老)는 그를 사수우(山水友)로 추대(推戴)하였으며 임춘(林春)도 그에게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니 쇠퇴(衰退)한 문장(文章)을 일으켜 새로운 문풍(文風)을 진작(振作)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기대(期待)가 컸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동문선(東文選)1()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황보항(皇甫沆, ?~?)

은 특히 임춘(林春)과 친교(親交)가 있어 임춘(林春)은 그의 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 증희약수(贈戱若水)(), 송황보항부충주서(送皇甫沆赴忠州序)등의 시문(詩文)을 통하여 황보항(皇甫沆)박학(博學)과 문사(文辭)를 칭도하고 있으며 특히 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에서는 저술의 광장을 멋대로 보며 서한(西漢)의 문장을 흥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족하를 빼고 누구랴[闊視於綴述之場, 可以興西漢之文章者, 捨足下誰耶]?’라 하여 저술(著述)의 마당에 크게 눈 떠 서한(西漢)의 문장(文章)을 일으켜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문학(文學) 역시 명가(名家)의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편(詩篇)은 후대(後代)의 선발책자(選拔冊子)에서 뽑아주지 않았다.

 

 

함순(咸淳, ?~?)

역시 고려사(高麗史)문장과 절도에 맞는 행동으로 당시에 이름났다[以文章節行, 名於時].’라 한 것으로 보아 문장(文章)으로 그의 이름이 일시(一時)에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인(騷人)으로서의 함순(咸淳)임춘(林春)의 송서(送序) 송함순부익령서(送咸淳赴翼嶺序)와 시화서(詩話書)에 전하는 일화(逸話)를 통하여 그 풍류(風流)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담지(李湛之, ?~?)

는 칠현(七賢) 가운데서도 특히 임춘(林春)이인로(李仁老)와 친교(親交)가 있었으며 이인로(李仁老)의 이른바 사우중(四友中) 한 사람이다. 이인로(李仁老)의 사우(四友)백락천(白樂天)의 사우(四友)를 의방(擬放)한 것으로 임춘(林春)시우(詩友)’, 조통(趙通)삼림우(山林友)’, 이담지(李湛之)를 주우(酒友), 석종령(釋宗聆)공문우(空門友)’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학문(學問)을 닦던 시절엔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독서(讀書)를 했으며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卷上 특히 술을 좋아하므로 이인로(李仁老)가 주우(酒友)로서 우대(優待)한 것이다.

 

그러나 임춘(林春)이 그에게 바친 증이담지(贈李湛之)(五律), 여이미수회담지가(與李眉叟會湛之家)(五律) 등의 시편(詩篇)으로 보아 평란후(平亂後) 서울에 돌아와서도 임춘(林春)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그의 집에서 시주(詩酒)로써 자오(自娛)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시작(詩作)을 따로 뽑아 준 선발책자(選拔冊子)는 없다.

 

 

 

2) 김극기(金克己)와 진화(陳澕)의 소이(小異)

 

김극기(金克己, ?~?, 老峯)진화(陳澕, ?~?, 梅湖)는 시대적으로도 선후(先後)의 차가 있을 뿐 아니라 개성의 빛깔에서도 서로 농도를 달리 하는 소이(小異)가 발견되지만, 남용익(南龍翼)은 그의 기아(箕雅)서문(序文)에서 이들의 시세계를 유려(流麗)’로써 한 데 묶었다[流麗則鄭司諫金內翰李銀臺陳翰林鄭雪谷鄭圓齋].

 

그러나 진화(陳澕)에 대해서는 한림별곡(翰林別曲)1장에서 원순문 인로시 공로사육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 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 어려서 이규보와 명성을 나란히 하여 당시엔 이정언과 진한림으로 불렸다[少與李奎報齊名, 時號李正言陳翰林]’이라 한 이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지봉유설(芝峯類說)성수시화(惺叟詩話)등에서 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는 서로 이름을 나란히 한 것으로 말해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陳澕)이규보(李奎報)가 함께 시로써 일시에 이름을 드날린 소단(騷壇)에서의 비중을 말한 것이며 그 시의 내질(內質)이나 특장(特長)에서 대동(大同)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서거정(徐居正)이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권하(卷下) 4에서 이규보(李奎報)하일즉사(夏日卽事)

 

輕衫小簟臥風櫺 대닢자리 가벼운 적삼으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울음 두세 소리에 꿈이 깨었네.
密葉翳花春後在 나무 잎에 꽃이 가리어 꽃은 봄 뒤에도 남아 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나와 비 속에서도 밝구나.

 

진화(陳澕)야보(野步)

 

小梅零落柳僛垂 매화 떨어지고 버들은 어지러이 춤추는데
閑踏淸嵐步步遲 한가로이 기운 밟으니 걸음마다 더디네.
漁店閉門人語小 어점은 문을 닫고 사람 소리 적은데
一江春雨碧絲絲 온 강 봄비가 실실이 푸르네.

 

를 가리켜 품조운격(品藻韻格)이 한 손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으며, 그는 또 진화(陳澕)송도(松都)()정지상(鄭知常)서도(西都)를 대비한 곳에서 사어(詞語)가 청신미려(淸新美麗)하여 나란히 함께 갈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이규보(李奎報)하일즉사(夏日卽事)진화(陳澕)야보(野步)를 가리켜 마치 한 손에서 나온 것 같다고 추켜올린 것은 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의 시세계가 그 내질(內質)에서 전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웅혼(雄渾)이규보(李奎報)의 시작(詩作) 가운데서도 특히 완려(婉麗)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하일즉사(夏日卽事)의 솜씨가 진화(陳澕)야보(野步)와 너무도 닮아 있음을 말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진화(陳澕)송도(松都)정지상(鄭知常)서도(西都)를 대비하여 청신미려(淸新美麗)’로 합평(合評)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시작(詩作)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는 공통분모(共通分母)를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남용익(南龍翼)이 지적한 류려(流麗)’의 근거를 서거정(徐居正)이 일찍이 사실로써 보여준 것이 된다.

 

 

 

김극기(金克己)는 그 많은 시작(詩作)에 비하여 그의 행적을 알게 하는 기록은 너무도 빈약하며 시화서(詩話書)에 일화(逸話)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개구성장(開口成章)하여 경인어(驚人語)가 많았으나 등과후(登科後)에는 서울에 오지 않고 일인운사(逸人韻士)와 산림(山林)에서 소오(嘯傲)하다가 고종(高宗) 때에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사신(使臣)으로 금()에 갔다가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중도(中途)에 객사(客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생평(生平)의 전부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김원외집(金員外集)【『보한집(補閑集)』】, 김거사집(金居士集)【『용재총화(傭齋叢話)86 등으로 불리운 시문집(詩文集)이 있어 조선초기까지도 유전(流傳)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유저(遺著)는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의 배려로 고율시(古律詩), 사륙(四六), 잡문(雜文) 135권으로 편간(編刊)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서 150권의 시문집(詩文集)이 있었다고 소주(小註)한 내용과도 거의 일치한다.

 

이와 같이 방대한 그의 저술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시화서(詩話書)나 만록류(漫錄類)에 빈번하게 오르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문학사에서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서는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시선집(詩選集)으로는 가장 오래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247수 수록)에 그의 시편(詩篇)37수나 수록되어 이규보(李奎報)30, 이인로(李仁老)28수를 상회하고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50여수가 선발(選拔)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도처에 130여수의 제명(題詠)이 실려 있어 서로 중복되는 시편(詩篇)을 제외하고서도 그의 유작(遺作)은 물경 180여수에 이른다. 시문집(詩文集)이 전하지 않는 김극기(金克己)의 경우 이처럼 그의 가작(佳作)이 다량으로 선발되고 있다는 것은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비중을 다시 인식케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는 그의 시작(詩作)은 그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어옹(漁翁)(七絶)을 비롯하여 서루만망(西樓晩望)(七絶), 증미륵사주노(贈彌勒寺住老)(七絶), 이화(李花)(七絶), 추만월야(秋晚月夜)(七絶), 전가사시(田家四時)(五律4), 패상도오학사운(浿上渡吳學士韻), 파산현우서(派山縣偶書)(七律), 숙향촌(宿香村)(五古), 유감(有感)(五古), 취시가(醉時歌)(七古) 11편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경구(警句)들이 율시(律詩) 가운데 많다.

 

 

대표작 어옹(漁翁)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天翁尙不貰漁翁 하늘이 아직도 어옹(漁翁)에게 너그럽지 않아
故遣江湖少順風 일부러 강호(江湖)에 순풍을 적게 보내네.
人世險巇君莫笑 인간세상 험하다고 그대는 비웃지 마라,
自家還在急流中 제 몸이 도리어 급류중(急流中)에 있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어부의 한취(閑趣)를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와 반대로 어부(漁父)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돋보이는 곳이다. 어부(漁父)는 취하여 자기 집이 위험한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卷中) 3에서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대하여 지은 시가 맑고도 밝으며 말은 다양하고도 더욱 풍부하다[屬辭淸曠 言多益富]’라 하였거니와, 그의 말이 얼마나 풍부한가는 다음의 경구(警句)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언율시(五言律詩)부터 보도록 하자.

 

전가사시(田家四時)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喚雨鳩飛屋 含泥燕入樑 비 오라고 비둘기는 지붕 위에 날아 들고 진흙 물고 제비들이 들보에 찾아 드네.()

 

雉爲哺雛瘦 蠶臨成繭肥 새끼들 먹이느라 꿩은 여위고 고치를 만들 때 누에는 살찌네.()

 

牧笛穿烟去 樵歌帶月還 목동의 피리 소리 저녁 연기 뚫고 가고 나무꾼 노래 소리 달을 띠고 돌아오네.()

 

板簷愁雪壓 荊戶厭風號 널판자 처마는 눈에 눌린 것 걱정하고 사립문은 바람 소리 윙윙하는 것 싫어하네.()

 

잉불역(仍佛驛)은 다음과 같다.

 

溪聲淸似雨 野氣淡如烟 시내 물소리 맑아 비오는 것 같고 돌 기운 담담하여 연기 같이 깔렸구나.

 

칠언율시(七言律詩)에서 보면 야좌(夜坐)고원역(高原驛)를 들 수 있다.

 

야좌(夜坐)는 다음과 같다.

 

薄祿微官貧始重 가난할 때 비로소 박록미관(薄祿微官) 중한 줄 알고
浮名末利醉還輕 취했을 때 도리어 부명말리(浮名末利) 가볍게 보네.

 

고원역(高原驛)은 다음과 같다.

 

三年去國成何事 3년 동안 나라 떠나 무슨 일 이루었나?
萬里歸家只此身 만리에서 돌아오니 다만 이 몸 뿐이로다.
林鳥有情啼向客 숲 새는 정이 있어 나그네 보고 지저귀고
野花無語笑留人 들꽃은 말없이 웃으며 나를 붙잡네.

 

위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그는 고시(古詩)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취시가(醉時歌)(七古)와 같은 명편(名篇)은 인간(人間) 김극기(金克己)의 기골(氣骨)과 품위(品位)를 함께 알게 해준다. 그러나 남송(南宋)의 육유(陸游)와 그는 같은 때에 세상을 살았지만 평담(平淡)한 그의 구법(句法)을 대할 때마다 육유(陸游)를 연상케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화(陳澕)는 무인(武人)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금()에 다녀온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에 뽑히어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갔다가 죽었다. 그의 문집(文集)매호유고(梅湖遺稿)가 전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조 영조(英祖代)에 편집된 것이며진화(陳澕), 매화유고(梅湖遺稿)ㆍ서문(序文) 참조(參照) 그 내용은 대개 역대(歷代)의 시화서(詩話書)에서 수집한 것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시선집(詩選集)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진화(陳澕)의 시()는 대개 청신(淸新)ㆍ유려(流麗)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태백출(變態百出)하여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그래서 후대인(後代人)의 비평도 각양각색이다.

 

시화집 작품명 품평
역옹패설(櫟翁稗說)後集 14 () 情致流麗
동인시화(東人詩話)권하 4 야보(野步) 淸新幻眇 閑遠有美
동인시화(東人詩話)권하 3 송도(松都) 淸新美麗
성수시화(惺叟詩話)7 야보(野步) 淸勁可詠
지봉유설(芝峰類說)동시10   詩甚淸麗

 

이에 반하여 진화(陳澕)의 시()를 두고 기호의활(氣豪意濶)송시(宋詩)의 여향(餘響)으로 파악한 비평도 없지 않다. 호장계열(豪壯系列)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매호유고(梅湖遺稿)() 雄俊淸麗
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52 七言長句. 豪健峭壯得之詭奇
이규보(李奎報),진군부화차운증지서(陳君復和次韻贈之序) 辭語奔放

 

서거정(徐居正)의 경우 시작(詩作)에 따라서 청려계(淸麗系)를 택하기도 하고 호장계(豪壯系)를 택하기도 하여 작품에 따라 그의 표준척(標準尺)도 변질되고 있음을 본다.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동문수(東文粹)에서 진화(陳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야보(野步)를 뽑아주지 않은 것도 청신(淸新)ㆍ완려(婉麗)를 싫어하는 그의 시관(詩觀)이 철저하게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진화(陳澕) ()의 일면만 보고 당시(唐詩)와의 관계를 논하거나유준(柳俊), 진화(陳澕)의 성당적(盛唐的) 시풍(詩風), 한국한문학연구(韓國漢文學硏究)6, 參照 또는 설의(設意)를 중요시한 것으로 파악하는 성과김성기(金聖基), 진화(陳澕)의 시()에 대하여, 백영 정병욱선생 환갑기념논총, 參照도 나옴직한 것이다. 시선집(詩選集)에 수록된 시작(詩作)30여편에 이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시가(詩家)의 사랑을 받은 것은 춘만(春晩)(七絶), 춘흥(春興)(一云野步)(七絶), 상춘정옥예화(賞春亭玉蘂花)(七律), 감흥화구매(感興和歐梅)(五古) 등이다.

 

 

야보(野步)는 다음과 같다.

 

小梅零落柳僛垂 매화 떨어지고 버들은 어지러이 춤추는데
閑踏淸嵐步步遲 한가로이 산() 기운 밟으니 걸음마다 더디네.
漁店閉門人語小 어점은 문을 닫고 사람 소리 적은데
一江春雨碧絲絲 온 강 봄비가 실실이 푸르네.

 

이미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하(卷下) 4에서 이 작품을 이규보(李奎報)하일즉사(夏日卽事)와 대비하여 마치 한 손에서 나온 것 같다[品藻韻格如出一手].’고 하였지만, 그러나 하일즉사(夏日卽事)는 그 미감의 표현이 동적(動的)인데 반하여 이는 정적(靜的)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속에 몰입하는 일이 없이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다는 경()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마치 한 폭의 스케치를 보는 듯하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와 더불어 류려(流麗)’로써 묶어진 소이(所以)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한림제유(翰林諸儒)와 사원(詞苑)의 흥기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經詩賦

試場긔 엇더하니잇고

琴學士玉荀文生 琴學士玉筍文生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이는 고종(高宗) 때의 한림제유(翰林諸儒)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첫 장이다. 의종(毅宗) 때의 무신란(武臣亂)으로 한때 문신(文臣)들이 지기(志氣)를 잃고 산림(山林)에 자복(雌伏)하는 퇴영적인 풍조가 미만(彌滿)하였으나 사장(詞章)을 숭상한 전시대(前時代)의 안정기반에 힘입어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전횡(專橫)하던 신종(神宗)ㆍ고종(高宗) 연간에 이르러 현량(賢良)과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일시에 성황을 이룬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 중의 일부다.

 

 

원순문(元淳文)의 원순(元淳)은 유승단(兪升旦, 1168 의종22~1232 고종19)

의 초명(初名)이다. 유승단은 특히 고문(古文)에 조예가 깊어 원순문(元淳文)’으로 불리었으며 석전(釋典)까지도 두루 통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그의 시작(詩作)10()을 넘지 못하지만 그의 시()는 대체로 말이 굳세지만 뜻은 부드러우며 용사함이 정밀하고도 간이하다[語勁意淳, 用事精簡]’고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평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율시(律詩)에 재능을 보여, 조상국독락원(趙相國獨樂園)(五律), 혈구사(穴口寺)(五律), 숙보령현(宿保寧縣)(五律) 등의 명편(名篇)을 남기고 있다.

 

숙보령현(宿保寧縣)은 다음과 같다.

 

晝發海豐郡 侵宵到保寧 낮에 해풍 고을을 떠나 밤 이윽하여 보령에 이르렀네.
竹鳴風警寢 雲泣雨留行 대나무 울리는 바람은 잠을 깨우고 구름 눈물 짓게 하는 비는 갈 길을 머무르게 하네.
暮靄頭還重 朝暾骨乍輕 저녁 노을에 머리 도리어 무겁더니 아침 햇살에 몸이 금새 가벼워지네.
始知身老病 唯解卜陰晴 비로소 알겠구나, 이 몸이 늙고 병들어 날 흐릴지 갤지를 미리 점칠 수 있음을.

 

유승단(兪升旦)의 시는 대개 단련(鍛鍊)에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다고 한 청구풍아(靑丘風雅)의 논평이 일찍이 있어 왔거니와, 이 작품의 함련(頷聯)은 특히 수사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공로(李公老, ?~1224 고종11, 去華)

는 고종(高宗) 때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왕이 심복으로 알아 크게 쓰려 하였으나 아깝게도 요절(夭折)하여 그의 시문(詩文)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말이 굳세고 고와 더욱 임금의 조령(詔令)에 초()하는 일과 대우의 문장에 뛰어났다[辭語遒麗 尤長於演誥對偶之文]’이라 하여 공로사륙(公老四六)’의 특장(特長)을 다시 확인케 한다.

 

 

이 밖에도 이윤보(李允甫, ?~?)

는 학론(學論)이 정박(精博)하여 시문(詩文)이 근대(根帶)가 있었으며 이규보(李奎報)도 그의 무장공자전(無腸公子傳)을 보고 근세에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론 이윤보가 참으로 훌륭한 사관의 재주로다[近得能文者, 李允甫眞良史才也].’라 한 것을 보면 그도 사한(史翰)에서 솜씨를 보인 능문(能文)의 학사(學士)임을 알 수 있다.

 

 

 

 

조충(趙沖, 1171 명종 1~1220 고종7, 湛若)

역시 일찍이 사원(詞苑)에 있어서 고문대책(古文對策)을 많이 쓰고 여러 번 예위(禮圍)를 맡아 명사(名士)를 선발하였다.

 

 

김양경(金良鏡, ?~1235 고종 22, 초명 仁鏡)

은 조충(趙沖)을 따라 거란(契丹)을 토벌한 바 있거니와, 문무이재(文武吏才)를 구비(具備)하고 시사(詩詞)를 잘하여 일시에 이름을 드날렸다.

 

그의 시작(詩作)9편이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을 뿐이지만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그를 평하여 글자를 사용함에 반드시 맑고도 신선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 편의 글이 나오면 당시의 풍속을 감동시키며 놀래켰다[凡使字必欲淸新 故每出一篇 動驚時俗]’이라 한 것을 보면 청신(淸新)한 그의 시()가 일시를 울렸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전(現傳)하는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서보좌후장상(書黼座後障上)(五絶)내직(內直)(七絶)이 널리 알려진 명작이다. 서보좌후장상(書黼座後障上)을 보인다.

 

園花紅錦繡 宮柳碧絲綸 동산의 꽃들은 비단 수놓은 것보다 붉고 궁중의 버들은 실 가지보다 푸르네.
喉舌千般巧 春鶯却勝人 목구멍과 혀가 천 가지로 공교하지만 봄 꾀꼬리가 도리어 사람보다 낫구나.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이수(二首) 가운데 두 번째 것이다. 희종년간(熙宗年間) 대관전(大觀殿) 보좌(黼座)의 후장(後障)이 훼손되자 거기에 무일도(無逸圖)를 그리게 하고 김양경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때 지어 바친 것이 이 작품이다.

 

주어진 명제(命題)의 구속을 받으면서도 간결하게 우의(寓意)를 투입한 솜씨가 일품이다. 안짝은 임금을 칭송한 부분이고, 바깥짝은 후설지직(喉舌之職)에 종사하는 군왕(君王)의 측근(側近)을 경계한 것이다. ‘벽사륜(碧絲綸)’은 버드나무가 실낱같이 푸르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왕()의 말은 실과 같이 가늘지만 일단 나가면 밧줄처럼 굵어진다는 사륜(絲綸)’의 원 뜻이 숨겨져 있다. ‘후설(喉舌)’은 사람 몸에서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군왕(君王)을 모시는 벼슬자리도 후설지직(喉舌之職)이라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간들의 후설(喉舌)보다 오히려 꾀꼬리의 소리가 더 낫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지(主旨).

 

 

임유정(林惟正, ?~?)

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집구시인(集句詩人)이며 그의 시작(詩作)30여 수나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동문선(東文選)에서 뽑아준 것이며 그 밖의 시선집(詩選集)에선 그의 시작(詩作)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집구시(集句詩)에 대해서는 특히 조선후기 이덕무(李德懋)가 이에 관심을 보여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4) 이규보(李奎報)의 종의분방(縱意奔放)

 

이규보(李奎報, 1168 毅宗 22~1241 高宗 28, 春卿, 白雲居士止軒三酷好先生)

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지만, 한미(寒微)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시주(詩酒)를 좋아하고 스스로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40대 초반까지도 신통한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불우하게 청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일시도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시()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어 시()를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시()ㆍ주()ㆍ금()을 너무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벼슬에 대한 집착도 과상(過常)할 정도로 대단했다. 고위관료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시재(詩才)를 과시하기도 하고 직접 글을 올려 벼슬을 구하기도 했다. 최충헌(崔忠獻) 부자(父子)에게 접근하게 된 것도 시문(詩文)의 교섭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렇게 하여 출세 가도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학자(學者)들은 도()를 행하기 위하여 벼슬을 한다지만, 이규보(李奎報)는 문장(文章)을 세상에 행하게 하기 위하여 벼슬을 한 문인 관료의 전형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시문집(詩文集)을 생전에 완성하여 유루(遺漏)없이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하여 자기를 과시한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이다. 한 마디로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과 시()와 그리고 그의 위인(爲人)까지도 함께 읽게 해주는 본보기로서도 중요하게 값할 수 있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웅장(雄壯)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은 세론(世論)이 공통적으로 일컬어 온 일이거니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는 특히 그러한 증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충분하고 남는다. 일필(一筆)에 삼백운(三百韻)을 뽑아내는 장편(長篇)의 구사력(驅使力)이 이 글에서도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편지 한 편에 일천수백언(一千數百言)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 힘과 기상(氣象)은 그의 권능(權能)임에 틀림없다.

 

문선(文選)()이 모범 문장(文章)으로 통행하고 있던 당시의 속상(俗尙)에서 빠져나와 당송(唐宋) 고문(古文)의 간결한 매력에 미련을 갖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명쾌(明快)를 특징으로 하는 고문(古文)의 구속은 본질적으로 감내(勘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로잡힘이 없이 자유롭게 붓가는 대로 내리갈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굴레란 처음부터 가당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육경(六經)ㆍ자사(子史)를 읽었으되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궁원(窮源)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동파(東坡)를 근세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켜 올리면서도 끝내 그는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설사 동파(東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성(天性)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죽어도 남의 글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신어(新語)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의 글을 훔쳐서 쓰려고 해도 원래 읽은 글이 없으므로 훔치려고 해도 훔칠 수가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옛 사람은 조의(造意)만 하고 조어(造語)는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뜻과 말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빈축을 받았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러나 어()와 의()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언어학의 상식에 걸려 그는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신경(新警)과 기발(奇拔)을 좋아하여 신어(新語)신의(新意)를 창출한 것은 이규보(李奎報) 문장(文章)의 장처(長處)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발(奇拔)과 기괴(奇怪)가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그의 글 도처에서 창출한 신조어(新造語)들이 이러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다른 글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도 의기론(意氣論)을 개진하고 시의 함축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시는 대체로 ()’보다는 ()’에 가깝다. 말의 뜻은 깊지만 시의 뜻은 깊지 못하다는 것이 적평(的評)이 될 것이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승(氣勝)한 시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는 외로운 시인(詩人)이요 문장가(文章家)였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백락천(白樂天)을 경모(敬慕)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색마(色魔)ㆍ주마(酒魔)시마(詩魔)가 그를 괴롭힌 친구[三魔], 이 중에서도 시마(詩魔)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마귀였다고 자술(自述)하고 있지만 이때는 시도 이미 기력을 상실한 듯이 보인다.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문집(詩文集)2,000수가 넘는 시편(詩篇)을 남기고 있으며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수록된 작품도 80편을 상회한다. 이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그의 시작(詩作) 중에서도 비평의 초점이 된 하일즉사(夏日卽事)(七絶)를 비롯하여 북산잡영(北山雜詠)(五絶), 영정중월(詠井中月)(五絶), 춘일방산사(春日訪山寺)(七絶), 구품사(九品寺)(五律), 우용암사(寓龍巖寺)(五律), 숙덕연원(宿德淵院)(五律), 부녕포구(扶寧浦口)(七律), 강상월야망객주(江上月夜望客舟)(七絶),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七古) 등이 그것이며 특히 경구(警句)으로써 화제가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송김선배등제환향(送金先輩登第還鄕)은 다음과 같다.

 

落日愁行色 孤烟慘別腸 지는 해에 행색(行色)이 시름겹고 외로운 연기에 이별이 서럽네.

 

하녕사(下寧寺)는 다음과 같다.

 

野荒偏引燒 江暗易生雲 들이 거치니 불 붙기 일쑤요, 강이 어두우니 구름이 쉬 생기네..

 

구품사(九品寺)는 다음과 같다.

 

虛閣秋來早 危峰月上遲 텅 빈 누각에 가을이 일찍 오고 가파른 봉우리에 달도 늦게 오르네.

 

숙덕연원(宿德淵院)은 다음과 같다.

 

竹虛同客性 松老等僧年 대나무 빈 것은 나그네 성질을 닮았고 소나무 늙은 것은 중의 나이와 같네.

 

기오덕전(寄吳德全)은 다음과 같다.

 

黃稻日肥雞鶩喜 누른 벼 날로 살찌니 닭ㆍ오리 기뻐하지만
碧梧秋老鳳凰愁 벽오동 가을에 늙어서 봉황새 시름짓네.

 

부녕포구(扶寧浦口)는 다음과 같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가 너무 맑아 한복판에 비친 달 정교하게 도장 찍고
浦濶貪吞入口潮 갯벌이 하도 넓어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듯 삼키네.

 

우거천룡사(寓居天龍寺)는 다음과 같다.

 

竹根迸地龍腰曲 땅에 흩어진 대 뿌리는 용의 허리인 양 구부러지고
萬葉當窓鳳尾長 창을 막은 파초 잎은 봉의 꼬린 양 길기만 하네.

 

위의 경구(警句) 가운데서도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卷上) 20에 나타나듯 기오덕전(寄吳德全)두보(杜甫)紅稻喙餘鸚鵡粒, 碧梧棲老鳳凰枝 秋興八首를 도습(蹈襲)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죽어도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노라고 외치던 이규보(李奎報)의 장담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부녕포구(扶寧浦口)에서 보여준 동적(動的)인 미감의 표현은 이규보(李奎報)의 욕심과 기상(氣象)을 함께 읽게 해주는 전형이다.

 

 

그의 대표작 하일즉사(夏日卽事)제포구소촌(題浦口小村),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를 차례로 보인다.

 

하일즉사(夏日卽事)는 다음과 같다.

 

輕衫小簟臥風櫺 대닢자리 가벼운 적삼으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울음 두세 소리에 꿈이 깨었네.
密葉翳花春後在 나무 잎에 꽃이 가리어 꽃은 봄 뒤에도 남아 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나와 비 속에서도 밝구나.

 

이 작품은 한결같이 완려(婉麗)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 사출(寫出)한 그의 정감(情感)은 무엇을 쓸 것인가를 분명히 하느라 말을 많이 한 결과가 되고 있다.

 

 

다음은 칠율(七律)의 대표작 가운데 흔히 부녕포구(扶寧浦口)로 알려져 있는 제포구소촌(題浦口小村)이다.

 

流水聲中暮復朝 흐르는 물소리에 아침저녁 지나고
海村籬落苦蕭條 어촌의 민가는 쓸쓸하기만 하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가 하도 맑아 한복판에 공교하게 달을 찍어 놓았고
浦闊貪呑入口潮 포구가 넓어서 들어오는 조수를 탐욕스레 삼켰네..
古石浪舂平作礪 낡은 돌이 물결에 닳아 숫돌처럼 평평하고
壞船苔沒臥成橋 부서진 배가 이끼에 묻혀 누운 채 다리가 되었네.
江山萬景吟難狀 강산의 온갖 경치 읊어내기 어려우니
須倩丹靑畵筆描 화가의 솜씨 빌려야 묘사할 수 있겠네.

 

이 작품은 이규보의 기상과 조어(造語)의 솜씨를 함께 읽게 해준다. 처음 일으킨 시인의 뜻이 긴장으로 연결되고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호청교인당심월(湖淸巧印當心月)’()’()’으로 고치고 있으나 포활탐탄입구조(浦闊貪呑入口潮)’()’()’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은 모두 동적(動的)인 미감을 고려한 것이다. 뜻과 말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활탐탄입구조(浦闊貪呑入口潮)’의 기상이야말로 이규보의 것임을 확인케 한다.

 

 

그러나 그의 무서운 저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역시 고조(古調) 장편(長篇)이며 그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초기작 가운데 칠석우(七夕雨)로도 널리 알려진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七古)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銀河杳杳碧霞外 은하수 아득히 푸른 노을 밖에
天上神仙今夕會 천상의 신선이 오늘 저녁에 다 모이네.()
龍梭聲斷夜機空 베 짜는 소리 끊어지고 밤 베틀도 텅비었는데
烏鵲橋邊促仙馭 오작교 가에는 신선 행차 재촉하네.()
相逢才說別離苦 만나자마자 서로 이별의 괴로움만 나누고
還導明朝又難駐 도리어 내일 아침 또 만나기 어렵다 하네.()
雙行玉淚洒如泉 두 줄기 눈물이 샘물처럼 흘러 내리는데
一陣金風吹作雨 한바탕 가을 바람 비를 내리네.()
廣寒仙女練帨涼 광한궁 선녀들 명주 수건 서늘한데
獨宿婆娑桂影傍 홀로 계수나무 가에서 조용히 잠자네.()
妬他靈匹一宵歡 저들 한쌍 하룻밤 즐기는 것 샘나서
深閉蟾宮不放光 월궁을 깊이 닫고 빛을 내보내지 않네.()
赤龍下濕滑難騎 적룡은 몸이 젖어 미끄러워 타기 어렵고
靑鳥低霑凝不飛 청조는 날개가 젖어 날아가지 못하네.()
天方向曉汔可霽 바야흐로 새벽이라 아마도 개일 듯한데
恐染天孫雲錦衣 직녀성의 비단옷을 더럽힐까 두렵네.()

 

뜻은 깊지만 말이 거칠어 힘만 느끼게 한다. 구도(構圖)가 넓고 크지만, 그가 말한 대로 말이 원숙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말을 너무 많이 한 작품이 되고 있다. 그는 압운(押韻)에 있어서도 법칙적(法則的)인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측성(仄聲) 태운(泰韻)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제2연에서 바로 우운(遇韻)으로 환운(換韻)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시인들은 제4구의 선어(仙馭)’비개(飛蓋)’로 고쳐 태운(泰韻)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만년(晩年)에 다시 같은 제명(題名)으로 제작한 칠석영우(七夕永雨)에서는 지난날의 넓은 구도와 기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七夕少不雨 予莫知其故 칠석에 비 오지 않는 날 적은데 나는 그 까닭을 모르겠네.
靈匹將成歡 雨師應自妬 신령한 짝이 사랑을 이루려 하니 비를 내리는 신이 응당 질투하리라.
欲敎烏鵲侶 霑重落中路 까마귀와 까치 짝으로 하여금 젖은 것이 무거워 도중에서 떨어지게 하고 싶어서라네.
假令橋未成 河水不可渡 만약 다리를 놓지 못한다면 은하수는 건널 수 없으리라.
寧且泳而歸 此夕難虛度 차라리 헤엄쳐 건너갈망정 이 밤을 헛되이 보내기는 어려우리라.
明年若復雨 忍可長懷慕 명년에 만약 다시 비가 온다면 차마 길이 마음으로 사모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에서 보여준 폭넓은 구도(構圖)와 달리는 힘을 찾아볼 수 없다. 평범(平凡)을 거부하고 비범(非凡)을 시험하던 이규보의 시작(詩作)도 이미 범상(凡常)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 줄 뿐이다. 신의(新意)신어(新語)를 제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하다. 특히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그의 저력을 과시하던 장편(長篇)의 구사력도 현저하게 감퇴(減退)하고 있다. 젊은 시절, 기호의활(氣豪意豁)동파(東坡)를 배우면서도 동파를 본받거나 그 휴경(畦徑)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이규보는 만년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평담(平淡)백락천(白樂天)에 경도되고 있다후집(後集) 권십일(卷十一), 서백락천집후(書白樂天集後)참조. 백낙천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모습을 포개어 보면서 자위(自慰)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차운화백락천병중십오수(次韻和白樂天病中十五首)가 그런 것에 속한다. 이에 이르러서는 그가 스스로 자부하던 자기 시의 창작은 물론, 한국시로서의 한시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규보(李奎報)26세 때 이미 백운시(百韻詩)를 제작하여 장편(長篇)의 저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환상적인 오언고시(五言古詩)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장편이란 원래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규보가 그렇게 많은 고조장편(古調長篇)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힘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일필(一筆)에 삼백운(三百韻)의 기록을 이룩한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와 같은 작품 역시 28세의 젊은 나이에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물과 마주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호기심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를 시로써 말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다.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효용적인 시작(詩作) 말고도 전혀 전달할 뜻이 없이 그의 놀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작한 유희적(遊戱的)인 시작(詩作)들도 많다. 그는 앉아서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함 때문에 스스로 권귀(權貴)에게 나아가 시로써 벼슬을 구하기도 하여 시작(詩作)의 무절제를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벼슬길에 오른 40대를 지나면서 그는 주변의 관료들과 차운시(次韻詩)를 즐기고 있지만 예술적인 성취를 이룩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음주(飮酒)로 허일(虛日)이 없었던 그는 주필(走筆)로써 명작(名作)의 천재를 과시하기도 하였지만 주필(走筆)’, ‘희작(戱作)’으로 낭비를 일삼은 시인(詩人)은 일찍이 있지 않았다.

 

 

 

 

5) 이규보(李奎報)의 후예들

 

최자(崔滋, 1188 명종18~1260 원종1, 東山叟)

이규보(李奎報)를 뒤이어 일시에 문병(文炳)을 잡았다. 당시 국정(國政)을 전담한 최이(崔怡)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그 후계를 천거(薦擧)케 하였을 때 이규보(李奎報)는 최자(崔滋)를 첫째로 천거(薦擧)하고 다음으로 김구(金坵)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동문선(東文選)등에 10여편의 시작(詩作)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시작(詩作)이규보(李奎報)를 따르지 못했으며 알려진 명편(名篇)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최자(崔滋)속파한집(續破閑集)보한집(補閑集)』】과 김구(金坵)지포집(止浦集)이 지금까지도 유전하고 있다. 먼저 최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제유(南堤柳)(五律)를 보인다.

 

南堤一株柳 濯濯秀風標 남쪽 제방 버들 한 그루 산뜻하게 그 풍채 뛰어나도다.
毒虺藏空腹 嬌鶯弄細腰 독사는 등걸 구멍에 숨고 꾀꼬리는 가는 가지를 희롱하네.
歲寒無勁節 春暖有長條 차운 날씨에 굳은 절개 없더니 따뜻한 봄엔 긴 가지 늘어지네.
但問材何用 休論百尺喬 그 재목 어디다 쓸 것인가 물을 뿐이지 백척의 교목 되고 안되는 것 논하지 말라.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서 보면 파한집(破閑集)을 속보(續補)한 것이지만, 이규보의 후계자답게 이규보의 기상(氣象)을 천하에 공언(公言)한 것도 이 보한집에서 비롯하고 있다. 최자 역시 이규보처럼 대상을 핍진(逼眞)하게 그리는 데 용공(用功)하고 있지만, 말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意思)만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서 그친 작품이 많다. 이 작품 또한 그러한 것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남쪽 뚝의 버드나무가 모진 추위에는 절개를 지키지 못하다가 몸이 따뜻해지면 가지가 뻗어나는 것을 비웃고 있다. 키가 백척(百尺)으로 자란다 해도 재목(材木)으로 쓰이지 못한다고 하여, 재목(材木)에서부터 부족한 소인(小人)을 경계하고 있다.

 

 

김구(金坵, 1211 희종7~1278 충렬왕4, 次山, 止浦)

역시 최자(崔滋)와 같이 이규보(李奎報)로부터 추천받은 시인이지만, 그 기상은 이규보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섬약(纖弱)함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낙이화(落梨花)(七絶)는 그 전형이 되고 있다.

 

飛舞翩翩去却廻 풀풀 춤추며 가다 간 되오고
倒吹還欲上枝開 솟을 바람 도리어 불자 가지에 올라 피려 하네.
無端一片黏絲網 아뿔사 한 조각이 그물에 걸리자
時見蜘蛛捕蝶來 때마침 거미가 보고 나비인줄 알고 잡으러 오네.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36에서 이 시는 송()의 송기(宋祁), 여정(余靖) 등의 낙화시(落花詩)를 본떠 시어(詩語)는 공교(工巧)로우나 담긴 뜻이 얕다고 논한 것이 적평(適評)이라 하겠다. 어쩌다 배꽃 한 잎이 그물에 떨어져, 이를 나비인 줄 알고 거미가 잡으러 온다고 한 것이 의사(意思)의 전부다. 떨어지는 꽃잎의 움직임과 거미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나 시어(詩語) 속에 깊은 의미가 내재하지 않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 밖에도 김지대(金之岱), 곽예(郭預), 홍간(洪侃), 이장용(李藏用) 등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여러 편의 시작(詩作)을 남긴 시인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김지대(金之岱)유가사(瑜伽寺)(七律), 곽예(郭預)(賞蓮)(七絶), 이장용(李藏用)강수(江樹)(七律) 등은 모두 명편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김지대(金之岱, 1190 명종 20~1266 원종 7, 초명 仲龍)

는 섬교한 시풍(詩風)을 보인 시인으로 특히 요체(拗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의 대표작 유가사(瑜伽寺)를 보인다.

 

寺在煙霞無事中 절은 안개와 노을 고요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亂山滴翠秋光濃 들쑥날쑥 푸른 물 든 산 가을빛 무르익었네.
雲間絶磴六七里 구름 사이 비탈진 육칠리 산길
天末遙岑千萬重 하늘가에 아득한 묏부리 천겹 만겹이네.
茶罷松簷掛微月 차 들고 나자 솔처마에 초승달 걸리고
講闌風榻搖殘鐘 설법 끝나자 시원한 평상에 종소리 흔들리네.
溪流應笑玉腰客 시냇물 웃으리라 패옥 찬 나그네를
欲洗未洗紅塵蹤 홍진의 자취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는구나

 

고려중기는 송시학(宋詩學)이 소단(騷壇)을 지배하던 때이지만, 이 작품은 정지상(鄭知常)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를 연상케 할 만큼 섬교하기만 하다. 한시(漢詩)에서는 사찰(寺刹)ㆍ누정(樓亭)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거니와 이 시도 깊은 산 속에 있는 유가사(瑜伽寺)의 경계(境界)에서 읊고 있다. 세상의 먼지를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는 벼슬아치의 처지를 자조(自嘲)하고 있다.

 

김지대(金之岱)는 요체(拗體)에 능하여 정지상(鄭知常)의 깊이 법()을 체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련(頸聯) 상구(上句)()’는 측성(仄聲)을 둘 자리인데 평성(平聲)을 쓰고 ()’를 측성(仄聲)으로 써 구()한 것이 한 보기가 될 것이다.

 

욕세미세홍진종(欲洗未洗紅塵蹤)’정지상(鄭知常) 변산소래사(邊山蘇來寺)의 일구(一句) ‘고경적막영송근(古徑寂寞縈松根)’과 같이 측측측측평평평(仄仄仄仄平平平)’의 독특한 구율(句律)로 되어 있다. 한편 서거정(徐居正)은 함련(頷聯) 하구(下句)에서 천만중(千萬重)’이라고 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출구(出句)칠팔(七八)’은 지나치게 상세하여 잘못이라고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27에는 육칠(六七)’칠팔(七八)’로 되어 있다.

 

 

곽예(郭預, 1232 고종 19~1286 충렬왕 12, 先甲)

는 자신의 풍류를 시로 제작한 것이 많다. (賞蓮)이 대표적인 경우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賞蓮三度到三池 연꽃 보러 세 번이나 삼지에 왔는데
翠盖紅粧似舊時 푸른 잎 붉은 꽃이 옛날과 같네.
唯有看花玉堂老 꽃 구경하는 옥당의 어떤 늙은이
風情不减鬢如絲 풍정은 줄지 않았으나 귀밑털은 흰 실같네.

 

작자의 질탕한 기상을 한 눈으로 읽게 하는 작품이다. 귀밑에 흰 털이 나도록 연꽃 구경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자가 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비가 오면 항상 맨발로 우산을 들고 용화원(龍化院) 숭교사(崇敎寺)에 있는 연못에서 연꽃을 완상(玩賞)하였다 한다. 후인(後人)이 그의 풍치(風致)를 높이 여겨 이 일을 우중상련(雨中賞蓮)’이라 하고 화시(和詩)를 지은 것이 많다. 최해(崔瀣)추자곽밀직예상련시운(追次郭密直預賞蓮詩韻)과 민사평(閔思平)동국사영익재운(東國四詠益齋韻)중의 네번째 수 곽한림우중상련(郭翰林雨中賞蓮)이 그런 것이다.

 

 

홍간(洪侃, ?~1304 충렬왕30, 平甫, 洪厓)

은 고시(古詩)에 능하여 고안행(孤雁行)(七古), 난부인(嬾婦引)(七古)과 같은 명작을 남겼다.

 

난부인(嬾婦引)은 다음과 같다.

 

雲窓霧閣秋夜長 구름 창 안개 문에 가을밤 깊었는데
流然寶帳芙蓉香 술 달린 비단 장막에 부용(芙蓉)이 향기롭다.
吳歌楚舞樂未央 오초(吳楚)의 노래와 춤 즐거움이 다하지 않아
玉釵半醉留金張 옥비녀 꽂은 이 여인 취하여 귀공자들을 잡네.
堂上銀缸虹萬丈 당 위의 은등잔에는 무지개 만발하고
堂前畫燭淚千行 당 앞의 촛불은 눈물이 천 줄이네.
珠翠輝光不夜城 주취(珠翠)의 광명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뤘는데
月娥羞澁低西廂 달은 부끄러워 서쪽 행랑에 나직하네.
誰得知 누가 알리오?
貧家懶婦無襦衣 가난한 집 여인네 유의(襦衣) 없는 줄을
紡績未成秋雁歸 길쌈도 마치기 전에 가을 기러기 돌아간다.
夜深燈暗無柰何 밤은 깊고 등불 어둡지만 어쩔 수 없구나.
一寸願分東壁輝 동쪽집 한치 불빛을 나눠 주기 바라네.

 

고체(古體)에서 애용하는 고사(故事)의 사용도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처려(淸麗)한 홍간(洪侃)의 시작(詩作)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장편(長篇)이다.

 

 

 

 

2. 한국시(韓國詩)의 발견(發見)

 

 

임춘(林椿)이인로(李仁老)동파시(東坡詩)에 대한 관심은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 단계의 일이거니와, 이 뒤의 후진(後進)들에게 있어서도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교(技巧)에 이르기까지 동파시(東坡詩)의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당시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동파(東坡)를 한갖 시수업(詩受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자(崔滋)가 명쾌하게 진술하고 있다.

 

 

근세에 동파(東坡)를 숭상하는 것은 그 기운이 호매(豪邁)하고 뜻이 깊고 말이 풍부하고 고사(故事)의 원용(援用)이 광박한 것을 사랑해서 거의 그 체()를 본받아 얻으려 함이다. 지금의 후진들이 동파집(東坡集)을 읽는 것은 그것을 본받아서 그 풍골(風骨)을 체득(體得)하려고 해서가 아니고 다만 그것을 증거로 하여 고사(故事)를 원용하는 도구로 하자는 것이다.

近世尙東坡, 盖愛其氣韻豪邁, 意深言富, 用事恢博, 庶幾效得其體也. 今之後進, 讀東坡集, 非欲倣效以得其風骨, 但欲證據以爲用事之具.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본받아 다만 그들의 시작(詩作)에 용사(用事)의 자료(資料)로 써먹으려 한 당시의 문단기습(文壇氣習)을 여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규보(李奎報)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파(東坡)를 근세(近世)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켜 올리면서도 끝내 그는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설사 동파(東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한 일치일 것이라는 투다.

 

그래서 그는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와 달라 이미 옛 성현(聖賢)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옛 시인의 체()를 본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만약 부득이 하거나 창졸간에 시를 읊조릴 때에는 고갈되어 써 먹을 만한 것이 없으면 반드시 새로운 말을 특별히 만들기 때문에 말이 흔히 생소(生疎)하고 난삽(難澁)하여 웃음거리가 됩니다. 옛 시인들은 뜻은 창조하였지만 말은 만들지 않았는데 나는 말과 뜻을 아울러 만들고도 부끄러워함이 없어 이 때문에 세상의 시인들 가운데는 눈을 부릅뜨고 배척하는 자가 많습니다.

僕則異於是, 旣不熟於古聖賢之說, 又恥效古詩人之體, 如有不得已及倉卒臨賦詠之際, 顧乾涸無可以費用, 則必特造新語, 故語多生澁可笑. 古之詩人, 造意不造語, 僕則兼造語意無愧矣. 由是, 世之詩人, 橫目而排之者衆矣.

 

 

그는 생소(生疎)하고 난삽(難澁)하더라도 자유시를 쓴다고 외치고 있다.

 

 

이에 앞서 그는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보다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는 의경(意境)이 주가 되므로 의경(意境)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意境)은 또한 기()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의 우열에 따라 의경(意境)의 심천(深淺)이 결정될 따름이다. 그러나 기()는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배워서는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열()한 사람은 글을 다듬는 것으로 능사(能事)를 삼고 의경(意境)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꾸미고 다듬어 그 구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답게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심후(深厚)한 의경(意境)이 없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게 되면 맛이 없어지고 만다.

夫詩以意爲主, 設意尤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故氣之劣者, 以雕文爲工, 未嘗以意爲先也. 蓋雕鏤其文, 丹靑其句, 信麗矣, 然中無含蓄深厚之意, 則初若可翫, 至再嚼則味已窮矣.

 

 

그는 또 시()로써 시()를 논한 논시(論詩)(五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作詩尤所難 語意得雙美 시 짓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 없나니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含蓄意苟深 咀嚼味愈粹 함축되어 의()가 진실로 깊어야 씹을 수록 더욱 맛이 순수하네.
(중략) (중략)
就中所可後 彫刻華艶耳 그 중에서도 후차적인 것은 문장(文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세
(하략) (하략)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기교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시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관(詩觀)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이는, 중국 문학의 비평사(批評史)에서 보면 오히려 통합론에 가까운 소동파(蘇東坡)의 시세계를 수용함에 있어 우리나라 시인들이 극복해야 할 한국시의 과제를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미의 추구로써 도달 가능한 세계는 시원적(始源的)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를 계승하여 당시의 문병(文柄)을 잡은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卷中)에서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비평하는 글로 자신의 시관(詩觀)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어릴 때부터 붓을 달리면 다 신의(新意)를 창출해내고 문사(文辭)를 토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달리는 기운이 더욱 씩씩하여 비록 성률(聲律)의 구속을 받는 가운데서 세밀하게 조탁(雕琢)하고 공묘(工妙)하게 얽어 나가더라도 호기(豪氣)가 넘치고 기묘(奇妙)하게 우뚝하며 그러나 공()을 천부적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대구(對句)나 성률(聲律)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고조장편(古調長篇)을 하는 데 있어서 강운(强韻)과 험제(險題) 가운데서도 마음대로 분방하여 한꺼번에 100장을 써 내려가도 다 고인(古人)을 답습(踏襲)하지 아니하고 우뚝히 자연스럽게 만든다.

公自妙齡, 走筆皆創出新意, 吐辭漸多, 騁氣益壯, 雖入於聲律繩墨中, 細琢巧構猶豪肆奇峭, 然以公爲天才俊邁者, 非謂對律, 盖以古調長篇, 强韻險題中, 縱意奔放, 一掃百紙, 皆不賤襲古人, 卓然天成也.-崔滋, 補閑集卷中

 

 

이 글에서 최자(崔滋)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에게 있어서 기교적인 요소를 완강하게 후퇴시키고 있는 것은 최자(崔滋) 자신의 반기교적(反技巧的) 시관(詩觀)의 간접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평(詩評)에 있어서 개연적(蓋然的)인 기준이 되고 있는 시의 격()에 대해서도 보한집(補閑集)권하(卷下) 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개 시를 평하는 사람은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사어(辭語)와 성률(聲律)을 본다. 같은 의격(意格) 가운데도 그 운어(韻語)에 있어서는 혹 우열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한 수의 시에 이것들이 다 잘된 것은 극히 적다. 그러므로 이를 평하는 평어(評語)에 있어서도 말이 뒤섞여 한결같지 않다. 시격(詩格)에 이르기를 ()가 노련하고 글자가 속되지 않으며 이치가 깊으면서도 의경(意境)이 뒤섞이지 않고 재주가 자유자재하면서도 기()가 성내지 않고, 말은 간결하면서도 일이 어둡지 않아야 바야흐로 풍소(風騷)에 들게 된다고 한 이 말은 스승이 될 만하다.

夫評詩者, 先以氣骨意格, 次以辭語聲律, 一般意格中, 其韻語或有勝劣, 一聯而兼得者盡寡. 故所評之辭, 亦雜而不同. 詩格曰: “句老字不俗, 理深而意不雜, 才縱而氣不怒, 言簡而事不晦, 方入於風騷.” 此言可師.

 

 

풍격비평(風格批評)에 있어서도 사어(辭語)나 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ㆍ의격(意格)을 앞세우고 있어 기교론적인 성률(聲律)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자신의 태도를 천명하고 있다.

 

 

다음은 성률(聲律)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한집(補閑集)권상(卷上) 34에서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토로한 것이다.

 

 

학사(學士) 이지심(李知深)제풍주성두루(題豊州城頭樓)()하늘과 바다는 가이 없어서 아득할 손 바라보아도 끝가는 데가 없다. 사방천하(四方天下)에 천리(千里)를 보는 눈인데 유월(六月)에 구월(九月) 바람이 분다. 그림으로도 응당 묘하게 그리기 어려울 것이지만 글로써도 어찌 다듬어 내겠는가? 다만 날개가 돋아 몸이 허공에 있는가 의심스러울 뿐이라 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시를 가리켜 말은 다듬지 않았는데도 기상(氣象)이 호방(豪放)하고 의경(意境)이 넓다고 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열 자 가운데서 가이 없다고 말하고는 또 끝이 없다고 말하였으며, 위에서는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고 말했다가 아래에서는 천리(千里)를 바라보는 눈을 말했으니 뜻이 겹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읽으면 뜻이 겹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성병(聲病)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성병(聲病)을 회피하는 것을 금침격(金針格)으로 여겼는데 그 말이 사실이구나.

李學士知深題豊州城頭樓云: “天與海無際, 茫茫望不窮. 四方千里目, 六月九秋風. 圖畵應難妙, 篇章量得工. 只疑生羽翼, 身在大虛中.” 時人以此聯, 言不雕鑿, 而氣豪意豁. 雖然十字中, 言無際, 又言不窮, 或上言望不窮, 下言千里目, 似乎意疊. 而讀之不知有相疊之意者, 盖無聲病也. 古人以回忌聲病爲金針格, 信哉!

 

 

여기서 최자(崔滋)는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시로서 성취할 수 있는 기본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기의활(氣豪意豁)한 내면세계의 사출(寫出)에 있음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동파(東坡)학지이성 무성병대우(學之易成 無聲病對偶)’라 하여 성병(聲病)을 공척(攻斥)한 일이 있거니와, 평측(平仄) 성조(聲調)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폐해에까지 이르게 하는 성병(聲病) 문제에 대하여 최자(崔滋)가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자(崔滋)는 또 탁련(琢鍊)에 대해서도 보한집(補閑集)권하(卷下) 12에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하여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고 있다.

 

 

시를 다듬음에 있어 두보(杜甫)처럼 한다면 묘하기는 묘하지만, 저 솜씨가 서툰 자는 다듬으려고 고생을 하면 할수록 졸렬(拙劣)하고 난삽(難澁)한 것이 더욱 심하여 헛되이 마음만 태울 뿐이다. 어찌 각각 그 재국(才局)에 따라서 그 천성(天性)을 뱉아 내어 다듬은 흔적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

凡詩琢鍊, 如工部妙則妙矣, 彼手生者, 欲琢彌苦, 而拙澁愈甚, 虛雕肝腎而已. 豈若各隨才局, 吐出天然, 無礱錯之痕?

 

 

조탁(雕琢)으로 성공한 예를 두보(杜甫)와 같은 대수(大手)에서 구함으로써 사실상 연탁(鍊琢)의 무용론(無用論)을 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시인들을 향하여 기교론의 한계를 계도적(啓導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서, 한시(漢詩)에 대한 우리나라 시인의 자각이며 자기발견임에 틀림없다.

 

시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형식적인 기교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인 것은 결코 경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김시습(金時習)이나 윤춘년(尹春年)처럼민병수(閔丙秀), 고전시론(古典詩論)의 한국적(韓國的) 전개(展開)에 대하여, 진단학보(震檀學報)48, p.123, 금세(今世)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른바 고인(古人)들의 정종(正宗)과 정음(正音)을 어디서 배우고 들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정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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