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다양한 전개(展開)
조선(朝鮮)은 그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학관념에 있어서도 주자학(朱子學, 思想儒敎)이 문학 위에 군림하는 재도관(載道觀)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용적인 문학관은 결코 문학의 생산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문학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김창협(金昌協)의 말과 같이 시를 보면 그 사람까지도 알게 하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다만 국초(國初)에는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지 모른다.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조운흘(趙云仡)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유방선(柳方善) 등의 시편이 각종 선발책자에 자주 뽑히고 있지만, 이 가운데 유방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조(前朝)에서 과거로 입신(立身)하여 양조(兩朝)에 벼슬한 관료의 전형이다. 시단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앞 시대에서 숭상한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걸출한 시인의 배출을 보지 못하였지만 정이오(鄭以吾) 등이 중당(中唐)의 고품(高品)을 제작하여 국초(國初)의 시단에 당시(唐詩)의 멋을 과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 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 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성현(成俔)과 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ㆍ이승소(李承召)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ㆍ성현(成俔)ㆍ김시습(金時習) 등을 들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과 김종직(金宗直)은 각각 그들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과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통하여 그들이 지향하는 시세계의 경계를 간접으로 드러내보였다. 특히 김종직(金宗直)은 그의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스스로 시대의 풍상에서 멀리 떨어져 ‘호방(豪放)’과 ‘신경(新驚)’을 거부하고 엄중(嚴重)ㆍ방달(放達)한 시관(詩觀)으로 일관하고 있어 시사(詩史) 연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리고 초매(超邁)한 김시습(金時習)의 시세계는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열고 있다.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위하여 시를 쓰는 낭비를 일삼게 되었으며 시가 없으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 관한 모든 것도 시로써 해명한 보기 드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시업(詩業)이 다양하게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종대(中宗代)를 전후한 시기이다.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 이른바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의 출현을 보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시는 200년 동안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조선조의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강서시파(江西詩派)와 비슷한 시풍이 유행하여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이 서로 시의 경향을 같이 하면서 신풍(新風)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특히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은 조선조(朝鮮朝)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들이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즐겨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숭상하여 조선조 제일의 시인으로 기림을 받았다면 이는 곧 우리나라 시인들의 수준이 이때에 이르러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들과는 달리 이주(李胄)ㆍ박상(朴祥)ㆍ신광한(申光漢)ㆍ나식(羅湜)ㆍ임억령(林億齡)ㆍ김인후(金麟厚) 등은 수준 높은 당법(唐法)으로 당시의 시단을 다채롭게 하여준다. 박상(朴祥)ㆍ임억령(林億齡)ㆍ김인후(金麟厚)는 호남시단(湖南詩壇)의 선구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특히 임억령(林億齡)과 김인후(金麟厚)는 그 인품이 고매하여 시도 사람과 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칠언율시(七言律詩)에 특장을 보인 정사룡(鄭士龍)은 다음 시기의 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과 더불어 관각(館閣)의 대수(大手)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른바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 문학관념(文學觀念)의 성립(成立)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건국은 처음부터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에 의한 왕권(王權)의 도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왕권(王權)이 사실상 그 권능(權能)을 상실하고 있을 때, 정쟁(政爭)의 수습에서 성공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낡은 왕권의 회복과 새 왕조의 창업을 놓고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후자쪽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로 고려 왕권을 옹호하던 무력한 문벌관료층(門閥官僚層)이 퇴진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추종하는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대거 진출하여 정치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신분질서의 재편성이 용이하게 이루어져 지방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부식해온 향리층(鄕吏層, 戶長 등)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 이른바 삼노팔리(三奴八吏)【삼노팔리(三奴八吏): 종 출신의 세 집안과 아전 출신의 여덟 집안. 삼노는 정도전, 서기, 송익필의 집안이고, 팔리는 동래 정씨, 반남 박씨, 한산 이씨, 흥양 유씨, 진보 이씨, 여흥 이씨, 여산 송씨, 창녕 서씨의 집안이다. 모두 처음에는 종 또는 아전이었으나 뛰어난 자손의 덕으로 양반이 되었다】의 ‘팔리(八吏)’가 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대부분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건국은 역사적인 개념에서 보면 국성(國姓)이 왕씨(王氏)에서 이씨(李氏)로 바꾸어진 것을 의미하게 되지만 여초(麗初)에서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한 이래 사류정치(士類政治)로 일관해온 정치풍토의 기본성격에는 큰 변혁을 가져온 것이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송대(宋代)의 성명철학(性命哲學)인 주자학(朱子學)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사실이다. 이 주자학적(朱子學的) 질서는 신왕조(新王朝)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제도ㆍ문화의 사상적 제체계(諸體系)를 사변적(思辨的)인 윤리철학(倫理哲學)으로 개편하는데 중요하게 구실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과거제도를 개혁한 것도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이성계(李成桂)는 국초(國初)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먼저 인사정책(人事政策)의 중핵이 되어온 과거제도를 바꾸는 일부터 착수한다【「太祖卽位敎書」 참조】. 새로이 문무산계(文武散階)를 실시하고 문무양과제(文武兩科制)를 단행하여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한 양반관료제(兩班官僚制)의 확립을 꾀하게 된다. 사장(詞章)을 주로 하던 고려 이래의 감시(監試, 조선조의 進士試)를 혁거(革去)하고 그 대신 경전의 기송(記誦)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생원시(生員試)를 중시한 것도 같은 뜻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주자학(朱子學)의 철학적 사고는 문학의 세계【당시의 표현대로 따른다면 사장학(詞章學)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에 있어서도 문학을 문학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학 위에 사상을 올려놓고 ‘문이재도(文以載道)’나 ‘문이관도(文以貫道)’와 같은 세련된 표현을 빌려, 문(文)은 도(道)를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사상이 문학의 기능을 규제하는 지배원리로 군림함에 따라 문학은 스스로의 내적 질서에 따라 그 본질을 변별하는 제구실을 다할 수 없게 되고 문학외적인 사상적 표준에 의하여 문학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말 이전까지도 당시의 유학은 한(漢)ㆍ당(唐)의 사장학(詞章學)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한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수립되었으며, 때문에 사상과 같은 것이 문학을 논하는 표준이 된 일이 없다. 주자학(朱子學)을 처음으로 수입한 여말(麗末)에 있어서도 문학에 대한 요구는 『시경(詩經)』의 정신을 강조하는 수준 이상의 것이 아니다【민병수, 「朝鮮前期 漢詩의 樣相)」, 『韓國文學史의 爭點』, p.318 참조】.
조선조에 이르러 정도전(鄭道傳)이 직접 자기 목소리로 재도관(載道觀)을 「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에서 개진하게 되며 이것이 선성(先聲)이 된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하늘의 문(文, 文飾)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문(文)이요,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사람의 문(文)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氣)로 나타내고 땅은 형(形)으로써 나타내지만, 사람은 도(道)로써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文)이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
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 “文者, 載道之器.”
이 글에서 그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천(天)의 표현으로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인(人)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그 표현 질서는 천(天)에 있어서 기(氣), 지(地)에 있어서 형(形), 인간(人間)에 있어서는 도(道)에서 구함으로써, 인간에게 시서예악(詩書禮樂)을 나타내는 질서는 도(道)요. 이 도(道)의 질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곧 문(文)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도전(鄭道傳)이 앞에서 명료하게 재도관(載道觀)을 선창(先唱)했지만 권근(權近)만큼 효용론(效用論)을 실천한 시인(詩人)이나 문장가(文章家)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삼봉문집서(鄭三峯文集序)」에 드러난, 그의 진술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문(文)은 천지간(天地間)에 도(道)와 더불어 소장(消長)을 같이 하므로, 도(道)가 위에서 행하면 문(文)은 예악(禮樂)과 정교(政敎)의 사이에 나타나고, 도(道)가 아래에서 밝혀지면 문(文)은 간편(簡編)과 필삭(筆削) 속에 깃든다. 그러므로 전모(典謨)ㆍ서명(誓命)의 문(文)과 산정(刪定)ㆍ찬수(贊修)의 서(書)가 그 도(道)를 싣기는 마찬가지이다.
文在天地間, 與斯道相消長, 道行於上, 文著於禮樂政敎之間, 道明於下, 文寓於簡編筆削之內. 故典謨誓命之文, 刪定贊修之書, 其載道一也.
이와 같이 스스로 재도(載道)를 말하고 있지만, 특히 문(文)의 효용성(效用性)을 강조한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을 하나의 도(道)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작(詩作)의 도처에서 유로(流露)되고 있는 시경시(詩經詩)의 정신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이첨(李詹)이 쓴 「목은선생문집서(牧隱先生文集序)」에서 그의 목소리를 통하여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문사(文辭)는 덕(德)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화순(和順)한 기운이 쌓이는 것과 빛나는 문장이 발현되는 것은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문사(文辭)와 정화(政化)가 서로 유통하게 되어 시대의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에 따라 그 소리가 슬프게도 되고 즐겁게도 되나니, 이는 다 성정(性情)을 읊어 그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文辭德之見乎外者也. 和順之積, 英華之發, 有不容揜者矣, 夫文辭與政化, 相爲流通, 人世之治亂, 而音響有哀樂之殊, 皆所以吟詠性情, 以達其所蘊者也.
이 글에서 그는 문장을 한갓 도(道)의 부용(附庸)으로만 생각하는 형식적인 재도관(載道觀)으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문장(文章)은 덕(德)의 외화(外華)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시천견록(詩淺見錄)』에서 시의 근본을 인도(人道)로서 파악하여 그 실현범위를 가족(家族)ㆍ국가(國家)ㆍ천하(天下)로 보고 부부(夫婦)나 조정(朝廷)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가는 것을 시경(詩經)의 용(用)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관념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국초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을 비롯하여 양성지(梁誠之)ㆍ조운흘(趙云仡),ㆍ성현(成俔) 등이 모두 목청을 돋우어 문학의 효용성을 강조했지만 조선조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막중한 창업의 정지 작업에 문장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특히 권근(權近)은 태종(太宗) 7년에 「관학사목(觀學事目)」을 올려 과거제도의 개혁을 꾀한 바 있다. 문과초장(文科初場)의 제술론(製述論)을 골자로 한 문과개정안(文科改正案)이 그것이다. 강경(講經)을 파(罷)하고 제술(製述, 글짓기)로써 고시(考試)할 것을 주장한 그는 문장의 본래적 기능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성지(梁誠之)ㆍ성현(成俔) 등이 사장은 편폐(偏廢)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옹호론(擁護論)을 개진한 것도 그 궤철(軌撤)을 같이하는 것이다.
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에서 문장의 기능적 특성을 구별하여 대각(臺閣)의 문장(文章)과 초야(草野)의 문장(文章), 선도(仙道)의 문장(文章)으로 삼분(三分)한 바 있거니와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 크게 떨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시(詩)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른 것이 없다. 시(詩)를 인식하는 시대인의 의식은 역사단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지만, 문장의 본래적 기능을 따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문장을 하찮은 기술이라 생각한 이때의 시는 문장 가운데서도 더욱 미미한 것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호걸지재(豪傑之才)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김종직(金宗直), 「윤선생상시집서(尹先生祥詩集序)」】.
다만,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은 마땅히 군자(君子)가 취해야 할 것이라 하여 전통적인 시(詩)의 기능만은 구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터 놓았을 뿐이다【서거정, 『동인시화(東人詩話)』】.
2. 국초(國初) 소단(騷壇)의 양상
조선왕조는 국초(國初)부터 문치(文治)를 표방하였지만, 개국초원(開國初元)에는 걸출(傑出)한 시인(詩人)이 배출되지 않았다.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ㆍ조운흘(趙云仡)ㆍ유방선(柳方善) 등의 시편(詩篇)이 각종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자주 뽑히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 유방선(柳方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조(前朝)에서 과거로 입신(立身)하여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의 전형이다. 다만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모두 경세(經世)의 포부(抱負)로 또는 경국(經國)의 문장(文章)으로 일세(一世)를 울리었지만 그들의 시세계는 개성의 빛깔을 뛰어넘는 시정신(詩精神)의 근원에서부터 다른 세계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기도 한다.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시작(詩作)을 이러한 관점(觀點)에서 대비해보기로 한다. 정도전(鄭道傳)의 「산중(山中)」과 권근(權近)의 「탐라(耽羅)」를 차례대로 보기로 하자.
「산중(山中)」은 다음과 같다.
弊業三峰下 歸來松桂秋 | 삼봉(三峯) 아래서 공부도 그만두고 소나무 길 가을철에 돌아오는도다. |
家貧妨養疾 心靜定忘憂 | 집이 가난하여 병 고치기 어렵고 마음이 고요하여 근심 잊기 알맞도다. |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 대나무 보호하느라 길을 멀리 내었고 산을 아끼느라 작은 누각을 세웠네. |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 이웃 중이 글을 물으러 와 하루 종일 같이 지냈네. |
「탐라(耽羅)」는 다음과 같다.
蒼蒼一點漢羅山 | 푸르디 푸른 한 점의 한라산이, |
遠在洪濤浩渺間 | 멀리 푸른 파도 사이에 있네. |
人動星芒來海國 | 사람 따라 별빛이 바다에서 오고 |
馬生龍種入天閑 | 말은 준마를 낳아 천자의 마굿간에 드네. |
地偏民業猶生遂 | 땅은 외져도 백성의 생업은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
風便商帆僅往還 | 바람 편에 상선(商船)은 겨우 왔다 갔다 하네. |
聖代職方修版籍 | 성대의 직방씨(職方氏) 지도를 손질할 때 |
此方雖陋不須刪 | 이 나라 비록 누추해도 깍아버리지 않았네. |
양편(兩篇) 모두 그들의 대표작에 드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 관풍(觀風)의 의지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산중(山中)」의 ‘호죽개우경 련산기소루(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는 분명히 풍교(風敎)에의 용의(用意)보다는 멋과 호기(豪氣)가 앞서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탐라(耽羅)」에는 풍교(風敎)의 의지가 깊숙히 내장(內藏)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작자 권근(權近)이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에게 지어 바친 응제시(應製詩)이기 때문에 무게가 더 실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탐라의 역사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이 시의 주지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작자가 노리고 있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목판(木板)으로 된 지도 위에 새겨진 탐라(제주도)는 조그마한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지도를 개수(改修)할 때 끌[削刀[ 끝이 닿기만 해도 없어지고 말겠지만, 왕화(王化)는 이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작자의 속뜻이다. 이때 우리나라와 탐라와의 관계는 곧 명(明)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로 치환(置換)될 수 있음을 암유(暗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다음 시편(詩篇)은 모두 귀양에서 풀려난 양인(兩人)의 처지를 제각기 읊조린 것이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두 시세계의 먼 거리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의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는 다음과 같다.
君不見 |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
賈傅投書湘水流 | 가태부(賈太傅)가 호수(湖水)에 글을 던지고 |
翰林醉賦黃鶴樓 | 이태백(李太白)이 황학루(黃鶴樓)에서 시(詩)를 읊던 것을.. |
生前轗軻無足憂 | 생전(生前)의 불우(不遇)를 근심하지 마오, |
逸意凜凜橫千秋 | 호일(豪逸)한 기개(氣槪)가 천추(千秋)에 늠름하네. |
又不見 | 또 보지 못하였는가? |
病夫三年滯炎州 | 병든 몸 3년 동안 염주(炎州)에 묶였다가 |
歸來又到錦江頭 | 돌아올 때 또 다시 금강루(錦江樓)에 오른 것을. |
但見江水去悠悠 |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만 보았을 뿐, |
那知歲月亦不留 | 어찌 알았으리요 세월 또한 머물지 않는 것을. |
此身已與秋雲浮 | 이내 몸 두둥실 가을 구름이라 |
功名富貴復何求 | 부귀공명 또 다시 구해 무엇하리요? |
感今思古一長吁 | 고금의 감회 긴 탄식일 뿐. |
歌聲激冽風颼颼 | 노래 소리 격렬하고 바람도 우수수 부는데 |
忽有飛來雙白鷗 | 갑자기 백구 한 쌍 날아오누나. |
권근(權近)의 「차용궁객사판상시(次龍宮客舍板上詩)」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一郡風煙十里間 | 온 고을 연기는 십 리 사이에 일고 |
政淸刑簡吏民閑 | 정사 형벌 깨끗하여 관리 백성 한가롭네. |
門前直道澹臺路 | 문전의 곧은 길은 담대멸명(澹臺滅明)의 길이요, |
窓外群峯謝眺山 | 창 밖의 여러 봉우리 사조(謝眺)의 산(山)이네. |
幸與故人相會合 | 다행히 벗들과 서로 만나니 |
可憐逐客得生還 | 가련할손 내쫓긴 몸 살아서 돌아오네. |
從今欲遂爲農志 | 이제부터 농사짓는 뜻 이뤄볼꺼나, |
䆠海由來最險艱 | 관직의 세계는 본래부터 험난한 것. |
전자(前者)는 타고난 호탕(豪宕)을 한 눈으로 읽게 하는 작품이다. 귀양살이 때의 앙금을 일시에 떠올리며 바뀌어진 지금의 처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양상이다. 시작(詩作)의 높낮이를 따지는 것은 딴 문제에 속한다.
그러나 후자(後者)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감정의 유로를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비분(悲憤)해도 강개(慷慨)에 흐르지 않는 긴장을 끝내 잃지 않고 있다.
이는 물론 정도전(鄭道傳)의 ‘호매(豪邁)’와 권근(權近)의 ‘전아(典雅)’를 대조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는 개성 이상의 시정신(詩精神)과도 유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정도전(鄭道傳)은 앞장 서서 스스로 재도론(載道論)을 천명했지만, 시(詩)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집착 때문에 유명한 「오호도(嗚呼島)」 시화(詩禍)를 일으켜 이숭인(李崇仁)을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근(權近)의 시작(詩作)은 대부분 차운(次韻)ㆍ기증(寄贈)ㆍ송별(送別)ㆍ만사(挽詞) 등으로 채워져 있어, 없을 수 없는 삶의 부분들을 시(詩)로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한시가 대체로 한취(閑趣)를 노래한 전원문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한가로운 서정을 읊은 한정(閑情)ㆍ만성(謾成)ㆍ우음(偶吟)ㆍ감흥(感興) 따위도 그의 시작(詩作)에서는 감쇄(減殺)되고 있다.
정도전(鄭道傳, 1337 충숙왕 복위6~1398 태조7, 자 宗之, 호 三峯)
의 대표작으로는 「정조봉천문외구호(正朝奉天門外口號)」(七絶),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七絶), 「산중(山中)」(五律), 「오호도조전횡(嗚呼島弔田橫)」(五古),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七古) 등이 꼽히거니와 각체(各體)에서 두루 명편(名篇)을 뽑아낸 그의 시재(詩才)는 가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마주하는 것 같아 당인(唐人)의 솜씨에 모자람이 없다.
권근(權近, 1352 공민왕1~1409 태종9, 자 可遠ㆍ思叔, 호 陽村)
의 시작(詩作) 중에는 「탐라(耽羅)」(七律), 「금강산(金剛山)」(七律), 「항래주해(航萊州海)」(七律), 「차조정승준(次趙政丞浚)」(七律) 등이 각종 선발책자에 뽑히고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칠율(七律)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차조정승준(次趙政丞浚)」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은 모두 24수의 응제시(應製詩)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응제시(應製詩)는 표전(表箋) 문제로 명(明) 태조(太祖)가 그 찬자(撰者)를 불러들일 때 권근(權近)이 정도전(鄭道傳)을 대신하여 그 앞에 나아가 명제(命題)에 따라 시(詩)를 지어 바친 것으로, ‘온순전아(溫醇典雅)’, ‘평담온후(平淡溫厚)’한 시세계를 바로 입증해준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박학능문(博學能文)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위인(爲人)과 개성(個性)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륜(河崙)이 이숭인(李崇仁)과 권근(權近)의 시(詩)를 논하는 자리에서 특히 이 응제시(應製詩)를 가리켜 “양촌(陽村)은 이를 해내었지만 도은(陶隱)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 한 것도 시(詩)의 고하(高下)를 가린 것이기보다는 그의 정신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1,000여수에 이르고 있지만 역대 중요 시선집에서 선발되고 있는 것은 겨우 23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대부분 『동문선(東文選)』에서 뽑아준 것이다. 『동문선(東文選)』에서 그의 문(文)을 170여편 뽑으면서 시편(詩篇)은 겨우 20수를 뽑고 있는 것은 그 장처(長處)가 시(詩)보다는 곳에 있음을 쉽게 알게 해준다. 물론 그것들의 대부분이 교서(敎書)ㆍ책(冊)ㆍ표전(表箋)ㆍ찬(贊)ㆍ차자(箚子) 등 문학성이 거세된 의론체(議論體)의 관각문자(館閣文字)이기는 하지만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이 산문(散文)이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조 최초의 문형(文衡)다운 면모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초(國初)에 시업(詩業)으로 이름을 남긴 소인(騷人)은 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유방선(柳方善) 등이 대표할 만하다. 이때까지도 소단(騷壇)의 풍상(風尙)이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특히 이첨(李詹)과 정이오(鄭以吾)는 당인에 모자람이 없는 솜씨로 아려(雅麗)ㆍ초초(楚楚)한 시작(詩作)을 남기고 있다. 권근의 뒤를 이어 변계량(卞季良)이 문형(文衡의 제도가 변계량에서 시작되었음)의 영예를 누리었지만, 이첨(李詹)과 정이오(鄭以吾)도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국초(國初)에 문한(文翰)의 임무를 해내었다.
이첨(李詹, 1345 충목왕1~1405 태종, 자 中叔, 호 雙梅堂)
은 「저생전(楮生傳)」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다. 「용심(慵甚)」(七絶), 「등주(登州)」(五律), 「자적(自適)」(五絶), 「야과한벽루문탄금(夜過寒碧樓聞彈琴)」(七絶), 「주행지동양역(舟行至潼陽驛」(五律) 등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두루 뽑아준 대표작이다.
대체로 한원(閑遠)한 서정이 전편(全篇)에 펼쳐져 있어 동적(動的)인 미감(美感)은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용심(慵甚)」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平生志願已蹉𧿶 | 평생 뜻하던 일 이미 다 틀렸는데 |
爭奈慵踈十倍多 | 게으름은 더 많아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
午寢覺來花影轉 | 낮잠에서 깨어나니 꽃 그림자도 옮겨가 |
暫携稚子看新荷 | 잠깐 어린아이 데리고 새 연꽃을 쳐다보네. 『東文選』 卷之二十二 |
작자의 한취(閑趣)를 음미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편이다. 바깥짝(제3ㆍ4구)의 연결이 좋아 오후 한때 한가로움의 정조(情調)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정이오(鄭以吾, 1354 공민왕3~1434 세종16, 자 粹可, 호 郊隱)
는 많은 것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죽장사(竹長寺)」(七絶), 「차운기정백용(次韻奇鄭伯容)」(七絶)이 특히 가작(佳作)으로 알려져 왔으며 「신도설야(新都雪夜)」(七律)도 그 구법(句法)이 평담(平淡)하여 기림을 받은 작품이다.
「차운기정백용(次韻奇鄭伯容)」은 다음과 같다.
二月將闌三月來 | 이월이 다가고 삼월이 오니 |
一年春事夢中回 | 일년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드네. |
千金尙未買佳節 | 천금으로도 오히려 좋은 시절 살 수 없는데 |
酒熟誰家花正開 | 누구 집에 술이 익어 꽃이 저리 피었나? |
정감의 유로(流露)가 전혀 절제됨이 없다. 당시(唐詩)가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데 매우 적절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시(詩)를 가리켜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9번에서 국초(國初)의 절구(絶句) 중에서 마땅히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주숙수가(酒熟誰家)’는 ‘수가주숙(誰家酒熟)’의 도치된 모습이다. ‘가(家)’ 평성(平聲)이기 때문이다. 문집(文集) 『교은집(郊隱集)』에는 제목이 「차증린졸정백형(次贈隣倅鄭百亨)」으로 되어 있다.
유방선(柳方善, 1388 우왕14~1443 세종25, 자 子繼, 호 泰齋)
은 유주부(柳主簿)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 등에게 배워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오랜 유배생활로 현실에 뜻을 잃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시(詩) 가운데는 「우제(偶題)」(五絶), 「서회(書懷)」(七絶), 「설후(雪後)」(七絶), 「효우승사(曉遇僧舍)」(五律) 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작품은 모두 불우했던 그의 인간 경애(境涯)를 확인케 한다.
「효우승사(曉遇僧舍)」는 다음과 같다.
東嶺上初暾 尋僧扣竹門 | 동령(東嶺)에 해 돋을 때 중을 찾아 죽문(竹門)을 두드리네. |
宿雲留塔頂 積雪擁籬根 | 자던 구름 탑 위에 머물고 쌓인 눈은 울타리 밑을 에워쌓네. |
小徑連深洞 踈鍾徹遠村 | 작은 길은 골짜기에 이어져 있고 성긴 종소리 마을까지 울린다. |
蕭然吟未已 淸興到黃昬 | 쓸쓸히 아직도 읊조림을 끝내지 못했는데 맑은 흥은 어느새 황혼에 이르렀네. |
「서회(書懷)」는 다음과 같다.
門巷年來草不除 | 문 앞 골목 몇 년동안 풀을 베지 않았더니 |
片雲孤木似僧居 | 조각구름 외로운 나무 중의 집과 같구나. |
多生結習消磨盡 | 평생에 맺힌 버릇 이제 다 없어지고 |
只有胸中萬卷書 | 다만 가슴 속에 만권 책이 있을 뿐이네. |
한궁(寒窮)과 시름이 온통 이들 시편(詩篇)에 어우러져 있으나 시는 스스로 좋기만 하다.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李石亨)ㆍ성간(成侃)ㆍ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ㆍ이승소(李承召)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ㆍ성현(成俔)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 활약하여 문명(文名)으로 일세를 울렸다.
그러나 호방(豪放)한 김수온(金守溫)과 평이(平易)한 성현(成俔)의 문장은 모두 후에 평가(評家)들의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시업(詩業)으로 떨치지는 못했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 등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시세계를 이룩하면서 소단(騷壇)의 대가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와 김종직(金宗直)의 문(文)이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서거정(徐居正)은 훈구관료(勳舊官僚)의 전형(典型)으로, 김종직(金宗直)은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표로 또는 사림파(士林派)의 사종(師宗)으로 단정하여 신진관료(新進官僚)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학은 훈구관료층의 문학과는 성격까지도 달리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임형택(林熒澤), 「조선양반관료사회(朝鮮兩班官僚社會)의 문화(文化)」, 國史編纂委員會編韓國史제11권】. 김종직(金宗直)은 지방에서 관료로 진출한 새로운 인물이므로 신진관료(新進官僚)와 훈구관료(勳舊官僚)는 이해가 상충되고 기질(氣質)도 서로 달라 문학도 그러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신진(新進)과 훈구(勳舊)는 정치 현실의 선후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뿐,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간섭하는 요인일 수는 없다.
문학은 개성이다. 그러므로 계층간의 대립은 있을 수 있지만 개성의 문학세계에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열을 다투는 적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림파(士林派)의 ‘사림(士林)’과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산림(山林)’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류정치(士類政治)로 일관해온 전통사회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만이 사림(士林)일 수 있다는 논리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李石亨)ㆍ성간(成侃)ㆍ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ㆍ이승소(李承召)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ㆍ성현(成俔)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 활약하여 문명(文名)으로 일세를 울렸다.
그러나 호방(豪放)한 김수온(金守溫)과 평이(平易)한 성현(成俔)의 문장은 모두 후에 평가(評家)들의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시업(詩業)으로 떨치지는 못했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 등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시세계를 이룩하면서 소단(騷壇)의 대가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와 김종직(金宗直)의 문(文)이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서거정(徐居正)은 훈구관료(勳舊官僚)의 전형(典型)으로, 김종직(金宗直)은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표로 또는 사림파(士林派)의 사종(師宗)으로 단정하여 신진관료(新進官僚)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학은 훈구관료층의 문학과는 성격까지도 달리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임형택(林熒澤), 「조선양반관료사회(朝鮮兩班官僚社會)의 문화(文化)」, 國史編纂委員會編韓國史제11권】. 김종직(金宗直)은 지방에서 관료로 진출한 새로운 인물이므로 신진관료(新進官僚)와 훈구관료(勳舊官僚)는 이해가 상충되고 기질(氣質)도 서로 달라 문학도 그러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신진(新進)과 훈구(勳舊)는 정치 현실의 선후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뿐,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간섭하는 요인일 수는 없다.
문학은 개성이다. 그러므로 계층간의 대립은 있을 수 있지만 개성의 문학세계에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열을 다투는 적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림파(士林派)의 ‘사림(士林)’과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산림(山林)’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류정치(士類政治)로 일관해온 전통사회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만이 사림(士林)일 수 있다는 논리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김수온(金守溫, 1409 태종9~1481 성종12, 자 文良, 호 乖崖ㆍ拭疣)
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문장은 호방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거니와, 시작(詩作) 역시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거칠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다음의 「술악부사(述樂府辭)」를 보면, 시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다방면(多方面)에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十月層氷上 寒凝竹葉栖 | 시월달 꽁꽁 언 얼음 위에, 서릿발이 댓닢자리에 엉겼네. |
與君寧凍死 遮莫五更鷄 | 님과 함께 얼어 죽을망정, 새벽 닭이야 울거나 말거나. |
이 시는 제목과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를 한시로 옮긴 소악부(小樂府)이다.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의 원사(原詞)는 다음과 같다. “어름우힛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덩 어름우힛 댓닙자리 보와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情둔 오낤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농도 짙은 사랑 노래를 한시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는 억제되고 있으며 제명(題名) 그대로 ‘악부(노래)를 풀이한 시’에서 그치고 있다.
성간(成侃, 1427 세종9~1456 세조2, 자 和仲, 호 眞逸齋)
은 형 임(任), 아우 현(俔)과 더불어 일세(一世)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며 특히 그는 학문에 포부가 커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다. 30세에 요절하여 많은 시작(詩作)을 남길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조선 초기에 드물게 보이는 의고시인(擬古詩人)으로 꼽힌다. 「효도징군(效陶徵君)」(五古), 「효안특진(效顔特進)」(五古), 「효포참군(效鮑參軍)」(五古) 등이 모두 그러한 작품이다. 특히 그는 당인(唐人)의 악부제(樂府題)를 차용하여 「나홍곡(羅嗔曲)」(五絶) 12수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밖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중(道中)」(七), 「유성남(遊城南)」(七絶), 「궁사(宮詞)」(七) 등도 당시(唐詩)의 유향(遺響)을 쉽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나홍곡(羅嗔曲)」(其一)은 다음과 같다.
爲報郞君道 今年歸不歸 | 낭군에게 말씀 드리오니, 올해는 돌아 오실는지요? |
江頭春草綠 是妾斷腸時 | 강가에 봄 풀 푸를 때, 첩의 애가 끊어진답니다. |
「나홍곡(羅嗔曲)」은 오언사구(五言四句)의 악부(樂府)로 당(唐) 문종(文宗) 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망부가(望夫歌)」라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지금 곁에 있지 않는 남성을 그리는 여인의 심정을 읊조린 것이다. “금년귀불귀(今年歸不歸)”, “강두춘초록(江頭春草綠)”은 왕유(王維)의 「송별(送別)」에서 의경(意境)을 얻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점화(點化)의 솜씨는 일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귀불귀(歸不歸)’는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도중(道中)」은 다음과 같다.
籬落依依半掩扃 | 울타리는 무너져 반나마 문을 가렸는데, |
斜陽立馬問前程 | 빗긴 해에 말 세우고 갈길을 묻는다. |
翛然細雨蒼烟外 | 저녁 연기 저편으로 갑자기 가랑비 내려 |
時有田翁叱犢行 | 어떤 농부 송아지를 재촉하며 가네. |
정도전(鄭道傳)의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를 다시 보는 듯한 작품이다. 그림같이 영롱(玲瓏)한 당시(唐詩)의 풍격(風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2~1488 성종19, 자 子元ㆍ剛中, 호 四佳亭ㆍ亭亭亭)
은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 일찍부터 그의 기재(奇才)가 중국에까지 알려졌으며 40여년을 관료로서 영예를 누리었다. 26년 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고수하여 김수온(金守溫)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 등 일시의 문장들이 그로 말미암아 진출의 길이 막혔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대각(臺閣)의 높은 솜씨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선발책자(選拔冊子)의 편찬에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처음으로 시화(詩話)라는 이름을 붙인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따로 편찬하여 사장(詞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할 때의 서거정(徐居正)은 이미 효용론자(效用論者)로 급선회하였지만 『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편찬할 때의 서거정(徐居正)은 분명히 보기 드문 기상론자(氣象論者)였다. 그래서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행한 비평의 양상도 대체로 풍골(風骨)과 사어(詞語) 용사(用事)와 점화(點化)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예술적인 경계를 두루 포괄하는 여유와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 45에서 그는 ‘시(詩)는 소기(小技)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은 군자(君子)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이라[詩者小技. 然或有關於世敎. 君子宜有所取之]’하여 오히려 구제론(救濟論)을 펴는 여유를 보이고 있으며 이것도 전편(全篇)에서 단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대체로 부염(富艶)한 것으로 정평(定評)이 나 있지만 그의 오랜 관료 생활 때문에 평가(評家)들의 관심권에서 소외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감(藻鑑)으로 이름 높은 신흠(申欽)과 허균(許筠)은 그를 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 이후 조선초기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신경(新驚)을 쫓는 모험을 거부하고 스스로 옛사람을 배워 품위있는 아름다운 표현을 익히는 일에 힘써 대가(大家)의 풍도(風度)를 잃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술회(述懷)한 것을 들어보면, 그는 병중에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하루에도 3ㆍ4수 혹은 6ㆍ7수 또 10수가 넘는 때도 있었다 하며, 가업(家業)을 이을 어진 자손이 없어 자기의 시작(詩作)이 마침내 장독의 덮개가 될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읊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음 시편(詩篇)에 더욱 명료하게 나타난다.
「시성자소(詩成自笑)」는 다음과 같다.
一詩吟了又吟詩 | 시 한 수 읊고 나면 또 다시 읊고 |
盡日吟詩外不知 | 종일토록 시 읊는 일 그 밖에 아는 게 없네. |
閱得舊詩今萬首 | 지금까지 지은 시 만 수나 되는데 |
儘知死日不吟詩 | 죽는 날엔 읊지 못할 것 다 알고 있지. 『四佳集』 권29 |
겉으로는 엄숙하게 효용론(效用論)을 외쳤지만 무료한 시간에는 시(詩) 짓는 일외에는 따로 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만수(萬首)나 시(詩)를 읊고도 죽는 날까지는 시(詩)를 짓게 되리라는 솔직한 심정(心情)의 토로(吐露)다.
서거정(徐居正)의 시편(詩篇)은 후대의 선발책자(選拔冊子)에서 20여수를 뽑아주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일즉사(夏日卽事)」(七律), 「칠월탄신하례작(七月誕辰賀禮作)」(七律), 「춘일(春日)」(七絶), 「고의(古意)」(七古) 등이 명편(名篇)으로 꼽히고 있으며 「추풍(秋風)」(五律)의 ‘유봉비부정 한압수상의(遊峰飛不定, 閑鴨睡相依)’는 특히 가구(佳句)로 훤전(喧傳)되어 온 것이다.
「하일즉사(夏日卽事)」는 다음과 같다.
小晴簾幕日暉暉 | 반만 개인 햇살이 주렴에 비치는데 |
短帽輕衫暑氣微 | 짧은 모자 가벼운 적삼에 더운 기운이 스미네. |
解籜有心因雨長 | 껍질 벗은 죽순은 비를 맞아 자라고 |
落花無力受風飛 | 떨어지는 꽃잎은 바람을 받아 나네. |
久拚翰墨藏名姓 | 오래전에 붓 던지고 이름도 감추었으며 |
已厭簪纓惹是非 | 벼슬길에 시비하는 일 이미 싫어졌다.. |
寶鴨香殘初睡覺 | 향로불 가물가물 첫잠을 깨었는데 |
客曾來少燕頻歸 | 찾는 손은 본래 적고 제비만 자주 돌아오네. |
「춘일(春日)」은 다음과 같다.
金入垂楊玉謝梅 | 누른 빛 버들에 들고 흰 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
小池新水碧於苔 | 작은 연못 봄물은 이끼보다 푸르네. |
春愁春興誰深淺 |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
燕子不來花未開 | 제비가 오지 않아 꽃도 아직 피지 않네. |
풍부한 그의 말솜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는 것이 「하일즉사(夏日卽事)」라면 「춘일(春日)」은 한마디로 그의 첨예한 재주와 호탕한 기상을 함께 읽게 해주는 작품이다. ‘금입수양옥사매(金入垂楊玉謝梅)’는 뛰어난 색채감각이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연자불래화미개(燕子不來花未開)’에 이르러 모처럼 그의 호탕을 실감하게 한다. 제비가 오지 않아 꽃도 아직 피지 않는다고 한 풍도(風度)가 그것이다.
이는 그의 시가 송시권(宋詩圈)에만 갇혀있지 않았음을 사실로 증명해 준 것이다. 그는 문형(文衡)다운 솜씨로 응제시(應製詩)에도 뛰어나 「칠월탄신하례작(七月誕辰賀禮作)」과 같은 명작(名作)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평담(平淡)한 구법(句法)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의심한 평가(評家)들도 있었지만【『용재총화(傭齋叢話)』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막연하게 언급한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제졸고후(題拙稾後)」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해명해 주고 있다.
文章體格似詼諧 | 문장 체격 우스꽝스러워 |
自愧才名價日低 | 이름값 떨어지는 것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네. |
老去放翁餘舊癖 | 늘그막에도 육유(陸游)의 옛 버릇은 남아 있고 |
愁來王粲有新題 | 근심스러울 때엔 왕찬(王粲)의 새 시(詩)가 기다리고 있네. |
그의 시의 평담(平淡)이 육방옹(陸放翁)에게서 온 것임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13~1492 성종23, 자 季昷ㆍ孝盥, 호 佔畢齋)
은 도교(道學)의 연원계보(淵源系譜)에서 보면 고려(高麗)의 성리학(性理學)을 조선조에 이어준 학자(學者)이며, 정치사적(政治史的)으로는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사종(師宗)이기도 하다. 일문(一門)이 선산(善山)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길재(吉再)로부터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을 이어받아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전(傳)할 수 있었으며 김종직(金宗直)은 다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까지 학통(學統)을 전수(傳授)하게 된다. 그리고 김종직(金宗直)은 출생지가 밀양(密陽)이므로 이러한 지연(地緣)에 힘입어 영남(嶺南) 사류(士類)의 종장(宗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문집(文集)인 『점필재집(佔畢齋集)』에는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문자(文字)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그의 학문적(學問的) 경향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主眼)으로 삼는, 실제 방면에서 치중하였던 것임을 짐작케 하는 수편의 향교기(鄕校記)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황(李滉)이 그를 가리켜 평생토록 한 일이 문장에 있을 뿐이라고 논평(論評)한 바와 같이 그가 영채(英彩)를 발(發)한 것은 사장학(詞章學)이다. 흔히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와 김종직(金宗直)의 문(文)을 나란히 일컫기도 하지만, 후세 평가(評家)로부터 칭예(稱譽)를 받은 것은 시(詩)다. 신흠(申欽), 『청창연담(晴窓軟談)』의 말과 같이 그의 시(詩)가 일시(一時)의 으뜸임에는 틀림없다.
그도 효용론(效用論)을 개진(開陳)하여 ‘경술문장일도관(經術文章一道觀)’을 말하고 있지만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거칠지는 않았다. 경전(經典)이 곧 문장(文章)이기 때문에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했다. ‘시서육예(詩書六藝)가 다 경술(經術)이요 시서육예(詩書六藝)의 글이 바로 문장(文章)’이라 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때문에 그는 「윤선생상시집서(尹先生祥詩集序)」에서 경전(經典)과 문장(文章)의 관계를 초목(草木)에 비유하여 뿌리가 튼튼하면 잎과 열매는 저절로 무르익고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문수(東文粹)』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할 때의 김종직(金宗直)은 분명히 시인(詩人)이요 문인(文人)이다. 이때까지도 소단(騷壇)의 습상(習尙)이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當時)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달(放達)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으니[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도 그의 시관(詩觀)이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後代)의 비평(批評)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와 신흠(申欽)은 그의 「선사사(仙槎寺)」 가운데서 다음의 구(句)를 들어 비평을 가했다.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 학(鶴)은 신라시대의 지붕에 날고 용(龍)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다. |
細雨僧縫衲 寒江客棹舟 | 보슬비 내리는데 중은 누더기를 깁고 차가운 강에는 길손이 노를 젓네. |
방달(放達) 방원(放遠)함을 칭도(稱道)하고 있으며,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25번에서 이 시의 ‘세우승봉납(細雨僧縫衲)’을 들어 유독 당(唐)에 핍근(逼近)하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25번에서 「차제숙강(差祭宿江)」(五律)의 ‘학명청로하 월출대어도(鶴鳴淸露下, 月出大魚跳)’를 가리켜 ‘당인(唐人)의 고처(高處)에 모자람이 있겠는가’라 반문하고 있으며 「신륵사(神勒寺)」【「夜泊報恩寺下 贈住持牛師 寺舊名神勒或云甓寺 睿宗朝改創極宏麗賜今額」】의 다음의 구(句)를 26번에서 들어 비평을 가했다.
上方鍾動驪龍舞 | 상방(上方)의 종(鍾)이 울리니 여룡(驪龍)이 춤추고 |
萬竅風生鐵鳳翔 | 일만 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니 철봉(鐵鳳)이 난다. |
이 구(句)를 특히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하다고 하여 우주(宇宙)에 기둥을 받치는 구(句)라고 칭도(稱道)하고 있다.
웅혼(雄渾)ㆍ호방(豪放)으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린 이규보(李奎報)ㆍ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의 시작(詩作) 가운데에서도 호방(豪放)한 것으로 정평(定評)이 나 있는 작품들은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선발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려(婉麗)ㆍ신경(新警)한 것도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려(婉麗)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온 이규보(李奎報)의 「하일즉사(夏日卽事)」도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서도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나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 등도 모두 질탕(跌宕)ㆍ호방(豪放)한 작품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았지만 역시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뽑아주지 않았다.
김종직(金宗直)의 시작(詩作)은 선발책자(選拔冊子)에 뽑히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30수를 넘거니와 그 가운데서 특히 「차제천정운(次濟川亭韻)」(七絶),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五絶), 「낙동역(洛東驛)」(五律), 「불국사(佛國寺)」(五律), 「차청심루(次淸心樓)」(七律), 「박숙보은사하증주지우사(泊宿報恩寺下住持牛師)」(七律), 「복룡도중(伏龍途中)」(七律), 「한식촌가(寒食村家)」(七律), 「봉대곡(鳳臺曲)」(五古), 「영금강산간일출(營金剛山看日出)」(七古), 「삼월이십삼일입경(三月二十三日入京)」(五律) 등 10여편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선발되고 있어 편수로 따지면 서거정(徐居正)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 꼽히는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는 다음과 같다.
桃花浪高幾尺許 | 도화 뜬 물결이 몇자나 높았길래 |
狠石沒頂不知處 | 낭석(狼石)은 꼭지가 잠기어 있는 곳을 모르겠네. |
兩兩鸕鷀失舊磯 | 쌍쌍이 나는 물새는 옛집을 잃고 |
銜魚飛入菰蒲去 | 고기 물고 문득 수초 사이로 들어가네. |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26번에서 이 작품을 가장 높은 것으로 평(評)하고 있거니와 애써 꾸미거나 호기(豪氣)를 부리지 않은 그의 ‘엄중(嚴重)’을 높이 산 것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물론 전편에 우의(寓意)가 짙게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17~1493 성종24, 자 悅卿, 호 梅月堂ㆍ東峯ㆍ淸寒子)
은 타고난 재주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장래가 약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과 뜻이 서로 어그러져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詩)로써 즐길 거리를 삼으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스스로 술회(述懷)한 대로 그는 소시적부터 질탕(跌宕)하여 세상의 명리(名利)나 생업(生業)과 같은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山水)로 방랑(放浪)하면서 경치를 만나면 시(詩)나 읊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민병수, 「梅月堂의 시세계」, 『人文論叢」 제3집,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1978 참조】.
역대(歷代)의 소인(騷人) 가운데서 김시습(金時習)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詩)로써 말한 시인(詩人)은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렵다. 시(詩)로써 자신의 정신적(精神的) 가치(價値)를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시(詩)를 쓰게 한 시적(詩的) 충격(衝擊)과, 시(詩)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적(詩的) 동기(動機)도 모두 시(詩)로써 읊었다.
시(詩)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詩)를 쓰게 된 그는 시(詩)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했기에 시(詩)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서 유출(流出)되는 모든 정서(情緒)가 시(詩)로써 표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與否)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를 자연발생적으로 표백하였을 뿐 시(詩)를 짓는 데 힘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난잡(亂雜)하고 이속(俚俗)의 말이 많다는 비평(批評)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시(詩)에서 추구(追求)한 이상(理想)은 오히려 오묘(奧妙)한 입신(入神)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운(聲韻)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그를 수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실천적인 유교이념(儒敎理念)으로 무장된 김시습(金時習)의 체질에서 보면, 그는 모름지기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했고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自然)이요 선문(禪門)이었으며 그가 익힌 문장은 시(詩)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문(禪門)은 이단(異端)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行)한 선문(禪門)에의 투적(投跡)이나 시작(詩作)에의 침잠(沈潛)도 이미 사회의 전범(典範)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行蹟)이 기괴(怪奇)하다든가 그의 시작(詩作)이 희화적(戱畵的)이라는 기평(譏評)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이 지배하던 당시(當時)에 시(詩)라고 하는 것은 한갓 선비들의 교양물(敎養物)이거나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에게 이것은 그 이상으로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다. 시(詩)를 위해 시(詩)를 하는 낭비(浪費)를 일삼으면서도 시(詩) 말고는 다시 할 일이 없었던 그였기 때문에,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를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이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그는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詩文集)에 전하는 시편(詩篇)만 하더라도 2,200여수(餘首)나 되지마는 실제로 김시습(金時習)의 시작(詩作)은 이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문집(詩文集)을 편성하는 과정에서도 10년을 걸려 겨우 유편(遺篇) 3권을 수습하였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李耔, 「梅月堂集序」 참조)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金時習)의 시(詩)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主題的) 소재(素材)는 ‘자연(自然)’과 ‘각(閣)’이다. 몸을 산수(山水)에 내맡기고 일생(一生)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김시습(金時習)에게 자연(自然)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 일부(一部)가 되곤 했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의 시(詩)를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自然)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현실(現實)에 대한 실의(失意)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自然)의 불변(不變)하는 영속성(永續性)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深刻性)을 부여하고 비극적(悲劇的)인 감정을 깃들게 했다.
일생(一生)을 두고 별일 없이 살아간 김시습(金時習)에게는, 어쩌면 ‘한(閑)’ 그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고 자신과 자연(自然)이 함께 평화스런 상태에 놓여지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의(閑意)가 일어났다가도 세사(世事)나 다른 사물(事物)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흔들어 놓곤 했다. 애써 신(身)과 세(世)에 무관심하려 한 그는 일체(一切)의 집념(執念)에서 초탈(超脫)하여 그야말로 태연하고 별일 없고 생각에만 잠길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놓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의(閑意), 한극(閑極), 한적(閑適), 우성(偶成), 만성(漫成), 만성(謾成) 등 그의 시작(詩作)에서 보여준 그 많은 ‘한(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서 자적(自適)하지 못했다.
그의 시작(詩作)에 대한 후대인(後代人)의 비평(批評)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작(詩作)이 가능(可能)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 생각이 높고 멀어 초매(超邁) 오묘(奧妙)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前者)는 초보적(初步的)인 작시수업(作詩修業)을 논증(論證)한 천재론(天才論)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후자(後者)의 경우는 흔히 동양(東洋)의 시학(詩學)에서 추구(追求)하던 이상(理想)으로, 대개의 경우 이는 시인(詩人) 자신의 인격(人格)과 직결될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인상비평(印象批評)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詩人) 자신이 ‘다만 오묘한 곳만 볼 뿐 소리와 연구에 대해선 따지지 않는다[但看其妙處 不問有聲聯]’이라 한 것을 고려한다면 김시습(金時習)의 시작(詩作)에서 체제(體制)나 성률(聲律)은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 중에서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수에 이르고 있거니와 특히 다음의 시편(詩篇)들은 김시습(金時習)의 “초매(超邁)”를 한눈으로 알게 하는 작품들이다. 「산행즉사(山行卽事)」(七律), 「위천어주도(渭川漁釣圖)」(七絶), 「도중(途中)」(五律), 「등루(登樓)」(五律), 「소양정(昭陽亭)」(五律),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五律), 「고목(古木)」(七律), 「사청사우(乍晴乍雨)」(七律), 「등목교(獨木橋)」(七律), 「무제(無題)」(七律), 「유객(有客)」(五律) 등이 그것이다.
「등루(登樓)」는 다음과 같다.
向晚山光好 登臨古驛樓 | 저녁 되자 산빛이 하도 좋아서 옛 역 다락에 올라 보았네. |
馬嘶人去遠 波齧棹聲柔 | 말이 우니 사람은 멀리로 가고 물결 씹는 노젓는 소리 부드럽구나. |
不淺庾公興 堪消王粲憂 | 유공(庾公)의 흥취도 얕지 않은데 왕찬(王粲)의 시름도 가시지 않네. |
明朝度關外 雲際衆峯稠 | 내일 아침 관문 밖에 나갈 때에는 구름 가에 여러 봉우리 빽빽하겠지 |
조탁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흐름이 자재(自在)하여 군졸(窘拙)함이 없다. 유연(油然)히 피어 오르는 종편(終篇)의 의경(意境)은 꾸밈이나 일삼는 범용(凡庸)으로서는 감히 발돋움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중(途中)」은 다음과 같다.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 맥국에 처음으로 눈이 날리니 춘천 땅에 나뭇잎이 듬성해졌네. |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 가을 깊어 마을에는 술이 있는데 손 노릇 오래 하니 고기 맛을 모르겠네. |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우고 강이 머니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가니 나그네의 말발굽 머뭇거린다. |
이 광원(廣遠)한 경지는 스스로 깨달았을 때만 가능한 세계다. 초매(超邁)한 그의 시세계가 모처럼 이룩한 성과(成果)라 할 것이다.
「산행즉사(山行卽事)」는 다음과 같다.
兒打蜻蜓翁掇籬 | 아이는 잠자리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
小溪春水浴鸕鶿 | 작은 시내 봄 물에는 물새가 멱을 감는다. |
靑山斷處歸程遠 | 청산이 끝났지만 돌아갈 길은 멀어 |
橫擔烏藤一个枝 |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
등나무 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다가 그것도 힘에 겨워 비스듬히 등에 짊어지고 떠나가는 ‘횡담오등일개지(橫擔烏藤一箇枝)’의 경지는 바로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시습(金時習) 자신의 모습이다. 뛰어난 걸재(傑才)라 하더라고 상상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이밖에도 그의 「관동일록(關東日錄)」에는 특히 명편(名篇)이 많다. 「유객(有客)」, 「등루(登樓)」, 「도중(途中)」, 「독목교(獨木橋)」 등도 이 가운데 드는 것들이다. 마지막 시도한 환속(還俗)의 꿈이 실패(失敗)로 끝났을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를 수레에 싣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관동(關東)으로 떠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동행(關東行)이며 이때의 시편(詩篇)을 모은 것이 「관동일록(關東日錄)」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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