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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4) 풍요와 위항시인의 의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4) 풍요와 위항시인의 의지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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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여기서 풍요(風謠)라고 한 것은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위항시인(委巷詩人)의 시집(詩集)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작(詩作)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의 그것에 비길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중인(中人)ㆍ천예(賤隸)들의 피맺힌 소망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특수계층의 시집(詩集)이다. 때문에 그 편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사대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위항시인(委巷詩人)이란 대체로 의역중인(醫譯中人)ㆍ서리(胥吏) 등과 같이 중간 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詩人)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대부의 기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平民)보다는 우위에 있는 여정(閭井)의 시인(詩人)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처럼 일반 상인이나 천예(賤隸)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위항인(委巷人)의 시집(詩集)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현종(顯宗) 9(1668)에 중인 출신 6인의 시편(詩篇)을 모은 육가잡영(六家雜詠)이 나왔으며, 여기에 실린 시인(詩人)들은 최기남(崔奇男)을 비릇하여 남응침(南應琛)ㆍ정례남(鄭禮男)김효일(金孝一)최대립(崔大立)ㆍ정납수(鄭枏壽) 등 모두 일시(一時)의 명가(名家)들이다. 그 뒤 숙종(肅宗) 38(1712)에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격려와 협조로 10년동안 여정(閭井)에서 시편(詩篇)을 수집하여 해동유주(海東遺珠)1()을 간행한 것이 본격적인 위항시인의 시집(詩集)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는 바로 이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ㆍ속보(續補)한 것이며, 이에 이르러 조선초기에서부터 숙종대(肅宗代)까지의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을 정리하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역대의 중서천예(中庶賤隸) 중에서도 문학사에 이름을 전하고 있는 명가(名家)의 시작(詩作)이 많아 시사적(詩史的)인 무게에 있어서는 경홀(輕忽)히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위항시인들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며 이 뒤에도 주갑(周甲)마다 속집(續集)을 간행하는 의지를 보여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풍요속선(風謠續選)(73)이 간행되었으며, 그 이주갑(二周甲)이 되는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는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162()의 시편(詩篇)을 시체(詩體)에 따라 선집(選集)하여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 1737)에 간행되었으며, 원집(原集) 9()과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쳐 2()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뒷날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할 때(哲宗 8, 1857) 소대풍요(昭代風謠)가 산망(散亡)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이듬해(戊午)에 운각자(芸閣字)로 다시 인출(印出)한 중인본(重印本)이 널리 유행(流行)하고 있다. 편자는 고시언(高時彦, 1671~1734)으로 알려져 왔으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오광운(吳光運, 1698~1745)의 서문과 발문에 따르면 채팽윤(蔡彭胤)이 부집(裒集)한 것을 이달봉(李達峰)이 산정(刪正)하고 오광운(吳光運) 자신이 보산(補刪)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120년 뒤에 간행된 풍요삼선(風謠三選)의 발문(跋文)에는 고시언(高時彦)을 편자로 단정(斷定)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고시언(高時彦)의 제사(題辭)소대풍요(昭代風謠)권수(卷首)에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편자로 알려진 이 두 사람은 모두 책이 간행되기 전에 죽었다. 이 사실은 고시언(高時彦)의 작품(作品)이 이미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오광운(吳光運)의 발문(跋文)그 일을 주관하던 사람이 또한 모은 후에 죽었다[主其役者又裒後死].’라는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이러한 일련(一聯)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은 그 선집(選輯)에서부터 간행에 이르는 동안 오랜 기간이 소요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집(正集) 9() 외에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추보(追補)하여 정집(正集)과 함께 간행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단적인 증좌(證左)가 될 것이며 권수(卷首)에 제사(題辭)를 붙인 고시언(高時彦)의 작품(作品)이 별집(別集)에 수록되고 있는 현상은 이 책의 간행 경위를 사실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선집(選輯)한 것은 채팽윤(蔡彭胤)이며 고시언(高時彦)이 간행에 참여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오광운(吳光運)의 협조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詩人)들은 중서인(中庶人)을 비롯하여 상인(商人)ㆍ천예(賤隸) 출신(出身)까지도 망라되고 있지만,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의역중인(醫譯中人)과 서리(胥吏)이며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의역중인(醫譯中人)하대부와 같은 등급의 사람[下大夫一等之人]’으로 지칭(指稱)될 정도로 그 역할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서울의 중인층으로서 그들이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상 도시적인 지식인으로 또는 문인(文人)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사대부의 지우(知遇)를 입어 이들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國制)의 금고(禁錮)로 환로(宦路)의 진출이 제한되어 있던 이들은 양반 사대부의 유액(誘掖)과 추만(推輓)에 힘입지 않고서는 그들의 성취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의 간행에 있어서도 사대부의 협조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고시언(高時彦) 자신이 비장(悲壯)하게 칠언으로 읊고 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與東文選相表裏 동문선(東文選)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니
一代風雅彬可賞 일대(一代)의 풍아(風雅) 빛나서 볼 만하도다.
貴賤分岐是人爲 귀천(貴賤)을 나눈 것은 인간이 한 짓이지만
天假善鳴同一響 하늘이 준 좋은 노래는 같은 소리로다. (昭代風謠)卷首, 題辭

 

이 책의 성격은 동문선(東文選)과 더불어 표리가 되는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고 있으며, 인위적인 신분에는 귀천(貴賤)의 차이가 있지만 하늘이 준 노래는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위항시인은 문학 양식에 있어서도 그들 나름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사대부층의 시문(詩文)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시편(詩篇)의 대부분이 금체시(今體詩)로 채워져 있는 것도 시대의 풍상(風尙)을 그대로 추수(追隨)한 것이며 그들의 능력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율(排律)과 같은 장편(長篇)유희경(劉希慶)최기남(崔奇男)홍세태(洪世泰) 등 명가(名家)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며, 고체(古體)에 있어서도 전기(前記) 육가잡영(六家雜詠)의 여섯 사람 시()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 의식에 있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대개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으로 흐르고 있어 스스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7()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아니하고 각인(各人)의 성씨 아래 작품들을 열록(列錄)하여 고람(考覽)에 편하도록 하였다. 범례(凡例)에서도 이같은 취지를 밝히고 있으나 대부분 금체시(今體詩)로 채워져 있는 이 책에서는 시체별(詩體別)로 편차를 하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수(卷首, 卷之一) 소재(所載) 32()의 시편(詩篇)소대풍요(昭代風謠)의 권말(卷末)에 수록(收錄)된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다시 일권(一卷)으로 합집(合輯)한 것으로서, 그 체단(體段)을 갖추고 미진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재록(再錄)한 것이다.

 

이덕함(李德涵)의 발문에 따르면,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뒤에도 많은 시인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그 주갑(周甲)이 된 지금에 있어서는 그들의 이름조차 일실(逸失)한 시인들이 태반이나 되었으므로 송석원(松石園)이 중심이 되어 다시 시()를 수집, 예원(藝苑)의 명감(明鑑)에 취정(就正)하여 기험(奇險)한 것은 버리고 평정(平正)한 것은 취하여 정선(精選)ㆍ집약(集約)하게 되었다 하고, 또 그 목적은 매몰된 것에 대한 발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세지사(當世之士)로 하여금 더욱 면려(勉勵)토록 하여 후일을 기다리는 데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위항시인들이 그들의 시집(詩集)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단순한 시집(詩集)의 간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군자(君子)명자외물(名者外物)”이라 하여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불우한 처지에서 금세(今世)를 살아야만 하는 위항시인들에게 그것은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지는 위항시집(委巷詩集)의 선구가 된 해동유주(海東遺珠)소대풍요(昭代風謠)의 간행에 추진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18세기 말에서부터 본격적인 유파적(流派的) 활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사(詩社)의 결성에 활력소가 되었다. 풍요속선(風謠續選)의 간행에 구심체가 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일명(一名) 옥계시사(玉溪詩社)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원래 시사(詩社)의 결성은 사대부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위항시인이 중심이 된 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 이르러 시사적(詩社的)인 문학활동은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분위기와 성격은 존재집(存齋集)의 다음 글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 송석선생(松石先生)이 옥계(玉溪) 위에 살면서 문사(文史)로써 스스로 즐기니 뜻을 같이 하는 이웃 선비들이 날로 서로 송석간(松石間)에 왕래(往來)하였다. 모이면 반드시 시()가 있는지라 이 시들이 모여 책을 이루었다. 이것이 시사(詩史)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嗚呼! 松石先生居玉溪上 以文史自娛 鄕隣同志之士 日相與往來於長松老石之間 會必有詩 詩之成卷 此詩史之所以作也. -朴允默, 存齋集23, 玉溪詩史序

 

 

이 시사(詩社)의 중심인물은 대부분이 풍요삼선(風謠三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일부가 풍요속선(風謠續選)의 후반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이 책의 편자인 장혼(張混)은 일생을 규장각서리(奎章閣胥吏)ㆍ외각교서(外閣校書)의 이원(吏員)으로 있었지만, 사부서(四部書)를 박람(博覽)하고 시()에 뛰어나 그의 수교(讐校)를 거쳐 발간된 편서(編書)만도 여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김매순(金邁淳)이서구(李書九)홍석주(洪奭周) 등 당대(當代)의 명문대가(名門大家)들과도 사귀어 왕복서(往復書)로써 문학적인 교유(交遊)도 가졌다. 특히 그의 시는 부섬아순(富瞻雅順)하여 이서구(李書九)고체심득 한위여향(古體深得, 漢魏餘響).’이라고 하였으며구자균(具滋均), 근대적 문인(近代的 文人) 장혼(張混)에 대하여, 국문학논총(國文學論叢), p.35에서 인용 홍석주(洪奭周)는 그에게 답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의 문()은 시()가 가장 뛰어났으며 시()는 고체(古體)에 더욱 뛰어났소이다. 사언(四言)은 위진(魏晉)에서 그림자를 따오고 오언(五言)은 왕유(王維)와 위응물(韋應物)에서 다듬었으므로……또한 그대의 시()가 오늘날의 시()가 아님을 알겠도다.

足下之文, 最長於詩, 詩尤長于古體. 四言隱約魏晉, 五言灑削王韋亦知足下之詩, 非今世詩也. -洪奭周, 淵泉集書卷, 答張生混書

 

 

그 근원이 깊고 먼 데서 온 것임을 칭도(稱道)하고 있다. 금체(今體)가 행세(行世)하던 당시의 소단(騷壇)에서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능력을 과시한 그의 시업(詩業)은 사대부의 그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풍요삼선(風謠三選)은 속선(續選)의 속집(續集)이다. 직하사(稷下社)의 시동우(詩同友)유재건(劉在建)ㆍ최경흠(崔景欽) 등이 풍요속선(風謠續選)이후의 위항시인 305()의 시()를 선집(選集)하여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 인행(印行)7() 3책본(冊本)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만에 풍요속선(風謠續選)이 간행되었고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준비기간(準備期間)까지 합치면 12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위항시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삼선(三選)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이 대체로 수습되었으며 사실상 이것이 독자적인 위항시인의 시집(詩集)으로는 마지막 간행이 되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속선(續選)을 편집한 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을 비롯하여 김낙서(金洛瑞)ㆍ왕태(王太)박윤묵(朴允默) 등 송석원(松石園)의 중심 구성원들이 이채(異彩)를 띠고 있으며 조수삼(趙秀三)정지윤(鄭芝潤)과 같은 일시(一時)의 명류(名流)들이 끼어 있어 이 책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편제(編制)는 속선(續選)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실명씨(失名氏) 4, 석자(釋子) 13, 여자(女子) 4인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 위항시집(委巷詩集)으로서는 이례적이다. 이 책의 발간 경위에 대해서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최경흠전기(崔景欽傳記)에 상술(詳述)되어 있다.

 

 

또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이를 함께 하려 하고 마침내 시사(詩社)를 결성(結城)하였는데, 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매양 꽃 피는 아침, 달 뜨는 저녁이면 한데 모여 시()를 읊조리곤 하였는데 계축년(癸丑年) 봄에 이르러 난정계사(蘭亭稧事)를 모방하여 직하사(稷下社)에 모이어 각각 시()를 짓고 마시고 즐길 때 치명(穉明)이 풍요(風謠)를 계속 편찬할 것을 발의(發議)하였으므로 모두들 찬성하였다. 곧 여러 곳에 두루 알려 작품(作品)을 수집하고 문장대가(文章大家)에게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았다. 정사년(丁巳年) 겨울에 이르러 편집이 거의 완료되어 이름을 풍요삼선(風謠三選)이라 하고 마침내 성금(誠金)을 모아 300여질(餘帙)을 인행(印行)하였다. 서문(序文)은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대감에게 받았으며

又善於詩文, 欲與同志共之遂結社, 余亦參焉. 每於花朝月夕會而吟詠, 及癸丑春, 倣蘭亭稧事, 會于稷下社, 各賦詩飮而樂之, 穉明乃發風謠續編之議. 僉曰可 卽爲通諭于諸處 收輯諸作就正于文章大家 至丁巳冬編幾完 名曰風謠三選 遂鳩財刊印三百餘本 受序文于經山鄭相國- 劉在建, 里鄕見聞錄7, 崔景欽傳.

 

 

이 전기(傳記)는 삼선(三選)의 편자인 유재건(劉在建)이 직접 쓴 것이므로,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이 직하사(稷下社)의 결의에 의하여 수행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직하사(稷下社) 성립경위와 분위기에 대해서도 함께 알게 해준다.

 

직하사(稷下社)의 중심인물로는 최경흠(崔景欽)유재건(劉在建)ㆍ조희룡(趙熙龍)ㆍ이경민(李慶民) 등을 들 수 있다. 그 활동은 송석원(松石園)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지마는, 그 중심 구성원들이 저작한 호산외사(壺山外史)(趙熙龍), 희조질사(熙朝軼事)(李慶民),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劉在建) 등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전기(傳記) 자료로서 값진 것이 되고 있다.

 

삼선(三選) 이후 다시 60년이 되는 1917년에 기당(幾堂) 한만용(韓晩容)이 풍요사선(風謠四選)의 편찬 문제를 최남선(崔南善)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제도적으로 계급이 타파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중지되었으며구자균(具滋均),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 p.111, 장지연(張志淵)ㆍ이기(李琦)ㆍ장홍(張鴻) 등과도 편집을 기획한 바 있으나 역시 당시 실정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 등이 이 해에 편집한 대동시선(大東詩選)후반에 삼선(三選) 이후의 위항시(委巷詩)가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표면상으로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의 계급 타파를 운위(云謂)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구한말의 격동과 일본의 한국 강점 등을 거치는 동안 중인층의 사회적 진출이 현저해져서 사실상 계층 이동이 실현된 상태였으므로 구차하게 그 신분을 적출(摘出)하면서까지 위항시집(委巷詩集)의 속집(續輯)을 기도하는 것은 시의(時宜)를 잃은 일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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