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바뀌어졌지만 소식(蘇軾)의 뒤를 이은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 강서시파(江西詩派)의 활약으로 송시(宋詩)의 특색을 두드러지게 했다. 이들은 당시(唐詩) 정통을 거부하고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숭상하여 신풍(新風)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발(奇拔)함에 치우치다가 궤벽에 빠지거나, 참신을 다가 생경(生硬)을 드러내어 시(詩)의 품위를 저상(沮喪)케 하는 일도 있어 왔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명(明) 이동양(李東陽)은 천진(天眞)을 잃은 포풍착영(捕風捉影)의 시풍(詩風)이라 하여 혹평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시(詩)는 고려 중기 이후 200년 동안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조선조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강서시파(江西詩派)와 비슷한 시풍(詩風)이 유행하여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이 서로 경향을 같이하면서 신풍(新風)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선조 때의 대표적인 시인 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 등도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자주 시험하고 있어 때로는 이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상(朴祥)ㆍ김정(金淨)ㆍ신광한(申光漢)도 모두 같은 시대에 소단(騷壇)을 빛낸 주역들이지만 특히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은 같은 시대에 같은 경향으로 시(詩)를 써 각각 조선조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칭송을 받았다. 물론 평가(評家)들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서는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풍(詩風)으로 시(詩)를 써서 양인(兩人)이 모두 조선조 제일의 시인으로 기림을 받았다면, 이러한 시(詩)의 경향은 이행(李荇)이나 박은(朴誾)과 같은 시재(詩才)에 의해서만 성공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며 뒤집어 말하면 우리나라 시인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唐詩)보다 송시(宋詩) 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 등이 간헐적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신경(新警)을 시험한 것도 우리나라 한시가 이때에 이르러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박은(朴誾, 1479 성종10~1504 연산10, 자 仲悅, 호 挹翠軒)
은 15세에 이미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18세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힐 만큼 재주를 타고 났다. 풍채가 청수하여 마치 신선(神仙)을 방불했다 하며 신용개(申用漑, 申叔舟의 孫子)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26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을 당했으므로 그의 유고(遺稿)는 시집(詩集) 2책(冊)이 있을 뿐이다.
박은(朴誾)은 이행(李荇)과 주고 받은 시편(詩篇)이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거니와 시작(詩作)의 태반이 이행(李荇)과 증답(贈答)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작도 대개 이행(李荇)과 주고 받은 시편(詩篇) 속에 있다. 후세 선문가(選文家)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는 「우중회지(雨中懷之)」(五律), 「효망(曉望)」(五律), 「화택지(和擇之)」(七律), 「복령사(福靈詩)」(七律), 「증택지(贈擇之)」(七律), 「영보정오수(永保亭五首)」(七律), 「야와유회사화(夜臥有懷士華)」(七律), 「기택지(寄擇之)」(七律) 등이 있으며 이것들도 그 절반이 이행(李荇)과 증답(贈答)한 것이다.
「복령사(福靈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伽藍却是新羅舊 | 가람(伽藍)은 신라의 옛 것이요 |
千佛皆從西竺來 | 천불(千佛)은 다 서축(西竺)에서 모셔온 것, |
終古神人迷大隈 | 예로부터 신인(神人)도 대외(大隈) 만나려다 길을 잃었거니 |
至今福地似天台 | 지금의 이 복지(福地)도 천태(天台)와 같네. |
春陰欲雨鳥相語 | 봄날 흐려 비오려 하니 새가 먼저 속삭이고 |
老樹無情風自哀 | 늙은 나무는 정(情)이 없는데 바람이 스스로 슬프게 하네. |
萬事不堪供一笑 | 세상만사 일소(一笑)에 붙일 것도 못되지만 |
靑山閱世自浮埃 | 청산도 세상을 지내느라 스스로 먼지 위에 떠있네. |
1502년의 작품으로 박은(朴誾)의 대표작이다. 박은(朴誾)의 시(詩)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는 모두 그의 타고난 높은 재주를 칭도하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다. 비록 황진(黃陳)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의 뛰어난 재주가 스스로 그렇게 얻어낸 것이라 하였다.
특히 이 「복령사(福靈詩)」의 “춘음욕우조상어 노수무정풍자애(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28에 ‘비장노건(悲壯老健)하고 청신경절(淸新警絶)하여 이규보집(李奎報集) 같은 데서 어찌 한마디라도 이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悲壯老健 淸新警絶 如李奎報集中 那得有一語似此]?’라 반문하였으며, 허균(許筠)도 『성수시화(惺叟詩話)』 29에서 이 구(句)에 대해서는 신조(神助)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구(句)는 인간이 천기(天機)를 누설한 것이므로 그가 단명(短命)했다고도 하며 그래서 호사가(好事家)들은 이를 가리켜 단명구(短命句)라고도 했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29에서 특히 박은(朴誾)의 시(詩)를 정성(正聲)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이는 그의 당시(唐詩) 정통론이 논시(論詩)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애는 26년에서 그쳤지만, 그의 ‘청신(淸新)’에 못지 않게 세련의 극치를 보인 ‘노숙(老熟)’은 분명 나이를 초월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청산도 오래도록 세상을 지내노라니 뿌옇게 세상 먼지 위에 떠있다고 한 미련(尾聯) 하구(下句)의 솜씨는 경련(頸聯)의 신경(新警)과 좋은 대조를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함련(頷聯)에서 ‘종고(終古)’, ‘지금(至今)’과 같은 허자(虛字)로 대우를 맞추고 있는 기법은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높은 수준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박은(朴誾)과 신교(神交)를 맺은 사이로 알려진 시우(詩友) 이행(李荇)에게 준 「재화택지(再和擇之)」이다.
深秋木落葉侵關 | 깊은 가을 떨어진 잎이 문간에 침노하고 |
戶牖全輸一面山 | 창문으로 온통 산을 통째로 들여 보내네. |
縱有盃尊誰共對 | 비록 술이야 있지만 누구와 함께 대작할까? |
已愁風雨欲催寒 | 벌써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스럽네. |
天應於我賦窮相 |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를 내려 주었으련만, |
菊亦與人無好顔 | 국화 또한 사람과 같이 좋은 얼굴이 없네. |
撥棄憂懷眞達士 | 근심 걱정 내던지는 것이 진정한 달사(達士)이니, |
莫敎病眼謾長潸 | 병든 눈에 부질없이 눈물 흐르게 하지 마오.. |
1502년 파직되었을 때의 작품이다. 가을과 작자의 처지를 한묶음으로 처리하여 비감(悲感)을 더하고 있는 솜씨가 일품이다. 허자(虛字)의 적절한 사용이 자연스럽거니와 세속의 인정을 무리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도 친근감을 준다. 특히 경련(頸聯)은 황정견(黃庭堅)의 시(詩)와 흡사하다고 남용익(南龍翼), 『호곡시화(壺谷詩話)』 6번에서 했던 평도 있지만, 여기서도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모습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이행(李荇, 1478 성종9~1534 중종29, 자 擇之, 호 容齋)
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면서 벼슬이 재상에까지 올랐으나 무오(戊午)ㆍ갑자(甲子)ㆍ기묘사화(己卯士禍)의 와중에서는 네 차례나 유배지의 신고(辛苦)를 감내하여야만 하였으며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생활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손수 시고(詩藁)를 만들어 생생한 삶의 체험을 후세에 남겼다. 그때 만든 11편의 시(詩)가 『용재집(容齋集)』에 전하고 있어 그의 삶과 시세계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의 문집에 전하는 것으로는 조천록(朝天錄)을 비롯하여 적거록(謫居錄)ㆍ남천록(南遷錄)ㆍ해도록(海島錄)ㆍ창택록(滄澤錄)ㆍ남유록(南遊錄)ㆍ영남록(嶺南錄)ㆍ차황화시집(次皇華詩集)ㆍ동사집(東槎集)ㆍ화남악창수집(和南岳唱酬集) 등 10편이며 이 중에는 따로 간행된 것도 있다. 특히 그는 66편에 달하는 부(賦)를 남기고 있어 부(賦)의 작가로서도 조선초기의 으뜸이다.
그의 시(詩)에 대해서는 특히 허균(許筠)이 조선조 제일대가(第一大家)라 칭도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29에서 침후(沈厚)ㆍ화평(和平)하고 담아(澹雅)ㆍ순숙(純熟)한 그의 시(詩)를 “원혼화아 의치노성(圓渾和雅, 意致老成)”으로 평가하여 박은(朴誾)과 맞수임을 말하고 있다.
이행(李荇)의 시(詩)는 시선집(詩選集)에서 뽑힌 것만 30수가 넘어 조선조 제일대가(第一大家)의 면모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그의 대표작은 「팔월십오야(八月十五夜)」(七絶)와 「제천마록후(題天磨錄後)」(五律)다.
「팔월십오야(八月十五夜)」는 다음과 같다.
平生交舊盡凋零 | 평생에 사귄 벗들 다 죽고 없는데 |
白髮相看影與形 | 백발(白髮)이 되어 몸과 그림자가 서로 보게 되네. |
正是高樓明月夜 | 이야말로 높은 누각 달 밝은 밤인데 |
笛聲凄斷不堪聽 | 처량한 피리소리 차마 들을 수 없네. |
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그였지만, 정감과 시어(詩語)가 한데 어울어져 읽을 수록 무한한 감회(感懷)가 구슬픔을 더해줄 뿐이다. 특히 기구(起句)는 자신의 몸과 그림자가 서로 본다는 것으로 혼자 살아 남은 자신의 처지를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높은 수준이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를 과시한 것이다. 물론 ‘영여형(影與形)’은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서 ‘형영상인(形影相印)’으로, 장구령(張九齡)의 「조경견백발연구(照鏡見白髮聯句)」에서 ‘수지명경리 영형백상련(誰知明鏡裏, 影形白相憐)’으로 이미 보인 것이다.
「제천마록후(題天磨錄後)」는 다음과 같다.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 책 속의 천마산색(天磨山色), 아직도 어렴풋이 눈 앞에 있네. |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 사람은 가고 없고 고도(古道)는 날로 멀어져 가네. |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 가랑비 영통사(靈通寺)에 내리고 석양은 만월대(滿月臺)에 진다. |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 생과 사는 본래 만날 수 없는 것, 허옇게 된 머리로 홀로 배회하네. |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남곤(南袞) 등 3인이 개성(開城)에 있는 천마산(天磨山)에서 놀 때 지은 시집(詩集) 『천마록(天磨錄)』을 보면서 1503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박은(朴誾)을 그리워한 작품이다. ‘사생계활(死生契闊)’은 물론 『시경(詩經)』 패풍(邶風) 「격고(擊鼓)」의 ‘사생계활 여자성설(死生契闊 與子成說).’에서 나온 것이지만, 책 속에 담긴 천마산(天磨山)을 두고 이렇게 읊어 낼 수 있는 그의 솜씨는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도 찬양할 말을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고아(古雅)하면서도 침착(沈着)ㆍ중후(重厚)함을 잃지 않은 이행(李荇)의 시세계는 이 한 편만으로도 알고 남을 것이다.
정사룡(鄭士龍, 1491 성종22~1570 선조3, 자 雲卿, 호 湖陰)
은 관각(館閣)의 큰 솜씨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른바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지만 그들이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기 때문에 시(詩)로써 이름 높은 세 사람의 문형(文衡)을 골라 ‘호소지(湖蘇芝)’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詩)를 할 때에는 이행(李荇)과 경향을 같이 하였으며 생활인으로서도 이행(李荇)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행(李荇)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사사로이 시작(詩作)을 주고 받기도 하였으며 이행(李荇)의 시(詩)를 스스로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뛰어나 그의 득의구(得意句)도 모두 칠율(七律)에 있다. 김창협(金昌協)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 33의 말과 같이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가운데 풍격(風格)은 노수신(盧守愼)을 따르지 못하지만 그의 조직(組織)ㆍ단련(鍛鍊)은 이상은(李商隱)의 서곤체(西昆體)를 방불케 한다.
정사룡(鄭士龍)의 시편(詩篇)은 시선집(詩選集)에서 뽑아준 것만으로도 40편에 이르고 있어 그는 선문가(選文家)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제작한 명편(名篇)들도 모두 칠율(七律) 중에 있거니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기회(記懷)」, 「황산전장(荒山戰場)」, 「후대야좌(後臺夜坐)」도 모두 칠율(七律)이며 특히 「후대야좌(後臺夜坐)」는 평가(評家)들의 화제에 자주 올랐던 작품이다.
기작(奇作)으로 널리 알려진 「기회(記懷)」는 다음과 같다.
四落階蓂魄又盈 | 뜰 앞 명협초 떨어지니 달이 또 차는데 |
悄無車馬閉柴荊 | 말 탄 사람 사립문을 드나들지 않네. |
詩書舊業抛難起 | 시서(詩書) 읽던 옛 공부 한번 놓으면 다시 하기 어렵고 |
場圃新功策未成 | 전가(田家)의 새로운 일도 생각대로 되지 않네. |
雨氣壓霞山忽瞑 | 우기(雨氣)가 노을을 눌러 산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
川華受月夜猶明 | 시냇물 달빛 받아 밤인데도 훤하네. |
思量不復勞心事 | 생각하는 일 이제는 심사(心事)를 또다시 수고롭게 하지 못하니 |
身世端宜付釣耕 | 이 몸 오직 밭 갈고 낚시질이나 해야지. |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35에서 이 작품을 천년(千年) 이래의 기작(奇作)이라 하였으며 특히 “우기압하산홀명 천화수월야유명(雨氣壓霞山忽瞑 川華受月夜猶明).”은 신(神)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 하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짜임새와 다듬은 솜씨는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그의 것임에 틀림없다.
5. 당시(唐詩) 성향의 대두
고려 중기에 이르러 만당(晩唐)의 섬미(纖靡)를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소식(蘇軾)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소단(騷壇)은 200여년 동안 송시(宋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습상(習尙)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다만 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 등이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보였을 뿐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아성(牙城)에 도전한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러 스스로 호방(豪放)과 신경(新警)을 멀리하고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당시(唐詩)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종 연간에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황진(黃陳)의 시풍(詩風)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박은(朴誾)ㆍ이행(李荇) 등이 이로써 소단(騷壇)을 크게 울렸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이주(李胄)를 비롯하여 신종확(申從濩)ㆍ강혼(姜渾)ㆍ정희량(鄭希良)ㆍ박상(朴祥) 등이 당시(唐詩)의 풍격(風格)을 숭상하여 각각 다양한 시작(詩作)들을 남겼다.
이들을 뒤이어 신광한(申光漢)ㆍ김정(金淨)ㆍ김식(金湜)ㆍ기준(奇遵)ㆍ최수성(崔壽峸)ㆍ나식(羅湜)ㆍ임억령(林億齡)ㆍ김인후(金麟厚) 등도 모두 당역(唐域)에 드나들고 있었으며 선조대(宣祖代)의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노수신(盧守愼)은 특히 노두(老杜)의 격력이 있어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주(李胄, ? ~1504 연산군10, 자 胄之, 호 忘軒)
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처형을 당했다.
그의 시(詩)는 특히 성당(盛唐)의 풍격(風格)이 있다 하여 허균(許筠)의 아낌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통주(通州)」(五律)를 비롯하여 「즉사요체(卽事拗體)」(七律), 「차안변루제(次安邊樓題)」(七律) 등이 모두 명편(名篇)으로 알려져 있다. 「통주(通州)」는 다음과 같다.
通州天下勝 樓觀出雲霄 | 통주(通州)는 천하의 승지(勝地), 다락이 구름 위에 솟았네. |
市積金陵貨 江通楊子潮 | 저자에는 금릉(金陵)의 물화(物貨) 쌓여 있고 강물은 양자강(揚子江)의 밀물과 통하네. |
寒雲秋落渚 獨鶴暮歸遼 | 층층 구름은 가을 물가에 떨어지고, 외로운 새는 저녁에 요동(遼東)으로 돌아가네. |
鞍馬身千里 登臨故國遙 | 말 타고 천리에 온 몸, 높은 곳에 오르니 고국이 아득하네. |
이 시(詩)는 이주(李胄)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통주문루(通州門樓)에 올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許筠)은 특히 성운(聲韻)에 관심을 보여 이를 노두(老杜)의 청운(淸韻)이라 하였으며 왕맹(王孟)에 핍근(逼近)한 작품이라 하였다【『國朝詩刪』에서는 老杜淸韻이라 하고, 『성수시화(惺叟詩話)』 28에서는 王孟에 逼近한 것이라 했다】. 그곳 중국 사람들이 이를 현판에 걸어놓고 그를 ‘독조모귀요선생(獨鳥暮歸遼先生)’이라 칭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명편(名篇)이다.
신종호(申從濩, 1456 세조2~1497 연산군3, 자 次部, 호 三魁堂)
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며, 종제(從弟) 용개(用漑)ㆍ광한(光漢) 등 일문(一門)이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상춘(傷春)」(七絶), 「무제(無題)」(七絶), 「정월망도중여자군도옥하교(正月望都中女子群渡玉河橋)」(七律) 등은 모두 풍류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특히 「상춘(傷春)」 같은 작품은 그 기교가 섬세하여 그의 시세계를 당풍(唐風)으로 논하기에 충분하다. 「정월망도중여자군도옥하교(正月望都中女子群渡玉河橋)」는 다음과 같다.
露浥瓊花萬萬條 | 만 그루 가지마다 이슬이 매화꽃을 적시고, |
香風吹送玉塵飄 | 향기로운 바람은 흰 꽃잎을 날려 보내네. |
不隨月姊歸蟾闕 | 항아를 좇아 월궁으로 가지 않고, |
共學天孫度鵲橋 | 직녀를 흉내내어 까치 다리를 건너네. |
一夜宜男成吉夢 | 한 밤내 사내아이 낳는 길몽을 꾸려고, |
千金買笑薦春嬌 | 천금으로 웃음을 사도록 교태를 부리네. |
明朝十里天街上 | 내일 아침 십리 서울 거리에는, |
多少行人拾翠翹 | 행인들이 머리꾸미개를 꽤나 줍겠지. |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제목이 「정월십육일도중여자군도옥하교(正月十六日都中女子群渡玉河橋)」로 되어 있다. 우리 민속의 다리밟기 풍속을 시화한 것이다. 선녀들의 사연으로 현실의 풍습을 찬미한 함련(頷聯)을 허균은 특히 아름답다 했다.
강혼(姜渾, 1464 세조10~1519 중종14, 자 士浩, 호 木溪)
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지만, 젊은 시절 연산군의 근신(近臣)으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무오(戊午)ㆍ갑자사옥(甲子史獄)에도 신명(身命)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는 이름 높은 학자ㆍ문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거니와 특히 강혼(姜渾)ㆍ이주(李胄)ㆍ정희량(鄭希良) 등은 시로써 이름을 얻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무오(戊午)와 갑자사옥(甲子史獄)에 연루되어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지만, 강혼과 신용개(申用漑)는 원유(遠流)되었다가 풀려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후일 대제학의 영직(榮職)에 올랐다. 그러나 강혼은 시문(詩文)이 온전하게 전하지 않아 그의 『목계일고(木溪逸稿)』에는 겨우 19~20여수(餘首)의 시편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호방불기(豪放不羈)한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 시 또한 옛스럽고 아치(雅致)가 있다. 그의 시작(詩作)으로는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응제(應製)」(七律)를 비롯하여 「제사인사연정(題舍人司蓮亭)」(七絶), 「임풍루(臨風樓)」(七律), 「해운대차운(海雲臺次韻)」(七律) 등이 선발책자에 뽑히고 있으나, 그의 문집에도 있지 않은 「기성주기(寄星州妓)」(七律) 같은 작품은 후대의 시화서(詩話書)에 빈번하게 화제가 되었다.
강혼(姜渾)의 「응제(應製)」는 다음과 같다.
淸明御柳鎖寒煙 | 청명날 궁궐의 버들은 찬 안개에 잠겨 있는데, |
料峭東風曉更顚 | 스산한 봄바람은 새벽에 더욱 거세어지네. |
不禁落花紅櫬地 | 꽃잎이 대지를 붉게 물들임을 어찌할 수 없어, |
更敎飛絮白漫天 | 다시 버들개지로 하늘을 하얗게 덮게 하였네. |
高樓隔水褰珠箔 | 연못 건너 높은 누각에선 주렴이 걷히고, |
細馬尋芳躍錦韉 | 꽃구경 가는 준마는 비단 안장이 휘황하네. |
醉盡金樽歸別院 | 좋은 술에 실컷 취하여 별채로 돌아가니, |
綵繩搖曳畫欄邊 | 아름다운 난간 가에 그네줄이 출렁이네. |
이 시는 「폐조응제(廢朝應製)」 또는 「폐조응제어제 한식동림삼월근 낙화풍우오경한(廢朝應製御題“寒食園林三月近, 落花風雨五更寒”)」으로 시선집에 전하고 있거니와 강혼이 연산군의 근신(近臣)으로 있을 때, 어제시(御製詩) ‘한식동림삼월근 낙화풍우오경한(寒食園林三月近, 落花風雨五更寒)’을 보고 이에 붙인 것이다.
당(唐) 한굉(韓翃)의 「한식(寒食)」시에 ‘춘성무처불비화 한식동풍어유사(春城無處不飛花, 寒食東風御柳斜)’의 구가 있는 것을 보면 청명과 한식 사이에는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흩뿌려 매우 을씨년한 풍경을 드러낸다. 이 시의 수련과 함련은 그러한 궁궐의 청명 한식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것은 연산군이 내어준 시제에 잘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다.
특히, 미련에서 을씨년하고 처량해지기 쉬운 시제(詩題)를 가지고 응제시 특유의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 있어 그의 시재(詩才)를 과시하고 있다.
다음은 강혼(姜渾)의 「기성주기(寄星州妓)」이다.
扶桑館裏一場懽 | 부상관 속엔 한바탕 즐거운 사랑, |
宿客無衾燭燼殘 | 자는 객은 이불 없고 촛불도 가물가물. |
十二巫山迷曉夢 | 열두봉 무산(巫山)에서 새벽꿈에 미혹되어 |
驛樓春夜不知寒 | 역루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네. |
이 시는 강혼이 영남감사(嶺南監司)로 내려갔을 때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을 사랑하여 부상역(扶桑驛)에서 하루밤을 같이 지낸 체험적인 사실을 시화(詩化)한 것이다.
우리나라 한시에서 염정시(艷情詩)는 대체로 악부제(樂府題)를 빌리거나, 아니면 3인칭 시점의 관망자(觀望者) 처지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체험적인 사랑의 사연을 작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어 전통시대 염정문학으로서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호방한 그의 개성과도 물론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정희량(鄭希良)
의 「압강춘망(鴨江春望)」은 다음과 같다.
邊城事事動傷神 | 변방에선 일마다 마음이 상하는데, |
海上狂歌異隱倫 | 바닷가의 미친 노래는 은자의 것이 아니라네. |
春不見花猶見雪 |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
地無來雁況來人 | 이곳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거니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
輕陰漠漠雨連曉 | 봄 기운이 스산하여 비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
細草萋萋風滿津 |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에 찼네. |
惆悵芳時長作客 | 슬프다, 좋은 시절에 항상 나그네 되었으니, |
可堪垂淚更添巾 |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을 어이하랴? |
이 작품은 의주(義州) 유배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봄 풍경을 읊조리고 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봄같지 않다는 것이 주지다. 정희량(鄭希良)의 시가 황진(黃陳)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일컫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결코 한 시대의 속상(俗尙)에만 치우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보여준 미련(尾聯)의 기법은 오히려 두보(杜甫)의 풍기(風氣)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은둔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다. 율시(律詩)의 틀을 빌리지 않았다면 이러한 가작(佳作)의 제조는 가능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의 「차계문운(次季文韻)」을 보게 되면, 그 역시 황진(黃陳)을 추수(追隨)하던 당시의 풍상(風尙)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過眼如雲事事新 | 구름처럼 눈을 스치는 일은 일마다 새로운데, |
狂歌獨立路岐塵 | 어지러운 세상에서 미친 노래 부르며 홀로 우노라. |
百年三萬六千日 | 백년 삼만육천일을, |
四海東西南北人 | 사방 동서남북 떠도는 신세라네. |
宋玉怨騷悲落木 | 송옥의 원통한 노래는 낙엽 때문 아니었고, |
謫仙哀賦惜餘春 | 이태백의 슬픈 가락은 남은 봄을 애석해 한 것이라. |
醉鄕倘有閒田地 | 취향에 한가한 땅이 남아 있다면, |
乞與劉伶且卜隣 | 유령에게 이웃하자 청하고 싶구나. |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송시학(宋詩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고려중기 임춘(林春)의 「차우인운(次友人韻)」을 다시 보는 듯하다. 제1구의 ‘과안여운사사신(過眼如雲事事新)’에서와 같이 수사 기교가 직설적이며, 전편에 정감(情感)의 유로(流露)가 과다하여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송시(宋詩)의 장처(長處)를 잘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뜻이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듯한 긴장을 느끼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이 밖에도 『지봉유설(芝峯類說)』 동시(東詩) 72 등에서 정희량의 작품이라 단정한 「제원벽(題院壁)」은 많은 시화서(詩話書)에 일화를 남기고 있으나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같은 선발책자에는 무명씨작(無名氏作)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정희량의 작품인지 그 여부는 확언하기 어렵다
남곤(南袞, 1471 성종2~1527 중종22, 자 士華, 호 止亭)
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서변(西邊)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중종반정 후 대제학의 영예를 누리었으며, 심정(沈貞) 등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조작하여 명유(名儒)들을 숙청하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가 후일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의 글이 후세에 또다른 사화를 일으키는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사고(私稿)를 없앴다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고평을 받은 「제신광사(題神光寺)」 6수 중 그 첫 번째 것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千重簿領抽身出 | 천겹 문서더미에서 몸을 빼내, |
十笏禪房借榻眠 | 한 칸 절방에 잠자리 빌려 누웠네. |
六月炎蒸侵不得 | 유월의 뜨거운 기운도 날아가 이르지 못하니, |
上方如有別般天 | 절에는 별세계가 있는가 보네. |
속기(俗氣)가 없이 초월자의 시처럼 자연스러워 좋다.
박상(朴祥, 1474 성종5~1530 중종25, 자 昌世, 호 訥齋)
은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으로 호남계(湖南系) 시단(詩壇)을 열어준 선구이기도 하지만 이행(李荇)ㆍ신광한(申光漢)ㆍ김정(金淨)ㆍ정사룡(鄭士龍) 등과 함께 중종 연간의 시단(詩壇)을 빛내준 대표적인 시인이다.
정치 현실에서도 서로 처지를 달리했거니와 시업(詩業)에 있어서도 개성 있는 시작(詩作)으로 다양한 전개를 보이었다. 박상(朴祥)은 김정(金淨)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주창하다가 훈구(勳舊) 세력으로부터 폄척(貶斥)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그는 이른바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살아 남았다.
그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은 대부분이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장(文章)은 겨우 10여편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시경(詩經)』ㆍ『초사(楚辭)』와 이백(李白)ㆍ두보(杜甫)의 시(詩)에 깊지 않은 사람은 그의 시(詩)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거니와(文集序) 그는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제작하면서 고사(故事)와 전고(典故)를 능숙하게 운용하고 있어 그의 시(詩)는 초심자(初心者)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남에게 굴복하기를 싫어하고 기작(奇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사룡(鄭士龍)도 박상(朴祥)만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정사룡(鄭士龍)의 ‘기작(奇作)’으로도 박상(朴祥)을 알아준 것은 물론 시세계와 유관한 것이다.
그는 도연명(陶淵明)의 시(詩)도 즐겨 읽어 그의 시작(詩作) 가운데는 ‘정치는 버렸지만 인생은 버리지 않은’ 도연명(陶淵明)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작품도 많다. 대체로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득의구(得意句)가 많으나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도 그는 천재(天才)를 발휘했다. 「화동봉산인거백절(和東峯山人山居百絶)」과 같은 작품은 동봉산인(東峯山人)에게 화답하기 위하여 칠언절구(七言絶句) 백수(百首)를 한꺼번에 제작해 낸 일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수정한림유별운(酬鄭翰林留別韻)」을 비롯하여 「탄금대(彈琴臺)」, 「충주남루차운(忠州南樓次韻)」, 「차영남루(次嶺南樓)」, 「일진도(一陳圖)」, 「법성포우후(法聖浦雨後)」 등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작품들이 모두 칠율(七律)이며 칠절(七絶) 가운데서 알려진 것으로는 「하첩(夏帖)」, 「봉효직상(奉孝直喪)」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수정한림유별운(酬鄭翰林留別韻)」은 다음과 같다.
江城積雨捲層霄 | 강성(江城)의 장마 비 씻은 듯이 개이고 |
秋氣冷冷老火消 | 가을 기운 서늘하며 늦더위 사라지네. |
黃膩野秔迷眼發 | 기름진 들판의 벼는 눈 어지럽게 피어 있고 |
綠疎溪柳對樽高 | 푸르고 성긴 버들은 술독 앞에 드높으네. |
風隨舞袖如相約 | 바람은 기약한 듯 춤추는 소매 따르고 |
山入歌筵不待招 | 산은 부르지 않았어도 노래자리에 드네. |
慚恨至今持斗米 | 부끄럽고 한스러운 것은 지금도 벼슬길에 있어 |
故園蕪絶負逍遙 | 고향 동산 묵히고 소요하는 일 저버린 거다. |
시상(詩想)이 범속(凡俗)을 초탈(超脫)하고 있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신위(申緯)는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14에서 ‘기건(奇健)’이라 평가한 것과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서 ‘감개(感慨)’로 평가가 서로 동떨어지기도 하거니와, 다양한 그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말하기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다음 작품 「하첩(夏帖)」을 보이는 것으로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樹雲幽境報南訛 | 그윽한 지경 나무 숲이 남쪽에서의 화육(化育)을 알려주나니 |
休說東風捲物華 | 동풍이 물화를 휘감아간다고 말하지 말라. |
紅綻綠荷千萬柄 | 붉은 것이 녹연(綠蓮) 천만 그루에 터지니 |
却疑天雨寶蓮花 | 문득 하늘이 보연화(寶蓮花)를 뿌리는가 의심이 나네. |
윤호(尹壕)의 사시도(四時圖)에 붙인 작품으로 계절마다 2수씩 경물과 인물에 대해 읊조린 것이다. 여름 한때를 벌겋게 핀 연꽃에 초점을 맞추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시편은 단순히 초심자의 당시(唐詩) 취향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남와(南訛)’의 ‘와(訛)’는 화육(化育, 무럭무럭 자람)을 뜻하는 것이며, 바깥짝에 배치한 ‘홍(紅)’, ‘우(雨)’와 같은 동사도 만물이 생장하는 여름 한 철의 동적(動的)인 미감(美感)을 적절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신광한(申光漢, 1484 성종15~1555 명종10, 자 漢之ㆍ時晦, 호 企齋ㆍ駱峯ㆍ石仙齋ㆍ靑城洞主)
과 김정(金淨, 1486 성종17~1521 중종16, 자 元沖, 호 沖菴ㆍ孤峯)은 모두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리었으나 김정(金淨)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죽음을 당하고 신광한(申光漢)은 살아 남아 후일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다. 그러므로 김정(金淨)은 시인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김식(金湜)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행(李荇)과 박은(朴誾) 등이 황진(黃陳)을 배우고 있을 때 스스로 당풍(唐風)을 익혀 조선전기 소단(騷壇)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시(詩)는 허균(許筠)이 『성수시화(惺叟詩話)』 39에서 청절(淸絶)하여 아취(雅趣)가 있다고 일컬었다. 그는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많은 시작(詩作)을 남기고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ㆍ『기아(箕雅)』 등에 30여편이 선발(選拔)되고 있다.
김정(金淨)
은 그의 시(詩)가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서 ‘간준(簡峻)’으로 말해지고 있듯이, 스스로 다듬거나 마음을 쓰지 않아도 말이 높고 굳세다. 그의 오율(五律) 중에 이런 말에 들어맞는 작품이 많다. 그러나 이 양인(兩人)은 신기(新奇)를 쫓지 않았기 때문에 화제작은 남기지 않았다.
허균(許筠)은 특히 신광한(申光漢)의 「만망(晩望)」(五律)과 김정(金淨)의 「춘아증봉군조서왕송도인반고림(春夜贈奉君朝瑞往松都因返故林)」(五律)에 관심을 보였다.
신광한(申光漢)의 「만망(晩望)」은 다음과 같다.
峻盡滄江遠 沙平水驛開 | 산골짜기 다하니 푸른 강물 멀어지고 모래밭 평평한 곳 나룻터가 열렸네. |
收烟花外沒 夕鳥日邊回 | 밥 짓는 저녁 연기 꽃밭에서 잦아지고 저녁에 날아드는 새 해를 빙빙 도는구나. |
故國無消息 孤舟有酒盃 | 고국(故國)에선 아직도 소식 없는데 외로운 배에는 술과 잔이 있네. |
前山侵道峻 何處望蓬萊 | 앞 산이 길을 막아 우뚝이 서 있으니 어느 곳에서 봉래산을 바라보리요? |
군더더기 없이 맑기만 한 작품이다. 허균(許筠)은 특히 성운(聲韻)에 촛점을 맞추어 위맹(韋孟)의 고운(高韻)이라 하였지만 오로지 청신(淸新)ㆍ완절(婉切)할 뿐이다.
김정(金淨)의 「춘야증봉군조서왕송도인반고림(春夜贈奉君朝瑞往松都因返故林)」은 다음과 같다.
華月未揚光 層城夜蒼蒼 | 흰 달이 빛을 내지 못하여 성곽에 밤이 아물아물하는도다. |
臨觴忽怊悵 幽意故徊徨 | 술잔을 마주하니 갑자기 서글퍼져 그윽한 이 마음 공연히 서성거린다. |
故國雲煙斷 舊園林木長 | 고향에 구름 연기 다 끊어졌는데 옛 동산에 수풀이 많이 자랐을 테지. |
歸歟在明發 江海杳難望 | 내일 아침에는 돌아갈 것이니 강해(江海) 아득하여 바라보기 어렵겠네. |
김정(金淨)은 박상(朴祥)과 함께 신비(愼妃)의 복위(復位)를 주청(奏請)했다가 유배의 길에 오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헌(大司憲)의 영직(榮職)에 오른 33세 때에 제작한 것이다.
송도(松都)에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준 시이기 때문에 이 시에서 고국(故國)ㆍ구원(舊園)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것이다. 다른 시선집(詩選集)에서는 뽑아주지도 않은 것이지만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특히 수련(首聯)의 ‘華月未揚光, 層城夜蒼蒼’을 들어 ‘참으로 맹호연과 왕유의 높은 경지를 접했다[眞接孟王高派]’라 하여 당시(唐詩) 성향을 높이 사고 있다. 전혀 꾸미는 일을 돌보지 않았지만 말이 스스로 높고 굳세기만 하다.
이 밖에도 김정(金淨)은 그의 『해도록(海島錄)』에 오율(五律)의 「절국(絶國)」, 「유회(遺懷)」 등 명편을 남겼다. 「절국(絶國)」은 다음과 같다.
絶國無相問 孤身棘室圍 | 절해고도라 찾아 올 사람 없고, 외로운 몸은 가시 덤불에 갇혀 있네. |
夢如關塞近 僮作弟兄依 | 꿈에서도 변방이 가까운 줄 알겠거니 종놈들도 형제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네. |
憂病工侵鬢 風霜未授衣 | 근심과 병은 교묘히 살쩍을 파고드는데, 바람과 서리에도 겨울 옷을 마련 못하네. |
思心若明月 天末寄遙輝 | 그리는 마음은 밝은 달과 같아서, 하늘 끝에서 먼 빛을 보낸다. |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진도(珍島)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의 작품이다. 어렵게 살아가는 적소(謫所)의 현장을 그대로 읊은 것이지만, 쉽고 간결하여 청신(淸新)한 맛을 느끼게 한다.
기준(奇遵, 1492 성종23~1521 중종16, 자 敬仲, 호 復齋ㆍ德陽)
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덕성(德城)에 유배되었으며,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김정(金淨) 등 살아남은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죽음을 당할 때 그도 배소(配所)에서 교살되었다.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 「강상(江上)」(五律)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적소(謫所)에서 두만강을 바라보며 읊조린 것이다.
遠遊臨野戍 高會惜年華 | 멀리 떠돌다 거친 변방에 이르러 좋은 모임에 나와 봄을 아쉬워하네. |
夜靜胡天月 春深古塞花 | 밤은 오랑캐 땅의 달 아래 고요하고, 봄은 오래된 요새의 꽃 속에 깊어 있구나. |
長江誰作酒 哀唱不成歌 | 긴 강을 누가 술로 만들었나? 슬피 노래 불러도 가락을 이루지 못하네. |
望望雲空外 殘星沒曉河 | 구름낀 하늘 너머로 바라보니, 희미한 별빛이 새벽 은하수에 묻히네. 『德陽遺稿』 卷之二 |
이 시는 작자가 함경북도 온성(穩城)에 귀양가 있을 때, 어떤 연회에 참석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준은 스스로 수련(首聯)에서 ‘원유(遠遊)’라 하였지만, 이는 그의 배소(配所)인 온성행(穩城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법이 평담(平淡)하며 높고 낮은 곳도 없다. 특히 대구(對句)의 정교한 조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그의 표묘(標緲)한 시세계를 알게 해주는 「의상암(義相庵)」(七絶)과 같은 작품도 고평(高評)을 받은 것 중에 하나다.
임억령(林億齡, 1496 연산군2~1568 선조 1, 자 大樹, 호 石川)
과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5~1560 명종15, 자 厚之, 호 河西ㆍ澹齋)는 호남계(湖南系) 소단(騷壇)의 중진이다.
임억령(林億齡)은 박상(朴祥)의 문인(門人)으로 해남(海南) 출신이며, 김인후(金麟厚)는 송순(宋純)의 문하(門下)를 출입한 장성(長城) 출신이다. 이들은 인품이 고매(高邁)하여 시(詩) 또한 사람과 같다는 평이다.
임억령(林億齡)은 고금(古今)의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익히면서 일생 동안 시업(詩業)으로 일관했으므로 그의 문집도 대부분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文)은 다만 수필에 불과하다.
김인후(金麟厚)
는 학문이 깊어 그의 시(詩)도 침착(沈着)ㆍ준위(俊偉)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젊었을 때 그의 시는 화평(和平)하고 깨끗하며 호방(豪放)한 기운도 있었으나, 만년(晩年)에 이르러 고명(高明)ㆍ순정(純正)한 것을 깨달아 강개비분(慷慨悲憤)한 것도 엿보게 한다【『河西集』 卷34】.
임억령(林億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우인(示友人)」(七絶)은 다음과 같다.
古寺門前又送春 | 옛적 절 문앞에서 또 봄을 보내니 |
殘花隨雨點衣頻 | 남은 꽃 비를 따라 옷에 자주 점을 찍네. |
歸來滿袖淸香在 | 돌아올 때 온 소매에 맑은 향기 남아 있어 |
無數山蜂遠趁人 | 무수한 산벌들이 먼 데까지 따라오네. |
3수 가운데 마지막 것이다. 규모를 크게 잡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감(美感)의 표현도 정적(靜的)인 쪽에 가까와 전편(全篇)이 높고 낮은 데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허균(許筠)은 이 작품을 가리켜 유독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김인후(金麟厚)의 화제작인 「등화대(登火臺)」(五律)는 다음과 같다.
梁王歌舞地 此日客登臨 | 양(梁) 효왕(孝王)이 가무(歌舞)하던 곳에 오늘에사 손이 오르네. |
慷慨凌雲趣 凄涼弔古心 | 강개(慷慨)로운 정은 구름을 뛰어넘는 취향(趣向)이요, 처량(凄涼)한 비감(悲感)은 옛것을 조상하는 마음이로다. |
長風生遠野 白日隱層岑 | 긴 바람 먼 들에서 일어나고 흰 해는 먼 산 뒤로 숨는다. |
當代繁華事 茫茫何處尋 | 당대의 번화한 일, 아득히 어느 곳에서 찾을까? |
김인후(金麟厚)의 침착(沈着)이 이 한편에서 다한 느낌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45에서 특히 성율(聲律)에 관심을 보이어 성당(盛唐)의 고운(高韻)이라 했다.
최수성(崔壽峸, 1487 성종18~1521 중종16, 자 可鎭, 호 猿亭ㆍ北海居士)
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학문연구에 정진하여 사림(士林)에 명망(名望)이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실의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간을 유람하였으나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래서 최수성의 시작(詩作)은 온전하게 수습되지 못하여 각종 시선집에 몇편의 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전하는 「제화원(題畵猿)」은 나식(羅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 소재(所載) 「증승(贈僧)」도 김정(金淨)의 것이라는 이설(異說)이 있다.
「증승(贈僧)」은 다음과 같다.
嶺外寒山寺 逢僧眼忽靑 | 대관령 밖 한산사에서, 스님을 만나니 눈이 홀연히 반갑네. |
石泉同病客 天地一浮萍 | 산수에서 함께 아파하던 나그네, 천지 간에 부평초같은 신세라네. |
疏雨殘燈冷 持杯遠海聲 | 성근 비에 사그라드는 등불은 싸늘한데 술잔을 잡으니 먼 바다 소리 들려오네. |
開窓重話別 雲薄曉星明 | 창 열고 거듭 이별을 말하려니 엷은 구름에 새벽 별이 밝네. |
이 시는 작자가 누구인지 확연치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허균(許筠)은 그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이 시가 스님의 시축(詩軸)에 김정(金淨)의 작품으로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김정(金淨)의 작품으로 비정하고서도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는 도리어 최수성(崔壽峸)의 작품으로 신고 있다.
이 시는 스님에게 주는 시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인 증승(贈僧) 또는 송승시(送僧詩)와는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작자와 중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관계에서 함께 신세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다. 형식에 있어서도 율시는 함련과 경련에 대우(對偶)를 놓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시에서는 이러한 제한에 구속을 받지 않고 있다. 최수성은 지기(志氣)가 남다른 선비로 알려져 있거니와 이 작품은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시인의 불평음(不平音)을 이러한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나식(羅湜, 1498 연산군4~1546 명종1, 자 正原, 호 長吟亭)
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동생이 피죄(被罪)됨에 따라 그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에는 겨우 50여수가 수습되고 있을 뿐이어서 시세계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제화원(題畵猿)」, 「여강(驪江)」도 작자를 최수성(崔壽峸) 또는 정희량(鄭希良)이라하여 귀일(歸一)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시취(詩趣)가 있어, 허균(許筠)도 그의 시가 성당(盛唐)의 권역(圈域)에 근접하고 있다 하였다. 「제화원(題畵猿)」은 다음과 같다.
老猿失其群 落日枯槎上 | 늙은 원숭이 제 무리 잃고, 지는 해에 외론 나무가지에 올랐네. |
兀坐首不回 想聽千峯響 | 꼿꼿이 앉아 머리도 돌리지 않고, 왼 봉우리 울리는 소리 듣고 있는 듯. |
이 시는 원숭이를 그린 족자 위에 쓴 제화시(題畵詩)이다. 그는 기절(氣節)이 비범(非凡)하여 사람들이 쉽게 근접하기 어려웠다고 하거니와 이 작품은 바로 그의 오올(傲兀)한 직절(直節)을 실감케 하는 기작(奇作)이라 할 것이다.
이 시를 지을 때 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 등 일시(一時)의 명가(名家)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나식(羅湜)의 이 시를 보고 모두 감탄했다고 하며, 특히 정사룡(鄭士龍)은 이를 극찬했다고 한다. 이달(李達) 또한 이 시에 대하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 ‘그림 속에 다시 그림이 있다’고 평한 바 있으며, 이 시의 구법(句法)에 대하여 성당(盛唐)의 악부시(樂府詩) 「이주가(伊州歌)」의 법식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日暮蒼江上 天寒水自波 | 해가 지는 푸른 강물 위에 날씨는 차고 물 절로 일렁인다. |
孤舟宜早泊 風浪夜應多 |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야 하리니 풍랑이 밤에는 응당 거세지겠지. |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에 제목이 「한중우음(閑中偶吟)」으로 되어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ㆍ『기아(箕雅)』ㆍ『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여강(驪江)」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화 7과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3에서는 최수성(崔壽峸)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또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제목 아래 ‘혹자는 정허함이 지었다고 말한다[或云, 鄭虛菴作]’이라 주를 달아 이 작품이 정희량(鄭希良)의 것이라는 이설(異說)을 제시하고 있는데, 정희량(鄭希良)의 『허암선생속집(虛菴先生續集)』(卷一)에는 「둔거일운(遁去日)」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이 실려 있다.
원제(原題)는 「한중우음(閑中偶吟)」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는 다가올 정변(政變)을 예고하는 우의(寓意)가 담겨 있다. ‘일모(日暮)’와 ‘천한(天寒)’에 이은 ‘수파(水波)’ 등은 어두운 현실을, 3ㆍ4구는 예료(豫料)되는 정치적 격동을 보다 가까운 비유로 말하고 있다. 사화(士禍)에 희생된 인물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수경미(瘦硬美)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6. 유가(儒家)의 시편(詩篇)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일정한 문학관념을 성립시켰으며 이것이 문학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100여년간은 주자학이 사림(士林)의 속상(俗尙)으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 등이 앞장서서 효용론적(效用論的)인 문학관(文學觀)을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초기 시단(詩壇)의 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의 선구들에 있어서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설리성(說理性)이 강한 시풍(詩風)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의 흥취를 통해 순수한 성정(性情)을 표출하는 시풍(詩風)을 보이기까지 한다.
서경덕(徐敬德, 1489 성종20~1546 명종1, 자 可久, 호 花潭ㆍ復齋)
은 일생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격물(格物)에만 전심(專心)한 학자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일 외에는 손수 엮은 초막에 들어 앉아 격물(格物)에 힘써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수립하였다. 그가 남긴 산문은 「태허설(太虛說)」, 「원리기(原理氣)」,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자신이 궁구하여 터득한 것을 담은 논변류(論辨類)가 대부분이며 작시(作詩) 태도 또한 시(詩)의 문학적(文學的) 미감(美感)보다는 자득(自得)의 리(理)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시(詩)로 옮기고 있다.
그의 시는 『화담선생문집(花潭先生文集)』 「유사(遺事)」 卷3 17a를 보면 ‘화담의 강학은 오로지 주희와 소옹을 종주로 삼았고 시 또한 소옹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을 본받았다[花潭講學, 專以周邵爲宗, 詩亦效法擊壤].’라고 하여 북송(北宋)의 도학가인 소옹(邵雍)에게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서경덕(徐敬德)과 소옹(邵雍)의 관계는 원인손(元仁孫)과 윤숙(尹塾)의 서(序)에서도 밝혀져 있다】, 소옹(邵雍)의 관물론(觀物論)을 연상케 하는 「유물(有物)」은 다음과 같다.
有物來來不盡來 | 사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는 못하고 |
來纔盡處又從來 | 다 왔다가도 또 다시 오는 법, |
來來本自來無始 | 오고 또 와도 본디 오는 것은 처음이 없으니 |
爲問君初何所來 | 묻노니 그대의 시초는 어디에서 왔는가? |
서경덕(徐敬德)은 남긴 시편도 많지 않거니와, 현전하는 시는 대부분 철학적 이치를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은 그의 「원리기(原理氣)」에서 ‘太虛湛然無形, 號之曰先天, 其大無外, 其先無始, 其來不可究. 其湛然虛靜, 氣之原也.’라 했고 「리기설(理氣說)」에서 ‘無外曰太虛, 無始者曰氣, 虛卽氣也, 虛本無窮, 氣亦無窮.’라 했으며 「태허설(太虛說)」에서 ‘氣無始也, 無生也, 氣無始何所終, 氣無生何所滅?’라 하며 보여준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은 비록 그것이 주자학(朱子學)의 정통(正統)으로 용납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유물(有物)」 역시 그의 氣哲學만 확인하고 있을 뿐 시(詩)로써 갖추어야 할 것은 전혀 돌보지 않은 칠언사구(七言四句)의 파격(破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상수학적(象數學的)인 그의 관심을 유희적으로 읊조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한다. 그러나 조욱(趙昱)과 같이 사상적으로 순정한 주자학에 몰두한 초기의 학자까지도 시작(詩作)의 방식을 소옹(邵雍)과 그를 이은 서경덕(徐敬德)에게서 구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조욱(超昱, 1498 연산군4~1557 명종12, 자 景陽, 호 愚菴ㆍ保眞齋ㆍ龍門ㆍ洗心堂)
의 「낙천음(樂天吟)」, 「자경음(自警吟)」, 「효강절선생수미음(效康節先生首尾吟)」 등의 ‘음체(吟體)’는 곧 자신의 철학적 견해와 사회적 인식을 산문적인 시로 기술한 것이며, 때문에 이단하(李端夏)는 「답둔촌서(答遁村書)」에서 ‘대략 여러 편을 보면 『격양집(擊壤集)』의 읊조림과 유사함이 있다[略觀數篇, 有似擊壤集吟泳].’라고 하여 그의 시는 소옹(邵雍)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음의 「견도(見道)」와 같은 작품은 주희(朱熹) 설리시(說理詩)의 틀을 아우르고 있음을 쉽게 알게 해준다.
萬理用雖異 一原體自同 | 만가지 이치의 쓰임은 비록 다르지만 한가지 원리의 체(體)는 절로 같다오. |
纖毫私意盡 始覺合天公 | 터럭 만큼의 사사로운 뜻도 다 없어야 비로소 하늘의 공리에 맞는 줄 깨닫게 된다. |
이 시는 50세 때 은거하면서 도우(道友)들과 더불어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서로 질정(質正)을 구하는 강학의 와중에 제작된 것으로 태극(太極)ㆍ동정(動靜)ㆍ기화(氣化)ㆍ형화(形化)ㆍ겨도(見道)ㆍ수도(修道)ㆍ득도(得道)ㆍ지도(指道) 등의 철학적 항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읊은 가운데 견도(見道)에 해당하는 것이다. 시의 틀을 빌려 도(道)를 말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서경덕(徐敬德)의 「유물(有物)」과 이러한 작품들은 영사(詩史)에서 귀하게 여겨 수용할 작품이 되지는 못한다.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22~1553 명종8, 자 復古, 호 晦齋ㆍ紫溪翁)
은 중앙관계에 진출한 영남 사림의 선구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직접 선배이다. 사간(司諫)의 직책에 있을 때 당시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다 파직당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을 궁구하였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강계배소(江界配所)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서경덕(徐敬德)과는 달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여 음양(陰陽)의 기(氣)보다 태극(太極)의 리(理)가 선행하는 것으로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파악하였다.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저술을 남기고 있는 그는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득도(得道)의 즐거움을 직관적으로 노래하지 않고 잠심하여 수양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구도정신(求道精神)을 노래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무의(無爲)」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萬物變遷無定態 | 만물의 변화는 정해진 모양이 없으니 |
一身閑適自隨時 | 이 한몸 한가하고 절로 때를 따른다. |
年來漸省經營力 | 근래에는 꾸미는 데 힘을 점차 줄여서 |
長對靑山不賦詩 | 길이 푸른 산 마주해도 시를 읊지 않는다. |
이것은 1535년 은거시(隱居時)에 지은 작품이다. 여기서 「무의(無爲)」는 도가(道家)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용(中庸)』에서 유변된 유가적(儒家的)인 개념이다. 만물(萬物)의 현상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지만 주일무적(住一無適)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신은 한적(閑適)할 뿐이다. 한적(閑適)은 고요한 마음을 즐기는 것이다. 마음을 엉뚱한 곳에 기울이지 않아 푸른 산을 보고도 시(詩)를 짓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 「동시(東詩)」에서 ‘어의가 매우 고상하니 쪼잔하게 시를 짓는 이는 도달할 수 있지 않다[語意甚高, 非區區作詩者所能及也]’라고 평한 바 있고, 신위(申緯)는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8에서 ‘晦齋不屑學操觚 長對靑山一句無 好向先生觀所養 一身還有一唐虞’라 하였다. 이러한 평은 이 시가 고도의 수양을 바탕으로 한 이언적(李彦迪)의 정신세계를 보인 것이므로 다시 애써 꾸미려 하는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에서는 이룩할 수 없는 경지임을 말한 것이다.
이황(李滉, 1501 연산군7~1570 선조3, 자 景浩ㆍ季浩, 호 退溪ㆍ陶翁ㆍ退陶)
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해동주자(海東朱子)로까지 일컬어진 바 있는 학자이다. 그는 서경덕(徐敬德)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반대하고 이언적(李彦迪)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내세웠다. 그는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시가 성정(性情)의 바름을 구하는데 긴요하다는 문학관을 지녀 시작(詩作)에도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先生喜爲詩, 平生用功甚多, 其詩勁建典實, 不衒華彩, 初看似無味, 愈看愈好. 嘗言, ‘吾詩枯淡, 人多不喜, 然於詩用力頗深, 故初看雖似冷淡, 久看則不無意味’ 又曰: ‘詩於學者, 最非緊切, 然遇景値興, 不可無詩矣’].
그의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87에서 ‘퇴계 이황 선생은 이학으로 동방의 종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장 또한 탁월한 제자였다[退溪李先生滉非徒理學爲東方所宗, 文章亦卓越諸子].’라고 평(高評)하였다. 그는 시에서 본연의 마음을 찾아 순선지미(純善至美)의 경지를 노래하고자 하였다.
대표작 「의주(義州)」를 보인다.
龍淵雲氣曉凄凄 | 구룡연(九龍淵) 구름 기운 저녁에 서늘하고 |
鶻岫摩空白日低 | 송학산(松鶴山) 하늘에 닿아 흰 해 나직하네. |
坐待山城門欲閉 | 성문이 닫히기를 앉아서 기다리니 |
角聲吹度大江西 | 나팔소리 우렁차게 큰 강 서쪽으로 지나가네. |
홍만종(洪萬宗)은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서 이황(李滉)의 이 작품과 기대승(奇大升)의 「우제(偶題)」, 성혼(成渾)의 「우음(偶吟)」, 정구(鄭逑)의 「무제(無題)」 등 성리학자의 시)(詩)에 대하여 ‘이와 같은 여러 현인(賢人)들의 시(詩)는 시어(詩語)를 만든 것이 천연(天然)스럽고 각기 묘처(妙處)를 다하였으니 그 성정(性情)의 바름이 시(詩)에 구현된 것임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噫! 此等諸賢之詩, 作語天然, 各盡妙處, 其性情之正得於詩者, 於此可見矣].’고 하고 있다. 이황(李滉)의 시를 가리켜 ‘겉으로는 메마르지만 속으로 살찌다’라 한 세평(世評)도 이와 동궤(同軌)의 것이다. 그는 특히 매화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아 그의 『매화시권(梅花詩卷)』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 이황(李滉)은 다음의 「차운(次韻)」과 같이 그의 이학자적(理學者的) 관심을 직접 언표(言表)에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연의 리(理)를 청신하게 읊조린 높은 수준의 작품도 제작하고 있다.
草有一般意 溪含不盡聲 | 풀에는 한결같은 의미가 있고 시냇물은 언제나 끝없는 소리 있네. |
遊人如未信 蕭洒一虛亭 |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씻은 듯이 깨끗한 빈 정자로다. |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속에 내재(內在)하는 리(理)를 통하여 자연의 리(理)를 바라본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다.
조식(曺植, 1501 연산군7~1572 선조5, 자 楗中, 호 南冥)
은 이황(李滉)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퇴계(退溪)와는 달리 지리산 백운동(白雲洞)에서 은거하며 학문만을 닦은 학자이다. 그는 ‘이정과 주희 이후론 저서가 불필요하다[程朱後不必著書]’라 하여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보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창하는 실천적 학문경향을 보이었다. 그는 1558년 4월 지리산을 등반하여 기상을 키우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기기도 하였거니와 그의 대표작 「천왕봉(天王峰)」 또한 그의 자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 천석 무게 저 종을 쳐다보시오, 큰 것이 아니면 두드려도 소리나지 않네. |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 만고(萬古)의 천왕봉(天王峰), 하늘이 울어도 울지를 않네. |
이 작품은 거경(居敬)의 자세를 읊은 것이다. 그는 평거(平居)에도 칼을 차고 보료에 앉아 그의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나지 않을 거대한 천왕봉(天王峰), 자신의 은거지에서 쳐다보이는 천왕봉의 의연함을 노래하였다. 하늘이 울어도 미동(微動)하지 않는 천왕봉(天王峰)의 위용(偉容)이다.
이 작품에 대해 신흠(申欽)은 『청창연담(晴窓軟談)』 권하 20에서 ‘조식이 절의를 숭상하여 벽처럼 우뚝 천길 높이 서 있는 기상이 있다’고 하고 또 ‘시운이 호방할 뿐만 아니라 자부심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曹南冥名植 字楗中 尙節義 有壁立千仞之氣 隱遯不仕 爲文章 亦奇偉不凡 如請看千石鍾 非大叩無聲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不徒其詩韻豪壯 亦自負不淺也]. 지리산처럼 거대한 산을 바라보면서 굳건한 자세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벽립천인지기상(壁立千仞之氣像)’으로 추앙받는 인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운과 의경이 높아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집 『남명집(南冥集)』에는 제명(題名)이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로 되어 있으며, 전구(轉句)의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峰)’도 ‘쟁사두류산(爭似頭流山)’으로 되어 있어 천왕봉(天王鋒)을 직접 말하지 않고 있다. 천왕봉(天王峰)을 만드는 데에는 뒷 사람의 손길도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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