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漢詩)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서는 총결산에 해당한다. 표제(標題)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古朝鮮)에서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역대 2,000 여가(餘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12권(卷)으로 출판한 것이다. 구한말의 학자요 언론인이기도 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집하여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연보와 장홍식(張鴻植)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편(原編)은 1917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권수(卷首)의 범례(凡例)에서는, 서둘러 이를 편집, 간포(刊布)하기 때문에 유루(遺漏)된 것에 대해서는 보유(補遺)의 간행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이 책에 이미 보유(補遺)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편(原編)이 편집된 후 출판에 붙이는 사이에 증보의 작업이 있은 듯하다.
이 책의 범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동문선(東文選)』ㆍ『청구풍아(靑丘風雅)』ㆍ『기아(箕雅)』ㆍ『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ㆍ『대동명시선(大東名詩選)』 등 역대의 시선집(詩選集)을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ㆍ속보(續補)하였기 때문에 이를 『대동시선(大東詩選)』이라 한다고 하였거니와, 이 책은 편자 개인이 사사로이 시선집(詩選集)을 간행하는 단순한 선시(選詩) 작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나간 전통시대의 문화유산을 정리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한시(漢詩)의 전통이 사실상 전시대(前時代)의 것이 되어버린 현실이기 때문에, 장지연(張志淵)과 같이 시업(詩業)을 전주(專主)로 하지 않는 사가(史家)에 의하여 이 책이 편집, 출판된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 책의 체제(體制)는, 『전당시(全唐詩)』의 예에 따라 고근체(古近體), 오칠언(五七言)을 막론하고 각인(各人)의 성명(姓名) 아래 작품(作品)을 열록(列錄)하여 고람(考覽)에 편하도록 하고 있으며 특히 새 시대의 평등원칙에 따라 『기아(箕雅)』에서와 같이 불성씨(不姓氏), 잡류(雜流) 등을 권말(卷末)에 부록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고 이들을 모두 시대순으로 원편(原編)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이 시선(詩選)에서는 우리나라 시(詩) 가운데서 중국의 격률(格律)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시(詩)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의 시(詩)가 있다 하여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와 같은 고대가요를 권수(卷首)에 선입(選入)함으로써 이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왕(帝王)의 시(詩)는 수록하지 않는다는 전래의 원칙을 깨뜨리고 유리왕(琉璃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을 특례(特例)로 인정, 수록하였으며, 시대의 구분에 있어서도 작품의 제작연대를 고려하여 고조선ㆍ고구려ㆍ신라ㆍ고려ㆍ조선의 순서로 차례를 마련하고 있다. 『전당시(全唐詩)』 등 중국문헌에 실린 우리나라 상대(上代)의 시편(詩篇)들도 앞머리에 채록하여 초기의 한시(漢詩) 자료를 그만큼 보태주고 있다. 왕거인(王巨仁)ㆍ설요(薛瑤)ㆍ김지장(金地藏)ㆍ정법사(定法師) 등의 작품을 보여 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기아(箕雅)』 이전의 전통적인 시선집(詩選集)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며, 이는 곧 편자의 해박(該博)한 역사지식과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1917년은 『풍요삼선(風謠三選)』이 간행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때 기당(幾堂) 한만용(韓晩容) 등이 『풍요사선(風謠四選)』의 간행을 의론해 왔으나 편자는 이에 응하지 않고 『풍요삼선(風謠三選)』 이후의 위항시인을 이 『대동시선(大東詩選)』의 후반에 선입(選入), 처리함으로써, 풍요사선(風謠四選)의 편찬임무도 함께 수행한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도 그의 자각적인 시대 정신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도 처음에는 『대동풍아(大東風雅)』라 하였다가 ‘풍아(風雅)’ 두 자가 거리끼어 ‘시선(詩選)’으로 바꾸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또한 그 정신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 『대동시선(大東詩選)』은 또 작자 미상의 필사본 동명이서(同名異書)가 있다. 그 편집 체제는 대체로 『기아(箕雅)』와 같으나 편찬 연대는 조선 영조대(英祖代)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권수(卷首)에 「맥수가(麥秀歌)」와 「황조가(黃鳥歌)」를 수록하고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으나,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秀歌)」를 싣고 있는 의도는 장지연(張志淵)의 의식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한시(漢詩)를 생산한 당시의 시인과 비평가들이 직접 선발(選拔)에 참여하여 이룩한 역대 중요 시선집(詩選集)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들이 지니는 문학사적인 의미를 검토해 보았다. 조선초기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비롯하여 조선중기의 『국조시산(國朝詩刪)』, 조선후기의 『기아(箕雅)』및 위항시인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 그리고 우리나라 한시(漢詩)를 사실상 총결산한 『대동시선(大東詩選)』을 통하여 이것들이 가지는 시대사적 의미와, 우리 문학사의 기술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것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송시학(宋詩學)이 극복되고 있어, 호방(豪放)ㆍ신경(新警)한 것은 뽑아주지 않았으며,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준척(準尺)으로 한 『성수시화(惺叟詩話)』는 모처럼 한시(漢詩)의 음악성에까지 관심을 보여 본격파(本格派) 비평가로서의 권능(權能)을 과시하였다. 『기아(箕雅)』는 각 시대의 소상(所尙)을 사실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무난한 자료집으로서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선발책자(選拔冊子)가 되었다. 『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은 작품으로서의 수준은 높은 것이 못되지만, 조선후기 위항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료적인 가치는 값진 것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은 우리나라 한시선집(漢詩選集)의 결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이 책에서 읽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서설 - 3. 작품의 평가 문제, 2) 조선의 시화집 (0) | 2021.12.19 |
---|---|
한시사, 서설 - 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0) | 2021.12.19 |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4) 풍요와 위항시인의 의지 (0) | 2021.12.19 |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3) 『기아』와 절충론 (0) | 2021.12.19 |
한시사, 서설 - 2. 자료의 선택 문제, 2) 『국조시산』과 격조론 (0)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