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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목차 민병수(閔丙秀) 1. 서설(序說) 1) 한시연구의 과제 2) 자료의 선택 문제 ⑴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⑵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 ⑶ 『기아(箕雅)』와 절충론 ⑷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⑸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3) 작품의 평가 문제 ⑴ 고려의 시화집 ⑵ 조선의 시화집 2. 한시의 초기 모습 1) 대륙(大陸)의 노래 ⑴ 공후인(箜篌引) ⑵ 황조가(黃鳥歌) ⑶ 인삼찬(人蔘讚)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⑴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⑵ 정법사의 영고석(詠孤石)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⑴ 진덕여왕의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 ⑵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⑶ 설요의 반속요(..
「공후인(箜篌引)」은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그대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 기어이 물을 건너네. 墮河而死 當奈公何 마침내 빠져 죽어 버리니 그대를 어찌 하리오? 이 작품은 후한(後漢) 채옹(蔡邕, 133~192)의 『금조(琴操)』, 서진(西晉) 혜제(惠帝, 290~306) 때 최표(崔豹)가 편찬한 『고금주(古今注)』, 『예문유취(藝文類聚)』 등에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妻) 여옥(麗玉) 또는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이 작품은 부대설화(附帶說話)가 함께 전하고 있어 작자와 제작동기 등 작품과 관계되는 주변사정까지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부대설화를 배제하고 독립된 작품만 보면, 물을 건너지 말라는 애원을 뿌리치고 기어이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
1. 대륙(大陸)의 노래 우리나라 국토의 경계(境界)가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로 고착(固着)되기 이전의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그 시기가 어느 때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중국 대륙의 동북변(東北邊) 지역이 선주지(先住地)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 또는 국토의 개념도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때 중국과의 국가간의 경계 역시 지금처럼 확연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시가사(詩歌史)에서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 심지어 고구려인(高句麗人)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삼찬(人蔘讚)」까지도 그 국적과 제작 시기를 명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방면의 연구도 그 부대설화(附帶說話)의 산문(散..
2. 한시의 초기 모습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유입(流入)된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는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어 왔지만, 이는 연(燕) 위만(衛滿)의 동침(東侵)이나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역시 추정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한시(漢詩)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를 따지는 문제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다. 설사 문자(文字)의 유입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그릇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한시(漢詩)와 같은 고급 예술 문화를 양성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거쳐야 할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할 때에는 서책에 의존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을 광범위하게..
그러나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숙종대(肅宗代)의 번영은 정치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여 명맥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시문(詩文)에 대한 논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문학의 전통이 사실상 끝장날 무렵에 김택영(金澤榮)이 『소호당집(韶護堂集)』 권8이란 잡언(雜言)을 남겨준 것이 고전비평의 마지막 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잡록(雜錄)이며, 문학을 논한 부분에 있어서도 문론(文論)이 시론(詩論)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 뒤늦게 나온 조긍섭(曹兢燮)이 김택영(金澤榮)과 주고 받은 『암서집(巖西集)』에서 나온 「여김창강(與金滄江)」란 왕복서(往復書)도 도학자(道學者)의 문장론(文章論)이..
그러나 비평은 역시 문장가의 것이며 사장학(詞章學)의 부침(浮沈)과 기복(起伏)을 같이 한다. 서거정(徐居正)ㆍ성현(成俔) 이후에도 조선중기에 이르러 이수광(李睟光)ㆍ신흠(申欽)ㆍ허균(許筠) 등이 나타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면서 시학(詩學)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도 한 차례 호황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백과사전식으로 된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지만 그 문장부(文章部)에서 행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단순한 기문일사(奇聞逸事)의 채록 수준에서 뛰어넘어 일자일운(一字一韻)의 형식적인 기교에 이르기까지 높은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성운(聲韻)에 대한 그의 관심은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와 더불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가장..
조선왕조는 태조(太祖)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므로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다. 성현(成俔)은 그 태평한 시대에 『용재총화(傭齋叢話)』를 썼다. 그의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文章)으로 진기(珍奇)한 풍물도(風物圖)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대의 문장(文章)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의 필하(筆下)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엄(森嚴)했다. 사자(四字)로 된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포(褒)와 폄(貶)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높은 조감(藻鑑)은 후대(後代)의 신흠(申欽)ㆍ허균(許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과 성현(成俔) 이후의 비평 양상도, 시(詩)의 본질..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현을 가능케 하리만큼..
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시평의 단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천년래(三千年來)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앙받은 대수(大手)로서도 특정한 시인을 포폄(褒貶)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시풍(詩風)을 같이하는 일군의 시인들을 한데 묶어 그 장처(長處)를 추숭(推崇)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다. 시작법(詩作法)의 상식인 용사(用事)나 신의(新意) 따위를 논의하는 것도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점화(點化)의 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곳이기도 하지만, 이는 만상(萬象)을 구비한 이제현(李齊賢)의 시세계가 그렇게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전통이 정착의 단계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
『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 있어서도 『파한집(破閑集)』을 보(補)한 것이거니와 시기적으로도 소단(騷壇)의 한 시대를 통관(通觀)할 수 있는 고려중ㆍ말엽의 산물이다. 그래서 최자(崔滋)는 위로는 정지상(鄭知常)으로부터 당세(當世)의 명가(名家)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詩作)에 품평(品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대해서는 일월(日月)로도 그 칭예(稱譽)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 세상에 행(行)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작(詩作)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보한집(補閑集)』 권중(卷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규보(李奎報)를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 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을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시(詩)에..
2) 조선의 시화집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
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경우, 비평은 한문학의 전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설이 판을 치는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문학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것이 아니라 문어(文語)로 된 문장(文章)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시(詩)나 문(文)의 역사이며 실질적으로는 시(詩)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 비평의 현실은, 문학일반에 관한 이론이나 본격적인 시론(詩論)과 같은 것은 흔하지 아니하며, 대부분이 소박한 실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던 방식 그대로 개연적(蓋然的)인 평어(評語) 수준에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
5)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漢詩)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서는 총결산에 해당한다. 표제(標題)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古朝鮮)에서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역대 2,000 여가(餘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12권(卷)으로 출판한 것이다. 구한말의 학자요 언론인이기도 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집하여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연보와 장홍식(張鴻植)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편(原編)은 1917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권수(卷首)의 범례(凡例)에서는, 서둘러 이를 편집, 간포(刊布)하기 때문에 유루(遺漏)된 것에 대해서는 보유(補遺)의 간행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이..
『풍요삼선(風謠三選)』은 속선(續選)의 속집(續集)이다. 직하사(稷下社)의 시동우(詩同友)인 유재건(劉在建)ㆍ최경흠(崔景欽) 등이 『풍요속선(風謠續選)』 이후의 위항시인 305가(家)의 시(詩)를 선집(選集)하여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만에 『풍요속선(風謠續選)』이 간행되었고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준비기간(準備期間)까지 합치면 12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위항시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삼선(三選)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이 대체로 수습되었으며 사실상 이것이 독자적인 위항시인의 시집..
『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의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 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가(家)의 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소대풍요(昭代風謠)』는 162가(家)의 시편(詩篇)을 시체(詩體)에 따라 선집(選集)하여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 1737)에 간행되었으며, 원집(原集) 9권(卷)과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쳐 2책(冊)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뒷날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할 때(哲宗 8, 1857) 『소대풍요(昭代風謠)』가 산망(散亡)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이듬해(戊午)에 운각자(芸閣字)로 다시 인출(印出)한 중인본(重印本)이 널리 유행(流行)하고 있다. 편자는 고시언(高時彦, 1671~1734)으로 알려져 왔으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오광운(吳光運, 1698~1745)의 서문과 발..
4)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여기서 풍요(風謠)라고 한 것은 『소대풍요(昭代風謠)』와 『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 등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시집(詩集)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작(詩作)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의 그것에 비길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중인(中人)ㆍ천예(賤隸)들의 피맺힌 소망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특수계층의 시집(詩集)이다. 때문에 그 편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사대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위항시인(委巷詩人)이란 대체로 의역중인(醫譯中人)ㆍ서리(胥吏) 등과 같이 중간 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詩人)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대부의 기에..
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詩)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詩)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色)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
3) 『기아(箕雅)』와 절충론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시선집(詩選集)이라면,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찬집(撰集)한 『기아(箕雅)』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이후 조선후기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시선집(詩選集)이다. 임병양란(任丙兩亂)의 실의(失意) 이후 깊은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 들어간 소단(騷壇)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숙종(肅宗) 연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시대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숙종(肅宗)ㆍ영조(英祖) 연간에 가열된 당론(黨論)으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詩業)이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후기 사단(詞壇)의 현실에서 볼 때 『기아(箕雅)』의 출현은 조선후기 소단(騷壇)의 중간 보고 이상으로 시사적(詩..
이와 같은 허균(許筠)의 성운(聲韻)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고려시대의 시작(詩作)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채(異彩)를 발하고 있다.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는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시(詩)에 대해서도 각각 그 음악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색(李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벽루(浮碧樓)」에 대하여 『성수시화(惺叟詩話)』 13번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꾸미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음조에 합치하여, 읊조린 것이 신묘하고 뛰어나다. 不雕飾, 不探索, 偶然而合於宮商, 詠之神逸. 스스로 격조(格調)에도 뛰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에 대해..
그러나 허균(許筠)이 비평가로서의 높은 조감(藻鑑)을 과시한 것은 성률(聲律)에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뿐만 아니라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학산초담(鶴山樵談)』의 도처에서 시(詩)의 음악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최경창(崔慶昌)과 이달(李達)의 시작(詩作)을 수십편이나 뽑아 넣으면서 그 경위를 『성수시화(惺叟詩話)』 63번과 64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시(詩)를 내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뽑아 넣은 것이 각각 수십편이나 되는데 음절(音節)은 정음(正音)에 들 만하지만 그 밖에는 뇌동(雷同)을 면치 못한다. 二家詩, 余選入於詩刪者, 各數十篇, 音節可入正音, 而其外不耐雷同也. 그가 이들의 시(詩)를 선발(選拔)한 기준이 음절(..
한편 이 책에는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을, 역대의 시화(詩話)ㆍ만록(漫錄)에서 찾아 음각(陰刻)으로 보주(補注)를 붙이고 있다. 이는 아마 고본(稿本)을 재편집(再編輯)하는 과정에서 박태순(朴泰淳) 자신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에 널리 제본(諸本)을 구(求)하여 거기에 정정(訂定)을 가(加)하고, 또 제가(諸家)의 시화(詩話)에서 따서 같은 종류의 것을 보충하고 베껴서 몇권을 만들었다. 於是, 廣求諸本, 頗加證定, 又取諸家詩話, 以類補綴, 繕寫爲幾卷. 이 언급으로 보아 박태순(朴泰淳)이 한 일임에 틀림 없는 듯하다. 보주(補注) 가운데는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차..
2)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格調論) 『국조시산(國朝詩刪)』의 기본 성격은 허균(許筠)이 초선(鈔選)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자신이 선발(選拔)한 작품에 스스로 비(批)와 평(評)을 함께 붙이고 있어 이는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그 유례가 없는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시대사적으로는, 『동문선(東文選)』과 『청구풍아(靑丘風雅)』 이후 목릉성세(穆陵盛世)에 이르는 150년간은 조선 시대의 소단(騷壇)이 전에 없이 다양한 전개를 보이면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이것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 시대에 그 비평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무비(無比)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허균(許筠)이 당시(..
당시의 소단(騷壇)이 아직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을 선관(選觀)의 편향성을 지적한 적평(適評)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시가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인의 비평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나 신흠(申欽)이 「선사사(仙槎寺)」의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학(鶴)은 신라시대의 일산에 번득이고 용(龍)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동문선(東文選)』이 간행되었으며,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大東詩林)』이 이보다 뒤에 나온 듯하나 이것은 함께 논할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은 방대한 관찬서(官撰書)로서, 또 시문(詩文)의 총집(總集)으로서 이것이 갖는 자료집(資料集)으로서의 의미는 막중하지만, 그러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동문수(東文粹)』(文選集)와 더불어 편자(編者)의 취향과 조감(藻鑑)에 따라 정선(精選)한 사찬서(私撰書)이고 또 이것은 시선집(詩選集)이라는 점에서 양자(兩者)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서(兩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제가(諸家)의 기록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 10)에서 다음과 같이 말..
1)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기본적인 성격은 조선초기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편찬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형식적인 의미에서 보면, 조선초기에 이르러 전시대(前時代)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대관찬사업(大官撰事業)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라는 것이며, 둘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소단(騷壇)이 이때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이르러 그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
2. 자료의 선택 문제 한문학사는 문장(文章)의 역사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역사가 아니라 문언(文言)으로 된 시문(詩文)의 역사이며, 사실상 그 주종(主宗)이 되어 온 것은 시(詩)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史實)이 사실(事實)로 통용되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이른바 문학(文學)에 대한 연구는 시대의 풍상(風尙)으로 각광을 받아왔고 사실상 조윤제(趙潤濟)의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가 이러한 편향(偏向)을 조성하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정작 한시(漢詩)에 대한 관심은 작품의 소재 파악이나 기초 자료의 조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시(漢詩) 전통이 이미 전시대(前..
1. 서설(序說) 1. 한시(漢詩) 연구(硏究)의 과제(課題) 한시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삶을 있게 해주는 원천으로 소중한 것이 되고 있으며, 한시에서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해법(解法)조차도 이 자연을 통하여 구하려 한다. 그러나 한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과 자연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 물아(物我)가 한데 어우러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조화미(調和美)의 극치(極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漢詩)를 모르면서도 한시(漢詩)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학계의 현실은 지금까지도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