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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8.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8.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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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차좌일(車佐一)최북(崔北)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수삼(趙秀三)이다.

 

조수삼(趙秀三, 1762 영조38~1849 철종1, 芝園子翼, 秋齋經畹)

은 한미한 중인 출신이나 그의 시재를 아끼는 사대부들의 도움으로 83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ㆍ첨중추(僉中樞)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조희룡(趙熙龍)정지윤(鄭芝潤)천수경(千壽慶) 등 위항시인들과의 교유, 김정희(金正喜)ㆍ김명희(金命喜) 등과의 친분, 여러 차례 북경을 내왕함에 따라 오숭량(吳嵩梁)ㆍ주문한(朱文翰) 등의 중국 문사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그 어떤 위항시인들 보다 다양한 시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다.

 

조수삼(趙秀三)은 시문 뿐만이 아니라 의학, 약학, 바둑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제재와도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조국의 수려한 경승, 그 속에 담긴 백성들의 삶의 질곡이 빚어내는 미묘한 정서, 농민의 생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민란에 관한 시적 감수성, 옛 사적과 문물에 대한 깊은 조예, 개인 신변사에 대한 낭만적 필치 등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시작(詩作)의 제재가 되고 있다.

 

추재집(秋齋集)8권에 이르는 거질(巨帙)이거니와 이 가운데서도 일곱 권이 시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여섯 차례나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중국(中國)을 다녀왔으며, 국내에서도 관서(關西)ㆍ관북(關北)ㆍ영남(嶺南) 등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시를 남겨 시집(詩集) 일곱 권 가운데서도 여섯 권이 기행시로 채워져 있다. 북행백절(北行百絶)(五絶)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특히 그의 시세계에서 후대인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고려궁사(高麗宮詞)(22), 기이(紀異)(71),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81) 등이다. 그는 일찍부터 죽지사(竹枝詞)에 관심을 보여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15)를 비롯하여 지방의 풍물(風物)을 시로써 읊고 있는 것이 많거니와 특히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는 외국(外國)의 풍물을 시화(詩化)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조수삼(趙秀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기작 선죽교(善竹橋)를 보인다.

 

波咽橋根幽草沒 물결은 다리에 부딛혀 울고 풀들은 물 속에 잠기는데
先生於此乃成仁 선생은 이곳에서 인()을 이루셨다.
乾坤弊盡丹心在 세상은 다하여도 단심(丹心)은 남아있고
風雨磨來碧血新 비바람 몰아쳐도 선혈(鮮血)은 새롭다.
縱道武王扶義士 무왕(武王)이 의사(義士)를 부축하였다 말들하지만
未聞文相作遺民 문상(文相)이 유민(遺民) 되었단 말 듣지 못했네.
無情有恨荒碑濕 무정(無情)한 한()은 거친 비석에 젖어있어
不待龜頭墮淚人 비석 앞에서 굳이 눈물 흘릴 필요 없다네.

 

선죽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적이다. 조수삼(趙秀三)은 이 선죽교를 지나며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회상하고 있다. () 무왕(武王)이 상중(喪中)에 은()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불가(不可)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할 뻔 했으나 이들은 의사(義上)라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 文山, 右相)은 원()에 대항했다가 포로가 되어 참수(斬首) 당함에 따라 유민(遺民)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할 때의 충신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언진(李彦瑱, 1740 영조16~1766 영조42, 虞裳, 松穆館)

홍세태(洪世泰)이상적(李尙迪)정지윤(鄭芝潤)과 더불어 역관사가(譯官四家)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영조 때의 시단에서 혜성같은 존재로 평가된 바 있다. 특히 그는 24세에 일본에 통역관으로 따라가 그곳에서 시명을 떨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재에도 불구하고 일찍 요절함으로써 천재시인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실하게 돋보여 평가되기도 하여, 박지원(朴趾源) 등 여러 문인들에게서 입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文集) 송목관집(松穆館集)이 전하고 있다.

 

이언진(李彦瑱)의 시의 특징은 전통적인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 일색임에 비해, 이언진(李彦瑱)은 파격적으로 육언절구(六言絶句)를 즐겨 짓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동호거실(衕衚居室)157, 일본도중소견(日本途中所見)22, 실제(失題)5수 등이 대표적인 육언절구이다. 시의 제재나 내용도 역관의 체험에 기초한 외국 기행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새롭게 보고 듣는 것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 은근한 풍자가 돋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중인 출신 시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대부시인들이 접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며 그들이 본 그대로 기실(紀實)’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신분의 소유자인 반면 사대부들처럼 엄격한 예교적(禮敎的) 사회 규범으로부터 방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白話)를 적극 수용하면서 당대 현실의 여러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동호거실(衕衚居室)가운데 한 수를 보기로 한다.

 

市街頭賣炊餠 시장 머리에서 만두를 파는데
小孩兒知時價 어린애도 값을 안다.
只一件好東西 다만 제일 좋은 것이란
吾不辨眞和假 진짜 가짜 구분 못하는 그것이네.

 

시장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사대부의 시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시정(市井)의 분위기에 맞게 일건(一件), 동서(東西), () 등의 백화를 써서 구어에 가깝도록 조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언진(李彦瑱)시문이 앞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이우상(李虞裳)에서 보았다(金潚, 松穆館集跋).”라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고시언(高時彦, 1671 현종12~1734 영조10, 省齋, 國美)

은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온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역시 시에 뛰어났으며 경사(經史)에도 뛰어났다 한다. 채팽윤과 더불어 위항시의 집성인 소대풍요(昭代風謠)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지만 간행(刊行)을 보지 못하고 죽어, 그의 시편이 소대풍요(昭代風謠)』「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다. 소대풍요권수(昭代風謠卷首)의 제사(題辭)를 통하여 그는 동문선과 더불어 서로 표리를 이루어 한 시대의 풍아를 찬란히 감상할 수 있다. 귀천의 나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이 재주를 빌려주어 시를 잘 읊조리는 것은 한 가지다[與東文選相表裏, 一代風雅彬可賞, 貴賤分岐是人爲, 天假善鳴同一響]”라 하여 신분에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위항인의 문학은 사대부의 그것과 같은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고시언(高時彦)의 시세계는 꾸밈 없이 진솔한 심회를 읊어낸 것이 일반적이다. 다음에 효출동곽(曉出東郭)을 보기로 한다.

 

曉嶂尙依微 林風吹浙浙 새벽 산봉우리 아직 희미한데 숲 사이 바람은 선들선들 불어온다.
馬嘶臨寒流 殘星落如雪 말 울음 소리 찬 강물에 다다랐는데 새벽별 눈처럼 지고 있다.

 

일찍 길을 나선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지는 새벽풍경이 참신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직 동이 다 트지 않아 먼데 산이 희미한데 솔바람과 말울음 사이로 새벽별이 쏟아져 내리는 풍경 속에 시인의 맑고 상쾌한 새벽 기분까지 겹쳐 놓고 있다. 이 시는 위항인 특유의 불평음(不平音) 같은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담박한 시인의 천기(天機)를 느끼게 한다.

 

 

고시언(高時彦)월야(月夜)는 위의 시와는 대조적으로 한 눈에 신분적 자괴감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해준다.

 

短裙徘徊小院東 베옷차림으로 작은 뜰을 서성이다가
驚悟一葉乍金風 떨어지는 오동잎 하나에 잠깐 사이 가을임을 깨닫네.
孤城月桂蟲吟裏 달이 걸린 외로운 성은 풀벌레 소리 속에 있고
萬樹秋涵露氣中 가을 빛에 젖은 나무들은 이슬 기운 가운데 있네.
今古紛紜何日了 예나 지금이나 분주한 세상일 언제나 끝나랴?
乾坤遼闊此途窮 하늘과 땅은 멀고 넓은데 이곳은 길이 막혔구나.
家貧無恤還憂國 가난한 집도 돌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나라를 근심하니
自笑愚衷膝室同 스스로 이 내 마음 칠실과 같음을 비웃노라.

 

소대풍요(昭代風謠)』 「별집(別集)에는 제명(題名)칠일초납냥수하(七日初納涼樹下)로 되어 있다. 입의(立意)는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지만 통창(通暢)함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초가을 7월 밤 나무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쓴 것이다. 세상은 넓고 크지만 유독 그들에게만은 길이 막혀있는 신분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오히려 분에 넘치게 나라를 근심하는 자신의 칠실지우(漆室之憂)칠실지우(漆室之憂): 칠실은 춘추 시대 노()의 읍명(邑名)인데 한 고을이 겨우 일곱 집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제 신분(身分)에 맞지 않는 근심을 가리키는 말을 가리킨다. 열녀전(列女傳)에 노나라 칠실의 여자가 기둥에 기대어 울고 있어 이웃 사람이 시집을 못가서 우느냐고 물으니, 여자 대답이 사람을 너무 모른다. 임금은 늙고 태자는 어리니 그것이 걱정되어 운다.” 하였다. 그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것은 대부(大夫)들이나 할 걱정이다.” 하니, 대답이 그렇지 않다. 지난날 객()의 말이 고삐가 풀려 우리 아욱 밭을 밟아 1년 내내 내가 아욱을 먹지 못하였다. 노나라에 환란이 생기면 군신 부자가 다 그 해를 입게 되는데 부녀자가 유독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를 자조하고 있다.

 

 

 

장혼(張混, 1759 영조35~1828 순조28, 元一, 而已广空空子)

은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를 지낸 인물로, 시에 능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를 좇는 위항의 무리도 많았다 한다. 고대(古代)로부터 명말(明末)까지의 중국 역대 시를 넓게 선발하여 시종(詩宗)을 편찬하기도 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장혼(張混) 문하의 위항시인들이 다음 시기의 위항문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시사적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장혼(張混)은 모든 것을 체관한 인생관, 생활관을 말해주는 이이엄(而已广)이라는 그의 자호(自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오하였으며 오직 문학지교(文學之交)’ 만이 영세(永世)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혼(張混)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문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장혼(張混)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답빈(答賓)둘째 수를 들어본다.

 

籬角妻舂粟 樹根兒讀書 담모퉁이에서 아내는 절구질하고 나무 아래서 아이는 책을 읽는다.
不愁迷處所 卽此是吾廬 사는 곳 잃어버릴 근심 없으니 바로 이곳이 내 집이라네.

 

 

한편 장혼(張混)은 사대부시인들의 시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체시(異體詩)를 즐기기도 하였다. 육언시(六言詩)나 모시집구(毛詩集句) 등이 그러한 것이며, 특히 그는 사언시(四言詩)에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의 고체(古體)한위(漢魏)의 여향(餘響)이 있다[古體深得漢魏餘響. (李書九)]”거나 금세(今世)의 시가 아니다[足下之文, 最長於詩, 詩尤長于古體 …… 亦知足下之詩, 非今世詩也. 淵泉集17]”라는 평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이며, 또 이 때문에 당대인의 눈에 그의 루백천언(累百千言)이 글자마다 새롭게 보였을 것이다[百千字字新. 存齋集14].

 

이러한 장혼(張混)의 이체시(異體詩)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군선우지효도체(君善偶至效陶體)에도 잘 드러나 있다.

 

羗有人兮 不娶不宦 ! 어떤 한 사람, 장가들지 않고 벼슬하지 않네.
雖則苦貧 其心則晏 고생하고 가난해도 마음은 편안하네.
樂之嘐嘐 彈詠以間 거리낌 없이 즐기며 음악과 시로 시간을 보내네.
物各自適 鵬無笑鷃 사물은 제각기 즐기며 살아가는 법, 붕새는 메추라기 비웃지 않는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우연히 찾아 온 천수경(千壽慶, 君善은 천수경의 )을 맞아 도연명(陶淵明)의 사언시(四言詩)를 본받아서, 주어진 운명에 안분하는 자신을 옮고 있다. 이처럼 장혼(張混)의 사언시(四言詩)는 자신들의 생활 감정을 이미 익숙된 오칠(五七)형식을 배제하고 비교적 생소한 사언(四言)으로 표출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차좌일(車佐一, 1755 영조31~1809 순조9, 叔章, 四名子)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으로 서화(書畵)는 물론 음율, 사예(射藝)에도 능했던 시인이다. 홍양호(洪良浩)정약용(丁若鏞) 등과 시로써 사귀었으며, 잠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기도 하였으나 송석원 시사의 일원으로 풍류를 즐긴 일생이었다.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으로 자처한 그였지만, 그는 끝내 세세생생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겠다[哭曰: 世世生生, 不願爲本邦人也. (行狀)]”고 통곡하였다 한다.

 

차좌일(車佐一)산양역(山陽驛)은 그러한 그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落日山陽驛 歸程問牧童 산양역에 해가 질 무렵, 갈 길을 목동에게 묻는다.
一身無煖氣 四面有寒風 온 몸에 온기라곤 없는데 사방에는 찬 바람이 분다.
嶺勢惟天險 灘聲忽地雄 산마루 형세 험란하기만 해 여울 소리 갑자기 요란쿠나.
白頭猶役役 多愧古墻東 늙어서도 오히려 고역을 면치 못하니 낡은 담장 지나기도 부끄러워라.

 

한편 차좌일(車佐一) 시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범경문(范慶文)이 보여준 이체시(異體詩)의 경향을 따라 효사기체(效四氣體), 육갑체(六甲體), 약명체(藥名體), 효조명체(效鳥名體), 효수명체(效獸名體), 효십이속체(效十二屬體), 효육부체(效六府體), 효건제체(效建除體), 효육갑체(效六甲體), 팔음(八音), 괘명(卦名)등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괘명(卦名)은 각구에 주역(周易)의 육십사괘명(六十四卦名)을 하나씩 넣은 것이고, 효육부체(效六府體)는 재물을 가무리는 여섯 곳, 즉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의 글자를 각구에 넣은 것이며, 효십이속체(效十二屬體)는 일명 십이생초시(十二生肖詩)로 십이간지(十二干支)에 해당하는 동물 이름, 곧 서()ㆍ우()ㆍ호()ㆍ토()ㆍ용()ㆍ사()ㆍ마()ㆍ양()ㆍ후()ㆍ계()ㆍ구()ㆍ저()의 열두 글자를 넣어 시를 짓는 것이다. 효조명체(效鳥名體), 효수명체(效獸名體), 약명체(藥名體)는 각기 새이름, 짐승이름, 약이름을 각구에 넣은 것이며, 효사기체(效四氣體)는 일명 사시시(四時詩)로 춘()ㆍ하()ㆍ추()ㆍ동()의 네 글자를 각구에 넣은 것이다. 이러한 이체시의 실험은 바로 사대부시인들이 규범에 얽매여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기피하던 것과 달리 위항인이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자유분방한 창작활동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정래교(鄭來僑, 1681 숙종7~1757 영조33, 潤卿, 浣巖)

는 그의 아우 정민교(鄭敏僑)와 더불어 시문에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을 받았던 위항인이다. 1705년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곳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사대부 문인(文人)으로는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을 따랐으며, 위항인(委巷人)으로는 홍세태(洪世泰)를 좇아 교유하였다.

 

정래교(鄭來僑)의 시를 두고 이천보(李天輔)그의 시는 소탕연양(疏湯演瀁)하여 시인의 태도를 얻었는데, 가끔 성조(聲調)가 강개(慷慨)하여 연조(燕趙)의 격축지사(擊筑之士)가 위 아래로 치고받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 대개 그 연원은 홍세태(洪世泰)에게서 나온 것이니, 천기(天機)로부터 얻음이 또한 많다[其爲詩也疏湯演瀁, 得詩人之態度, 而往往聲調慷慨, 有若與燕趙擊筑之士, 上下而馳逐. 蓋其淵源所自出於道長, 而其得之天機者多 浣巖稿序].” 하였다.

 

이는 사대부들이 온유돈후(溫柔敦厚)를 내세워 성정(性情)의 순화(醇化)를 중시하여 시에서 비애(悲哀) 및 격정(激情)을 배제한 것과 달리, 정래교(鄭來僑)는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감정을 호방하게 표출하였음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래교(鄭來僑) 시의 모습은 다음의 동양서재(東陽書齋)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垂老吾多病 胡爲滯海西 늙어가며 내 몸에 병이 많은데 어찌하여 해서(海西)에만 머무르겠나.
開門千樹色 高枕一鸎啼 문을 여니 온갖 나무 빛 베개를 베니 꾀꼬리 소리.
酒榼空仍卧 書籤散不齊 술통 비어 속절없이 누워 있으니 서첨(書籤)은 흐트러져 고르지 않네.
羈愁兼別恨 故故暮雲低 나그네 수심과 이별의 한 때문에 자주 저녁 구름에 고개 숙인다.

 

보이는 물상(物象)마다 시인의 고단한 심회를 포개어 보지만, 이제는 몸이 늙어 그 강개로움조차 사그러들고 비애만이 남은 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정민교(鄭敏僑, 1697 숙종23~1731 영조7, 季通, 寒泉)

정래교(鄭來僑)의 막내 동생으로, 일찍이 사예(詞藝)로써 진사에 올랐으나 낙척자방(落拓自放)하다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에 앞서 소대풍요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 사람됨이 자못 소탕하고 구속되는 바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멀리 여행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이들 형제는 삼연(三淵)을 추숭하며 삼연(三淵)의 문하생과 어울려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를 비롯한 여타의 위항시인들과 함께 백사(白社)를 결성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정민교(鄭敏僑)는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기행시가 많은데, 오원(吳瑗)은 이에 대하여 여행의 뇌소(牢騷)를 읊은 것은 모두 정이 진실되고 시어가 새로우며 생각이 풍부하고 빼어났다[羈旅牢騷之所發, 皆情眞語新, 思致贍逸 寒泉遺稿序.]” 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정민교(鄭敏僑) 시의 또 한 부분은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수세작(收稅作)을 들어본다.

 

窮年兀兀夜膏焚 일년 내내 부지런히 밤새 불 밝히고
用力平生在典墳 평생 힘들여 책을 읽었네.
勤苦果成何事業 그러나 각고 끝에 무슨 일 이루었나?
經綸聊試此船村 쌓아온 경륜은 이 어촌에서 시험해 볼 뿐.
但能如法斯爲美 다만 법대로 하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길 뿐,
豈必干譽強作恩 어찌 명예를 구하여 성은(聖恩)을 억지로 바라리오?
到處要無箠楚虐 이르는 곳마다 학정이 없었으면
愛民吾受聖人言 백성을 사랑하라는 성인의 말씀 받았음이라.

 

수련(首聯)의 상구(上句)한유(韓愈)진학해(進學解)에서 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의 뜻을 빌린 것이다. 서리(胥吏)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정관념으로 농상공(農工商) 등의 상민(常民)까지도 오류시(惡類視)하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 시는 자조적인 강개(慷慨) 이상으로 비정한 시속(時俗)을 나무라는 위항인의 양심까지도 함께 읽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쓰임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힐 때 위항인들은 자주 검()과 금()ㆍ주() 속으로 도피하기도 한다.

 

 

다음에 보이는 정민교(鄭敏僑)확귀(獲歸)에는, 시인이 스스로 농부로 등장하고 있어 경이로움 이상으로 감동을 준다.

 

九月寒霜至 南鴻稍稍飛 구월에 찬 서리 내리고 남녘으로 기러기 날아오기 시작하네.
我收水田稻 妻織木綿衣 나는 논에 나락을 걷고 아내는 목면 옷 짓네.
白酒須多釀 黃花自不稀 흰 술은 모름지기 많이 빚어야 하는 법, 국화는 스스로 많이도 피었네.
於焉聊可隱 且作百年歸 이 곳이야말로 이 몸 숨길 만 하니 백년 뒤에 돌아가리라. 寒泉遺稿1

 

형식이나 취재의 신기(新奇)를 구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생활 체험을 평담하게 얽어낸 진솔이야말로 위항시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珍奇) 그것이 아닐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백거이(白居易) 등이 과시한 전원시(田園詩)를 이으면서도 하천민(下賤民)의 생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권능(權能)은 오로지 위항인에게 속할 뿐임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천수경(千壽慶, ? ~1818 순조18), 君善, 松石園松石道人)

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서당의 훈도(訓導)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경(千壽慶)은 시에 능했으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족적인 삶을 구가하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도처에 투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섭원(日涉園)이다.

 

堆霞復拳石 上有松樹閒 쌓인 노을 거듭 돌을 휘감고 그 위에 소나무 한가히 서 있다.
誅茅寔爲此 柴扉溪上關 띠풀 베고 집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니 사립문은 시냇가에 닫혀 있다네.
軒窓容我膝 林木怡我顔 처마끝 창가에 이 몸 하나 앉을 만하고 숲의 나무는 내 얼굴 편안하게 해준다.
有時看白雲 鎭日對靑山 때로 흰구름 바라보면서 하루종일 푸른 산과 마주보고 있네.
生事自蕭條 不似在人間 세상살이 절로 한가하여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오언고시(五言古詩)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다. 함련(頷聯) 상구(上句)두보(杜甫)주모복거총위차(誅茅卜居總爲此, 枏樹爲風雨所拔歎詩)’에서 가져온 것이며 용아슬(容我膝)’이아안(怡我顔)’도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에 있는 眄庭柯以怡顔 …… 審容膝之易安에서 빌린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이들은 비록 관념적이긴 하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분위기를 의방(擬倣)하려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귀거래사(歸去來辭)園日涉而成趣에서 따온 日涉園을 제목으로 쓰고 있거니와, 생활의 빈궁을 잊고 자연 속을 소요하며 자족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속세를 떠나 사는 것 같은 초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박윤묵(朴允默, 1771 영조47~1849 철종1, 士執, 存齋)

은 정이조(鄭彛祚)의 문인으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와 평신첨사(平薪僉使)를 지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정밀하여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중배대학사석재윤공묘(雨中拜大學士碩齋尹公墓)를 보기로 한다.

 

三十年間九度過 삼십년 사이에 아홉 번을 지나는데
法華山色尙嵯峨 법화산(法華山) 모습은 아직도 우뚝하다.
松深古道靈風起 소나무 우거진 옛 길엔 시원한 바람 불고
花落荒原暮雨多 꽃 떨어진 거친 들엔 저녁비 내린다.
楸舍簡編猶剩馥 개암나무 집 책에는 남은 향기 가득하고
梣灘樵牧亦悲歌 침탄에 초동은 슬픈 노래 부른다.
忽聞蜀魄啼無盡 갑자기 저렇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들리니
可柰枝頭怨血何 나무가지 위에 뿌린 피는 어찌 하겠는가.

 

 

박윤묵(朴允默)은 그의 존재집(存齋集)에 많은 시작(詩作)을 남기고 있어 조수삼(趙秀三)과 함께 위항인(委巷人)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시편(詩篇)을 남긴 시인이 되기도 하였거니와, 이 작품과 같이 쉽게 그리고 당인(唐人)의 여유를 누닐 수 있는 것도 그의 다작(多作)과 무관하지 않다. 시사(詩社)에서 위항인들은 시를 짓고 술을 마는 것으로 즐길거리를 삼았지만 이들의 시업(詩業)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그러한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과시한 작품으로 다음과 같은 시후유작(詩後有作)을 들 수 있다.

 

豪唫雖未售今世 호탕한 읊조림 금세에 팔지 못해도
苦癖何曾讓古人 ()만은 어찌 고인에 사양하겠는가?
簸弄江山空自好 강산(江山)을 음롱(吟弄)하니 공연히 그냥 좋고
招呼風月爲誰新 풍월을 부르는 것 누구를 위해 새롭게 했던가?
搜膓鏤肺應添瘦 애태우며 짜내는 시 파리해지기 마련이지만
累牘聯篇不捄貧 겹겹이 쌓인 시편이 가난 구제 못하네.
六十年來詩萬首 육십년 동안 지은 시 만수나 되니
放翁去後又吾身 육방옹(陸放翁) 이후에 또 이 몸이 있다네. 存齋集22

 

육유(陸游)의 시작(詩作)이 평담(平淡)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거니와 물경(物景)이 많기로도 이름이 높다. 박윤묵(朴允默) 역시 이 작품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방옹(放翁)에게 비기어 스스로 그의 다작(多作)을 자부하고 있다.

 

 

 

5. 경세가(經世家)의 시편(詩篇)

 

 

실천적인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학자들은 물론, 사장(詞章)으로 이름을 얻은 문장가(文章家)들도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며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제작한 탐진농가(耽津農歌)등을 통하여 농촌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고난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으며, 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고문(古文) 문장가(文章家)의 체질에 걸맞게 화평전실(和平典實)한 시작(詩作)으로 경세(經世)의 일념(一念)을 잃지 않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38~1836 헌종2, 初字 歸農, 美鏞頌甫, 茶山三眉與猶堂俟菴)

은 진주목사였던 재원(載遠)42녀 중 제 4남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은 그의 처남이며, 이러한 주변 환경은 그의 삶의 향방을 결정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의지를 다지다 천주교도인 이벽(李檗)을 만나 서학(西學)을 배우게 된 것도 이승훈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경기도(京畿道) 암행어사(暗行御史)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나, 정조(正祖)가 붕어(崩御)한 후, 신유교옥사건(辛酉敎獄事件)을 계기로 포항의 장기(長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으로 전남의 강진(康津)에 각각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19년여의 유배기간 동안 그는 학문에 전념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머물던 때에도 저술생활로 삶을 마감하였다.

 

다산(茶山)은 문학가이기 전에 학자였다. 경세가로서의 명망이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알려진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등의 문제작을 비롯한 수많은 경적(經典) 석의(釋義)와 의학서(醫學書)ㆍ악학서(樂學書) 등의 저술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의 학구적 관심은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철학, 문학, 의학, 교육, 군사,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그의 문학세계에서 있어서도 전통적인 소인묵객(騷人墨客)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2,5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시편(詩篇)들을 제작하고 있지만, 시세계의 장처(長處)를 확인케 하는 것은, 그의 관풍(觀風) 의지가 무겁게 실려 있는 고조장편(古調長篇)이며 산문(散文)의 세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문장가들이 즐겨 제작한 서발(序跋)ㆍ기()ㆍ비지(碑誌) 형식의 문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정조(正祖)의 문체순정(文體醇正)에 대하여 일찍이 패관소품(稗官小品)를 부정했던 다산(茶山)은 허구적인 산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지원(朴趾源)처럼 오늘날의 기준에 걸맞는 문학적 산문을 양산할 수 없었던 반면 실증성과 실용성을 겨냥한 수많은 산문들을 저술해내었다 할 것이다.

 

다산(茶山)은 일찍이 문장을 풀이나 나무의 꽃에 비유하였는데, 그의 논지에 따르면, “성의(誠意)과 정심(正心)으로 뿌리를 북돋우고, 독행(篤行)과 수신(修身)으로 줄기를 안정시키고, 경전(經典)과 예()를 연구함으로써 진액(津液)을 빨아 올리고, 널리 얻어 들어 예()에 노닒으로써 잎과 가지를 펴게 한다. 이에 깨달은 바를 쌓아 그것을 표현하면 문장[人之有文章 猶草木之有榮華耳 種樹之人 方其種之也 培其根安其幹已矣 旣而行其津液 旉其條葉 而榮華於是乎發焉 榮華不可以襲取之也 誠意正心以培其根 篤行修身以安其幹 窮經研禮以行其津液 博聞游藝以旉其條葉 於是類其所覺 以之爲蓄 宣其所蓄 以之爲文 則人之見之者 見以爲文章 斯之謂文章 文章不可以襲取之也 爲陽德人邊知意贈言)]”이라 천명하고 있으며

 

시는 힘써 할 일이 아니다[詩非要務. 示兩兒]”,

 

나는 본성이 시율(詩律)을 좋아하지 않는다[余性不喜詩律. 寄二兒]”라 하여 시 자체를 중요한 일거리로 삼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산(茶山)에게 인식되는 문학이란 불가(佛家)의 치심법(治心法)은 치심(治心)을 사업(事業)으로 삼지만 우리 유가(儒家)의 치심법(治心法)은 사업(事業)을 치심(治心)으로 삼는다[佛氏治心之法, 以治心爲事業, 而吾家治心之法, 以事業爲治心. 大學公議].”라 하여 실천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 인성도야(人性陶冶)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사회적(對社會的)인 효용까지 갖추어야 참다운 문학이 된다고 생각한 다산(茶山)의 신념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속(時俗)에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 非詩也, 不傷時憤俗, 非詩也. 示兩兒]”라하여 공리적인 처지를 견지하고 있다.

 

다산시(茶山詩)의 실상은 그가 일찍이 나는 조선인이므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老人一快事]”라 읊었던 그대로 제재면에서는 시인의 주관보다는 대상을 존중하여 조선시대의 시속을 자주 다루었고, 표현면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전고 및 토속적인 방언을 사용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곧 시경시(詩經詩)에 내포된 채시관풍(採詩觀風)과 풍교(風敎)의 정신을 본받고 있는 것에서 그 소유래(所由來)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풍교의지(風敎意志)가 그의 사회비판시(社會批判詩) 전반(全般)과 우언시(寓言詩)의 세계에 그대로 잇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다산(茶山)은 그 평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적중송죽리김학사리교귀경(謫中送竹里金學士履喬歸京), 능허대(凌虛臺), 우중양기(雨中兩妓)(이상 七律), 강천반청도(江天半晴圖), 적성촌사(積城村舍)(이상 七古)가 있지만, 여기서는 경세가(經世家)와 시인(詩人)의 면모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탐진농가(耽津農歌)넷째 수를 보인다.

 

穮蔉從來不用鋤 김매고 북돋우기 호미를 쓰지 않고
手搴稂莠亦須除 잡초도 두 손으로 잠깐동안 뽑아내네.
那將赤脚蜞鍼血 어떻게 맨다리에 거머리가 빨아낸 피로
添繪銀臺遞奏書 그림을 그려서 은대에 보낼까.

 

탐진농가(耽津農歌)정약용(丁若鏞)1801신유교난(辛酉敎難)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으로,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탐진농가(耽津農歌)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농가(耽津農歌), 탐진어가(耽津漁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탐진농가(耽津農歌)10원래 12수였는데 10수만 남아 전함1804년에 지었다고 한다. 농촌 백성의 소박한 생활상이나 고난에 찬 삶을 진솔하게 그리기 위하여 제명(題名)악부(樂府)’라 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맨 다리로 논에서 일을 하다가 거머리에게 물어 뜯긴 피로 그림을 그려 은대(銀臺)에 상주문(上奏文)을 보낸다고 한 바깥짝의 제조 솜씨는 어려운 농촌 사정을 핍진(逼眞)하게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43 또는 223의 조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칠언시(七言詩)의 구성원리에서 보면 다듬어진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이는 풍인주(諷人主)를 위하여 당대 조선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조선시(朝鮮詩)의 변모 양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가환(李家煥, 1742 영조18~1801 순조1, 廷藻, 錦帶貞軒)

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개척한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엄격한 학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다. 남인(南人) 가계(家系)의 학풍을 체감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그는 환경과,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그의 외숙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질 조건도 함께 곁들여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丁若鏞)ㆍ이벽(李檗)ㆍ권철신(權哲伸) 등 남인계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일찍이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이름을 얻은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가학(家學)에 숙달하여 실학자적 소양과 문장력을 겸비하였으나 그의 명성에 걸맞는 저술이 없는 것이 흠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이가환(李家煥)은 솔직한 성정에서 나오는 청신(淸新)한 시를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천기론에 연원을 둔 중인층의 여항문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모도 보였다.

 

그는 43세에 생질인 이벽과 서학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 오히려 천주교인이 되는가 하면, 1791신유박해(辛酉迫害)의 와중에서는 도리어 광주부운(廣州府尹)이 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는 역설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대사성(大司成)ㆍ개성유수(開城留守)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는 과정에 다시 이승훈, 권철신 등과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 1801년에 순교 옥사하였다.

 

이용휴(李用休)이가환(李家煥) 부자(父子)가 기궤첨신(奇詭尖新)한 시풍을 열었다는 것은 김택영(金澤榮)의 평가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의 시세계는 정치적 좌절에서 울분을 토로한 것이 한 경향을 이루고, 또 그 반대편에는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는 청신(淸新)한 시세계가 유로되어 있으며, 간혹 애염(哀艶)ㆍ탕일(宕逸)한 작품들이 그의 자유로운 몸짓을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그의 청신(淸新)한 시풍에 대해서는 그와 문학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학규(李學逵)ㆍ신광하(申光河)가 그의 시를 가리켜 청아(淸雅)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가환(李家煥)의 도달처가 바로 청신(淸新)의 경지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그의 문학관을 피력한 논설들은 대체로 시인의 솔직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이 언외지의(言外之意)를 함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고 있으며, 신리핍사(神理逼似)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대동시선에는 연광정(練光亭)2(七絶), 기자묘(箕子廟), 설청(雪晴(이상 五律), 견민(遣悶), 백문(白門)(이상 七律), 송만덕환탐라(送萬德還耽羅)(七古) 등이 대표작으로 선발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견민(遣悶)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蕭條錦樹落天霜 쓸쓸한 나무에 찬 서리 내리고
爲客江關日月長 강남(江南)의 나그네 신세 세월은 느리기만.
千佛風雲供坐臥 천불산(千佛山)의 풍운(風雲)은 앉거나 누워 있고
五山冰雪變衣裳 오산(五山)의 빙설(氷雪)은 입은 옷을 바꾼다.
衰顔賓對蒼生哭 쇠한 얼굴로 백성의 고통 보고만 있으니
往歲虛隨粉署香 지난 세월 벼슬살이 헛되이 하였구나.
薄暮柴門扶杖立 저물녘 사립문에 지팡이 짚고 서서
愁看荒艸野茫茫 아득한 거친 들판 시름겹게 바라본다.

 

시름을 풀어내는 시답게 처량한 인생사와 쓸쓸한 경물이 어우러진 시이다. 특히 함련에서 보여주고 있는 묘사구는 매우 참신하여 이가환(李家煥) 시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다. 구름에 휘감긴 천불산과 빙설이 얼어붙은 오산의 생동하는 모습이 절묘한 댓구로 표현되어 있다. 천불(千佛)과 오산(五山)의 지명으로 첫 대를 공교롭게 맞춘 뒤, 풍운(風雲)과 빙설(氷雪)의 평이한 대, 다시 공좌와(供坐臥)와 변의상(變衣裳)의 기발한 대로 이어져 첨신(尖新)한 맛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첨신기발한 표현 뒤에 시인의 고음(苦吟)이 뒤따르고 있다. “쇠안빈대창생곡 왕세허수분서향(衰顔賓對蒼生哭 往歲虛隨粉署香)”이라 하여, 백성들의 질곡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벼슬아치의 처지가 토로되어 있다.

 

 

 

 

홍석주(洪奭周, 1774 영조50~1842 헌종8, 成伯, 淵泉)

는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과 함께 연대문장(臺淵文章)’으로 이름을 얻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선조의 부마였던 홍계원(洪桂元) 이후 꾸준히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영예를 누린 그의 가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게 되었으며, 아우 길주(吉周)와 현주(顯周) 등도 현달(顯達)하였다. 김창협(金昌協)박지원(朴趾源)의 뒤를 이어 한 장석(韓章錫)ㆍ김윤식(金允植)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에 이르는 중간단계에서 고문가(古文家)의 전통을 빛낸 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풍산세고(豊山世稿)를 간행하면서 우리 집안이 문학을 전수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십팔대인데 그 성취한 바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 자손들이 감히 논의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예의가 아니면 일컫지 않고 경전이 아니면 기술하지 않아 오로지 화평전식(和平典寔)함으로 종주(宗主)를 삼았다[吾家以文學相傳紹 迨今十八世矣 其所就深淺高下 非我後子孫所敢議 若其非禮義不稱 非經傳不述 一唯是和平典 寔以爲主者 豊山世稿跋]”고 한 바와 같이 그의 고문(古文)은 가학(家學)으로 지켜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조의 학문장려책으로 신설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어 규장각에서 6년간 특별교육을 받았으며 정조ㆍ순조ㆍ헌종을 차례로 보필하여 61세에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여러 요직을 두루 맡았다.

 

시보다는 고문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홍석주(洪奭周)는 사상적 주조로 보면 존심(存心)구방심(求放心)을 신조로 성리학(性理學)을 옹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당시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제고된 훈고학(訓古學)ㆍ금석학(金石學)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성리학 자체에 대해서도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지양하고 소쇄응대(掃灑應對)ㆍ읍양진퇴(揖讓進退) 등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의 문학관은 주로 시보다는 문장 평가에 집중되고 있거니와 사달(辭達)을 중심으로 억양개합(抑揚開闔)에 의한 문장의 고법(古法)을 체득하여 간결근엄(簡潔謹嚴)한 경지을 열어보여야 한다는 데 귀착되고 있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 그의 문장이 여러편 수록되어 있는 것도 이론과 창작의 실제를 일치시키려 했던 노력의 결과라 할 것이다.

 

 

경세가로서, 문장가로서의 이름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홍석주(洪奭周)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평가가 될 것이다. 그의 시편 중에서 대동시선에 수록된 가작은 차영명루한운(次永明樓寒韻)(七絶), 장서도중(長湍途中), 강경포(江鏡浦)(이상 五律), 장림(長林), 차상사운(次上使韻), 추일등루차포옹운(秋日登樓次圃翁韻)(이상 七律), 강여사(姜女祠)(五古) 7편에 이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장림(長林)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蕭蕭寒雨正催詩 쓸쓸한 찬 비 정히 시()를 재촉하는데
十里平林又一奇 십리(十里)에 뻗은 숲 또 하나 기경(奇景)이로다.
濃翠連綿秋色裏 짙은 녹음은 가을 빛 속에 이어져 있고
半江隱見夕陽時 강물은 은은히 노을질 때 나타나네..
輕舟渺渺隨桃葉 가벼운 배로 아득히 복사잎 따라가니
遠岸依依唱竹枝 먼 언덕에는 희미하게 죽지사(竹枝詞) 들린다.
不盡臺城楊柳感 대성(臺城)의 버드나무 느낌 다하지 않았는데
東明舊國幾回移 동명(東明)의 옛나라는 몇 번이나 바뀌었나.

 

이 시는 차분한 어조로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된 옛 행성(行城)의 버드나무 숲을 본 감회와 동명왕(東明王)의 고사(故事)를 교직(交織)한 것이다. 그러나 화평전실(和平典實)’함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는 고문의 대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역시 정감(情感)의 표출에 있어 화평함과 전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김매순(金邁淳, 1776 정조1 ~1840 헌종6, 德叟, 臺山)

역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와 같이 대연문장(臺淵文章)’으로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세도가벌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으로 이어지는 가계만 보아도 그의 문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 자신이 경학과 문장이 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으로는 오직 우리 집안의 여러 조상이 그러하였을 뿐[經學文章合而爲一者, 惟吾家諸祖爲然. 答族姪士心]”이므로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를 입증해준다.

 

20세의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예문관(藝文館)ㆍ홍문관(弘文館)ㆍ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ㆍ병조참판(兵曹參判)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에 종형인 김달순(金達淳)이 사약을 받게 되는 가화(家禍)를 입게 되자 향리에 물러나 20여년간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차라리 그가 학문과 문장에 전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할 것이다.

 

고문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그 역시 홍석주(洪奭周)와 비슷한 문학관을 피력했다. 훈고학(訓古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지양하고 정주학(程朱學)을 계승하고자 노력했으며,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여 실천적 학문을 주장했는가 하면,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와 모방문체(模倣文體)를 모두 배척했던 경위가 홍석주(洪奭周)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는 글을 짓는 요체로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에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간결함[]’이요, 둘째는 진실함[]’, 셋째는 바름[]’이라 했다. 도문합일(道文合一)을 주장하는 고문가(古文家)의 문장론(文章論)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장에서 특별히 지적되어야 할 것은 간요(簡要)’라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문장론은 그의 詩作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은 출계상득일절(出溪上得一絶), 함종도중(咸從道中)(이상 七絶), 야연린사 송윤경도 제홍 출재홍원(夜讌隣舍 送尹景道 濟弘 出宰洪原), 차이두신태승운(次李斗臣台升韻)(이상 七律), 동야영회(冬夜詠懷)(五古) 등이다. 이 중 함종도중(咸從道中)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磴道千回並磵斜 돌길은 구불구불 개울과 함께 빗겼는데
馬蹄磊落蹋崩沙 뚜벅뚜벅 말발자욱 모래톱을 허무네.
崖縫紫菊無人管 언덕 위 자주빛 국화 향내 맡는 이 없지만
自向寒天盡意花 찬 하늘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피었네.

 

실제로 그의 문장은 각박하리만큼 그 소리가 맑다. 그래서 이것이 도리어 흠으로 잡히기도 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曹兢燮)김매순(金邁淳)의 문장에 쇠기(衰氣)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하여 일부러 번다(繁多)하게 꾸미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인 함종도중(咸從道中)도 물론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평안도 함종현에서 지은 것이다. 안짝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들판길을 가는 모습을 그렸고, 바깥짝은 길 옆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피어있는 들국화의 소담한 모습을 그렸다. 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제 뜻대로 핀 들국화에는 은자의 초연한 모습이 겹쳐져 있기도 하다.

 

 

 

 

6. 후사가(後四家)와 죽지사(竹枝詞)

 

 

천기(天機)ㆍ진기(眞機)ㆍ본색(本色)ㆍ진색(眞色) 등을 강조하면서 진솔(眞率)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삼연(三淵)의 문학론은, 홍세태(洪世泰)를 필두(筆頭)로 한 위항시인(委巷詩人)들과 정선(鄭敾)이병연(李秉淵)ㆍ조영석(趙榮祏) 등의 백악사단(白岳詞壇)으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국내적으로는 삼연(三淵)의 문학론을 잇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밑을 중심거점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의 거장 정선(鄭敾),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의 대가 조영석(趙榮祏),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병연(李秉淵) 등이 똑같이 백악산 아래에 위치해 있던 노론계(老論系)의 김수항가(金壽恒家)와 잦은 교유를 통해 학문과 사상의 원천을 제공받았으므로, 이들은 자연히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의 학맥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문학(文學)과 회화(繪畵)를 동시에 추구했던 이들 백악사단(白岳詞壇)은 크게 문인(文人)과 화가(畵家)의 사승(師承), 교우관계(交友關係) 및 중국(中國)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수용을 계기로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를 추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동국진경(東國眞景) 즉 조선풍(朝鮮風)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를 추구했던 백악사단(白岳詞壇)의 활동은 이덕무(李德懋)청비록(淸脾錄)유득공(柳得恭)이 조영석(趙榮祏)동국풍속도(東國風俗圖)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파고다 공원인 백탑(白塔)을 지연(地緣)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二柳(柳得恭柳琴)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등의 백탑시파(白塔詩派)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한편으로는 국외의 문인들에게서도 심대(深大)한 영향을 받았다. 백악사단이 국내적으로는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의 학맥을 이으면서 중국 남종화풍(南宗畵風)에 자극받았듯이, 연암(燕巖)과 후사가 역시 국내적으로는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의 맥을 이으면서도 중국의 문인들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후사가는 연행(燕行)을 통해 청대문물(淸代文物)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으므로 사상적으로는 북학파(北學派)로 일컬어지기도 하거니와, 문학적으로는 명대의 창신파(創新派)인 서위(徐渭)와 공안파(公安派)ㆍ장릉파(章陵派) 제가(諸家)의 시설(詩說), 그리고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염무(顧炎武)ㆍ전겸익(錢謙益)ㆍ왕사정(王士禎)의 시학(詩學)을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왕사정의 신운설(神韻說)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 후사가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청()에 가지고 간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이른바 신운풍(神韻風)의 시를 추구한 시편(詩篇)들이 많았고, ()의 걸출한 문인이었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廷筠)의 평어(評語) 역시 왕사정의 신운설에 합치되는 ()’, ‘()’, ‘고담(古淡)’ 등이 많다.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의 시세계는 그 창작정신에서 보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그들이 실천한 것은 창신(創新)’에 기울고 있다.

 

이들이 이처럼 특징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 데는 그 설명 가능한 이유들이 여러 가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에게 신분상의 제약과 학풍의 특이성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는 서얼출신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한품서용(限品敍用)’ 의 규제에 걸려 청요직(淸要職)으로의 진출이 어려웠고, 농공상업(農工商業)으로 영달할 길도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당대의 사대부 지식인들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청()의 사조(思潮)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는가 하면, 일본(日本)ㆍ안남(安南)ㆍ유구(琉球) 등 외국문학의 동향에도 관심을 표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 시창작을 실천할 때에는 정통 사대부들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민간의 물태인정(物態人情)을 사실적, 회화적으로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며, 이것을 담고 있는 것이 죽지사(竹枝詞). 이들은 사대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으며 사대부들로서는 듣지도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대부들에게는 보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지사(竹枝詞)와 같은 노래틀을 빌려 세태(世態)와 인정(人情), 삶의 구석구석까지 두루 찾아내어 시()로써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서얼(庶孼)이라는 생득적(生得的) 지위가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제한하는 질곡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들은 양반 사대부들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사회적 규범과 생활권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의 향유방식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이들이 학문예술의 세계에 탐닉하게 되면서, 시가 가진 예술적 가치를 매우 중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시적 정서가 주정적(主情的) 시어(詩語)를 통해 표면에 노출되기를 꺼려한 대신, 시의 예술적 기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시어의 자과 단련(鍛鍊), 제재(題材)의 선택과 운용, 의상(意象)의 표출방식에 있어 인공적(人工的) 기교(技巧)를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매우 맑지만 과하게 깨끗하다[太淸而過潔]’이라 평가되기도 하였지만, 당송시풍(唐宋詩風)을 의방(擬倣)하려던 당시의 시단에서는 신체(新體)’, ‘신조(新調)’, ‘별재시풍(別裁詩風)’, 혹은 검서체(檢書體)’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박지원(朴趾源)이서구(李書九)는 현벌가(懸閥家) 태생(胎生)이면서도 당대의 사류(士類)와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박지원(朴趾源)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명문 출생이면서도 과거를 통한 관료진출을 미루고 홍대용(洪大容)과 사귀면서 북학론(北學論)을 창도(倡導)하였다. 반골적(反骨的)ㆍ현실비판적 기질이 강했던 그는 한때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몰락으로 당대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의 미움을 사서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세(避世)하기도 하였거니와, 44세에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연행(燕行)을 다녀와서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따라서 연암(燕巖)이 후사가(後四家)와 내밀(內密)한 관계를 맺게 된 이유는 그의 진보적 사상이 서얼출신인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의 그것과 상통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지연(地緣)이 백탑(白塔)을 근거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서구(李書九)는 증령의정(贈領議政) 이원(李遠)의 자제로 사가(四家) 가운데 유일한 적출(嫡出)이었지만 20대에는 관리로서의 영달보다는 학문과 시수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과 백탑을 근거지로 한 시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가 중 가장 어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사가의 주도적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며, 아울러 명문거족의 자제로서 타삼가(他三家)와는 다른 시세계를 보였다. 이덕무(李德懋)가 진경산수도(眞景山水圖)의 시적변용을 꾀하여 당대의 풍속도를 즐겨 취재(取材)하고 회화성 짙은 시작을 남겼으며, 유득공(柳得恭)이 시의 소재를 역사 쪽으로 확대하여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였고, 박제가(朴齊家)가 사회비판이나 북학사상을 핍진하게 시에 담아내었던 것과는 달리 이서구(李書九)는 전통적인 자연시를 신운설(神韻說)의 입장에서 답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백탑시파'는 백탑 서쪽이 이들의 주무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석치 등이 이 모임을 주도하며 '북학사상'을 폈다.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13~1805 순조5, 仲美, 燕巖)

은 명문가(名門家)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과업(科業)에 특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였거니와, 노론(老論) 벽파(僻派)로 몰려 당대의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44세에 연행(燕行)을 하기도 하였다. 말년(末年)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온포(蘊抱)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문장(文章)이다. 율문(律文)보다는 산문(散文)에 승()하여서, 허생전(許生傳)양반전(兩班傳)호질(虎叱)등은 그의 기지(機智)와 풍자정신(諷刺精神)을 돋보이게 하였다.

 

홍재전서(弘齊全書)에서 신박한 걸 좋아하고 기이함에 힘쓴다[好新務奇]’ 하였다고 평한 것은 그에게 패관소품(稗官小品)과 같은 산문이 승()했던 사정을 지적한 언설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연암(燕巖)이 관심을 보였던 서적(書籍)은 청()에서도 금서(禁書)로 지적한 이지(李贄)ㆍ고염무(顧炎武)ㆍ모기령(毛奇齡) 등의 저작(著作)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관에서도 전후칠자(前後七子)의 복고노선(復古路線)을 부정한 원굉도(袁宏道)로 대표되는 공안파(公案派)의 시설(詩說)이었다.

 

다만 그가 말년에 정조(正祖)의 문체순정(文體醇正)에 굴복하여 열하일기(熱河日記)문장으로 장난친 것[以文爲戱]’한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인정하고 과농소초(課農小抄)와 같은 정통(正統) 고문(古文)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결코 연암(燕巖)의 기승(氣勝)한 산문이 폄하(貶下)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연암(燕巖)이 산문에 극승(極勝)하였다는 점은 유명한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운문(韻文) 부분인 명()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반증되지만, 결코 그의 시편이 가볍지 않은 것은 대동시선필운대간행화(弼雲臺看杏花), 회원수원(懷袁隨園), 담원팔영 선삼(澹園八咏 選三), 원조대경(元朝對鏡), 산행(山行), 강거(江居), 노숙구련성(露宿九連城), 도압록강회망용만성(渡鴨綠江回望龍灣城), 체우통원보(滯雨通遠堡), 도중사청(道中乍晴), 만조숙인(輓趙淑人)10여편이 선발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기발한 시재(詩才)가 돋보이는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보기로 한다.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모습이 누구와 비슷했던가?
每憶先君看我兄 아버님 그릴 때마다 형님 얼굴 뵙곤 했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느 곳에서 뵈올까?
自將巾袂映溪行 의관을 갖추고서 시내물에 비추며 걸어가야겠네.

 

대체로 연암(燕巖)의 시작(詩作)에는 사실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애완(哀婉)한 격조(格調)로 선형(先兄)을 그리고 있지만, 특히 입의(立意)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형에게로 이동하고, 형의 모습이 다시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단장한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정감(情感)의 토로(吐露)를 직접적으로 언표(言表)에 나타냄이 없이도 그 애절함을 지극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곰살궂게 다듬지도 않았거니와, 구성의 솜씨도 산문적이어서 기승(氣勝)한 그의 산문(散文)을 운문(韻文)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덕무(李德懋, 1741 영조17~1793 정조17, 懋官, 炯庵雅亭靑莊官嬰處東方一士)

는 멀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의 별자(別子)인 무림군(茂林君)의 후예(後裔)이지만, () 성호(聖浩)와 모()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시세계는 법고(法古)창신(創新)을 결합하고 진심(眞心)과 진상(眞象)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지원(朴趾源)영처시고서(嬰處詩稿序)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덕무(李德懋)이백(李白)두보(杜甫)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옛시인에게 얽매일 까닭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진솔한 생활모습과 정서를 담은 풍속시를 많이 남겼으며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죽지사(竹枝詞)를 남기는가 하면, 세련된 솜씨로 체험적인 염정시(艷情詩)를 보여주었다.

 

이덕무(李德懋) 스스로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일권에서 체법(體法)은 스스로 법()을 법()삼지 않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法自具於不法之中]”고 하여 모방을 배척하고 천연(天然)과 천진(天眞)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개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 하나의 풍격에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여 공안파(公案派)의 초탈(超脫)한 시작(詩作)마저도 시인을 구속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덕무(李德懋) 자신은 엄우(嚴羽)의 묘해투오(妙解透悟)와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에 경사되면서 의고(擬古)와 창신(創新)을 아우르려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평범(平凡)을 거부한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안광(眼光)에 들어오는 일체(一切)의 대상들을 결코 범상(凡常)한 완상물(玩賞物)로 만들지 않았다. 비상(非常)한 진기물(珍奇物)로 제조한 것이 그의 시세계에서 돋보이는 부분들이다. 진솔한 농촌의 생활 풍경을 그린 경물시(景物詩), 지방의 풍물을 사랑으로 바라본 죽지사(竹枝詞), 체험적인 염정시(艷情詩)의 세계를 차례로 보기로 한다.

 

먼저 제전사(題田舍)를 보인다.

 

荳殼堆邊細逕分 콩깍지 더미 곁으로 오솔길은 나뉘어 있고
紅暾稍遍散牛群 아침햇살 퍼지자 소떼들은 흩어진다.
娟靑欲染秋來岫 가을 든 산등성이는 고운 청색으로 물들려 하고
秀潔堪餐霽後雲 비 갠 뒤 구름은 너무 정결하여 먹음직하네.
葦影幡幡奴鴈駭 갈대 그늘 흔들리자 새끼 기러기 놀라고
禾聲瑟瑟婢魚紛 벼잎 스치는 소리에 잔 물고기떼가 야단스럽다.
山南欲遂誅茅計 산 아래에 집 짓고 살고 싶으니
願向田翁許半分 농부에게 반만이라도 빌리자고 해야겠다. 雅亭遺稿1

 

사가시집(四家詩集)에도 이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그가 젊은 시절에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특히 함련(頷聯)은 그 구법(句法)이 노련(老練)하여 노건(老健)이덕무(李德懋)의 시세계를 한눈으로 읽게 해준다. 경련(頸聯)노안(奴雁)’비어(婢魚)’같은 것도 사대부(士大夫)의 시작(詩作)에서는 상상하는 일조차 허락될 수 없는 시어들이다. 미물이나 다름없는 자연물(自然物) ‘()’()’를 꾸미는 데에도 노비(奴婢)’ 인식이 깃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평화롭고 고운 중경(中景), 원경(遠景), 그리고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근경(近景)이 시인의 눈길에 따라 차례로 시인의 향유물이 된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사대부(士大夫)들은 물론 예사 사람들조차 보지 못하는 광경을 보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시인 이덕무(李德懋)에게 속해 있는 권능(權能)이다. 비가 개인 구름의 모습을 가리켜 너무 깨끗하여 먹음직하다고 한 것이 바로 그의 비범(非凡)을 시험한 현장이다.

 

 

다음은 죽지사(竹枝詞) 선연동(嬋娟洞)이다.

 

嬋娟洞艸賽羅裙 선연동의 풀들은 비단치마보다 뛰어나
剩粉殘香暗古墳 남은 분, 향기가 옛무덤에 그윽하네.
現在紅娘休詑豔 현세의 아낙네들 아름다움 자랑하지 마라,
此中無數舊如君 이 속에 무수한 사람 옛날엔 그대 같았네. 대동시선(大東詩選)7.

 

공교롭게도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경잡절(西京雜絶)을 통하여 꼭같이 선연동(嬋娟洞)’을 읊조리고 있으며 이들의 자유분방한 사랑에의 정감(情感)이 죽지사(竹枝詞)에 응축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진솔이야말로 사대부의 시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며, ‘선연동초새라군(嬋娟洞草賽羅裙)과 같은 기교는 이덕무(李德懋)의 비범(非凡)이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다음엔 체험적인 사랑의 시 효발연안(曉發延安)을 본다.

 

不已霜鷄郡舍東 객사(客舍) 동쪽 새벽닭 울음 그치지 않고
殘星配月耿垂空 새벽별은 달을 짝해 하늘에 반짝인다.
蹄聲笠影矇矓野 말굽소리 갓 그림자 몽롱한 들판에
行踏閨人片夢中 꿈 속에서 아가씨를 밟으며 가네. 대동시선(大東詩選)7.

 

기생(妓生)과 부인(婦人)을 제외하고는 이성간(異性間)의 애정(愛情) 교감(交感)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전통사회에서 시인이 염정시를 제작할 때에는 허구적인 추체험(抽體驗)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때 시인은 작중의 화자와 작자가 동일시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사용한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악부(樂府)의 틀을 빌리는 일이며 다음으로는 작자가 시적 정황에 개입하는 것을 억제하느라 최소한 3인칭 시점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작(詩作)을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시인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체험적인 사실을 1인칭 시점에서 시화(詩化)하고 있다. 하루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길을 떠나는 고백적인 염정을 읊조리고 있으면서도 쉽게 비속(鄙俗)함에 떨어지지 않고 아정(雅正)한 격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장처(長處).

 

 

 

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惠風惠南, 泠齋泠庵古芸堂)

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모두 우리나라의 역사에 귀 기울인 흔적을 유감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27세에 이미 그의 숙부 유금(柳琴)이 청() 문단에 내놓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그의 시작(詩作)이 수록되면서 시명(詩名)을 중국에까지 떨쳤으며,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연행(燕行)을 통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청조(淸朝)의 문물(文物)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시작(詩作) 중에서 중국(中國) 문사(文士)들로부터 개별적으로 품평(品評)받은 작품만도 이조원(李調元)으로부터 23,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16수 등 총 97수에 이른다. 특히 반정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재는 재주와 정이 넉넉하고 격률이 독보적이다. 이따금 웅장한 시어를 토로하는 데 등림회고에 이르면 더욱 걸작이 많아 기아(箕雅)속에 편입되더라도 반드시 대가로 추앙되리라.

泠齋, 才情富有, 格律獨高. 時露鯨魚碧海之觀, 至於登臨懷古, 尤多傑作, 在箕雅中, 定推大家. 箋註四家詩2 卷末

 

 

유득공(柳得恭)의 문학이 역사회고(歷史懷古)와 기행(紀行)에 크게 의지했음을 지적한 평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유득공(柳得恭)이 주로 활용했던 시적 소재가 바로 조선의 역사와 풍속, 사적, 인정이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실제로 1000여 수가 넘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작(佳作)으로 꼽히는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등이 이를 입증해준다. 아래에 죽지사(竹枝詞) 서경잡절(西京雜絶)을 보인다.

 

乙密臺西春日曛 을밀대 서쪽으로 봄날은 저무는데
嬋娟洞裏艸如裙 선연동의 우거진 풀 기생 치마 같구나.
可憐今日西游客 가련할손 오늘 여기 서북(西北)에서 노는 나그네,
又斷情膓蘇小墳 또 한번 소소(蘇小)의 무덤 앞에서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이 작품 역시 이덕무(李德懋)선연동(嬋娟洞)과 마찬가지로 기생들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선연동(嬋娟洞)에서 읊은 것이다. ()나라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소소(蘇小)의 연상을 통하여 기생들의 고혼(孤魂)을 젊은 시절의 뜨거운 가슴으로 위로하고 있다. ()보다는 정()을 앞세운 작품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 영조26~1805 순조5, 次修在先修其, 楚亭貞蕤葦杭道人)

는 본관이 밀양이며, 승지(承旨) ()의 서자(庶子)이다. 소년시절부터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1776년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시편이 올라 청()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호평(好評)을 받았다. 1779년에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ㆍ서리수(徐履修) 등과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배수되었으며, 1778, 1790(두 차례), 1801년의 연행을 통하여 대륙의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연행에서 청()의 석학인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과 교유할 기회를 가졌고 돌아와서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박제가(朴齊家)의 시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조원이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그의 문()을 천하의 기문(奇文)이라 하였거니와 시도 역시 기()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초정시고서(楚亭詩稿序)에서 그가 답습을 경계한 시인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박지원(朴趾源)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학고(學古)와 창신(創新)을 아울렀다고 말한 것과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는 천성(天性)과 천기(天氣)를 보존하여 성정을 바르게 펼 것을 주장하였고,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과정을 통해 천진(天眞)을 구현하는 상태 즉 자득적(自得的) 문학세계를 중요시하였다. 때문에 그는 전겸익(錢謙益)의 문학론, 그리고 왕사정(王士禎)의 문학론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참된 시는 각각 작가의 말에서 나온다[眞詩各出自家言]’이라 하여 개성 있는 시작법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에 대한 관심은 격식과 모방을 경계하고 천연의 경지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박제가(朴齊家)의 시세계는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와 중년 이후의 시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초기의 시들이 시인 자신의 시정(詩情)과 갈등(葛藤)을 자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면 후기의 시편에는 사회제도나 문명의 현실을 대상으로 비판의식을 드러낸 것들이 많다.

 

한편, 그 자신이 시서화에 능하여 산수화의 제재를 시화하기도 하고, 원근 구도에 따른 수묵화의 인상으로 시를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반정균이 한객건연집서(韓客巾衍集序)에서 사가(四家)의 시작(詩作) 중에는 경물을 그린 시가 많다고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시선집에 전하는 시편으로는 대동시선(大東詩選)서경(西京(七絶), 백운대(白雲臺)(七絶), 북한문수사(北漢文殊寺)(七律), 서회(書懷)(七律)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젊은 날의 정열로 쓴 죽지사(竹枝詞) 서경(西京은 다음과 같다.

 

春城花落碧莎齊 봄날 성에 꽃 지고 잔디는 무성한데
終古芳魂此地棲 옛부터 고운 넋들 여기에 살고 있네.
何限人間情勝語 인간들의 정겨운 말 어찌 끝이 있으리오만,
死猶求溺浣紗溪 죽더라도 완사계(完紗溪)에서 빠져죽고 싶다 하네.

 

원제는 평양잡절송이무관(平壤雜絶送李懋官)으로 되어 있지만, 이 또한 이덕무(李德懋)선연동(嬋娟洞)유득공(柳得恭) 서경잡절(西京雜絶)과 마찬가지로 기생(妓生)들의 무덤이 있는 선연동(嬋娟洞)을 읊조린 것이다. 그러나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은 그들 특유의 뛰어난 기법으로 정감의 유로(流路)를 절제하고 있으나 사유구닉완사계(死猶求溺浣紗溪)’에서 보여준 박제가(朴齊家)의 정열은 누구보다도 직절하고 강열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서구(李書九, 1754 영조30~1825 순조25, 洛瑞, 惕齋薑山席帽山人)

역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인연으로 후세에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와 더불어 후사가(後四家)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향유한 문학세계는 이들과 함께 묶여지지 않는다.

 

그는 본관이 전주이며, 중종(中宗)7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宣祖)12자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이다. 나머지 삼가(三家)와 달리 적출(嫡出)인 그는 20대에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시활동을 벌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료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사환(仕宦) 중에도 늘 은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저술로는 척재집(惕齋集)강산초집(薑山初集)이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척재자술(惕齋自述), 척재병거록(惕齋幷居錄), 탑좌종정지(塔左從政志)등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는 특별한 사승(師承)관계 없이 홀로 양덕방(陽德坊) 고가(古家)에 있는 만고장(萬古藏)의 가장서(家藏書)를 읽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관례(冠禮)를 올릴 때 빈객(賓客)으로 초빙된 사람이 김수항(金壽恒)5자인 창집(昌緝)의 아들 김용겸(金用謙)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가 일찌기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의 영향을 수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0대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환로에 나서면서부터는 심환지(沈煥之)ㆍ서용보(徐龍輔) 등과 사귀었다. 박지원(朴趾源)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과정록(過庭錄)125에 의하면, 그는 가장 어리면서도 재기가 뛰어나고 식견이 많아서 연암(燕巖)이 아꼈다고 한다[薑山, 年最少, 而潁拔出群, 沈靜有識量, 先君愛重之].

 

그러나 그가 타삼가(他三家)와 함께 20대의 왕성한 시절에 이우보인(以友輔仁)의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서 타삼가(他三家)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시도와는 달리 16세기 사림에 비근한 강호자연의 시와 은거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세계는 백탑동인시기와 그후 사환 및 은둔의 시기로 대별될 수 있지만, 1778년 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강산초집(薑山初集)에는 560여수의 시편이 전하는 반면, 그의 시문을 총집한 척재집(惕齋集)에는 오히려 그보다 적은 544수의 시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20대의 젊은 시절에 시작(詩作)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서구(李書九)의 시세계에 대한 평으로는 그의 영직(榮職)과 성망(聲望)에 걸맞게 다채롭다. 사가시집(四家詩集)薑山諸作能工 …… 元本陶謝而時泛觴於儲孟之間.”이라든가, 청비록(淸脾錄)薑山爲詩, 心摹力追, 登堂入室 …… 爲東國魚洋.”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로써 보면 그가 왕사정(王士禎) 및 도잠(陶潛)ㆍ사령운(謝靈雲)ㆍ저광희(儲光羲)ㆍ맹교(孟郊) 등 중국시인에게서 영향받았음을 간취할 수 있으며, 그의 시가 무척 공교로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서구(李書九) 역시 우리나라 전래의 시가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그가 이보온(李普溫)에게 탄핵당한 뒤 영평(永平)에 은거할 시기에 내놓은 호산음고(湖山吟稿)에 서()를 쓴 유득공(柳得恭)의 다음 기록, “出其所著, 湖山吟稿, 一卷以示之, 率皆漁歌樵唱.”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에 의하면 그 역시 우리의 풍속과 민간 시가에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실제로 그의 시편들 중에 수표교절구(水標橋絶句), 구마(驅馬), 누원도중(樓院道中), 우부이금언(偶賦二禽言)등은 이를 입증해주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그의 시작(詩作) 수법은 객관적 경물을 묘사하는 데 승하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서구(李書九)의 시세계가 왕유(王維)의 자연시와 한정(閑情)에 닮아가는 모습은 그가 경중한(景中閑)과 은거(隱居)를 갈구하였던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후대의 시선집에 전하는 시편으로는 대동시선효기관창(曉起觀漲), 자백운계부지서강소와송음(自白雲溪復至西岡少臥松陰), 촌모(村暮)(이상 五絶) 산행(山行)(), 조종옥동소문입계상회인(早從屋東小門立溪上懷人), 추일전원(秋日田園), 수동도중(水洞道中)」 「한야증이산인덕화(寒夜贈李山人德和), 망압구정(望鴨鷗亭)(이상 七律) 등이 뽑혀 있다. 이 중에서 자백운계부지서강소와송음(自白雲溪復至西岡少臥松陰)을 보기로 한다.

 

讀書松根上 卷中松子落 솔 뿌리 위에서 책을 읽노라니 책 위에 솔방울이 떨어진다.
支筇欲歸去 半嶺雲氣白 지팡이 짚고서 돌아가려니 산허리에 구름이 희구나.

 

간결하고 청아한 묘사 때문에 절로 탈속한 분위기가 이는 시편이다. 고담(古澹)하고 청신(淸新)한 정조(情調), “언유진이의무궁 미재신함지외(言有盡而意無窮, 味在酸鹹之外).”의 신운(神韻)을 고집한 왕사정의 영향이 보이는 듯하다.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하였던 이서구(李書九)는 시를 쓸 때에도 역시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묘사의 운치를 중시하여 마치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경지를 이루어 놓곤 한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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