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기본적인 성격은 조선초기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편찬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형식적인 의미에서 보면, 조선초기에 이르러 전시대(前時代)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대관찬사업(大官撰事業)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라는 것이며,
둘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소단(騷壇)이 이때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이르러 그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신라말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126가(家)의 각체시(各體詩) 503수를 정선(精選)하여 7권(卷) 1책(冊)으로 간행한 시선집(詩選集)이다. 현존하는 『청구풍아(靑丘風雅)』로는 국립도서관소장 갑진자본(甲辰字本)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필사본이 유전(流傳)하고 있으나 갑진자본(甲辰字本)은 창고(蒼古)하여 인묵(印墨)이 선명치 않은데다가 훼손된 부분이 많으며 여타(餘他)의 필사본【高大本 등】들도 완전하게 보존된 것을 얻어 보기 어렵다.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간행 시기는 갑신자본(甲辰字本)에 있는 편자의 서문(成化 9년, 성종 4년)과 최숙정(崔淑精)의 발문(跋文, 성종 6년)에 따라 일단 성종 초로 추정할 수 있으나 김종직(金宗直)의 연보에 따르면 1488(성종 19년)에 『동문수(東文粹)』와 함께 간행된 것으로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문선집(詩文選集)의 편찬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말하기 어렵지만, 『동문선(東文選)』 서문의 언급으로 보아 고려중ㆍ말엽에 김태현(金台鉉)이 편집(編輯)한 『동국문감(東國文鑑)』이 그 선구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시(詩)만 따로 초선(抄選)한 시선집(詩選集)의 편찬 작업도 고려말기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 『청구풍아(靑丘風雅)』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룩된 초기 성과 가운데 하나다. 서문(序文)의 다음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시는 김태현(金台鉉)ㆍ최해(崔瀣)ㆍ조운흘(趙云仡) 세 분이 각각 선집(選集)을 남기고 있다 (중략) 이에 짐짓 이 세 분이 편찬한 것에 따라 그 뛰어난 것을 선발하고 또 충선왕(忠宣王) 이후 지금까지 고람(考覽)할 만한 유고(遺稿) 중에서 고시(古詩)ㆍ율시(律詩) 도합 300여수를 뽑았다. 경인년(庚寅年)에 사국(史局)의 자리를 이어받아 최숙정(崔淑精)과 더불어 관(館)을 검색하던 중 오래된 상자 속에서 변계량(卞季良) 등 여러 분이 수집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을 얻어 또 100여편을 수록하였다. (후략)
東人之詩, 金快軒ㆍ崔猊山ㆍ石磵三老各有選集 (中略) 於是, 姑就三老所撰, 而拔其尤者, 又採忠宣以下, 至于今日, 遺藁可攻者, 合古律詩三百餘篇. 庚寅歲, 承乏史局, 與國華檢館中, 舊篋得春亭諸公裒集未成之書, 又錄百餘篇. (後略)
여기서 쾌헌(快軒)은 김태현(金台鉉)이며, 예산(猊山)은 최해(崔瀣, 1287~1340), 석간(石磵)은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이다. 예산(猊山)과 석간(石磵)의 선집(選集)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아마 이는 윗 예산(猊山)의 편저(編著)로 알려진 『동인지문(東人之文)』(詩文選集)과 석간(石磵)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세 분이 편찬한 것에 따라[三老, 各有所撰].’라 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최해(崔瀣)의 편서(編書)와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사이에도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최해(崔瀣)의 「동인지문서(東人之文序)」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충렬왕(忠烈王) 때까지의 명가(名家) 중에서 시(詩) 약간을 뽑아 오칠(五七)이라 하고 문(文) 약간을 천백(千百)이라 하고 변려문(騈儷文) 약간을 사육(四六)이라 하고 이를 합쳐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 하였다고 한다.
於新羅崔孤雲, 以至忠烈王時凡名家者, 得詩若干首, 題曰: 「五七」; 文若干首, 題曰「千百」; 騈儷之文若干首, 題曰「四六」, 摠而題其目曰: 『東人之文』
이로써 보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동인지문(東人之文)ㆍ사육(四六)』은 이때 편찬한 『동인지문(東人之文)』 가운데 하나인 사육(四六)인 것으로 보이며, 이 밖에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의 잔권(殘卷)이 최근 발견되었고 『동인지문(東人之文)ㆍ천백(千百)』은 실전(失傳)된 것 같다.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과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과 『동문선(東文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운필(呂運弼)이 쓴 논문인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의 면모와 『동문선(東文選)』과의 관련 양상【『한국한시연구』 3, 태학사, 1995】을 참고 바란다.
현존하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는 ‘최해가 비점(批點)했고 조운흘이 정선했다[崔瀣 批點, 趙云仡 精選].’으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선자(選者)를 먼저 적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서 편자인 조운흘(趙云仡)에 앞서 비점(批點)을 가한 최해(崔瀣)의 이름을 먼저 적고 있는 것은 이 책에 있어서 최해(崔瀣)의 비중이 조운흘(趙云仡)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최해(崔瀣)와 조운흘(趙云仡)의 선후관계다. 최해(崔瀣)의 졸년(卒年)에 조운흘(趙云仡)은 겨우 아홉살 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석간(石磵)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예산(猊山)이 비점(批點)을 가한 것이 아니라 예산(猊山)이 초선(抄選)하여 비점(批點)을 한 어떤 시선집(詩選集)을 참고하여 다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편집하고, 예산(猊山)이 비점(批點)을 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로 예상되는 예산(猊山)의 『동인지문(東人之文)』이 석간(石磵)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과 유관(有關)하리라는 추측을 가능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서 보면, 『청구풍아(靑丘風雅)』는 김태현(金台鉉)ㆍ최해(崔瀣)ㆍ조운흘(趙云仡) 등이 편찬한 시선집(詩選集)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등의 미완성 구고(舊藁)가 기본이 된 ‘선집(選集)의 선집(選集)’이라 할 것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동문선(東文選)』이 간행되었으며,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大東詩林)』이 이보다 뒤에 나온 듯하나 이것은 함께 논할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은 방대한 관찬서(官撰書)로서, 또 시문(詩文)의 총집(總集)으로서 이것이 갖는 자료집(資料集)으로서의 의미는 막중하지만, 그러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동문수(東文粹)』(文選集)와 더불어 편자(編者)의 취향과 조감(藻鑑)에 따라 정선(精選)한 사찬서(私撰書)이고 또 이것은 시선집(詩選集)이라는 점에서 양자(兩者)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서(兩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제가(諸家)의 기록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 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삼문(成三問)이 살았을 때 우리 나라의 문(文)을 편집하여 『동인문보(東人文寶)』라 하였으나 다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김종직(金宗直)이 뒤따라 이를 편성하여 『동문수(東文粹)』라 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은 문(文)의 번화한 것을 미워하여 다만 온자(醞藉)한 문(文)만 취했다. 비록 규범에 마음을 썼으나 나른하고 힘이 없어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가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비록 시가 문(文)과 같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고집불통의 편견이냐?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것은 유취(類聚)요, 선(選)한 것이 아니다.
成謹甫在時 編東人之文名曰東人文寶 未成而死 金季醞踵而成之 名曰東文粹 然季醞專惡文之繁華 只取醞藉之文 雖致意於規範 而萎薾無氣 不足觀也 其所撰靑丘風雅 雖詩不如文然 詩之稍涉豪放者 棄而不錄 是何膠柱之偏 至如達城所撰東文選 是乃類聚 非選也.
두 책의 성격과 김종직(金宗直)의 문학 세계까지도 함께 논하고 있다.
책명 | 동문선(東文選) | 청구풍아(靑丘風雅) |
편찬자 | 서거정 | 김종직 |
편찬 주체 | 관찬(官撰) | 사찬(私撰) |
특징 | 과거 시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함 | 호방한 것들은 수록하지 않아 모인 시들이 힘이 없음. |
그리고 남용익(南龍翼)과 홍만종(洪萬宗)은 그 속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남용익(南龍翼)은 『기아서(箕雅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선(東文選)』은 널리 취하였지만 정선(精選)하지 아니하였으며 『속동문선(續東文選)』은 수재(收載)한 것이 많지 않다.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정선(精選)하였지만 널리 취하지 않았으며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어디서 취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東文選博而不精, 續則所載無多. 靑丘風雅精而不博, 續則所取不明.
홍만종(洪萬宗)은 「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은 한 유취(類聚)이니 또한 선법(選法)을 따른 것이 아니다. 소세양(蘇世讓)의 『동문선(東文選)』은 취사(取舍)가 불공평한 것으로 보아 자못 애증(愛憎)에 기인한 것 같다.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다만 한 것만 취하여 기상이 뛰어난 것은 빠뜨렸다. 유근(柳根)의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버리고 취(取)한 것이 분명치 않아 그 요령을 얻지 못했다.
徐四佳東文選, 卽一類聚, 亦非選法. 蘇暘谷續東文選, 取舍不公, 頗因愛憎. 金佔畢靑邱風雅, 只取精簡, 遺其發越. 柳西坰續靑邱風雅, 與奪不明, 不得其要領.
두 속집(續集)의 성격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로 보면 『속동문선(續東文選)』과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각각 정편(正篇)에 이어 그 이후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점에서 속편(續篇)의 의미가 있을 뿐 정편(正篇)의 성격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는 정편(正篇)에서 볼 수 있는 전집적(全集的)인 성격은 이미 상실되고 있으며, 특히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같은 사찬(私撰) 선집(選集)의 경우, 다른 편자에 의하여 그것을 속보(續補)한다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유근(柳根)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남용익(南龍翼)과 홍만종(洪萬宗)이 각각 지적한 바와 같이 ‘어디서 취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所取不明]’, ‘그 요령을 얻지 못했다[未得要領]’한 것으로 사실상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속보(續補)할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청구풍아(靑丘風雅)』는 편자 미상인 여러 종의 필사본【3卷 3冊, 7卷 1冊本 등】이 유전(流傳)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근(柳根)의 속편(續篇) 외에도 또 다른 이종(異種)이 있는 듯하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청구풍아(靑丘風雅)』도 조선후기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이종(異種)의 인본(印本)이 있는 바, 『청구풍아(靑丘風雅)』라는 이름이 이미 보통명사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당시의 소단(騷壇)이 아직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을 선관(選觀)의 편향성을 지적한 적평(適評)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시가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인의 비평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나 신흠(申欽)이 「선사사(仙槎寺)」의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 학(鶴)은 신라시대의 일산에 번득이고 용(龍)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다. |
구(句)를 들어 그의 ‘방달(放達)’ 또는 ‘방원(放遠)’함을 칭도(稱道)한 것이라든가,
허균(許筠)이 「신륵사(神勒寺)」【「夜泊報恩寺下 贈住持牛師 寺舊名神勒或云甓寺 睿宗朝改創極宏麗賜今額」】의
上方鐘動驪龍舞 | 상방(上方)의 종이 울리니 여룡(驪龍)이 춤을 추고 |
萬竅風生鐵鳳翔 | 일만 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니 철봉(鐵鳳)이 난다. |
을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하다고 하여 우주에 기둥을 받치는 구(句)라 하고
또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
桃花浪高幾尺許 | 도화(桃花) 뜬 물결이 몇자나 높았길래 |
狠石沒頂不知處 | 한(狠)은 꼭지가 잠기어 있는 곳을 모르겠네. |
兩兩鸕鶿失舊磯 | 쌍쌍이 나는 물새는 옛집을 잃고 |
啣魚却入菰蒲去 | 고기를 물고 도리어 수초 사이로 들어가네. |
를 가장 높은 것이라 평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 ‘엄중방원(嚴重放遠)’한 김종직(金宗直)의 시세계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가 그 선시(選詩) 과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여 이룩된 것이 『청구풍아(靑丘風雅)』이다. 때문에 그는 웅혼(雄渾)ㆍ방원(放遠)으로 일세(一世)에 시명(詩名)을 드날린 이규보(李奎報)ㆍ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같은 시인의 시작(詩作) 가운데서도 호방(豪放)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온 작품들은 선발(選拔)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려(婉麗)ㆍ신경(新警)한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려(婉麗)’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온 이규보(李奎報)의 「하일즉사(夏日卽事)」도 『청구풍아(靑丘風雅)』에는 보이지 않는다.
輕衫小簟臥風櫺 | 댓잎자리 가벼운 적삼으로 바람난간에 누웠다가 |
夢斷啼鶯三兩聲 | 꾀꼬리 울음 두세 소리에 꿈길이 끊어졌네. |
密葉翳花春後在 | 나무 잎에 꽃이 가리어 꽃은 봄 뒤에도 남아있고 |
薄雲漏日雨中明 |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 나와 비 속에서도 밝구나. |
이 시(詩)는 읽는 이로 하여금 산뜻한 기분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며, 그의 칠언절구(七言絶句)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어 왔기 때문에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한 역대 시선집(詩選集)에선 빼지 않고 수록하고 있지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다만, 횡방(橫放)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규보(李奎報)의 시편(詩篇) 중에서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선입(選入)되고 있는 것으로는 칠언고시(七言古詩)인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를 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시도 그 횡방(橫放)한 기상(氣象)에 앞서 전편(全篇)에 넘치는 부려(富麗)한 여유가 그의 안광(眼光)을 흡족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정몽주(鄭夢周)의 경우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을 보여 준다. 칠언율시 가운데서도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나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 「동래역 시한서장상질(蓬萊驛 示韓書狀尙質)」과 같은 작품은 모두 ‘질탕호방(跌宕豪放)’한 작품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은 것이지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한 편도 뽑아주지 않았다.
후세에까지 절창(絶唱)으로 불리어 온 것 중에서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선입(選入)된 것은 「강남곡(江南曲)」(七絶)과 「여우(旅寓)」(五律) 정도이지만 이 작품은 호쾌(豪快)와 풍류를 함께 읽을 수 있는 명작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그의 시가 전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서 나왔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오히려 심울(沈鬱)ㆍ엄중(嚴重)한 두시(杜詩)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시세계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후대의 시선집(詩選集)에서 당(唐)을 그 선발(選拔)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도 시원적(始源的)으로는 김종직(金宗直)에게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제언(提言)이 결코 무용(無用)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를 여기서 찾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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