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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3. 라말려초시의 성격과 만당의 영향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3. 라말려초시의 성격과 만당의 영향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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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성격과 만당(晚唐)의 영향

 

 

1.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일반적 성격

 

 

나말여초는 왕조사(王朝史)에서도 서로 겹치는 기간이 18년이나 되지만, 문학사의 현실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분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한시문학(漢詩文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역사 단계라는 점에서 한 데 묶여질 수 있는 공통성을 가진다. 신라말에 당()에 들어가 직접 중국시를 체험하게 되는 고려 초기 일군의 시인들이 당시의 풍상(風尙)만당(晩唐)을 배운 것이 이 시기 한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동문선서(東文選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사실을 확인케 해주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읽어보면 그 격률(格律)이 무려 세 번이나 변()했다. 신라말ㆍ고려초는 오로지 만당(晩唐)을 답습했으며 고려(高麗) 중엽(中葉)에는 오로지 동파(東坡)를 배웠다. 그 말세(末世)에 이르러 익재(益齋) 등 여러분이 구습(舊習)을 조금 바꾸어 아정(雅正)하게 재단(裁斷)함으로써 조선조의 문명(文明)에 이르러서도 그 궤도(軌道)를 그대로 따랐다.

得吾東人詩而讀之, 其格律無慮三變. 羅季及麗初, 專習晚唐, 麗之中葉, 專學東坡. 迨其叔世, 益齋諸公, 稍變舊習, 裁以雅正, 以迄于盛朝之文明, 猶循其軌轍焉.

 

 

나말의 유학생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들어갈 당시에 당()도 이미 국세(國勢)가 쇠미해진 당말(唐末)이었으므로 이들이 만당(晩唐)을 배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당()을 배우면서도 바로 앞 시기의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뛰어넘어 오히려 기려(綺麗)한 육조시(六朝詩)에 관심을 보이었으며 그들의 시작(詩作)에도 육조풍(六朝風)이 농후하다.

 

물론 육조 시대의 모범 문장집이라 할 수 있는 문선(文選)이 태학(太學)의 교재로서 또는 과시(科試)의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었으므로 문선(文選)이 당시 문학 수업의 교과서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의 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적 삼국시대(三國時代) 중엽 이후에는 공용문서(公用文書)가 다 문선(文選)을 모방하였는데 임강수(任强首)최치원(崔致遠) 같은 이가 그 가운데서 두드러진 자다. 고려초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였으나 명신(名臣)들의 장주(章奏)와 비문(碑文) 가운데는 왕왕 양한(兩漢)의 기미(氣味)가 있어 후세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그 말세에 이르러 익재(益齋)가정(稼亭)목은(牧隱) 등 여러분이 고문(古文) 신사(新辭)를 창도하여 세상에 크게 울렸다.

在昔, 三國中葉以後, 公用文書, 皆放文選, 如任强首崔文昌, 其顯者也. 至麗初猶然而名臣章奏及碑版之作, 往往有兩漢氣味, 非後世所及. 及其季世, 益齋稼亭牧隱諸公, 倡爲古文新辭, 大鳴於世.

 

 

모두 문선(文選)의 문체(文體)를 익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산문문장(散文文章)이 대부분 변려문(騈儷文)으로 채워져 있는 사실이 전적으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관심과 취향(趣向)의 소재다.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대표작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登臨暫隔路岐塵 높은 곳에 올라서 잠깐 동안 속세와 멀어지는가 싶더니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되씹어 보니 한이 더욱 새롭구나.
畫角聲中朝暮浪 아침 저녁 화각(畵角) 소리에 물결은 흘러만 가고
靑山影裏古今人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옛 사람도 있고 지금 사람도 있네
霜摧玉樹花無主 옥수(玉樹)에 서리 치니 꽃은 임자 없고
風暖金陵草自春 금릉(金陵) 땅 따뜻하니 풀은 혼자 봄이로다.
賴有謝家餘境在 사씨가(謝氏家)의 남은 경치 그대로 살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 오래도록 시객(詩客)으로 하여금 정신 상쾌하게 하네.

 

봄을 맞는 금릉(金陵) 땅의 서정을 사조(謝眺)로 대표되는 사씨일가(謝氏一家)의 여경(餘景)에다 접속시키고 있다.

 

최승우(崔承祐)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송진책선배부빈주막(送陳策先輩赴邠州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禰衡詞賦陸機文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의 문()으로
再捷名高已不群 두 번이나 급제하여 이름 이미 높았도다.
珠淚遠辭裴吏部 구슬 같은 눈물로 배리부(裵吏部)를 떠나와
玳筵今奉竇將軍 대연(玳筵)에서 오늘은 두장군(竇將軍)을 받들겠도다.
尊前有雪吟京洛 술독 앞에 눈 있을 땐 서울에서 시()를 읊었는데
馬上無山入塞雲 말에 올랐을 땐 산이 없어 변방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從此幕中聲價重 이로부터 막중(幕中)에는 명성이 무거울지니
紅蓮丹桂共芳芬 문무(文武)가 같이 만나 방향(芳香)을 함께 하리라.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 같은 문장(文章)의 솜씨로 두번씩이나 진책(陳策) 선배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칭송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치원(崔致遠)은 고병(高騈)에게 올려 바친 칠언기덕시(七言記德詩) 30수중 설영(雪詠)과 같은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五色毫編六出花 오색(五色)붓으로 눈을 그려
三冬吟徹四方誇 삼동(三冬)에 읊어대어 사방(四方)에 자랑했네.
始知絶句勝聯句 비로소 알겠거니 절구(絶句)가 연구(聯句)보다 더 나은 것을
從此芳名掩謝家 이로부터 꽃다운 이름 사씨가(謝氏家)를 무색케 하리라.

 

고병(高騈)의 시()를 추어 올리는 헌시(獻詩)에서조차도 그 기준이 사씨일가(謝氏一家)와 대비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또 그는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제 잠깐 일위(一尉)를 그만두고 삼편(三篇)으로 응시(應詩)하려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하기를 원했으며 또 은거하기를 꾀하여 홀로 산림(山林)에 의지하여 다시 옛글을 열람하였습니다. 날마다 시()를 익혔으므로 우눌(虞訥)의 꾸짖음에도 피하지 않았으며 몇년 동안이나 부()를 지었으므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업을 닦아, 탁마(琢磨)하여 그릇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 今者乍離一尉, 欲應三篇. 更願進修, 且謀退縮, 獨依林藪, 再閱丘墳. 課日攻詩, 虞訥之𧥮訶无避, 積年著賦, 陸機之哂笑何慙, 候其敦閱致功, 琢磨成器……

 

 

스스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개의치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육기(陸機)의 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육기(陸機)는 그의 문부(文賦)에서 여러가지 문학이론을 배합하고 있거니와 ()는 정()을 추구하여 무늬 놓인 비단처럼 정교해야 한다[詩緣情而綺靡].’로 요약되는 그의 지론은 정서와 심미적 성격을 함께 드러내 보인 문학론의 압권(壓卷)이다.

 

이로써 보면 기려(綺麗)한 육조시(六朝詩)가 나말여초의 시인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우리나라 한시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것이 당말(唐末)이기 때문에 당시의 풍상(風尙)만당(晚唐)을 받아들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육조(六朝)의 기려(綺麗)만당(晩唐)의 기미(綺靡)가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수사기교에 용공(用工)할 수 밖에 없는 습작과정의 입당(入唐) 유학생들이 육조(六朝)의 장식미에 쉽게 영합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초기의 습작 과정에서부터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배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이후의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대체로 그러하다 또 시()를 숭상하는 경향에 있어서도 바로 전시기(前時期)의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시()의 내질(內質) 역시 만당(晩唐)과 그 이전의 당시(唐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두보(杜甫)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의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치력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시()에도 반영되고 있지만, 만당(晩唐)의 시인들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큰 뜻이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으며 분명한 것은 시를 짓는 즐거움 그것만이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당(晩唐)을 배운 당시의 시인들이 성당(盛唐)을 건너 뛰고 스스로 육조시(六朝詩)에 근접하고 있는 까닭을 여기서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형(詩型)의 선택에 있어서는 대체로 칠언(七言)이 우세하며 특히 율시(律詩)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최치원(崔致遠)의 경우에도 작품의 전체에서 보면 칠언절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명편(名篇)으로 알려진 작품 가운데는 칠언율시가 많다. 우리나라 한시가 일반적으로 절구(絶句)보다는 율시(律詩), 남용익(南龍翼) 편찬(編纂)기아(箕雅)서문(序文)을 참조해보면 오언(五言)보다는 칠언(七言)에 명작(名作)이 많은 것과 동궤(同軌)의 현상이다[七言多於五言者 詩家用功極於七字律 而五字絶則工者絶無故也].

 

물론 만당(晩唐)의 명편(名篇) 가운데는 절구가 많다. 특히 만당(晩唐)의 풍류를 한 눈으로 읽게 하는 두목(杜牧)의 시작(詩作)을 비롯하여, 정곡(鄭谷)ㆍ고병(高騈)ㆍ온정균(溫庭均)ㆍ위장(韋莊)ㆍ나은(羅隱)ㆍ장비(張泌) 등에게 있어서도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와 시가 함께 쇠미해진 만당(晩唐)에서 장편(長篇)을 뽑아낼 저력이나 여유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만당(晩唐)의 섬교(纖巧)가 단형(短型)의 절구를 즐겨 선택한 것도 오히려 자연한 추세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존하는 나말여초시의 대부분이 입당유학생들의 초기작이거나 또는 그 기반 위에서 성립된 여조시(麗朝詩)의 창시자들의 것이고 보면, 시를 익히는 습작과정에서 직절(直截)한 절구 형식으로 명편(名篇)을 제작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대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작자 자신을 회한(悔恨)하고 있거나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강개(康槪)와 비수(悲愁)를 섬세한 미감으로 표현하려는 고심(苦心)을 읽을 수 있으나 시에 몰입함에 있어 대체로 시야가 좁아 미소(微小)한 부분 묘사에서 화미(華美)를 보여 줄 뿐이다. 전편(全篇)을 통하여 전고(典故)를 과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기도 하지만, 의사(意思)를 운반하는 기력이 섬약(纖弱)하여 처음의 긴장이 중도에서 파쇄(破碎)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때문에 용공(用功)한 흔적은 역력하지만 형식과 내용이 긴절(緊切)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어, 염려(艶麗)한 서정을 노래한 작품에서는 특히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 작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1) 최치원(崔致遠)과 라말(羅末)의 유학생들

 

최치원(崔致遠)이 당()에 유학할 당시에는 이미 유학생의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 가운데서 후세까지 이름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불과 10여인이며 이들 가운데서도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최승우(崔承祐)ㆍ박인범(朴仁範)ㆍ최언위(崔彦撝, 仁滾) 등이 있을 뿐이다. 특히 최언위(崔彦撝)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와 더불어 삼최(三崔)’로 불리운 문장가로서 고려가 건국한 뒤에도 문한(文翰)의 임()을 도맡아 궁전 누각의 액호(額號)를 모두 그가 선정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문자들 중 전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6(1337)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십초록(十鈔錄)(夾注名賢十鈔詩)에 그들의 시편을 전하고 있는 최광유(崔匡裕)최승우(崔承祐)ㆍ박인범(朴仁範) 등이 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우리나라 시사(詩史)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대부분 고려초까지도 생존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최승우(崔承祐)가 여초(麗初)에 문장으로 그의 행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조(麗朝)에서의 발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최치원(崔致遠, 857 憲安王 1~?, 孤雲海雲)

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이상의 것이 없지만, 자신이 쓴 여러 편의 문장을 통하여 보다 상세한 이력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계는 성골(聖骨)ㆍ진골(眞骨) 다음의 귀족계급인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며 아버지 견일(肩逸)과 종제(從弟) 언위(彦撝), 종질(從姪) 광윤(光胤, 彦撝) 등이 모두 당대의 문장가였던 것을 보면 최치원(崔致遠)은 문장가(文章家)의 가문에서 또 문장(文章)이 나온 셈이다. 그는 12세에 입당(入唐)하여 18세에 빈공(賓貢)으로 급제하고 이로부터 10년뒤 28세 되던 해에 환국(還國)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것들은 모두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46에 실린 동년(同年) 고운(顧雲)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이란 증별시(贈別詩)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권중(卷中) 20을 따른 것이다. 현재까지 추적된 그의 마지막 행적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쓴 것으로 알려진 천우(天祐) 오년(五年, 孝恭王 12, 908)까지이며 이는 그의 나이 52세 때다. 김혜숙(金惠淑)이 쓴 최치원(崔致遠)의 시문(詩文) 연구(研究)에는 53세로 정리되고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저작은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과 환국(還國) 이후에 저술한 약간의 시문(詩文)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대부분 재당(在唐)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며 현존하는 계원필경(桂苑筆耕)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계원필경(桂苑筆耕)의 서문에 따르면 그가 고병(高騈)의 필연(筆硯)을 담당한 4년 동안에 지은 글만 해도 1만여수가 넘는다고 하였으며 그 이전의 수학기간에도 각체(各體)의 시작(詩作)이 수권(數卷)에 이르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습작기의 시문(詩文)은 대부분 폐기하고 그 정화(精華)만 모은 것이 계원필경(桂苑筆耕)임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이르러 여러 차례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이 간행되어 국내외 문헌에 산재(散在)해 있는 유문(遺文)의 수습이 일단 마무리된 듯하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많은 시문(詩文)을 수록하고 있는 국역고운선생문집(國譯孤雲先生文集)에 따르면 현전하는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은 시() 115, () 353편으로 집계된다. 우리나라 문집의 대부분이 시로써 채워져 있는 사실에서 보면, 최치원(崔致遠)의 경우는 이와 달리 문()이 시()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며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도 산문(散文)이었던 것 같다. 이규보(李奎報)가 그의 백운소설(白雲小說)3에서 다음과 같이 쓰며 문장(文章) 쪽을 높이 산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은 천황(天荒)을 깨치는 큰 공()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두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 「황소격(黃巢檄)과 같은 것은 비록 중국의 서적에 등재(謄載)되지 않았지만 …… 귀신을 울리고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시()는 그렇게 높지 않으니 어찌 그 중국에 들어간 것이 만당(晩唐) 이후이기 때문에 그러하겠는가?

崔致遠孤雲, 有破天荒之大功, 故東方學者, 皆以爲宗 …… 如黃巢檄一篇, 雖不載於中國書籍 …… 如非泣鬼驚神之手, 何能至此? 然其詩不甚高, 豈其入中國, 在於晩唐後故歟?

 

 

이밖에도 최치원(崔致遠)의 시문평(詩文評)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비록 시구(詩句)에 능하지만 뜻이 정밀(精密)하지 못하며 비록 사육문(四六文)에 공교하지만 말이 정제되지 않았다.

我國文章, 始發揮於崔致遠, 雖能詩句, 意不精, 雖工四六, 而語不整.

 

 

그의 시문이 수식에 치중하고 있음을 간접으로 시사하고 있거니와 그의 붓 끝에 완전한 시인이나 문인이 일찍이 있은 일이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중기의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1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최고운(崔孤雲) 학사(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서도 또한 정곡(鄭谷)ㆍ한악(韓偓)과 동류(同流)라 대체로 천박(淺薄)하여 중후(重厚)하지 아니하다.

崔孤雲學士之詩, 在唐末亦鄭谷韓偓之流, 率佻淺不厚.

 

 

그의 시를 만당(晩唐)의 부박(浮薄)과 동류(同流)의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청구풍아(靑丘風雅)기아(箕雅)대동시선(大東詩選)등 역대의 중요 시선집에 29수나 선발되고 있어 개산시조(開山始祖)로서의 면모가 약연(躍然)하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추야우중(秋夜雨中)(五絶)을 비롯하여 임경대(臨鏡臺)(七絶), 증금천사주인(贈金川寺主人)(七絶), 우강역정(芋江驛亭)(七絶), 증지광상인(贈智光上人)(五律), 야증악관(夜贈樂官)(五律), 수양섬수재(酬楊瞻秀才)(七律), 화장교(和張喬)(七律), 강남녀(江南女)(五古) 등은 대부분 20대 재당(在唐) 시절의 작품이지만 전기(前記)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으며, 이밖에도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七律), 제가야산(題伽倻山)(七絶)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외면을 당했지만 국내외에서 자주 화제에 올랐던 작품이다.

 

추야우중(秋夜雨中)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제가야산(題伽倻山)을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추야우중(秋夜雨中)은 다음과 같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 어디에도 알아 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창밖엔 깊은 밤비 내리는데 등불 아래 천만리 떠나간 마음.

 

한시에서는 흔히 제목을 먼저 읽으라고 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다시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가을과 밤과 비의 만남이 포개어져 화려한 꿈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거세되고 있다. 때문에 그가 힘들여 익혀온 부화(浮華)한 수사의 솜씨도 엄두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1에서 이 시를 가장 마음에 들어한 것도 이 시의 아려(雅麗)를 높이 산 것인지 모른다[一絶最好].

 

창과 등불이 어울리어 한적한 추야장(秋夜長)의 분위기를 끌어냄직도 하지만 그러나 만리심(萬里心)’에 이르러 시인의 모든 것은 끝나고 황량만이 있을 뿐이다. 흔히 절구(絶句)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에 끌리어 만리나 떨어진 타국에서 고국을 그린 작품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환국할 무렵의 신라는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난정(亂政)으로 국운이 이미 기울어지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에게 구국에의 의지나 현실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이미 문제 밖에 있었다.

 

정작 그가 장안여사(長安旅舍)에서 지은 장안여사여우신미장관접린유기(長安旅舍與于愼微長官接隣有寄)에서는, 알아주는 이 없는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타향소지기(他鄕少知己)’로 나타내고 있다. 장차 고려가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을 예언했다는 전언(傳言)도 방증자료로서는 충분한 것이다. 계원필경(桂苑筆耕)에도 이 추야우중(秋夜雨中)은 들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예료(豫料)되는 주제도 작자의 온포(蘊抱)를 용납해 줄 세상을 만나지 못한 현실에 대한 회한(悔恨)이라 할 수 있다. ‘지음(知音)’은 지기지우(知己之友)지만 바로 이 현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추야우중(秋夜雨中)과 흡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그의 작품으로 우정야우(郵亭夜雨)가 있다. 이 작품 역시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빠져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旅館窮秋雨 寒窓靜夜燈 나그네 집에는 깊은 가을비 내리고 차가운 창문에는 고요한 밤 등불 비치네.
自憐愁裏坐 眞箇定中僧 가엾게도 시름 속에 앉아 있노라니 이야말로 진정 참선하는 중이로구나.

 

나그네가 된 자신의 처지를 참선(參禪)하는 승려에다 비기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는 다음과 같다.

 

登臨暫隔路岐塵 높은 곳에 올라서 잠깐 동안 속세와 멀어지는가 싶더니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되씹어 보니 한이 더욱 새롭구나.
畫角聲中朝暮浪 아침 저녁 화각(畵角) 소리에 물결은 흘러만 가고
靑山影裏古今人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옛 사람도 있고 지금 사람도 있네
霜摧玉樹花無主 옥수(玉樹)에 서리 치니 꽃은 임자 없고
風暖金陵草自春 금릉(金陵) 땅 따뜻하니 풀은 혼자 봄이로다.
賴有謝家餘境在 사씨가(謝氏家)의 남은 경치 그대로 살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 오래도록 시객(詩客)으로 하여금 정신 상쾌하게 하네.

 

흔히 등윤주자화시(潤州慈和詩)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경물시(景物詩)는 대개 사경(寫景)을 먼저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이 시는 수련(首聯)에서부터 촉급하게 정()을 앞세워 회고적인 감상에 흐르고 있다. 수사에도 용공(用工)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함련(頷聯)에 이르러 서완(徐緩)하게 풀어 주면서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은 곳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대응시키면서 무상(無常)을 읊조리고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화각(畵角) 소리 울리는 가운데 아침저녁 흐르는 물은 다함이 없고 푸른 산 그늘 속에는 옛 사람의 자취도 있고 지금 사람의 자취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함련(頷聯)이 너무 높아 다시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을 이어나가기에는 이미 기력이 쇠진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당시일권(全唐詩逸卷)에도 이 함련(頷聯)이 등재(謄載)되어 있고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5이나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상권 2에서 유독 이 함련(頷聯)만을 적시(摘示)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제가야산(題伽倻山)은 다음과 같다.

 

狂奔疊石吼重巒 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
人語難分咫尺間 사람들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 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

 

제가야산(題伽倻山), 가야산옥류동(伽倻山玉流洞)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야산 은거 이후에 썼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광분첩석(狂奔疊石)’()’파한집(破閑集)권중 20 이후 ()’으로 널리 알려져 이 시에서 소재가 되고 있는 물의 의미가 부각되어 왔다. ‘진롱산(盡籠山)’()’()’으로 된 시화서(詩話書)도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기구(起句)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은 호흡의 불편을 느낄 정도로 억색(臆塞)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장쾌미(壯快味)를 보태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고(孤高)와 장쾌(壯快)를 함께 읽게 한다. 추야우중(秋夜雨中)과 더불어 세상을 멀리 하려는 최치원(崔致遠) 자신의 독백을 거듭 확인케하는 작품이다.

 

승구(承句)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은 바깥세상에서 들끓고 있는 시비성(是非聲)의 강도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물소리의 강도도 그 만큼 높인 것이다.

 

 

 

 

최광유(崔匡裕, ?~?)

는 신라말의 학자로서 당()에 유학하여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ㆍ박인범(朴仁範) 등과 더불어 신라십현(新羅十賢)으로 불리었다는 사실 밖에는 그를 알 수 있는 전기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십초시(十鈔詩)에 그의 시가 전하고 있으며 그 뒤의 각종 시선집(詩選集)1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기아(箕雅)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는 것은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七律)억강남이처사거(憶江南李處士居)(七律) 2수다.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은 다음과 같다.

 

麻衣難拂路岐塵 포의(布衣)의 몸으로 거리 먼지 털기 어려운데
鬂改顔衰曉鏡新 흰머리 쇠한 얼굴 새벽 거울이 새롭구나.
上國好花愁裏艶 상국(上國)의 좋은 꽃은 시름 속에 아름답고
故園芳樹夢中春 고국(故國)의 꽃다운 나무는 꿈 속의 봄일레라.
扁舟煙月思浮海 편주(扁舟) 띄워 저녘에 바다로 떠날 생각
羸馬關河倦問津 여윈 말 타고 관하(關河)에서 나루 묻기도 지쳤네.
祗爲未酬螢雪志 아직도 형설(螢雪)의 뜻 이루지 못했으니
綠楊鶯語大傷神 버드나무 꾀꼬리 소리도 내 마음 상하게 하네.

 

장안(長安)에서의 봄맞이를 읊은 것이다. 늦도록 과거에 오르지 못하여 벼슬도 하지 못한 포의(布衣)의 몸으로 새벽에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흰머리가 돋아난 자신의 모습에 놀란 시인의 독백이다. 이국의 정서를 포개어 농도를 짙게 해준다. 수사에 공을 들이어 말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수련(首聯)에서 제시한 처지를 쉽게 미련(尾聯)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나 수련(首聯)은 당() 이상은(李商隱)무제(無題)효경단수운빈개 야음응각월광한(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을 연상케 하거니와 아직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처지에 운개안쇠효경신(雲改顔衰曉鏡新)’을 푸념하고 있는 것은 무리와 비약을 자초하고 있는 느낌이다

 

 

 

 

박인범(朴仁範, ?~?)

은 최광유(崔匡裕)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여 빈공(賓貢)으로 급제한 학자요 문인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박인범(朴仁範)의 시는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신라왕여당강서고대부상장(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의 선비들을 보면, 특히 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으로 하여금 쌍쌍이 봉리(鳳里)에 날고 상대하여 용문(龍門)에 뛰어오르게 하였다. …… 생각컨대 박인범(朴仁範)은 고심(苦心)하여 시()를 하였으며 김악(金渥)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하여……

……顧雞林之士子, 特令朴仁範金渥, 雙飛鳳里, 對躍龍門……伏以,朴仁範苦心爲詩, 金渥克己復禮.…… -(東文選)47, .

 

 

시업(詩業)에 전념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5에서 최치원(崔致遠)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와 박인범(朴仁範)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 박인량(朴寅亮)사주귀산사(泗州龜山寺)등 삼자시(三子詩)가 중국의 문단을 울렸다고 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도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2에서 아동인지이시명어중국 자삼군자시(我東人之以詩鳴於中國, 自三君子始)’라 하여 박인범(朴仁範)의 시명(詩名)최치원(崔致遠)과 동렬(同列)로 인정하였다.

 

그의 벼슬은 시선집(詩選集)에 전하는 바로는 저작랑(著作郞)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사실을 일실(逸失)하여 입전(立傳)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는 십초시(十鈔詩)를 비롯하여 그 밖의 시선집에 10수가 전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구성궁회고(九成宮懷古)강행정장수재(江行呈張秀才)(이상 七律) 등이 꼽힌다.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는 다음과 같다.

 

翬飛仙閣在靑冥 나는 듯한 선각(仙閣)이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아
月殿笙歌歷歷聽 월궁(月宮)의 피리소리 역력히 들려온다.
燈撼螢光明鳥道 등불은 반딧불인 양 새가 다니는 길을 비추고
梯回虹影到岩扃 사닥다리는 무지개 드리운 듯 바위문에 닿았네.
人隨流水何時盡 사람은 흐르는 물 따라 어느 때나 다할꼬?
竹帶寒山萬古靑 대나무는 찬 산을 띠 둘러 만고에 푸른 것을.
試問是非空色理 시비(是非)와 공색(空色)의 이치를 시험삼아 물었더니
百年愁醉坐來醒 백년 동안의 맺힌 시름 그 자리에서 깨는구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동문선(東文選)에는 각각 경주용삭사각(涇州龍朔寺閣), 경주용삭사겸간운서상인(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으로 표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앞에서 보인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5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2에서 특히 함련(頷聯)燈撼螢光明鳥道 梯回虹影落岩扃()가 락()으로 되어 있음의 구()를 드러내어 칭도하고 있으며 최해(崔瀣)도 그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서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 비점(批點)을 행하고 있는 것은 보면 섬려(纖麗)한 표현 기교가 이들의 안광(眼光)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목전(目前)의 사경(寫景)에서부터 쉽게 풀어나간 이 작품도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이 너무 높아 사실상 이 시는 경련(頸聯)에서 끝나고 있는 느낌이다.

 

 

 

 

최승우(崔承祐, ?~?)

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기 시작한 진성여왕(眞聖女王) 3(890)에 입당하여 3년만에 빈공(賓貢)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사육문(四六文) 5권을 편찬하여 스스로 호본집(餬本集)이라 하였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견훤(甄萱)을 대신하여 고려왕에게 보낸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동문선(東文選)에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고려초기까지 생존했던 것은 틀림 없다.

 

최치원(崔致遠)이 찬한 낭혜화상탑비후주(朗慧和尙塔碑後注)에도 소위일대삼최(所謂一代三崔)’라 하여 최치원(崔致遠)ㆍ최언위(崔彦撝)와 더불어 삼최(三崔)’로 불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나 승우경무전어후세자(承佑竟無傳於後世者).’라 하여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참조. 그의 시는 모두 10수가 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曹進士松入羅浮)(七律)관중송진책선배부빈주막(關中送陳策先輩赴邠州幕)(七律)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함께 뽑히고 있다.

 

관중 송진책선배부빈주막(關中 送陳策先輩赴邠州幕)은 다음과 같다.

 

禰衡詞賦陸機文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의 문()으로
再捷名高已不群 두 번이나 급제하여 이름 이미 높았도다.
珠淚遠辭裴吏部 구슬 같은 눈물로 배리부(裵吏部)를 떠나와
玳筵今奉竇將軍 대연(玳筵)에서 오늘은 두장군(竇將軍)을 받들겠도다.
尊前有雪吟京洛 술독 앞에 눈 있을 땐 서울에서 시()를 읊었는데
馬上無山入塞雲 말에 올랐을 땐 산이 없어 변방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從此幕中聲價重 이로부터 막중(幕中)에는 명성이 무거울지니
紅蓮丹桂共芳芬 문무(文武)가 같이 만나 방향(芳香)을 함께 하리라.

 

관중(關中)에서 빈주막(邠州幕)으로 부임하는 진책(陳策) 선배를 송별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관이 무장의 막중으로 부임하는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 경련(頸聯)의 대구 처리에서 각박하리만큼 사조(辭藻)에만 용공(用工)하고 있는 흠이 있으나, 표제(標題)의 제한을 쉽게 극복하고 있는 미련(尾聯)의 끝맺음이 좋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육기(陸機)로 대표되는 육조(六朝)문선(文選)()이 나말유학생들의 모범 문장이 되고 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당시(全唐詩)에 수재(收載)된 당() 장효표(章孝標)송김가기귀신라시(送金可紀歸新羅詩)를 비롯하여 장교(張喬)송빈공김이오오봉사귀본국시(送賓貢金夷吾奉使歸本國時), 두순학(杜荀鶴)송빈공등제후귀신라시(送賓貢登第後歸新羅詩)등 증별시(贈別詩)로 미루어 보아 일찍부터 당()의 문사들에게 입당 유학생의 학문과 시작(詩作)이 결코 경홀(輕忽)하게 대접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여조시(麗朝詩)의 창시자(倡始者)

 

나말의 문신(文臣)으로서 여초(麗初)의 문화 건설에 협찬한 최언위(崔彦撝), 최지몽(崔知夢), 최응(崔凝), 태평(泰評) 등의 유자(儒者)들과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등에 이름을 전하는 일군의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여조시(麗朝詩)를 창시한 선구자들이다. 최해(崔瀣)가 그의 동인지문서(東人之文序)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려의 개국으로 삼한(三韓)이 귀일(歸一)되었지만 의관전례(衣冠典禮)는 신라의 그것을 답습하였다. 따라서 소단(騷壇)의 풍토도 이후 200여년 동안 나말(羅末)에서부터 익혀온 만당(晚唐)의 풍상(風尙)이 그대로 지배하게 된다.

 

고려 태조(太祖)가 무략(武略)으로 건국하였지만, 불교신앙과 유교치국으로 기본성격을 굳힌 것은 이때까지의 유교가 사상유교가 아닌 기본유교, 다시 말하면 통경명사(通經明史)와 같은 유자(儒者)의 일상적인 글공부가 곧 문학수업으로 발전하는 문학유교(文學儒敎)성악훈(成樂熏), 한국사상논고(韓國思想論稿)문학유교(文學儒敎)항 참고의 수준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말(羅末)의 문학 유자(儒者)인 최언위(崔彦撝)ㆍ최지몽(崔知夢)ㆍ최응(崔凝) 등을 등용하여 문치(文治)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이러한 사정을 사실로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유교로 입국한 고려 문화의 향방은 문학풍토의 성취에 있어서도 그대로 중요하게 구실하게 된다. 건국초기에는 문물제도의 정비와 정치적 안정의 추구 등 문화건설의 과업이 필연적으로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걸출한 문인의 배출을 기다릴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국초(國初)의 안정기조가 구축되면서 기본유교의 속성은 그 위에 이론적인 학설이나 화려한 문장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광종대(光宗代)에 비롯한 과거제의 실시, 최충(崔沖)으로 대표되는 사학(私學)의 흥기, 예종(睿宗)ㆍ인종(仁宗)호학(好學) 등이 모두 이 문학유교에 힘입은 것이며, 고려의 문풍이 크게 떨치어 빛나는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을 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특히 광종(光宗) 9년에 실시된 과거제도는 후주(後周)의 귀화인(歸化人)인 쌍기(雙冀)를 지공거(知貢擧)로 하여 시험을 보인 것이 그 처음이거니와 이때의 과거는 제술과(製述科, 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의 양대업(兩大業)이 있었고 잡과(雜科)로서 의업(醫業), 복업(卜業) 등이 있었다【『고려사(高麗史)(), 권제(卷第)27, 과거(選擧)1.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과시과목이 무엇이었느냐에 있다. 제술과(製述科)에 있어서는 시()ㆍ부()ㆍ송()ㆍ시무책(時務策) 등 사장(詞章)이 주종이었으며 명경과(明經科)에서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시과목의 내용은 그 시기에 따라 다소의 출입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제술과(製述科)에는 사장(詞章)이 중심이 되었으며 양대업(兩大業) 중에서도 사장(詞章)을 과()하는 제술과(製述科)가 명경과(明經科)보다 훨씬 중요시되었다. 1032년에 새로이 실시된 국자감시(國子監試)조선 시대의 진사시(進士試)에 있어서도 과시과목은 모두 사장(詞章)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편향은 당시 사풍(士風)의 향방을 크게 자극하였던 것이며, 사장을 숭상한 고려 시대 문풍의 소유래(所由來)를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온전하게 시를 전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물로는 초기의 오학린(吳學麟)과 최승로(崔承老)에서 비롯하여 장연우(張延祐)ㆍ최충(崔沖)ㆍ최약(崔瀹)ㆍ이자량(李資諒)ㆍ이오(李䫨)ㆍ최석(崔奭)박인량(朴寅亮)ㆍ김연(金緣)ㆍ최유선(崔惟善)ㆍ곽여(郭璵)ㆍ권적(權適)ㆍ이자현(李資玄)ㆍ인빈(印份)김부식(金富軾)ㆍ김부의(金富儀)ㆍ정습명(鄭襲明)ㆍ고조기(高兆基)ㆍ최유청(崔惟淸)정지상(鄭知常) 등에 지나지 않으며 이 가운데서도 시사(詩史)에서 문제삼을 만한 시인은 장연우(張延祐)박인량(朴寅亮)ㆍ곽여(郭璵)김부식(金富軾)ㆍ정습명(鄭襲明)ㆍ고조기(高兆基)정지상(鄭知常)ㆍ최유청(崔惟淸) 등이 고작이다.

 

최언위(崔彦撝)와 같은 문장으로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나 조석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금석문자(金石文字)만 남기고 있을 뿐, 그의 시편(詩篇)은 단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사장학(詞章學) 200년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려초(麗初)의 시사(詩史)를 그토록 공허하게 한 것은 시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전승자에게 책임이 있다.

 

개인의 문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후대인의 수습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초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 알려지고 있는 김태현(金台鉉)동국문감(東國文鑑)이 고려말기에 나타나고 있으며 그 내용도 소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해(崔瀣)동인지문(東人之文)도 조선초기에 이미 산일(散逸)된 것이 많았으며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동인지문(東人之文)ㆍ사육(四六)은 선문집(選文集)일 뿐이다. 십초시(十鈔詩)는 기본적으로 당시선집(唐詩選集)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시작(詩作)으로는 견당유학생(遣唐遊學生)들의 시편(詩篇)이 거기에 몇 수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은 필사본(筆寫本)이 전하고 있거니와 내용이 빈약하여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선발책자는 모두 15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400년전 려초(麗初)의 시편(詩篇)이 온전하게 수습되기 어려웠을 것은 물론이다.

 

 

 

장연우(張延祐, ? ~1015 현종5)

는 현종(顯宗) 때의 대신(大臣)이다. 거란의 침입 때 남으로 피난한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으며 뒤에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까지 올랐으나 그의 시작(詩作)한송정곡(寒松亭曲)한 편이 동문선(東文選)』 『기아(箕雅)등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달 밝은 한송정(寒松亭) 밤에 경포(鏡浦)의 물결은 잔잔한데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슬피 울며 오락가락 유신(有信)한 백구로다.

 

조용한 영탄(詠嘆)이 이 시의 전부다. 동사를 사용하는데 인색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는 더욱 정적(靜的)이다. 전구(轉句)에 동사가 겹치고 있지만 선행어(先行語) ‘애명(哀鳴)’ 때문에 래우거(來又去)’의 동적(動的)인 기능이 거세되고 있다. 강릉기(江陵妓) 홍장(紅粧)의 시조 한송정 달 밝은 밤에때문에 거꾸로 빛을 보게 된 것이 이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자는 그의 아버지 유()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이덕무(李德懋)청비록(淸脾錄)에는 장유(張儒)가 사신으로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표착(漂着)한 비파[]의 밑바닥에 새겨진 글자가 자기나라 악부인 한송정(寒松亭)이라 이것을 한역(漢譯)해 준 것이 이 시()라고 한다[高麗張延祐 興德縣人 顯宗朝踐歷華要 官至戶部尙書 又名晉山 其時樂府 有寒松亭曲 甞有人書此曲於瑟底 瑟漂流至江南 江南人未解其詞 光宗時晉山奉使江南 案似是吳越錢氏時 江南人問其曲意 晉山作詩釋之曰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𩿨 案此說則高麗時 別有國書以譯方言 如新羅吏讀 本朝訓音 而未可考也].

 

이에 따르면 한송정곡(寒松亭曲)은 전래의 민간 노래가 한시체(漢詩體)로 옮겨진 것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장연우(張延祐)의 작품이 유독 이 한 수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짐작도 사실에 가까운 것이 됨직하다.

 

 

 

 

박인량(朴寅亮, ? ~1096 숙종 1, 代天, 小華)

은 문종(文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ㆍ순()ㆍ선()ㆍ헌()ㆍ숙() 오조(五朝)를 역사(歷事)하였다. 문종(文宗) 이후 숙종(肅宗)까지의 70여년은 최충(崔沖)ㆍ이자연(李子淵)ㆍ김근(金覲)을 정점으로 하는 최()ㆍ이()ㆍ김() 삼성(三姓)이 전성하였으나 그 밖에도 박인량(朴寅亮)ㆍ김인존(金仁存, ) 같은 명사(名士)들이 있어 국교(國交)에 기여하였다. 김인존(金仁存)도 시재(詩才)가 있었다고 하나 동문선(東文選)에 칠언율시 2편이 전하고 있을 뿐이며 특히 박인량(朴寅亮)은 문사(文辭)가 아려(雅麗)하여 송()과 요()에 보내는 고주표장(告奏表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문종 29(1075)진정표(陳情表)를 요주(遼主)에게 올려 국경 분쟁을 끝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문종 34(1080)에 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 동행했던 김근(金覲)과 함께 척독(尺牘)ㆍ표장(表狀)ㆍ제영(題詠)이 송인(宋人)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양인(兩人)의 시문집(詩文集)을 간포(刊布)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 했다 한다.

 

()의 문화가 절정에 이르기 시작한 원풍년간(元豊年間, 神宗)에 이러한 찬양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단림(馬端臨)문헌통고(文獻通考)에도 박인량(朴寅亮)ㆍ김제(金梯)ㆍ이강손(李絳孫) 등의 창화시집(唱和詩集)고려시(高麗詩)삼권(三卷)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으로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오자서묘(伍子胥廟)(七絶)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七律)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오자서묘(伍子胥廟)절강(浙江)(청구풍아(靑丘風雅))으로, 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금산사(金山寺)(보한집(補閑集)권상 20)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두 편 다 봉사도중(奉使途中)에 지은 것이므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오자서묘(伍子胥廟)는 다음과 같다.

 

掛眼東門憤未消 눈을 뽑아 동문(東門)에 걸어도 분이 풀리지 않아
碧江千古起波濤 절강(浙江)의 푸른 물결 천고(千古)에 파도 치네.
今人不識前賢志 지금 사람 옛 어진 이의 뜻을 알지 못하여
但問潮頭幾尺高 밀물 높이 몇 자인가 그것만 묻네.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상(卷上)에 따르면 사행(使行) 도중(途中) 절강(浙江)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어 파도가 크게 일어 일어났는데 그때 마침 강변에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이 있는 것을 보고 이 시()를 지어 조상(弔喪)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바람이 걷히며 배가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다[須臾風霽船利涉].

 

오자서(伍子胥)가 참소(讒訴)를 입어 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눈을 뽑아 동문(東門)에 걸어두면 월()이 오()를 멸()하는 것을 보리라고 한 고사(故事), 절강(浙江)의 조수(潮水)가 격렬한 것이 자서(子胥)의 분기(憤氣)가 그렇게 한 것으로 믿고 있는 전래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시로써 옮겨놓은 것이 이 작품이다. 때문에 웅장(雄壯)ㆍ쇄락(灑落)한 작품으로 정평(定評)되고 있다. 청구풍아(靑丘風雅)에는 벽강(碧江)’절강(浙江)’으로 되어 있다.

 

 

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는 다음과 같다.

 

巉巖怪石疊成山 험한 바위 괴상한 돌 겹친 그대로 산인데,
上有蓮坊水四環 위에 연당(蓮塘)이 있어 물이 사방으로 둘렀네.
塔影倒江飜浪底 () 그림자 강()에 거꾸러져 물결 밑에 일렁이고
磬聲搖月落雲間 풍경소리 달을 흔들어 구름 사이에 떨어진다.
門前客棹洪濤疾 문 앞의 나그네 배에 파도가 급한데
竹下僧碁白日閑 대나무 아래 중의 바둑은 대낮에 한가롭다.
一奉皇華堪惜別 사신의 임무를 띤 몸 이별을 어쩔 수 없어
更留詩句約重攀 시 한 수 남기고 다시 오기 기약하네.

 

이 작품은 오자서묘(伍子胥廟)와는 달리 수식에 용공(用工)하고 있어 만당(晩唐)의 섬교(纖巧)를 확인케 한다. 경련(頸聯)이 가구(佳句)로 불리고 있으며 대구(對句)의 조성이 특히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백운소설(白雲小說)5보한집(補閑集)권상(卷上)에ㆍ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2 등 초기의 시화ㆍ비평서에 모두 언급되고 있으며 최치원(崔致遠)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 박인범(朴仁範)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와 더불어 중국에서 인정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는 함련(頷聯)과 경련(頸聯)방여승람(方輿勝覽)에 등재(謄載)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확인케 한다. 그러나 함련(頷聯)탑영도강변낭저 경성요월낙운간(塔影倒江飜浪底 磬聲搖月落雲間)’은 당() 고병(高騈)산정하일(山亭夏日)() 중에서 녹수음몽하일장 누대도영입지당(綠水陰濃夏日長 樓臺倒影入池塘)’점화(點化)란 것이 아닌가 의심냄직하다. “문전객도홍파급門前客棹洪波急홍파급(洪波急)’은 후대의 시선집(詩選集)에서 홍도질(洪濤疾)’로 고쳐서 전하기도 한다.

 

 

 

동산거사(東山居士) 곽여(郭璵, 1058 문종12~1130 인종8, 夢得, 東山處士)

는 특히 사신(詞臣)을 좋아한 예종(睿宗)으로부터 선생의 대우를 받아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김문우객(金門羽客)이라 하였다. 때문에 동문선(東文選)등 선발책자(選拔冊子)4수의 시작(詩作)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 3수가 예종(睿宗)에게 바친 응제시(應製詩)이다.

 

나머지 1수가 청평산(淸平山)에 은거한 이자현(李資玄)에게 준 증청평이거사(贈淸平李居士)인 것을 보면 이자현(李資玄)과 뜻이 계합(契合)했던 것 같다. 이자현(李資玄)과 함께 청평산(淸平山)에 은거한 권적(權適)동문선(東文選)4편의 시()를 전하고 있다.

 

 

곽여(郭璵)와 문장으로 서로 좋아하여 신교(神交)로 불리운 김황원(金黃元)은 특히 고문(古文)을 좋아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궤(李軌)와 함께 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당시 사람들이 문장은 김()ㆍ이()라 불렀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이 시선집에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예림(藝林)의 가화(佳話)만 무성할 뿐이다.

 

그가 일찍이 서경(西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고금(古今)의 제영(題詠)이 모두 마음에 차지 않아 현판(懸板)을 모두 불사르고 종일토록 고음(苦吟)하여 다만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의 일련(一聯)을 얻고는 뜻이 고갈(枯渴)하여 통곡하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파한집(破閑集)권중 19이나 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6 등에 실리며 널리 알려져 온 것이거니와 이에 대해서도 후대인의 비평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6에서 노유상담(老儒常談)’이라 하였으며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시골 학당에서 의론한 것을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不過村學堂中所論之流傳者]’라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성산수(星山守)가 되어 부임할 때 분행역(分行驛)에서 이재(李載)를 만나 시()를 준 일이 있었는데, 진신(搢紳)들이 여기에 속화(屬和)한 것이 거의 100편이나 되어 분행집(分行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인빈(印份)

도 시명(詩名)이 일세를 울렸다고 하지만 그의 시작(詩作)동문선(東文選)우야유회(雨夜有懷)(五律), 동도회고(東都懷古)(五律), 징현국사영당(澄賢國師影堂)(五律) 3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며 여타의 시선집(詩選集)에도 뽑아 준 것이 없다. 파한집(破閑集)권하 14에서 이인로(李仁老)가 격찬하고 있는 작품도 바로 우야유회(雨夜有懷).

 

 

 

김부식(金富軾, 1075 문종29~1151 의종5, 立之, 雷川)

은 최충(崔沖)ㆍ이자연(李子淵)ㆍ김근(金覲) 등 최()ㆍ이()ㆍ김() 삼대명문(三大名門)의 하나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출신이다. 김근(金覲)의 아들로서 4형제가 모두 등제한 부필(富弼)ㆍ부일(富佾)ㆍ부의(富儀) 형제 가운데 셋째다. 정중부란(鄭仲夫亂)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김돈중(金敦中)은 그의 아들이며, ()로써 일대(一代)에 이름을 드날린 김군수(金君綏)는 손자다.

 

송사(宋使) 노윤적(路允迪)의 보좌관(補佐官)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김부식(金富軾)이자겸(李資謙)과 함께 당대의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로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몸이 부섬(富贍)하고 검은 얼굴에 눈이 부리부리하며 기괴낙이(奇魁樂易)하여 큰 그릇을 타고났다고 한다.

 

특히 김부식(金富軾)과 김부철(金富轍, 富儀初名)이 송(),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명자(名字)를 따서 그들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사하는 것이 많다. 소식(蘇軾)김부식(金富軾)은 연대차(年代差)가 겨우 40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식(蘇軾)이 그의 논고려매서이해차자(論高麗買書利害箚子)에서, 고려의 서적 청매(請買)에 대하여 이를 오해(五害)라 하여 허락하지 말라고 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의 국교관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오만무례(傲慢無禮)한 그 어구로 보아 동방인(東方人)으로서는 타매(唾罵)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식(富軾) 형제 가운데서도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울린 부식(富軾)ㆍ부철(富轍)이 이들을 사모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는 소씨(蘇氏)로 대표되는 송대(宋代) 문장의 전파속도가 그만큼 빨랐던 것을 알게 하는 증좌(證左)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횡분방(縱橫奔放)한 그들의 문장에 부식(富軾) 형제가 심열성복(心悅誠服)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문선(文選)()이 모범문장으로 행세하던 당시의 속상(俗尙)에서 김부식(金富軾) 개인의 문장 취향을 크게 자극했을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문장을 예고하는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보면 앞에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에서 보인 바와 같이, 여초(麗初)에도 그대로 문선(文選)()이 통용되었지만 명신들의 장주(章奏)와 비문(碑文)에는 더러 양한(兩漢)의 기미가 있다고 한 것이 곧 질박(質朴)김부식(金富軾)의 문장을 두고 암시적으로 말한 것임을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김부식(金富軾)의 문장은 표전(表箋)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그러나 그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과시한 기사문(記事文)의 솜씨는 사필(史筆)로써 시범한 문장가의 권능임에 틀림없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그의 온달전(溫達傳)을 가리켜 여조제일(麗朝第一)의 걸작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대해서도 조선초기의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4 김부식(金富軾)정지상(鄭知常)은 시()로써 일시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金文烈富軾. 鄭諫議知常 以詩齊名一時]’고 하였으며, 성현(成俔)도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12에서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나 화려하지 못하고 정지상(鄭知常)은 빛나지만 드날리지 못한다[金富軾能贍而不華 鄭知常能曄而不揚].’고 평가하여 두 사람을 함께 비기고 있지만,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의 문()정지상(鄭知常)의 시()가 함께 일세를 울렸다는 것이 적평(適評)이 될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시작중(詩作中)에서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만 하여도 32편이나 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五律)등석(燈夕)(七律)이다.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를 보면 다음과 같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속객(俗客)이 이르지 않는 곳, 올라보니 생각이 맑아지네.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산형(山形)은 가을에 다시 좋고 강색(江色)은 밤에 더 밝다.
白鳥孤飛盡 孤帆獨去輕 흰 새는 멀리 다 날아가고 외로운 배 홀로 가벼이 가네.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좁디 좁은 이 세상에서 반평생 공명(功名) 찾던 일 부끄럽기만 하네.

 

이 작품은 차운시(次韻詩)가 감내해야만 하는 구속을 극복하고 우선 군졸(窘拙)함이 없어 여유가 있어 좋다. 속객(俗客)의 발자국이 지나가지 않은 높은 것에 올랐다가 악착하게 환해(宦海)에서 살아온 반생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결구(結句)의 처리도 돋보인다.

 

그러나 경련(頸聯)이백(李白)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에서 따온 것이 틀림없다. 특히 이백(李白)이 기구(起句)에서 중조고비진(衆鳥高飛盡)’이라 한 것을 김부식(金富軾)은 이를 경련(頸聯)에서 차용(借用)하고 있어 단순한 경물(景物) 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 ‘()’, ‘()’도 겹치고 있어 전편의 균형이 여기서 깨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정습명(鄭襲明, ?~1151 의종50)

은 학문에 힘쓰는 한편 문사(文辭)에도 능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오랫 동안 간직(諫職)에 있었으므로 쟁신(諍臣)의 풍()이 있어 의종(毅宗)이 태자로 있을 때 극진히 보호하였으므로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의 사부(師父)로 삼았다고 한다. 의종(毅宗)이 즉위한 뒤에 참소를 입어 음독(飮毒), 자진(自盡)하였다.

 

정습명(鄭襲明)에게는 특히 시()에 얽힌 가화(佳話)가 많아 그의 시는 모두 3수를 남기고 있을 뿐이지만, 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석죽화(石竹花)증기(贈妓)시도 모두 사연이 있는 것들임을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권하 16을 보면 알 수 있다.

 

석죽화(石竹花)는 다음과 같다.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 세상에서 모두들 모란꽃 붉은 것만 좋아하여 왼 뜰 가득히 심고 가꾸었네.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누가 거친 이 초야(草野)에 좋은 꽃 있는 줄 알기나 하겠나?
色透村塘月 香傳隴樹風 어여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을 꿰뚫었고 향기는 언덕 나무의 바람에 불어 전했네.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외진 땅에 있노라니 찾아주는 귀공자(貴公子) 적어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붙이네.

 

때마침 대혼(大閽, 수문장)이 이 시를 외우다가 대궐에까지 전해지게 되어 그가 옥당(玉堂)에 보임되었다는 일화가 파한집(破閑集)에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석죽화(石竹花)는 바로 정습명(鄭襲明)의 출세작이 된 셈이다. 평범한 산문의 조직을 연상케 하는 구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의 기법(技法)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자신의 처지를 석죽화(石竹花, 패랭이꽃)에 비유하여 세속에서 사랑을 받는 모란과 대응시키면서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맹호연(孟浩然)이 일찍이 직절(直截)하게 읊어 낸 부재명주기 다병고인소(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에도 손색이 없다. 특히 이 작품이 만약 최치원(崔致遠)촉규화(蜀葵花)를 읽고 점화(點化)한 것이라면 그 장인의 솜씨는 더욱 칭찬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촉규화(蜀葵花)의 다음 구절을 다시 읽어 보면 석죽화(石竹花)가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점화(點化)하고 있는가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寂寂荒田側 繁花壓柔枝 쓸쓸한 외진 곳 거친 밭두덕에 탐스런 꽃송이 어린 가지 휘게 하네.
(중략) (중략)
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 수레 탄 높은 손님 뉘 와서 보리요? 벌 나비만 부질없이 서로 엿보네.
自慚生地賤 堪恨人棄遺 천한 곳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이 버려둔 것 참고 견디네.

 

이 작품은 꾸민 것이 도리어 흠집처럼 보이리만치 천박하지만 석죽화(石竹花)는 이러한 어려운 곳도 순하게 극복하여 세련된 풍유(諷諭)의 솜씨를 과시하고 있다.

 

 

 

고조기(高兆基, ?~1157 의종11, 雞林)

의 초명(初名)은 당유(唐愈)이다. 그는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7편의 시가 대부분 오언(五言)이다. 그 가운데서도 산장야우(山庄夜雨)(五絶)기원(寄遠)(七絶)이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숙금양현(宿金壤縣)(五絶)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다.

 

산장야우(山庄夜雨)는 다음과 같다.

 

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지난 밤 송당(松堂)의 비에 시냇물 소리 온통 베개 서쪽에서 들린다.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栖 새벽녘에 나와서 뜰의 나무를 보니 간 밤의 자던 새 아직도 둥우리를 뜨지 않았네.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에서 고조기(高兆基)의 이 시를 가리켜 사의(辭意)가 호장(豪壯)하다고 평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운암진(書雲巖鎭)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작품은 오히려 핍진한 육조(六朝)의 자연을 보는 것 같다. 동사(動詞)의 사용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으면서도 전구(轉句)의 매끄러운 율조(律調) 때문에 전편의 표정은 밝다.

 

기원(寄遠)도 그의 또 다른 시세계를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錦字裁成寄玉關 비단에 편지 써서 옥문관(玉門關)에 보내노니
勸君珍重好加飱 부디 그대 몸조심하고 밥 많이 드소서.
封侯自是男兒事 봉후(封候)는 본디 대장부의 일,
不斬樓蘭未擬還 누란(樓蘭)을 베지 않고는 돌아올 생각 않으리.

 

제목은 편지를 붙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이 변방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어서 오히려 호쾌(豪快)하기까지 하다.

 

 

 

최유청(崔惟淸, 1095 헌종1~1175 명종4, 直哉)

은 예종(睿宗)ㆍ인종(仁宗)ㆍ의종(毅宗)ㆍ명종(明宗) 등 사조(四朝)를 역사(歷事)하고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의 아들이며 정서(鄭敍)는 그의 처남이다. 인종(仁宗) 이자겸(李資謙)이 모역할 때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실직(失職)되었다가 자겸(資謙)이 패한 뒤에 상주졸(尙州倅)이 되어 덕정(德政)을 베풀었다. 사신으로 금()에 갔을 때에도 언동(言動)이 예법(禮法)에 합하여 금인(金人)들을 탄복케 했다고 하며 정중부(鄭仲夫)의 난()에도 제장(諸將)이 유청(惟淸)의 청덕(淸德)을 존앙(尊仰)하였기 때문에 군인들을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친척까지도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에 서책(書冊)을 손에서 놓지 않아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널리 통하고 또 불설(佛說)을 매우 좋아하여 유석(儒釋)들 중에서 질문하러 오는 자가 분집(坌集, 먼지처럼 모여들다)하였으며 문생(門生)의 문하(門下)에서 다시 문생(門生)을 보게 되는 종백(宗伯)의 높은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참조. 그의 입신행도(立身行道)훈자시(訓子詩)일편(一篇)에 잘 나타나 있으며 자손이 모두 귀현(貴顯)하여 세세적선 경류자손(世世積善, 慶流子孫)’의 번영을 누렸다. 왕명으로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를 찬정(撰定)하였으며 그의 저술도 문장 수백편과 남도집(南都集)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시작(詩作)7편이 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잡흥(雜興)구수(九首, 五古)가 널리 알려져 있다. 기일(其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春草忽已綠 滿園胡蝶飛 봄풀이 어느새 푸르러져서 동산에 온통 나비떼 날아 든다.
東風欺人睡 吹起床上衣 자는 사이 동푸(東風)이 슬쩍 불어서 평상 위의 옷자락 펄럭이게 하네.
覺來寂無事 林外射落暉 깨어 보니 쥐 죽은 듯 일도 없는데 멀리 숲 밖에는 저녁 햇빛 쏟아진다.
依檻欲歎息 靜然已忘機 난간에 기대어 긴 한숨 쉴까 했더니 너무도 고요하여 세상만사 이미 잊었네.

 

잡흥(雜興)기팔(其八)을 참고하면 만년에 은거한 양주(楊州)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지난날의 장지(壯志)는 사라지고 없지만 풍정(風情)은 때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므로 전원의 한가로움과 그 곳에서 소요하던 심경을 읊은 것이다. 남의 신하된 몸으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른[位極人臣] 노재신(老宰臣)의 인생회고가 숨김 없이 토로되고 있다.

 

 

 

3) 정지상(鄭知常)과 요체시(拗體詩)

 

정지상(鄭知常, ?~1135 인종13, 南湖)은 반역(叛逆)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참살(斬殺)을 당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 그 밖에 구체적인 혐의(嫌疑) 내용(內容)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동정적(同情的)이다. 따로 입전(立傳)을 하지는 않았지만, 반역(叛逆)ㆍ묘청전(妙淸傳)에서 그 약전(略傳)을 싣고 있으며 특히 그의 시()에 대해서는 비평(批評)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다.

 

 

지상(知常)의 초명(初名)은 지원(之元)이며 젊어서부터 시()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갑과(甲科)에 제1인으로 뽑히어 벼슬은 기거주(起居注)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김부식(金富軾)이 본디 지상(知常)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문장의 시샘 때문에 불평이 쌓이어 마침내 묘청(妙淸)과 내통했다고 칭탁(稱托)하여 지상(知常)을 죽였다고 한다. 지상(知常)의 시()만당체(晚唐體)를 배워 특히 절구(絶句)에 공교하였으며 사어(詞語)가 청화(淸華)하고 운격(韻格)이 호일(豪逸)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知常初名之元, 少聰悟, 有能詩聲. 擢魁科, 歷官至起居注, 人言, 富軾素與知常齊名於文字間, 積不平, 至是托於內應殺之. 知常爲詩, 得晚唐體, 尤工絶句, 詞語淸華, 韻格豪逸, 自成一家法. -高麗史列傳40, 叛逆 1, 妙淸條.

 

 

이것이 약전(略傳)의 전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지상(鄭知常)은 문자(文字)의 시샘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시인일 뿐이다. 정지상(鄭知常)과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시화서(詩話書)파한집(破閑集)에서, ‘형양보궐(滎陽補闕)’성정기망기명(姓鄭者忘其名)’ 등으로 이름 밝히기를 꺼리어 성()만으로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후세의 호사가(好事家)들에 의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평을 보인 것은 최자(崔滋)가 그의 보한집(補閑集)권상 22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운(語韻)이 청화(淸華)하고 구격(句格)이 호일(豪逸)하여 그 시()를 읽노라면 흐트러진 가슴과 어두운 눈을 쇄연(洒然)히 깨어나게 한다. 다만 웅심(雄深)한 거작(巨作)이 모자랄 뿐이다.

語韻淸華, 句格豪逸, 讀之使煩禁昏眼, 洒然醒悟, 但雄深巨作乏耳.

 

 

이것은 선성(先聲)에 속한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지상(知常)의 시()를 논한 것도 여기서 따온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정지상(鄭知常)詩風만당(晚唐)을 배워서 절구(絶句)에 뛰어나며현존하는 시편(詩篇)만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운(語韻)이 청화(淸華)하고 구격(句格)이 호일(豪逸)하다는 것으로 묶을 수 있다.

 

성현(成俔)용재총화(傭齋叢話)1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가리켜 빛나기는 하지만 드날리지 못한다[能曄而不揚]’고 한 것도 이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후대의 비평에서 그의 시를 가리켜 유려(流麗)’, ‘완려(婉麗)’한 것으로만 일컫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최자(崔滋)의 그것과 동궤(同軌)의 것이며 그의 시작에 웅심(雄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도 이를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지상(鄭知常)의 시세계를 가장 감동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선후기의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그는 그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3에서 정지상(鄭知常)송인(送人)이색(李穡)부벽루(浮碧樓)()를 비교하여 한마디로 위장부전요조낭(偉丈夫前窈窕娘)’이라 했다. 아리따운 요조숙녀(窈窕淑女)와 훤칠한 위장부(偉丈夫)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작(詩作) 가운데서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은 모두 13편에 지나지 않지만 편편(篇篇)이 모두 널리 알려진 절창(絶唱)이다. 그 가운데서도 서도(西都)(七絶), 취후(醉後)(七絶), 대동강(大同江)(七絶), 단월역(團月驛)(七絶), 장원정(長遠亭)(七律), 제등고사(題登高寺)(七律),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七律), 변산소래사(邊山蘇來寺)(七律) 등이 특히 명편(名篇)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칠언(七言)이다.

 

대동강(大同江)은 다음과 같다.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뚝엔 풀빛 더 파란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南浦)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린다.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다할 것인고?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흘린 눈물로 푸른 물결 더 보태네.

 

이 작품은 대동강별곡(大同江別曲), 송우인(送友人), 송인(送人)오언율시(五言律詩)送人은 다른 작품이다 등 딴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별의 노래로서 가장 많이 불리었으며 후인(後人)의 차운시(次韻詩)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달(李達)최경창(崔慶昌)신위(申緯)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결구(結句)첨록파(添綠波)’는 원시(原詩)첨작파(添作波)’이제현(李齊賢)이 그렇게 고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파한집(破閑集)권하에는 송군천리동비가(送君千里動悲歌)’로 되어 있어 천리(千里)’남포(南浦)’의 선후관계는 확인하기 어렵다.

 

대동강(大同江)정지상(鄭知常)의 더벅머리 시절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거니와, 많은 전인(前人)들의 시작(詩作)이 이 한 편에 녹아들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면서도 만고(萬古)의 절창(絶唱)으로 높은 칭예(稱譽)를 받아 온 것은 분명히 그의 권능(權能)에 속한다.

 

() 왕유(王維)송군남포루여사(送君南浦淚如絲)’나 노륜(盧綸)등등산로하시진(登登山路何時盡)’, 박인범(朴仁範)인수류수하시진(人隨流水何時盡)’, 두소릉(杜少陵)별루요첨금수파(別淚遙添錦水波)’ 등 서로 다른 분위기에서 씌어진 이 같은 시작(詩作)들을 모방하였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훌륭한 이별의 노래로 재조성(再造成)한 그의 솜씨는 일품(逸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승구(承句)에서 결구(結句)로 연결하는 반전(反轉)의 수법은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대동강수(大同江水)가 다하는 날이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염원과도 같은 반문(反問) 때문에, 해마다 이별하는 눈물로 해서 도리어 푸른 강물만 더 보태고 있다는 끝맺음은 실의(失意)의 낙차를 크게 해준다.

 

한시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애정은 남성 상호간의 우정으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시의 수준 높은 상징성 때문에 우인(友人)의 모습은 몽롱(朦朧)해지기 일쑤이며 정인(情人)과의 구별을 어렵게 할 때가 많다. 이 시에서의 우인(友人)도 물론 정회 깊은 연인이다.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百步九折登巑岏 백보(百步)에 아홉 번 돌아 높은 산에 올랐더니
家在半空唯數閒 허공에 집 몇 간이 떠 있을 뿐이네.
靈泉澄淸寒水落 맑디 맑은 샘물은 찬물로 떨어지고
古壁暗淡蒼苔斑 암종(暗從)한 낡은 벽에 푸른 이끼인양 얼룩졌네.
石頭松老一片月 돌머리 소나무는 한 조각 달에 늙어 있고
天末雲低千點山 하늘 끝 구름은 천점산(千點山)에 나직하다.
紅塵萬事不可到 세상만사 이곳에는 이를 수 없으니
幽人獨得長年閑 숨어 사는 사람만이 오래 오래 한가롭겠네.

 

정지상(鄭知常)의 시작(詩作) 가운데는 사찰이나 누정(樓亭)을 소재로 한 것이 많거니와 그의 경물시(景物詩)를 대할 때마다 항상 한 폭의 스케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유려(流麗)하게 뽑아낸 사경(寫景)의 솜씨는 문자 그대로 일창삼탄(一唱三嘆)의 감동을 어쩔 수 없게 한다. 이러한 그의 취향은 노장(老莊)을 좋아하는 삶의 본바탕과도 무관하지는 않을성 싶다.

 

그의 명편(名篇)은 대부분 요체구(拗體句)로써 성공하고 있으며 이 작품도 그러한 기법을 시범한 것 중에 하나다. 서거정(徐居正)이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요체(拗體)란 평자(平字)를 놓을 자리에 측자(仄字)를 바꾸어 쓰는 것이며 그것이 노리는 것은 어기(語氣)를 기건(奇健) 발군(拔群)케 하는 데 있다. 요체(拗體)로써 가구(佳句)를 얻은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아래부터 拗體)

 

地應碧落多遠 僧與白雲相對閑 제등고사(題登高寺)

 

石頭松老一片月 天末雲低千點山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

 

綠楊閉戶八九屋 明月捲簾兩三人 장원정(長遠亭)

 

浮雲流水客到寺 紅葉蒼苔僧閉門

秋風微京吹落日 山月漸白啼淸猿 변산소래사(邊山蘇來寺)

 

 

만당인(晩唐人)들이 이 체()를 즐겨 썼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지상(鄭知常)이 그 묘리(妙理)를 얻었을 뿐이다. 그 밖에 김구(金坵)도 이를 애용(愛用)했다 하나 실례(實例)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수광(李睟光)이 그의 지봉유설(芝峯類說)문장부(文章部)에서 요체(拗體)를 예증(例證)한 것도 이 가운데서 뽑은 것이다.

 

 

 

 

 2. 나말여초시의 만당(晚唐)과의 거리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소단(騷壇)만당(晚唐)과 육조(六朝) 사이를 왕래하면서 문학 유교의 자유분방한 풍토에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장학(詞章學)이 떨칠 수 있는 여건은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보기 드문 호황을 맞이한다.

 

그러나 당시의 시인들이 만당(晚唐)을 배우고 육조(六朝)에 연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익히어 그것들을 우리 시()로서 변용할 수 있었는지 그 현장을 점검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다. 물론 한두 수의 시작을 대비시켜 그 영향관계를 점치거나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만당(晚唐)과의 거리를 측정했으며 나말여초 한시의 일반적인 성격은 이미 앞에서 보였다. 그러나 많은 만당(晚唐)의 시작(詩作)들을 일일이 섭렵하여 우리 시()와의 친근도(親近度)를 가늠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 의미도 부여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당(晚唐)의 대표적인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이상은(李商隱)을 비롯하여 정곡(鄭谷)ㆍ위장(韋莊)ㆍ고병(高騈) 등 일부 시인과 그 밖의 당대시인(唐代詩人)들을 대상으로하여 그 분위기가 닮아있거나 시어(詩語)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을 서로 맞대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작품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만당(晩唐) 이전의 작품도 참고자료로 붙여 답습(踏襲)의 현장을 검색해 보았다.

 

위장(韋莊), 금릉도(金陵圖)

江雨霏霏江草齊 六朝如夢鳥空啼

無情最是台城柳 依舊煙籠十里堤

 

 

-1 정곡(鄭谷), 회상여우인별(淮上與友人別)

揚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2 두보(杜甫), 봉기고상시(逢寄高常侍)

汶上相逢年頗多 飛騰無那故人何

天涯春色催遲暮 別淚遙泳錦水波

 

 

-1 왕유(王維), 송별(送別)

送君南浦淚如絲 君向東州使我悲

 

-2 옹완(翁緩), 절양유(折楊柳)

紫陌金堤映綺羅 遊人處處動離歌

 

 

노륜(盧綸), 산점(山店)

登登山路何時盡 決決溪水到處聞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

燈撼螢光明鳥道 梯回紅影倒岩扃

人隨流水何時盡 竹帶寒山萬古靑

 

 

정지상(鄭知常), 대동강(大同江)

雨歇長提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고병(高騈), 산정하일(山亭夏日)

綠樹陰濃夏日長 樓臺倒影入池塘

 

 

최치원(崔致遠), 조랑(潮浪)

石壁戰聲飛霹靂 雲峰倒影撼芙蓉

 

 

박인량(朴寅亮), 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

巉巖怪石疊成山 上有蓮坊水四環

塔影倒江翻浪底 磬聲搖月落雲間

 

 

이상은(李商隱), 무제(無題)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

 

 

최광유(崔匡裕),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

麻衣難拂路岐塵 鬂改顏衰曉鏡新

 

 

유우석(劉禹錫), 자낭주지경희증제군자(自朗州至京戲贈諸君子)

紫陌紅塵拂面來 玄都觀裡桃千樹

無人不道看花回 盡是劉郞去後栽

 

 

정지상(鄭知常), 서도(西都)

紫陌春風細雨過 輕塵不動柳絲斜

線窓朱戶笙歌咽 盡是李園弟子家

 

 

이백(李白),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김부식(金富軾),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위의 예에서 보면, 위장(韋莊)금릉도(金陵圖)()와 정곡(鄭谷)회상여우인별(淮上與友人別)(), 그리고 정지상(鄭知常)대동강(大同江)()은 그 분위기에 있어서 너무도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한다. 대동강(大同江)강우비비강초제 육조여몽조공제 무정최시태성류 의구연롱십리제(江雨霏霏江草齊 六朝如夢鳥空啼 無情最是台城柳 依舊煙籠十里堤)’에서 봄비가 지나간 강둑의 소경(小景)을 취하고 양자강두양유춘 군향소상아향진(揚子江頭楊柳春 君向瀟湘我向秦)’에서 농도 짙은 이별의 서정(抒情)을 뽑아내어 대동강(大同江)의 분위기를 서정(抒情)의 소경(小景)으로 무르익게 한다.

 

더욱이 정지상(鄭知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왕유(王維) 송별(送別)송군남포루여사(送君南浦淚如絲)’(-1)와 옹완(翁緩) 절양유(折楊柳)유인처처동리가(遊人處處動離歌)’(-2), 그리고 노륜(盧綸) 산점(山店)등등산로하시진(登登山路何時盡)’(),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인수류수하시진(人隨流水何時盡)’() 만당(晩唐) 이전의 당시(唐詩)에서부터 우리 시에 이르기까지 그 답습이 예상되는 시어(詩語)들을 따서 쓰고 있으며 그 소유래(所由來)가 분명한 것은 두보(杜甫)봉기고상시(逢寄高常侍)(-2) ()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모방 수준에서 뛰어 넘어 점화(點化)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유우석(劉禹錫, 中唐)자낭주지경희증제군자(自朗州至京戱贈諸君子)()정지상(鄭知常)서도(西都)(), 전자(前者)의 서정이 동적(動的)인데 반하여 후자(後者)의 그것이 정적(靜的)인 차이는 발견되지만 시인이 느낀 분위기, 감정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을 또 알게 해준다.

 

 

다음의 것들은 답습한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부착(斧鑿)의 흔적 없이 자기 시()로서 소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고병(高騈) 산정하일(山亭夏日)녹수음농하일장 누대도영입지당(綠樹陰濃夏日長 樓臺倒影入池塘)’()최치원(崔致遠) 조랑(潮浪)석벽전성비벽력 운봉도영감부용(石壁戰聲飛霹靂 雲峰倒影撼芙蓉)’(),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등감형광명조도 제회홍영도암경(燈撼螢光明鳥道 梯回紅影倒岩扃)’(), 박인량(朴寅亮)상유연당수사환 탑영도강번낭저(上有蓮坊水四環 塔影倒江翻浪底)’()를 한자리에 펴놓고 보면,

박인범(朴仁範)제회홍영도암경(梯回紅影倒岩扃)’박인량(朴寅亮)탑영도강번랑저(塔影倒江飜浪底)’의 소유래(所由來)를 한 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인(前人)의 시작(詩作)을 본뜬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써 새로운 분위기를 양출(釀出)점화(點化)의 솜씨는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들이다.

 

다음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른 것은 없지만, 이상은(李商隱) 무제(無題)효경단수운빈개 야음응각월광한(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과 최광유(崔匡裕)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마의난불로기진 빈개안쇠효경신(麻衣難拂路岐塵 鬂改顏衰曉鏡新)’()을 보면 최광유(崔匡裕)의 빈개안쇠효경신(鬂改顔衰曉鏡新)이 어디서 온 것인지 한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광유(崔匡裕)는 이를 수련(首聯)에서 원용(援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구(轉句)와의 연결에서 작의(作意)를 과다하게 노출시키고 있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직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포의(布衣)의 처지에서 흰 머리가 돋아난 것을 새벽 거울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분위기를 그만큼 감각(減却)시키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李商隱)의 경우는, 이것이 경련(頸聯)에 해당하므로 대구(對句)의 효과를 이용하여 그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살리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참고로 보인 김부식(金富軾)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성당(盛唐)의 것을 과시(誇示)하기 위하여 이백(李白)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을 경련(頸聯)에 옮겨 백조고비진 고범독거경(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으로 읊어 보았지만 고범독거경(孤帆獨去輕)’의 부박(浮薄)으로써 백조고비진(白鳥高飛盡)’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 ‘()’이 모두 겹치고 있어 고독한(孤獨閑)’의 여유와 운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중국시를 배우고 익히어 우리 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나라 초기 시인들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읽을 수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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