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서설 - 3. 작품의 평가 문제, 2) 조선의 시화집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서설 - 3. 작품의 평가 문제, 2) 조선의 시화집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8:22
728x90
반응형

 2) 조선의 시화집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현을 가능케 하리만큼 성숙된 시기의 것이다.

 

동문선(東文選)의 성격이 유적(類的)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찬(私撰)으로 이루어진 동인시화(東人詩話)도 나말에서 선초에 이르는 시인(詩人) 각론(各論)으로 채워져 있다. 이때에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기는 하였지만, 그가 행한 비평의 양상은 대체로 풍골(風骨)과 사어(辭語), 용사(用事)점화(點化)의 기술(技術)에 이르기까지 예술적인 경계를 두루 포괄하고 있다. 찬자(撰者)의 시각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史實) 확인에도 중요하게 값할 수 있다. 이때에는 아직 도학(道學)의 보급이 일반화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서거정(徐居正) 자신이 효용적인 관도관(貫道觀)을 표방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흔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이 특기(特記)할 일이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므로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다. 성현(成俔)은 그 태평한 시대에 용재총화(傭齋叢話)를 썼다. 그의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文章)으로 진기(珍奇)한 풍물도(風物圖)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대의 문장(文章)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의 필하(筆下)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엄(森嚴)했다. 사자(四字)로 된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포()와 폄()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높은 조감(藻鑑)은 후대(後代)신흠(申欽)허균(許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성현(成俔) 이후의 비평 양상도, ()의 본질이나 시작법(詩作法)의 기술과 같은 것은 감쇄되고 있으며 실제비평이 대부분이다. ‘시자음영성정(詩者吟詠性情)’이나 시발어성정(詩發於性情)’과 같은 것이 시문집(詩文集)의 서문에서 자주 애용되고 있었으나 이것은 재도적(載道的)인 시관(詩觀)이 제조한 상투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비평의 양상이 이와 같이 흐르게 된 사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경술(經術)이 곧 문장(文章)’으로 생각하는 효용론적인 문학관[經術文章一道觀]이 지배하던 시대에 있어서 시문(詩文)의 본질이나 기능 따위를 논하는 것은 스스로 도학(道學)과의 상호충돌을 가져올 뿐이며 둘째, 한시(漢詩)를 이미 우리 것으로 수용한 이후의 문학비평에서 개별작품이 비평의 대상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역시 문장가의 것이며 사장학(詞章學)의 부침(浮沈)과 기복(起伏)을 같이 한다. 서거정(徐居正)성현(成俔) 이후에도 조선중기에 이르러 이수광(李睟光)신흠(申欽)허균(許筠) 등이 나타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면서 시학(詩學)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도 한 차례 호황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峰類說)은 백과사전식으로 된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지만 그 문장부(文章部)에서 행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단순한 기문일사(奇聞逸事)의 채록 수준에서 뛰어넘어 일자일운(一字一韻)의 형식적인 기교에 이르기까지 높은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성운(聲韻)에 대한 그의 관심은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와 더불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꼽혀야 한다.

 

신흠(申欽)청창연담(晴窓軟談)도 기본 성격은 잡록(雜錄)이며 내용 또한 소략하다. 그러나 조선전기 사단(詞壇)의 흐름을 요약해 준 그의 명감(明鑑)은 오히려 상쾌조차 느끼게 한다.

 

허균(許筠)은 그의 위인(爲人)보다도 높은 조감(藻鑑) 때문에 후세까지도 그 이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 성수시화(惺叟詩話)는 한시(漢詩) 약사(略史)도 함께 읽게 해주는 시평서(詩評書).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의 설부(說部)에 있는 다른 글과 더불어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논시(論詩)의 표준으로 삼고 있지만 당시의 풍상(風尙)이 섬교(纖巧)만당(晩唐)에 치우치고 있었으므로 조식(藻飾)을 논한 부분도 수준급이다. 그의 학산초담(鶴山樵談)은 당시 소단(騷壇)의 풍속도(風俗圖)로서 중요하게 값하는 것이며, 시선집(詩選集) 국조시산(國朝詩刪)은 형식적으로는 선발(選拔) 책자(冊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비주란(批注欄)에서 기도(企圖)한 성운(聲韻)의 검색 작업은 역대의 시선집(詩選集)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허균(許筠)의 예술감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목릉성세(穆陵盛世)는 조선전기의 안정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이거니와, 임병양란(壬丙兩亂)을 치르고 난 소단(騷壇)의 황량은 이후 70여년 동안 적막 그대로다. 외세의 압박으로부터 화평을 되찾은 조선후기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문풍(文風)이 다시 일어나고 비평의 문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김득신(金得臣)종남총지(終南叢志)를 비롯하여 홍만종(洪萬宗)소화시평(小華詩評)시평보유(詩評補遺), 남용익(南龍翼)호곡시화(壺谷詩話), 김만중(金萬重)서포만필(西浦漫筆)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識)등이 모두 이때의 것이다. 그러나 홍만종(洪萬宗)이 역대의 시화(詩話)를 집대성하여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의 대부분은 기왕의 중요 비평서(批評書)에서 시도한 작품론을 재확인하거나 저명한 시인들의 시작(詩作)에 얽힌 주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고 있을 뿐 독자적인 비평을 행한 것은 극히 제한되고 있다. 당대의 소단(騷壇)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이 별로 없다. 홍만종(洪萬宗)이 직접 저술한 소화시평(小華詩評)이나 시평보유(詩評補遺)도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을 보지 못한 당시의 사단(詞壇)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다만 김창협(金昌協)이 그의 농암잡지(農巖雜識)에서 월상계택(月象谿澤) 사대가(四大家)의 문장(文章)을 논핵(論覈)하여 산문비평(散文批評)으로서는 가장 전실(典實)한 것이 되고 있으며, ()를 논하는 곳에서도 호방(豪放)ㆍ기험(奇險)한 것을 버리고 노건(老健)ㆍ청신(淸新)한 것만 취택(取擇)하고 있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양미(兩美)김창협(金昌協)의 면목을 여기서도 읽게 해준다.

 

 

그러나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숙종대(肅宗代)의 번영은 정치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여 명맥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시문(詩文)에 대한 논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문학의 전통이 사실상 끝장날 무렵에 김택영(金澤榮)소호당집(韶護堂集)8이란 잡언(雜言)을 남겨준 것이 고전비평의 마지막 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잡록(雜錄)이며, 문학을 논한 부분에 있어서도 문론(文論)이 시론(詩論)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 뒤늦게 나온 조긍섭(曹兢燮)김택영(金澤榮)과 주고 받은 암서집(巖西集)에서 나온 여김창강(與金滄江)란 왕복서(往復書)도 도학자(道學者)의 문장론(文章論)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김택영(金澤榮)과 조긍섭(曹兢燮)이 주고 받은 왕복서(往復書)의 내용은 문인과 학자 사이에 상존(尙存)하는 문장론(文章論)의 거리를 재확인케 하는 자료로서도 일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지원(朴趾源)의 문장(文章)을 그토록 높은 수준에까지 끌어 올린 것은 김택영(金澤榮)이지만, 학문으로 발신(發身)한 조긍섭(曹兢燮)의 체질은 박지원(朴趾源)의 문장(文章)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은 박지원(朴趾源)의 발랄한 문장(文章)이 조긍섭(曹兢燮)의 삼엄(森嚴)한 안광(眼光)에는 김성탄(金聖嘆)수호지(水湖志)와 같은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다만, 신운(神韻)을 좋아한 김택영(金澤榮)의 취향이나, ()의 공졸(工拙)을 성조(聲調)로써 판가름하려 한 김택영(金澤榮)의 시학(詩學)을 알게 해주는 것은 이 잡언(雜言)이 한 일임에 틀림없다.

 

김윤식(金允植)이 편지글 형식으로 보여준 운양속집(雲養續集)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김택영(金澤榮)의 잡언(雜言)과 더불어 문장(文章)의 소유래(所由來)를 가르쳐 준 글로서는 값진 것이다. 그러나 김윤식(金允植)의 장처(長處)가 문장(文章)에 있었기 때문에 시()를 논한 문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