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필가(文筆家)의 시세계
소단(騷壇)에서도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각방면에서 뛰어난 시인이 나와 각각 제 몫을 다해준 결과라 할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저작한 유몽인(柳夢寅)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睟光), 그리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인 허균(許筠) 등은 그들이 제작한 시작(詩作)으로도 일정하게 시사(詩史)에 기여하고 있지만, 특히 이수광(李睟光)과 허균(許筠)은 뛰어난 조감(藻鑑)으로 후세의 기림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 1559 명종14~1623 인조1, 자 應文, 호 於于堂)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당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상투적인 표현을 거부하고 청신한 시어의 선택과 질박한 표현에 주력하였다. 특히 장편시에 특장을 보인 그는 「관동기행(關東紀行)」, 「유두류산(遊頭流山)」 등 백운(百韻) 이상의 장편으로 그의 탁월한 시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모의하여 지은 「의고시십구수체(擬古詩十九首體)」에서 그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시재를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시세(時世)에 격상(激傷)할 때마다 그의 답답한 불평음(不平音)을 시작(詩作)을 통하여 토로하기도 했다. 수의어사(繡衣御史)의 몸으로 남북으로 내달릴 때의 작품으로 채워진 「북수록(北繡錄)」, 「서수록(西繡錄)」, 「남수록(南繡錄)」 등에 이러한 시편이 많다. 그는 문장에 있어서도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추승하여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에 힘씀으로써 당대는 물론 후대의 제가들에 의하여 최립(崔岦)과 힐항(詰抗)할 대가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권벽(權擘)은 최립(崔岦)의 문장이 고인을 모의함에 힘쓴 것과는 달리 유몽인은 모든 시문이 자기의 가슴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최립(崔岦)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하였다.
유몽인(柳夢寅)
은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인 성혼(成渾)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이첨(李爾瞻)ㆍ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의 전횡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 등의 사건에 불복하는 등 당대 현실의 부패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서슴지 않아 집권층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제보개산사벽(題寶盖山寺壁)」은 그의 이러한 기질과 문학경향을 사실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명 유몽인(柳夢寅)의 「상부사(霜婦詞)」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계해년(癸亥年)에 쓴 것으로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壼 | 칠십 먹은 늙은 과부, 홀로 빈 방을 지키네. |
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 여사잠도 익숙하게 읽었고 태임과 태사의 교훈도 자못 안다네. |
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 이웃 사람 시집가라 권하고는 남자 얼굴 무궁화처럼 예쁘다나. |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 흰 머리에 봄 교태 짓는다면 어찌 연지분에 부끄럽지 않으리. |
유몽인은 광해군 즉위 후에 당시의 난정(亂政)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그래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괄(李适)의 반란 후에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한다는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훗일의 화를 우려한 조정 중신들에 의하여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서인층은 유몽인의 이 시를 들어 토역률(討逆律)로 그를 다스려 옥중에서 죽게 만들었다. 칠십 먹은 백발과부가 개가(改嫁)하는 것이 수치스럽듯이 유몽인 자신이 광해군을 버리고 인조에게 출사(出仕)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우의(寓意)를 담고 있는 것이 토역률(討逆律)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세상이 돌아왔다고 해서 광해군 밑에서 벼슬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기지는 않겠다는 것이 유몽인의 뜻이다.
정조 때에 신원되면서 내린 「어제판부(御製判付)」에서는 유몽인의 이 시를 평가하여 『이소(離騷)』의 남은 뜻을 깊이 얻고 김시습(金時習)의 시와 백중(伯仲)이 된다고 하여 그의 충절을 기렸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48에서 이 시의 분방함과 자연스러움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음은 유몽인(柳夢寅)이 44세 되던 해, 백마강상(白馬江上)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작품이다.
夷島颿初返 戎廬鏑欲鳴 | 이도에서 노닐다 처음 돌아오니 융려에선 화살촉이 울려고 하네. |
吾生百年半 朝論幾時平 | 내 생애 백년의 반이건만 조정의 의론 어느 때나 화평할까? |
潭黑龍珠晦 林昏鬼火明 | 못물 검어 여의주도 보이지 않고 수풀 어둑하여 귀신불만 밝네. |
江山空自古 淚落濟王城 | 강산은 자고로 공허하여 눈물 흘리며 왕성을 건너네. |
위 시는 「사회(寫懷)」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귀인(貴人)은 나타나지 않고 간신들의 득세로 정치가 논단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경련(頸聯)의 ‘담흑룡주회 임혼귀화명(潭黑龍珠晦, 林昏鬼火明)’에 담겨진 우의(寓意)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제의 왕성을 건너면서 공허한 현실을 회한(悔恨)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그의 문장 수업은 선진양한(先秦兩漢)에서부터 시작하여 당(唐)에서 그쳤기 때문에 송(宋) 이하의 문자(文字)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했지만【『於于集』 後集 권3, 「哭具二相思孟貞敬夫人輓詩序」】, 대체로 그의 시는 위험(奇險)한 것이 많아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이수광(李睟光, 1563 명종18~1628 인조6, 자 潤卿, 호 芝峰)
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아들 민구(敏求)와 더불어 문명을 날렸다. 그는 역대 제가(諸家)들의 경세책과 문장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역대 여러 경전과 제가서(諸子書)에 두루 밝았을 뿐 아니라 성운(聲韻)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시는 종종 성당(盛唐)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평가되어 왔다.
『지봉유설(芝峰類說)』 시28에서 스스로 “나는 오경 외에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을 좋아하였고 시는 건안(建安)으로부터 초당(初唐)ㆍ성당(盛唐)까지 좋아하였다. 그러나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이하의 것은 그 경구만을 취하였을 따름이다[余於五經, 好莊子司馬子長, 詩好建安以至始唐盛唐, 而中晚以下, 則唯取其驚句而已]”라고 한 언급에서 그의 문학관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구(字句)나 사조(辭藻)의 정련(精鍊)에 진력하지 않고 언의(言意)가 간심(簡深)한 데에 주력하였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이규보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진위사(陳慰使)로 중국에 수차례 가서 많은 창화시(唱和詩)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안남(安南) 사신 풍극관(馮克寬)과의 창화시집인 「안남사신창화록(安南使臣唱和錄)」은 그의 문명을 중국 및 베트남에까지 떨치게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스스로 시작(詩作)에 작위(作爲)의 뜻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가롭게 거처할 때 경물을 보고 마음 속에 감흥이 촉발되면 그것을 읊조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어가 반드시 공교롭지는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의 실상은 반드시 그러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과 함께 대구 등의 형식적 요건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3에서 자신의 시 가운데 대구가 잘 이루어진 작품을 따로 선발하여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음 작품이 이수광(李睟光)의 시세계를 설명하는 데 좋은 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岸柳迎人舞 林鶯和客吟 | 언덕 버들은 사람 맞아 춤추고 수풀 속의 꾀꼬리는 길손 보고 지저귀네. |
雨晴山活態 風暖草生心 | 비가 개니 산은 활기를 띠고 바람 따뜻해 풀이 싹을 틔운다. |
景入詩中畫 泉鳴譜外琴 | 풍경은 시 속에 그림으로 들어오고 냇물은 악보 밖의 거문고 소리 울리네. |
路長行不盡 西日破遙岑 | 길은 길어 가도 가도 다함이 없는데 지는 해는 먼 산봉우리에 깨어지고 있구나. |
위의 「도중(途中)」은 「속조천록(續朝天錄)」에 수록된 작품이다. 연경에 사신가는 도중, 경물에 촉발된 감흥을 구태여 조탁에 힘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읊조린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감흥을 회화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대구 등의 수사적 기교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음은 이수광(李睟光)의 「동헌(東軒)」이란 작품이다.
檻外池光染綠苔 | 난간 밖의 못물 빛은 푸른 이끼 물들이고 |
一簾微雨欲黃梅 | 주렴 가득 가랑비에 매실이 익으려 하네. |
衙居寂寞門長掩 | 관청이 적막하여 문은 늘 잠겨있고 |
公退尋常印不開 | 공무 끝나면 늘상 도장함을 열지 않네. |
盧橘香邊山鹿睡 | 귤나무 향기 가에 산사슴이 잠들고 |
石榴花下怪禽來 | 석류꽃 아래에 바다새 찾아오네.. |
軒窓盡日淸如水 | 동헌 창문 종일토록 맑기가 물과 같아 |
輸與騷翁晝夢回 | 시 짓는 시인에게 낮잠을 보내주네. |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순천동헌(順天東軒)」으로 되어 있다. 수련(首聯)의 ‘황매우(黃梅雨)’와 같은 것은 고인(古人)들에 의하여 흔하게 쓰여온 시어이지만, 이 작품 역시 정치한 수사 기교가 엿보인다. 더욱이 작자는 미련(尾聯)에서 자신이 목민관이란 사실도 잊은 채 스스로 시인임을 자처하고 있어 학자들의 시작(詩作)과는 먼 거리를 느끼게 한다.
허균(許筠, 1569 선조2~1618 광해군10, 자 端甫, 호 蛟山ㆍ惺所ㆍ白月居士)
은 재정(才情)이 뛰어난 시인으로 의고주의 문풍에 반대하여 정(情)의 문학을 주창하였으며 시에 대한 조감(藻鑑)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지목되었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의 조감력(藻鑑力)을 잘 보여준 시선집으로 후대의 제가들에 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송시(宋詩)가 시리(詩理)가 아닌 성리학적 도리(道理)에 편향되어 시의 참다운 맛을 저상(沮喪)시켰다는 판단에 따라 당대 시문학의 폐습을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언외(言外)의 정(情)을 함축한 시, 곧 당시(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시(詩)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달(李達)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문필진한 시필성당(文必秦漢, 詩必盛唐)”을 내세운 명나라 의고파(擬古派)의 문학관을 거부하였는데 이것은 전후칠자(前後七子)【전칠자(前七子):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서정경(徐積卿), 변공(貢),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 / 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의 학당(學唐)이 독창성이 결여된 모의에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唐詩)의 높은 경지는 칭상(稱賞)하였지만 당시(唐詩) 그 자체를 시법화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정과 개성을 중시하고 상어(常語)로 시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지(李贄)의 「동심설(童心說)」과 공안파(公安派)의 「성령설(性靈說)」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허균(許筠)의 시는 재정(才情)이 뛰어나지만 격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그의 시는 혜성(慧性)이 있으나 정력(定力)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송원명(唐宋元明)의 격조가 뒤섞여 나왔다고 평가하였다. 허균(許筠) 스스로도 자신의 시에는 당조(唐調)만이 아니라 정경에 따라 여러 조(調)가 뒤섞여 나오는 것을 자신 나름대로 조화한 것이기에 당조(唐調) 혹은 송조(宋調)와 흡사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당시(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시법(詩法)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眞情)을 유출하려고 힘썼던 문학관의 한 표현이라 볼 수도 있다. 허균(許筠)의 이러한 시문 혁신론은 17세기에 대두한 농암(農巖)과 삼연(三淵) 등 개성주의 문학의 출현에 일조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허균(許筠)은 군서(群書)에 널리 통하고 전고(典故) 및 역대 사적에 대하여 해박했기 때문에 속문(屬文)에 능하였다. 그의 「궁사(宮詞)」 백수(百首)는 전고(典故)가 많이 쓰인 대표적인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많은 전고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정을 잘 그려낸 명편(名篇)이다. 유교적 예교의 틀에 얽매여 인간의 본성인 인욕을 짓밟혀야만 하는 궁녀의 한과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필치로 형상한 것이다.
이 시는 1610년 여름에 허균(許筠)이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수표교 근처에서 살고 있는 76세의 퇴궁인(退宮人)을 찾아가 인종과 선조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와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모실 당시 궁중생활의 애환과 궁중 풍속, 두 왕후의 후덕(厚德)을 듣고 지은 칠언절구의 작품으로, 당(唐)의 시인 왕건(王建)의 「궁사(宮詞)」 백수(百首)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시가 궁중의 화미함과 궁녀들의 염정적인 생활을 유미적인 관점으로 쓴 것과는 달리 허균(許筠)의 「궁사(宮詞)」는 궁녀들의 희노애락 등 인간의 정감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권필(權韠)과 양경우(梁慶遇)는 궁중의 고실(故實)을 다 갖춘 일대(一代)의 시사(詩史)로 스스로 일가를 이룬 작품이라고 품평하였다.
다음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린 「궁사(宮詞)」 가운데 일곱째 작품이다.
建春門外仗如雷 | 건춘문 밖 의장대 소리 우뢰 같고 |
法府豐呈小宴開 | 사헌부 정재(呈才)로 조그만 잔치 열었네. |
花裏一班宮女出 | 한 줄로 꽃 속에서 궁녀가 나오더니 |
兩宮初幸瑞蔥臺 | 양궁(兩宮)께서 비로소 서총대(瑞蔥臺)로 거동하시네. |
건춘문은 세자궁이 있던 곳이고 서총대는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무관들의 활 쏘는 기예를 점검하던 누대이다. 봄날 임금이 서총대로 거동하는 의례의 장중함과 궁녀들의 화사함을 유려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허균(許筠)은 세상의 예교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과의 화합을 쉽게 이룰수 없었기에 노장(老莊)과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목민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듭 파직을 당하자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의지를 시로써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초하성중(初夏省中)」 2수(首)가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田園蕪沒幾時歸 | 전원이 거칠건만 어느 때나 돌아갈까?? |
頭白人間官念微 | 머리 흰 이 사람은 벼슬살이 뜻이 적네. |
寂寞上林春事盡 | 적막한 산림에 봄일 다 지나가고 |
更看疎雨濕薔薇 | 성긴 비에 장미 젖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되네. |
懕懕晝睡雨來初 | 고요한 낮졸음은 비내릴 때부터요, |
一枕薰風殿閣餘 | 베개머리 더운 바람 관청에 넉넉하네. |
小吏莫催嘗午飯 | 소리야, 점심 먹으라 재촉하지 말아라, |
夢中方食武昌魚 | 꿈 속에서 바야흐로 무창의 고기를 먹나니. |
번잡한 공무에 시달리던 그는 그리던 전원에 돌아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어느 날 성근 비에 촉촉히 젖어드는 장미를 보고 불현듯 귀거래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창의 고기를 먹으며 단잠에 취해있는 자신을 깨우지 말라고 소리(小吏)에게 타이른다.
허균(許筠)의 ‘귀거래(歸去來)’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가 도리어 당대 사대부들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도리어 지탄을 받게 되자 남에게 제어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6. 문장가(文章家)의 시작(詩作)
최립(崔岦)의 문(文)과 권필(權韠)의 시(詩)는 나란히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렸거니와, 특히 의고문(擬古文)을 숭상한 최립(崔岦)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너무 높아 그의 시작(詩作)은 문명(文名)에 가리어 빛을 발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고문(古文)을 시범(示範)한 월상계택(月象谿澤) 또는 계택상월(谿澤象月)로 불리우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역시 그들의 시작(詩作)이 문명(文名)에 가리어 후세의 관심에서 소원(疎遠)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립(崔岦, 1535 중종30~1612 광해군4, 자 立之, 호 簡易ㆍ東皐)
은 문장에 조예를 보여 월상계택(月象谿澤)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특히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에 가서 왕세정(王世貞) 등과 문장을 논하여 그곳의 학자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으며, 왕세정 등 고문에 전심한 문인들로부터 ‘고아간결(古雅簡潔)’하며 법도에 맞는다는 칭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고문체(擬古文體)는 선진문(先秦文)을 극도로 추승하여 고문의 평이성을 거부하고 험벽(險僻)하게 억지 모방을 일삼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최립(崔岦)은 시(詩)보다는 문장(文章)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시도 기건(奇健)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김창협(金昌協)은 최립(崔岦)의 시를 평가하여 소식(蘇軾)과 강서시파(江西詩派)인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시를 배워 풍격이 호횡(豪橫)하고 성향(聲響)이 굳세어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소리같다고 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114에선 “간이 최립은 시에 후산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시는 모름지기 용의(用意)로써 공교로움을 삼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는 의미가 없어 좋은 작품이 없다라고 말했다[崔簡易岦於詩酷好后山 常言詩須以用意爲工 我國人詩無意味 所以未善也]”고 동방의 시를 품평하였다. 이 말은 그의 시가 소황(蘇黃)의 유풍(遺風)을 계승하여 시어의 정절(精切)함과 기상의 교건(矯健)함에 힘쓰는 등 시의 정련(精鍊)에 치중하였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래서 “최립(崔岦)의 어의(語意)는 회회(晦晦)하여 또한 구속됨을 면하지 못하였다[語意似晦 而且未免拘牽].”고 평가하였다.
최립(崔岦)의 「삼월삼일등망경루요양성(三月三日登望京樓遼陽城)」은 최립(崔岦)의 침건(沈健)한 기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城上高樓勢若騫 | 성 위의 높은 누각 날 듯한 기세라, |
危梯一踏一驚魂 | 사다리 한 번 밟자 혼이 한 번 놀라네. |
遙空自盡無山地 | 아득한 허공은 산 없는 평원에 절로 다하고 |
淡靄多生有樹村 | 맑은 아지랑이 나무 있는 마을에 많이 피어 난다. |
北極長安知客路 | 북극의 장안은 나그네 길 알려주고 |
東風上已憶鄕園 | 삼짓날 봄바람은 고향 동산 생각케 하네. |
閑愁萬緖那禁得 | 한가한 시름 만 가닥 어찌 막으리? |
料理斜陽酒一樽 | 해질녘에 술 한잔 마시고파라. |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삼월삼일등망경루(三月三日登望京樓)」라는 제명으로 선발되어 있다. 망경루는 중국 요양현에 있는 누대 이름이다. 간이는 1577년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왔는데 이 시는 그 사행(使行) 때 쓴 것이다. 물경(物境)에서 촉발된 향수(鄕愁)를 잘 그려낸 시이다. 함련(頷聯) 하구(下句)의 ‘담애다생유수촌(淡靄多生有樹村)’에서 특히 ‘유수촌(有樹村)’이 이 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지(山地)가 없는 평원(平原)에 ‘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정절(精切)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허균(許筠)은 이정(李楨)이 정아판(鄭亞判)을 호종하여 연경에 사행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쓴 「송이정종정아판부경(送李楨從鄭亞判赴京)」이라는 오언고시는 최립(崔岦)의 웅혼기굴(雄渾奇崛)한 기상이 잘 드러난 시라고 평가하였다.
文殊路已十年迷 | 문수로를 이미 십년 동안 헤매여 |
有夢猶尋北郭西 | 꿈에도 북곽 서쪽을 찾는다네. |
萬壑倚筇雲遠近 | 만 골을 지팡이 짚고 가니 구름은 원근에서 일고 |
千峯開戶月高低 | 천 봉우리 문을 열어 달빛이 일렁이네. |
磬殘石竇晨泉滴 | 경쇠소리 돌구멍에 잦아들고 새벽 샘물 방울 듣는데 |
燈剪松風夜鹿啼 | 등불은 솔바람에 흔들리고 밤사슴 울음 우네. |
此況共僧那再得 | 이런 정황을 중과 함께 어찌 다시 얻으리오? |
官街七月困泥蹄 | 관가의 칠월 진창에서 말이 고생하네. |
위의 시는 문수(文殊)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를 차운한 「차운문수승권(次韻文殊僧卷)」이다. 문수승의 행적은 살필 수 없으나 이 시를 통하여 최립(崔岦)과 상당한 친교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오랜만에 문수승을 찾은 감회를 저력있게 묘파하고 있어 기굴한 그의 기상을 한 눈으로 읽을 수 있다.
신흠(申欽, 1566 명종21 ~ 1628 인조6, 자 敬叔, 호 象村ㆍ玄翁ㆍ玄軒ㆍ放翁)
은 장유(張維)ㆍ이식(李植)ㆍ이정구(李廷龜)와 함께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불린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여 일찍부터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하며 대명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 등에 참여하여 문운(文運)의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흠(申欽)은 시보다는 문에 특장을 보였다. 정두경(鄭斗卿)은 이러한 그의 특징을 ‘현옹은 문장이 우월하였지만 시는 본색이 아니다[玄翁行文雖優, 詩非本色]’라 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시가 문에 비하여 열세에 있었던 것이지 시 자체가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비단을 얽어놓은 듯이 섬려(纖麗)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특징은 원(元) 후기의 시인인 살도리(薩都利, 字 天錫) 등의 류려청완(流麗淸婉)한 시풍(詩風)을 수용한 데서 기인한다.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동방의 시인 중에 고학(古學)에 뜻을 둔 사람으로는 성현(成俔)ㆍ신흠(申欽)ㆍ정두경(鄭斗卿)나 삼가(三家)가 있다. …… 상촌(象村)은 가릉년간(嘉陵年間)의 제공(諸公)을 배워 용의(用意)가 광대하고 섬밀(纖密)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본래의 재구(才具)와 성조(聲調)가 심히 서로 합치되지 않았다[東方詩人有意於古學者, 成虛白申象村鄭東溟三家 …… 象村學步於嘉陵諸公, 用意非不廣大纖密, 而只是本來才具聲調不甚相合].’고 신흠(申欽)의 시를 품평하였다. 이는 신흠(申欽)이 의고시(擬古詩)에 특장을 보였음을 이른 것이다.
섬려(纖麗)하고 청완(淸婉)한 신흠(申欽)의 「수기유술(睡起有述)」을 본다.
溪上茅茨小 長林四面回 | 시냇가의 띠풀집 작기도 한데 긴 수풀이 사면을 에워싸고 있네. |
夢醒黃鳥近 吟罷白雲來 | 꿈을 깨니 꾀꼬리 가까이 있고 읊조리기 끝나자 흰구름 다가오네. |
引瀑澆階筍 拖筇印石苔 | 폭포수로 계단의 죽순에 물대고 지팡이 질질 끌어 돌이끼에 자국남네. |
柴扉無剝啄 時復爲僧開 | 사립문은 두드리는 사람도 없건만 이따금 다시 중을 위해 열어놓네. |
이 시는 『기아(箕雅)』와 『대동시선』에는 「수기(睡起)」로 되어 있다. 함련(頷聯)이 너무 고와서 도리어 연약함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미련(尾聯)에서 그는 승경(勝景) 속에서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기는 자신의 흥취를 함께할 이 없지만 행여나 찾을지도 모르는 중을 위해서 사립문을 열어놓는다고 하여 시인으로서의 넉넉함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이정구(李廷龜, 1564 명종19~1635 인조13, 자 聖徵, 호 月沙ㆍ保晩堂ㆍ凝菴)
역시 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과 함께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래서 월사(月沙)는 중국과의 각종 외교문서와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작성하여 당시 선조(宣祖)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사행(使行)을 통하여 중국의 문인 석학들과 교유하여 그의 문명을 중국에까지 드날렸다.
이정구(李廷龜)는 시(詩)보다는 문(文)에 장처(長處)를 보였지만 1,600여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시는 「조천록(朝天錄)」, 「동사록(東槎錄)」등 중국과 일본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쓴 작품이 많다.
중국의 문인 왕휘(汪煇)는 「월사집서(月沙集序)」에서 그의 시를 ‘음운이 크고 맑으며 기개가 뭇사람보다 뛰어나 마치 실에 웬 꽃이 그 새로움을 중히 여기고 시든 잎이 그 윤택함을 회복한 듯하여 생동하는 뜻이 넘쳐 흐르고 신기한 이치가 반짝인다[音韻宏亮, 氣槪超群, 若綴之華重其新, 卽槁之葉復其潤, 生意洋然, 神理煥發].’고 평가하였으며, 남용익 또한 그의 『호곡시화(壺谷詩話)』 1과 19에서 월사(月沙)의 시를 가리켜 ‘온화하면서 심원하다[和遠]’, ‘물처럼 고르게 펼쳐져 있다[平鋪如水]’고 평가하였다.
이정구(李廷龜)의 「도중구점(途中口占)」을 보기로 한다.
古店依西岸 河橋柳映灣 | 낡은 객점은 서쪽 언덕에 의지하고 강 다리의 버들은 물굽이에 비치네. |
春生天外樹 日落馬前山 | 봄은 하늘 밖 나무에서 생동해오고 해는 말 가는 앞산에 떨어지네. |
物色驚佳節 年華入病顏 | 만물의 색태는 좋은 계절에 놀라고 한 해의 화려함 병든 얼굴에 드네. |
羈愁無處寫 詩就不須刪 | 나그네 시름 어디에서도 풀어낼 길 없어 시 지어도 모름지기 다듬지 않네. |
청징(淸澄)한 물경의 묘사로 정감의 유로(流露)도 없이 기려(羈旅)의 애수(哀愁)를 유려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명암(明暗)이 번갈아 이어지고 있어 기수(羈愁)를 말하고 있지만 전편의 흐름이 결코 음울하지 않다. ‘춘생(春生)’과 ‘일락(日落)’, ‘가절(佳節)’과 ‘병안(病眼)’ 등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의 대우(對偶) 처리가 긴절(緊切)하면서도 조화를 이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유(張維, 1587 선조20~1638 인조16, 자 持國, 호 谿谷ㆍ默所)
는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식(李植)과 함께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고문(古文)을 시범한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그의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 외에도 『계곡만필(谿谷漫筆)」이 있다. 어려서부터 유가경전(儒家經典)과 노장서(老莊書) 및 양명학(陽明學) 등의 경사(經史) 제서(諸書)를 두루 탐독하고 고문에 전심하여 서른 살을 전후하여 자성일가(自成一家)하였다.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고문 작법을 체득하여 박실(朴實)하고 사달(辭達)한 명편(名篇)을 남겨 송시열(宋時烈)ㆍ이명한(李明漢)ㆍ정조(正祖) 등으로부터 고평을 받았다.
시보다는 문장에 관심이 많았지만 계축옥사(癸丑獄事) 이후 이두(李社) 등의 당송(唐宋)시인들의 시를 섭렵하고 고율시(古律詩) 이천여 수를 짓는 등 시작에도 힘을 기울였다【『谿谷漫筆』, 卷一】. 시는 참다운 감정과 경물의 진솔한 표현이 주가 된다고 하여 박실(朴實)과 사달(辭達)을 중시한 문장론과 접맥된다. 이것은 시의 참신성과 진실성을 주장한 그의 작시오계(作詩五戒)【毋尖巧, 毋滯澁, 毋剽竊, 毋模擬, 毋使疑事僻語】와도 관련된다.
다음은 오언고시의 형식을 빌어 쓴 장유(張維)의 「감흥 오수(感興 五首)」 중의 제사수(第四首)이다.
荊玉隱璞中 長與頑石隣 | 형산의 옥돌이 돌 속에 묻혀 있어 오래도록 막돌과 이웃하였네. |
一朝遭卞和 琢磨爲國珍 | 하루 아침에 화씨(和氏) 만나 갈고 닦아 나라 보배 되었네. |
雖增連城價 無乃毀天眞 | 비록 여러 성과 바꿀 만한 가치 더했지만 천진을 훼손하지 않았던가? |
繁文滅素質 美名戕其身 | 화려한 무늬는 본바탕을 해치고 좋은 이름은 그 몸을 상하게 한다네. |
至人貴沈冥 處世混光塵 | 지인(至人)은 묻혀 사는 삶을 귀히 여겨 처세에 빛과 먼지 가리지 않는다네. |
「감흥 오수(感興 五首)」는 세속의 혼탁함과 신산(辛酸)을 멀리하고 지락(至樂)과 천진(天眞)을 추구하려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화씨벽(和氏璧)의 고사를 인용하여 천진한 삶을 살고자하는 자세를 질박(質朴)하게 서술하고 있다. 화씨벽(和氏璧)은 변화(卞和)에 의하여 발굴된 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연성지가(連城之價)를 갖게 되었으나 구슬 자체의 본바탕은 훼손된 것이다. 구슬을 다듬으면 아름다와지기는 하지만 본바탕을 상실하듯이 사람도 미명(美名)을 추구하다 보면 자신의 천진함을 잃게 된다. 그래서 지인(至人)은 미명(美名)보다는 실질(實質)을 귀히 여겨 본성을 더럽히지 않는다. 이 시 속에는 화미(華美)함보다는 박실(朴實)함을 추구한 장유(張維)의 처세관이 그대로 박혀 있다.
이식(李植, 1584 선조17~1647 인조25, 자 汝固, 호 澤堂)
역시 시(詩)에 비하여 문(文)으로 이름을 떨친 고문가다.
이식(李植)의 시문은 성리학적 전범을 좋아 『수촌만록(水村謾錄)』에서 ‘전중아건(典重雅健)하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거니와 특히 그의 문장은 평이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어 문장을 수련하는 초심자들이 즐겨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는 두보(杜甫)의 당풍(唐風)을 중심으로 하고 초사(楚辭)와 황정견(黃庭堅) 등에도 연맥되어 각체를 두루 구비하였다 하며, 시어(詩語)가 간략(簡略)하면서도 의경(意境)이 정미(精微)하다는 평가를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했지만, 시작(詩作) 역시 문과 마찬가지로 평이한 것이 많다.
새봄에 돌아온 제비를 보고 읊은 「영신연(永新燕)」을 아래에 보인다.
萬事悠悠一笑揮 | 만사는 유유히 한 번 웃음에 날려보내고 |
草堂春雨掩松扉 | 초당에 봄비 내릴 제 솔사립을 닫노라. |
生憎簾外新歸燕 | 얄미워라, 주렴 밖에 새로 온 제비는 |
似向閑人說是非 | 한가로운 사람 향해 시비를 지저귀는 듯하네. |
봄날에 찾아온 제비를 평이한 시어(詩語)로 읊으면서도 그 속에 인간사의 실상을 우의적(寓意的)으로 말하고 있어 시세계의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7. 난중(亂中)의 명가(名家)
정작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전기 마지막 단계의 사단(詩壇)을 황량(荒凉)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전쟁의 아픈 체험을 직접 노래한 이호민(李好閔)ㆍ김상헌(金尙憲)ㆍ이안눌(李安訥) 같은 시인(詩人)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현실의 고경(苦境)을 직접 체험하면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차천로(車天輅)ㆍ권필(權韠)ㆍ이춘영(李春英)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이민구(李敏求)ㆍ정두경(鄭斗卿) 등은 임병(壬丙) 양란(兩亂)이 지나간 뒤의 황량(荒凉)한 시단에서 일어나 이 시기의 공백(空白)에 섬광(閃光)을 발하기도 했다.
이호민(李好閔, 1553 명종8~1634 인조12, 자 孝彦, 호 五峰)
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의주까지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평양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거니와, 난중에 그는 특히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시는 난중에 직접 체험한 여러 정황과 감회를 형상화한 것으로 우국충정이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직접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이며 남용익(南龍翼)ㆍ신위(申緯)ㆍ김택영(金澤榮) 등 제가들에 의해서도 고평(高評)을 받은 명작이다.
이민구(李敏求)는 「오봉선생집서(五峯先生集序)」에서 이호민(李好閔)의 문장이 전인(前人)을 답습하지 않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으며[爲文章, 不肯襲前人其軌轍, …… 自成一家], 이식(李植)도 「옥봉선생집발(玉峯先生集跋)」에서 그의 문장은 실질이 있으면서도 문채가 있어서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서도 문의(文意)와 문리(文理)가 명창하여 스스로 진부한 누습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또 그의 시는 상조(常調)를 없이 하고 더욱이 죽은 시어(詩語)를 꺼려하여 기이하면서도 빼어나서 두보(杜甫)의 음조를 얻었다고 하였다[其文有質有華, 雖不囿於格, 而意明理暢, 自不墮陳言臼壘中, 其詩絕去常調, 尤忌死語, 奇峭挺拔, 得老杜夔峽之音].
이것은 이호민(李好閔)의 시문이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참신한 시세계를 구현하고 있음을 호평한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의 대표작인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은 선조(宣祖)를 모시고 의주로 피란갔을 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도(三道) 병사들이 한양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치기 위하여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干戈誰着老萊衣 | 전쟁 중에 그 누가 노래자의 옷을 입으랴?? |
萬事人間意漸微 | 인간 만사 점차 뜻이 희미해지네. |
地勢已從蘭子盡 | 지세는 이미 난자도에서 다 하였고 |
行人不見漢陽歸 | 한양에서 돌아오는 행인은 찾아볼 수 없네. |
天心錯漠臨江水 | 임금님의 마음은 아득히 압록강까지 다달았는데 |
廟筭凄凉對夕暉 | 조정의 대책은 처량하게 석양만 쳐다보네. |
聞道南兵近乘勝 | 남도병이 거의 승승장구한다는 말 들었건만 |
幾時三捷復王畿 | 어느 때에 세 번 이겨 한양성을 회복할까? |
이 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기막힌 정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은 의주 행재소까지 임금을 모셨기 때문에 임금의 몽진(蒙塵)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극한 상황을 직접 목도(目睹)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함련(頷聯)의 직절한 표현도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이 시의 경련(頸聯)은 당시의 동년배로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수작이라고 평하였으며 김택영은 그의 문집에서 이 시는 고금에 드문 훌륭한 작품으로 이백(李白)ㆍ두보(杜甫)라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다음은 이호민(李好閔)의 「난후필운춘망(亂後弼雲春望)」이다.
荒城無樹可開花 | 황폐한 성곽엔 꽃 핀 나무마저 없고 |
惟有東風落暮鴉 | 애오라지 봄바람에 저녁 까마귀만 내려앉네. |
薺苨靑靑故宮路 | 냉이풀만 푸릇푸릇한 고궁 길 가 |
春來耕叟得金釵 | 봄이 되자 밭 갈던 늙은이 금비녀를 줍네. |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뒤에 인왕산 자락에 있는 필운대(弼雲臺)에서 봄경치를 보면서 지은 시이다. 필운대 부근의 인가에는 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므로 서울 사람들의 봄꽃 구경은 이곳을 항상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그러나 전란이 끝난 뒤에는 봄이 와도 꽃을 피울 나무마저 없고 궁인들이 드나들던 고궁의 길가엔 냉이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다. 시인은 밭가는 늙은이가 비녀를 줍는 모습을 상정(想定)하여 전쟁 중에 왜구에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황급히 달아나다 금비녀를 잃어버린 어느 궁인의 참사로까지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전쟁의 참상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참모습이 이런 것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차천로(車天輅, 1556 명종11~1615 광해군7, 자 復元, 호 五山)
는 조선중기의 문신, 문학가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아버지 식(軾), 동생 운로(雲輅)와 함께 삼소(三蘇)로 병칭되기도 하였으며 가사(歌辭)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여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속작(速作)에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시에 능하여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이수광(李睟光)은 차천로의 문장을 평하여 기상이 웅건(雄健)하고 기장(奇壯)하여 정련(精鍊)에 힘쓰지 않아 장강(長江)과 대해(大海)가 쏟아져 내려도 더욱 다하지 않는 것과 같았으며 대우(對偶)의 시문에 특히 장기를 보였다고 하였다. 그는 시문의 조탁보다는 웅혼한 기상의 표출에 진력하여 고려시대의 거필(巨筆)인 이규보(李奎報) 이후 제일인이라고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스스로 ‘만리장성에 종이를 붙여놓고 나로 하여금 붓을 내달리게 한다면 성이 다할지라도 나의 시는 다하지 않을 것이다’라 하여 그의 도도하고 무궁한 시재를 자부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사신가서 남긴 4~5천수의 시와 이여송(李如松)을 환송하면서 하루밤에 쓴 칠언배율과 칠언율시 각각 백 수 등도 그의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많은 칭상을 받았다. 오산은 대체로 절구나 율시보다는 배율같은 장편에 특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는 차천로(車天輅)의 「제영월루(題詠月樓)」를 본다.
愁來徙倚仲宣樓 | 시름 속에 왕찬(王粲)의 누대에 옮겨 기대니 |
碧樹凉生暮色遒 | 푸른 나무에 서늘한 기운 일고 저녁 빛 다가오네. |
鼇背島空風萬里 | 자라 등 같은 바다에는 만리 바람 불어오고 |
鶴邊雲散月千秋 | 학의 날개 같은 구름 다한 곳에 천년의 달 걸렸네. |
天連魯叟乘桴海 | 하늘은 한나라 사신이 뗏목타던 길에 이어졌고 |
地接秦童採藥洲 | 땅은 진나라 시동들이 약초 캐던 섬에 닿아 있네. |
長嘯一聲凌灝氣 | 긴 파람 한 소리로 천지기운을 압도하니 |
夕陽西下水東流 | 석양은 서쪽으로 지고 강물은 동으로 흐르네. |
영월루는 강원도 간성군에 있는 누대이다. 이 시는 오산이 명천(明川)에 유배가서 지은 시와 함께 그의 웅혼한 시상을 잘 보여준다. 허균(許筠)은, 명천에 유배가서 지은 ‘바람결에 성난 소리 발해에서 들려오고, 눈발 속에 근심스런 얼굴로 음산한 산을 바라보네[風外怒聲聞渤海, 雪中愁色見陰山].’를 웅혼한 기상이 깃든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한 바 있거니와, 「제영월루(題詠月樓)」 시도 이에 못지않게 시상이 시공을 초월하는 광대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가시적인 물경의 묘사에서 시작하여 천지자연의 기운을 압도하는 자신의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시상을 급전하여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김택영(金澤榮)은 오산(五山)의 시가 호건(豪健)함을 위주로 했다는 시평을 거부하고 때때로 섬연(纖姸)한 시작(詩作)도 있다고 평했다. 다음의 「강야(江夜)」 시는 이러한 시세계의 단면을 명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夜靜魚登釣 波淺月滿舟 | 밤이 고요하여 고기는 낚싯대에 오르고 물결 잔잔하여 달빛이 배에 가득차네. |
一聲南去雁 嗁送海山秋 | 한 소리 강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바다와 산의 가을을 울며 보내네. |
이 시는 마치 한 편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밤에 달빛을 받으면서 고기를 낚는 유유자적한 모습과 강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모습이 눈에 선연하게 그려져 있다. 전편이 핍진한 사경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으면서도 바깥짝 두 구 속에 향숙(鄕愁)의 정을 가탁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권필(權韠, 1569 선조2~1612 광해군4, 자 汝章, 호 石洲)
은 권근(權近)의 후손이자 권벽(權擘)의 오자(五子)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한 글자의 오서(誤書)로 축방(黜榜)당한 이후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고 방랑하면서 시작에 진력하였다. 그의 시는 두보(杜甫)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를 배워 시어(詩語)의 뜻이 지극함에 이르고 구법이 아름다워서 당대 및 후세의 대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유(張維)는 「석주집서(石洲集序)」에서 ‘그 문장이 이루어짐에 정경이 알맞고 성률이 모두 조화로와 대개 천기가 흘러 움직이지 않은 것이 없다[及其章成也, 情境妥適, 律呂諧協, 蓋無往而非天機之流動也]’고 하여 천기의 유동함과 정경의 교융을 높이 평가하였고 허균(許筠)도 그의 시사(詩詞)의 아름다움과 시의 유장한 여운을 칭송하였다.
김득신(金得臣)은 『종남총지(終南叢志)』 24에서 관각의 대가인 정사룡(鄭士龍)도 고시 장편에는 공교롭지 못했으나 ‘오직 석주 권필(權韠)만이 고시체에 깊이 밝아 그의 「충주석(忠州石)」과 「송호수재((送胡秀才)」 등의 시편은 빼어난 가작[唯權石洲深曉古詩體, 其「忠州石」ㆍ「送胡秀才」等篇, 絶佳]’이라고 칭송하여 그의 장처가 장편고시에 있음을 말하였다.
그의 대표작 증의 하나인 「충주석(忠州石)」을 보기로 한다.
忠州美石如琉璃 | 충주의 좋은 돌 유리와 같아서 |
千人劚出萬牛移 | 천 사람이 캐내어 만 마리 소로 옮기네. |
爲問移石向何處 | 묻노니 어디로 이 돌을 옮기는가? |
去作勢家神道碑 | 가져다가 세도가의 신도비를 만든다네. |
神道之碑誰所銘 | 신도비 쓰는 이 그 누구인가? |
筆力倔強文法奇 | 필력도 굳세고 문체도 기이하네. |
皆言此公在世日 | 모두들 말하네, “이 분은 살아계실 적에 |
天姿學業超等夷 | 높은 자질과 학문은 무리보다 뛰어났고, |
事君忠且直 居家孝且慈 | 임금을 섬김에 충직하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자애로왔네. |
門前絶賄賂 庫裏無財資 | 문전에는 뇌물이 끊기고 창고에는 재물도 없었다네. |
言能爲世法 行足爲人師 | 말은 능히 세상의 법도 되고 행실은 남들의 사표가 되었네. |
平生進退間 無一不合宜 | 살아 생전 나아가고 물러남에 한 가지도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네. |
所以垂顯刻 永永無磷緇 | 비석에 이름을 크게 새긴 까닭은 영원토록 아니 닳게 함이라네.” |
此語信不信 他人知不知 | 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남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
遂令忠州山上石 | 부질없이 충주의 산돌을 |
日銷月鑠今無遺 | 날로 깎고 달로 녹여 이제는 없다네. |
天生頑物幸無口 | 천생으로 저 돌은 입이 없어 다행이지, |
使石有口應有辭 | 만약 입이 있었다면 응당 말이 있었으리. |
「충주석(忠州石)」은 장편고시의 형식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의 「청석(淸石)」을 본받아 지은 것으로 당시 부패한 사대부들의 위선과 가식적인 생활의 이면을 폭로한 대표적인 시작이다. 이 외에 「고의(古意)」, 「행로난(行路難)」 등도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권필(權韠)이 장편에 특장이 있다고 한 제가들의 평가도 권필(權韠)의 높은 풍자성과 예술성에 공감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당대 현실에 대하여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는 것은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별집(別集)을 편찬하면서 풍자가 너무 심한 것과 승려들과 화답한 시 500여수를 산삭(刪削)하고 문집에 싣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권필(權韠)이 이처럼 장편고시의 형식을 이용하여 현실 풍자를 일삼은 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과 스승 정철(鄭澈)의 유배, 광해군의 폭정과 인목대비의 유폐 등 당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품이 본래 올곧고 세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외척 유씨(柳氏)들의 전횡을 비판하다. 유배의 고초를 겪는 등 순탄치 않은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명한 「궁류(宮柳)」【原題는 「聞任叔英削科」】 시도 이러한 기질과 유관한 것임은 물론이다.
권필(權韠)이 스승인 송강 정철(鄭澈)의 무덤에 쓴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은 정철(鄭澈)의 사설시조인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사의(辭意)를 따서 인생의 무상함을 피력한 절창(絶唱)으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와 비견되곤 한다. 이 시는 정경(情境)이 혼융되고 여운이 오래도록 가는 수작으로 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들에 의하여 널리 구송되기도 하였다.
空山木落雨蕭蕭 | 빈 산에 낙엽지고 부슬부슬 비내리니 |
相國風流此寂寥 | 상국의 풍류도 이처럼 쓸쓸하구려. |
惆悵一杯難更進 | 애달퍼라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렵건만 |
昔年歌曲卽今朝 | 지난 날의 그 노래 오늘을 두고 지었음이라. |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21에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와 이 시를 비교하여 석주의 수구(首句)는 마치 옹문(雍門)의 거문고 소리가 홀연히 귀를 놀라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하고[盖權之首句, 有如雍門琴聲忽然驚耳] 이어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와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격조는 권필(權韠)의 시가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雖難優劣, 然格調則權勝].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통하여 그의 탁월한 시재(詩才)를 과시하고 있거니와, 석주(石洲) 권필(權韠)도 그가 제작한 「주생전(周生傳)」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보지 못한 사(詞)의 솜씨를 시범함으로써 시인(詩人)은 소설류(小說類) 작품을 제조할 때에도 시의 기능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춘영(李春英, 1563 명종18~1606 선조29, 자 實之, 호 體素齋)
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시문으로 자호(自豪)한 문장가이다. 이춘영은 여러 제가의 시문을 다독(多讀)하여 시문을 지음에도 정련에 힘쓰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의 시문은 부려(富麗)함을 전상(專尙)하여 시격이 높지는 않지만 시재가 도도하고 호한(浩汗)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의 호한함과 정련에 힘쓰지 아니함은 도리어 그의 시가 번쇄하고 난잡한 데로 나가게도 하였다.
신흠(申欽)은 「체소집서(體素集序)」에서 그의 글은 제자(諸子)와 소식(蘇軾)의 글들을 가슴 속에 융합하여 창일한 기운으로 쏟아내는 것이 마치 봄에 저절로 꽃이 피고, 고였던 물이 터져나가는 듯하다고 평하였다.
이춘영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정철(鄭澈)의 건제문제(建諸問題)에 연루되어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을 갔다.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에 철령을 넘으면서 지은 「적행(謫行)」은 『기아(箕雅)』와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선발되고 있으며 『체소집(體素集)』에는 제명(題名)이 「철령(鐵嶺)」으로 되어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夜發銀溪驛 晨登鐵嶺關 | 밤에 은계역을 떠나 아침에 철령관을 오른다. |
思親雙鬢白 戀關一心丹 | 어버이 생각에 귀밑털 희어지고 임금님 그리움에 촌심(寸心)이 붉다. |
客路連三水 家鄕隔萬山 | 나그네 길은 삼수(三水)로 이어지고 고향은 만 겹 산에 막히었네. |
未應忠孝意 蕪沒半途間 | 충효(忠孝)의 뜻 다 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묻히고 말았네. |
오언(五言)이기 때문에 기운이 더욱 힘차게 실리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강개(慷慨)에 흐르고 있지만, 전편에 달리는 기상을 느끼게 하고 있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은계역은 철령으로 가는 도중의 역참으로 강원도 회양에 속해 있다. 유배가는 참담한 심정보다 충효의 포부를 펴지 못하는 현실에 상심하고 있다.
다음은 이춘영(李春英)의 「영보정(永保亭)」【원제 「湖西水營挹翠軒之詩」】 시 4수 중의 제3수다.
雉堞縈紆樹木間 | 성곽은 나무와 물에 에둘려 있고 |
金鼇頂上壓朱欄 | 금빛 자라 머리 위에 붉은 난간이 누르고 있네. |
月從今夜十分滿 | 달은 오늘밤을 좇아 십분 가득차고 |
湖納晩潮千頃寬 | 호수는 만조를 받아들여 천 이랑이나 넓네. |
酒氣全禁水氣冷 | 술기운은 냉랭한 물기운을 이기고 |
角聲半雜江聲寒 | 나팔 소리는 차가운 강물 소리와 뒤섞였네. |
共君相對不須睡 | 그대와 함께 마주하여 모름지기 잠들지 않고 |
待到曉霧淸漫漫 | 새벽 안개가 아득히 개는 것을 기다리리. |
영보정(永保亭)은 충청남도 보령군에 있는 정자로 수군절도사의 병영 안에 있다. 정자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많이 찾던 곳으로 일찍이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로 알려진 박은(朴誾)이 이곳에 와서 「영보정(永保亭)」시 4수를 지어 그 승경을 기렸다. 허균(許筠)은 이춘영(李春英)의 「영보정(永保亭)」은 박은(朴誾)의 「영보정(永保亭)」을 모의한 것으로 운조(韻調)가 박은(朴誾)에 비하여 한 단계 낮으나 호탕(豪宕)하고 방사(放肆)한 풍격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함련은 수사기교가 극치를 이루고 있으면서 호탕한 기상도 함께 읽게 해주는 부분이다. 성색(聲色)과 원근(遠近)의 대비를 통하여 실경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오탕(傲宕)한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
임숙영(任叔英, 1576 선조9~1623 인조1, 자 茂叔, 호 疎庵)
은 광해군의 난정과 척신(戚臣)들의 무도함을 논박하다 유배의 어려움을 겪는 등 직절청명(直節淸名)으로 이름을 남긴 문신이다. 소암은 특히 대책문(對策文)에 능했는데 그의 변려문(騈儷文)은 육조(六朝)의 서릉(徐陵)과 유신(庾信), 초당사걸(初唐四傑)인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빙왕(駱賓王)의 체제를 본받아 정두경(鄭斗卿)의 가행체(歌行體)와 병칭될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임숙영(任叔英)은 시(詩)보다는 문(文)에 능했지만 특히 시에 있어서는 굉편거제(宏編巨製)의 장편에 보였다. 오언배율(五言排律) 「술회(述懷)」, 칠언배율(七言排律) 「관창(觀漲)」 삼수(三首)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원제(原題)가 「술회기정강화이동악안눌사군칠백십육운(述懷寄呈江華李東岳安訥使君七百十六韻)」인 「술회(述懷)」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에게 부친 오언배율(五言排律) 716운(韻)의 장편시로 우리나라의 역사, 동악의 덕행에 대한 찬사와 자신과의 교우관계 및 인생관을 함께 말한 작품이다. 두보(杜甫)의 시(詩), 이규보(李奎報)의 삼백시(三百詩) 등의 장편시는 예로부터 있어왔지만, 소암처럼 칠백운(七百韻)이나 되는 장편을 창작한 것은 그 유례가 없었다. 그래서 김득신(金得臣)은 『종남총지(終南叢志)』 16에서 이 시를 광박기벽(廣博奇僻)하여 진실로 천재걸작(千載杰作)이라고 고평하였다.
다음의 「조행(早行)」은 임숙영(任叔英)의 강개지정(慷慨之情)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客子就行路 早乘西北風 | 나그네 길 떠남에 새벽에 서북풍 맞으며 간다. |
鷄聲月落後 水氣曉寒中 | 달 진 뒤 첫 닭이 울고 새벽 추위에 물기운 인다. |
孤店鳴雙杵 空林語百蟲 | 외로운 주막에 쌍다듬이 울고 빈 숲에 온갖 벌레 울어댄다. |
自憐千里外 長作一飛蓬 | 가련쿠나, 천 리 밖에서 오래도록 떠돌이 신세 된 것이!! |
임숙영(任叔英)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에 직언을 서슴지 않아 절의지사(節義之士)로 명망이 있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 문제로 초야(朝野)의 의론이 분분할 때 임숙영은 폐비론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폄출(貶黜) 당하여 외방을 전전하다 광주(廣州)에 은거하였다.
위의 시는 바로 이 때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암울한 현실에의 울분과 여수(旅愁)를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점(孤店)’과 ‘공림(空林)’ 등은 자신의 비절(悲切)한 처지를 신외(身外)의 물을 통하여 강하게 드러내는 데 매우 적절하게 선택된 것이다.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은 제명(題名) 그대로 새벽에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움직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에 이르러서는 적막한 나그네의 처지를 진솔하게 그려내는, 정적(靜的)인 구성의 묘를 얻고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3~1652 효종 3, 자 叔度, 호 淸陰)
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파직되었고 1639년 명(明)을 치기 위하여 청(淸)의 출병을 요구할 때에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심양(瀋陽)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는 절의를 표방한 작품으로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의 한시도 대부분 난세에 대한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후대의 제가들이 청음(淸陰)을 조선의 소무(蘇武)라고 일컬은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가 심양에 구금되어 있을 때 읊은 「송추일유감(送秋日有感)」은 다음과 같다.
忽忽殊方斷送秋 | 쓸쓸히 낯선 곳에서 가을을 다 보내니 |
一年光景水爭流 | 일년의 세월이 물처럼 흐르네. |
連天敗草西風急 | 하늘에 닿은 시든 풀은 서풍에 급하고 |
羃磧寒雲落日愁 | 모래 사막의 찬 구름 석양에 시름겹네. |
蘇武幾時終返國 | 소무(蘇武)는 그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
仲宣何處可登樓 | 중선(仲宣)은 어느 곳에서 누각에 오를지. |
騷人烈士無窮恨 | 소인(騷人) 열사(烈士)의 끝없는 한, |
地下傷心亦白頭 | 지하(地下)에서도 마음 아파 또한 백두(白頭)가 되었으리. |
‘연대패초(連大敗草)’와 ‘멱적한설(羃磧寒雪)’, ‘소무(蘇武)’와 ‘중선(仲宣)’ 등은 모두 호지(胡地)에 잡혀가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거니와 결연히 자신의 절의(節義)를 드러내보인 미련(尾聯)의 작법(作法)은 범상(凡常)한 시인으로서는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경련(頸聯)에서 소무(蘇武)와 왕찬(王粲, 字 仲宣)의 고사를 빌려 쓰고 있지만, 소무는 한나라 때 흉노에 잡혀가 19년 동안이나 북해(北海)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절의를 굽히지 않은 절신(節臣)이고, 왕찬은 삼국시대 초기에 장안에 난리가 나자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몸을 기탁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인물이고 보면, 이 작품에서 작자가 노린 것은 스스로 절의의 선비로서, 또는 강개한 시인으로서의 구실을 함께 다하고 있음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 뒤 화산(花山)에 은거할 때 어느 날 밤 달빛 아래를 배회하면서 지은 「유감(有感)」도 암울했던 지난날의 회한(悔恨)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南阡北陌夜三更 | 남북의 밭두둑길 밤은 삼경인데 |
望月追風獨自行 | 보름달 가을 바람에 홀로 걷노라. |
天地無情人盡睡 | 천지는 무정하여 사람 모두 잠자건만 |
百年懷抱向誰傾 | 백년 회포 누구에게 기울일까? |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오랑캐에게 짓밟힌 민족의 자긍심, 그 치욕의 한을 씻을 길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배회하는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안눌(李安訥, 1571 선조4~1637 인조15, 자 子敏, 호 東岳)
은 목릉성세기(穆陵盛世期)에 권필(權韠)과 함께 이재(二才)로 칭송받은 시인이다.
동악(東岳)은 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로 알려진 이행(李荇)의 증손이자 박은(朴誾)의 외증손으로 시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은 시인이다.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은 그의 재종질이다. 동악(東岳)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권필(權韠)ㆍ이호민(李好閔)과 함께 그들의 시재(詩才)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석주(石洲)와 함께 전대 문학의 폐해를 시정하고 새로운 문풍을 개척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악(東岳)은 권필(權韠)과는 달리 시작에 있어 정련(精鍊)을 중시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54에서 석주(石洲)와 동악(東岳)의 시를 비교하면서 석주(石洲)는 돈오(頓悟)의 시풍, 동악(東岳)은 점수(漸修)의 시풍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함께 두보(杜甫)와 한유(韓愈)를 전범으로 삼아 시문에 진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을 대표로 하는 당풍(唐風)의 시작(詩作)들이 주로 만당(晚唐)의 풍습에 빠져 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동악(東岳)은 두보의 봉군수관(奉君守官)과 우국충정(憂國忠情)의 시정신을 계승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상을 사실적 기법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두보의 시정신을 수용했기 때문에 동악(東岳)의 시풍은 혼융(混融)하면서도 침울한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시도(詩道)를 논한 김창흡(金昌翕)은 『삼연집(三淵集)』 「습유(拾遺)」 권15에서 특히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시에는 본색(本色)이 없음을 개탄,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이안눌(李安訥)의 시작(詩作) 중에서도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린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은 그가 후일 동래부사로 부임했을 때 동래성의 함락으로 빚어진 당시의 처참한 상황과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애국충절을 기린 작품으로 이호민(李好閔)의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시와 병칭되고 있으며, 「당사탄(當死歎)」은 죽음보다 못한 전쟁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세를 울부짖으며 임금을 위해서 죽음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아래의 「등총군정(登統軍亭)」은 멀리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물 위에 떠있는 마름과도 같은 조그마한 나라의 운명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六月龍灣積雨晴 | 유월의 용만에 장마비 개어 |
平明獨上統軍亭 | 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茫茫大野浮天氣 | 아득한 넓은 들에 하늘 기운 떠 있고 |
曲曲長江裂地形 | 구비구비 긴 강은 땅 모양 갈라놓았네. |
宇宙百年人似螘 | 우주의 백년 세월에 인생은 개미같고 |
山河萬里國如萍 | 만리 산하에 나라는 부평초와 같네. |
忽看白鶴西飛去 | 문득 흰 학이 서쪽으로 날아가는 걸 보니 |
疑是遼東舊姓丁 | 옛날 요동의 정령위 아닌가 하네. |
동악(東岳)은 칠율(七律)에 특장을 보였는데 이 시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오래동안 계속되던 장마비가 갠 후 통군정에 올라 광대무변한 대지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땅덩어리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마름만큼이나 작은 것을 자탄하면서도 웅대한 그의 호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양경우(梁慶遇)와 조성기(趙聖期)는 이 시를 대가(大家)의 풍도가 있는 작품으로 품평하였는데, 이는 동악(東岳)의 시상이 웅혼함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다음은 석주(石洲)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과 함께 송강(松江)의 국문시가를 노래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이다. 이 시의 원제는 「용산월야 문가희창고인성정상공사미인곡 솔이구점 시조지세곤계(龍山月夜 聞歌姬唱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 率爾口占 示趙持世昆季)」로 밤에 한 가희(歌姬)가 송강(松江)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지은 작품이다.
江頭誰唱美人詞 | 강가에서 그 누가 미인곡을 부르나? |
正是孤舟月落時 | 외로운 배에 달빛 지는 바로 그때라네. |
惆悵戀君無限意 | 슬프도다 님 그리는 무한한 이 뜻을 |
世間惟有女郞知 | 세상에선 애오라지 여랑(女郞)만이 알고 있네. |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21에서 이 시를 석주(石洲)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과 비교하여 “이안눌(李安訥)의 마지막 구절은 마치 적벽의 퉁소 소리가 실처럼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아서 무한한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李之末句, 有如赤壁簫音不絶如縷, 猶含無限意思].”고 품평하였다.
이 시는 청렴하고 곧은 선비가 임금에게 용납되지 못함을 슬퍼하고 간신들이 아첨하고 시기하는 현실을 탄식하는 언외지의(言外之意)가 함축되어 있다. 정쟁(政爭)의 와중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스승 정철(鄭澈)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가희(歌姬)의 노래를 통하여 상기된다. 정련(精練)에 힘쓰면서 무한한 함축미를 내포하여 시가의 정취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민구(李敏求, 1589 선조22~1670 현종11, 자 子時, 호 東洲ㆍ觀海)
는 이수광(李睟光)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부자가 함께 문명(文名)을 떨쳐 아버지 수광(睟光)은 시(詩)로, 아들 민구(敏求)는 부(賦)로 병칭되기도 하였다. 이민구는 평생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는 등 집필에 왕성한 열의를 갖기도 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71번에서 이민구(李敏求)의 시세계를 평하여, “처음에는 글이 몹시 어려워 읽기 힘들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왕을 강화에 안전하게 모시지 못하여 굴욕을 당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간 이후 시에 진력하여 점점 명창(明暢)하게 되었다[其詩初以佶屈爲主, 晚廢江外, 益肆力焉, 而漸近明暢]”고 하였다. 남용익(南龍翼)도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명창(明暢)하면서도 격조(格調)가 있으며 한광(閑廣)한 풍격을 지닌 시가 많다고 하였다.
다음은 『기아(箕雅)』에 선발된 「월계협(月溪峽)」이다.
廣陵江色碧於苔 | 광릉의 강물 빛이 이끼보다 푸르러 |
一道澄明鏡面開 | 온 길이 맑고 밝아 거울이 열린 듯하네. |
夾岸楓林秋影裏 | 양 언덕의 단풍숲은 가을 그림자 속인데 |
水流西去我東來 | 물은 서로 흘러가고 나는야 동으로 온다. |
월계협(月溪峽)은 현재의 양평군에 있는 계곡으로 남한강가에 자리잡고 있어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 시는 가을날의 풍광을 정중동(靜中動)의 상황으로 표현하여 시중유화(詩中有畵)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맑고 푸른 강물, 붉게 물든 산빛 등 선명한 회화적 심상, 흐르는 강물과 주위의 풍광을 완상하며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은 동적인 미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결구(結句)는 물의 흐름과 기려(羈旅)를 병치시켜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게 하여 무한한 시적 여운을 느끼게 한다.
다음은 이민구(李敏求)가 통도사(通度寺)를 유람하면서 지은 「유통도사(遊通度寺)」 시이다.
岧嶢鷲嶺閟禪居 | 높디 높은 취령(鷲嶺)은 선원(禪院)을 깊숙히 감싸고 |
石路莓苔步屧徐 | 돌길에 이끼 끼어 발걸음이 더디네. |
忽有高僧來款我 | 갑자기 웬 고승이 나를 환대하는데 |
都無俗事可關渠 | 도무지 세속의 일과 관계될 만한 것이 없네. |
千峯樹色和雲冷 | 천봉의 나무 빛은 구름과 어우러져 차갑고 |
一壑鍾聲帶雨疏 | 온 골짜기의 종소리는 비 머금어 성기네. |
若道三幡終不妄 | 삼번(三幡)을 말하여도 망령되지 않다면 |
吾將卽此問眞如 | 내 장차 이에 나아가 진여(眞如)를 물으려네. |
이 작품에서는 시의 정련(精鍊)에 힘을 기울인 흔적을 볼 수 있다. 함련(頷聯)에서는 심지어 승(僧)ㆍ속(俗), 아(我)ㆍ거(渠) 등 인사(人事)에까지 대우(對偶)에 대한 고려를 극진히 하고 있으며, 경련(頸聯)에서는 한 연 속에 수목(數目)ㆍ지리(地理)ㆍ성색(聲色)ㆍ천문(天文) 등의 여러 가지 대장(對仗)을 공교하게 구사하여 율시의 대구 수법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명한(李明漢, 1595 선조28~1645 인조23, 자 天章, 호 白洲)
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문장가로 관각응제(館閣應製)의 외교서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으며 아버지 정구(廷龜), 아들 이상(一相)과 더불어 삼대(三代)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당시의 문단을 빛내었다. 이명한(李明漢)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척화파(斥和派)로 지목되어 두 차례나 심양에 끌려가는 등 절의지사(節義志士)의 삶을 영위하였는데 그가 심양으로 잡혀갈 때 지은 육수(六首)의 시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명한(李明漢)은 이식(李植)과 장유(張維)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는 등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후대에 김만중(金萬重)과 홍만종(洪萬宗)도 이명한은 문사(文思)가 민속(敏速)하며 “재주가 무리에서 뛰어나다[天才迢衆]”고 하였거니와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특히 그의 시는 호일(豪逸)한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선 몇몇 작품은 청절(淸切)하다고 하였다.
다음의 「백마강(白馬江)」 시는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를 유람하다가 읊은 작품이다.
何處高臺何處樓 | 높은 대는 어느 곳에, 누각은 어느 곳에? |
暮山千疊水西流 | 저녁 산 천 겹인데 강물 서쪽으로 흐른다. |
龍亡花落他時事 | 용이 없어지고 꽃 떨어진 것도 옛날 일인데 |
謾有浮生不盡愁 | 부질없이 뜬 인생 끝없이 시름하네. |
원제(原題)는 「백마강시이중심록(白馬江示李仲深穆)」이다. 백마강에서 조용히 백제의 지난 역사를 회고하고 있는 작품이다.
‘용망(龍亡)’이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침공할 때 강물의 파도가 거세어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백마를 묶어 미끼로 삼아 용(龍)을 낚아내었다는 전설을 말한 것이다. 백제의 멸망과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落花巖) 고사는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실일 뿐인데 부질없이 인간들은 시름겨워한다는 것이 이 시의 주지(主旨)다.
동사의 사용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어 회고시(懷古詩)에 걸맞게 전편의 분위기 또한 정적(靜的)이다.
다음은 이명한(李明漢)이 경기도 남양주군 양수리(兩水里) 부근에 있는 수종사(水鐘寺)를 유람할 때 지은 「수종사(水鐘寺)」 시이다.
暮倚高樓第一層 | 날 저물어 높은 누각 제일층에 기대니 |
石壇秋葉露華凝 | 석단의 가을잎에 이슬꽃이 엉기었네. |
群山衮衮蟠三縣 | 뭇산들은 연이어져 삼현(三縣)에 서리었고 |
大水滔滔謁二陵 | 큰물은 도도히 흘러 이릉(二陵)을 알현하네. |
煙際喚船沽酒客 | 안개 저 편에는 배를 불러 술사는 나그네요. |
月邊飛錫渡江僧 | 달빛 아래는 석장 날리며 강 건너는 중이로다. |
酣來暫借蒲團睡 | 술 취하여 잠시 동안 포단에서 잠 들었는데 |
古壁蓮花照佛燈 | 낡은 벽의 연꽃에 불등이 비추이네. |
수종사는 세조 때 5층의 돌계단을 쌓아 중창한 사찰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풍광이 아름다워 서거정(徐居正)은 동국 제일의 승경(勝景)이라고 칭상하기도 하였다.
광주ㆍ양평ㆍ양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어 ‘삼현(三縣)’이라 했으며 주변에 태종과 성종의 왕릉이 있기 때문에 이릉(二陵)을 말하고 있다. 경련(頸聯)의 흥치(興致)와 미련(尾聯)의 매끄러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의심날 정도다. 관각(館閣)의 솜씨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 아닐 수 없다.
정두경(鄭斗卿, 1597 선조30~1673 현종14, 자 君平, 호 東溟)
은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정언(正言)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어적십난(禦敵十難)」의 상소를 올렸으며 1650년 풍시(諷詩) 27수를 효종에게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간흉(奸凶) 정순붕(鄭順朋)의 증손으로 이것이 그의 사회적 진출에 멍에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의 조상 중에는 렴(磏)과 같은 문사(文土)가 있으며 아버지 지승(之升)도 문명(文名)을 떨쳐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가계(家系)를 이어 그 역시 시명(詩名)으로 일세(一世)를 울렸다. 임병양난(壬丙兩亂) 이후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는 소단(騷壇)의 불모(不毛)에서 우뚝 솟아 이민구(李敏求)와 더불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시서(詩書)에 모두 능통하였는데 특히 그의 가행체(歌行體)는 당대 임숙영(任叔英)의 변려문(騈儷文)과 함께 중국의 문인들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도 “이백(李白)과 두보는 감당할 수 없으나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등은 혹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李杜則不敢當矣, 至於高岑輩 或可比肩. 『종남총지(終南叢志)』 25]” 할 정도로 시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남용익(南龍翼)도 『호곡시화(壺谷詩話)』 40에서 “오율(五律)과 칠절(七絶) 모두 그의 특장인데 칠언(七言)의 가행체(歌行體)는 이백(李白)ㆍ두보(杜甫)와 흡사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것[五律七絶皆其所長, 而至若七言歌行則彷彿李杜 我國前古所未有也]”이라 하여 정두경의 가행체를 고평(高評)하였다.
시의 풍격은 주로 장건(壯健)ㆍ웅혼(雄渾)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작시(作詩)에 있어 전고(典故)와 용사(用事)를 엄격히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학자의 안광(眼光)에 비친 정두경의 시세계는 부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 63에서 그의 시에 대하여 “그 의기(意氣)가 앞사람의 그림자만 좋아 그 시가 비록 청신호준(淸新豪俊)하고 세속의 악착스럽고 썩은 기운이 없지만 그 정치한 말과 오묘한 의사(意思)는 고인(古人)의 깊은 경지를 엿볼 수 없고, 멋대로 휘달렸지만 시가(詩家)의 변요(變要)를 극진히 하지 못했다[鄭東溟 …… 意氣追逐前人影響, 故其詩, 雖淸新豪俊, 無世俗齷齪庸腐之氣. 然其精言妙思, 不足以窺古人之奧, 橫騖旁驅, 又未能極詩家之變].”라 하여 엄중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체로 웅혼(雄渾)한 시작(詩作)들의 속성이 진밀(縝密)하지 못한 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정두경(鄭斗卿)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다음의 두 작품, 「새상곡(塞上曲)」과 「마천령상작(磨天嶺上作)」도 이러한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작품을 차례로 보인다.
「새상곡(塞上曲)」은 다음과 같다.
花門藩將氣雄豪 | 화문의 번장은 기개가 웅장하여 |
八尺長身帶寶刀 | 팔척 장신에 보검을 차고 있네. |
大獵天山三丈雪 | 천산의 세 길 눈 속에서 사냥을 하고 |
帳中歸飮碧蒲萄 | 장막으로 돌아가 푸른 포도주를 마시네. |
위 시는 악부제(樂府題)로 된 가행체(歌行體)의 노래로 정두경의 웅호(雄豪)하고 준일(俊逸)한 풍격을 잘 보여준 것 중의 하나다. 일종의 군가(軍歌)다.
오랑캐 장군의 웅호한 기개를 군더더기 없이 박진감 넘치는 필치로써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상황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생략하고서도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정두경(鄭斗卿)의 「마천령(磨天嶺)」이다. 마천령을 읊은 역대의 시들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칭상을 받은 작품이다. 원제(原題)는 「마천령상작(磨天嶺上作)」으로 정두경의 웅호준일(雄豪俊逸)한 시풍을 잘 보여준다.
不向磨天嶺上看 | 마천령 정상을 보지 아니하고 |
誰知行路上天難 | 누가 알리요? 행로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움을. |
地形自作三韓險 | 땅의 형세는 절로 삼한을 험벽하게 하였고 |
海氣能令六月寒 | 바다 기운은 능히 유월에도 춥게 하네. |
雪裏千峯連朔漠 | 눈 속의 천봉은 북쪽 변방으로 이어졌고 |
雲邊一道走長安 | 구름가의 외길은 장안으로 치달리네. |
美人回首音塵闕 | 미인에게 머리를 돌려도 소식은 없고 |
欲寄芳華恐歲闌 | 편지를 부치려해도 한 해가 저물까 두렵네. |
마천령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학성군의 경계에 있는 험준한 고개이다. 마천령의 험준한 산세와 풍기를 호기롭게 묘사하고 있어 그 후속수단으로서의 마무리가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으나 시인은 미련(尾聯)에서 과시한 연군지정(戀君之情)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다.
미련(尾聯) 상구(上句)의 ‘미인회수(美人回首)’는 ‘회수미인(回首美人)’으로 도독(倒讀)해야 하며 ‘미인(美人)’은 물론 임금을 가리킨다. 미련(尾聯) 하구(下句)의 ‘욕기방화(欲寄芳華)’도 ‘꽃’을 보내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편지를 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멀고 험벽한 곳이기 때문에 임금으로부터는 소식도 없고 글을 올리려 해도 이날 저날 벼르기만 하다가는 또 한 해가 지나갈까 두렵다는 것이다.
8. 풍요(豊饒) 속의 음지(陰地)
사대부(士大夫) 계층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들과 다른 처지에서 외롭게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천예(賤隸) 출신인 유희경(劉希慶)ㆍ백대붕(白大鵬)과,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유희적 애정의 대상으로 일세에 풍류를 과시한 황진이(黃眞伊)ㆍ이옥봉(李玉峰)ㆍ계생(桂生)과 같은 기녀(妓女)들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위항인(委巷人)의 신분으로 『육가잡영(六家雜詠)』과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최기남(崔奇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 등도 모두 음지(陰地)에서 시를 쓴 이 시대의 시인들이다.
유희경(劉希慶, 1545 인종1~1636 인조14, 자 應吉, 호 市隱ㆍ村隱)
은 조선중기의 천예(賤隸) 출신 시인이다. 그러나 노역에는 종사하지 않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喪禮)에 밝았으며 또한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워 시재(詩才)가 크게 이루어졌다. 그는 또다른 천예출신인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조직하여 이를 주도하였으므로 세간에서 이들을 유백(劉白)이라 불렀다. 풍월향도는 서류(庶流) 중심으로 조직된 시사(詩社)이지만 박계강(朴繼姜)ㆍ정치(鄭致)ㆍ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층도 이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이 모임은 조선후기 위항문학을 발흥케 한 초기의 움직임으로 의미를 가진다. 촌은은 그의 신분 때문에 나이 70이 되어서도 남의 집 상역(喪役)에 불려다니는 등 불우한 삶을 살기도 하였으나 한시에 능하여 사대부들의 지우(知遇)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창덕궁 서쪽의 정업원동(淨業院洞)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이 속에서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겼다. 『촌은집』 권3은 「침류대록(枕流臺錄)」으로 이는 그가 여러 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와 여러 학사가 쓴 서(序)ㆍ기(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숙영(任叔英)ㆍ차천로(車天輅)ㆍ이수광(李睟光)ㆍ신흠(申欽)ㆍ이달(李達)ㆍ이안눌(李安訥)ㆍ권필(權韠)ㆍ이정구(李廷龜)ㆍ이민구(李敏求) 등 여러 문인 학사의 수창시(酬唱詩)와 차운시(次韻詩)가 수록되어 있어 촌은의 교유와 시적 성취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의 시는 청절(淸絶)하고 충담(沖淡)하여 당풍(唐風)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거니와 김창협은 문집서(文集序)에서 초초(楚楚)한 것으로, 이경전(李慶全)은 문집인(文集引)에서 청고소창(淸高疏暢)하여 당인(唐人)의 격조를 잃지 않았다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 방류 12에서 촌은에게 준 시에 대해 “오직 당나라 이백(李白)ㆍ두보(杜甫)를 추숭하고 송나라 진사도ㆍ황정견을 배우지 않았다네[惟追唐李杜, 不學宋陳黃]”라 하여 그의 시가 당풍에 기울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유희경(劉希慶)의 「월계도중(月溪途中)」【『大東詩選』에는 詩題가 「月溪」로 되어있다】은 청절(淸絶)한 그의 시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山含雨氣水生煙 | 산에는 우기(雨氣) 서리고 물에는 안개 피어 나는데 |
靑草湖邊白鷺眠 | 푸른 풀 호수가에 백로가 졸고 있네. |
路入海棠花下轉 | 길 따라 해당화 아래로 구부러져 들어가니 |
滿枝香雪落揮鞭 | 왼 가지의 흰 꽃 향기 채찍 끝에 떨어지네. |
이 시는 촌은이 여러 유사(儒士)들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 놀러 갔을 때 유사(儒士)들이 마상(馬上)에서 촌은에게 시를 짓도록 하자 그 자리에서 지은 것이다.
봄날 호수가의 아침 물경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감정은 절제되고 있지만 물경에 대한 섬세하고 유려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신분의 소유자이지만, 이 시편에는 도무지 불평음(不平音)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을 뿐이다.
『촌은집(村隱集)』 권1에 실려있는 일련(逸聯)의 시구도 촌은의 청절(淸絶)한 시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죽엽조경로 송초야괘성(竹葉朝傾露, 松梢夜掛星)”, “석대태흔고 삼한우기청(石帶苔痕古, 山含雨氣靑)” 등은 시상(詩想)의 청절(淸絶)함과 함께 대우(對偶) 등 표현 기교도 매우 뛰어나다.
다음은 유희경(劉希慶)의 「구일배유문학등북록(九日陪柳文學登北麓)」이다.
松間開小酌 兩岸石苔斑 | 소나무 사이에서 작은 술자리 벌렸는데 양쪽 언덕엔 돌에 이끼가 아롱졌네. |
亂壑泉聲細 層城夕照寒 | 어지러운 골짜기에는 샘물 소리 가늘고 층층 성곽에는 저녁 노을 차가와라. |
秋陰生古木 雲影度空壇 | 가을 기운은 고목에서 생기고 구름 그림자는 빈 단을 지나간다. |
巖下崎嶇路 扶筇獨自還 | 바위 밑에 구불구불한 산길, 지팡이에 의지하여 홀로 돌아오네.. |
이 시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선발되어 전한다. 구일(九日)날 유문학(柳文學)을 모시고 북록에 올라가서 읊조린 것이다. 한가롭고 충담(沖淡)한 시세계가 전편에 펼쳐져 있다.
이 시는 아마도 촌은이 삼각산(三角山) 아래의 침류대 부근에 은거할 때 유문학과 함께 중양절(重陽節)에 북록에 올라 안광(眼光)에 들어오는 가을 물경(物景)을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文學) 벼슬을 한 유씨(柳氏)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백대붕(白大鵬, ? ~ 1592 선조25, 자 萬里)
은 조선중기 천예출신(賤隸出身)의 시인으로 유희경(劉希慶)과 함께 조선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 발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출생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학산초담(鶴山樵談)』등에 유희경(劉希慶)ㆍ정치(鄭致)ㆍ허봉(許篈)ㆍ심희수(沈希洙) 등과 교유하였다는 기사를 참고로 한다면 아마도 출생연대는 155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취음(醉吟)」시에서 자신의 신분이 군함과 수운의 업무를 행하는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허균(許筠)은 그가 궁궐의 개폐와 왕명의 전달을 맡는 액정서(掖庭署)의 사약(司鑰)을 역임하였다고 하였으나 천인 신분의 그가 정6품 잡직(雜職)인 이러한 지위에 어떠한 경로로 보임(補任)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백대붕(白大鵬)의 위약(萎弱)한 만당시풍(晚唐詩風)을 본받은 시체(詩體)를 사약체(司鑰體)라고 일컬었던 사실에서 그가 사약(司鑰)의 지위에 올랐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그는 통신사 허성(許筬)을 호종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시로써 이름을 날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일본을 잘 안다고 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1538~1601)을 좇아 전투에 참여했다가 상주(尙州)에서 전사했다.
백대붕(白大鵬(의 시는 「취음(醉吟)」, 「추회(秋懷)」, 「송일본승문계봉교작(送日本僧文溪奉敎作)」 등 3편이 『국조시산(國朝詩刪)』ㆍ『기아(箕雅)』ㆍ『대동시선(大東詩選)』에 전하고 있어 그의 시세계는 그 편린(片鱗)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천예(賤隸)ㆍ중인(中人) 출신과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시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사실로 보아 신분적 제약에서 오는 감개를 토로하는 불평지음(不平之音)이 시의식의 근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백대붕(白大鵬)의 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만당(晚唐)의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ㆍ위약(萎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권필(權韠)은, 당시 백대붕(白大鵬)의 시를 본받아 만당풍(晚唐風)의 시를 쓰는 사람을 일컬어 사약체(司鑰體)라 하였다 한다. 이에 대하여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80에서 당시에 사약체(司鑰體)라 한 것은 그 시체의 위약함을 조롱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백대붕(白大鵬)이 길가에서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지나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즉흥적으로 대답한 것이 「취음(醉吟)」시이다. 이 작품은 『해동유주(東東遺珠)』ㆍ『대동시선(大東詩選)』ㆍ『소대풍요(昭代風謠)』 등에는 「구일(九日)」, 『기아(箕雅)』에는 「취음(醉吟)」으로 되어 있다.
醉揷茱萸獨自娛 | 술에 취해 수유꽃 꽂고 홀로 즐기다가 |
滿山明月枕空壺 | 왼 산 밝은 달에 빈 병 베고 잠들었네. |
傍人莫問何爲者 | 지나는 사람들아 무엇하는 사람인가 묻지 마라, |
白首風塵典艦奴 | 풍진 세월에 머리 센 전함사의 종놈이라네. |
중양절(重陽節)인 구월 구일에 백발이 성성한 몸으로 수유꽃을 머리에 꽃고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양절(重陽節)에 수유꽃을 머리에 꽂는 전통은 한시 관습의 유향(遺響)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함노(戰艦奴)의 신분으로 중구일(重九日)에 수유꽃을 머리에 꽂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어서, 시적(詩的) 관습(慣習)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고 있는 수법은 일품이 아닐 수 없다. 머리에 수유꽃을 꽂은 것은 스스로 시인임을 보여준 장식이며 술에 취하여 거리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천예신분의 본래적 자기 모습이다.
다음은 백대붕(白大鵬)이 일본의 승려 문계(文溪)를 전송하면서 지은 「송일본승문계봉교작(送日本僧文溪奉敎作)」이다.
相國古精舍 洒然無位人 | 상국의 옛 정사에 씻은 듯이 머무는 사람 없네. |
火馳應自息 柴立更誰親 | 불길같이 달리는 마음이야 응당 그치겠지만,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서 다시 누구와 가까이하리? |
楓岳雲生屐 盆城月滿闉 | 풍악의 구름은 나막신 아래에서 일고 분성의 달빛은 성문에 가득차네. |
風帆海天闊 梅柳古鄕春 | 바람 맞은 돛배는 바다 저쪽으로 멀어지는데 매화와 버들은 고향의 봄빛이로다. |
백대붕(白大鵬)은 조선을 방문한 일본 승려 문계(文溪)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김해(金海)에서 그를 전송한 듯하다. 분성(盆城)은 김해의 옛이름이다. ‘불길처럼 달리는 성급한 마음이야 시간이 지나면 지식(止息)이 되겠지만, 홀로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서 다시 누구와 가까이 할까?’라 한 함련(頷聯)의 진솔함이 인정(人情)의 농도를 짙게 해준다.
황진이(黃眞伊, ?~?, 本名 眞, 一名 眞娘, 妓名 明月)
는 중종(中宗) 때의 명기(名妓)로 시서(詩書)와 음률(音律)에 능통하였다. 그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출중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 15세에 기적(妓籍)에 투신한 이후 당대의 문인 명유와 교유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생불(生佛)이라 일컬어지던 천마산(天磨山)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일과 시조 한 수로 벽계수(碧溪守)를 매료시킨 일, 소세양(蘇世讓)과의 교유, 서경덕(徐敬德)과의 사이에 사제관계(師弟關係)가 이루어진 사연 등은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특히 그는 서경덕(徐敬德)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우게 되어 그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 스스로 서경덕(徐敬德)과 박연폭포(朴淵瀑布), 그리고 자신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한 것이 그러한 보기가 될 것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의 시조집에 수록되어 있는 6수의 시조는 참신한 유와 세련된 언어 구사, 풍부한 서정성이 함축되어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한시는 시조처럼 높은 수준을 과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들의 정한(情恨)을 자유분방하게 풀어내어 시조의 정조와 부합되는 측면이 많다. 그러나 그의 시조가 남녀간의 사랑과 별리의 여성적 정한을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한시의 세계는 이보다도 다양하다. 「별김경원(別金慶元)」,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은 별한(別恨)을, 「영반월(詠半月)」은 원정(怨情)을,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송도(松都)」는 지나간 역사의 애상(哀傷)을,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웅혼한 기상까지 일게 해준다.
이로써 보면 황진이(黃眞伊)의 한시는 세련된 기교와 풍부한 정감과 웅혼한 기상의 혼융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됨 직하다.
황진이(黃眞伊)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영반월(詠半月)」을 보면 다음과 같다.
誰斲崑山玉 磨成織女梳 | 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다듬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
牽牛離別後 愁擲碧空虛 | 직녀는 견우와 이별한 뒤에 부질없이 창공에 던져두었네. |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우리나라 기류(妓流)들의 한시는 후세에 전해지는 작품이 드물다 하고 황진이(黃眞伊)의 이 시와 계생의 「취객(醉客)」을 가리켜 특히 시재(詩才)의 기이함을 칭송하였다. 이 작품은 물론 반달과 빗의 모양이 비슷한 것에서 취재(取材)한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반달을 직녀가 견우와 이별한 뒤에 창공에 던져버린 빗으로 환치시켜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님과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여인에게 빗이란 소용없는 치장도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여성의 시답지 않게 웅혼한 시상이 돋보이는 황진이(黃眞伊)의 「박연폭포(朴淵瀑布)」다.
一派長天噴壑壟 | 긴 하늘에 한 줄기를 골짝에 뿜어내니 |
龍湫百仞水叢叢 | 백 길이나 되는 용추폭포 물소리 우렁차다. |
飛泉倒瀉疑銀漢 | 물줄기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인가 의심나고 |
怒瀑橫垂宛白虹 | 성난 폭포 가로비껴 흰 무지개 완연하다. |
雹亂霆馳彌洞府 | 물벼락 어지러이 달려 골짝에 가득하고 |
珠聳玉碎徹晴空 | 구슬을 찧고 부순 듯 창공에 맑아라. |
遊人莫道廬山勝 | 놀이꾼들이여, 여산이 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라, |
須識天磨冠海東 | 모름지기 천마산이 해동 최고임을 알겠네.. |
수련(首聯)에서 경련(頸聯)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폭포의 외경(外景) 묘사를 통하여 이 시의 구도가 장대함은 쉽게 알 수 있거니와, 이 작품에서 시인이 남아다운 호기를 부린 것은 미련(尾聯)이라 할 것이다.
중국에서도 크기로 유명한 여산(廬山)보다도 우리나라 천마산(天磨山)의 승경(勝景)을 칭도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천마산(天磨山)에 있는 박연폭포가 해동(海東) 제일의 승경(勝景)이라 한다면 자신도 해동의 제일임을 은근히 빗대어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으므로 생각이 이에 미치면 이 시의 운치가 한층 살아날 수도 있다.
이옥봉(李玉峰, ?~?)
은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으로 옥봉(玉峰)은 그의 호(號)다. 옥봉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35세를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일(散逸)되었으나 조원(趙瑗)의 현손(玄孫)인 조정만(趙正萬)이 편한 『가림세고(嘉林世稿)』 편말(編末)에 수록되어 있는 「옥봉집(玉峰集)」에 32수가 전하고 있다. 『가림세고(嘉林世稿)』는 조원(趙瑗)ㆍ조희일(趙希逸)ㆍ조석형(趙錫馨) 등 삼대(三代)의 시문 3권과 옥봉의 시로 편차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옥봉의 시를 맑고 굳세며(淸健ㆍ淸壯)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이 많다고 평가하였으며 신흠(申欽)과 홍만종(洪萬宗)도 옥봉이 시문에 능하여 난설헌(蘭雪軒)과 더불어 조선 제일의 여류 시인이었다고 고평을 아끼지 않았다. 옥봉의 시는 주로 별한과 연정을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로 호소하듯 읊은 것이 많다. 별한의 애절함을 적실하게 표현한 「규정(閨情)」은 다음과 같다.
有約來何晩 庭梅欲謝時 | 기약하고 어찌 그리 돌아오지 않는가? 뜰에 핀 매화도 때 지나 지려하네. |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 홀연히 가지 위의 까치 소리에 부질없이 거울 속의 눈썹 그리네. |
매화 필 때 만남을 약조했으나 매화가 지려해도 님은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나무에서 까치가 우짖자 행여 님이 오시지나 않을까 하는 설레임에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해본다는 것이다. 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님을 위해 단장하는, 고우면서도 애절한 여심(女心)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매력은 결구(結句)의 허자(虛字)에 응축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자적(自適)」이다.
虛簷殘滴雨纖纖 | 빈 처마에 가는 낙수물 부슬부슬 비 내리는데 |
枕簟輕寒曉覺添 | 베개자리 찬 기운은 새벽에 점점 더하네. |
花落後庭春睡美 | 꽃지는 뒤뜰에 봄 잠이 달콤한데 |
呢喃巢燕要開簾 | 지지배배 제비 소리에 주렴을 걷네. |
봄의 한복판에서 규방을 홀로 지키는 외로움을 읊조리고 있으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작품이다.
계생(桂生, 1573 선조6~1610 광해군2, 일명 癸生ㆍ癸娘ㆍ香今, 자 天香, 호 梅窓ㆍ蟾初)
은 부안(扶安)의 명기(名妓)로 가금(歌琴), 한시, 시조에 능한 여류시인(女流詩人)이다.
아전 이양종(李陽從)의 딸로 개성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었으며 당대의 문사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등과 교유가 깊었으나 38세로 요절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99번에서 근세의 송도(松都) 황진이(黃眞伊)와 부안(扶安)의 계생(桂生)은 그 사조(辭藻)가 문사들과 더불어 다툴 만하니 기이하다고 칭송하였다.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 계생에게 준 시 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증계낭(贈癸娘)」 시를 보면 “일찍이 남국 계랑의 명성을 들었거니 시운(詩韻)과 가사(歌詞)가 서울을 진동시켰다네[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라 하였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계생과의 시 교유의 일화 및 그녀의 인물됨, 애도시가 수록되어 있어 그녀의 탁월한 시재(詩才)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의 사랑과 이별은 그녀의 시작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시조 “이화우(李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은 유희경과의 이별을 슬퍼하면서 쓴 대표적인 작품으로 후세에 애송되었다.
계생의 문집인 『매창집(梅窓集)』은 현(縣)의 아전들이 전송하던 작품을 수집하여 1668년 개암사(開巖寺)에서 2권 1책으로 개간(開刊)한 것이다. 『매창집(梅窓集)』에는 54수의 한시가 시체별(詩體別)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 역시 애정과 별한(別限), 상사(相思)와 고독이 주된 정조를 이루고 있어 여타의 여류시와 그 성격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러나 한눈에 기생의 작품임을 알게 해주는 진솔함을 잃지 않고 있다.
인구에 회자된 계생(桂生)의 「취객(醉客)」도 그러한 것 중에 하나다.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 취한 손님 비단 적삼 잡아당기니 비단 적삼 손길 따라 찢어지는구나. |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 비단 적삼 한 벌이야 아깝지 않지만 은정이 끊어질까 두려울 뿐이라네. |
취객(醉客)을 희학적(戱謔的)으로 달래는 계생의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 작품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시가(詩家)에서 금기시하는 일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나삼(羅衫)’이라는 동일 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기녀(妓女) 작품의 색깔을 짙게 느끼게 한다. 비록 희작시(戲作詩)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지만 기녀 특유의 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분위기를 숙연케 하기도 한다.
다음은 『기아(箕雅)』와 『대동시선』에 선발된 계생(桂生)의 「춘원(春怨)」이다. 봄은 왔지만 봄같지 않은 봄의 원한을 제비와 대비시켜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竹院春深鳥語多 | 죽원(竹院)에 봄이 깊어 새소리 많은데 |
殘粧含淚捲窓紗 | 다지워진 화장에 눈물 번진 채 사창을 연다. |
瑤琴彈罷相思曲 | 요금(瑤琴)으로 상사곡조(相思曲調) 다 타고 나니 |
花落東風燕子斜 | 동풍에 꽃 떨어지고 제비들 비껴나네. |
‘다 지워진 화장이 눈물로 얼룩진 여인이 대나무 수풀에서 즐겁게 우는 새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사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고 한 수련하구(首聯下句)에 작자의 정한이 잘 드러나 있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는 심사는 ‘꽃은 떨어지고 제비는 비껴 난다’고 한 미련(尾聯) 하구(下句)에서 ‘낙화(花落)’과 ‘연자서(燕子斜)’가 어울어져 원정(怨情)의 강도를 보태면서 마무리 수법의 뛰어남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작자의 별한(別恨)을 ‘떨어지는 꽃’, ‘봄이 되어 다시 돌아온 제비’ 즉 경(景) 속에 정(情)을 의탁한 세련된 수법으로 극치를 이루고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18~1589 선조22, 本名 楚姬, 자 景樊, 호 蘭雪軒)
은 엽(曄)의 딸이자 균(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당시(唐詩)를 배워 시재(詩才)를 떨친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詩)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난설헌(蘭雪軒)은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8세 때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명편을 지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림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남편 김성립(金誠立)과 금슬(琴瑟)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어머니와의 불화, 자식들의 요사(夭死), 친정의 몰락 등 계속되는 시련으로 불우한 생애를 보내야만 하였다.
특히 난설헌(蘭雪軒)의 시 역시 규방의 정한과 삶의 비애 등을 읊은 것이 많다. 그래서 현실의 고통을 뛰어넘기 위하여 신선의 세계를 초절(超絶)하게 읊은 「유선사(遊仙詞)」 등의 명편이 있다. 특히 「유선사(遊仙詞)」 등 선경(仙境)을 읊은 시편(詩篇)들은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하여 고평을 받았다.
악부제(樂府題)를 빌린 「강남곡(江南曲)」은 상사(相思)의 노래 중에서도 가작(佳作)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다섯 수 중 둘째 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人言江南樂 我見江南愁 | 남들은 강남이 즐겁다고 하지만 나는야 강남이 슬프기만 하네. |
年年沙浦口 腸斷望歸舟 | 해마다 이 포구에서 애끓이며 돌아오는 배 바라본다. |
「강남곡(江南曲)」은 대체로 농도짙은 사랑노래들인데 작자도 이러한 사실을 수용하면서 오히려 ‘강남락(江南樂)’과 ‘강남수(江南愁)’의 대비를 통하여 자신의 슬픔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여류시의 진솔을 단적으로 알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강남수(江南愁)’의 사연을 결구(結句)의 ‘장단망귀주(腸斷望歸舟)’로 쉽사리 풀어내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에는 신선의 세계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정경을 읊은 작품이 많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이상 공간인 신선의 세계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작자의 고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선사(遊仙詞)」는 칠언절구(七言絶句) 87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째수는 다음과 같다.
千載瑤池別穆王 | 천 년의 요지에서 주 목왕과 헤어진 뒤 |
暫敎靑鳥訪劉郞 | 잠깐 파랑새에게 한 무제를 찾게 했네. |
平明上界笙簫返 | 새벽에 하늘에서 피리소리 들려오고 |
侍女皆騎白鳳凰 | 시녀들은 모두 다 흰 봉황을 타고있네. |
주지번(朱之蕃)은, 난설헌(蘭雪軒)의 「유선사(遊仙詞)」와 같은 시편(詩篇)은 표연(飄然)히 진세(塵世)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청수(淸秀)하면서도 화미(華靡)함이 없는 명편(名篇)이라 극찬하였다.
이 시는 선계(仙界)로 비상한 작자가 선계의 모습을 형용한 장편이다. 요지(瑤池)ㆍ목왕(穆王)ㆍ청조(靑鳥)ㆍ유랑(劉郞)ㆍ생소(笙簫)ㆍ봉황(鳳凰) 등을 적절하게 교직(交織)하여 새로운 선계(仙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창출하고 있었다.
위항인(委巷人)
이란 ‘거리에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항시인이란 대체로 중간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이른바 ‘하대부일등지인(下大夫一等之人)’으로 자처(自處)하는 의역중인(醫譯中人), 서리(胥吏) 등이 핵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서류(庶流)와 하천인(下賤人)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곧 사대부의 반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보다는 우위에 있는 이른바 여항의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작(詩作)이 궁극적으로 사대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편 사대부와 구별되는 계층에 속하는 지식인이 집단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한 사실에서 보면 조선후기 한문학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 위항시인(委巷詩人)의 詩作 활동은 『육가잡영(六家雜詠)』ㆍ『해동유주(海東遺珠)』ㆍ『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특수계층 시집으로 응결 되었으며, 또 이 시작활동은 일종의 동인적 성격을 띤 각종 시사(詩社) 활동, 즉 풍월향도(風月香徒)ㆍ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ㆍ낙사(洛社)ㆍ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ㆍ직하사(稷下社)ㆍ비연시사(斐然詩社) 등을 통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위항시인들은 그들 詩作의 논리로 천기론(天機論) 내지 진시론(眞詩論) 등을 주창하면서, 위항시의 존재 의의를 자체적으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육가잡영(六歌雜詠)」에 시편(詩篇)을 싣고 있는 최기남(崔奇男)ㆍ남응침(南應琛)ㆍ정례남(鄭禮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ㆍ정남수(鄭柟壽) 등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위항시의 선성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 이들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온축을 스스로 표출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위항문학이 이에 이르러 그 기반이 구축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육가잡영(六家雜詠)』은 제목 그대로 여섯 사람의 각종 시체를 한데 묶은 동우인적(同友人的) 성격의 시선집으로, 이후의 본격적인 위항시집의 선구가 되고 있으며, 또 이 시집에 수록된 시인들이 다음 시대의 위항문학을 이끌어갈 많은 시인들을 직접 배출하고 있어 조선후기 위항문학의 전통이 이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최기남(崔奇男, 1586 선조19~?, 자 英叔, 호 龜谷ㆍ默軒)
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궁노출신(宮奴出身)으로 신흠(申欽)에게서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위항시인이다.
이 구곡의 문하에서 임준원(林俊元)ㆍ유찬홍(庾纘洪)ㆍ이득원(李得元) 등의 위항시인이 배출되었다. 그는 당시(唐詩) 성향의 시를 즐겨 썼기 때문에, 특히 이경석(李景奭)은 그의 율시에 두보(杜甫)의 풍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시를 ‘청절(淸切)’하다고 한 바 있다. 장지연(張志淵)은 구곡의 생애와 시를 두고서, 조물주가 그의 가난하고 미천함을 슬퍼하여 시로써 이름을 나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곡의 「렴체(奩骵)」를 본다.
婀娜綺窓柳 昔時郞自栽 | 아리따운 창가의 버드나무, 옛날 우리 님이 손수 심으신 것. |
柳帶已堪結 長年郞不廻 | 버드나무 휘늘어져 이미 서로 감고 있건만 그 긴 세월 님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
염체는 대개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사랑의 노래로 보편화되어 왔으며, 여기서도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는 아쉬움을 읊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시로 「원사(怨詞)」가 있다. 이외에도 최기남(崔奇男)이 남긴 시편들은 대체로 궁핍한 자신의 처지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 많다.
한편 최기남(崔奇男)는 특히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여 귀거래(歸去來)를 노래한 시가 많다. 도연명을 본떠 자전(自傳) 「졸옹전(拙翁傳)」을 짓고 있으며 「자제문(自祭文)」, 「자만시(自挽詩)」를 남기고 있는 것으로도 그 추종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다음에 보이는 「독도정절시(讀陶靖節詩)」는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은일(隱逸)을 좋아하여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吾愛陶元亮 脫落違世務 | 내 일찍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홀로 떨어져 세속의 일 멀리 하였네.. |
有酒輒成醉 所樂在田圃 | 술 있으면 문득 바로 취하고 즐기는 일이란 전원에 있는 것 뿐이라네. |
豈不寒與餒 耿介懷貞度 | 어찌 춥고 배고프지 않으리오마는 꼿꼿이 곧고 넓은 맘 품고 있느니. |
文章頗夷曠 足以見平素 | 문장은 자못 평범하고 넓어 평소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네. |
所嗟生苦晩 異代不相遇 | 슬픈 것은, 세상에 뒤늦게 태어난 것 세대가 달라서 서로 만나지 못하네. |
已矣無此士 有懷將焉訴 | 이 선비 이미 가고 없으니 이 회포 어떻게 하소연하리. |
이러한 은일에의 향수는 최기남(崔奇男)만이 아니라 이 시기 위항시인들의 시작(詩作)에서 흔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들이다. 위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의 한 자위적 표출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꾸밈이 없고 진솔하여 도리어 속기(俗氣)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다. 어법(語法)에도 맞지 않는 ‘기불한여뇌(豈不寒與餒)’와 같은 것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김효일(金孝一, ?~?, 자 行源, 호 菊潭)
은 금루관(禁漏官)을 지낸 위항시인으로 역시 시에 능하여, 『육가잡영(六歌雜詠)』에 41수의 시를 전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생활을 평담하게 표백하고 있는 「만음(漫吟)」을 보기로 한다.
樂在貧還好 閑多病亦宜 | 즐거움이 있어 가난도 도리어 괜찮고 한가로움 많아 병 또한 편안하네. |
燒香春雨細 覓句曉鍾遲 | 향불을 태우노라니 봄비가 가랑가랑 내리고 시구를 찾노라니 새벽 종소리 드디 울리네. |
巷僻苔封逕 窓虛竹補籬 | 궁벽진 마을에 이끼는 길을 덮고 빈 창에는 대나무가 부서진 울타리를 기웠네. |
笑他名利客 終歲任驅馳 | 우습구나. 저 부귀영화를 좇는 무리들 한 해가 다가도록 달려가기만 하네. |
이 시 또한 좌절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평범한 삶의 주변 부분들을 옮고 있다. 그러나 미련(尾聯)에서 끝내 작의(作意)를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킴으로써 도리어 천진(天眞)을 깨뜨리고 있는 아쉬움을 남긴다. 시를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의도가 처음부터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듬는 일에 애쓴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음 시는 「야좌(夜坐)」라는 시로, 역시 안분(安分)하는 생활태도를 노래하고 있다.
萬事凋雙鬂 孤燈照五更 | 만사 귀밑머리 마냥 시들어 버리고 외로운 등불은 새벽을 비추네. |
名因貧不立 愁與病相嬰 | 가난 때문에 이름은 세우지 못하고 근심과 병만이 서로 엉켰네. |
蔣逕誰披草 陶籬自掇英 | 묶은 길 그 누가 풀을 헤치고 찾아오리? 울타리에서 스스로 꽃잎만 따누나. |
安排但知命 此外更何營 | 이럭저럭 살아온 것 천명을 알 뿐 그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소대풍요(昭代風謠)』 卷四 |
청운(靑雲)에의 꿈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위항인은 그 체념을 안분(安分)과 지족(知足)으로 돌리고 자신의 위상을 은일자(隱逸者) 도연명(陶淵明)에게 포개어 볼 수 밖에 없음을 이 시를 통해 볼 수 있다.
최대립(崔大立, ?~?, 자 秀夫, 호 蒼厓)
은 임준원(林俊元)ㆍ최승태(崔承太)ㆍ유계홍(庾繼弘)ㆍ김부현(金富賢) 등과 어울려 낙사(洛社)를 결성하여 시회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시범(示範)하여 뒷날 『소대풍요(昭代風謠)』와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빛내고 있다.
최대립(崔大立)의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七絶)과 「풍중화(風中花)」(七古)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睡鴨薰消夜已關 | 향로에 불기 가시며 밤도 이미 끝났는데 |
夢回虛閣枕屛寒 | 꿈에 잠긴 빈 집에는 베개와 병풍이 썰렁하구나. |
梅梢殘月娟娟在 | 매화가지 끝, 지는 달만은 곱디 곱게 남아서 |
猶作當年破鏡看 | 그때의 깨어진 거울을 보게 하는구나. 『소대풍요(昭代風謠)』 권3. |
이 시의 제목이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내를 잃고 난 뒤의 고독한 시인의 처지가 절실하게 그려져 있다. 직접적인 감정의 노출을 삼가한 채, 오히려 경물만을 덩그렇게 제시하여 더욱 핍진하게 하였다.
다음에 보이는 최대립(崔大立)의 「풍중화(風中花)」는 한편의 부요(婦謠)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風中花何飄揚 | 바람에 날리는 꽃잎 어찌 저리 나부끼는가? |
東家離婦怨阿郞 | 임을 여읜 아낙은 임을 원망하는구나. |
阿郞薄倖奈婦何 | 임이 박정한 걸 아낙이 어쩌리요만은 |
恨郞不如風中花 | 무정한 임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만도 못하네. |
花飛繞樹似戀枝 | 날아가는 꽃잎도 나무를 애워싸고 옛 가지를 그리워하는 듯한데 |
阿郞出門行不遲 | 임은 문을 나서자 휑하니 떠나버리는구나. 『소대풍요(昭代風謠)』 권8. |
임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나이의 모습은 바람에 날리는 꽃보다도 못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지(主旨)다. 제재(題材)는 매우 범속한 것이지만, 마지막 연에서 보여준 정감(情感)의 처리 수법은 평범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악부(樂府)에서 흔히 보이는 사랑노래의 취향도 함께 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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