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시의 초기 모습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유입(流入)된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는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어 왔지만, 이는 연(燕) 위만(衛滿)의 동침(東侵)이나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역시 추정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한시(漢詩)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를 따지는 문제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다. 설사 문자(文字)의 유입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그릇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한시(漢詩)와 같은 고급 예술 문화를 양성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거쳐야 할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할 때에는 서책에 의존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을 광범위하게 보급하여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기관의 창설을 기다려야 하며 이에 의한 국가적인 교육 사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배경설화에 묻혀 전하고 있는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와 같은 것은, 현재까지의 전승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모두 기원전(紀元前)의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전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인 후한(後漢) 채옹(蔡邕, 133~192)의 『금조(琴操)』가 2세기 때의 것이고 보면, 이 무렵 국가의 정치 목적이나 역사적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서정시(抒情詩)가 우리나라 조상들에 의하여 한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고 있는 「황조가(黃鳥歌」 역시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자료에 의거하여 「황조가(黃鳥歌)」를 수록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황조가(黃鳥歌)」로부터 1천년이 지난 뒤에 김부식에 의해 거두어져 기록된 「황조가(黃鳥歌)」는 이미 김부식(金富軾)이 재구(再構)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 작품은 질박(質朴)한 김부식(金富軾)의 산문(散文) 가운데서 상주문(上奏文)의 한 부분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국학(國學)제도가 성립된 최초의 시기는 372년【小獸林王 2,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6 小獸林王 2年 참조】이며, 신라에서는 640년【宣德王 9,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五 참조)】에 국학(國學)이 창설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고시(古詩) 형식을 갖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612년)이나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3)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 모두 7세기에 이루어진 것이고 보면, 이들 시작(詩作)이 이때에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에서는 이 무렵까지도 중국에서 조서(詔書)가 내도(來到)하였을 때에 통효(通曉)한 사람은 강수(强首)뿐이었다 한다【『三國史記』 列傳 6 「强首」 참조】.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조차도 강수(强首)가 제작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이로써 보면 이때까지도 신라에서는 한자(漢字) 문화의 향유층이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전통을 계승함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계승하는 경우와 부정적으로 계승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는 한시(漢詩) 문학이 문학사의 한 부분으로 전승되기에는 부정적인 상황이었으므로 설사 일부 특수계층에 의하여 한시(漢詩)가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전승되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도 모두 배경설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부대적(附帶的)으로 유전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도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연계되고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같은 사서(史書)를 통하여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전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 대륙(大陸)의 노래
우리나라 국토의 경계(境界)가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로 고착(固着)되기 이전의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그 시기가 어느 때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중국 대륙의 동북변(東北邊) 지역이 선주지(先住地)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 또는 국토의 개념도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때 중국과의 국가간의 경계 역시 지금처럼 확연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시가사(詩歌史)에서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 심지어 고구려인(高句麗人)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삼찬(人蔘讚)」까지도 그 국적과 제작 시기를 명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방면의 연구도 그 부대설화(附帶說話)의 산문(散文) 문맥 파악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어 왔으며, 이러한 논의는 논의로서 시종(始終)하고 있을 뿐이다. 광활한 대륙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공후인(箜篌引)」, 「황조가(黃鳥歌)」, 「인삼찬(人蔘讚)」을 차례로 보인다.
「공후인(箜篌引)」은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 그대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 기어이 물을 건너네. |
墮河而死 當奈公何 | 마침내 빠져 죽어 버리니 그대를 어찌 하리오? |
이 작품은 후한(後漢) 채옹(蔡邕, 133~192)의 『금조(琴操)』, 서진(西晉) 혜제(惠帝, 290~306) 때 최표(崔豹)가 편찬한 『고금주(古今注)』, 『예문유취(藝文類聚)』 등에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妻) 여옥(麗玉) 또는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이 작품은 부대설화(附帶說話)가 함께 전하고 있어 작자와 제작동기 등 작품과 관계되는 주변사정까지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부대설화를 배제하고 독립된 작품만 보면, 물을 건너지 말라는 애원을 뿌리치고 기어이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어떤 사람의 슬픈 사연을 작자가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며 지은 것으로 된다. 다만, 부대설화를 그대로 따르면 이 작품의 작자는 작품의 바깥에 있는 진졸(津卒) 또는 그의 처이며, 공후(箜篌)를 끌어당겨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후일 송(宋) 곽무청(郭茂淸)의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악부(樂府)의 상화가사(相和歌辭, 相和引)로 포함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箜篌引者, 朝鮮津卒霍里子高所作也. 子高晨刺船而濯, 有一狂夫, 被髮提壺, 涉河而渡. 其妻追之, 不及, 墮河而死. 乃號天噓唏, 鼓箜篌歌曰: “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死, 當奈公河.” 曲終, 自投河而死. 子高聞而悲之, 乃援琴而一之, 作箜篌引, 以象其聲, 所謂, 公無渡河曲也. 『琴操』 卷下
箜篌, 朝鮮津卒霍里子高妻麗玉所作也. 子高晨起, 刺船而櫂, 有一白首狂夫, 被髮提壺, 亂流而渡. 其妻隨呼止之, 不及, 遂墮河水死. 於是援箜篌而鼓之, 作公無渡河之歌. 聲甚悽愴, 曲終, 自投河而死. 霍里子高還, 以其聲, 語妻麗玉, 玉傷之, 乃引箜篌而寫其聲, 聞者莫不墮淚飮泣焉. 麗玉以其聲傳隣女麗容, 名曰箜篌引. 『古今注』 卷中
우리나라에서는 『금조(琴操)』가 뒤늦게 확인되었기 때문에 주로 『고금주(古今注)』의 자료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 설화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으며 문제의 핵심은 조선진(朝鮮津)에 일차적으로 집중되었다.
이때 조선진(朝鮮津)의 위치가 대동강(大同江) 유역인지, 아니면 중국 직례성(直隸省)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어 왔다. 이에 따라 작품의 국적문제가 쟁점이 되어 조선인의 노래, 중국인의 노래,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노래 등의 설이 제기되었으며 창작의 시기 또한 고조선 때인지, 한사군(漢四郡) 때인지 2~3세기의 것인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설화를 요약하면 곽리자고가 새벽에 배를 끌고 나서는데 한 백수광부(白首狂夫)가 술병을 끼고 물을 건너고 있어 그 처가 만류하였으나 마침내 물에 빠져죽게 되었다.
이에 백수광부의 처가 공후를 끌어당겨 이 노래를 부르고는 자신도 투신자살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처 여옥에게 말하니 여옥이 다시 공후를 당겨 그 노래를 본떠 불렀다고 한다. 이로써 보면 노래의 작가가 곽리자고의 처가 되지만, 『예문유취(藝文類聚)』에는 곽리자고가 그 광경을 보고 직접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황으로 보아 집에 돌아온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최종적으로 노래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고 있는 「공후인(箜篌引)」은 시구(詩句)가 소박하고 구상이 웅건하여 선진(先秦)의 풍(風)이 있으나 작자 ‘여옥(麗玉)’의 명명법(命名法)이 매우 세련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작품은 그 내용만 보면, 사건의 진행과정을 본대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4구의 ‘당내공하(當奈公何)’에서 ‘당(當)’은 사실상 허자(虛字)로 쓰이고 있으며 ‘당내(當奈)’를 또 ‘하(何)’와 중복시켜 장차 닥쳐올 일을 안타까워하는 강도(强度)를 더해준다. 한시(漢詩)의 제작이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은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더욱이 뱃사공의 아내가 이러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미치지 못할 일이다.
국적문제에 있어서도, 송(宋) 곽무청(郭茂淸)의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악부(樂府)의 상화가사(相和歌辭, 相和引)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이 노래는 일찍부터 대륙의 조선(朝鮮)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널리 불려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조가(黃鳥歌)」는 다음과 같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 퍼득퍼득 꾀꼬리 암수 서로 즐겁네. |
念我之獨 誰其與歸 |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一 琉璃明王. |
황조가(黃鳥歌)는 출전 문헌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ㆍ『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전한다. 사언사구(四言四句)로 되어 있어 시경체(詩經體)에 가깝다.
고구려에서의 한문(漢文) 보급이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태학(太學)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을 감안하여 후대의 위작(僞作), 또는 한역(漢譯)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유리왕(琉璃王) 삼년(三年) 시월(十月)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계실(繼室)로 맞았는데 둘이서 서로 쟁총(爭寵)하다 치희(雉姬)가 달아나 버렸고, 이에 유리왕이 말을 타고 좇았으나 치희가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는 부대설화가 전한다. 이 시의 제작연대에 관해 유리왕 4년 설과 5년에서 11년 사이 설, 원년에서 2년 사이 설 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자로 알려져 있는 유리왕이 신화(神話) 속에 묻혀있는 인물일 뿐 아니라, 한문의 수입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기원전(紀元前) 시기에 이 작품이 한시 형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가정(假定)조차도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불려진 노래가 중국에 유입되어 중국인에 의하여 한시체(漢詩體)로 번역되었다면 이는 이미 우리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리왕(琉璃王)의 「황조가」와 출전 문헌인 『삼국사기』 사이에는 시대적으로 천 년의 거리가 있으므로 설사 어떤 형태의 노래가 유리왕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유전(流傳) 과정에 그것이 온전하게 전승되었을 것이라는 것조차 신빙성이 희박하다. 특히 이 작품은 시경체(詩經體)에 가까우며 그 질박(質朴)함이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의 산문(散文) 가운데 한 부분을 보는 듯하여 이 작품은 이미 김부식의 것이 아닌가 의심나게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바깥짝에서 시범한 허자(虛字) 처리의 솜씨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념아지독 수기여귀(念我之獨, 誰其與歸)’의 ‘념(念)’과 ‘기(其)’는 사실상 본뜻을 상실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읽혀질 수 있는 조음(調音)의 효과를 돋보이게 한다.
「인삼찬(人蔘讚)」은 다음과 같다.
三椏五葉 背陽向陰 | 세 줄기 다섯 잎사귀, 해 등지고 그늘 향하네. |
欲來求我 假樹相尋 | 나를 얻으려면 가수나무 아래서 찾을 일. 『續博物誌』 |
‘삼아오엽(三椏五葉)’ 즉 10년생 이상의 인삼은 줄기가 셋, 잎사귀가 다섯이 난다. 이를 진인삼(眞人蔘)이라 한다. 이 작품은 이 진인삼(眞人蔘)의 생태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삼 스스로 인삼을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시 작품의 경계에 들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인삼의 생태를 단순하게 진술한 설명문과 구별된다.
이 작품을 전하고 있는 문헌은 『속박물지(續博物志)』를 비롯하여 『본초강목(本草綱目)』ㆍ『명의별록(名醫別錄)』ㆍ『패관잡기(稗官雜記)』ㆍ『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이지만 「인삼찬(人蔘讚)」을 처음 기록하고 있는 것은 6세기에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완성한 『명의별록(名醫別錄)』이며, 『패관잡기(稗官雜記)』ㆍ『해동역사(海東繹史)』는 모두 『본초강목(本草綱目)』과 『명의별록(名醫別錄)』에서 인용한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김은정(金垠廷)의 「형성기(形成期) 한시(漢詩) 연구(硏究)」(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5)에 자세하다】.
『본초강목(本草綱目)』 초부(草部) 「인삼조(人蔘條)」에 실린 도홍경(陶弘景)의 주(注)에 ‘처음 난 작은 놈은 3~4마디쯤으로 한 줄기에 다섯 잎사귀이고 4~5년 후엔 두 줄기에 다섯 잎사귀이지만 꽃이 달린 줄기는 없으며 10년에 이른 후에 세 줄기가 나고 묵은 놈은 네 줄기에 각각 다섯 잎사귀가 있다[初生小者三四寸許, 一椏五葉, 四五年後, 生兩椏五葉, 未有花莖, 至十年後生三椏, 年深者生四椏各五葉]’이라 하고 이 시를 인용하였으므로 이 시의 정착 시기는 6세기 고구려까지 소급될 수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고구려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대륙과 연접해 있는 고구려는 대륙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는 백제와 신라보다 한자문화의 유입(流入)이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며, 상호 교접(交接)도 번다(繁多)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에 의하여 삼국시대의 문화와 역사가 정리ㆍ기록된 사실에서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비하여 소원(疏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고구려의 시편(詩篇)도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과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모두 북방(北方)의 기상(氣象)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스스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은 다음과 같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다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싸움 이겨 공이 하마 높으니 만족하고 이제는 그쳐주시길. 『三國史記』 列傳 「乙支文德」 |
출전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이며 『동문선(東文選)』ㆍ『고시기(古詩記)』ㆍ『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 이 작품이 전한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분류되어 있으나 염법(簾法, 平仄法)이 근체(近體)에 맞지 않으며, 제작된 시기도 근체시(近體詩)가 성립되기 이전이다. ‘리(理, 上聲 紙韻)’, ‘지(止, 上聲 止韻)’ 등 측성운(仄聲韻)을 통압(通押)하고 있어 어세(語勢)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꾸밈이 없어 절로 힘과 기상(氣象)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의 기상(氣象)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나게 한다. 결구(結句)의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에서 ‘운(云)’을 허자(虛字)로 사용하여 조음(調音)을 고려한 솜씨도 당시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 ‘운(云)’을 ‘언(言)’으로 고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한 짓이다.
수(隋) 양제(煬帝)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고구려를 침략케 하였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교병책(驕兵策)을 써 살수(薩水)까지 유인한 후 이를 격파하였다. 이 시는 교병책(驕兵策)의 일환으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장(隋將)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것이다.
「영고석(詠孤石)」은 다음과 같다.
逈石直生空 平湖四望通 | 먼 바위 하늘에 곧추 솟아 평호(平湖)에 사방으로 통하네. |
巖根恒灑浪 樹杪鎭搖風 | 바위 뿌리엔 언제나 물결이 치고 나무 끝에 늘 살랑대는 바람. |
偃流還漬影 侵霞更上紅 | 물결에 기우니 그림자 잠기고 노을 침노하니 돌머리 붉어라. |
獨拔群峰外 孤秀白雲中 | 홀로 우뚝 뭇 봉우리 밖에 솟아 외로이 흰 구름 속에 빼어났구나. 『古詩紀』 권117 |
작자 자신의 깨끗한 모습을 외로운 돌에 비유한 것이다. 돌과 작자가 완전히 자리바꿈하고 있다.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은 율시(律詩)의 형식과 일치하지만, 경련(頸聯)ㆍ미련(尾聯)의 염법(簾法, 平仄法)은 율시(律詩)의 그것과 다르다. 그러나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서 이룩한 대우(對偶)의 솜씨는 근체(近體)에 모자람이 없다. 특히 미련(尾聯)에서 과시한 빼어난 기상(氣象)은 절로 북방(北方)의 것임을 알게 해준다. 작자가 승려(僧侶)이고 중국에서 지은 것이므로 이러한 작품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정법사(定法師)가 일찍이 후주(後周)에 들어가 표법사(標法師)와 종유(從遊)하였다고 했으나, 후주(後周)는 북조(北朝) 북주(北周, 557~580)의 잘못이다. 『고시기(古詩紀)』에는 이 시가 남조(南朝) 진(陳, 557~589)에 선입되어 있으며, 같은 권(卷) 속에 석혜표(釋惠標)의 「영고석(詠孤石)」이 실려 있다. 『대동시선(大東詩選)』의 주(注)에서 말한 표법사(標法師)는 이 혜표(惠標)를 말하는 듯하다.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대륙의 동남단(東南端)에 위치한 백제와 신라는, 삼국이 정립(鼎立)하던 시기에 있어서는 해로(海路)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중국과의 교섭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 대안(對岸)에 중국대륙이 있어 교접(交接)의 가능성이 신라보다도 유리한 처지에 있었지만,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문학 유산은 산문(散文) 가운데 중국에 올린 표(表) 몇 편이 있을 뿐이다. 남토(南土)는 서정시(抒情詩)의 본향(本鄕)이거니와, 신라에는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 외에도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ㆍ「반속요(返俗謠)」ㆍ「분원시(憤怨詩)」 등 남방의 서정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이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으로 불리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大唐開鴻業 巍嵬皇䣭昌 | 훌륭한 당(唐)나라 큰 기업 여니 높디높은 천자님의 교화(敎化) 크게 이루어지도다. |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 융복(戎服) 입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문교(文敎)를 닦아 백왕(百王)을 계승하였네. |
統天崇雨施 物理體含章 | 하늘 뜻 이어서 혜택 내리고 만물을 다스림에 감춘 덕 드러나네. |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日月)에 짝하고 세상 진무는 태평을 힘쓰네. |
幡旗旣赫赫 鉦鼓何煌煌 | 휘날리는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 오랑캐로 천자의 명(命) 어기는 자는 칼 앞에 엎드려 천벌을 받으리. |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 순후한 풍속 온누리에 가득하여 멀리 가까이서 다투어 상서(祥瑞) 드리네. |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 사시(四時)는 옥촉(玉燭)같이 조화롭고 칠요(七曜)는 만방(萬方)을 순행하네. |
維獄降帝輔 維帝任忠良 | 높은 산은 어진 재상을 내리고 천자는 충량(忠良)한 이에 일을 맡기네. |
五三含一德 昭我皇家唐 |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을 이루어 우리 당(唐) 황실(皇室) 밝혀준다네. 『東文選』 卷四 |
「태평송(太平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전해주고 있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이나 결자(缺字)가 많다. 여기서는 최선본(最善本)인 『동문선(東文選)』의 것을 본문으로 싣고 제목도 『동문선(東文選)』을 따랐다. 영휘(永徽) 원년(元年, 650)에 백제를 격파한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이 작품을 비단에 수놓아 김법민(金法敏)으로 하여금 당(唐) 고종(高宗)에게 바치게 하였다. 해박한 전고(典故)를 사용하여 당(唐)의 개업(開業)을 칭송하고 신라가 외이(外夷)로서 순종할 것임을 비친 오언고시(五言古詩)다.
당(唐)의 위업(偉業)을 찬양하면서도 비굴함에 흐르지 않은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다. 이 시의 풍격(風格)에 대해서는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 2번에서 웅혼고고(雄渾古高)라고 함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비평도 없지 않다. 김만중(金萬重)은 그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이러한 문자(文字)가 나올 수 없으니, 이는 돈을 주고 중국사람에게 사들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이 무렵까지도 신라에서는 중국에서 조서(詔書)가 내도(來到)하면 이에 통효(通曉)한 사람은 강수(强首) 하나뿐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작품 역시 강수(强首)가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 신라에의 한문 보급이 일반화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사정에서 보면, 시경시(詩經詩)의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유루(遺漏) 없이 실천한 이러한 작품의 출현이 당시 신라의 보편적인 문화현상에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돌출현상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은 다음과 같다.
空門寂寞汝思家 | 네가 집 생각하니 공문(空門)이 적막쿠나, |
禮別雲房下九華 | 운방(雲房) 떠나 구화산(九華山)을 내려가네. |
愛向竹欄騎竹馬 | 대울타리선 죽마타기 즐기고 |
懶於金地聚金沙 | 금지(金地)에선 금모래 줍기 게을리했지. |
漆甁澗底休招月 | 개울서 병물 담으며 달 부르던 일 그치고 |
烹茗甌中罷弄花 | 그릇에 차 달이며 꽃놀이 하던 일도 그만. |
好去不須頻下淚 | 잘 가거라 눈물 질질 흘리지 말고 |
老僧相伴有烟霞 | 이 노승은 같이 짝할 연하(烟霞)가 있어라. 『全唐詩』 卷七三二 |
『전당시(全唐詩)』에 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唐) 지덕(至德) 연간(756~758)에 김지장(金地藏)이 중국 구화산(九華山)에 은거할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작자가 승려이고 중국에 거주했기 때문에 성당(盛唐) 때에 유행한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시범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의 함련(頷聯)에서 ‘죽란(竹欄)’과 ‘죽마(竹馬)’, ‘금지(金地)’와 ‘금사(金沙)’를 대응시켜 세속(世俗)과 불사(佛事)의 만남을 양적(陽的)으로 드러내고 있는 수법은 후세(後世)의 운석(韻釋)들을 이때에 이미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반속요(返俗謠)」는 다음과 같다.
化雲心兮思淑貞 | 깨끗한 마음 되고파 정숙을 생각했건만 |
洞寂滅兮不見人 | 적멸에 빠져들어도 청연(靑蓮)은 보이지 않네. |
瑤草芳兮思芬蒕 | 고운 풀 꽃다와 향기를 풍겨내니 |
將奈何兮是靑春 | 장차 어쩔거나, 이 청춘을. 『全唐詩』 卷 七九九. |
설요(薛瑤)는 아버지 승충(承沖)이 죽자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불교에 몸을 맡겼는데 보당보살(寶堂菩薩)을 보는 경지에까지는 이르렀으나, 불각(佛覺)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하여, 마침내 이 노래를 부르고 환속하여 곽원진(郭元振)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혜(兮)’를 매구(每句) 삽입하면서 쌍성자(雙聲字) ‘청춘(靑春)’과 첩운자(疊韻字) ‘분온(芬蒕)’을 사용하여 리듬감을 강하게 살리고 있다.
작자 설요(薛瑤)의 생평(生平)에 대해서는 출전 문헌인 『전당시(全唐詩)』에는 그가 곽원진(郭元振)에게 시집가 첩(妾)이 되었다고만 적고 있으나, 진자앙(陳子昂)이 쓴 묘지명(墓誌銘)【「館閣郭公姬薛氏墓誌銘」, 『陳伯玉文集』, 四部叢刊本】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승충(承沖)은 당(唐) 고종(高宗) 때 김인문(金仁問)을 따라 입당(入唐)하였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분원시(憤怨詩)」는 다음과 같다.
于公慟哭三年旱 | 우공 통곡에 삼년동안 가물었고 |
鄒衍含悲五月霜 | 추연이 슬픔 머금자 오월에도 서리 내렸네. |
今我幽愁還似古 | 지금의 내 시름 도리어 예와 같건만 |
皇天無語但蒼蒼 | 황천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누나. 『三國史記』 卷十一 |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霜落.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으로 되어 내용에 이동(異同)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작품 가운데 근체시(近體詩)에 근접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구의 ‘한(旱)’이 근체(近體)의 율격에서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889년) 봄, 진성여왕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私通)하여 국정(國政)을 어지럽히자, 이를 비판한 글이 나붙었다. 왕은 왕거인(王巨仁)의 짓이라 여겨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에 왕거인이 원통하여 이 시를 지었다 한다. 이 시를 지어 옥중의 벽에 붙이자 벼락이 쳤으므로 왕거인이 풀려나게 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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