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
강간(江干)
‘강가[江邊]’를 말한다. / 인용: 薌娘謠(이광정)
강강(彊彊)
암수가 서로 따르는 모양, 다투고 미워하는 모양.
강개(忼慨)
‘실속없이 큰 소리 치는 것’을 말한다.
강개(慷慨)
‘실속없이 큰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강거(康居)
고대의 나라 이름인데, 대월지(大月氏)와 동족이며, 지금의 신강(新疆) 북쪽 경계로부터 아령(俄領)·중아(中亞)의 지역까지 영유하였다.
강거국(康居國)
아랄해 동쪽 시르강 하류의 키르기스 초원에 있었던 터키계(系) 유목 민족의 작은 나라이다.
강경순(姜景醇)
경순(景醇)은 강희맹(姜希孟)의 자(字)이다.
강경우(姜景愚)
경우는 강희안(姜希顔)의 자(字)이다.
강계(江鷄)
‘강가 마을의 닭’을 말한다.
강계(薑桂)
생강과 계피는 오래 둘수록 매워지므로, 늙어서 더욱 강강해짐을 비유한 말이다.
강고어(羌古魚)
강고도어(羌古道魚)·간고어(乾古魚). 일본어인 ‘가쓰오’의 음역어(音譯語)로 가다랭이, 또 ‘가쓰오부시’ 곧 가다랭이의 살만을 발라내어 끓는 물에 쪘다가 불에 쬐어 말려 조미하여 다시 햇볕에 말려서 굳힌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간고어라 할 때에는 ‘가쓰오부시’의 뜻으로만 쓴다.
강곤륜(康昆侖)
당(唐) 나라 때 비파를 잘 탔던 사람이다.
강공헌(姜公獻)
공헌(公獻)은 강유(姜瑜)의 자(字)이다.
강관(絳灌)
한 나라의 개국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병칭이다.
강관(江關)
관(關)의 이름이다. 큰 강물이 두 산 사이를 흐르며 형세가 극히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잠팽전(岑彭傳)」
강관(羌管)
피리를 가리킨다.
강관(絳灌)
한 패공(漢沛公)의 신하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으로 무신(武臣)을 가리킨 것이다.
강굉공피(姜肱共被)
형제간의 우애를 말한다. 강굉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가 백회(伯淮)인데, 두 아우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잤으므로 강굉공피(姜肱共被)라는 고사가 생기게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卷五十三 「강굉전(姜肱傳)」
강굉피(姜肱被)
후한(後漢)의 강굉(姜肱)이 동생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지극히 우애하며 늘 한 이불을 덮고 잤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강굉전(姜肱傳)」
강교노과다(講郊魯過多)
노(魯) 나라는 제후국으로서 교제(郊祭)를 지낸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교(郊)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는 교제(郊祭)를 말하는데 공자(孔子)는 “노나라의 교제와 체제(禘祭)는 예가 아니다.”라 하였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강구(康衢)
‘사통오달(四通五達)의 큰 거리’를 말한다.
강구연월(康衢煙月)
오거리(康)와 네거리(衢)에 밥짓는 연기가 자욱한 세월을 말한다. 평화스러운 대낮의 길거리 풍경과 저녁 짓는 굴뚝 연기가 달을 향해 피어오르는 풍경으로 살기 좋고 평화로운 태평시대를 상징한다. / 유의어: 고복격양(鼓腹擊壞), 격양가(擊壞歌), 태평성대(太平聖代), 비옥가봉(比屋可封), 함포고복(含哺鼓腹).
강구요(康衢謠)
강구(康衢)는 큰 길거리로 오달(五達)을 강(康), 사달(四達)을 구(衢)라 한다. 옛날 요(堯)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에 천하가 잘 다스려지는가, 백성들이 자기를 위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미복(微服)으로 강구에 나갔더니, 아이들의 동요(童謠)에 “잘사는 우리 백성들 모두 임의 덕(德)이라오. 우리들은 알 것 없고 오직 임금의 법만을 따를 뿐이네[立我蒸民 莫非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라 하였다. 요 임금이 기뻐서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대부(大夫)에게 배웠다.”라고 하였다. 『열자(列子)』 「중니(仲尼)」
강구음(康衢吟)
요 임금 때에 천하가 태평함에 따라 세간에 유행했던 동요(童謠)이다.
강궁(絳宮)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강궐(絳闕)
선궁(仙宮)을 가리킨다.
강궐청도(絳闕淸都)
강궐은 붉은색을 칠한 대궐의 문이고 청도는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로, 신선 세계를 말한다.
강근지친(强近之親)
도와줄 만한 가까운 친척. 아주 가까운 일가를 이른다.
강금(姜衾)
형제를 말한다. 후한(後漢) 때 강굉(姜肱)이 그의 두 아우인 강중해(姜仲海), 강계강(姜季江)과 함께 우애가 지극해서 잠을 잘 때 반드시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53 「강굉전(姜肱傳)」
강기숙정(綱紀肅正)
법령, 명령, 규칙 풍습 등을 엄격히 지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강남곡(江南曲)
강남채련곡(江南採蓮曲)으로, 벗끼리 서로 화답하는 악부의 곡명인데 전별하는 시를 뜻하기도 한다. 강남에서 연밥을 따는 광경을 형용한 옛 악부시(樂府詩)이다.
강남만리(江南萬里)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누가 한 조각 강남 흥으로 하여금 나를 좇아 은근히 만리를 오게 했나.”라고 하였다.
강남부(江南賦)
북주(北周) 유신(庾信)이 고향이 그리워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로서 고향을 그리며 짓는 글을 말한다.
강남역사(江南驛使)
친지(親知)의 소식을 말한다. 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에서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장안(長安)에 있는 친구 범엽(范曄)에게 역마 탄 사자 편에 보내 준 고사가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卷970
강남조(江南調)
악부(樂府) 상화곡(相和曲)으로 강남곡과 같은데, 멀리 헤어져 있는 부부가 서로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경을 노래하는 뜻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남조(南朝) 양(梁)의 유혼(柳惲)의 오언고시, 당(唐) 이익(李益)의 오언절구, 당 저광희(儲光羲)의 오언절구 등이 있다.
강남죽(江南竹)
대나무가 특이하게 좋다는 뜻이다. 중국 강남(江南)에서 나는 대는 관악기(管樂器)를 만들기에 좋기로 유명한데, 양 간문제(梁簡文帝) 쟁부(箏賦)에 “강남의 대는 농옥(弄玉)이 봉(鳳)의 울음소리를 낸 퉁소가 있다.”라고 하였다.
강남탄(江柟歎)
두보(杜甫)의 초당 앞 강가에 서 있던 2백 년 된 굴거리나무가 풍우에 뽑힌 것을 탄식하여 읊은 「남수위풍우소발탄(柟樹爲風雨所拔歎)」을 말하는데, 첫 구절이 “倚江柟樹草堂前”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강남탄(江柟歎)」이라고 한 것이다.:『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0
강노지말(强弩之末)
힘찬 활에서 튀겨 나온 화살도 먼 데까지 다 가면 힘이 다해서 마지막에는 노(魯)나라에서 나는 얇은 명주도 뚫을 수 없다는 문맥에서 유래하였다[强弩之末, 力不能入魯縞]. ‘강대한 힘일지라도 최후의 쇠약해짐에는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강능(岡陵)
만수무강을 축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如山如阜 如岡如陵”이라 하였다.
강담(江潭)
상강(湘江)의 못이다.
강담행음(江潭行吟)
‘임금에게 쫓겨난 신세’라는 뜻이다.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굴원(屈原)이 방축(放逐)되어 강담(江潭)에 노닐며 택반(澤畔)에 행음(行吟)했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라 하였다.
강당좌(姜唐佐)
소식(蘇軾)의 문인이다.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으로, 수(隋) 나라 양제(煬帝) 때의 서울이다. 당 나라 고조(高祖)가 이곳에서 수나라를 멸망시켰다.
강도왕(江都王)
경제의 작은아들 강도역왕(江都易王) 유비(劉非)의 아들 유건(劉建)을 말한다. 유비의 봉국을 물려받은 그는 극도로 황음무도하였다. 상중에 부친의 애첩과 동침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매들을 범하였다.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꾀할 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병장기를 제작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모반이 발각되어 경사에 불려와 심문을 받고 자살했다.
강돈(江豚)
물속에서 사는 돼지처럼 생긴 짐승이다. 허혼(許渾)의 「금릉회고(金陵懷古)」 시에 “돌제비가 구름 털면 개인 날도 비가 오고, 강돼지가 물 뿜으면 밤 되어 바람 불지[石燕拂雲晴亦雨 江豚吹浪夜還風].”라고 하였다.
강동(江東)
진양(晉陽)이다.
강동군(江東郡)
초회왕이 월나라를 멸하고 설치한 군이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안휘성 동남부, 강소성 남부 및 절강성 북부지역을 포함했다.
강동독보(江東獨步)
진(晉) 나라 왕탄지(王坦之)가 약관(弱冠)에 재명을 날려 강동 지방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자, 당시에 “성덕이 절륜한 치가빈이요, 강동의 독보 왕문도로세[盛德絶倫郗嘉賓 江東獨步王文度].”라고 일컬었다고 하는데, 문도는 왕탄지의 자(字)이고 가빈은 극초(郗超)의 소자(小字)이다. 『진서(晉書)』 「왕탄지전(王坦之傳)」
강동주(江東舟)
부귀영화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우로서, 초한(楚漢) 시대 항우(項羽)가 한왕(漢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단신으로 다시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건너가려다가 탄식하기를 “내가 강동의 8천 자제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건너가 싸우다가 지금 살아 돌아온 자제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강동의 부형들을 볼 수 있겠는가[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강락(康樂)
남조(南朝) 송(宋)의 문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다.
강랑금일척(江郞錦一尺)
남조(南朝) 때의 문장가 강엄(江淹)이 만년(晩年)에 꿈속에서 장경양(張景陽)이라는 사람에게 비단폭을 돌려준 뒤로부터 문장이 갑자기 퇴보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남사(南史)』 卷59 「강엄열전(江淹列傳)」
강랑재고진(江郞才告盡)
강랑(江郞)은 양(梁) 나라 때 문장가 강엄(江淹)을 가리키는데, 그가 본디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드날렸으나, 꿈에 오색(五色)의 붓을 곽박(郭璞)에게 돌려주고 나서 문재(文才)를 상실했다고 한다.
강랑재진(江郞才盡)
강랑(江郞)의 재주가 다했다는 말로, 학문상에 있어 한 차례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다란 뜻이다.
강랑채필(江郞彩筆)
강랑(江郞)은 남조(南朝) 양(梁) 나라 때 문장가 강엄(江淹)을 말한다.
강랑한부(江郞恨賦)
강랑(江郞)은 남조(南朝) 고성(考城) 사람 강엄(江淹)인데 자는 문통(文通)이고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예릉후(醴陵侯)에 봉해졌다. 소시적부터 문예(文譽)가 있었으며 유명한 한부(恨賦)를 지었다.
강려자용(剛戾自用)
성미가 깔깔하여 스스로의 재능과 지혜만 믿고 남의 말은 듣지 아니함을 말한다.
강렵(剛鬣)
돼지의 이칭이다. 돼지는 살찌고 모렵(毛鬣)이 억세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강령(江令)
육조(六朝) 양(梁) 나라의 문인(文人) 강엄(江淹)이 동무령(東武令)을 지냈으므로 강령(江令)이라 한다. 고향에 못 돌아감을 슬퍼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강령(綱領)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기 또는 정당이나 단체의 취지·목적·행동 규범 따위의 원칙을 말한다.
강로(岡老)
동강(東岡) 이항복(李恒福)을 말한다.
강뢰(江瀨)
‘강 여울’을 일컫는다.
강류본자조종거(江流本自朝宗去)
조종(朝宗)은 제후들이 봄과 여름에 천자를 찾아뵙는 것을 말하는데,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있다.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陣圖) 중에 있는 말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강류협휴상(僵柳協休祥)
한(漢) 나라 소제(昭帝) 3년에 상림원(上林苑)의 거대한 버드나무가 땅에 쓰러졌다가 저절로 일어나자, 휴홍(眭弘)이 말하기를 “이는 필부(匹夫)에서 천자가 나올 징조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5년 뒤에 선제(宣帝)가 민간에서 일어나 황제가 되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 卷75 「휴홍전(眭弘傳)」
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이다.
강리(腔裏)
‘가슴 속’이란 뜻이다.
강리(江蘺)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강리와 벽지로 옷을 해 입고, 가을 난초 엮어서 허리에 둘렀노라[扈江蘺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라는 구절이 있다. 강리와 벽지는 모두 향초(香草) 이름이다. 주자집주(朱子集註)에 “離香草生於江中 故曰江離”라는 풀이가 있다.
강리(茳籬)
강리(江離)로도 쓰며 궁궁이라고도 하고 천궁(川芎)이라고도 한다. 미나리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어린잎은 식용이 되고 한약재로 쓰인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강리인란(江蘺紉蘭)
강리(江蘺)와 난초는 향초(香草)인데, 이것을 입고 패(佩)를 만드는 것을 군자(君子)가 아름다운 덕을 닦는 데에 비유한 것이니,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말이다.
강리좌도소(江蘺左徒騷)
좌도의 글은 초 회왕(楚懷王) 때 좌도 벼슬을 지낸 굴원(屈原)의 글로, 「이소경(離騷經)」를 가리킨다.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의 “궁궁이풀과 벽지를 몸에 두르고 가을 난초 엮어서 허리에 차네[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에서 나온 것이다.
강매(江梅)
산골짜기 물가에 피어 있는 야생(野生) 매화를 말한다.
강명(强名)
『도덕경(道德經)』 25장의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에서 나온 말로, 실속이 없는 허명(虛名)이란 뜻으로 쓰인다.
강명왈묘(强名曰妙)
천지(天地)의 미묘한 조화를 무엇으로 형용하여 말할 수 없으나 억지로 묘(妙)라고 이름한다는 말이다.
강목(綱目)
주자가 편찬한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약칭이다.
강목수생(剛木水生)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 어려운 사람에게 없는 것을 내라고 억지를 부리며 강요하는 것을 비유한다.
강목팔목(岡目八目)
당사자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이해득실(利害得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바둑에서 나온 말로, 옆에서 보고 있는 관전자가 오히려 냉정하게 지켜보기 때문에 대국자보다 팔목(八目)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강(崗)은 옆이란 뜻이다.
강무(講武)
임금이 사냥이나 또는 군사 연습을 하는 것을 강무(講武)라고 한다.
강문통(江文通)
문통은 남조(南朝) 때 문인(文人) 강엄(江淹)의 자이다. 그는 젊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유학(儒學)·도학(道學)·『불경(佛經)』에 두루 통하였다.
강미천지회(糠眯天地晦)
외물(外物)가 마음속에 들어오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본성(本性)을 잃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
강백(姜柏)
조선조 후기의 시인이다. 특히 과시(科詩)에 능했으며 시풍(詩風)이 호탕했는데, 영조(英祖) 4년에 찰방(察訪)으로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도주했다는 죄로 유배당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강백(江伯)
하백(河伯), 즉 강물 귀신을 가리킨다.
강복(降服)
자신이 입어야 할 상복(喪服)에 대하여 한 등급을 내려 입는 것을 말한다.
강복이(姜復而)
복이(復而)는 강석기(姜碩期)의 자(字)이다.
강부(羌婦)
중국 서쪽에 있는 만족(蠻族)의 여자이다.
강부하지축성편(岡阜何知祝聖篇)
신하가 임금을 축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의 “하늘이 당신 안정시켜 모든 것이 흥성하네. 높은 산과 언덕처럼 산등성이 구릉처럼 흘러오는 강물처럼 불어나지 않음 없네(天保定爾 以莫不興 如山如阜 如岡如陵 如川之方至 以莫不增)”를 인용한 말이다. 곧 문장을 익히지 못해 시경의 이 시처럼 임금에 대한 축복을 고상하게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비(江妃)
전설 속에 나오는 신녀이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 「강비이녀(江妃二女)」에 “강비 두 여인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인지 모른다.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에 나와 놀다가 정교보(鄭交甫)를 만났는데 정교보가 그녀들이 신녀인 줄도 모르고 허리에 차고 있는 패옥(佩玉)을 달라고 청하자, 두 여인이 마침내 자기들이 찬 패옥을 풀어서 정교보에게 주었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조식(曺植)이 상고 시대 복희씨(伏羲氏)의 딸 복비(宓妃)가 낙수(洛水)에서 익사하여 수신(水神)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거해 지은 「낙신부(洛神賦)」에 “물결을 타고 사뿐사뿐 걸으니, 비단 버선에 물방울 튀어 오르네[凌波微步 羅襪生塵].”라고 하였다. / 유의어: 강비(江婓). / 인용: 江上女子歌(이광정), 桃竹杖引(두보)
강비주요순(糠粃鑄堯舜)
강비(糠粃)는 쭉정이와 겨를 말하는데 옛날 묘고야산(藐姑射山)의 신인(神人)은 도가 워낙 높아서 쭉정이와 겨를 가지고도 요순(堯舜)같은 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신인(神人)은 덕이 높아 그 몸의 먼지나 쭉정이만 가지고도 세상에서 성인(聖人)이라는 요순(堯舜)을 만들어 낼 수 있다.”라 하였다. / 유의어: 강비주우당(糠粃鑄虞唐)
강사(强仕)
4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上에 “사십왈강이사(四十曰强而仕)”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흔 살쯤 되면 지기(志氣)가 굳건하게 확립되어 이해(利害)나 화복(禍福)에 흔들림이 없게 되니 이제 벼슬해도 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 인용: 雲錦樓記(이제현)
강사(江汜)
『시경(詩經)』 소남(召南) 「강유사(江有汜)」에 “강에 갈라진 물줄기가 있거늘, 그 사람 시집갈 적에, 내게 들르지 않았도다. 내게 들르지 않았으나, 뉘우치고 편안해져 노래하도다.[江有沱 之子歸 不我過 不我過 其嘯也歌]”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시는 시집가면서 잉첩(媵妾)을 데리고 가지 않았던 적처(嫡妻)가 후비(后妃)의 교화를 입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강사(絳紗)
진 무제(晉武帝)가 양가(良家)의 자녀를 궁중으로 뽑아 들일 적에 자신이 직접 미녀를 골라낸 뒤 붉은 깁[絳紗]을 팔에 둘러 묶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후비전(后妃傳)』 上 호귀빈(胡貴嬪)
강사계(絳紗繫)
진 무제(晉武帝)가 아름다운 처녀를 선택하여 붉은 비단으로 팔을 매어 표를 해서 곧 궁중으로 데려왔다.
강산(薑山)
조선 순조(純祖) 때의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이서구(李書九)의 호이다.
강상(綱常)
유교 도덕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함. 삼강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이고 오상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다. / 인용: 正氣錄序(윤근수)
강상로(江上蘆)
달마조사(達摩祖師)가 갈대 한 가지를 타고 강을 건넜다 한다.
강생(江生)
남조(南朝) 양(梁) 나라의 강엄(江淹)을 가리킨다. 남조의 송(宋)·제(齊)·양(梁) 3대에 걸쳐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문장가로 당대에 이름이 났으나 만년에는 재주가 감퇴하여 좋은 글이 별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강랑(江郞)의 재주가 바닥이 났다고 말했다 한다. 『양서(梁書)』 卷十四 「江淹傳」
강서사(江西社)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말한다. 이 시파는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 황정견(黃庭堅)을 종(宗)으로 삼았는데, 이 시파의 시인에는 진사도(陳師道)·반대림(潘大臨)·조충지(晁冲之) 등이 있다.
강서종파(江西宗派)
송(宋) 나라 때 황정견(黃庭堅)을 종(宗)으로 삼은 시파(詩派)를 이르는데, 여기에는 진사도(陳師道)를 비롯하여 반대림(潘大臨)·사일(謝逸)·한구(韓駒)·조충지(晁沖之)·왕직방(王直方)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강서파(江西派)
남송(南宋) 시대에 시인들은 황산곡(黃山谷)의 시체를 승행하였는데, 황산곡이 강서 사람이므로 그 일파를 강서파라 하였다. 황정견(黃庭堅)은 소동파(蘇東坡)와 다른 시풍(詩風)을 창작하여 당 나라의 두보(杜甫)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가 강서성(江西省) 사람이므로 그의 시풍을 따르는 자들을 강서파라고 한다.
강설(絳雪)
선가(仙家)에서 먹는다는 단약(丹藥)의 이름이다.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선가의 상약(上藥)으로 현상(玄霜)과 강설(絳雪)이 있다.”라 하였다.
강설반(絳雪盤)강설(絳雪)을 담은 소반이다. 강설은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단약(丹藥)의 이름이다.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선가(仙家)의 상약(上藥)으로는 현상(玄霜)과 강설이 있다.”라 하였다.
강설진망(强舌塵網)
‘혀가 굳어지도록 글을 읽지 않음으로써 책에 먼지가 끼고 거미줄을 치게 되었음’을 이른 말이다.
강설현상(絳雪玄霜)
모두 선약(仙藥)의 이름이다.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선가(仙家)의 상약(上藥)에 현상·강설이 있다.”라 하였다.
강성(康成)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예기(禮記)』 등의 주석을 낸 정현(鄭玄)의 자이다. 정현은 일찍이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문도(門徒)가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국상(國相) 공융(孔融)이 정현을 매우 존경하여 그가 사는 향리를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이라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정현전(鄭玄傳)』
강성청락매(江城聽落梅)
봄철이 다 지나 초여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 권20 「여사랑중음청황학루상취적(與史郞中飮聽黃鶴樓上吹笛)」의 “황학루 누대 속에 옥피리를 부는데, 가람성 오월달에 매화꽃이 떨어지네[黃鶴樓中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강수(强首)
신라(新羅) 때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서, 특히 태종 무열왕 때에는 당(唐) 나라와 신라 사이에 왕래하던 국서(國書)를 도맡아 크게 공헌하였고, 신문왕 때에는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워 여러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이때 강수가 설총(薛聰)과 함께 경서(經書)를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쳤었다.
강시(姜詩)
후한 때의 효자(孝子)인데, 그의 아내 또한 남편보다 효성이 더 지극하여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었다. 시어머니가 생선회를 좋아하였으므로, 부부가 항상 회를 장만하여 봉양하였더니, 어느날 갑자기 집 옆에서 샘물이 솟아나왔는데, 물맛이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강물과 같았고, 거기에는 매일 아침마다 잉어 두 마리씩 뛰어나왔으므로 항상 이것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강시처전(姜詩妻傳)』
강실(絳室)
황정경(黃庭經)에 “마음은 강궁(絳宮)이 되고 폐(肺)는 옥당궁(玉堂宮)이 된다.”라고 보인다.
강아(羌兒)
강족(羌族)의 아이, 즉 오랑캐 소년을 말한다.
강악등산(康樂登山)
남조(南朝) 송(宋) 시인 사령운(謝靈運). 강락공(康樂公)을 봉했다. 서화(書畵)·시문(詩文)에 능했으며 등산을 좋아했다.
강안여자(强顔女子)
얼굴이 강한(두꺼운) 여자라는 말로, 수치심을 모르는 여자라는 뜻이다.
강약궐(絳藥闕)
‘신선이 노는 곳’을 말한다.
강약산(姜若山)
약산(若山)은 강이오의 호이다. 자는 성순(聖淳)이고, 진주인(晉州人)인데 표암(豹庵) 세황(世晃)의 손자이다. 그림을 잘 그렸다.
강약지원운(强弱之原雲)
제후국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먼저 망하고 약하면 약할수록 요행히 살아남은 현상을 말한다.
강양(江陽)
경상남도 합천(陜川)의 고호이다.
강엄(江淹)
강엄의 자는 문통(文通)인데 남조(南朝) 때 고성(考城) 사람으로 본래 글재주가 있었다. 처음에는 송(宋)·제(齊)에서 벼슬했고, 양(梁) 나라 천감(天監) 중에 금자광록대부로서 『제사십지(齊史十志)』를 지었다.
강엄오색필(江淹五色筆)
육조(六朝) 때 강엄은 문장을 잘하였는데 한번은 꿈에 곽박(郭璞)이라는 자가 “내 붓을 자네가 가지고 있은 지 여러 해였으니 이제 돌려다오.”라 하므로, 품에서 오색필을 내어 돌려주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아름다운 시를 짓지 못하였다. 『남사(南史)』 卷五十九 「강엄전(江淹傳)」
강엄재진(江淹才盡)
강엄(江淹)은 남조 시대의 송(宋)·남제(南齊)·양(梁)의 문인으로, 자는 문통(文通)이다. 젊은 날에는 문사(文思)가 뛰어났으나 어느 날 꿈에 곽박(郭璞)이 채필(綵筆)을 돌려달라고 하자, 돌려준 뒤로 문필이 예전만 못하여 사람들이 강엄재진(江淹才盡)이라고 하였다.
강엄필(江淹筆)
강엄(江淹)은 양나라 때의 문장가로, 그가 한번은 야정(冶亭)에서 잠을 자는데 곽박(郭璞)이라고 자칭하는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내 붓이 그대에게 가 있은 지 여러 해이니, 이제는 나에게 돌려다오.” 하므로, 자기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에게 돌려준 꿈을 꾸었는데, 그 후로는 좋은 시문을 전혀 짓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강엄의 붓이란 곧 뛰어난 문재(文才)를 의미한다. 『남사(南史)』 卷59 「강엄열전(江淹列傳)」
강역(疆埸)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를 말한다. / 유의어: 전장(戰場).
강역불토(剛亦不吐)
씹기 거북한 것은 뱉고 부드러운 것은 삼킨다는 뜻인데, 권문세가는 건드리지 못하고 약한 자만 괴롭히는 것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부드러워도 삼키지 아니하며 강해도 뱉지 않는다[柔亦不茹 剛亦不吐].”라고 하였다.
강연소(講筵所)
송 인종(宋仁宗) 경력(慶曆) 연간 초기에 설치했던 관사로, 궁 안에 있던 설서소(說書所)를 개명한 것이다. 『송대관제사전(宋代官制辭典)』 「강연소(講筵所)」
강영과(江盈科)
명(明) 나라 사람으로 자는 진지(進之), 호는 녹라산인(綠蘿山人)이다. 벼슬은 사천제학부사(泗川提學副使)를 지냈고, 저서에는 16종의 소전(小傳)과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16종이 있다.
강왕곡렴수(康王谷簾水)
중국 강서(江西) 성자현(星子縣) 서쪽 강왕곡에 염수(簾水)가 있는데 그 물줄기가 발과 같이 바위에 퍼져서 흘러내린다. 육우(陸羽)는 그 물을 천하의 제일이라고 품평하였다.
강왕회마수(康王回馬首)
강왕(康王)은 휘종(徽宗)의 아홉째 아들인데, 금(金) 나라 군사가 송 나라에 침입하매 송 나라에서 땅을 베어 주고 화의(和議)를 하려고 하니, 금 나라에서 강왕(康王)을 오라 하였다. 강왕이 처음 갔다가 돌아와서 두 번 가려 하다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돌렸다. 금 나라에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잡아가니, 강왕이 강남(江南)에 옮겨서 임금이 되었다. 이가 곧 고종(高宗)이다.
강요(江珧)
정삼각형 모양의 검은 색 바다 조개이다.
강유(姜維)
삼국시대 촉(蜀)의 무장. 천수기(天水冀; 甘肅) 사람. 자(字)는 백약(伯約)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건흥(建興) 6년 제갈량(諸葛亮)이 북벌군을 일으킬 때 투항하여 크게 신임을 받았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蜀)의 군사상 책임자가 되고, 결국 대장군, 다시 녹상서사(錄尙書事)로서 민정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환관의 횡포에 맞섰기 때문에, 수도인 성도(成都)에 들어가지 못했다. 촉(蜀)이 멸망하자 위(魏)에 항복하여 종회(鍾會)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종회가 난을 일으켜 살해되었다.
강유(絳帷)
후한(後漢)의 명유(名儒) 마융(馬融)이 늘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사장막(絳紗帳)을 내리고 생도들을 교수했는데, 뒤에 여악(女樂)들이 늘어섰었음을 말한다.
강유겸전(剛柔兼全)
굳셈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춤. 곧, 성품이 굳세면서도 부드러움을 말한다.
강일(剛日)
일진(日辰)에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이 든 날을 이른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외사는 강일에 하며 내사는 유일에 한다[外事以剛日 內事以柔日].”라 하였는데, 그 소(疏)에 “10일 중에 기수일이 다섯, 우수일이 다섯인데 갑·병·무·경·임은 강일이며, 을·정·기·신·계는 유일이 된다[十日 有五奇五偶 甲丙戊庚壬爲剛 乙丁己辛癸爲柔].”라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외사는 치병(治兵)·순수(巡狩) 등의 일, 내사는 종묘 제사·관혼 상제를 말한다.
강자(綱字)
운부(韻府)에서 여러 글자를 묶은 음운 단위의 표제(標題) 글자로서, 곧 동운(東韻)의 여러 글자 중에서는 ‘동(東)’ 자, 동운(冬韻)의 글자들 중에서는 ‘동(冬)’ 자를 말한다.
강작아시구(强作哦詩癯)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는 당나라 헌종(憲宗) 때 같은 시대의 시인인데,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시를 평하기를 “맹교는 차고, 가도는 여위었다[郊寒島瘦].”라 하였다.
강장(康莊)
번화한 거리하여 사통 팔달의 큰길을 말한다. 『이아(爾雅)』 「석궁(釋宮)」 에, “다섯가닥으로 통한 길은 강(康)이라 하고, 여섯가닥으로 통한 길은 장(莊)이라 한다[五達謂之康 六達謂之莊].” 하였다. 송순의 「문개가(聞丐歌)」에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큰 길에서 마치려네[優遊卒歲於康莊].”라는 말이 있다. / 인용: 虎狼(이학규)
강장(絳帳)
붉은 비단으로 만든 휘장으로 書堂이나 스승을 지칭한다. 강좌(講座).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호사스러움을 좋아하여 언제나 높은 당상에 앉아 진홍색 비단으로 된 휘장을 쳐두고 앞에서는 제생들을 교수하고 뒤에는 여악(女樂)을 배열해 놓았는데, 그 진홍색 휘장(絳帳)을 후세에 강좌(講座)를 미칭하는 뜻으로 전용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마융전(馬融傳)에 “융의 거처(居處) 기복(器服)이 치식(侈飾)이 많아서 항상 고당(高堂)에 앉아 강사장(絳紗帳)을 치고서 앞으로는 생도들을 가르치고 뒤로는 여악(女樂)을 벌였다.”라 하였다. 그래서 후세에 강좌(講座)를 지칭하여 강장이라 한다. 『후한서(後漢書)』 「마융전(馬融傳)」 / 인용: 哭林德涵(김창협)
강장유가훈(絳帳留家訓)
자식들을 엄하게 훈도한 것을 말한다. 옛날 후한(後漢)의 대유(大儒) 마융(馬融)이 고당(高堂)에 앉아 붉은 장막을 드리우고 생도를 가르쳤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후한서(後漢書)』 「마융전(馬融傳)」
강장하무약병(强將下無弱兵)
강한 장수 밑에 약한 병사 없다. 유능한 인재 밑에는 유능한 인재가 모인다는 말이다.
강장혹참암(康莊或巉巖)
강장(康莊) 즉 사통팔달의 대로(大路) 위에서도 거침없이 참소와 무함의 유언비어가 횡행하여,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마치 험한 산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극악무도한 대죄인이 옳고 그름을 알 수 없게 흐려 놓고는 도당을 모아 대로상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네[元惡迷是似 聚謀洩康莊].”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23 「입형주(入衡州)」
강장휘음(絳帳徽音)
박학한 학식으로 잘 가르쳤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위영(韋逞)의 모친 송씨(宋氏)가 아무도 모르는 주관(周官)의 의례(儀禮)에 밝았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의 집에 학당을 세우고 붉은 비단 장막(絳帳) 너머로 가르치게 했던 고사가 『열녀전(列女傳)』에 실려 있다.
강적(羌篴)
곡명. 즉 호가곡(胡笳曲)이다.
강적(羌笛)
① 피리 이른다. 한 무제(漢武帝) 시대에 구중(丘仲)이 만든 악기라 하고 혹은 오랑캐 지방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 곡조에 낙매곡(落梅曲)이 있다.
② 일종의 호가(胡笳). 이백(李白)의 취적시(吹笛詩)의 “황학루에서 옥피리 부니 오월 강성(江城)에 매화가 떨어지네[黃鶴樓中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고 한 시가 낙매화곡(落梅花曲)으로 악부(樂府)에 들어있다.
강절(絳節)
사신을 상징하는 붉은 절부(節符). 옛날에 사신이 지니고 갔던 신표(信標)이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이다.
강절조군선(絳節朝羣仙)
강절은 한(漢) 나라 때에 사자(使者)가 가지는 적색(赤色)의 부절(符節)을 말한 것이니, 강절을 지닌 군선이란 즉 각국의 사신들을 미화하여 이른 말이다.
강정항우(扛鼎項羽)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항적(項籍)이 신장은 8척이 넘고 힘은 능히 구정(九鼎)을 들었다[籍長八尺餘, 力能扛鼎].”라 하였다.
강조(江調)
악부(樂府)의 강남조(江南調)로서 채련(采蓮)·채릉(采菱) 등의 곡조를 말한다.
강조(腔調)
악곡의 성률(聲律)이다.
강좌(江左)
①강좌는 중국 장강(長江) 하류의 동부지방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이다.
②왕세정을 가리킨다. 왕세정이 바로 강소성(江蘇省) 태창(太倉) 출신이기 때문이다.
강좌명류(江左名流)
강좌는 중국 장강(長江) 하류의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일대이고 명류는 명사와 같은 뜻인데, 동진(東晉) 때 강좌에서 명사로 불리던 왕도(王導)·사안(謝安)등을 가리킨다.
강좌이오(江左夷吾)
강좌(江左)는 장강(長江) 하류의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의 강소성(江蘇省) 일대를 말하고, 이오(夷吾)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제 환공(齊桓公)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룬 관중(管仲)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온교(溫嬌)가 왕도(王導)의 인물됨을 보고 강좌의 이오라고 칭찬한 데서 나온 말이다. 곧 국가의 위기를 구제할 왕도와 같은 뛰어난 인재를 말한다.
강좌풍류(江左風流)
강좌(江左)는 강동(江東)을 말한다. 『남제서(南齊書)』 「왕검전(王儉傳)」에 “강좌(江左)의 풍류재상(風流宰相)으로 오직 사안(謝安)이 있을 뿐이다.”라 하였다.
강주(强做)
‘억지로 하다’라는 뜻이다.
강주누습포(江州淚濕袍)
당 나라의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늙은 기생이 타는 비파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린 고사를 말한다. 백낙천이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상소를 올렸다가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는데, 분포에서 손님을 전송하다가 늙은 기생이 뜯는 비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비파행(琵琶行)을 지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前集 「비파행(琵琶行)」
강주백사마(江州白司馬)
백 사마는 곧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 말인데, 백낙천이 「비파행(琵琶行)」을 짓고 자신을 가리켜 ‘강주 사마(江州司馬)’라 하였으므로 일컬어진 것이다.
강주사마루천행(江州司馬淚千行)
당 나라 백낙천(白樂天)이 강주사마(江州司馬)로 멀리 좌천(左遷)되어 갔는데, 강상(江上)에서 여자의 비파소리를 듣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여 눈물을 흘렸다.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의 자(字)다.
강중연류감(岡中連類坎)
『주역(周易)』의 감괘(坎卦)는 위아래는 떨어져 있고 가운데만 연하여져 있다. 그러므로 감중련(坎中連)이라 하는데, 산의 모습이 마치 감괘처럼 위아래는 떨어져 있고 가운데만 연하여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강중의패채란향(江中衣佩茝蘭香)
초(楚)의 굴원(屈原)이 상강(湘江)에 빠져 죽었는데, 그의 의상(衣裳)이 채란(茝蘭)처럼 향기롭다는 말로, 굴원의 충절과 고고(高孤)한 의취를 찬미한 것이다.
강책(絳幘)
계관(鷄冠)을 비유하여 한 말이다. 당 나라 왕유(王維)의 시에 “絳幘鷄人報曉籌”라 하였다.
강철지추(强鐵之秋)
강철(强鐵)은 상상의 동물로 지나간 곳마다 결실이 다된 초목이나 곡초가 말라 죽는다는 뜻으로 운수가 기박한 사람은 팔자가 사나워 가는 곳마다 불행한 사고가 연발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강총(江總)
강충(江充)은 진(陳) 나라 사람인데, 그의 6대조 강이(江夷)는 남조 송(南朝宋) 때 재상이었고, 강총 또한 시문(詩文)으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재상에 이르렀었다. 『남사(南史)』 卷三十六
강총미환가(江摠未還家)
양(梁) 나라 문인(文人) 강총(江摠)이 난리를 만나서 고향을 떠나, 그의 외숙이 있는 영남(嶺南)으로 가서 의탁하였는데,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강추사(江秋史)
청 나라 강덕량(江德量)이다.
강충(江充)
조(趙) 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제(齊)였는데, 이름을 고치고 망명하여 한 나라로 오니 무제는 상림원(上林苑)에 있는 견대궁(犬臺宮)에서 만나보고는 그의 훌륭한 외모에 감탄하여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에는 참으로 기이한 선비가 많다.”라 하고는 중용하였는데, 뒤에 무제가 병들자 여태자(戾太子)가 저주(咀呪)한 때문이라고 속여 무고(巫蠱)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이에 격분한 여태자는 그를 죽이고 자살했는데, 뒤에 무제는 여태자의 억울함을 깨닫고는 강충의 삼족을 멸하였다. 『한서(漢書)』 「강충전(江充傳)」
강타(江沱)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강유사(江有汜)」 시에 “강에는 지류가 있는데, 그 사람은 가면서 날 데려가지 않네……[江有沱 之子歸 不我過]”라 운운하였다.
강태공(姜太公)
낚시질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고대 중국 주나라 태공망(太公望)에게서 비롯되었다.
강파(糠簸)
손작이 어느 날 습착치(習鑿齒)와 함께 길을 가다가 뒤에 오는 착치가 ‘앞에 있는 쭉정이(糠)를 키질(簸)해 버리겠다.’라 했다. 『진서(晉書)』 卷五十六 「손작전(孫綽傳)」
강편수(姜編修)
중국 한림원(翰林院)의 편수 강왈광(姜曰廣)을 말한다. 인조 4년에 황자 탄생의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
강포(江鮑)
강엄(江淹)과 포조(鮑照)를 말한다. 강엄은 남조(南朝) 시대 양(梁) 나라의 시인(詩人)이고, 포조도 역시 남조 시대 송(宋) 나라의 시인이다.
강풍(罡風)
도교에서, 높은 하늘의 바람이라는 뜻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을 이르는 말한다. /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강피(姜被)
강굉(姜肱)의 이불. 형제간의 우애를 말한다. 후한(後漢) 때 강굉(姜肱)이 나이 젊은 계모(繼母)를 섬기면서, 내실(內室)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우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화목하게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53 「강굉전(姜肱傳)」
강피난(姜被暖)
강씨(姜氏)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강굉(姜肱)은 그의 아우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우애가 지극하여 한 이불을 같이 덮었다 한다.
강필(江筆)
훌륭한 시문을 비유한 말이다. 강필은 양(梁) 나라 때의 문장가인 강엄(江淹)의 붓이란 뜻으로, 그가 일찍이 곽박(郭璞)에게서 오색필(五色筆)을 받아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가 뒤에 꿈에 그 붓을 다시 돌려주고는 문재(文才)가 상실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양서(梁書)』 卷十四
강하(江夏)
장강과 하수를 말한다.
강하류만고(江河流萬古)
문장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不廢江河萬古流”라 하였다.
강하황동(江夏黃童)
총명하고 박학하여 재주가 넘치는 사람을 칭송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사람인 황향(黃香)은 자가 문강(文强)인데, 어려서 모든 서책을 두루 보아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특히 천문(天文), 역법(曆法), 음악(音樂) 등을 좋아하여 박문강기(博聞强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천하무쌍 강하황동(天下無雙江夏黃童)’이라고 칭하였다. 뒤에 장제(章帝)가 황향에게 동관(東觀)에 있으면서 미처 보지 못한 서책을 보게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면서 칭송하였다. 『동관한기(東觀漢記)』 「황향(黃香)」
강한(江漢)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 형초(荊楚) 일대를 가리킨다.
강한국지기(江漢國之紀)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월(四月)」에 “넘실거리는 강한의 물, 남쪽 나라에 물 대 주네[滔滔江漢 南國之紀].”라는 말이 있다.
강한귀(江漢歸)
강한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물길로 배를 타고 돌아왔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시 회파상유(懷灞上遊)에 “눈앞에 펼쳐진 고금의 뜻이여. 강한에서 한 번 돌아가는 배를 타노라[眼前古今意 江漢一歸舟].”라 하였다.
강한송풍신(江漢頌楓宸)
「강한(江漢)」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주 선왕(周宣王) 때 회수(淮水) 가의 오랑캐가 자주 침입하자, 선왕이 소목공(召穆公)에게 명하여 회남(淮南)의 오랑캐를 평정하니, 시인이 그 공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강한영광광(江漢詠洸洸)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편을 말함인데 주나라 문왕(文王)이 남쪽 한강(漢江)유역까지 미친 것을 노래한 시이다. 그것으로 새 임금의 덕화(德化)를 말함이다.
강한조종(江漢朝宗)
강수(江水)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제후(諸侯)들이 천자(天子)를 우러러 보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강항(强項)
‘굳센 목’이란 뜻으로 강직함을 이른 말이다. 광무제(光武帝) 때에 호양공주(湖陽公主)의 종(奴)이 사람을 죽였으므로, 당시 낙양령(洛陽令)으로 있던 동선이 그를 잡아다 죽이었다. 그러자 공주가 이 일을 임금께 하소연한 결과, 마침내 임금이 동선을 잡아다 놓고 공주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니, 동선이 두 팔로 땅을 힘껏 버티어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강항령(强項令)을 내보내라고 명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선전(董宣傳)」
강항령(强項令)
강직하여 굴(屈)하지 않는 현령(縣令)이란 뜻으로, 후한(後漢) 때의 동선(董宣)을 가리킨 말이다. 동선이 낙양령(洛陽令)으로 있을 때, 호양공주[湖陽公主 광무제(光武帝)의 손위 누이임]의 종이 대낮에 사람을 죽여 공주의 집에 숨겨놓았으나 옥리(獄吏)가 그를 체포하지 못했는데, 뒤에 공주가 그 종을 데리고 출행하는 때를 당하여 동선이 길에서 공주의 행차를 정지시키고 그 종을 끌어내려 때려 죽였다. 공주가 그 일을 임금에게 하소연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동선을 불러다 놓고 매를 때려 죽이려고 하자, 동선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성덕으로 나라를 중흥시키고서 종을 놓아 선량한 사람을 죽인다면 장차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매를 기다리지 않고 자살하겠습니다.”라 하고는 머리로 기둥을 들이받아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황문(黃門)을 시켜 동선을 붙잡게 하고 동선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드리도록 하였으나, 동선은 두 손으로 땅을 힘껏 버티고서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결국 그를 강직하게 여겨, 강항령을 내보내고 돈 삼십만을 하사하라고 조칙을 내리니, 이로부터 낙양의 강호들이 동선을 대단히 무서워하여 불법을 자행하지 못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77 酷吏傳 董宣
강해(江海)
은사(隱士)의 거처를 말한다. 『장자(莊子)』 「각의(刻意)」에 “此江海之士 避世之人”이라 하였다.
강해심(江海心)
벼슬하지 않고 산수(山水) 사이에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강향(江鄕)
강과 하천이 많은 중국의 강남땅을 이르는 말이다.
강현노인(絳縣老人)
『좌전(左傳)』에 진(晋) 도부인(悼夫人)에게 초대되어 회식(會食)한 강현(絳縣)의 노인. 그의 나이가 일수(日數)로 4백45 갑자(甲子)라 해서 그것이 2만 6천 6백60일이 되므로 사광(師曠)은 73년이라 하고, 사조(史趙)가 “해유이수육신 하이여신 족기일수(亥有二首六身 下二如身 足其日數)”라 하여서 사구백(士久伯)이 그런즉 2만 6천6백60일이라 판정했다.
강현옹(絳縣翁)
평생토록 험한 일만 하며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늙어 온 나이 많은 노인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강현(絳縣) 출신의 73세 된 노인이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되자 조맹(趙孟)이 불쌍하게 여기면서 사죄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襄公 30年
강호(羌胡)
서강족(西羌族)으로, 고대 중국 사천성(四川省) 서부에 살던 부족이다.
강호(康瓠)
질솥.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쓸모 있는 주정(周鼎)은 버려두고 깨어진 강호를 보배로 여긴다.”라 하였다.
강호만리(江湖萬里)
난세(亂世)에 화를 피해 멀리 숨어살려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문명(問明)에 “군자는 마치 봉황처럼 처신하여 치세(治世)에는 출현하고 난세에는 숨어야 할 것이니, 기러기가 저 보이지 않는 하늘 속으로 높이 날아가면 어떻게 주살로 쏘아 맞출 수 있겠는가[鴻飛冥冥 人何篡焉].”라고 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강호산인(江湖散人)
당 나라 육구몽(陸龜蒙)이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칭하였다.
강호상망(江湖相忘)
‘도에 뜻을 두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물고기는 강호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 잊는다[魚相造乎水, 人相造乎道].”라 한 데서 온 말이다.
강호연파(江湖煙波)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보얗게 이는 잔물결. 곧, 대자연(大自然)의 풍경(風景)을 말한다.
강호와죽림(江湖臥竹林)
관동별곡의 첫 구절인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를 가리킨다.
강호우(江湖憂)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높이 조정에 거할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멀리 강호에 처할 때는 임금을 걱정한다[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강호지락(江湖之樂)
강호(자연)을 즐김. 자연을 벗삼아 누리는 즐거움을 말한다.
강호지인(江湖之人)
강호에 있는 사람으로 곧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강홉량(糠合郞)
허적(許적)이 감찰(監察)이었을 때에 그 성품은 총찰(總察)하였으나 청대(請臺)하는 관사(官司)에서 바치는 것은 강직(糠稷) 5홉(合)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집안에서 전하며 우스개로 부르던 별호이다.
강홍립(姜弘立)
우의정 사상(士尙)의 손자요, 이조 판서 신(紳)의 아들로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618년 명 나라가 건주위의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 요청을 하자, 그가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출정했는데, 다음해 명 나라 도독 유정의 휘하에 들어가 부차(富車)의 싸움에서 패전하여 휘하 전군을 거느리고 적군에 항복했었다.
강회(江淮)
① 강수(江水) 즉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를 말한다.
② 장강과 회수를 말한다.
강회(康回)
공공(共工)의 이른다. 요임금 때 치수를 맡은 관리이다.
강회빙노비곤유(康回憑怒圮坤維)
강회(康回)는 공공(共工)의 이름이다. 전욱(顓頊)과 제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실패하자 화풀이로 부주산(不周山)에 몸을 부딪쳤는데 그 결과 하늘의 끈이 끊어지고 땅 기둥이 무너져서 동남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한다. 『초사(楚辭)』 「천문(天問)」 註
강회지투(康回之鬪)
강회는 상고 시대 공공(共工)의 이름이다. 그는 힘이 세었는데 전욱(顓頊)과 임금 자리를 다투다가 되지 못하자, 성내어 불주산(不周山)에 부딪치니 하늘의 끈이 끊어지고 땅의 기둥이 꺾이었다. 이때문에 중국의 지형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
강후(絳侯)
한(漢) 나라 주발(周勃)인데 유방(劉邦)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그 공로로 강후에 봉해졌다. 유방이 일찍이 말하기를 “주발은 중후하고 학문은 없으나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여후(呂后) 때에 여씨(呂氏)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여후가 죽자 주발이 진평(陳平) 등과 같이 여씨들을 죽이고 문제(文帝)를 맞이하여 왕으로 모시었다. 『한서(漢書)』 卷 40 「주발전(周勃傳)」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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