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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52. 금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52. 금

건방진방랑자 2019. 11. 1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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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금간(錦肝)

금심수장(錦心繡腸)과 같은 뜻으로, 시문(詩文)에 있어 가사여구(佳詞麗句)를 지어내는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금강(錦江)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강이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짓는 강으로 이 하구인 기벌포를 통해서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泗沘城)으로 진격했다.

 

금강강상시중성(錦江江上詩中聖)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금강은 민강(岷江)의 지류(支流)로 사천성(四川省)에 있는데, 두보가 이곳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금강권(金剛拳)

가장 강한 주먹으로, 무엇이든지 파괴할 수 있다는 제석천(帝釋天)의 주먹이다. 주먹의 네 가지 종류의 하나로,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넣고 쥐는 것이다.

 

금강삼매신(金剛三味身)

금강(金剛)과 같이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는 몸을 이른다.

 

금강저(金剛杵)

불가의 용어인데, 오고저(五鈷杵)라고도 한다. 승려들이 수법(修法)할 때에 쓰는 도구의 하나이다. 쇠나 구리로 만드는데, 양 끝을 한 가지로 만든 것을 독고(獨鈷), 세 가지로 만든 것을 삼고(三鈷), 다섯 가지로 만든 것을 오고(五鈷)라 한다. ()는 본디 인도의 무기이다. 금강저는 보리심(菩提心)의 뜻이 있으므로 이를 갖지 않으면 불도 수행을 완성하기 어렵다 한다. 번뇌를 끊고 악마를 굴복시키는 병기로서 견고해서 부서지지 않는 신통력을 말한다.

 

금강정(錦江亭)

영월(寧越) 금장강(錦障江) 언덕의 절벽 위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금경(金鏡)

금배경(金背鏡)의 준말로, 해록쇄사(海錄碎事)고계보(高季輔)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인사발령(人事發令)을 함에 있어 적재적소에 잘 처리하니, 태종(太宗)이 그에게 금배경을 하사하여 사람을 잘 전형하는 것을 표창하였다.”라고 하였다.

당 나라 때에 황제(皇帝)의 생일에는 신하들이 거울()을 바쳐서 축하하는데, 현종(玄宗)의 생일에 하지장(賀知章)은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이란 글을 지어 바치었다. 그 책은 국가의 흥망(興亡)에 거울이 될 만한 사적을 적은 것이었다.

 

금경(金莖)

동주(銅柱)인데, 한 무제(漢武帝)20()의 동주를 세우고 그 위에다 이슬 받는 선인장(仙人掌)을 받들어 옥설(玉屑)을 이슬에 타서 마시며 신선(神仙)을 구하였다. 두보(杜甫)의 시에 이슬 받는 금경이 운한 사이에 솟았도다[承露金莖雲漢間].”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반고전(班固傳)擢雙立之金莖이라 하고, 그 주에 孝武作柏梁銅柱 承露仙人掌之屬 金莖銅柱也라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 서쪽에 태액지(太液池)를 만들고, 그 속에 영주(瀛洲), 봉래(蓬萊), 방장(方丈)의 삼신산을 본떠서 산을 만들어 세웠으며, 또 감로(甘露)와 옥가루를 섞어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설에 따라 감로(甘露)를 받으려고 선인장(仙人掌) 모양의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어 구리 기둥으로 높이 받쳐 세웠는데, 이 구리 기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上 註

 

금경공유로(金莖空有露)

재질을 활용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했다는 말이다. 금경(金莖)은 승로반(承露盤)을 받쳐 세우고 있는 구리 기둥을 말한다.

 

금경항해(金莖沆瀣)

한 무제가 장생불사의 선방(仙方)을 얻고자 높은 동주(銅柱)를 세워 그 끝에 선인장(仙人掌)을 만들고 감로(甘露)를 받아 마시려 했다.

 

금경휴(琴景休)

경휴(景休)는 금봉서(琴鳳瑞)의 자이다.

 

금계(金雞)

동해바다에 부상(扶桑)이란 나무가 있고 해가 그 가지에서 떠오르는데 금계가 운다 한다.

사조(赦詔)를 반포하는 날 간두(竿頭)에 설치하는 금()으로 장식한 닭을 말한 것으로, 왕의 사명(赦命)을 말한다.

 

금계(金鷄)

당나라에서는 대사(大赦)가 있으면 붉은 옷 입은 아전이 금으로 만든 닭을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한다.

② 『수서(隋書)』 「형법지(刑法志)죄수를 석방시킬 때 창합문(閶闔門) 밖 우측에 금계와 북을 설치하여 북소리가 일천 번 울린 뒤에 죄수의 가쇄(枷鎖)를 풀어 준다.”하였고, 송사(宋史) 의위지(儀衛志)에는 하늘의 천계성(天鷄星)이 움직이면 나라에서 사령(赦令)이 내린다 하여 육조(六朝) 이래로 금계를 사용했다.”라고 하였다.

별 이름으로, 천계성(天鷄星)이라고도 하는데 이 별이 움직이면 반드시 사면령이 내린다 한다.

금계의 깃으로 꾸며 만든 병풍이나 장막이다. 당서(唐書)안녹산전(安祿山傳)()가 근정루(勤政樓)에 올라가서 장막 왼쪽에 금계대장(金鷄大章)을 베풀고 앞에는 특별한 의자를 놓고 안녹산을 그곳에 앉게 했다.”라 하였다.

 

금계(金界)

사찰의 별칭이다.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봉호(封號)이다.

 

금계사(金鷄赦)

금계(金鷄)로 놓아줌은 북제(北齊) 때에 죄인을 놓아주는 날에 무고령(武庫令)이 금계와 북을 창합문(閶闔門)에 설치해 놓은 다음 죄수들을 궁궐 앞에 모이게 하고, 북을 1천 번 울린 뒤에 형틀을 풀어 주었다 한다. 수서(隋書)』 「형법지(刑法志)

 

금계사(金鷄使)

사조사(赦詔使)와 같다. 옛날 사조(赦詔)를 반포할 때 황금으로 머리를 장식한 금계(金鷄)를 간대 머리[竿頭]에 설치했던 데서 온 말이다.

 

금계악(金鷄喔)

부상(扶桑)의 산 위에서 황금닭(金鷄)이 한 번 울면 천하의 닭이 모두 따라 울며 새벽이 밝아 온다는 전설이 있다.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

 

금계희보(金鷄喜報)

죄를 사면한다는 소식을 이른다. 옛날에 사조(赦詔)를 반포하는 날이면 금계(金鷄)를 장대 끝에다 올려두었다 한다. 황정견(黃庭堅)의 죽지사(竹枝詞)두견은 더 울래야 피가 밭아 눈물 없는데, 어느 때나 금계가 구주를 사면할까?[杜鵑無血可續淚 何日金鷄赦九州].”라고 하였다.

 

금고(琴高)

() 나라 때 조() 나라 사람인데 거문고를 잘 타고 기주(冀州) 탁군(涿郡)에서 놀았다. 그 후 그는 탁수(涿水)에 들어가서 용의 새끼를 데리고 아무 날에 틀림없이 돌아오겠다고 제자들과 약속하였다. 제자들이 재계를 하고 그날 물 옆에서 기다렸더니 고가 과연 잉어를 타고 나왔다가 한 달을 머무르고 다시 물로 들어갔다 한다. 열선전(列仙傳)

 

금고(金鼓)

절의 별칭이다.

 

금고과리어(琴高跨鯉魚)

금고(琴高)는 옛날 선인(仙人)의 이름인데, 그는 일찍이 선술(仙術)을 닦아 잉어를 타고 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금고기어룡(琴高騎魚龍)

금고(琴高)는 조() 나라 사람으로 거문고를 잘 탔었으며, 제자들과 용()의 아들을 잡으려고 물에 들어가 잉어를 타고 나왔다가 다시 물에 들어갔다 한다. 열선전(列仙傳)일설(一說)에는 한대(漢代) 사람으로, 경수(涇水) 북쪽 산 바위에 살다가 붉은 잉어를 타고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 한다. 명승지(名勝志)

 

금고리(琴高鯉)

옛날에 금고(琴高)란 사람이 도술(道術)을 배워 잉어를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그의 연대에 대해서는 설()이 많아서 분명치 않다.

 

금고생(琴高生)

고대의 거문고 잘 탔다는 사람이다.

 

금고일반(今古一般)

지금이나 예나 하나 같다라는 말로 시대는 변하지만 기저에 흐르는 옳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금곡(金谷)

중국 하남(河南) 낙양시(洛陽市) 서북쪽에 있는 땅 이름인데, 진 무제(晉武帝)때 부자 석숭(石崇)이 그곳에 호화로운 별장(金谷園)을 만들어 놓고 호사를 누렸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자기의 애첩 녹주(綠珠)를 달라는 권신 손수(孫秀)의 요구를 거절한 일로 그의 모함에 걸려 처자 등 일족 15인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처형되기 위해 수레에 실려 동시(東市)로 나갈 때 한탄하기를 종놈들이 내 재산을 탐낸 것이다.”라고 하자, 압송해가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재산이 해를 끼치는 줄 알았으면 어찌 일찌감치 분산시키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진서(晉書)卷三十三

중국 하남(河南) 낙양시(洛陽市) 서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금곡간(金谷澗) 또는 금곡원(金谷園)이라고도 불린다. ()나라 석숭(石崇)이 그곳에 동산을 만들어 놓고 벗들과 밤낮으로 연회를 베풀어 즐기면서 각자 시를 짓도록 하고 짓지 못한 자는 벌주 서 말을 마시게 했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

 

금곡기(金谷妓)

() 나라 때 석숭(石崇)이 금곡원(金谷園)에서 주연(酒宴)을 하면서 데리고 놀던 애기(愛妓) 녹주(綠珠)를 말한다.

 

금곡롱리곤(琴曲弄離鵾)

옛날에 서로 화답하는 노래 가운데 있었다는 곤계곡(鵾鷄曲)이다.

 

금곡원(金谷園)

() 나라 석숭의 별장 이름이다. 석숭이 항상 금곡원에 빈객들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아주 호화롭게 놀았다 한다.

 

금곡원제노(金谷怨齊奴)

금곡원(金谷園)은 진() 나라 석숭(石崇)의 별장이고 제노(齊奴)는 제 왕경(齊王冏)을 말한다. 석숭에게 애첩(愛妾) 녹주(綠珠)가 있었는데, 손수(孫秀)가 여인을 탐내어 석숭의 생질인 구양건(歐陽建)을 잡아 가두고 그녀를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이에 숭과 건을 죽이려는 계략으로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숭이 잡혀가게 되었는데, 숭이 그녀에게 내가 너 때문에 죄를 받게 되었다.”하자 그녀가 울면서 죽음으로써 절개를 보이겠다.”하고 누대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진서(晉書)』 「석숭전(石崇傳)

 

금곡장(金谷障)

() 나라 석숭(石崇)의 금보장(錦步障)을 말하는데, 귀인(貴人)들이 출행할 때 바람이나 먼지를 막기 위해 치는 비단 장막이다.

 

금곡타루(金谷墮樓)

() 나라 때 부호(富豪) 석숭(石崇)의 애기(愛妓)인 녹주(綠珠)가 금곡원(金谷園)의 청량대(靑涼臺)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을 말한다.

 

금곤(金昆)

금우옥곤(金友玉昆)의 준말로, 남의 형제를 칭찬하여 이르는 말이다.

 

금골(金骨)

선골(仙骨)과 같은 말로 신선을 의미한다.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같이 귀중한 법칙이나 규정. 잘 정비된 나라의 법칙과 제도, 기틀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금관성(錦官城)

촉한 소열제(蜀漢昭烈帝)의 도읍지인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현 사천성 성도현(成都縣) 서남이다.

 

금광장육신(金光丈六身)

석가(釋迦) 당시 인도인(印度人)의 신장은 보통 8척이었는데, 불교도들이 교조를 존숭한 나머지 불상을 조성할 때 두 배로 더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西域 天竺傳·불설십이유경(佛說十二遊經)

 

금광초(金光草)

먹으면 장수를 누린다는 풀로 명경초(明莖草)의 일종이다, 신선 영봉(寧封)이 항상 먹었다 한다.

 

금구(金甌)

금으로 된 사발.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발할 때 그 성명을 쓴 종이를 먼저 금구로 덮고 사람을 시켜 그 이름을 맞추게 한 뒤에 비로소 임명했다는 고사가 있다. 고사성어고(故事成語考)』 「문신(文臣)

금으로 만든 병은 완전무결한 것이 원칙이므로 나라의 국경이 그 금병과 같이 완전무결하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다.

황금의 항아리이다. () 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명황십칠사(明皇十七事)주상이 정승을 임명할 때 먼저 팔분체(八分體)로 정승의 성명을 쓴 뒤에 금구로 덮었다.”고 하였다.

 

금구계이(金鉤桂飴)

황금 낚시바늘과 계피가루를 친 미끼. 일을 하는 데 있어 쓸데없이 형식적인 것에 신경을 쓰느라 정말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금구계함등(金口戒緘縢)

말을 삼가라 하였는데 말을 많이 한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의 태묘(太廟) 바른편 뜰 앞에다 금인(金人)을 세워두고 그 입 세 군데를 봉함하고는 그 등에다 쓰기를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하여 놓았다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

 

금구복명(金甌覆名)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정하여 그의 이름을 써서 금사발로 덮어 가려놓고 신하에게 알아맞추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금구청차(金溝淸泚)

바둑 두기 좋은 곳을 말한다.

 

금궁(金宮)

금은으로 꾸민 궁으로 신선이 거처하는 곳인데, 임금이 거처하는 대궐을 가리킨다.

 

금궐옥경(金闕玉鏡)

황금 궁궐은 달 속에 있다는 전설상의 궁궐이고, 옥 거울은 달을 형용한 말이다.

 

금궐요지(金闕瑤池)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근심 걱정이 없는 낙원을 말한다.

 

 

 

금궤(金匱)

낭함(琅函)과 같이, 국가에 귀중하게 보관하는 서적을 말한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태사공(太史公)이 서거한 지 3년 만에 아들인 사마천(司馬遷)이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사기 석실 금궤의 글을 뽑아내기 시작하였다[紬史記石室金匱之書]”라고 하였다.

 

금궤석실(金匱石室)

귀중한 글을 보관해 두는 곳이다.

 

금궤주서(金匱紬書)

금궤는 책서(策書) 등의 비서(祕書)를 간직한 금속제(金屬製)의 상자이다. 곧 귀중한 서책을 의미한다.

 

금귀(金龜)

벼슬아치가 차는 거북 모양으로 된 인장이다. 이백(李白)이 고인이 된 벗 하지장(賀知章)을 생각하며 지은 시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금귀로 술을 바꾸어 먹던 곳에서 벗을 생각하며 눈물로 수건을 적시네.”라 하였다.

 

금귀촉군(琴歸蜀郡)

() 나라 때 촉군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나중에 고향에 돌아가서 탁문군(卓文君)과 결혼하여 음식 장사를 하며 살았다 한다.

 

금규(金閨)

중국 한() 나라 때 궁궐에 금마문(金馬門)이 있었는데, 금문(金門)이나 금규(金閨)로도 약칭하였다. 임금과 가까운 곳을 말한다. 문선(文選)』 「강엄별부(江淹別賦)

 

금규객(金閨客)

한원(翰苑)의 문신(文臣)을 말한다.

 

금근(金根)

한퇴지(韓退之)의 아들 창()이 암렬(暗劣)하기 그지없었는데, 집현 교리(集賢校理)로 있을 때 천자가 타고 다니는 금근거(金根車)의 고사를 알지 못한 나머지, 글자가 잘못되었다고 둘러대며 근()을 은()으로 고쳤던 일화가 있다. 상서고실(尙書故實)

 

금근거(金根車)

진시황(秦始皇)이 은()나라 제도를 본받아 금으로 장식한 수레 이름이다. 원래 천자(天子)의 수레였으나 한당(漢唐) 이후 태황태후(太皇太后), 황태후, 황후가 모두 탈 수 있었다. 한유(韓愈)의 아들 창()이 금근거(金根車)를 금근거(金銀車)로 잘못 읽어 글자를 잘못 읽거나 씀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고, 임금의 죽음을 금근거가 늦게 나옴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금금(嶔嶔)

입을 크게 벌리는 모양이다.

 

금기(襟期)

두보(杜甫)가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 정건(鄭虔)에게 준 취시가(醉時歌)란 시에 日糴太倉五升米 時赴鄭老同襟期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3 취시가(醉時歌)

 

금난파(金鑾坡)

당 덕종(唐德宗) 때 학사(學士)의 집을 금난파 위로 옮겼다 하여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홍문관을 말한다.

 

금남(錦南)

조선 인조(仁祖) 때 무장 정충신(鄭忠臣)의 봉호이다. 그는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활약, 황주(黃州) 등지에서 크게 이겨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금낭(錦囊)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로, 주로 시고(詩稿)나 중요한 문서를 넣는 주머니이다. () 나라 시인 이하(李賀)가 매일 아침 아이 종에게 오래 된 비단 자루(古錦囊)를 등에 메고 따라오게 하면서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대로 시를 지어 그 자루 안에 집어넣었던 고사가 전한다. 신당서(新唐書)203 文藝傳下 李賀

 

금낭시천수(錦囊詩千首)

당 나라 이장길(李長吉)은 매일 놀러갈 때에는 아이 종에게 비단 주머니를 들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지어서는 그 주머니 속에 넣어 저녁에 돌아와서 보면 주머니에 시가 가득하였다 한다.

 

금년추야무(今年錐也無)

백성들의 빈궁한 상황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도척(盜跖)요 임금과 순 임금은 천하를 소유하였지만, 자손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堯舜有天下 子孫無置錐之地].”라는 말이 나오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1권에 다시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 작년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엔 땅에 꽂을 송곳조차 없다네[去年貧 未是貧 今年貧 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라는 게송(偈頌)이 실려 있다.

 

금뇨제(金褭蹄)

말발굽 모양의 황금이다. 황금(黃金)의 이칭(異稱)으로, 한 무제(漢武帝) 태시(太始) 연간에 백린(白麟천마(天馬황금을 발견하고는 황금을 인지(麟趾요제(褭蹄)의 형상과 같이 고쳐 주조(鑄造)했던 데서 온 말이다.

 

금니옥검(金泥玉檢)

금니(金泥)는 수은과 황금가루를 혼합한 물질이고 옥검(玉檢)은 옥으로 만든 서함(書函) 뚜껑이다. 제왕이 뛰어난 공을 이루어 천하가 안정이 되면 하늘에 고하기 위해 직접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을 행하는데, 이때 그 공적을 기록한 책을 상자에 담고 옥검으로 덮은 뒤에 금니로 봉하여 그 행사에 사용했다고 한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태산에 올라 봉 제사를 행하다(登封泰山)”의 주()금책(金策) 석함(石函)과 금니(金泥) 옥검(玉檢)을 들고 올라가 봉()을 행한다.”라고 하였는데, 금니는 황금으로 도색하는 것을 말하고 옥검은 옥첩서(玉牒書)를 봉함한 궤이다.

 

금단(金丹)

방사(方士)들이 금석(金石)을 정련하여 만든 단약(丹藥)으로, 이것을 복용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금단(金丹)금단의 본성은 오래 달굴수록 그 변화가 더욱더 신묘하다. 황금이 불 속에 들어가면 백 번을 정련해도 녹아 없어지지 않으며, 땅에 묻으면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썩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금단술(金丹術)

금단(金丹)은 도사가 제조하는 불로불사약이니, 즉 양생법(養生法)을 말한다.

 

금단지음응독향(琴斷知音應獨響)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움을 말한 것이다. 지음(知音)은 곡조를 아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금단환골(金丹換骨)

보통 시문(詩文)의 경지가 점수(漸修)를 거쳐 돈오(頓悟)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로 금단 환골(金丹換骨)’이라는 표현을 쓴다.

 

금당(琴堂)

공자(孔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단보재(單父宰)가 되어, 거문고만 타고 몸은 당() 아래를 내려가지 않고도 단보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즉 지방관의 집무(執務)하는 곳을 가리킨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

②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복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때 거문고만 타고 있고 몸이 마루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다스려졌다.”에서 나온 말로, 수령을 칭송할 때 그의 관아를 가리킨다.

 

금당(金璫)

한명제(漢明帝) 이후로는 내시들이 전횡하였으므로 환관을 당()이라 칭한다.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의 호이다.

 

금대(金臺)

황금대(黃金臺). () 나라 소왕(昭王)곽외(郭隗)를 어질다 하여 대()를 지어 주고 거처하게 하였는데, 이때의 대 이름이 곧 황금대이다. 임방(任昉), 술이기(述異記)

북경(北京) 조양문(朝陽門) 밖에 있는데, 그곳의 석조(夕照)는 일품으로 꼽힌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소왕(昭王)이 천하의 현사(賢士)를 대접하기 위해 세운 황금대(黃金臺), 곧 연경(燕京)을 가리킨다.

전국(戰國) 시대에 연() 나라 소왕(昭王)이 제() 나라에 대하여, 아비 죽인 원수를 갚으려고 사방의 인재들을 초청하면서, ()를 쌓고 대 위에다 황금을 쌓아 두었다. 그것을 금대(金臺)라 한다.

천제(天帝)의 치소(治所), 즉 중국 조정을 말한다.

 

금독거(金犢車)

황우(黃牛)로 끄는 수레를 말한다.

 

금동공주(金童公主)

충숙왕(忠肅王)의 비()이며, ()나라 순종(順宗)의 아들 위왕(魏王) 심양왕(瀋陽王) 아목가(阿木哥)의 딸이다. 충숙왕 11년에 원나라에서 혼인, 다음 해(1325) 본국 용산(龍山) 행궁(行宮)에서 아들을 낳고 18세로 곧 승하(昇遐)하였다.

 

금등(金縢)

① 『서경(書經)의 편() 이름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병들었을 때 주공(周公)이 자기를 대신 죽게 해달라고 조상들에게 기도한 글을 금등(金縢)의 궤짝 속에 넣어 놓으니, 그 이튿날에 무왕의 병이 바로 나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서경(書經)』 「금등(金縢)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하고 1년만에 병이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단은 주무왕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태사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고 축문을 써서 읽게 하였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괘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 축문이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수록되어 있다.

 

금등대목(金縢大木)

() 나라 성왕(成王) 때에 풍우로 말미암아 큰 나무가 뽑힌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금등(金縢)가을에 크게 곡식이 여물었는데, 거둬들이기 전에 하늘에서 크게 벼락과 번개가 치며 바람이 불어, 곡식이 모두 넘어지고 나무가 뽑혔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등유책(金縢遺冊)

금등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으로 봉인(封印)했다는 뜻인데, 주 무왕(周武王)이 병들었을 때, 주공(周公)이 단()을 모아 놓고 자신을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신명께 기도한 사실을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금으로 봉인한 궤에 간직하여 둔 것을 말한다. 관숙(管叔채숙(蔡叔)은 다같이 주공의 형으로서, 주공이 유자(孺子; 성왕(成王)을 말함)에게 불리할 것이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주공을 의심하므로 주공이 스스로 피하여 동도(東都)에 가 있었는데, 어느 날 큰 우레와 바람이 일어나 대목(大木)이 뽑히고 익은 벼가 다 쓰러지자, 성왕이 놀라 점을 치기 위해 금등의 궤를 열어보다가, 옛날 주공이 무왕을 위해 자신을 대신 죽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발견하고는 드디어 주공에게 의심을 풀었다. 서경(書經)』 「금등(金縢)·채중지명(蔡仲之命)

 

금란(金蘭)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하여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하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한 대목에서 왔다.

 

금란(金鸞)

금란전(金鸞殿)의 준말로,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보통 금란(金鑾)으로 많이 쓴다.

 

금란객(金鑾客)

문신(文臣)을 말한다. 당대(唐代)에 한림원(翰林院)을 일러 금란궁(金鑾宮)이라고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職官 翰林學士

 

금란계(金蘭契)

절친한 친구의 교분(交分)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날카로운 것이 쇠()를 자를 수 있고 뜻이 서로 맞는 말은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금() 자와 난() 자를 따온 것이며, 계는 교분을 말한 것이다.

 

금란교(金蘭交)

친구간의 쇠같이 견고하고 난초같이 향기로운 극히 친밀한 교의(交誼)를 말한다.

 

금란옥수(金蘭玉樹)

사안(謝安)이 그의 숙부 현()에게 묻기를 부형이 왜 자제의 아름답기를 원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면 지란(芝蘭)과 옥수(玉樹)를 자기 집 뜰에 났으면 하는 것이지요.”라 하였다.

 

금란전(金鑾殿)

당 나라 때 학사(學士)와 문인(文人)들이 있던 궁전으로, 예문관(藝文館)을 가리킨다.

 

금란지계(金蘭之契)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情誼)를 말한다. 금란(金蘭)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二人同心 其利 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두 사람이 마음이 같으면 그 예리(銳利)함이 쇠를 끊고, 마음이 같은 말은 그 향기(香氣)가 난초(蘭草)와 같다)”에서 유래한다.

 

금란지계(金蘭之契)

벗 사이에 정()이 깊음을 이른다. 두 사람의 마음을 합치면 그 견고함이 금()을 능히 다절할 수 있으며, 그 진정한 마음은 향기로운 난초에 비유되므로 금란이라고 한다.

 

금란지교(金蘭之交)

깊은 우정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은 금()도 끊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 하였다.

 

금란탈화(金鑾脫靴)

당 나라 이태백(李太白)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금란전(金鑾殿)에 들어갔을 때에 술이 취하여 고역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게 하였다.

 

금란학사(金鑾學士)

한림학사를 가리킨다. 금란전(金鑾殿)은 당() 나라 때 문인 학사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다.

 

금람선(錦纜船)

수 양제(隋煬帝)가 강도(江都)에 행차했을 때 탄 용주(龍舟)가 비단 돛에 비단 닻이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려(黔驢)

기량(技倆)의 졸렬함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금() 땅에는 나귀가 없었는데, 어떤 이가 나귀를 데려가 산 아래 놓았더니, 호랑이가 큰 나귀를 처음 보고는 신()이라고 여겼다. 이어 나귀가 한번 울자 호랑이는 더욱 크게 놀라서 자기를 물까 걱정했으나, 차츰 서로 가까워져서 나귀에게 한번 덤벼 본 결과 나귀가 성을 내어 호랑이를 발굽으로 찼는데, 별로 아프지 않으므로 호랑이가 마침내 나귀를 만만하게 여기어 물어 죽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유하동집(柳河東集)卷十九

 

금련(禁臠)

다른 사람은 맛볼 수 없는 물건이란 뜻이다. 높은 분의 음식을 감히 먹을 수 없다는 뜻으로, 자신으로서는 감히 엿볼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금련(金蓮)

남조(南朝) ()의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가 황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땅에 박아 놓고, 그 위로 반비(潘妃)를 걷게 하면서 말하기를 걸음걸음마다 연꽃이 피는구나.”하였다 한다. 남사(南史)齊廢帝 東昏侯紀

 

금련분(金蓮盆)

() 나라 단문창(段文昌)이 소시(少時)에 말하기를 장래에 부귀(富貴)하여 금련화분(金蓮花盆)에 발을 씻으리라.”하더니 뒤에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금련촉(金蓮燭)

()의 영호도(令狐綯)가 한림 승지(翰林承旨)로서 밤에 금중(禁中)에 입대하였다가 초가 다 타자 황제가 그를 한림원으로 돌려보내면서 승여(乘輿)에다 황제가 쓰는 금련촉을 밝혀 돌아가게 하였다. 당서(唐書)』 「영호도전(令狐綯傳)

 

금련촉(金蓮燭)

소동파(蘇東坡)가 한림학사로 있을 때에 임금에게 불려 가서 밤늦도록 있다가 나올 때에 임금이 어전(御前)에만 쓰는 금련(金蓮) 촛불을 들려서 보내 주니 사람들은 임금이 오는가 하고 깜짝 놀래었다 한다.

 

금렬마(金埒馬)

금렬(金埒)은 금구(金溝)와 같은 말로 금전(金錢)을 깔아 만든 도랑인데, 그 위를 달리는 말을 말한다. 진 무제(晉武帝) 때 왕제(王濟)가 무제의 딸 상산공주(尙山公主)에게 장가들어 극도의 호사를 누렸는데, 땅을 사들여 도랑을 만들고 그 안에 금전을 깔아 말을 타고 달리며 활쏘기를 즐겼다 한다. 진서(晉書)卷四十二 왕제전(王濟傳)

 

금로(金露)

한 무제(漢武帝)가 감로(甘露)를 받기 위하여 건장궁(建章宮)에 만들어 놓았던 동반(銅盤)인데, 그 이슬에 옥가루를 타서 마시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한다. 삼보경사(三輔敬事)

 

금롱실솔(金籠蟋蟀)

유사(遺事)매년 가을이 되면 궁중의 비첩(婢妾)들이 조그만 금롱 속에 귀뚜라미를 잡아넣어 베개맡에 두고 밤마다 그 우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서민의 집에서도 다 이를 흉내내었다.”라고 하였다.

 

금루(黔婁)

춘추(春秋) 때 제() 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매우 가난했으나 고절(高節)을 지켰다 한다. 고사전(高士傳)

 

금루곡(金縷曲)

곡조(曲調) 이름이다. 곽옥(郭鈺)의 시에 술에 취한 연분홍 소매 금루곡을 노래하네[紅袖醉歌金縷曲]”라 하였다.

 

금루비파(金縷琵琶)

금실로 만든 비파이다.

 

금루의(金縷衣)

금실로 꾸민 무의(舞衣)인데, 곡조의 이름이기도 하다. 당나라 두추랑(杜秋娘)이 부른 금루의곡(金縷衣曲)이 있는데 그대여, 금루의를 아끼지 말고 젊은 시절 아끼라. 꽃이 피어 꺾을 만하거든 곧 꺾을 것이요, 꽃이 없어진 뒤에 빈 가지만 꺾지를 마소.”라고 하였다.

 

금루창(金縷唱)

옛날 악곡명이다. 금루의(金縷衣금루곡(金縷曲) 등으로도 불린다.

 

금륜(金輪)

불탑(佛塔) 꼭대기의 상륜(相輪)을 말한다.

 

금륜야차(金輪夜叉)

금륜은 불교 용어로, 뛰어난 무력(武力)을 지니어 동서남북 사대주(四大洲)를 통치한다는 금륜왕(金輪王)을 가리킨다.

 

금릉(金陵)

김포(金浦)의 옛 이름이다.

명 나라가 북경(北京)으로 천도하기 전의 수도인 남경(南京)의 옛 지명이다.

강진의 옛 이름이다

경상북도 김천(金泉)의 옛 이름이다.

 

금리(錦里)

금관성(錦官城)의 별칭인데, () 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거기서 살았다.

금성(錦城)으로 나주를 가리킨다.

산악지대인 중국 사천(四川) 성도(成都)의 별칭이다.

 

금리(禽李)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에 내금청리첩(來禽靑李帖)이 있다.

 

금리선생(錦里先生)

금강(錦江) 가에 사는 은사(隱士)를 말한다. 두보(杜甫)까만 각건 쓰신 우리 금리 선생, 뜰에서 밤만 주워도 굶지는 않겠구려[錦里先生烏角巾 園收芋栗不全貧].”라는 시구가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9 南鄰

 

금리선생(錦里先生)

금리는 금관성(錦官城)이다. 두보(杜甫)가 거기 살며 자칭 금리선생이라 했다. 그의 시 금리 선생이 오각건을 쓰고 동산에서 토란과 밤을 거두니 온전히 가난하지는 않구나[錦里先生烏角巾 園收芋栗未全貧]”라는 시가 있다.

 

금리위저영(錦里爲儲英)

고려 태조(太祖)가 태봉국(泰封國)의 장수로서 전라도 나주(羅州)에 갔을 때에, 오후(吳后)를 만나서 혜종(惠宗)을 낳았다.

 

금린(金鱗)

황금비늘. 일광이 수면에 비치면 그 반사 작용으로 일어나는 금물결을 이른다.

 

금림(禁林)

궁중(宮中)을 가리킨다.

 

금마(金馬)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는 금마문(金馬門)의 약칭으로,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한 대(漢代)의 궁문 이름으로 금마문(金馬門)’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에서 금마문은 벼슬관서의 문이다. 문 옆에 동마가 있어 그것을 일러 금마문이라 하였다[金馬門者, 宦署門也. 門傍有銅馬, 故謂之曰金馬門]”라고 말하고 있다. 한대에는 초징되어 온 사람들은 모두 대조공거(待詔公車)였는데, 그 중 가장 재능이 우수하고 특이한 사람은 대조금마문(待詔金馬門)이라 명하였다. 사혜련(謝惠連)의 연주(連珠)에서 금마에 올라 이름을 떨치네[登金馬而名揚]”이라 하였다.

마한의 옛도읍이다.

 

금마객(金馬客)

금마(金馬)는 금마옥당(金馬玉堂)의 준말로, 금마객은 한림(翰林)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마문(金馬門)

한 무제(漢武帝)가 대완(大宛)의 말을 얻고 그 기념으로 동상을 만들어 노반문(魯班門) 밖에 세우고 그 문을 금마문이라 불렀다 한다.

 

금마문(金馬門)

문명(門名). 한대(漢代)의 미앙궁(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학사(文學士)들이 출사하던 곳인데, 문 앞에 동제(銅製)의 말이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이 문에다 여러 학자들을 배치시켜, 조서를 기다려서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금마옥당(金馬玉堂)

한림학사가 대조(待詔)하는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 조정 안의 화려한 내직(內職)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금마촉신(金馬蜀神)

촉 땅 익주(益州)에 금마(金馬)와 벽계(碧溪)의 신()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 그들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방사(方士)의 말을 듣고, 한 선제(漢宣帝)가 간의대부(諫議大夫) 왕포(王褒)를 그곳에 사신으로 보낸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64下 王褒傳, 25교사지(郊祀志)

 

금망상상(琴亡牀上)

아내가 일찍 죽고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금맹(錦繃)

갓 돋은 죽순을 말한다.

 

금명(琴鳴)

고을 수령이 정사를 간략하게 하고 형옥을 맑게 해서, 다스리지 않아도 잘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복자천(宓子賤)이 단보(單父)를 다스림에 악기나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도 단보가 잘 다스려졌다.”라 하였다.

 

금모사(金母使)

서왕모의 사신(使臣)이란 뜻으로 곧 황작(黃雀)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양보(楊寶)가 화음산(華陰山)에 들어갔다가 황작이 솔개한테 채여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가져다가 건상(巾箱) 안에 두고서 황화(黃花)를 백일 동안 먹이니, 깃이 나서 이에 날아갔는데, 그날 밤 꿈에 황의동자(黃衣童子)가 나타나 양보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서왕모의 사신인데, 인애(仁愛)한 그대의 구원을 받은 데에 감사한다.”하고, 보답으로 흰 옥환(玉環) 4개를 주면서 그대의 자손들을 결백하게 하여 삼공(三公)에 오르도록 하는 바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금모상사여(金母常使汝)

금모(金母)는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를 지칭하는 말인데, 태양 속에 있다는 삼족오(三足烏)가 항시 서왕모를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다행히 삼족오가 있어 부리게 되었다.”는 주에 삼족오는 청오(靑烏)인데, 주로 서왕모를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 준다.”라 하였다.

 

금모후(金毛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즉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말로 부처의 설법하는 소리를 사자(獅子)의 영각(哮吼)에 비유하는 말이다.

 

금목(金木)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옛적에 형벌을 시행할 때 사용된 금속과 목제의 형벌기구를 통칭함. 금속형구는 칼, , 도끼 같은 것이고 목제형구는 채찍과 질곡 같은 것이다[舊時施刑所用金屬和木製刑具的總稱. 金屬刑具如刀鋸斧鉞, 木製刑具如捶楚桎梏等].”라고 나와 있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금문(金文)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한다. ()이나 솥 등에 새겨있다 하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들은 주로 덕과 영광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과 귀족들의 제사·전쟁 등에 관한 기록이 많다. 갑골문보다 글씨가 정교하고 균형이 잡혔으며 획이 부드럽다. 세공 기술이 발달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붓과 같은 필기도구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금문(錦文)

금자서(錦字書)와 같은 뜻으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편지를 말한다.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처 소혜(蘇蕙)가 유사(流沙)로 쫓겨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단 옷감 위에 회문시(廻文詩)를 지어 보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열녀전(列女傳)두도처소씨(竇滔妻蘇氏)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의 준말이다. 한무제(漢武帝)가 학사(學士)로 하여금 금마문에서 대조(待詔)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미앙궁(未央宮) 앞에 동마(銅馬)가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진사왕전(陳思王傳)금문을 밀치고 옥계(玉階)를 밟았다.”하였고,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歷金門上玉堂有日이라 하였다.

 

금문대조(金門待詔)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동방삭(東方朔주보언(主父偃엄안(嚴安서락(徐樂)등이 모두 금마문에서 조명을 대기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금문상서(今文尙書)

서경(書經)는 진() 나라가 모든 책을 불태운 뒤에 세상에서 전송(傳誦)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한() 나라 초기에 서경(書經)의 학문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경(書經)를 잘 아는 사람을 천하에 구했으나 없었다. 이때 마침 복승(伏勝)이 잘 안다는 말을 듣고 불러오려 하였으나 복승의 나이 이미 90이 넘어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태상장고(太常掌故) 조조(鼂錯)에게 명하여 가서 받아오게 하였다. 복승은 29편을 전송하니 이것을 금예(今隷)로 썼기 때문에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였다. 금문상서는 고문상서보다 16편이 적다. 이것은 복승이 다 기록하지 못하여 탈락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금문처(錦文萋)

비방하는 말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항백(巷伯)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라고 하였다.

 

금미산(金微山)

몽고(蒙古)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다.

 

금미지취(金迷紙醉)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迷惑)되고 취한다는 뜻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나라 말엽의 명의(名醫)인 맹부(孟斧)는 독창(毒瘡) 치료에 뛰어나서, 자주 황궁에 들어가 소종(昭宗) 황제(皇帝)의 병을 진료했다. 차츰 황제(皇帝)를 진료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그는 황궁내의 실내 장식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훗날 맹부는 사천(四川)지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황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장식했는데, 방안의 기물들을 모두 금종이로 포장했다. 창문을 통하여 햇빛이 비칠 때면, 방안은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돌아가면서 그에게 이 방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만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해 버렸다네[此室暫憩, 令人金迷紙醉]”라고 말하였다 한다. ()나라의 도곡(陶谷)이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금박소향몽(衾薄疏鄕夢)

이불이 얇아 추워서 잠을 잘 자지 못하므로, 고향꿈도 따라 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방(禁方)

비방(秘方), 즉 잘 알려지지 않은 진귀한 약방문(藥方文)을 말한다.

 

금방(金榜)

전시(殿試)의 합격자를 게시하는 방()을 말한다.

 

금배경(金背鏡)

해록쇄사(海錄碎事)고계보(高季輔)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인사발령(人事發令)을 함에 있어 적재적소에 잘 처리하니, 태종(太宗)이 그에게 금배경을 하사하여 사람을 잘 전형하는 것을 표창하였다.”라고 하였다.

 

금배하마(金背蝦蟆)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음력 815일 밤에 숲 속을 바라보니, 하얀 기운이 마치 마전한 베를 뻗쳐놓은 듯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등이 누런 두꺼비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달 속에 있는 두꺼비인 듯하다고 하였다.

 

금범유(錦帆遊)

대업기(大業記)양제(煬帝)가 강도(江都)에 행행(幸行)할 때에 탔던 용주(龍舟)가 비단으로 된 돛과 닻줄이었다.”하였고, 개하기(開河記)에는 비단돛이 지나는 곳에는 향내가 백 리까지 풍겼다.”하였다.

 

금벽(金碧)

금칠한 푸른 빛깔인데, 누각의 단청을 말한다.

 

금보(琴譜)

거문고에 대한 곡조를 총망라한 책이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유씨(劉氏주씨(周氏)의 금보가 네 권이다.”라고 하였다.

 

금복고(金僕姑)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화살의 이름이다.

 

금본무성성역공(琴本無聲聲亦空)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소문씨(昭文氏)의 거문고 타는 것은 성()도 없고 훼()도 없다는 말이 있다.

 

금불상(錦不傷)

지방관으로서 지방을 잘 다스림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를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자, 자산(子産)이 윤하를 부적합하게 여기어 자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그것을 옷 지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 옷 짓기를 배우도록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襄公三十一年

 

금비(金篦)

조그만 칼처럼 생긴 쇠붙이로 물건의 표면을 긁어내는 도구인데 이것으로 안막(眼膜)을 긁어 눈병을 치료한다. 삼국(三國) 시대 위 무제(魏武帝; 曹操)가 눈병이 나자, 명의(名醫) 화타(華陀)는 금비를 가지고 눈의 막()을 긁어내어 수술한 적이 있다. , 열반경(涅槃經)소경이 의사를 찾아가자 의사가 즉시 칼로 눈꺼풀을 떼어내어 광명을 찾게 해 주었다.”는 말이 있다. / 인용: 贈鄭在中(이용휴)

 

금비개양막(金鎞開兩膜)

옛날 인도(印度)에서 양의(良醫)가 소경의 눈꺼풀을 쇠칼로 떼어 내어 광명을 찾게 해 주었다는 금비괄목(金鎞刮目)’의 고사가 있다. 열반경(涅槃經)8 / 인용: 贈鄭在中(이용휴)

 

금비괄목(金篦刮目)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를 눈뜨게 해 준다는 뜻이다. 옛날 인도(印度)의 양의(良醫)가 쇠칼(金篦)로 맹인(盲人)의 눈꺼풀을 떼어 내어(刮眼膜) 광명을 되찾게 해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열반경(涅槃經)8 / 인용: 贈鄭在中(이용휴)

 

금비수(金篦手)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게 하여 넓고 넓은 대도(大道)의 세계로 인도해 줌을 말한다. 어떤 맹인(盲人)이 양의(良醫)를 찾아가자 바로 쇠칼로 닫힌 눈꺼풀을 잘라내 보게 해 주었다는 이른바 金鎞刮目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열반경(涅槃經)

 

금비척괄(金篦剔刮)

인도에서 눈병을 치료하는 법이다. 열반경(涅槃經)

 

금사(金蛇)

()은 서방(西方)에 해당하니 금사는 신사(辛巳)의 딴 이름이다.

전광(電光)의 별칭으로 빠른 것을 말한다.

달빛이 시냇물을 따라 금빛을 길게 끌며 비치는 것을 한 가닥 긴 금빛 뱀과 같다고 형용한 것이다.

 

금사(金砂)

금단(金丹), 단약(丹藥)을 가리킨다.

 

금사(金絲)

휘늘어진 수양버들을 이르는 말이다.

 

금사사(金沙寺)

황해도 장연(長淵) 해안방(海安坊)에 있던 절인데 이곳에 성보(城堡)를 설치하고 승장(僧將) 1명을 두었다.

 

금사여한선(襟事如寒蟬)

침묵을 지킨다. 추위 속의 매미와 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며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고 감히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한선(寒蟬)’은 매미의 별명으로서도 사용되지만 울지 않는 매미를 말하기도 한다.

 

금사주(金絲酒)

닭을 넣어 함께 삶은 술을 말한다.

 

금산(金山)

산 이름이다. 요녕성(遼寧省) 강평현(康平縣)에 있는데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 군대를 그곳에서 격파하였다고 한다.

 

금상(錦傷)

() 나라 자피(子皮)가 윤하(尹何)에게 고을을 맡기려 하므로 자산(子産)이 말리니 자피는 시험삼아 맡기면 어떠한가.”하였다. 자산은 당신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는데 솜씨가 서투른 사람에게 시험삼아 재단하라고 맡기면 상()함이 많으리다.”라 하였다.

 

금상(金箱)

중요한 문서를 보관해 두는 상자이다. / 유의어: 금궤(金匱), 낭함(琅函)

 

금상지문(錦上之文)

() 나라 두도(竇滔)가 집을 버리고 먼 곳에 가서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진약란(秦若蘭)이 시()를 지어 비단에 수()놓아 보내었는데, 빙빙 돈 무늬(回文)로 되어 바로 읽어도 시가 되고 거꾸로 읽어도 시가 되었다. 두도는 그것을 보고 감동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금상첨화(錦上添花)

비단 위에 꽃(장식)을 더한다. 본래부터 좋고 아름다운 것이 더욱 좋고 아름다워지다. 또는 좋은 일 위에 좋은 일이 더한다. / 반의어: 설상가상(雪上加霜), 엎친 데 덮친 격

 

금석뇌약(金石牢約)

쇠나 돌 같은 굳은 언약. 서로 언약함이 매우 굳음을 비유한다.

 

금석맹약(金石盟約)

쇠나 돌과 같은 굳은 맹세나 약속.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 유의어: 금석지계(金石之契)

 

금석성(金石聲)

쇠나 돌로 만든 악기인 종경(鍾磬)에서 나는 음악 소리. 훌륭한 시문(詩文)에 비유하기도 한다.

증자(曾子)가 위() 나라에 있을 때 사흘이나 불을 때지 못하고 십 년 동안 새 옷을 해 입지 못하는 극빈(極貧)의 생활 속에서도 신발을 끌고 상송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 간에 가득 차면서 마치 금석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다[曳縱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는 고사가 전해 온다. 장자(莊子)』 「양왕(讓王)

()의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었는데 범영기(范榮期)가 보고 땅에 던지면 반드시 금석의 소리가 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진서(晉書)』 「손작전(孫綽傳)

 

금석지감(今昔之感)

지금과 옛날을 비교하여 생각할 때 그 차이가 심함을 보고 느끼는 정을 이른다.

 

금석지교(金石之交)

쇠나 돌처럼 굳고 변함없는 교제(交際), 교분을 말한다. / 유의어: 금석지계(金石之契).

 

금선(金仙)

대각 금선(大覺金仙)의 준말로, ()을 가리킨다. / 유의어: 불상(佛像)

 

금선(金船)

술잔의 별칭이다. 당시(唐詩)술 취해 금선을 엎질렀다.”라 하였다.

 

금설(金屑)

눈병의 신약(神藥)을 말한다.

 

금설착안(金屑着眼)

불서(佛書)금가루가 비록 귀중하나 눈에 들어가면 눈이 흐리다(金屑雖貴 着眼則眯)”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좋은 말과 지식도 거기에 집착하면 마음 닦는 데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금설폐구(金舌蔽口)

금으로 혀를 만들어 입을 가린다.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아니한다.

 

금성(金城)

쇠로 만든 성이라는 뜻으로 산하가 요새지(要塞地)로 되어 견고함을 말한다. 한서(漢書)』 「괴통전(蒯通傳)모두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못이 되어 공격할 수 없다[皆爲金城湯池 不可攻也].”라고 하였다.

 

금성(錦城)

금성은 파촉(巴蜀) 성도(成都)에 있는 금관성(錦官城)으로 현재의 사천성에 있다.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고려 태조의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는 목포(木浦)에서 났다. 태조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주로 출진하던 중 목포에 대었다가 후가 빨래하는 것을 보고 불러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혜종(惠宗)이다. 뒤에 그 땅에 용흥사(龍興寺)를 지었다.

 

금성노백(錦城老柏)

금성(錦城)은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에 있는 금관성(錦官城)을 말한다. 이곳에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공명묘(孔明廟)가 있으므로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노백(老柏)은 오래 묵은 잣나무를 말하는데, 공명묘에는 오래 묵은 잣나무가 있어 유명하다. / 두보(杜甫)촉상시(蜀相詩)승상의 사당이 어느 곳에 있는고, 금관성 밖 잣나무 무성한 곳일세[丞相祀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고, 또 고백행(古柏行)공명의 사당 앞에 노백이 있으니 가지는 청동 같고 뿌리는 철과 같네[孔明廟前有老柏 柯如靑銅根如鐵]”라고 하였다.

 

금성사관(錦城絲管)

금성의 풍악놀이를 이른다. 이는 두보(杜甫)증화경시(贈花卿詩)에 보이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피난 와서도 놀이만을 일삼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錦城絲管日紛紛 半入江風半入雲 此曲祇應天上有 人間能得幾回聞”.

 

금성옥진(金聲玉振)

맹자(孟子)공자(孔子)의 성덕(聖德)을 음악에 비하여 찬양한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음악은 금소리()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옥소리()로 수합한다[金聲而玉振之也]”라고 하였다. ()은 종(), ()은 선(), ()은 경(), ()은 수()를 의미한다. 팔음을 합주할 때 먼저 종을 쳐서 그 소리를 베풀고 마지막에 경을 쳐서 그 운을 거두어 주악을 끝낸다. 전하여 지덕(智德)이 갖추어 있음을 비유한다.

 

금성척처(金聲擲處)

() 나라 손작(孫綽)이 시문을 잘했는데, 일찍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어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은 이것을 땅에 던져 보라. 응당 금석(金石) 소리가 날 것이다.”라 하였다. 진서(晉書)卷五十六 손작전(孫綽傳)

 

금성철벽(金城鐵壁)

아주 튼튼한 방어 진지를 말한다. / 유의어: 금성탕지(金城湯池), 아성(牙城), 난공불락(難攻不落), 철옹성(鐵甕城).

 

금성탕지(金城湯池)

쇠같은 성()과 끓는 해자(垓字). 견고하여 용이하게 접근하여 쳐부수기 어려운 성지(城地). , 방비(防備)가 완벽(完璧)함을 말한다. / 유의어: 금성철벽(金城鐵壁), 아성(牙城), 난공불락(難攻不落), 철옹성(鐵甕城).

 

금세계(衿帨戒)

출가(出嫁)한다는 뜻이다.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모친이 딸의 옷고름을 매 주고 허리에 수건을 채워 주면서 부지런하고 공경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집안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고 일러 준다[母施衿結帨曰 勉之敬之 夙夜無違宮事].”라고 하였다. /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금속(禁贖)

법사(法司)의 금리(禁吏)가 시리(市里)에 나가 금령(禁令)을 범한 자를 검거하여 거둔 속전(贖錢)을 말한다.

 

금속(金粟)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이었다는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준말로 곧 불()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의 태릉(泰陵)이 위치한 산 이름이다. 현종이 일찍이 금속산에 이르러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나는 듯한 산세를 보고는[覩崗巒有龍盤鳳翔之勢] 자기의 장지(葬地)로 택했다고 한다. 대당신어(大唐新語)』 「리혁(厘革)

황금 색깔의 곡식 낱알과 같은 등화(燈火)의 모습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금속보환(金粟寶環)

명황잡록(明皇雜錄)여우(女優) 사아만(謝阿蠻)은 능파곡(凌波曲)의 춤을 잘 추었다. 궁중과 제이(諸姨)의 집에 드나들 때 귀비가 매우 후하게 대우해 주었는데, 임금이 서촉(西蜀)에서 화청궁(華淸宮)으로 돌아온 뒤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녀가 금속보환을 꺼내어 드리며 이는 귀비가 주신 것입니다.’하자 임금이 받아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라 하였다.

 

금속정신강후전(金粟精神降後前)

불경(佛經)에 의하면,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의 이름이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하는데, 이백(李白)이 자신은 금속여래의 후신(後身)이라 자칭하였다.

 

금쇄갑(金鎖甲)

금빛 나는 실로 꾸민 갑옷이다. 정교한 갑옷을 쇄자갑(鎖子甲)이라고도 한다. 杜甫 重過何氏詩

 

금쇄갑녹침창(金鏁甲綠沈槍)

두보(杜甫)가 하장군(何將軍)의 정원에서 노는 시에 금쇄갑(金鏁甲)은 비맞게 던져두고 녹침창(綠沈槍)에 이끼가 슬었다.”하였다. 그것은 다시 무력(武力)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금수(錦水)

금수(錦水), 민강(岷江)은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들어 계강과 합류한다.

()에 있는 금강(錦江)이다.

 

금수(金水)

금수하(金水河), 북경(北京)에 있는 하천 이름인데, 옥하(玉河)라고도 한다.

 

금수(錦繡)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지은 글이 비단같이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금수간장(錦繡肝腸)

시문(詩文)이 뱃속에 가득해서 가구(佳句)를 잘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심간(心肝)과 오장(五臟)이 모두 금수(錦繡)로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시화(詩畵)에서 나온 말이다. 이백(李白) 冬日于龍門送從弟京兆參軍令問之淮南勤省序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緋緞) 위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산천(山川).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금수장(錦繡腸)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지은 글이 비단결같이 고운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금슬(琴瑟)

큰 거문고와 작은 거문고로 부부를 가리킨다. 성세인연전(醒世姻緣傳) 52()젊은 부부가 금슬처럼 잘 조화된다면, 고기가 물을 얻은 것 같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시경(詩經)주남(周南) 관저(關雎)

 

금슬상화(琴瑟相和)

거문고()와 비파를 함께 연주하여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단란한 부부 사이를 비유하는 말이다. 금슬이 좋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시경(詩經)주남(周南) 관저(關雎)/ 유의어: 백년해로(百年偕老), 해로동혈(偕老同穴).

 

금슬지락(琴瑟之樂)

거문고와 비파의 즐거움. 조화를 잘 이루는 부부사이의 즐거움을 이른다. 부부사이의 화락하고 다정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금슬(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로, 부부(夫婦), 또는 부부사이를 말한다. 거문고와 비파가 조화를 이루어야 고운 곡조(曲調)의 음악이 연주된다는 데서 유래한다. 시경(詩經)주남(周南) 관저(關雎)

 

금승(金繩)

불가(佛家)의 말에 의하면, 이구국(離垢國)에는 길의 양쪽에 황금으로 된 노끈을 쳐서 한계를 삼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금시(金翅)

고대 인도(印度)의 괴조(怪鳥)로서 범어(梵語)로는 가유라(迦留羅)인데 구역에는 금시조요 신역(新譯)에는 묘시조(妙翅鳥)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나인데 그 새의 두 날개는 서로의 거리가 삼백 삼십 육만 리라 한다. 그 새가 용을 잡아먹고 살므로 용은 항상 두려워하여 열뢰(烈惱)를 품고 있는데 오직 아유달용(阿耨達龍)만 두려움이 없다 한다. 법원주림(法苑珠林)

 

금시조(金翅鳥)

불경(佛經)에 나오는 새. 수미산(須彌山) 북쪽 철수(鐵樹)에서 살며, 일명 가루라(迦樓羅)라고 하는 인도 전설상의 새인데 조류(鳥類)의 괴수로서 입으로 불을 토하여 용을 잡아먹고 다시 되새김질을 한다고 한다.

 

금시초문(今時初聞)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 상대로부터 그동안 전혀 몰랐던 소식이나 소문 등을 전해 들었을 때 하는 말이다.

 

금신(金身)

여래(如來)의 금신. 금신은 금물을 입힌 부처의 상을 가리킨다.

 

금심(錦心)

시문(詩文)의 뛰어난 재주를 비유한 말이다. / 유의어: 금심수장(錦心繡腸), 금심수구(錦心繡口).

 

금심수장(錦心繡腸)

금간(錦肝)과 같은 뜻으로, 시문(詩文)에 있어 가사여구(佳詞麗句)를 지어내는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금아(金鴉)

금오(金烏)와 같은 뜻인데, 옛말에 해() 가운데 삼족오(三足烏)가 있다 해서 해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바다 밑에서 금오가 처음으로 날아온다[金烏海底初飛來].”라고 하였다.

 

금악사위고(今樂斯爲古)

맹자가 앙혜왕(梁惠王)에게 묻기를 들은즉 왕이 음악을 좋아한다 하니 왕이 음악을 좋아하면 나라가 잘 될 것입니다.”하니 나는 고악(古樂)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금악(今樂)을 좋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금악이 고악과 같습니다. 왕께서 혼자만 즐기시지 말고 백성과 함께 즐기십시오. 백성들이 잘살면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맹자(孟子)』 「양헤왕(梁惠王)

 

금안환취아(金鞍換翠娥)

미녀를 구하기 위하여 준마를 내주었던 진() 나라 사안(謝安)의 풍류를 말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사안의 풍류는 또 어찌할 수 없나니, 준마를 내주어 미녀와 바꾸려 하였도다[安石風流無奈何 欲將赤驥換靑娥].”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15 酬裵令公贈馬相戱

 

금압(金鴨)

금속으로 오리처럼 주조하여 만든 향로(香爐)이다.

 

금양(金穰)

그해의 간지(干支)가 금()인 해는 풍년이 든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금양도위(錦陽都尉)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한 박미(朴瀰)의 봉호이다.

 

금양위(錦陽尉)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한 박미(朴瀰)의 봉호(封號)이다.

 

금어(禁禦)

궁중(宮中)의 동산, 즉 임금의 원유(園囿)를 말한 것으로, 금원(禁園)과 같은 뜻이다.

 

금어(禽魚)

새와 물고기를 합칭한 것이다.

 

금어(金魚)

금어부(金魚符). 잉어 모양을 새긴 금으로 만든 부절(符節)로 당 나라 때 3품 이상의 관원이 찼다 하여 고관을 말한다.

 

금언패(禁言牌)

말하지 말라는 뜻을 새긴 나무조각. 탐음(貪淫)이 날로 심하던 연산군은 자기 신분에 대한 비방을 염려한 나머지 환관(宦官) 및 조신(朝臣)들에게 금언패를 차게 하였는데, 그 금언패에는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언제나 안온하리라[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라는 시가 쓰여 있었다.

 

금연(禁煙)

연기를 금한다는 말로 한식일(寒食日)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개지추(介之推)가 중이(重耳)를 따라 19년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중이와 함께 귀국하였는데, 중이가 왕이 된 뒤에 행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면산(緜山)에 들어가 왕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그가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불타 죽으니, 왕은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가 죽은 날에는 불을 붙여 밥을 짓는 것을 금하고 찬밥을 먹도록 조처하였는데, 그것이 후세에 풍속이 되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금엽(金葉)

(() 등의 관() 속에 설치하는 소리를 내는 혀[]를 가리킨다.

 

금영(衾影)

혼자 있을 때의 품행을 경계하는 말이다. 신논신독(新論愼獨)홀로 서 있을 때는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고, 혼자 잠잘 때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獨立不慚影 獨寢不慚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예(今隷)

현재 쓰고 있는 예서(隷書)이다.

 

금오(金鼇)

동해 가운데 금자라[金鼇]가 있어서 삼신산(三神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금오(金吾)

본래 한 무제(漢武帝) 때 설치된 금오위(金吾衛)의 관리인데, 집금오(執金吾)라고도 한다. 치안(治安)을 맡았으며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것도 그의 권한이었다. 우리나라는 조선 태종 14년에 처음 설치된 의금부(義禁府)의 관리로 임금의 명을 받아 죄인을 잡아들이고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았다.

 

금오(金烏)

태양 속에 있다고 하는 발이 세 개 달린 새인데, 전하여 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의 별칭이다.

 

금오산성(金烏山城)

경상북도 선산군 금오산에 위치한 석축산성이다. 고려·조선 시대에 요충지로 이용된 대규모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오선(金鼇仙)

최치원(崔致遠)을 이른다. 금오(金鼇)는 신라의 아칭(雅稱)이다.

 

금오옥토(金烏玉兎)

일월(日月)을 말한다. 금오(金烏)는 태양, 옥토(玉兎)는 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오장주(金吾章奏)

의금부에서 올린 결옥(決獄) 관계의 문서를 가리킨다. 금오(金吾)는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이다.

 

금오춘(金烏春)

술이름이다. 금오춘은 마치 동파(東坡)의 나부춘(羅浮春)과 같은 뜻이다.

 

금오흘대(金鼇屹戴)

발해(渤海) 동쪽에 큰 구멍이 있고 가운데 다섯 산이 있었는데, 부리가 연착(連着)되지 않아 늘 물결을 따라 아래위로 흔들리니, 상제(上帝)가 노하여 서극으로 귀양 보내니 뭇 성인들이 살 곳을 잃었다. 이에 큰 자라 열다섯 마리에게 시켜 머리를 들어 이게 하였다 한다.

 

금옥(金屋)

한 무제(漢武帝)가 어릴 적에 자기의 고종매(姑從妹)되는 진아교(陳阿嬌)와 함께 놀면서 매우 친애하였다. 고모가 묻기를 아교를 배필로 삼으면 어떻겠는가.”라 하니 무제가 정말 아교와 배필이 된다면 금옥(金屋)에 감추어 두리라.”라고 하였다. 과연 진아교는 후일에 진황후(陳皇后)가 되었다.

 

금와(金蛙)

[]의 별칭이다. 상고 시대 후예(后羿)의 아내인 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의 선약(仙藥)을 훔쳐가지고 월궁(月宮)에 달아나 두꺼비(蟾蜍)가 되었다는 전설에 의하여 달을 섬여(蟾蜍항아·금섬(金蟾)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금완(金盌)

제장(諸將) 다섯 수 중 첫째 수에 보인다. 옥어(玉魚)와 금완(金盌)은 그 주에 염장(斂葬)하는 데 쓰는 물건이라 하였다.

 

금완(金椀)

장사를 지낼 때 함께 묻은 기물(器物)을 말하는데, 금완(金碗)이라고도 한다. 수신기(搜神記)16권에 범양(范陽)의 노충(盧充)이 최소부(崔少府)의 딸과 유혼(幽婚)을 하였는데, 헤어진 뒤 4년째 되는 해 33일에 노충이 물가에서 송아지 두 마리가 끄는 수레를 만났다. 거기에는 최씨의 딸과 세 살 가량된 어린 아이가 타고 있었는데, 최씨의 딸이 어린아이를 안아서 노충에게 주고 또 무덤에 묻었던 금완을 주면서 시를 지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금완은해(金椀銀海)

왕릉(王陵)의 사치스러움을 말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한서(漢書)』 「초원왕전(楚元王傳)에 의하면, 진시황(秦始皇)을 여산(驪山)에 장사지낼 적에 수은(水銀)으로 강해(江海)를 만들고, 황금으로 부안(鳧雁)을 만들었으며, 위에는 천문(天文)을 갖추고, 아래에는 지리(地理)를 갖추었으며, 온갖 기기(奇器)와 진괴(珍怪)한 것들을 갈무리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용(金墉)

옛 성()의 이름으로, () 나라 사마사(司馬師)가 임금 조방(曹芳)을 폐한 뒤 이곳으로 옮겼고, 진 나라 양후(楊后)와 민회태자(愍懷太子)가 이곳에 유폐되었으며, 조왕 윤(趙王倫)이 찬탈한 뒤 혜제(惠帝)를 이곳에 거하게 하였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河南 낙양현(洛陽縣)

 

금우(金牛)

금똥을 눈다는 소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진 혜왕(秦惠王)은 촉()을 치려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돌을 깎아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 뒤에 금을 넣어 놓고는 이것을 촉도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는 돌소가 금똥을 눈다고 하자, 이 소문을 들은 촉왕(蜀王)은 천여 명의 군사와 다섯 명의 역사(力士)를 동원하여 성도(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때문에 길이 뚫려, 진 나라는 마침내 이 길을 따라 촉을 공격하여 탈취했으므로 이 길을 금우도(金牛道)라 하였다.

 

금우역(金牛驛)

사천성(四川省)과 섬서성(陝西省) 사이에 있는 옛날의 잔도(棧道) 이름으로, 한중(漢中)에서 촉()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이다. () 나라 혜왕(惠王)이 촉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이에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고는 그 뒤에다가 금()을 놓아둔 다음 소가 금똥을 누었다.’고 소문내니, 촉 나라 사람들이 그 소를 달라고 하였다. 혜왕이 주겠다고 하자, 촉에서 역사(力士) 다섯 명을 보내어 길을 뚫고 끌어오게 하였는데, 진 나라에서는 그 소의 뱃속에다가 무기를 숨겨 보내어 이를 가지고 촉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화양국지(華陽國志)

 

금우옥곤(金友玉昆)

남의 형제를 칭찬하여 이른 말이다.

 

금운(金韻)

훌륭한 인재(人材)에 비유한 말이다.

 

금원(金源)

금국(金國)의 별칭이다. 상경로(上京路)는 금()의 나라를 금원(金源)이라고 칭한다.

 

금위주불자교(金爲注不自巧)

장자(莊子)』 「달생(達生)기왓장을 상품으로 내기를 걸고 활을 쏘면 잘 맞추고, 황금을 상품으로 걸고 활을 쏘면 정신이 혼란해진다. 그것은 곧 기량은 동일하지만 외물(外物)인 내기 상품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대체로 외물을 중시하는 사람은 내면이 얄팍하다[以瓦注者巧, 以鉤注者憚, 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 而有所矜, 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융(金狨)

원숭이 가죽으로 만든 금색(金色)의 방석을 말한다.

 

금의야행(錦衣夜行)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다님. 성공(출세)은 했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쓸 데 없다. 성공은 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 유의어: 의수야행(衣繡夜行)

 

금의옥식(錦衣玉食)

비단옷과 옥같이 흰 쌀밥이란 뜻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런 의식(衣食)을 가리킨다. / 유의어: 호의호식(好衣好食) 악의악식(惡衣惡食).

 

금의환향(錦衣還鄕)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데서, 출세를 하여 고향에 돌아옴을 말한다.

 

금이이정학양신(琴以怡情鶴養神)

송 나라 조변(趙抃)이 철면어사(鐵面御史)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촉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거문고 하나 학 한 마리만을 가지고 갔다 한다. 지금 청렴한 관리를 말할 때는 늘 금학을 쓰고 있다.

 

금인(金印)

관리들이 허리에 차는 화려한 인장으로 벼슬아치의 상징이다.

 

금인(金人)

()으로 만든 인상(人像)을 이름이다. 조룡(祖龍)진시황(秦始皇)을 이른 말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는 천하의 병기(兵器)들을 모두 함양(咸陽)으로 거두어들여 이를 가지고 금인 12구를 주조해서 궁중(宮中)에 세워두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진황본기(秦始皇紀)

 

금인구뉴(金印龜紐)

거북 무늬 끈이 달린 금 인장이다. () 나라 때 승상(丞相)과 대장군(大將軍) 및 열후(列侯)와 황태자(皇太子)가 금인구뉴를 찼다. 한구의(漢舊儀)』 「보유(補遺)

 

금인삼함(金人三緘)

금인(金人)은 쇠로 만든 사람이다. 공자(孔子)가 주() 나라 서울에 가서 태조(太祖)인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금인이 있는데, 세 번 입을 꿰매고 그 등에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 말을 많이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 유의어: 금인함(金人緘)

 

금자(禽子)

전국시대(戰國時代) 묵자(墨子)의 제자인 금활리(禽滑釐)를 가리킨다. 활리(滑釐)를 활리(滑痢)의 뜻으로 전용하여 설사가 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금자(金紫)

높은 벼슬아치라는 뜻이다.

 

금자(錦字)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아내 소씨(蘇氏)가 직금회문시(織錦回文詩)를 남편에게 보낸 고사로, 아내의 편지, 또는 아름다운 시구를 말한다.

 

금자서(錦字書)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편지를 말한다.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처 소혜(蘇蕙)가 유사(流沙)로 쫓겨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단 옷감 위에 회문시(廻文詩)를 지어 보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列女傳 두도처소씨전(竇滔妻蘇氏傳)

 

금자시(錦字詩)

전진(前秦)의 두도(竇滔)가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할 때 총희(寵姬) 조양대(趙陽臺)를 데리고 부임하여 그 처 소씨(蘇氏)와 소식을 끊어버렸다. 이에 소씨가 한스러워하고 슬퍼하여 비단에 회문시(廻文詩)를 짜넣어 두도에게 부치니, 도가 그 비단 글자를 보고 감복하여 수레를 갖추어 소씨를 맞아왔다. 侍兒小名錄

 

금자시회문서(錦字詩回文書)

금자의 시와 회문의 글은 전진(前秦)의 진주 자사(秦州刺史) 두도(竇滔)가 유사(流沙)로 귀양가자 그의 아내 소씨(蘇氏)가 그리워하여 비단을 짜서 돌려가며 읽는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수놓아 보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진서(晉書)卷九十六 두도처소씨전(竇滔妻蘇氏傳)

 

금자탑(金子塔)

후세에 오래 남을 뛰어난 업적을 이른다.

 

금작(金爵)

궁전의 용마루 위에 장식한 구리쇠로 만든 봉황이다.

금으로 만든 새. 여인의 장식품. 금작(金雀). 또는 집 추녀마루 위에다 금으로 장식하여 만들어 덧붙인 새나 봉 따위를 말한다. 문선(文選)班固 서도부(西都賦)

 

금작고릉(金爵觚稜)

금작(金雀). 집 추녀마루 위에다 금으로 장식하여 만들어 덧붙인 새나 봉 따위를 말한다.

 

금잔지(金盞地)

유설(類說)에 의하면, 장안(長安)의 영녕방(永寧坊) 동남쪽은 바로 금잔지인데 이곳은 깨뜨려도 다시 이룰 수가 있고, 안읍리(安邑里)의 서쪽은 바로 옥완지(玉碗地)인데 이곳은 깨뜨리면 완전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금잠(金蠶)

벌레의 이름이다. 금잠충(金蠶蟲)이라고 하는 독충(毒蟲)이다.

 

금장(金章)

금으로 만든 관인(官印)을 말한다. (() 때의 승상(丞相)이 이를 찼었고, ()의 광록대부(光祿大夫)도 이를 찼었다. 금장 자수(金章紫綬)와 같다.

 

금장(金帳)

금으로 장식한 휘장. 곧 호화로운 방을 말한다.

 

금장(金掌)

동인(銅人)의 손바닥으로, 이슬을 받기 위해 만들었다는 승로반(承露盤)을 말한다. 한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甘露)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건장궁(建章宮)에다가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운 다음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한다. 한서(漢書)25교사지(郊祀志)

 

금장니(錦障泥)

호화스런 사람들은 말의 발굽에 비단으로 장니(障泥)를 만들어 타고 다닌다.

 

금장랑(錦帳郞)

비단 휘장을 두른 성()낭관(郞官)이다.

 

금장부귀(金張富貴)

금장(金張)은 한 나라 때 공신 세족(功臣世族)인 금일제(金日磾)와 장탕(張湯)을 가리킨다. 금일제 집안은 무제(武帝)때부터 평제(平帝)때까지 7대가 내시(內侍)벼슬을 지냈고 장탕의 자손은 선제(宣帝원제(元帝)이후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를 지낸 사람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금장수두(錦膓繡肚)

시와 글을 잘한다는 말로, “비단 창자에 수놓은 배[錦膓繡肚]”라는 글이 있다.

 

금장옥절(金章玉節)

금으로 된 관인(官印)과 옥으로 만든 부절(符節), ‘관직에 나아감을 의미하는 말이다.

 

금장우사십리(錦障紆四十里)

() 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부()를 자랑할 새 왕개가 자사보장(紫紗步障) 40리를 치니, 석숭은 금보장(錦步障) 50리를 쳤다.

 

금장자수(金章紫綬)

황금인(黃金印)의 붉은 인끈을 말하는데, 고관(高官)을 지칭한다.

 

금저표직(金筯表直)

천보유사(天寶遺事)송경(宋璟)이 재상(宰相)이 되니 조야(朝野)의 인심이 다 귀의(歸依)하였다. 마침 봄철에 임금을 모시고 잔치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평소 사용하던 금저를 송경에게 하사했다. 경은 금저를 받고도 그 영문을 몰라 얼른 사례를 드리지 못하자 임금이 이는 경()의 강직을 표함이다.’했다.”라 하였다.

 

금적(金狄)

적인(狄人)의 동상을 가리킨다.

 

금전두(錦纏頭)

노래하고 춤을 추는 기생에게 주는 재물을 말한다. 옛날에 손님이 기생에게 비단 등을 선사할 때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금전일녀채중랑(琴傳一女蔡中郞)

채중랑(蔡中郞)은 한 나라 말년에 유명한 문사(文士) 채옹(蔡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거문고를 잘하였다. 그 거문고는 그 딸 채염(蔡琰)이 계승하였으므로 그런 말이 있게 되었다.

 

금전희작(金錢喜鵲)

옛날에 금전으로 길흉을 점쳤고 까치가 울면 반가운 사람이 찾아온다 하였다.

 

금절(金節)

사신의 상징인 황금 부절(符節)을 말한다.

 

금정(金精)

()의 정기, 서방(西方)의 기운, 즉 숙살지기(肅殺之氣)가 몰아치는 가을 기운. ()의 기운을 말한다.

 

금정(金井)

청양현(靑陽縣)의 북쪽에 있는데, 곧 백제의 왕이 마셨던 우물이다

 

금정(金鼎)

재상의 지위를 말한다.

 

금정조갱수(金鼎調羹手)

()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국을 끓이면 너를 소금과 매실[鹽梅]로 삼아 국맛을 조화(調和)시키겠다.”라 하였다. 이 말은 정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솜씨란 뜻이다.

 

금제류(金堤柳)

수양제(隋煬帝)가 변하(汴河)에 행궁(行宮)을 짓고 강 언덕에 버들을 많이 심어서 음란하게 놀아, 나라가 망한 뒤에 버들만이 남아 있었다.

 

금제작회(金虀斫膾)

서리 내린 뒤 석 자 미만의 농어[鱸魚]를 잡아 회를 뜬 뒤 향기롭고 부드러운 화엽(花葉)을 잘게 썰어서 묻혀 먹는 것으로, 예로부터 가미(佳味)로 일컬어져 시 속에 많이 등장한다.

 

금조(琴操)

주희가 지은 시이다.

 

금종료격당(金鍾聊擊撞)

() 나라 손작(孫綽)천태부(天台賦)’를 짓고 나서 그 시를 땅에 던지면 금석의 악기 소리가 울릴 것이라고 자부한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문장을 가지고 혼자서 즐기나니, 날마다 울리는 금석의 악기 소리[文章自娛戱 金石日擊撞]”라는 구절이 있다.한창려집(韓昌黎集)5 병중증장십팔(病中贈張十八)

 

금주(錦洲)

박정(朴炡)의 호이다.

 

금주(今注)

주자(朱子)의 초사집주(楚詞集註)를 말한다. 그 주에 棘當作夢 商當作天 以篆文相似而誤也 盖其意 本謂啓夢上賓于天 而得帝樂以歸라고 하였다.

 

금준(琴樽)

거문고와 술동이. 호방한 문사(文士)가 항상 가까이하는 물건이다.

 

금준미주(金樽美酒)

금으로 만든 술단지 안의 아름다운 술. 화려한 술그릇 속에 담긴 맛 좋은 술을 이르는 말이다.

 

금중(禁中)

금령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제왕의 기거하는 궁궐 안을 가리킴[禁令所及範圍之內, 指帝王所居宮內]. / 인용: 禁中東池新竹(최승로)

 

금중파(禁中頗)

궁정 안에서 시종하는 사람으로서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자를 말한다. 염파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조나라의 명장이다. ()나라 선종(宣宗) 때 당항(黨項)이 하서(河西) 지방을 어지럽히자 한림학사(翰林學士) 필함(畢諴)이 이들을 격파하는 계책을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이에 황제가 몹시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장차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을 것이다. 누가 염파와 이목이 나의 금서(禁署)에 있다고 말하는가. 경은 짐을 위해서 나가라.”하였다. 그리고는 필함을 빈녕 절도사(邠寧節度使)로 삼았다. 신당서(新唐書)卷一 百八十三 필함전(畢諴傳)

 

금중파목(禁中頗牧)

문무(文武)를 겸비한 조정의 시종신(侍從臣)을 뜻하는 말이다. 파목은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병칭한 말이다.

 

금지(琴池)

거문고를 이른다. ()는 거문고의 상면(上面)을 이르는 말이다.

 

금지(金枝)

금지옥엽(金枝玉葉)의 준말로 임금의 자손을 귀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금지(金地)

부처가 정사(精舍)를 지으려고 하는데, 땅 주인이 황금을 땅에다 깔아 주면 그만큼 팔겠다.”하였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는 그의 요구대로 황금을 깔았으므로 절[]을 금지(金地)라 하였다.

 

금지(金支)

수레에 장식하는 우보(羽葆) 등을 다는 황금으로 된 지주이다.

악기(樂器)를 장식하는 황금으로 된 장식품이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

 

금지구경(金芝九莖)

금지초는 금빛을 띤 지초(芝草)로 선초(仙草)의 이름이다. 한서(漢書)8 선제기(宣帝紀)금지초 아홉 줄기가 함덕전(函德殿) 동지(銅池) 안에서 생산되었다.”라고 하였다.

 

금지옥엽(金枝玉葉)

금으로 된 가지와 옥으로 된 잎사귀라는 뜻에서 임금의 자손이나 집안, 혹은 귀여운 자손을 비유한다.

부모와 자식을 얘기할 때, 부모는 나무에, 자식은 가지나 잎에 비유한다. 금으로 만든 가지와 옥으로 만든 나뭇잎을 지칭하는 말로 본래는 임금의 가족이나 자손들을 가리키는 존칭. 일반적으로 귀여운 자손을 통칭하는 말이다.

 

금직(禁直)

금중 직숙(禁中直宿)의 준말로, ‘궁궐 속에서 숙직하다라는 뜻이다. / 인용: 丁丑七月 禁直詠懷示季雅(기준)

 

금진세난(金盡說難)

전국(戰國) 시대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이 진왕(秦王)을 설득코자 열 번이나 상서(上書)를 하였으나 그의 말이 먹혀들지 않음으로써, 소진은 노자로 가지고 나왔던 황금 백 근이 다 떨어져서 매우 군곤(窘困)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금착도(金錯刀)

() 나라 왕망(王莽) 때에 주조한 돈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는 옛날 패도(佩刀)의 이름이기도 하다.

 

금척(金尺)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할 것을 미리 예시했다는 문헌 설화(文獻說話),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신인(神人)이 꿈에 내려와서 그대는 문무를 겸비하고 덕망과 신의가 두터워 백성에게 촉망받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라.”라고 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금천(錦韉)

말 등위에 안장을 올려놓기 전에 먼저 덮는 덮개이니, 보통 언치라고 한다. 그것을 비단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금철(衾鐵)

추위의 고통스러움을 비유한 말이다. 금철은 이불이 마치 무쇠처럼 차가움을 이른 말이다.

 

금청(衿靑)

깃이 푸른 옷이란 말로, 옛날 학생들이 입던 옷이다.

 

금체시(禁體詩)

보통 사용하는 단어를 제외하고 짓는 시를 말한다. () 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취성당(聚星堂)에서 주연을 베풀고 눈[]에 대한 시를 짓게 하면서, 설부(雪賦)에 흔히 등장하는 옥(), (), (), (), (), (), (), (), (), ()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금초(金貂)

황제의 좌우에서 시종하는 신하가 모자에 다는 장식으로, 시종신을 말한다.

한 나라 때 품계 높은 무관(武官)이 쓰던 관이다.

 

금초반(金貂班)

귀신(貴臣)과 시종(侍從)을 말한다. ()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처음 만들었다 한다. 북방에서는 춥기 때문에 본래 초피(貂皮)와 난액(暖額)을 관에 붙였는데, 후에 수식(首飾)이 되었다.

 

금총(琴聰)

소동파(蘇東坡)와 친한 시승(詩僧) 두 사람이 있었는데, 혜총(惠聰)은 거문고를 잘 타고, 혜수(惠殊)는 꿈을 즐기므로, 금총(琴聰) 밀수(蜜殊)라 하였다.

 

금추(禁推)

의금부에서 죄지은 관원을 불러다 신문(訊問)하는 일이다. 금추는 죄인을 잡아들여 금부에 가두고 신문하는 나추(拿推)와는 달리, 금부가 개좌(開坐 근무)하는 날 관()을 벗기고 원정(原情사정 진술)을 받은 다음 그대로 방면하되, 그 결말은 임금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금침(金針)

비법을 전수받는 데 쓰인 말이다. 계화총담(桂花叢談)정간(鄭侃)의 딸 채랑(采娘)칠석(七夕) 저녁에 향연(香筵)을 베풀고 직녀에게 기도하기를 원컨대 교()를 빌려주소서.’하자, 직녀가 길이가 한 치 남짓한 금바늘을 주면서 종이 위에 꽂아 치마끈 속에 두고 사흘 동안 말을 말면 너는 마땅히 기교해질 것이다.’고 하였다.”하였다. / 원호문(元好問)논시절구(論詩絶句)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이라 하였다. 금침도인(金針度人)의 준말이다.

 

금탄무학(琴彈舞鶴)

옛날 진() 나라의 사광(師曠)이 거문고를 타니, 검은 학 16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춤을 추었다 한다.

 

금탕(金湯)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로 된 참호[金城湯池]나 산하(山河)의 견고하다는 뜻이다. 견고한 성곽이나 요새지를 이른다.

 

금탕백이(金湯百二)

험준한 산하(山河)에 세워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鐵甕城)을 말한다. 백이는 백이산하(百二山河) 혹은 백이관산(百二關山)의 준말로, 2만의 병력이 백만 대군을 막을 수 있는 험한 지세(地勢)를 가리키고, 금탕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로, 굳건한 요새지를 가리킨다.

 

금파(金坡)

금란파(金鑾坡)의 약칭으로, 한림원(翰林院) 학사원(學士院)의 아칭이다. 당 나라 때에 한림원이 금란전(金鑾殿)에 있었다.

 

금파(金波)

달빛의 이칭(異稱)이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달빛은 금파처럼 어른거리고 햇빛은 환히 비친다[月穆穆以金波 日華耀以宣明]”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달빛이 물에 비치면 황금빛의 물결이 일기 때문에 금파라 한 것이다. / 유의어: 금파수(金波水)

 

금파라(金叵羅)

금으로 만든 귀한 술잔이다. 이백(李白)대주(對酒)포도주를 금파라에 따른다[蒲萄酒金叵羅].” 하였다. / 인용: 祖江行(신유한)

 

금판(金版)

경계하는 내용을 새겨 기록한 철판을 말한다.

 

금패(金牌)

규장각(奎章閣)에서 쓰는 부신(符信). 나무조각에 금물을 도금하여 만든 패. 규장각을 출입할 때 쓰였다.

 

금패(金牌)

송 나라 때 사서(赦書)나 군사(軍事)상의 기밀 등 가장 긴급한 사안을 역말로 전달할 때 사용하는 금자패(金子牌)를 말한다. 송사(宋史)』 「악비전(岳飛傳)진회(秦檜)악비의 외로운 군대를 오래 머물러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회군(回軍)하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악비가 하루에 열두 개의 회군을 명하는 금패를 받고 비분에 차 울며 십 년의 공력이 하루 만에 허사가 되는구나.’하였다.”한다.

 

금패교언(錦貝巧言)

시경(詩經)소아(小雅) 항백(巷伯)조그만 무늬[小文]로 패금(貝錦)을 이룬다. 저 참소하는 사람[讒人]이 너무도 심하도다.” 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남의 조그만 허물을 가지고 얽어서 큰 죄를 만들어내는 참소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금패단주(金牌斷酒)

유사(遺事)안녹산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갈수록 깊어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임금이 혹 독살을 당할까 염려하여 그에게 금패를 내려 술을 끊도록 했으므로 왕공(王公)들이 술을 권할 적에는 으레 금패를 내보이며 칙명을 따라 술을 끊었다고 했다.”라 하였다.

 

금편(金鞭)

자루가 쇠로 된 채찍을 가리킨다.

 

금포(錦袍)

비단 베로 만든 도포를 말한다. ()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용문(龍門)에 유람갔을 적에 군신(群臣)에게 시를 짓게 하고는 우승하는 자에게는 금포를 하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좌사(左史) 동방규(東方虯)가 먼저 시를 지어 바치자, 무후는 금포를 하사하였는데, 뒤이어 송지문(宋之問)이 시를 바치니,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무후는 즉시 동방규에게 하사한 것을 빼앗아 송지문에게 입혔다. 수당가화(隋唐嘉話)이때문에 시재(詩才)가 뛰어난 것을 칭하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한 자를 탈금지인(奪錦之人)이라 하였다.

 

금포(襟袍)

형승(形勝)의 산하가 겹겹으로 싸였음을 말한다.

 

금포(金鋪)

문비(門扉)에 설치한 금구(金具)로서 즉 짐승[]이나 용()이 문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형상을 가리킨다.

화려하게 꾸민 임금의 탑상(榻牀)을 가리킨다.

 

금포영아(錦袍嬰兒)

죽순(竹筍)을 말한 것인데 죽순을 싼 껍질이 얼룩얼룩하므로 죽순을 비단 포대기에 쌓인 어린애에 비유하였다.

 

금표(錦標)

비단으로 만든 표. 옛날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금하(金河)

대흑하(大黑河)라는 강물 이름으로 북변(北邊)의 둔수(屯戍) 지역을 말한다.

 

금학(琴鶴)

거문고와 학.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탐욕을 부리지 않고 거문고와 학을 신변에 두어 즐긴다는 것으로, 청렴하게 벼슬살이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금학사(琴學士)

고려 때의 금의(琴儀)를 가리킨다. 금의는 명문장가로,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 금학사(琴學士)라고 지칭하였다.

 

금할(鈐轄)

지방의 벼슬 이름이다.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총관금할사(總管鈐轄司)는 군려(軍旅)와 둔수(屯戍)의 일을 맡아 본다.”라고 하였다.

 

금함(金函)

유사(遺事)명황이 국정(國政)을 걱정하고 힘써 바른 말을 다 받아들였고, 혹 풍간(諷諫)하는 소장(疏章)이 있으면 치도(治道)에 우수한 것을 뽑아 금함 속에 넣어 측근에 두고 수시로 꺼내 읽어 잠시도 게을리 한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금함구(金緘口)

공자(孔子)가 주() 나라에 구경 가 태조후직(后稷)의 묘()에 들어갔더니, 묘당 우편 섬돌 앞에 쇠사람(구리로 만든 사람)이 있는데, 세 군데로 그 입을 꿰매고, 그 등에 새긴 글에 옛날의 삼가는 사람이라 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

 

금향랑(錦香囊)

석류 열매를 말한다. 장포(張布)석류가(石榴歌)가을 바람에 떨어져 부서진 금향랑, 앵무새가 빨간 콩알 쪼아 먹누나[霜風擊破錦香囊 鸚鵡啄殘紅豆顆]”라는 구절이 있다.

 

금헌(琴軒)

공자(孔子)의 제자인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단지 비파[]를 타고 노래만 부를 뿐 공당(公堂)에 내려간 적이 없는데도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

김뉴(金紐)의 당명이다. 김뉴의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쌍계재(雙溪齋)인데,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에 모두 뛰어나서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금현(金鉉)

단단하게 부착된 세 개의 솥귀로 삼공(三公)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

 

금혈(金穴)

후한(後漢) 곽황후(郭皇后)의 아우이다. ()의 집에 황제가 자주 돈과 비단을 상사(賞賜)하여 풍성함이 비할 데 없었다. 그래서 경사(京師)에서 황의 집을 금혈이라 불렀다.

 

금호(金壺)

술그릇으로 곧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물시계.

 

금호(金虎)

() 나라를 금호(金虎)라 한다.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 나온다.

 

금화(禁火)

한식일(寒食日)을 말한다. 진 문공(晉文公) 때 산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개자추(介子推)를 슬프게 여겨 후인들이 그가 죽은 전후 3일간은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금화(金花)

부인(婦人)의 수식(首飾)인 금색(金色)의 조화(造化)를 이르는데, 두보(杜甫)의 인일시(人日詩)머리꾸미개의 금화는 추위를 잘도 견디네[勝裏金花巧耐寒]”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二十一

음력 정월 초이레, 인일(人日)에 부인(婦人)들이 머리에 장식하는 채색 조화(造花)를 말한 듯하다.

 

금화(金華)

금화성(金華省) 즉 문하성(門下省)으로 중앙 관서를 말한다.

벼슬하는 사람의 찬란한 관복(官服)을 말한다.

() 나라 미앙궁(未央宮) 안의 금화전(金華殿)으로, 성제(成帝) 때 정관중(鄭寬中)과 장우(張禹)가 이곳에서 상서(尙書)논어(論語)를 진강(進講)한 고사에 의거하여 학사원(學士院)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100 서전(敍傳)

 

금화강(金華講)

한 성제(漢成帝) 때에 정관중(鄭寬中)과 장우(張禹)가 금화전에서 조석으로 임금을 모시고 상서(尙書)·논어(論語)를 강설했던 데서 온 말이다.

 

금화산(金華山)

신선의 석실(石室)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 이름이다.

 

금화성(金華省)

() 나라 미앙궁(未央宮)의 궁전 이름으로, 일찍이 성제(成帝) 때에 장우(張禹) 등이 이곳에서 상서(尙書)논어(論語)등을 진강(進講)한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100 서전(敍傳)

 

금화옥당(金華玉堂)

금화(金華)는 신선 적송자(赤松子)가 도를 얻었다는 산 이름이고 옥당은 옥으로 꾸민 집으로 신선이 산다는 집이다.

 

금화자(金華子)

() 나라 때의 신선 황초평(黃初平)을 말한다. 황초평은 나이 15세 때 양()을 먹이러 나갔다가 도사(道士)를 만나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로 들어가 40년간 도를 닦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금화전(金華殿)

()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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