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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390. 황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390. 황

건방진방랑자 2020. 6. 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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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

피리 등의 악기의 얇은 떨림판, 즉 리드(reed)이다. 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갈대로 만든다.

 

황각(黃閣)

한대(漢代)에 승상(丞相)이 나라 일을 보던 곳을 황각이라 불렀는데, 그곳 문을 누런 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 나라 때에는 문하성(門下省)도 황각이라 불렀다. 자각(雌閣)이라고도 하는 것은 옛날엔 노란 칠을 흔히 자황(雌黃)으로써 했기 때문이다.

 

황각조갱(黃閣調羹)

의정부(議政府)에서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황각은 의정부의 별칭이고, 국을 끓인다는 것은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 「열명(說命), “만약 국을 끓일 경우에는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겠다.” 하였다.

 

황간(黃幹)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고제(高弟)로서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가 일찍이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가 상례(喪禮)ㆍ제례(祭禮) 두 편을 황간에게 맡겨 이를 완성하게 하였으며, 임종시에 그에게 도통(道統)을 전했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

 

황감(黃甘)

황감(黃柑)과 같은 것으로 밀감이다.

 

황감동정(黃柑洞庭)

감자()는 동정(洞庭)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다.

 

황감저작(黃甘抵鵲)

중원(中原)에서는 귀중히 여기는 것을 변방에서는 천히 여긴다는 뜻으로 곤산(昆山)의 곁에서는 옥이 흔한 때문에 옥박(玉璞)을 까마귀나 까치에게 던져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황갑(黃甲)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을 말한다. 갑과 급제자의 명단(名單)은 특히 황지(黃紙)에 썼던 데서 온 말이다.

 

황강(黃崗)

일명 황강(黃岡)으로, 유배지(流配地)를 뜻하는 말이다. ()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1082)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짓게 된 임술년(壬戌年)소동파(蘇東坡)가 그곳으로 귀양을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황강(黃岡)

황주(黃州)의 별칭이다.

 

황강고사(黃崗故事)

()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연간에 소동파(蘇東坡)가 황강(黃崗)에 귀양갔을 때 그의 아우 자유(子由)도 균주(筠州)로 좌천되어 내려왔으므로 오랜만에 해후하여 함께 노닌 고사가 있는데, 소동파의 감구시(感舊詩)’ 서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3

 

황강유편(黃崗遺篇)

소동파(蘇東坡)전적벽부(前赤壁賦)를 가리킨다. 황주(黃州)에 유배된 그가 송()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1082) 즉 임술년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 나서 그 감회를 전()ㆍ후()의 두 적벽부로 써내었다. 황강(黃崗)은 보통 황강(黃岡)이라고 하는데 바로 황주(黃州)를 말한다.

 

황강적(黃岡跡)

황강(黃岡)은 호북성(湖北省) 황강산(黃岡山) 동쪽에 있는 황니판(黃泥坂)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후적벽부(後赤壁賦)두 손이 나를 따라 황니의 판을 지났다.(二客從予 過黃泥之坂)”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황거(黃裾)

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를 말한다.

 

황건적(黃巾賊)

후한(後漢) 때 장각(張角) 등을 말한다.

 

황견(黃絹)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쓰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첩어(捷語)

 

황견묘(黃絹妙)

()의 파자(破子) 은어(隱語), 조조(曹操)가 일찍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는데 양수(陽修)가 좇았다. 비 등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舊)8자가 쓰여 있거늘, 양수가 풀이하되, “황견(黃絹)은 색실이니 글자로 절(), 유부(幼婦)는 젊은 여자이니 글자로 묘(),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이니 글자로 호(), 제구()는 쓴 것을 받는 그릇이니 글자로 사()자이니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란 말이다.” 하였다.

 

황견유부(黃絹幼婦)

절묘(絶妙)’라는 두 글자의 은어(隱語),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 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 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말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그러자 무제가 나의 재주가 경에게 못 미치는 것이 30리이다.” 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첩어(捷語)

 

황계(璜溪)

반계(磻溪)의 이칭. 태공 망(太公望)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황옥(璜玉)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황계(荒鷄)

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도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惡聲)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황계(黃鷄)

()나라 조적(祖逖)이 밤에 유곤(劉琨)과 같이 자다가, 황계(荒雞)의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일으키고 춤을 추면서,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황계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찍 우는 닭을 말하는데 황계가 울면 난리가 난다.” 하였으니, 이는 조적이 한 번 시세를 타서 공명을 세울 큰 뜻이 있는 것이었다.

 

황계백일세쟁영(黃雞白日歲崢嶸)

백거이(白居易)의 시(), “황계는 새벽을 재촉하고, 백일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재촉한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하였다.

 

황계백일최(黃鷄白日催)

백거이(白居易)취가(醉歌)에 나오는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오전 두 시에 울고, 하얀 해는 해를 재촉하여 오후 여섯 시에 진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락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1

 

황고산(黃孤山)

조선조 중종 때의 명필로 이름은 기로(耆老), 자는 태수(鮐叟), 본관은 덕산(德山), 고산은 그의 호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

 

황고집(黃固執)

평양인(平壤人) 황순승(黃順承)의 별명으로, 성품이 아주 강직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황고집이라 하였다. 어느 명절날(節日) 새벽에 말을 타고 성묘(省墓)하러 가다가 평양 보통문 밖에서 도적을 만나자 말()을 주면서 의복은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주지 못하겠다.” 하니, 도적이 황 고집인 줄을 알고 즉시 말을 돌려주고 달아났다고 한다. 송악집(松岳集)

 

황곡(黃鵠)

고니의 일종으로 한 번 날면 천리를 간다 한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황색을 띤 대조(大鳥)의 이름인데, 전하여 대재(大才)가 있는 사람에 비유한다.

 

황곡가(黃鵠歌)

한 무제 때 강동왕(江東王) ()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삼아 오손국(烏孫國)의 곤막(昆莫)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곤막이 늙은 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자 공주가 비수(悲愁)에 젖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원컨대 황곡이 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면[願爲黃鵠兮歸故鄕].”이라 하였다 한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下 烏孫國

 

황공로(黃公壚)

()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과 청담(淸淡)을 하며 술을 먹었던 주점 이름이다. 세설(世說)왕융(王戎)이 황공의 주로(酒壚)를 지나면서 객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는 혜숙야(嵇叔夜)ㆍ완사종(阮嗣宗)과 함께 이 술집에서 실컷 취하며 즐겼는데, 이 두 사람이 죽은 뒤로는 이곳이 비록 가까우나 까마득하기가 산하(山河)가 막힌 것 같이 여겨진다.’고 하였다”. 하였다. / 인용: 朱溪謠(황상)

 

황공비략(黃公祕略)

병법(兵法)에 능통했다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아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

 

황공주로(黃公酒壚)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왕융(王戎)ㆍ혜강(嵇康)ㆍ완적(阮籍) 등이 질탕하게 마셔대던 술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회상할 때 흔히 비유하는 표현이다. 혜강과 완적이 죽은 뒤 왕융이 상서령(尙書令) 신분으로 이곳을 지나가다가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관직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탄식한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

 

황과(皇荂)

옛날 가곡의 이름이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황관(黃冠)

농부의 관. 도사(道士)가 쓰는 관. 전하여 도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농부는 황관을 쓰는데, 황관은 풀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관귀경호(黃冠歸鏡湖)

황관(黃冠)은 도사(道士)의 관인데, () 나라 때 하지장(賀知章)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도사가 되어 임금으로부터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받아 그 곳으로 가서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이다. 당서(唐書)卷一百九十六

 

황교(黃敎)

라마교의 신파(新派)이다. 청 나라 때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의 교주 겸 전제 군주가 되었다. 교도는 누런 옷과 모자를 착용하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회교(回敎)이슬람교 / 인용: 五學論(정약용)

 

황구소아(黃口小兒)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 참새 새끼의 황색 주둥이(黃口)에서 연유한 말이다.

 

황구아(黃口兒)

참새의 새끼를 말한다.

 

황구요탁(黃口謠啄)

악부시집(樂府詩集)맹호행(猛虎行)배고파도 맹호에게 붙여 먹지 않고 해 저물어도 참새에게 붙여 깃들이지 않는다.” 했는데, 자신의 청렴하지 못함을 이들도 싫어한다는 겸사로 인용한 듯하다.

 

황구첨정(黃口簽丁)

황구(黃口)는 새 새끼처럼 어린아이의 입이 노랗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어린아이라는 뜻 어린아이를 장정으로 군인 명부인 군적(軍籍)에 올림. 어린아이도 장정으로 군적에 올려 세금을 착취하던 조선말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말한다.

 

황궁(黃宮)

도가(道家)의 말로 머리(腦頂)를 말한다.

 

황권(黃卷)

옛날 책이 좀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벽나무로 내피(內皮)를 염색한 황색종이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통칭하여 말한 것이다. / 인용: 臥陶軒記(이인로)

 

황권공부(黃卷工夫)

황권(黃卷)은 옛날 좀을 막기 위하여 종이를 황색으로 물들여 책을 만들었으므로 경전(經傳)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황권의장정(黃卷擬章程)

경서(經書)의 교훈으로 자신의 법도를 삼을 것이라는 뜻이다.

 

황극(黃棘)나무 이름이다. 노란 꽃에 둥근 잎을 지닌 나무다.

 

황극(皇極)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규범. 홍범(洪範)에 있는 말인데, “크게 중정(中正)한 도라는 뜻이다.

 

황금대(黃金臺)

() 이름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연() 나라 소왕(昭王)이 제() 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역수(易水) 가에 쌓았다는 대(), 그 위에 황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뒷사람이 쌓은 대가 있어 연경팔경(燕京八景)의 하나인 금대석조(金臺夕照)로 유명하다.

 

황금압(黃金鴨)

누런 향로(香爐)를 말한다. 서갱(徐鏗)의 시에, “香烟結霧籠金鴨이라는 것이 보인다.

 

황기(黃綺)

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 ()나라 말기에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살던 이른바 상산사호(商山四皓) 중의 두 사람. 고사전(高士傳)/ 인용: 感秋(이민구)

 

황녕(黃寧)

도교의 황정경(黃庭經)의 도를 수련하여 이루는 일이다.

 

황노직(黃魯直)

() 나라 때의 황정견(黃庭堅)을 말한다. 노직은 그의 자이다.

 

황당(黃堂)

태수(太守)가 거처하는 청사(廳舍)를 가리킨다. 옛날에 태수 청사의 벽을 자황(雌黃)으로 바른 데서 연유된 것이다. 오군국지(吳郡國志)/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황당리(黃堂理)

황당(黃堂)은 한() 나라 때 황각(黃閣)을 일컫는 말로 곧 승상부(丞相府)를 말하며, 섭리는 직책을 잘 수행하여 천지(天地)를 조화(調和)한다는 뜻이다.

 

황당무계(荒唐無稽)

말이나 행동이 허황되고 터무니가 없다는 말이다.

 

황대(璜臺)

은의 마지막 왕 주가 쓰던 술 연못을 말한다.

 

황대(黃臺)

언덕의 이름이다. ()의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태자 홍()을 독살하고 차자인 현()을 태자로 봉했는데, 이때 현이 고종(高宗)을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감히 상()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깊은 걱정에 빠진 나머지 황대고사(黃臺苽辭)라는 노래를 지어 악공으로 하여금 그를 늘 노래하게 하여 상과 후()가 느끼고 깨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가사 내용이, 익은 외를 하나 둘 다 따고 나면 끝에 가서는 덩굴을 걷어 안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음. 당서(唐書)』 「건녕왕담전(建寧王倓傳)/ 인용: 山有花女歌(최성대)

 

황대과(黃臺瓜)

당나라 무후(武后)가 자기의 아들을 자꾸 죽이므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황대 밑에 외를 심었더니 셋 따고 나중에는 넝쿨만 안고 돌아오네.” 하였다.

 

황대권만(黃臺捲蔓)

황대(黃臺)는 언덕 이름이다. ()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태자 홍()을 독살하고 차자인 현()을 태자로 봉했는데, 이때 현이 고종(高宗)을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감히 상()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깊은 걱정에 빠진 나머지 황대고사(黃臺苽辭)라는 노래를 지어 악공으로 하여금 그를 늘 노래하게 하여 상과 후()가 느끼고 깨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가사 내용이, 익은 외를 하나 둘 다 따고 나면 끝에 가서는 덩굴을 걷어 안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당서(唐書)』 『건녕왕담전(建寧王倓傳)

 

황도(黃圖)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황도(黃圖)가 나오는데, 삼보궁관(三輔宮觀)ㆍ능묘(陵廟)명당(明堂)ㆍ벽옹(辟雍)ㆍ교전(郊田) 등을 기록하였다.

 

황도(皇圖)

제왕(帝王)이 통치하는 판도(版圖)이다.

 

황도(黃道)

황제의 의범(儀範)을 말한다.

태양(太陽)이 운행하는 궤도(軌道). 천구(天球)의 황도(黃道)는 양 옆으로 각각 8도로서 도합 16도인데 그 구간을 황도대(黃道帶)라 한다. 해와 달과 주요 행성이 이 길로 운행된다고 한다.

해와 달이 다니는 길. ()하여 제왕이 다니는 길을 말하기도 한다. 진서(晉書)12천문지(天文志), “해에는 중도(中道)가 있고 달에는 구행(九行)이 있는데, 중도란 것은 황도(黃道)이며, 광도(光道)라고도 한다.” 하였다.

 

황도일(黃道日)

음양도(陰陽道)의 측면에서 일을 거행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吉日)을 말한다.

 

황독(黃獨)

토란의 이명(異名). 옛날 형악사(衡岳寺)의 중 명찬선사(明瓚禪師)가 성품이 게을러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하므로 이필(李泌)이 이상하게 여겨 찾아가 보니, 화롯불에 토란을 굽고 있었다 한다. 두보(杜甫)의 동곡현가(同谷縣歌)황독은 싹이 돋지 않았는데 산에는 눈이 마구 퍼붓고[黃獨無苗山雪盛], 짧은 옷은 자주 당겨도 정강이를 못 가린다[短衣數挽不掩脛].”하였다.

 

황두랑(黃頭郞)

오행(五行)의 생극(生克)으로 보아 토극수(土克水)라 하여 토()는 황색(黃色)이므로 옛날에 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누른 모자를 쓰게 하고 이름하여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등통전(鄧通傳)

 

황량(黃粱)

인간 세상의 영욕(榮辱)이 한바탕 꿈처럼 부질없는 것을 가리킨다. 한단(邯鄲)의 노생(盧生)이 객사(客舍)에서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자기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이 베개 하나를 주며, “이것을 베고 누우면 뜻대로 되리라.” 하였다. 노생은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모든 것이 소원대로 되어, 부귀공명(富貴功名)80년간 누리다가 깨고 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짓던 메조(黃粱) 밥이 채 익지도 않은 짧은 동안이었다 한다. 침중기(枕中記)

 

황량몽(黃粱夢)

한단몽(邯鄲夢)과 같은 말이다. 황량은 누른 기장. 당 덕종(唐德宗) 때 심기제(枕旣濟)가 우언(寓言)으로 지은 침중기(枕中記)에서 나온 말로서, 인생의 부귀영화는 허무하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침중기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 7년에 매우 가난한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의 객사에서 여옹(呂翁)이란 도사를 만나 그가 준 요술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 베개 속으로 들어가 자기가 평소에 동경하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꿈을 깨보니, 객사의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황량미숙(黃梁未熟)

당 나라의 침중기(沈中記)란 소설에 노생(盧生)이 한단(邯鄲) 여숙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그가 주는 베개를 베고 꿈을 꾸어 출장입상(出將入相), 자손이 모두 영달(榮達), 80년의 호화를 누리다가 문득 깨니, 여숙 주인이 짓던 누른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

 

황량불과편시증(黃粱不過片時蒸)

부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을 잤는데, 좁쌀밥 한 번 짓는 동안에 온갓 부귀공명을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황량숙(黃粱熟)

인간 세상의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자가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 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황량일취몽(黃粱一炊夢)

() 나라의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기장밥을 짓는 동안, 곤궁함을 탄식하는 노생(盧生)을 위해 부귀 공명을 누리는 꿈을 꾸게 해 주었던 고사로서, 인생의 영화(榮華)라는 것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의미이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고도 한다. 심기제(沈旣濟), 침중기(枕中記)

 

황량지몽(黃粱之夢)

()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로,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황려(黃驪)

경기도 여주(驪州)의 고호이다. 여강(驪江)에서 누른 말과 검정 말이 나왔다 하여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한다.

 

황로(黃壚)

죽림칠현(竹林七賢)들이 모여서 노닐던 황공주로(黃公酒壚), 보통 세상을 떠난 벗을 추억할 때 쓰는 표현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

 

황로태반시교친(黃壚太半是交親)

벗들 대부분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 완적(阮籍)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함께 노닐다가, 그들이 죽고 난 뒤에 생전에 어울려서 술을 마셨던 황공(黃公)의 주점(黃壚)을 지나면서 옛 추억에 잠겼던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

 

황록(隍鹿)

세상의 일은 진위(眞僞)가 서로 뒤섞여 있는 가운데 마치 환영(幻影)이나 꿈을 꾼 것처럼 득실(得失)이 무상(無常)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 나라 때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아 해자()에 감춰두고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감춰둔 곳을 깜박 잊어 그 일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거니 생각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니 사슴이 있었다. 집으로 가져 와서 그의 아내에게 그 내력을 얘기하고는 내가 사슴을 얻었으니 그 사람은 참 꿈을 꾼 것이다.” 하니, 그 아내가, “당신이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꿈 속에서 만난 것이며, 이제 사슴을 얻었으니 당신이 참 꿈을 꾸었소.” 하였다. 그날 밤에 사슴을 잃은 나무꾼이 정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따라 사슴을 가져 간 사람을 찾아내어 송사를 일으켰더니, 재판관이 그 사슴을 각각 반분하도록 하였으며, 뒷날 정군(鄭君)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재판관도 꿈 속에서 그 사슴을 반분하라 한 것이 아니냐.” 하였다는 고사(故事)이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황룡부(黃龍府)

거란(契丹)에서 설치한 부의 이름으로, 치소(治所)가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는데, 여기서는 효종이 볼모로 잡혀 가 있던 심양(瀋陽)을 가리킨다.

 

황룡부우주(黃龍負禹舟)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임금이 남방을 순행하다가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짊어지니, 배가 움직이지 못하였다. 모두들 두려워했으나 우 임금은 웃으며 내가 천명(天命)을 받았다.’ 하고는 태연하자, 황룡은 머리를 숙이고 도망쳤다.” 하였다.

 

황룡축(黃龍舳)

황룡(黃龍)은 수() 나라 때에 만든 군함(軍艦)의 이름이다.

 

황류(黃柳)

이제 막 새순을 내놓은 버들가지를 말한다.

 

황류(黃流)

강신(降神)할 때 땅에 붓는 술로 검정 기장으로 빚고 울금초(鬱金草)로 색깔을 낸 누런 색깔의 귀한 울창주(鬱鬯酒)를 가리킨다. 시경(詩經)대아(大雅) 한록(旱麓)아름다운 옥 술잔에 황류가 가득 담겨 있네. 점잖은 군자님께 복록이 듬뿍 내리시길[瑟彼玉瓚 黃流在中 豈弟君子 福祿攸降].”이라는 말이 나온다. 귀한 인재라는 뜻이다.

 

황릉묘(黃陵廟)

옛날 순()임금이 강남 지방을 순시하다가 호남(湖南) 지방 소상강(瀟湘江)가에 있는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그의 두 왕비는 그가 죽은 데까지 쫓아갔으나, 그의 죽은 곳을 찾지 못하고 역시 그 지방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을 열녀라 하여 소상강가에다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지내었는데, 그 사당을 황릉묘(黃陵廟)라고 한다. / 유의어: 이비묘(二妃廟)

 

황릉사(黃陵祠)

황릉묘(黃陵廟)는 순()의 이비(二妃)의 사당인데, 순이 남순(南巡)하다가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자 이비는 소상강(瀟湘江) 가에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

 

황리몽(隍裏夢)

옛날 정() 나라의 나무꾼이 사슴을 잡아 늪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藏諸隍中] 그 장소를 잃어버리고는 꿈속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진짜 꿈속에서 그 사슴을 찾아 가져간 사람을 알아내고는 소송을 벌인 결과 반절씩 나눠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황마(黃馬)

누른 말이다. () 나라 유준(劉峻)의 광절교론(廣絶交論)황마가 달리는 듯한 농담, 벽계(碧鷄)가 치오르는 듯한 웅변이다.” 하였다.

 

황마(黃麻)

임금이 내리는 조서(詔書). ()나라 때에, 내사(內事)에는 백마지(白麻紙), 외사(外事)에는 황마지(黃麻紙)에다 조서를 썼었음. 한림지(翰林志)

 

황매(黃梅)

음력 4월을 말한다. 매실이 4월경이 되면 노랗게 익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황매선사(黃梅禪師)

홍인(弘忍)을 말하는데, 선종(禪宗) 5()이다. 4조 도신(道信)에게 심인(心印)을 받았고 6조 혜능(慧能)에게 전하였다.

 

황매우(黃梅雨)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 내리는 비. 보통 6월 중순부터 7월 초순에 걸쳐 내리는 장마비를 말한다.

 

황매절(黃梅節)

매실이 누렇게 익는 때인 초여름을 말한다.

 

황면(黃面)

누른 얼굴은 궁한 선비의 꼴이다.

 

황면로(黃面老)

도금(鍍金)한 불상(佛像)을 말한다.

 

황명(蝗螟)

메뚜기나 이화명충 등 곡식을 해치는 곤충으로, 인간의 각종 탐욕을 비유한 말인데,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내경(內景), 외경(外景), 중경(中景)의 황정(黃庭)에서 자라는 가곡(嘉穀)에 황명(蝗螟)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소식(蘇軾)의 시 부용성(芙蓉城)’의 말미에 안으로 수렴하여 삼정을 살피면서, 가곡에 황명이 생기지 않도록 하오시라[願君收視觀三庭 勿與嘉穀生蝗螟].”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삼정(三庭)은 바로 황정(黃庭)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16

 

황모(黃帽)

누른 빛깔의 모자. 오행(五行)의 생극(生克)으로 보아 토극수(土克水)라 하여 토()는 황색(黃色)이므로 옛날에 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누른 모자를 쓰게 하고 이름하여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등통전(鄧通傳)

 

황모어랑(黃帽漁郞)

황색은 오행(五行)으로 쳐서 토()에 속하는데, 오행의 생극(生剋)으로 보아 토가 수()를 이기기 때문에 배를 만지는 자는 모두 황색모를 썼다고 한다. 한서(漢書)』 「등통전(鄧通傳)

 

황모촌(黃茅村)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시골 마을. 주희(朱熹)의 매화를 읊은 시에, “나부산 아래 황모촌 마을에, 소공(蘇公)은 신선이 되어 가고 시혼만 남았구나.” 하였다.

 

황문교(黃門交)

석숭(石崇)의 호위병을 말한다.

 

황미백미(黃米白米)

태감(太監) 이광(李廣)이 공주(公主)가 병이 나서 약을 쓰다가 잘못되자 두려워서 자살하였다. 효종이 그의 집 안을 수색해서 뇌물을 바친 자의 이름을 적은 명단을 찾아냈는데, 황미(黃米)와 백미(白米)를 백 석을 바치고 천 석을 바쳤다고 기록된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효종이 이광이 하루에 얼마나 먹기에 이렇게 많은 쌀을 받았는가?”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이것은 은어(隱語)입니다. 황미는 금()을 말하고 백미는 은()을 말합니다.” 하였다. 사략(史略)卷九 효종경황제(孝宗敬皇帝)

 

황미옹(黃眉翁)

동방삭(東方朔)이 홍몽(鴻濛)의 늪에서 노닐다가 별안간 황미옹을 만났는데, “나는 화식(火食)을 끊고 정기(精氣)를 흡수해 온 지가 이미 9천여 년이 된다. 3천 년 만에 한 차례 뼈를 바꾸고(反骨) 뇌를 씻었으며(洗髓), 2천 년 만에 한 차례 뼈를 찌르고(刺骨) 털을 갈았으니(伐毛), 나는 태어난 이후로 세 차례 뇌를 씻고 다섯 차례 털을 갈았다.” 하였다. 서경잡기(西京雜記)

 

황반자(黃半刺)

반자(半刺)는 도호부(都護府)의 통판(通判), 즉 판관(判官)의 별칭이다.

 

황발(黃髮)

‘70~80세 노인을 말한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황발송(黃髮頌)

시경(詩經)노송(魯頌) 비궁(閟宮)누런 머리털에 검버섯이 피다[黃髮台背]”에서 온 말인데, 노인의 흰머리가 다시 누렇게 되는 것은 곧 장수(長壽)의 조짐이라 한다.

 

황백(黃白)

어린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황백(幌帛)

주례(周禮)황씨(幌氏)가 실()을 맡아, 삶고 빨아서 마전한다.” 하였다.

 

황벽(黃蘗)

산 이름인데 당 나라 단제선사(斷際禪師) 희운(希運)의 별칭이다. 황벽종(黃蘗宗)ㆍ조계종이 있다.

 

황벽인배휴(黃蘗引裴休)

황벽(黃蘗)은 당() 나라 단제선사(斷際禪師) 희운(希運)의 별칭이다. 고승전(高僧傳)희운이 배 상국(裵相國)의 청으로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제자를 가르쳤는데, 배 상국도 이곳에서 희운에게 득법(得法)했다.” 하였다.

 

황변녹(隍邊鹿)

꿈속에서 있었던 허무한 일을 말한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들판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정() 땅 사람이 사슴을 만나서 잡은 다음 이를 죽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가져갈까 염려되었다. 이에 사슴을 끌어다가 해자 속에다 감추고는 풀로 덮은 다음 몹시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감추어 둔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여겼다. 그 사람이 길을 내려오면서 그 일을 떠들어대자, 곁에 있던 사람이 듣고는 그 말에 따라 찾아가서 사슴을 얻었다.” 하였다.

 

황복(荒服)

오복(五服)의 하나로, 중국 경사(京師)에서 25백 리 떨어진 변원(邊遠)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이만(夷蠻)은 요복(要服)이요, 융적(戎翟)은 황복(荒服)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여 교화 밖의 만이(蠻夷)를 가리킨다.

 

황봉(黃封)

임금이 하사한 술을 말한다. 궁중에서 빚은 술은 누른비단으로 봉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궁중의 맛좋은 술을 가리킨다.

 

황봉주(黃封酒)

임금이 하사한 술을 말한다.

 

황분(皇墳)

삼황(三皇)의 분서(墳書)라는 뜻으로,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의 글을 말한다. 공안국(孔安國), 상서서(尙書序)

 

황비(黃扉)

승상, 삼공(三公), 급사중(給事中) 등 최고위 관원을 가리키는 말로, 그들의 문에 황색 칠을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인용: 柳居士(홍신유)

 

황비자달(黃扉紫闥)

주황색 문은 재상의 집을, 보라색 문은 대궐을 가리킨다.

 

황비주획(黃扉籌畫)

정승의 위치에서 수립한 정책을 말한다. 옛날 승상이나 삼공(三公) 등의 집무실에는 황색으로 문을 칠했는데, 이를 황비(黃扉)라 하였다.

 

황비피현(黃扉避賢)

재상의 지위를 후배에게 물려주려고 했다는 말이다. 옛날에 재상 등 고관의 관청 문을 황색으로 칠했던 고사가 있다. 피현(避賢)은 현재(賢才)에게 길을 비켜 준다는 말이다.

 

황사(黃沙)

사막(沙漠)이란 뜻이다. 왕창령(王昌齡)의 종군행(從軍行)사막의 백번 싸움에 쇠 갑옷 뚫리었네(黃沙百載穿金甲)” 하였다.

황사옥(黃沙獄)의 준말로, () 나라의 조옥(詔獄)의 이름으로, 감옥 속의 고통을 말한다.

 

황사랑(黃四娘)

두보(杜甫)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라는 시에, “황사랑의 집에 꽃이 길에 가득하다[黃四娘家花滿蹊].”란 구절이 있는데, 황사랑은 어떤 여자인 듯하며 두자미의 시에 실렸기 때문에 전하여졌다는 것이다.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의 호이다.

 

황산곡(黃山谷)

황산곡의 성명은 황정견(黃庭堅)이요, 산곡은 그의 호이다. 그는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시대 사람이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이성계(李成桂)ㆍ이두란(李豆蘭) 장군이 고려 우왕 6(1380)에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적 아기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1577)에 세운 승전비(勝戰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雲峯面) 화수리(花水里)에 있었는데 왜정 때 파괴되고 지금은 파편만 남아 있다 한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각자(刻字)하였다.

 

황삼(黃衫)

()ㆍ당() 시대에 소년들이 입었던 화려한 황색 복장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황삼 입은 소년이여 자주 와서 즐기시오, 동으로 흐르는 물처럼 청춘도 그렇게 지난다오[黃衫年少來宜數 不見堂前東逝波].”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0 少年行 2

 

황상(黃裳)

적처(嫡妻)를 말한다. 한편, 주역(周易)』 「곤괘(坤卦)육오(六五)의 효사(爻辭)인데, 길상(吉祥) 또는 사람의 내면에 갖춘 덕을 뜻하기도 한다.

 

황상곤도(黃裳坤道)

주역(周易)』 「곤괘(坤卦)육오괘사(六五卦辭)황상을 입었으니 매우 길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황색은 중앙의 색이고 치마는 하의이니, 중도를 지켜 아래에 있으면 매우 길하다.”고 하였다.

 

황상길(黃裳吉)

주역(周易)』 「곤괘(坤卦)육오 효사(六五爻辭)누른 치마라 크게 길하다[黃裳元吉].” 하였는데, 곤괘는 여자(女子)의 상()인바, 황색은 중색(中色)이며 치마는 아래에 있는 것이므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분수를 알아 자신을 낮게 처하면 하다는 뜻이다.

 

황색상미(黃色上眉)

상리형진(相理衡眞)두 눈썹 사이에 자황색(紫黃色)이 떠오르면 반드시 기쁜 일이 있게 된다.” 하였다.

 

황석(黃石)

() 나라의 개국공신인 장량(張良)에게 이상(圯上)에서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수해 준 노인이 나중에 황석(黃石)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장량이 죽은 뒤에 그 황석과 함께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장막 속에서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일천 리 밖에서 승부를 벌써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運籌策帳中 決勝千里外 子房之功也].”라고 칭찬한 고사가 있다.

 

황석공(黃石公)

선인(仙人). () 나라 말기에, 하비(下邳)의 이교(圮橋)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황석공비결(黃石公祕訣)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소서(素書)라는 비결(祕訣)을 받았는데, 그 글 속에, “성공하고 나면 물러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황선(黃璿)

자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본관은 장수(長水), 처신(處信)의 아들이다. 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변란 때 경상도 관찰사로서 역전(力戰)하여 공을 거두고 그날 밤에 죽었다.

 

황성(皇宬)

() 나라의 장서각(藏書閣)인 황사성(皇史宬)을 말한다. 이 집은 명 나라 궁중에 있었으며, 실록(實錄)과 비전(祕典)을 간직하였다.

 

황소(黃巢)

5세 때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후에 과거에 낙방하자 소금 암매매를 업으로 삼았다. 875년 왕선지의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후 허난·산둥, 남으로는 광저우에 이르는 거의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을 격파하고, 5년 후에는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자결하였다.

 

황소(黃蘇)

황정견(黃庭堅)소식(蘇軾)으로 송체(宋體)를 말한다.

 

황소송(黃小松)

소송(小松)은 청 나라 황이(黃易)의 호이다.

 

황송당(黃松堂)

송당(松堂)은 황윤길(黃允吉)의 호이다.

 

황수(潢水)

낙동강(洛東江)의 일명이다.

 

황수(黃綬)

황수동인(黃綬銅印)의 준말로, 지방 수령이 차는 황색 인끈을 말한다.

 

황순우잠(黃純于潛)

태현경(太玄經)()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黃純于潛].”한 데서 온 말인데, ()은 곧 물()이 생()하기 어려움을 뜻하고, ‘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는 것은 바로, 동짓달에 양기(陽氣)가 지하에 숨어 있으면서 만물(萬物)의 근해(根荄)를 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황씨(慌氏)

옛날 옷 빛깔을 관장하던 오공(五工) 중의 하나. 흰 실과 비단을 손질하는 일을 맡았었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황아(黃芽)

연단(鍊丹)의 결과로 얻게 되는 정화(精華)를 말한다.

 

황아백설(黃芽白雪)

도가 양생술에서 비약(秘藥)으로 쓰는 연분(鉛粉) 등의 약물.

 

황양(黃壤)

누런 흙인데, 여기서는 죽어서 땅 밑에 묻힌 것을 말한다.

 

황양(黃楊)

황양목(黃楊木)은 빨리 자라지 않는 나무인데 윤달이 드는 해에는 다시 작아진다 한다. 그러므로 황양은 윤달 드는 해에 액()을 당한다[黃楊厄閏年].”는 고시(古詩)가 있다.

 

황양(潢洋)

흐트러져 몸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황양액윤년(黃楊厄閏年)

윤년에는 황양목 즉 회양목이 액운을 당한다는 말이다. 이 시제는 소식(蘇軾)뜨락의 초목 봄이 오면 무수히 자라건만, 오직 황양목은 윤년에 재앙을 당한다네.(園中草木春無數 只有黃楊厄閏年)”라는 시구에서 나온 것인데, 소식의 자주(自註)속설(俗說)에 의하면, 황양목이 1년에 한 치씩 더디게 자라다가 윤년을 만나면 오히려 세 치가 줄어든다고 한다.” 하였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11 監洞霄宮兪康直郞中所居四詠 退圃

 

황어(黃魚)

잉어 종류의 바닷물고기. 일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지내고 산란기에만 하천으로 올라오는데, 비가 오려고 할 때면 높이 뛰어올랐다가 물 위에 떨어지곤 하며, 조밀하게 어군(魚群)을 형성하여 동행하는 습성을 보인다.

 

황여(皇輿)

임금이 탄 수레를 말한다.

 

황예(荒穢)

거칠고 잡초만 무성하다는 뜻이다.

 

황옥(黃屋)

임금의 수레를 말한다.

 

황옥거(黃屋車)

노란 비단으로 덮개를 한 천자의 수레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천자를 가리킨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쳐들어와 인조가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었던 일을 말한다.

 

황왕제패(皇王帝覇)

중국 고대의 정치(政治)에 삼대(三代)는 순수한 왕도(王道), ()은 패도(覇道)를 섞었다 한다.

 

황우(黃虞)

태평 성대를 말한다. 중국의 전설시대인 5천년 전에 황제(黃帝)라는 임금이 있었고, 그 후에 우순(虞舜)이 있었으므로 그 둘을 합하여 황우(黃虞)라고 말한 것이다.

 

황우지혁(黃牛之革)

주역(周易)혁괘(革卦), “공고히 하는 데는 누런 소의 가죽을 쓰라[鞏用黃牛之革].”하였다.

 

황우패(黃牛佩)

() 나라 공수(龔遂)가 발해군(勃海郡)에 태수(太守)로 갔는데, 그곳에 도적들이 난리를 일으켰다. 공수는 그들을 귀순시키면서 검()을 찬 사람에게, “너는 왜 소()를 차고 있느냐.” 하고, ()를 찬 사람에게는, “너는 왜 송아지를 찼느냐.” 하였다. 그것은 검()은 소 한 마리 값이고, ()는 송아지 한 마리 값에 해당하니, 그것을 팔아서 소를 사고 송아지를 사서 도둑질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라고 교화시키는 말이다.

 

황우협(黃牛峽)

산 모습이 황소처럼 생겼다는 장강(長江)의 협곡 이름이다.

 

황운(黃雲)

벼나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논밭에 그득히 서 있는 모습을 비유한 말이다. / 인용: 戊子秋哀丐者(송규빈)

왕의 어머니 또는 왕비를 상징한 것. 제요(齊堯)의 어머니가 두유(斗維) 들에서 태어났을 때 황색 구름이 그 위를 늘 덮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

 

황운십경추(黃雲十頃秋)

벼 이삭들이 누렇게 익어 넘실대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황금 들판과 같은 말이다.

 

황원락일원서오(荒原落日怨棲烏)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를 보니 불효자의 심정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말이다.

 

황월(黃鉞)

천자(天子)가 정벌(征伐)할 때 쓰는 황금으로 장식한 도끼. 서경(書經)』 『주서(周書)목서(牧誓)왼손으로는 황월을, 오른손으로는 백모(白旄)를 잡고 지휘하였다.”라 하였다.

 

황유(黃楡)

누렇게 변한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이 나무가 많은 북쪽 변방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황유기명(黃楡丌銘)

누른빛의 느릅나무로 만든 책상에 대한 명이다.

 

황유백초(黃楡白草)

변새(邊塞)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가리킨다. 황유는 북방의 변경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이고, 백초는 서역(西域)의 목초(牧草)로서 다 자라면 희게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 나라 장적(張籍)의 시 양주사(涼州詞)봉림관 물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백초와 황유는 예순 해를 넘겼도다[鳳林關裏水東流 白草黃楡六十秋].”라는 구절이 있다.

 

황의(黃衣)

미관 말직(微官末職)을 가리킨다.

 

황의한록(皇矣旱麓)

시경(詩經)대아(大雅) 황의(皇矣)시경(詩經)대아(大雅) 한록(旱麓)편을 말한다.

 

황이(黃耳)

() 육기(陸機)의 애견(愛犬) 말한다. 대통(竹筩)에 넣은 주인의 편지를 목에 걸고 몇 천리를 뛰어 육기의 고향 오도(吳都)에 가 전하고, 답장을 받아 가지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황이균(黃耳菌)

귀 모양으로 생기고 누른빛이 나는 버섯을 말한다.

 

황익성(黃翼成)

익성(翼成)은 조선조 초기의 명재상인 황희(黃喜)의 시호(諡號)이다.

 

황익성공(黃翼成公)

익성(翼成)은 조선 초기의 명상(名相)인 황희(黃喜)의 시호이다.

 

황자파(皇子陂)

장안 남쪽 위곡(韋曲) 부근의 명승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제오교 동쪽 물에 한을 흘려보내고, 황자파 북쪽 정자 시름이 서렸어라[第五橋東流恨水 皇陂岸北結愁亭].”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6 題鄭十八著作丈故居

 

황작풍(黃雀風)

음력 5월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풍토기(風土記)“5월에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히는데 황작장풍이라 한다[仲夏長風扇暑 名黃雀長風].” 하였다.

 

황장(黃腸)

백목(柏木)의 황심(黃心) 부분의 판재(板材)로 만든 장구(葬具)인데, 즉 잣나무의 심재로 만든 관()을 말한다.

 

황장사우게(黃腸思苃憩)

백성들이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앙모(仰慕)함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그 지방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감당(甘棠)나무를 소중히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당(甘棠)

 

황정(黃精)

식물(植物) 이름이다. 약초로 쓰이고 특히 신선이 식량으로 먹는다고 한다. 또는 보양강장제로 오래 먹으면 신선이 되어 장생(長生)한다고 한다. 박물지(博物志)

 

황정(黃鼎)

청 나라 상숙(常熟) 사람으로 자는 존고(尊古), 호는 광정(曠亭)인데 만호(晩號)는 정구노인(淨垢老人)이다. 산수를 잘 그려 화품(畫品)이 초일하였으며 평생에 유람을 좋아하여 천하의 산수를 다 보았으므로 붓끝에는 모두 생기가 있었음.

 

황정(黃庭)

황정(黃庭)은 마음을 말한다. ()은 중앙의 색, ()은 사방의 중앙으로서, 우리 몸의 중심이 된다고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상단전(上丹田 뇌중(腦中))ㆍ중단전(中丹田 심중(心中))ㆍ하단전(下丹田 비중(脾中))을 말한다. 운급칠첨(雲笈七籤)

황정경(黃庭經)을 말한다. 도가(道家)의 경문(經文) 이름으로 네 종류가 있다. 위 부인(魏夫人)이 전한 것이라 하는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 왕희지(王羲之)가 쓴 황정외경경(黃庭外景經), 그 밖의 황정둔갑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 황정옥추경(黃庭玉樞經)이다. 세상 사람이 위에 든 네 가지를 황정경이라 말한다.

③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내경(內景), 외경(外景), 중경(中景)의 황정(黃庭)에서 자라는 가곡(嘉穀)에 황명(蝗螟)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황정경(黃庭經)

도가(道家)의 경전(經傳)으로, 신선(神仙)의 장생법(長生法)을 말한 경()인데, 칠언시(七言詩)로 되어 있다.

도교의 경전에 대한 통칭. 운급칠첨(雲笈七籤), 황정 내경경(內景經), 황정 외경경(外景經), 황정 둔갑연신경(遁甲緣身經)의 세 이름이 나오며, 그밖에 황정 양신경(養神經), 황정 중경(中經), 황정 오장육부진인옥축경(五臟六腑眞人玉軸經) 등의 몇 가지 이름이 있다. 도가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의 글들로, 상청(上淸)의 진경(眞經)을 남악(南岳)의 위부인(魏夫人)이 그의 제자에게 주어서 여러 번 전하였는데, 뒤에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빠뜨려 버리고, 황정경 1편만 남아 전한다고 한다.

노자황정경(老子黃庭經)의 준말로, 도교(道敎)의 경서를 가리킨다.

 

황정욱(黃廷彧)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으로 부원군이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황정환백아(黃庭換白鵝)

글씨에 뛰어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의 도사(道士)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 있으므로, 이백(李白)이 그 고사를 전용하여, 글씨에 뛰어난 하지장(賀知章)을 보낸 시에 경호의 흐르는 물 맑은 물결 넘실대니, 광객의 돌아가는 배에 흥취도 많아라. 산음의 도사를 만일 서로 만나며는,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鏡湖流水漾淸波 狂客歸舟逸興多 山陰道士如相見 應寫黃庭換白鵝].” 한 데서 온 말이다. 이태백집(李太白集)卷十六

 

황제(黃虀)

거친 채소.

 

황제승천(黃帝升天)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서 구리()로 솥()을 주조하다가 솥이 다 이루어지자, 턱에 수염을 드리운 용()이 내려와 황제를 맞으므로 황제가 그를 타고 하늘에 올랐다.” 하였다.

 

황종(黃琮)

황색의 서옥(瑞玉)으로 제사(祭祀)에 쓰는 옥이다.

 

황종(黃鐘)

십이율(十二律)의 하나인데, 곧 십이율의 기본음(基本音)이 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중동(仲冬)의 달은 율이 황종에 해당한다[仲冬之月 其音羽 律中黃鐘].” 하였다.

옛 음악에서 12()가운데 하나로 소리가 가장 크고 웅장한 것인데, 길이의 단위를 정할 때 황종 길이의 90분의 11()으로, 10분을 1()으로, 10촌을 1()으로, 10척을 1()으로, 10장을 1()으로 한다고 한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

 

황종(黃鍾)

12() 가운데 양률(陽律)에 속하는 여섯 종류의 율 중 첫 번째 율이고, 대려는 여섯 음률(陰律) 중 네 번째 율로서, 음악이나 시문이 장엄하고 정대한 것을 비유할 때 곧잘 병칭해서 쓴다.

 

황종률(黃鍾律)

후기법(候氣法)에 의하면, 밀실(密室) 안에 명주베()를 깔고 십이 율관(十二律管)을 각 방위대로 안치한 다음, 각 율관 속에 갈대재(葭灰)를 채워 놓으면, 각 기()가 이를 때마다 해당 율관의 재가 날리게 되는데, 특히 동지(冬至)의 기가 이르면 황종율관의 재가 날므로 이른 말이다.

 

황종손와부(黃鍾遜瓦缶)

황종(黃鍾)은 아악률(雅樂律)의 이름으로 질장군과는 크게 좋고 나쁜 차이가 있으므로, 전하여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인식이 전도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황종재동(黃鐘纔動)

황종관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황종률관(黃鐘律管)에 넣어둔 갈대재(葭灰)동지(冬至)에 이르러 날아 움직이는 것을 이른 말이고, 큰 소리가 고요하다는 것은 곧 송() 나라 소옹(邵雍)의 동지시(冬至詩)찬 물은 맛이 바야흐로 담담하고 지극히 큰 소리는 고요하기만 하네[玄酒味方淡 大音聲正希]” 한 데서 온 말이다.

 

황종해우이(黃鍾駭牛耳)

황종(黃鍾)은 현자(賢者)에 비유한 말이고, 황소 귀는 곧 사이비의 소인에 비유한 것이니, 즉 현자가 소인을 증오하는 뜻이다.

 

황주(皇州)

제도(帝都) 즉 서울을 말한다.

 

황주(黃紬)

황색 명주 이불을 말하는데,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한 현령(縣令)에게 경계하기를 황주 이불 속에 늦게까지 누워서 직무를 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한다.

 

황주고각(黃州鼓角)

황주(黃州)는 중국 호북성(湖北省)의 지명이고 고각은 군중에서 사용하는 북과 나팔이다. 소동파(蘇東坡) 시에 황주의 고각소리 그 또한 다정하다. 남쪽으로 날 보내 먼 길 아니 마다했네[黃州鼓角亦多情 送我南來不辭遠].”라고 하였다.

 

황주피(黃紬被)

누런 명주 이불을 말한다.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한 현령(縣令)에게 이르기를 근신하여 황주피(黃紬被) 속에 누워서 청사를 비우지 말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황죽(黃竹)

주 목왕이 사냥을 나가서 지었다는 노래 이름이다.

 

황죽가(黃竹歌)

주목왕(周穆王)이 황대(黃坮)의 평택(苹澤)에서 사냥할 때 날씨가 몹시 춥고 우설(雨雪)이 퍼부어 얼어죽은 사람이 있음을 듣고, 애절한 뜻을 노래한 3()의 황죽시(黃竹詩)를 이름이다.

 

황중정색(黃中正色)

()ㆍ적()ㆍ흑()ㆍ백()ㆍ황()의 오색을 각각 사방(四方)과 중앙에 배열하면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오색을 오방(五方)에 배열하는 것은 오행설(五行說)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황색은 중앙의 토()로 가장 존귀하게 보아 황제의 일용복식(日用服飾)이 모두 황색으로 되어 있다.

 

황지(黃紙)

임금의 조서(詔書)를 노란색 종이에 쓰므로, 전하여 임금의 조서를 말한다.

 

황지서(黃支犀)

황지(黃支)는 남해(南海)에 있었던 나라다. 한서(漢書)』 「평제기(平帝紀)황지국에서 무소를 바쳤다.” 하였다.

 

황지제명(黃紙題名)

과거에 급제하여 관원으로 임명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조서(詔書)를 내리거나 이부(吏部)에서 전형(銓衡) 결과를 위에 보고할 적에는 황색 종이를 사용하였다.

 

황진(黃陳)

() 나라의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가리킨다.

 

황진도원(黃眞桃源)

황진(黃眞)은 무릉 도원(武陵桃源)을 처음 발견했다는 어부 황도진(黃道眞)을 가리키며, 도원(桃源)은 호남성(湖南省) 도원현(桃源縣) 도원산에 있는데,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폭포가 있어 선경(仙境)으로 칭하게 되었다. 도잠(陶潛)도화원기(桃花源記)() 나라 태원(太元) 때에 무릉(武陵)에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이 도원에 이르러 보니 마치 선경과 같았다. 그는 그곳을 내려왔다가 다시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였는데, 이는 진()의 난리를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이라 한다.

 

황창랑(黃昌郞)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무를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검무를 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황천(皇天)

하늘의 경칭(敬稱)이다.

 

황천벽락양망망(黃泉碧落兩茫茫)

당 나라 백락천(白樂天)장한가(長恨歌), “양귀비(楊貴妃)의 혼령이 있는 곳을 두루 찾을 때에 위로는 푸른 창공, 아래로는 황천(黃泉), 두 곳이 망망(茫茫)하여 다 볼 수 없다[上窮碧落下黃泉 雨處茫茫皆不見].”란 구절이 있다.

 

황초(皇初)

개벽(開闢) 할 때를 말하니, 즉 태고(太古) 시대를 말한다.

 

황초(黃初)

삼국(三國) 시대 위 문제(魏文帝; 曹丕)의 연호로, 이 연간에는 특히 훌륭한 시문가(詩文家)가 많아 황초체(黃初體)라는 시체(詩體)가 이룩되기도 했다.

 

황초체(黃初體)

황초(黃初)는 위 문제(魏文帝)의 연호이므로, 즉 황초 연간의 시체(詩體)를 이른 말이다.

 

황총상미(黃摠上眉)

돌아갈 생각에 기쁜 기색을 띤다는 뜻이다. 옛날의 점치는 법에서 누런 기운이 미간에 생기는 것은 공경(公卿)이 될 상으로 보아 아주 좋은 조짐으로 여겼다. 태평어람(太平御覽)364

 

황총요성(荒塚遼城)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된 뒤 천 년 만에 학을 타고 고향 땅에 돌아왔는데, 어떤 소년이 활을 들고서 쏘려고 하자 공중을 배회하면서 성곽은 여전한데 사람들은 다르나니, 어찌 도를 안 배우고 무덤만 저렇게 즐비한고[城郭如古人民非 何不學仙塚壘壘].”라고 말하고는, 하늘 높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수신후기(搜神後記)1

 

황추포(黃秋浦)

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 황신(黃愼), 추포는 그의 호이다. 그가 선조 28(1595)에 명() 나라 책봉사 이종성(李宗城)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바람을 만나 물길이 험하므로 바다 귀신에게 맹세하는 글(誓海文)을 지어 고하고 제사지냈다. 그의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825일 기사에 자세하다.

 

황침(黃綅)

지방 수령은 구리 도장에 노란 인끈을 찬다고 하여 수령을 말한다.

 

황파(黃把)

인삼(人蔘) 철에 외인이 몰래 들어와 인삼을 캐어 가는 것을 막는 한편 인삼을 캐어 모으기 위하여 강계(江界) 일대에 나누어 보내는 군대. 인삼의 열매가 붉어진 때(丹節)에 보내는 것으로 단파라 하고, 인삼 잎이 노래지기 시작할 때(黃節)에 보내는 것으로 황파라 한다.

 

황패(黃霸)

()의 순리(循吏). () 나라 때 양하(陽夏) 사람으로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얻었다. 무제(武帝)의 말기부터 벼슬하기 시작하여 여러 지방관(地方官)을 거치는 동안, 치적이 천하의 제일로 알려졌고, 뒤에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르렀으며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한서(漢書)循吏 黃霸

 

황표정사(黃標政事)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정사(政事) 때에는 법에 따라 망단자(望單子)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기는 하되, 의정부(議政府)와 이조(吏曹) 또는 병조(兵曹)의 당상관(堂上官)들이 의논하여, 쓸만한 사람을 가려서 한 사람의 이름에 미리 황지(黃紙)로 표를 붙여서 입계(入啓)하면, 임금은 표가 붙어 있는 사람의 이름에 낙점(落點)만 하였다. 낙점은 본디 임금의 뜻을 표명하여 재결(裁決)하는 것인데, 신하에 의하여 미리 정해지고 임금은 다만 붓으로 점을 쳐서 형식만을 갖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와 같은 변칙적인 인사행정을 가리켜 황표정사라 하였다. 황표정사는 이듬해 3월부터 없어졌다.

 

황풍(皇風)

임금의 덕()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다.

 

황하(黃河)

중국 제2의 대하(大河)인데, 황하수가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황하기일징(黃河幾日澄)

혼탁한 세상을 탄식한 말이다. 황하는 원래 혼탁한 물인데, 옛말에 황하가 천 년 만에 한 번 맑아지고,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나온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황하서류자곤륜(黃河西流自崑崙)

한 무제(漢武帝) 장건(張騫)이 서역(西域)과 통한 뒤로 계속 사신이 왕래하였는데, 한서(漢書)장건전(張騫傳)한 나라 사신이 황하의 근원인 끝까지 가 보니, 그 산엔 옥이 많았으므로 캐 왔다. 천자가 옛 도서(圖書)를 상고해 보니 황하수가 나오는 산은 곤륜산(崑崙山)이다.” 했으므로 한 말이다.

 

황하소식(黃河消息)

어질고 성스런 임금이 나와 태평 성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송사(宋史) 악지(樂志)백성이 편안하고 풍속이 좋아지면 황하수가 맑아지고 바닷물도 조용하다.” 하였다.

 

황하재보(黃河再報)

황하수(黃河水)가 누렇고 탁한데, 천 년(千年)만에 한 번씩 맑으면 반드시 성군(聖君)이 나서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온다는 말이 있다.

 

황하제일천(黃河際一千)

황하(黃河)는 대단히 탁한 강물이다. 그러나 그 물이 1천 년에 한 번씩 맑아지고, 맑아지면 성인이 나서 세상을 지극히 태평하게 다스린다고 하였다.

 

황하청유사(黃河淸有俟)

황하는 진흙과 모래가 많이 끼어 물이 항상 혼탁하므로 옛적에는 황하가 맑아지면 상서로운 일로 여겼음. 좌전(左傳)양공(襄公) 8년 조()俟河之淸 人壽其何라는 말이 있는데 시기(時機)의 만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습유기(拾遺記)황하는 천년만에 한 번 맑는다.” 하였다.

 

황하해탁(黃河解濁)

황하수는 천 년에 한 번쯤 맑아진다 하는데, 성인이 나오면 맑아진다 한다.

 

황학루(黃鶴樓)

신선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찾아왔었다는 누각으로, 지금의 중국 호북(湖北) 무한시(武漢市) 사산(蛇山) 장강(長江)가에 있었다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고금의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곳을 찾아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 이백(李白)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남방으로 쫓겨가던 도중 황학루에 올랐던 일이 있다.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서쪽 황학기(黃鶴磯) 위에 있는 누대로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굽어볼 수 있고 천리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보응록(報應錄)강하군(江夏郡)에 신씨(辛氏) 한 사람이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한 노인이 와서 술을 청하자 두말 없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다. 이렇게 반년 동안 계속하였는데, 하루는 그 노인이 와서 술값을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그 집 벽에다가 황학(黃鶴)을 그려 주었다. 술 취한 사람이 탁자를 치며 노래하자 이 그림 학이 나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이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신씨는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다시 와서 피리를 불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왔고, 노인은 이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신씨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학루를 세웠다.” 하였다.

 

황학유선(黃鶴遊仙)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 나라 비문위(費文褘)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황학산에서 쉬어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황향(黃香)

가난한 집안에서 겨울에는 자기 몸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침상에서 시원하게 부채를 부쳐 드리는 등 극진하게 어버이를 모셨다는 후한(後漢)의 효자 이름이다. 동관한기(東觀漢記)』 「황향(黃香)

 

황향온정(黃香溫凊)

온정은 아들이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 겨울에는 따습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는 것으로, 전하여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을 이르는데, 후한(後漢) 때 황향(黃香)이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아버지를 섬기면서 항상 여름이면 부친의 와상과 베개에 부채질을 하여 시원하게 하고, 겨울이면 자신이 부친의 이부자리 속에 먼저 드러누워 자리를 따습게 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八十

 

황형영자(煌螢映字)

()손강(孫姜)이 등유(燈油)가 없어 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던 고사를 인용하였다.

 

황홀(恍惚)

가누지 못하다. 정신이 아득하다.

 

황홀(怳惚)

어렴풋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는 뜻에서 즉 도()를 가리킨 말이다.

 

황홀(荒忽)

정신이 아득한 모양. 아득하다.

 

황화(皇華)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인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약칭으로, 곧 천자의 사신이나 사신의 행차를 일컫는 말이다. 황황자화서(皇皇者華序)황황자화는 임금이 사신을 보낼 적에 예악(禮樂)으로써 보내는 것이니, 멀리 가서 빛냄이 있을 것을 말한다.” 하였다.

 

황화곡(黃華曲)

황화는 중국 조() 나라 서울 한단(邯鄲)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 주위의 민간에서 부르는 평범한 곡이다. 백악천시집(白樂天詩集)2 속고시십수(續古詩十首)한단에서 창녀를 진상했는데 황화라 그 곡조를 능히 불렀네[邯鄲進倡女 能唱黃華曲].” 하였다.

 

황화오백년(黃花五百年)

장한(張翰)의 시(), “누른 꽃이 마치 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黃花如散金].”는 명귀(名句)가 있다. 이백(李白)의 시에, “장한의 황화귀는 풍류 오백 년이로다[張翰黃花句風流五百年].” 한 귀가 있다. 그것은 장한과 이백의 사이가 오백년이 된 것이었다.

 

황화재(皇華才)

황화는 본디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인데,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짓는 재주를 말한다.

 

황화절(黃花節)

99일의 중양절(重陽節)을 말한다.

 

황화집(皇華集)

명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 접반관(接伴官)과 화답한 시집(詩集)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 세조(世祖)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정자인데, 정자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지었으며, 그 후 자주 중국 사신을 압구정에서 연회하면서 시를 화답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컬은 것이다.

 

황화취죽본비진(黃花翠竹本非眞)

화엄좌주(華嚴座主)가 대주화상(大珠和尙)에게 묻기를 선사(禪師)께서는 어찌하여 푸른 대는 모두 법신(法身)이요, 누런 꽃은 반야(般若)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하니, 대주화상이 대답하기를 법신은 형상이 없으므로 푸른 대에 응하여 상()을 이루는 것이요, 반야는 앎이 없으므로 누런 꽃을 대하여 상()을 드러내는 것이지, 저 누런 꽃과 푸른 대에 의해서 반야와 법신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지월록(指月錄)

 

황화회미급(皇華懷靡及)

황화는 곧 사신(使臣)을 가리킨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빛 어려 환한 꽃은 언덕이며 진벌에 피어 있네. 부지런히 달리는 사나이는 행여 못미칠까 걱정일세[皇皇者華 于彼原濕 駪駪征夫 每懷靡及].” 한 데서 온 말이다.

 

황황(洸洸)

물이 흘러서 어떤 곳에 이르는 모양

 

황황(遑遑)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 갈 곳 없이 헤매는 모양.

 

황황(徨徨)

방황하는 모양, 어슷거리는 모양

 

황황중니(遑遑仲尼)

황황(遑遑)은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대는 모양. 후한서(後漢書)』 「소경전(蘇竟傳)중니(仲尼)는 황황하였고 묵자(墨子)도 황황하였으니 매우 사람을 걱정해서이다.”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국가나 백성을 위하여 몹시 노력한 공자(孔子)를 닮겠다는 뜻이다.

 

황황특달천화연(煌煌特達泉火然)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단(四端)을 확충하고, 발달시키기를 불이 처음 타듯, 샘물이 처음 흘러나오듯 하라[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하였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황회원(黃會元)

회원은 황여일(黃汝一)의 자이다.

 

황효(黃驍)

여주(驪州)의 고호인 황요(黃饒)의 착오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황효(黃驍)

황효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진()의 명사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이곳의 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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