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어쩌면 러일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의 자세가 그렇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를 불시에 기습하면서 그 이튿날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군대를 따라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고종(高宗)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일본을 도우라고 강요했다. 아직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그 반면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2월 12일에 공관 수비대와 함께 일찌감치 서울을 빠져나갔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조선의 임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쟁 중에도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외무장관)인 이지용(李址鎔, 1870~?)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징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으며,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교차 승인해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했다는 뜻이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소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하는 순간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직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 조선과 일본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강화도조약에서 규정된 ‘대등한 관계’에 있었고, 더구나 조선은 비록 무늬만이기는 하나 일본과 같은 제국의 위상이다. 그래서 조선을 완전히 소유하려면 먼저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1905년 11월 초 일본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별대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온 목적은 바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 해주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강화도조약에서 두 나라를 ‘대등한 관계’라고 규정했던 일본이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것은 자기모순이지만, 불행히도 당시는 논리보다 총칼이 앞선 시대였다).
덜떨어진 고종(高宗)도 이번만큼은 일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리고, 이토를 만난 자리에서 보호받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날 이토였다면 애초부터 한반도에 발을 내딛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 군대를 무장시켜 서울 시내를 시위하도록 하고, 궁성 주변에는 헌병과 경찰을 삼엄하게 배치해서 잔뜩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다시금 고종(高宗)에게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과연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고종은 슬그머니 무대에서 퇴장해 버렸고 ‘국왕이 빠진 어전회의’는 처음처럼 강력한 반대의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했다(수구화에는 앞장서다가 정작 국가적으로 중요한 때는 말없이 물러나 버리는 고종을 어떻게 봐야 할까?). 때를 놓칠세라 이토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한 사람씩 차례로 의사를 물었다. 어차피 국왕도 책임을 회피한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모두 여덟 명의 주요 대신들 가운데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통과되었는데,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의 다섯 명이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불리는 자들이다【그들은 비록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매국노라는 비난을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줄 잘 선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그 공로로 일본 정부가 수여한 작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모두 권력을 누리면서 살 만큼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특히 이완용은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과 매국 행위를 계속해서 후대에 매국노의 대명사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나라가 망한 것도 비극이지만 이처럼 민족의 반역자들이 제때 처단되지 못한 것은 더 큰 비극이다. 나중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에도 친일 매국노들이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은 그런 역사적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 합방의 두 주역 일본과 조선은 둘 다 제국이지만, 두 제국의 합병은 각각의 실세인 이토(아래쪽)와 이완용(위쪽) 사이에 이루어졌다. 비록 둘 다 실세였고 양국의 황제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만, 일본은 황제와 정부가 원하는 조약이었고, 조선은 그렇지 않았으니 합병 조약의 애매한 성격은 여기서 비롯된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달리 방법이 있었겠느냐고 을사오적을 두둔하는 건 옳지 않다. 그들과 달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고 나중에 일본이 인사치레로 주는 작위마저 거부한 참정대신(지금의 부총리급) 한규설(韓圭卨, 1848~1930) 같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사오적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역사를 진행해 온 필연적 귀결이지만, 당시의 인물 만으로 책임을 따진다 해도 가장 큰 책임은 단연 고종(高宗)에게 있다. 따라서 을사오적은 ‘고종과 을사오적’이라고 하든가, 마치 록밴드 이름 같아 거부감이 든다면 고종을 포함시켜 ‘을사육적’이라 불러야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젊은 시절에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지낸 것까진 인물이 모자란 탓이라고 봐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의 집 더부살이로 국가 위신을 실추시키고 자주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 단체를 탄압하는 정신나간 행동을 일삼은 고종은 을사오적보다 훨씬 더 무책임한 매국노다.
정작 그가 잘못을 깨달은 것은 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다. 이듬해 1월 을사조약을 주도한 일본 공사이 해체되고 통감부(統監府)가 성립되었다. 이제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공사관 대신 정식 지배기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과연 통감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사관의 위상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정부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에게 외교권과 군사권을 내맡겨 왔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종주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박탈감이 더 심할뿐더러 향후의 조짐도 심상치 않다. 일본이 단지 예전의 중국이 담당해 온 조선의 관리자라는 역할에만 머물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제야 고종은 자신의 지위조차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감한다. 물론 왕위에 특별한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의 대에서 조선의 왕통이 끊어진다면 종묘 사직에 대죄를 짓게 되고 죽어서 조상 뵐 면목도 없어지게 되니까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원래 모든 후회는 때늦은 법, 이제 와서 그가 쓸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다. 한 가지 있다면 오로지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사실상 조선의 정부가 된 통감부는 외국에 있는 조선의 공사관들을 일제히 소환하고, 서울에 주재한 외국의 공사관들도 철수시켜 버렸기 때문이다(아마 외국에서도 일본과 조선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면 한 나라에 두 개의 공사관을 둘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종(高宗)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친정집이나 다름없는 러시아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마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일 터이다. 어쨌거나 국제사회에 조선의 사정을 알릴 ‘매체’가 전혀 없었던 고종(高宗)으로선 하늘이 내린 기회나 다름없다【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완료되자 누구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은 같은 처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형세의 역전을 도모한다. 그러자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에 긴장한 영국은 라이벌 프랑스에다 오랜 앙숙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맺고 삼국동맹에 대비한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3장 참조). 국제적 평화회의가 필요해진 이유는 이런 유럽의 정세 때문이었으므로 먼 극동의 사정이 열강 대표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회의를 1년 앞둔 1906년 4월에 일찌감치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출발했고 1년 뒤에는 이준(李儁, 1859~1907)이 조선을 떠났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그곳에 체재하고 있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 1887~?)과 합류해서 1907년 6월 회의 날짜에 맞춰 헤이그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작전 성공이지만 그 다음에는 역시 각오했던 어려움이 따른다. 회의의 분위기나 쟁점이나 식민지ㆍ종속국 문제와는 전혀 무관했으니 이들의 활동이 순탄할 리 없다. 우선 열강은 조선 대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된 이상 참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일본 대표가 유럽 대표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방해 공작을 펴기도 했지만 애초에 유럽 열강에게 조선의 처지를 공감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해서 열사가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눈물로 이준을 매장한 다음 귀국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래도 밀사들이야 돌아오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는 고종은 꼼짝없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조약 체결 이후 초대 조선 통감(統監, 통감부의 책임자인데 아직 조선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기에 총독에 해당한다)이 된 이토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高宗)에게 사태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면서 제위에서 물러나고 아들에게 섭정을 맡기라고 강요한다. 자신도 어차피 허수아비인 판에 섭정까지 들인다면 허수아비의 허수아비가 되는 셈인데, 아무리 모자라고 못난 고종이라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양위를 해버렸고, 이로써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0)이 즉위했다【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을 지킨 것일지 모르지만 그 양위는 결국 고종(高宗)의 마지막 실책이 되었다. 아무리 속국의 신세라 해도 조선 조정과 국민들의 정서가 있고, 또 아직 조선은 속국일 뿐 식민지는 아니었으므로 통감부가 조선의 황실을 마음대로 하기는 어려웠다(이완용을 통로로 활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에게 진정한 저항의 의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통감부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최대한 자리에서 버티었어야 했다(더욱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은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랬더라도 식민지화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일본은 무척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테고 다만 몇 년이라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긴, 고종에게는 그런 정도의 저항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을까?】.
▲ 바지와 저고리 앉아 있는 늙은 자가 고종(高宗)이고 서 있는 젊은 자는 순종이다. 이들의 명함에는 황제라고 찍혀 있으나 실상 이들은 바지저고리였다. 그래도 쓸데없이 오래 재위했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탄압 같은 데서나 권한을 발휘한 고종에 비해 처음부터 끝까지 멋모르고 끌려다닌 순종이 조금 낫다고나 할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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