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11/17 (35)
건빵이랑 놀자
5. 그림과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에 들어갈 것은? [1점] 학생 A: 티이완에서는 이렇게 ‘낮에 끼니로 먹는 음식’을 ‘午飯’이라고 해 학생 B: 그렇구나. 한국에서는 보통 ‘(㉠)’이라고 해. 원래는 ‘배고플 때 조금 먹는 음식’을 뜻하는 말이지. ① 夕食 ② 點心 ③ 白飯 ④ 良心 ⑤ 菜食 더보기 답안 ② 인용 목차 23학년도 수능
4. 단어장의 내용으로 보아 ㉠에 들어갈 것은? [1점] 원래의 뜻 남은 땅 ㉠ ⇒ 확장된 뜻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 ① 大地 ② 黃土 ③ 餘地 ④ 國土 ⑤ 農地 더보기 답안 ③ 인용 목차 23학년도 수능
3. 그림과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에 들어갈 것은? A: ㉠, 이 한자의 음은 ‘潮’와/과 같아. B: 부수는 ‘勤’과 같아. C: 총획은 ‘車’과 같지. D: 이 글자 앞에 ‘共’을 결합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도와줌’을 뜻하는 말로 쓰여. ① 早 ② 加 ③ 志 ④ 助 ⑤ 有 더보기 답안 ④ 인용 목차 23학년도 수능
2. 상반되는 뜻을 지닌 한자끼리 연결한 것만을 에서 고른 것은? [1점] ㄱ. 同 - 異 ㄴ. 中 - 央 ㄷ. 強 - 弱 ㄹ. 價 - 値 ① ㄱ, ㄷ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더보기 답안 ① 상반(同異, 強弱) / 유사(中央, 價値) 인용 목차 23학년도 수능
1. 그림과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에 들어갈 것은? [1점] 교사 : 이 작품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발표해 볼까요? 정우 :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스승에 대한 존경과 배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주 : 중국 송나라 때 정이(程頤)를 뵈러 갔던 두 제자가 사색에 잠긴 스승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눈이 내리는 집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그래서 마당에 서 있는 제자들의 하반신을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묘사했습니다. 재용 : 스승 정이의 집 앞에서 눈을 맞으며 서서 기다리는 장면을 그렸기에 ‘程門立(㉠)圖’라고 합니다. ① 江 ② 村 ③ 野 ④ 田 ⑤ 雪 더보기 답안 ⑤ 程門立雪圖: 정이 집 문의 눈 내린 데서 서 있는 그림 인용 목차 23학년도 수능
14-10.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그것은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신체가 낱낱이 버힘을 당한 것과도 같다. 나는 그 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어째서인가? 그 옛날에 마디 마디 잘림을 당했던 그 때에, 내가 만약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코 분노와 미움을 냈으리라. 何以故? 須菩堤!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於我爾時, 無我相, 无人相, 无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瞋恨.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체. 어아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이러한 끔찍한 가리왕의 이야기는 결코 설화가 아니다. 보스니아..
14-4.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닫고 이를 받아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만약 먼 훗날 후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듣고, 믿어 깨달아 이를 받아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則爲第一希有.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즉위제일희유. 14-5.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이 사람은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
14-2. 세존이시여! 만약 여기 다시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그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참된 모습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나이다. 世尊, 若復有人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 세존, 약복유인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성취제일희유공덕. 14-3. 세존이시여! 이 참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어떤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참된 모습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世尊! 是實相者, 則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여래설명실상. 여기 ‘참된 모습’은 집역(什譯)의 실상(實相)인데, 이 실상(實相)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
14. 상을 떠나 영원으로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14-1.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의취를 깊게 깨달아 눈물 흘려 흐느끼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신다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얻은 바의 혜안으로도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爾時, 須菩堤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이시, 수보리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소득혜안, 미증득문여시지경. 이 제14분은 『금강경』 전체에서 가장 긴 분이다. 콘체의 말대로 주된 암송이 제13분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13-8.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불?” 13-9.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 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삼십이상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13-10.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또한 다..
13-4.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須菩堤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13-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 하겠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불?” 13-6.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言: “甚多. 世尊!” 수보리언: “심다. 세존!” 13-7. “수보리야!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13-3.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所以者何? 須菩堤! 佛說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칙비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불?” ‘여당봉지(汝當奉持)’에서 멋있게 끝난 피날레를 억지로 논리를 붙여내어 끌어간 느낌이 역력하다. 그러나 퍽으나 자연스럽게 논지를 펼쳐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판본의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 시중에서 통용되고 있는 많은 『금강경』이 라집역본(羅什譯本)임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잘못된 의취(義趣)에 따라 제멋대로 가감(加減)한 비선본(非善本..
13. 법에 따라 받아지녀라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13-1.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爾時, 須菩堤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13-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佛告須菩堤: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불고수보리: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콘체는 『금강경』이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보고 있다. 사실 콘체의 이와 같은 분석은 공부를 깊게 한 사람의 통찰력 있는 ..
12-2.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須菩堤!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則爲有佛若尊重弟子.” 수보리! 당지시인,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약존중제자.” 이것은 ‘교회론’의 최종적 해석이다. 내가 이 『금강경』을 내 방에 꽂아두면(그 말씀을 내 방과 내 마음에 모시면) 곧 내 방이 부처님의 사리탑이 되고 법당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내 책상에 꽂아두면 바로 그 책상이 베드로의 성전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이 살아계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참신하고 과격하고 진실한 사상인가? 동포들이여! 앞으로 ..
12.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12-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復次須菩堤! 隨說是經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如佛塔廟. 何況有人盡能受持讀誦! “복차수보리! 수설시경내지사구게등, 당지차처일체세간천인아수라, 개응공양여불탑묘. 하황유인진능수지독송! 이 분 역시 대승불교운동의 역사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금강경』의 성립이,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것이 많이 지어진 시대를 배경..
11-4.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言: “甚多. 世尊!” 수보리언: “심다. 세존!” 11-5.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佛告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勝前福德.”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승전복덕.”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표현과 그 진실한 내용이 잘 조화되어 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돈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은 칠보의 공덕을 결코 천시하거나 낮잡아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도 ‘..
11-2. 수보리가 사뢰었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須菩堤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상다무수, 하황기사?” 11-3.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須菩堤!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利用布施, 得福多不?” “수보리! 아금실언고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다불?” ‘아금실언고여(我今實言告汝)’는 여태까..
11.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11-1.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須菩堤!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寧爲多不?”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녕위다불?”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분(分)이다. 인도인들의 프라이드와 시적 정취가 너무도 잘 표현된 아름다운 분이다. 인도의 고문명(古文明)은 하라파(Harappa), 모헨죠다로(Mohenjodaro) 등의 유적지에서 보여지는 하라판문명(Harappan Civilization)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것을 포함하여 인더스강..
10-7.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큽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부처님께서 그 몸은 몸이 아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비로소 이를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須菩堤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비신(非身), 시명대신(是名大身)’과 ‘비장엄(非莊嚴), 시명장엄(是名莊嚴)’은 동일한 논리적 구조로 되어 있다. 부정이 아닌 대긍정의 논리다. 그러나 그 대긍정의 전제는 신(身)이 신(身)이 아니라고 하는 ‘무아(無我)’(실체의 부정)인 것이다. 『금강경』은 긍정의 논리이지,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특히 유념해주기 바란다. 인용 목차 금강경
10-6. 수보리야! 비유컨대, 그 몸이 수미산처럼 큰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몸이 크다 할 것이냐? 크지 않다 할 것이냐?” 須菩堤! 譬如有人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수보리! 비여유인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불?” 논의는 불국토(佛國土)의 정화행위로부터 법신(法身)의 인식문제로 옮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동일한 문제의식의 패턴 속에서 논구하고 있다. 여기 역시 수미산(須彌山)만큼 큰 법신의 부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긍정인 것이다. ‘수미산왕(須彌山王)’이라는 표현은 수미산이 산 중의 왕이라 해서 붙인 이름일 수도 있지만(Suppose, Subhuti, there were a man endowed with a body, a huge bo..
10-5. “그러므로, 수보리야! 뭇 보살과 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또한 마땅히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是故須菩堤!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시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이생기심. 앞의 ‘시명장엄(是名莊嚴)’의 인식론적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 나의 마음이 불토(佛土)를 구성하는 육경(六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토라고 하는 인식작용의 대상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색을 말하고 나중에 성(..
10-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불?” 10-4.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 하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장엄하다 이름하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則非莊嚴, 是名莊嚴.”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여기에 나오는 ‘장엄(莊嚴)’이라는 말은 ‘vyūha’에 해당되는 말인데 그 원의는 ‘건립(formation)’, ‘보기 좋은 배열, 배치(distribution, arrangement)’, ‘수식, 장식’, ‘구조물(structure)’, ..
10-2.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실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實无所得.”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앞의 질문이 ‘여래가 연등불(디빵까라따타가따) 아래서 얻은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의 뉴앙스로 되어 있다. 여기 ‘소득(所得)’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즉 ‘얻은 그 무엇’, 바로 그 무엇이 실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보리의 대답은 실로 그 무엇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무화(無化)시키고 공화(空化)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래가 전생에서 샤캬의 성자(샤캬무니=석가모니)가 됨을 확약 받았기에 성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소승적(小乘的) 발상이요, 대승적 발상이 아니다. 예수가 오직 다윗왕의 자손이..
10.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10-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있느냐? 있지 아니하냐?” 佛告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得不?”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불?” 여기 ‘정토(淨土)’란 이름이 분명(分名)으로 나오고 있는데 본문(本文) 속의 ‘불토(佛土)’와 동일한 뜻이다. 정토(淨土)란 말은 한역(漢譯)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나오는 ‘청정국토(淸淨國土)’라는 말을 두 글자로 압축시킨 것이다. 정토(淨土)란 ‘부처님의 나라’ 즉 깨달은 자들의 나라며 정복(淨福)의 영원한 이상향이다. 불계(佛界), 불국(佛國), 불찰(佛刹)로도 쓰이는데, 이는 우리가..
9-10.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世尊! 我若作是念我得阿羅漢道, 世尊則佛說須菩堤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堤實無所行, 而名須菩堤是樂阿蘭那行.” 세존! 아약작시념아득아라한도, 세존즉불설수보리시낙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시낙아란나행.” 여기 ‘아란나(阿蘭那)의 행(行)을 즐기는 자’(araṇā-vihārin)라는 표현은 앞의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과 같은 표현이다. ‘득무쟁삼매인(得無諍三昧人)’이라는 것은 의역이고 ‘낙아란나행자(樂阿蘭那行者)’는 음역이다. ..
9-9.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의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라는 이 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최위제일, 시제일리욕아라한. 아불작시념, 아시리욕아라한. ‘무쟁삼매인중최위제일(無靜三昧人中最爲第一)’의 원문은 ‘araṇā-vihāriṇām agryaḥ’이며 그 뜻을 직역하면, ‘다툼이 없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최고의 사람’이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나 이외의 인간들로부터의 온갖 모욕과 박해와 비난, 그리고 외도(外道)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더불어 싸우지 않는..
9-8.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실제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 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著我人衆生壽者.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명아라한. 세존! 아라한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번역이 실제적 의미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면서 읽기 쉽게 되어 있으므로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 의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나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
9-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阿羅漢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불?” 제1위(第一位)로부터 제4위(第四位)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같은 패턴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앞의 3위는 모두 ‘과(果)’로 되어있었는데 최후의 제4위는 그것이 ‘도(道)’로 되어 있다. 아라한의 증득(證得)의 상태가 이전의 3단계의 상태와는 다르다고 하는 차별성을 살리는 표현으로, 범문(梵文)에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라집(羅什)이 그에 맞추어 번역한 것이다. 앞의 세 경우는 ‘phalaṃ’이라하여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라한의 경우는 ‘arhat..
9-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불?” 9-6.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 올 자’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无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명위불래, 이실무래. 시고명아나함.” 우리 해인사본(本)에 ‘실무래(實无來)’로 되어 있는 부분이 명본(明本)에는 ‘실무불래(..
9-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斯陀含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디함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불?” 9-4.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 번 왔다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명일왕래, 시명사다함.” 라집(羅什)이 음역과 의역을 이용하여 기나긴 산스크리트 원문을 간결하게 처리해버리는 한역방식이 참으로 돋보인다. 사다함? 하늘..
9-2.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이오니이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만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다원이 수다원일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수도의 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에가 아니다. 어느 곳에도 들어감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인 것이다. 이 분(分)에서 깨고자 하는 것은 모든 수도인들의 자의식이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겨나는 자의식..
9.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9-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須陀洹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불?” 이 제9분은 역사적으로 『금강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한 분이다. 『금강경』은 소승과 대승이라는 구분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당대에 성립한 부파불교에 대한 통렬한 반성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로 이 분(分)은 『금강경』이 쓰여진 당대의 부파불교의 통념에 대한 매우 통렬한 비판의 어조를 깔고 있다. 불교의 언어는 매우 밋밋하고 두리뭉실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면에 숨어..
8-5.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須菩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일언(一言)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의 불(佛)은 곧 ‘깨달음’이다. 불법(佛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一言)은 바로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대승예수의 최후의 일언은 이런 것이었다: “나 예수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다.” 인용 목차 금강경
8-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바로 이 『금강경』이 설(說)하고 있는 대승의 지혜야말로 일체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깨달음의 원천인 것이다.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붓다의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최후의 심판,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다음을 보라! 인용 목차 금강경
8-3.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 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사람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其福勝彼. “약복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위타인설, 기복승피.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문 중에 경(經)이라 하니 이는 불타의 한나절 설법인데 어찌 경(經)이라 할손가? 이미 『금강경』이라는 책이 설법자의 손에 쥐어져 있기라도 하단 말가? 재미있는 지적이기는 하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질문이다. 인도문화는 본시 오디오문화다. 입에서 귀로 전달되는 것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화다. 그런데 이 질문은 비디오를 중시하는 중국문화전통의 사람에게서 나온 질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