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11/16 (45)
건빵이랑 놀자
8-2.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니이다.” 須菩堤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 福德多.”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곧 대승적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대승적 마음가짐이란, 곧 복덕에 복덕이라는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복덕을 복덕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복덕은 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함이 없음을 행하면 되지 않음이 없다”(위무위爲無爲, 즉무불치則無不治. 제3장). ‘즉비복덕성(卽非福德..
8.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8-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녕위다불?” 이 장에서 우리의 ‘악취공(惡取空)’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법(法)을 버리고 비법(非法)을 떠난다 해서 그럼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무위(無爲)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적 도덕적 행위는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행하는 자세가 보살승에 올라타 있어야 한다는 것..
7-3.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 非法非非法.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불가설, 비법비비법. 7-4.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라집(羅什)은 ‘하이고(何以故)’, ‘소이자하(所以者何)’와 같이, 문의의 다양성을 위해 표현을 약간씩 달리하는 구문을 썼다. 같은 문장 안에서도 동일한 주어의 표현을 바꾸는 것도 그러하다. 나도 번역에 있어 그에 맞추어 변주하였다. 마지막 문장의..
7-2.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須菩堤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无有定法如來可說.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제, 역무유정법여래가설. 실재(實在)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재는 무상(無常)하여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는 그것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한 세계는 무상의 세계가 아니라 상(常)의 세계다. 상의 세계는 망상(妄想)인 것이다. 천당의 불변적 삶을 추구하는 소승적 기독교인의 망상이 어떠한 오류에 속하는 것인지 이제 좀 깊게 이해..
7.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7-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인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과연 있는 것인가?”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과연’은 내가 문의를 살리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이제 『금강경』이 바로 『금강경』을 설할 것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6-8.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여기 비교적 길었던 제6분(第六分)의 총결론이 제출되고 있다. 앞서 이 책의 모두에서 내가 말했듯이 종교는 교설(敎說)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귀한 휴지라도 밑을 담으면 버려야지, 그것이 귀하다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면 쿠린내만 계속 날 것이다. 기독교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런 ..
6-7.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불응취법, 불응취비법.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이 표방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언어체계는 실재(實在)의 정확한 그림이 될 수가 없다. 실재세계(實在世界)를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부정적으로 표현해도 다 부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구사는 논리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논리의 법칙은 실재세계의 모습과는 무관한 또 다른 께임일 뿐이다. 이 양자의 정합성에서 세계를 규명하려는 모든 노..
6-6.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則著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심취상(若心取相)’은 ‘그 마음에 존재의 상을 갖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곧 마음의 상을 바로 밖에 있는 대상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후대 유식(唯識)에서 많이 다루게 되는 문제에 속한다. ‘약취법상(若取法相)’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가 마치 ‘약법취상(若法取相)’인 것처럼, ‘약심취상(若心取相)’과 대비하여 번역했는데(이기영도 나카무라..
6-5.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无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복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역무비법상. 이 글귀의 핵심은 ‘무법상역무비법상(無法相亦無非法相)’에 있다. 박테리아를 쳐부시는데 항생제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항생제를 좋아해서 항생제를 계속 먹으면 그것이 더 큰 병을 불러 일으킨다. 공(空) 사상은 존재(存在)를 실체의 존속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유병(有病)을 치료하는 데는 더 없는 좋은 약이다. 그러나 공 그 자체에 집착하면 더 큰 병이 생겨난다. 악취공(惡取空, dur-gṛhītā śūnyatā: 공의 ..
6-4.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須菩堤!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득여시무량복덕. 여래는 각자(覺者)이다. 각자는 전체를 보는 사람이다. 여기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 함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막연한 ‘전지전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는 근본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극적 상황에도 훌륭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동학에서 ‘만사지(萬事知)’라 한 것과도 상통한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6-3.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聞是章句乃至一念生淨信者.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종제선근, 문시장구내지일념생정신자. 산스크리트 원본과 비교해 보면 라집역은 매우 간결하게 축약되어 있다. 여기 ‘부처’는 ‘깨달음’을 상징하며 역사적인 싯달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표현은 이미 오랜 윤회(saṃsāra)의 시간 속에서 훌륭한 행동(good conduct)과 덕성(virtuous quali..
6-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말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며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에 잘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이를 진실한 것으로 삼으리라.” 佛告須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 章句能生信心, 以此爲實.” 수보리의 비관론에 대하여 불타의 낙관론이 설파되고 있다. 여기의 핵심되는 구절은 ‘후오백세(後五百歲)’인데, 사실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범문(梵文) 원본에도 한역본에도 완벽하게 명료하지는 않다. 범문에는 ‘후(後)의 오백년대(五百年代)에’라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삼시(三時)사상 중에서 가운데 시대인 ‘상법(像法)’ 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시(三時)란 불타의 멸적 후의..
6. 바른 믿음은 드물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6-1.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須菩堤白佛言: “世尊! 頗有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백불언: “세존! 파유중생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불?” ‘정신(正信)’은 ‘바른 믿음’이다. 문중(文中)의 ‘실신(實信)’과 상통한다.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는 ‘신(信)’이란 글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믿음(faith)’이라는 용례에로 쓰인 적이 없다. 그것은 ‘실증한다’라는 ‘verification’의 의미에 가까운 내포를 지녔을 뿐이다. 이미 라집(羅什)의 시대에는 신(信)이라는 글자가 종교적 ‘믿음’의 ..
5-3.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佛告須菩堤: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불고수보리: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아론(無我論)’이 강한 어조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 처음 ‘허망(虛妄)’ 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허망이라는 말은 곧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이다. 존재 그 자체의 허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ㆍ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뜻이다. 콘체는 이 허망을 ‘fraud’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우리 인식의 기만성을 내포한 말이다. ‘견제상비상(見諸相非相)’의 ‘견(見)’은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5-2.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신상(身相)’을 나는 ‘몸의 형상’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붓다의 색신(色身)을 구성하는 특징에 관한 것이다. 상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어는 ‘lakṣaṇa’인데 ‘nimitta’와 대응하여 물체의 외면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표시(mark), 싸인(sign), 심볼(symbol), 증거(token), 성격(characteristic), 속성(attribute), 성질(quality) 등의 의..
5.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5-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견여래불?” ‘여리(如理)’는 ‘리와 같이’ ‘리대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그리고 물론 이것은 한역불교에서 더 뚜렷이 발전된 개념이지만, ‘리(理)’라고 하는 것은 ‘사(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사(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리(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본체론과는 다르지만 본체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리(理)는 진여(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생멸(生滅)의 세계가 아닌 생멸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엄밀..
4-7.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須菩堤! 菩薩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단(但)’을 ‘오직’으로 한 것은 세조본의 우리말을 따랐다. 여기서 ‘가르친 바 대로’라는 것은 본분(本分)에서 말한 내용을 가리킨다. 보살은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노자(老子)』 제2장에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란 말이 있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루어진 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불거(弗居)’는 여기서 말하는 ‘불주어상(不住於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중국인들은 오히려 불교의 ‘불주(不住)’의 논리를 노자적(老子的)인 불거(弗居)로서 이해했음에 틀림이 없다. 중국인들에게서는 『노자(老子)」가 분명 선행되었던 지혜의 경전이다...
4-6.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堤!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不可思量. “수보리! 보살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불가사량. 『반야심경』의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를 연상하면 같은 패턴의 문장구성방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4-5. “수보리야! 남ㆍ서ㆍ북방과 사유ㆍ상ㆍ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가사량불?” “불야. 세존!” 우리가 보통 시방(十方)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 온갖 방위를 가리키는 인도인의 개념화방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 동방인들은 주로 4방ㆍ8방은 잘 말해도 ‘시방’을 말하지는 않았다. ‘시방’에는 상(上)과 하(下)의 2방이 더 들어가는데 이것은 인도인들의 공간감각이 중국인들보다 훨씬 입체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방(四方)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네 방위다. 사유(四維)라는 것은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들어 가는, 동북ㆍ동남ㆍ서남ㆍ서북을 말한다. 여기에 상(..
4-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가사량불?” “불야, 세존!” ‘어의운하(於意云何)’는 계속 나오는 관용구다. ‘뜻에 있어서 어떠한가?’인데, 세조본의 아름다운 우리말에 따라 ‘네 뜻에 어떠하뇨?’로 일관되게 번역하겠다. 우리가 동쪽하늘의 양이나 크기를 개념적으로 수량화해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보시가 결과적으로 가져오는 무량(無量)한 복덕(福德)이 이와 같이 엄청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도덕을 실천한다 하는 것은 외면적으로 도덕을 초월하는 것(trans-ethical)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도덕성..
4-3.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하이고? 약보살불주상포시, 기복덕불가사량.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 이미 선진시대(先秦時代)에 불교와 무관하게 성립한 중국의 지혜의 서(書)인 『노자(老子)』 제7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故能成其私 고능성기사 여기서 말하는 ‘무사(無私)’는 곧 불교의 ‘무아(無我)’로..
4-2.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堤!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소위불주색보시, 불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불주어상. 종교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구제’, ‘보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가 실제적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측면이 심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에서 끊임없이 그 조직이 유지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보시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보시는 ‘dāna’의 번역인데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보시는 크게 ‘삼시(三施)’로 나뉜다. 그 첫째가 ‘재시(財施)’인데, 의식(衣食..
4.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4-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復次須菩堤!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복차수보리! 보살어법응무소주, 행어포시. ‘묘행(妙行)’이란 ‘아름다운 행동’이라 번역했지만, 실제로 여기서의 ‘행(行)’은 ‘보시’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의 ‘묘(妙)’라는 글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할 때의 묘와 항상 의미적으로 상통해 있는 글자며, 그것은 통속적 인식을 벗어난, 즉 지혜의 인식을 거친 후에 획득되는 상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무주(無住)’라는 말은 ‘부주열반(不住涅槃)’ 혹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는 대승의 개념에서 도출되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 nirv..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바로 이 절에서 정종분(正宗分)은 피크를 이룬다. 이것은 불타의 무아론(無我論)의 본의로 회귀하자는 보살운동의 캣치프레이즈이기도 한 것이다. ‘Return to Buddha!’ 역사적으로 보살의 의미규정은 이 한 절에 완료되고 완성된다. 바로 보살됨의 내용이 이 한 절을 벗어남이 없다. 역사적으로 대승의 규정은 이 한 절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이 사상(四相)이라고 하는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
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諸法)이란, ‘법(法)’이라 해서 무슨 대단한 ‘달마’나 ‘진체(眞諦)’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나 유식(唯識)에서 칠십오법(七十五法), 백법(百法) 운운했듯이 그냥 ‘모든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법(法)은 존재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법을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유위적 법(法, 존재)이요, 하나는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무위적 존재다.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후자를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데, 유위법 속에는 또다시 크게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유법(心所有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4카테고리가 있..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바로 여기까지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의 ‘이와 같이’의 내용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즉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한 것이다. 바로 이 3절의 내용이야말로 대승정신의 출발이며, 바로 『금강경』」이 『벼락경』이 될 수밖에 없는 전율의 출발인 것이다. 벼락같이 내려친 대승(大乘)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붓..
3-2.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 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기심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약무색, 약유상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령입무여열반이멸도지. ‘소유(所有)’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있는 바’의 뜻인데, 백화문에서는 이 자체로 ‘일체’라는 뜻이 된다. 다음에 ‘일체(一切)’라는 것이 다시 나오..
3. 대승의 바른 종지 대승정중분(大乘正宗分) 3-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佛告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적합치 못하다. 왜냐하면 『금강경』의 본경에 해당되는 부분(13분 2절까지)에서 이 ‘대승(大乘)’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최초의 혁명적 보살운동이 아직 ‘대승’이라는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t)으로 ‘소승’과 대비되기 이전의 소박한 진리를 이 경(經)은 설(說)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의 대승은 오직 ‘보살’일 뿐이요, ‘선남선녀’일 뿐이요, ‘더 이상 없는 수레(agrayāna)..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唯然世尊! 願樂欲聞.” “유연세존! 원락욕문.”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유연(唯然)’은 단순한 ‘예(唯)’라는 대답의 음사(音寫)에 ‘연(然)’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예’는 붓다의 선포(케리그마)에 대한 보살들의 긍정이다. ‘그러하옵니다!’ 즉 ‘이와 같이’란 내용이 설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열음’이다.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다. 긴장이 사라진다. 갈등구조들이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진리는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유(Enjoyment)의 대상이다. 존재는 곧 향유, 즐김인 것이다. 즐길 수 있을 ..
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佛言: “善哉! 善哉! 須菩堤!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如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얼마나 강력하고 단호한 붓다의 말씀인가? 좋다! 좋다! 나는 네 말대로 못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여금체청(汝今諦聽)’에서 ‘여(汝)’는 ‘너’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
2-3.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지혜는 마음의 문제다! 2-2절에서의 질문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의 라집역도 산스크리트 원문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맛보다 라집본의 맛이 더 명료하고 그 의취가 깊다.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란 불전에서 매우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특별히 선택된 승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보통사람들’의 뜻이고, 여기서는 ‘보살’(구도자求道者)의 다른 표현..
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세존!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산스크리트 원문을 무시하고 집본(什本)을 그대로 볼 때에 ‘희유(希有)’는 세존(世尊)을 수식하는 형용구로 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의 뜻이 될 것이다. 세존(世尊)은 이미 상설(詳說)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호칭으로 부를 때는 ‘세존(世尊)’이라는 말을 쓰고, 구체적인 문장의 주어로 쓰일 때는 ‘여래(如來)’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집(羅什)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숙달된 맛에서 생겨난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불(佛), 세존(世尊..
2.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선현계청분(善現啓請分) 2-1. 이 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時, 長老須菩堤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시, 장로수보제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이백불언: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4자의 제약 때문에, 수보리(須菩提)라는 3글자 이름을 쓸 수 없으므로, 그것을 줄여 표현한 것이다. ‘선현(善現)’은 바로 ‘수보리(須菩提, Subbūti)를 의역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후에 현장(玄奘)은 바로 이 의역을 채택하였다. ‘세존(世尊)’과 같은 것은 ‘박가범(薄伽梵)’이라..
통석(痛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나는 매우 엄격하고도 신실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우리어머니는 기독교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민족의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개화(開化)의 세기를 사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성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그리고 학교 가기 전에 안방윗목 문턱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면 한 구절당 10원을 탔다. 그리고 못 외우면 종아리를 맞았다.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나의 고전에 대한 소양은 이렇게 해서 길러진 것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기초 소양도 우리 모친이 이렇게 해서 길러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신나게 외운 것으로 ‘산상수훈(Sermo in mont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가장 완정한 형태..
앉아서 들어야 들린다 제일 마지막 표현인 ‘부좌이좌(敷座而坐)’는 라집(羅什)의 위대성을 잘 드러내주는 명번역 중의 명번역이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면, ‘이미 마련된 자리에 앉아, 양다리를 꼬고, 몸을 꼿꼿히 세우고, 정신을 앞으로 집중하였다.’로 되어 있다. 이미 설정된 자리에 쌍가부좌를 틀고 등을 세우고 입정(入定)하였다는 뜻인데, 현장(玄奘)은 이러한 원문에 충실하여 ‘어식후시(於食後時), 부여상좌(敷如常座), 결가부좌(結跏趺坐), 단신정원(端身正願), 주대면념(住對面念)’이라고 구구한 문자를 늘어놓았다. 집(什)【앞으로 꾸마라지바(鳩摩羅什)를 약(略)하여 집(什)으로 쓰기도 한다】의 위대성은 바로 문자의 간결함과 상황적 융통성이다. 특정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보다는 불특정의 장소에 방석이나 자..
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그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잔잔한 영화 속에 클로즈엎 되어 나타나는 컷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하나둘씩 스러져간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번뜩이는 금강의 지혜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 속에서 설파(說破)되었다고 하는 사실의 파라독스다. 가장 일상적인데 가장 벼락 같은 진리가 숨어있다고 하는 긴장감을 이 붓다의 행동은 보여 준다. 의발을 거두어들이고,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는 이 모든 평범한 의례가 바로 금강의 지혜에 번뜩이는 자가 바로 금강의 지혜를 설(說)하려는 그 순간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
1-3.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於其城中, 次第乞已, 環至本處, 飯食訖.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식글. 우리말은 세조언해본을 많이 따랐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의(文義)를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그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1분 3절은 바로 그러한 이미지가 명료하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새벽에 먼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난 비구승들이 가사를 챙겨입고 바리를 들고 1km 떨어진 대성(大城) 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차례로 밥을 빌고, 다시 기원(祇園)의 숲으로 돌아오는 평화롭고 웅장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차제(..
1-2.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나의 국역은 세조본 언해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수양대군 세조께서는 마지막 ‘걸식(乞食)’을 1~3절의 첫머리에 붙도록 끊어 읽었다.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어떻게 끊어 읽든지 그 의미상에 대차는 없으나 나는 ‘입성(入城)’과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너무 뜻이 반복되므로,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뒤로 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주어의 표현이 달라졌다. 앞에서는 ‘불(佛)’이란 표현을 쓰고, 여기서는 ‘세존(世尊)’이란 표현을 썼다..
라집과 산스크리트원본 금세기 일본의 대불교학자라 할 수 있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동경대학 인도철학과 중심으로 활약】는 역으로 의정(義淨) 외의 타5본(他五本)에 보살ㆍ마하살이 없으므로 범본의 ‘보살ㆍ마하살’ 부분이 후대의 첨가라고 못박았다. 나카무라의 이와 같은 생각은 『금강경』 전체 텍스트와 그 전체 의미를 고려하지 못하고 부분만을 천착한 데서 생겨난 명백한 단견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기영은 이 단견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불교연구원(韓國佛敎硏究院)에서 나온 이기영(李箕永) 번역(飜譯)ㆍ해설(解說)의 『반야심경』ㆍ『금강경』(1978 초판, 1997 개정판)은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ㆍ키노 카즈요시(紀野一義) 역주(譯註)의 『반야심경(般若心經)』ㆍ『금..
1,250명에 대해 우선 큰 비구들 1,250명이라는 숫자부터 문제다. 왜 하필 1,250명인가?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 역대주석가들의 신통한 논의가 별로 없다. 원시불교 교단의 구성멤버의 수로서 관념적으로 그 숫자를 구성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 비추어, 해인사나 송광사 같은 대찰의 규모에 비견해보아도, 큰 비구스님들 1,250명이라는 숫자는 좀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기원정사의 규모로 볼 때 도저히 1,250명의 스님들을 한자리에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초기승가의 규모가 큰 스님 1,250명 정도가 한자리에 모일 만큼의 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기원정사 본당이 7층짜리 건물이었고, 또 오늘 발굴된 기단의 주춧돌의 규..
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에서 앞의 ‘여(與)’는 우리말의 ‘~과’에 해당되는 전치사이다.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은 그 전치사의 목적이며, 맨 끝의 ‘구(俱)’가 본동사이다. ‘구(俱)’는 ‘더불어 계시었다.’ ‘같이 생활하였다’는 의미이다. ‘중(衆)’은 여기서는 우리말의 ‘들’에 해당되는 복수격일 뿐이다. ‘대(大)’는 산스크리트 원전의 문맥으로 비추어볼 때,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 ‘득도(得道)의 깊이가 있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훌륭한 비구들 1,250인)’이라는 말은 좀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내용은 불교적 진리의 최고봉의 간략한 통찰이..
기원정사(祇園精舍) 붓다 당대의 코살라왕국의 군주는 파사익왕(波斯匿王), 즉 쁘라세나지뜨(Prasenajit)였다. 설화적인 이야기겠지만, 파사익왕은 싯달타와 생년월일이 같다 하고, 또 싯달타가 성불한 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성불한 싯달타를 만나는 순간 그에게 감화를 입어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념적으로 보나, 정치적 관계로 보나 이 두 사람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붓다의 인격의 위대성과 함께, 그 위대함을 위대함으로 인지할 줄 아는 당대의 통치자들의 큰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사익왕은 초기승가의 절대적인 외호자(外護者)였다. 바로 파사익왕은 국도(國都)인 슈라바스띠(사위성)에서 살고 있었다. 파사익왕에게..
사위국(舍衛國)과 서라벌(徐羅伐)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佛在舍衛國孤樹給孤獨園)’이란 문장은 정확한 사실적 고증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상상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내가 생각키에는 여기서 말하는 ‘사위국(舍衛國)’은 곧이어 뒤에 나오는 ‘사위대성(舍衛大城)’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분명 국(國)과 성(城)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城)은 국(國) 속에 있는 성곽도시의 개념이다. 사위국(舍衛國)은 여기서는 바로 코살라왕국을 가리킨다. 역사적 붓다가 소속해 있던 샤캬종족의 카필라바쯔는 작은 종족(tribe) 단위의 종족집단정치체제였고, 그것은 보다 거대한 집단인 부족(部族, clan)에 속해 있었다. 당대의 부족은 큰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전제군주체제인 왕국(王國)과 ‘상가’ 혹은 ‘가나’라고 ..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일시(一時) 제일 먼저 소명태자가 나눈 분(分)의 이름을 설(說)하겠다. 소명태자의 분명(分名)은 글자수를 모두 네 글자로 맞추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약간의 무리가 있는 상황도 있다...
신우(辛禑) #高麗史133卷-列傳46-辛禑1-00-00-0000 辛禑一. #高麗史133卷-列傳46-辛禑1-00-01-0000 ○辛禑小字牟尼奴旽婢妾般若之出也. 或云: “初般若有身滿月旽令就友僧能祐母家産*能佑{能祐}母養之未期年兒死能祐恐旽讓旁求貌類者竊取隣家隊卒兒置諸他所告旽曰: ‘兒有疾請移養.’ 旽諾. 居一年旽取養于家以同知密直金鋐所賂婢金莊爲乳媼般若亦未知爲非其兒也.” 恭愍王常憂無嗣一日微行至旽家旽指其兒曰: “願殿下爲養子以立後.” 王睨而笑不*荅然心許之旽密令其黨吳一鶚爲書祈洛山觀音云: “願令弟子分身牟尼奴福壽住國.” 及旽流水原王語近臣曰: “予嘗至旽家幸其婢生子毋令驚動善保護之!” 旽旣誅王召牟尼奴納明德太后殿謂守侍中李仁任曰: “元子在吾無憂矣.” 因言: “有美婦在旽家聞其宜子遂幸之乃有此兒.” 後王欲以牟尼奴爲嗣請就學太后不欲曰: “稍長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