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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363. 한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363. 한

건방진방랑자 2020. 6. 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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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한가(漢歌)

오랑캐를 쫓았으니 한() 나라 노래 부르는 소리만이 있다는 것이다.

 

한가용비사수활(漢家龍飛泗水闊)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상정장(上亭長)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각반렴산(閑却半簾山)

문을 닫고 산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간(韓幹)

당 현종(唐玄宗) 때의 이름난 화가(畫家)로서 특히 인물(人物)과 안마(鞍馬)의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패(曹霸)를 사사(師事)하였으나 뒤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독보적 존재가 되었으며, 옥화총(玉花驄)ㆍ조야백(照夜白) 등의 말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상우록(尙友錄)

 

한간마도(韓幹馬圖)

한간은 당 나라 남전(藍田) 사람인데 당서(唐書)』 「명화기(名畫記)에는 대량(大梁) 사람으로 되어 있다. 현종(玄宗)이 큰 말을 좋아하여 어구(御廏)에는 사십만 필이나 되었는데 그 중 준마(駿馬)를 한간이 모두 그렸는데 고금의 독보가 되었다. 소식(蘇軾)의 한간마십사필시(韓幹馬十四匹詩)가 있다.

 

한강백(韓康伯)

()의 한백(韓伯). 강백(康伯)은 그의 자이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추운 겨울에 자기 어머니가 저고리를 만들어주면서 빨리 다림질을 하라고 하고, 계속하여 바지를 만들려고 하자, 강백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까닭을 물으니 강백이 대답하기를, “이 다리미 속에 불이 있으니까 다리미자루까지 따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위에다 따뜻한 저고리를 입었으니 그 따뜻함이 점차 아래까지 내려올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그 어머니는 강백을 특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진서(晉書)』 『한백전(韓伯傳)

 

한강투석(漢江投石)

한강에 돌 던지기란 말로, ‘지나치게 미미(微微)하여 전혀 효과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개광명원(漢改廣明園)

한 선제(漢宣帝)가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무덤을 개장(改葬)한 것을 말한다. 무덤의 이름은 원래 도원(悼園)인데 광명(廣明)의 성곽 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광명원이라고 가칭한 것이다. 한서(漢書)63

 

한거부(閒居賦)

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냄. 옛 사람들이 허다히 세상에 숨어 한가롭게 살기를 좋아하는 뜻에서 한거부(閒居賦)를 쓴 이들이 많았다.

 

한거부(閑居賦)

() 나라 때 반악(潘岳)이 지은 문장의 이름으로, 이것은 대개 세상 일을 다 잊어버리고 한정하게 지내는 뜻을 서술하고 있다.

 

한걸(寒乞)

의복이 남루한 걸인을 뜻하는 말이다.

 

한경기(韓景琦)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 또는 동고(東皐). 본관은 청주.

 

한계승추(韓洎繩樞)

승추(繩樞)는 기둥에 노끈으로 지도리를 매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가리킨다. () 나라의 한계는 그의 형 한부(韓溥)와 함께 문장을 잘하여 명망이 있었는데, 한계는 늘 형을 경시하여 우리 형님의 글은 승추와 같아서 겨우 비바람만을 막을 뿐이고, 나의 글은 아름다운 오봉루(五鳳樓)를 꾸밀 수 있다.” 하니, 한부는 촉()에서 생산되는 좋은 종이를 주면서 시를 지어 말하기를 형은 이 종이를 얻었으나 전혀 쓸데가 없기에 너의 오봉루 꾸미는 것이나 도우려 한다[老兄得此全無用 助汝添修五鳳樓].” 하였다. 송사신편(宋史新編)

 

한고(漢錮)

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한고(漢皐)

산의 이름이다. ()의 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초()에 가는 길에 한고대(漢皐臺) 아래를 지나다가 두 여자를 만나 두 구슬을 찬 것을 보고 그 구슬을 청하여 얻었다. 한시외전(韓詩外傳)

 

한고선자패경요(漢皐仙子佩瓊瑤)

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놀새 저 한고대(漢皐臺) 밑에 올라 두 여자를 만나니 옥을 차고 있었다. 교보가 눈짓하여 정을 돋우니, 두 여자가 찬 것을 풀어 주었다.” 한시외전(漢詩外傳)한고(漢皐)는 산 이른다. 호북성(胡北省) 서북.

 

한고연패(漢皐捐佩)

()의 정교보(鄭交甫)가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을 만나, 그들에게 그대의 패물(佩物)을 갖고 싶다.” 하자, 두 여인이 정교보에게 패물을 주므로, 교보는 그 패물을 받아 품속에 간직하고서 10여 보()쯤 가다 보니 패물이 없어졌고, 두 여인도 없어졌다는 고사이다.

 

한곡편양휘(寒谷徧陽暉)

() 나라 재상 송경(宋璟)이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밟고 가는 곳마다 따스한 봄볕이 묻어나온다(有脚陽春)고 일컬어졌던 고사가 전한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卷下

전국시대(戰國時代) 추연(鄒衍)이 연() 나라의 한곡(寒谷)에 가서 율관(律管)을 취주(吹奏)하자 기후가 따뜻해져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논형(論衡)』 「한온편(寒溫篇)

 

한공애태전(韓公愛太顚)

한공(韓公)은 당() 나라 한유(韓愈)를 이르는데,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太顚)이라는 중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주고 작별을 하기까지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한유가 불씨(佛氏)를 숭봉(崇奉)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한유가 상서(尙書)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한공연압구(韓公宴狎鷗)

한공은 조선 세조 때의 상신 한명회(韓明澮)를 이르는데, 한명회가 일찍이 압구정(狎鷗亭)을 짓고 거기서 노닐었으므로, 갈매기와 친하기만 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한공오궁(韓公五窮)

한공은 당() 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키고, 오궁(五窮)은 한유가 지은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을 말한다.

 

한공월(韓公鉞)

() 나라 한금호(韓擒虎)가 대장이 되어 진() 나라를 쳐서 멸하였는데, 도끼()는 임금이 출정(出征)하는 대장에게 내려주는 것이다.

 

한공탄순양(韓公呑荀楊)

한공은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한유(韓愈)인데, 유학문장(儒學文章)으로서 맹자(孟子)의 후계라 자칭하고 순자(荀子)양웅(揚雄)을 정상(精詳)하지 못하다고 비평하였다.

 

한관(漢關)

중국의 변새(邊塞), 즉 변방을 말한다.

 

한관위의(漢官威儀)

() 나라 조정 관원들의 복식(服飾)과 전례(典禮), 제도(制度), 번성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1광무제기(光武帝紀), “사례(司隷)와 요속(僚屬)들이 보고는 모두들 기쁨을 금치 못하였으며, 늙은 아전들은 혹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금 한관의 위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하였다.

 

한관의(漢官儀)

전한(前漢)이 망한 지 10여 년만에 한() 나라를 광복(光復)하려는 군사가 일어났는데, 유수가 관들을 설치하여 삼보(三輔)로 지나가니 늙은 백성들이, “오늘날에 야 한관(漢官)의 의기를 볼 줄을 몰랐다.”고 기뻐하였다.

 

한굉(韓翃)

당 나라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군평(君平)이다. 대력(大歷) 십재자(十才子)의 한 사람이다.

 

한교악지위린(韓蛟鱷之爲隣)

당 나라 때 한유(韓愈)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어 가 있을 적에 악어가 백성들을 침범하여 해를 끼치자, 악어문(鱷魚文)을 지어 악어를 물리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구(韓歐)

당송팔가(唐宋八家)의 일원인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를 합칭한 것이다.

 

한구(寒具)

방한용(防寒用)의 의복을 말한다.

 

한구(韓駒)

() 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자창(子蒼). 소철(蘇轍)에게서 수업하였고, 벼슬은 저작랑(著作郞)을 거쳐 강주지사(江州知事)에 이르렀음. 저서에는 능양집(陵陽集)이 있다.

 

한구이보가봉류(韓仇已報可封留)

장량(張良)은 본시 한()의 세족(世族)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진()에 대항하여 일어났다가 한 고조(漢高祖)를 만나 진을 멸하고 나중에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한궁비(漢宮妃)

() 나라 때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을 말한다.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이라는 이백(李白)의 시로 더욱 유명하다.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3 王昭君

 

한기(韓琦)

송조(宋朝)의 명신.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송사(宋史)卷三百十二

 

한난염량(寒暖炎凉)

차가움과 따뜻함, 더움과 서늘함 곧, 흐르는 세월

 

한남재자(漢南才子)

조식(曹植)을 말하는데 그가 업하(鄴下)에 있었다.

 

한녀금전규효경(漢女金鈿窺曉鏡)

한녀(漢女)는 한수(漢水)의 여신. 아름다운 여자가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한다는 뜻이다.

 

한다폭소(寒多曝少)

맹자(孟子)』 「고자(告子), “천하에 손쉽게 생장하는 식물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게 하고 열흘 동안 춥게 한다면[一日暴之 十日寒之] 제대로 생장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단(邯鄲)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서울. 전하여 조 나라를 가리킨 말이다.

 

한단가청구(邯鄲駕靑軥)

한단(邯鄲)은 당()의 이필(李泌)이 지은 황량몽(黃梁夢)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노생(盧生)을 가리킨다. 한단의 나그네였던 노생은 허술한 단갈(短褐)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도자(道者)인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은 주머니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것을 베고 자면 자네는 마음대로 부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노생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꿈속에 온갖 부귀공명을 누렸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자기 전에 주인이 누른 기장(黃梁)으로 떡을 찌고 있었는데 아직 다 익지 못하였다. 노생은 하도 허무해서 이상스레 여기자 여옹은 세상일이 모두 이 꿈과 같다.” 했다. 여기에 한단이 나오므로 한단몽(邯鄲夢)이라고도 하며 침중기(枕中記)라고도 한다.

 

한단갱(邯鄲坑)

전국 때 조()의 도읍. ()의 장수 백기(白起)가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대파하고 조의 장수 조괄(趙括)을 쏘아 죽이고 조의 항복한 군졸 45만을 장평(長平)에서 무찔러 죽였다.

 

한단금수사(邯鄲錦繡詞)

삼국 시절 위()의 한단 순(邯鄲淳)을 말한 것으로 그가 창아(蒼雅) 충전(蟲篆) 등을 잘 썼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한단몽(邯鄲夢)

황량몽(黃粱夢)과 같다.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의 비유이다. () 나라 때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여사(旅舍)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궁곤한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은 주머니 속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면 영달(榮達)할 수 있다.” 하였다. 이때에 그 주인은 황량(黃粱)을 찌기 시작하였는데, 노생은 이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꿈속에 미인(美人)인 최씨(崔氏) 여자에게 장가들어 훌륭한 자녀를 많이 낳았고 노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름과 동시에 아들 5형제가 다 벼슬하고 손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나이는 80세가 넘어서 죽었는데, 그 꿈을 깨고 나니 황량이 아직 익지 않았더라는 고사이다. 침중기(枕中記)

 

한단보(邯鄲步)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이다. () 나라의 소년 수릉(壽陵)이 조() 나라 서울 한단 사람의 한가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린 고사.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른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한단불여수릉(邯鄲不如壽陵)

남을 흉내내느니보다는 자기 고유의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 나라 수릉(壽陵)의 어린애가 조()의 수도인 한단(邯鄲)에 와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결국은 자기 나라 걸음마저 잊어버리고 기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한단자(邯鄲子)

한단(邯鄲)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서울이었으므로, 전하여 한단자는 조씨(趙氏)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단주(邯鄲酒)

뜻밖의 사태가 전개되면서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것을 말한다. () 나라에 바친 조() 나라의 술은 진했고 노() 나라의 술은 묽었는데, 앙심을 품은 초 나라의 관리가 이를 뒤바꿔서 바치자, 초왕(楚王)이 화를 내면서 조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공격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장자(莊子)』 「거협(胠篋)

 

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邯鄲)에서 여옹이 낮잠을 자면서 꾼 꿈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부귀란 덧없다는 뜻이다.

 

한단지보(邯鄲之步)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자기의 본분을 잊고 공연히 남의 흉내를 내다보면 두 가지 다 제대로 할 수 없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유의어: 한단학보(邯鄲學步)

 

한단청구하필치(邯鄲靑駒何必恥)

청구(靑駒)는 한단몽에서 나오는 노생의 말() 이름인데, 여기서는 곧 노생을 지칭한다. 아무리 푸른 사기 베개를 베고 노생의 한단몽처럼 허무한 꿈을 꾼다 한들 무어 그리 부끄럽겠느냐는 뜻이다.

 

한단침(邯鄲枕)

인생의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모두 꿈결처럼 헛되고 덧없는 것을 말한다. 이필(李泌)의 침중기(枕中記)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19년에,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노생(盧生)이란 한 곤궁한 소년이 신세타령하는 것을 보고, 자기 베개를 빌려 주면서 이 베개를 베고 자면 그대가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노생이 그 베개를 베고 잤는데 과연, 꿈속에 청하(淸河)에 사는 최씨(崔氏)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또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부귀영화를 일평생 누리고 살다가 꿈을 깨어 본즉, 아까 여관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 않았다. 이에 여옹이 웃으면서 인간 세상의 일도 이 꿈과 마찬가지이다.’ 했다.” 하였다.

 

한단행(邯鄲行)

장자(莊子)』 「추수(秋水)子獨不聞夫壽陵餘子之學行於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라 하였다. 이는 남의 것을 본뜨려고 하다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한당인(漢黨人)

() 나라의 당인이란 곧 후한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에 걸쳐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이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함께 그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들로부터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으로 몰리어, 당시 뜻을 같이했던 1백여 인의 선비들과 함께 피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黨錮傳)

 

한대(漢臺)

공신으로 책록(冊錄)되었음을 말한다. 한대(漢臺)는 바로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공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신 28인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았던 운대(雲臺)를 가리킨다.

 

한대서경(漢代西京)

한 나라가 장안(長安)에 도읍했었는데, 동한(東漢) 때에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장안을 서경이라 했다.

 

한도성어사(漢道盛於斯)

두보(杜甫)의 시에서 한 나라는 문장이 심후해서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유향(劉向), 왕포(王褒) 등 훌륭한 문장가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두시택풍당비해(杜詩澤風堂批解)偶題 註

 

한랑설리파(韓郞雪裏葩)

한유(韓愈)의 질손(姪孫)인 한상(韓湘)은 자신이 준순주(逡巡酒)를 빚어 잠깐 사이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유가 네가 조화를 빼앗아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하자, 한상은 흙을 쌓아 놓은 다음 동이로 덮어놓았다가 잠시 후 동이를 치우니 푸른 모란 두 떨기가 피어 있었는데 그 잎에 작은 금자(金字)구름은 진령(秦嶺)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藍關)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적혀 있었다. 그 뒤 한유가 좌천되어 조주(潮州)로 가다가 남관에 이르러 눈을 만나고서 그 뜻을 깨달았다 하는데, 이때 한유가 멀리서 찾아온 한상에게 준 시 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姪孫湘)에 역시 구름은 진령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읊은 다음 네가 멀리서 온 것은 뜻한 바 있어서임을 아노니, 장강(瘴江) 가에서 나의 유골을 거두어 주게.” 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한로(韓盧)

전국시대(戰國時代) 한국(韓國)에서 생산된 준견(俊犬)의 이른다.

 

한로입지완로적(漢老入地完老謫)

한로(漢老)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말하고 완로(完老)는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말한다. 이덕형은 광해군 5(1613)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양근(楊根)에 내려가 그해에 죽었으며, 이원익은 광해군 7(1615)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

 

한록사(韓錄事)

고려 때의 명사(名士) 한유한(韓惟漢)을 말한다. 그는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면서 조행(操行)이 고상하고 조촐하여 세상일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한유한이 처음 서울에 살았으나, 최충헌(崔忠獻)의 정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장차 난()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는데, 뒤에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三十

 

한롱적(韓隴笛)

농적은 농서 지방의 젓대 소리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화최사인영월시(和崔舍人詠月詩)고을의 누대 어느 곳을 바라볼까 농서의 젓대 소리 이때에 듣네[郡樓何處望 隴笛此時聽].” 하였다.

 

한륙견척(韓陸見斥)

당 헌종(唐憲宗) 한유(韓愈)가 황보박(皇甫鎛)의 배척을 받아 중용(重用)되지 못한 일과 당 덕종(唐德宗) 때 육지(陸贄)가 노기(盧杞) 등의 배척을 받은 일을 말한다. 당서(唐書)卷一百五十七, 卷一百七十六

 

한름진진속(漢廩陳陳粟)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太倉之粟 陳陳相因 充溢露積於外 至腐敗不可食이라고 하였다.

 

한림(翰林)

한림원(翰林院)의 학사.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 고려 후기와 조선에서는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ㆍ봉교(奉敎) 이하의 관원을 한림이라 통칭하였다. ()은 새의 깃, 곧 붓을 뜻하고, ()은 무리로 많이 모인 것을 말한다.

하지장(賀知章)의 추천을 받고 당 현종(唐玄宗)을 알현한 뒤 바로 한림으로 임명되어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이태백(李太白)을 가리킨다.

 

한림취부황학루(翰林醉賦黃鶴樓)

()나라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일찍이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으므로 한림이라 칭한다. 그는 나는 또 그대를 위해 황학루를 쳐부수겠다[我且爲君搥碎黃鶴樓].” 하였다.

 

한마공(汗馬功)

말이 땀을 흘리게 한 공로, 즉 전공(戰功)을 말한다.

 

한만(汗漫)

광대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장자(莊子), “한만과 더불어서 천지 밖을 기약한다.” 하였다.

 

한만유(汗漫遊)

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이인(異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이에 응답하기를 당신은 중주(中州)의 사람이다. ……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汗漫)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구해(九垓)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

 

한매(寒梅)

추운 날씨에 꽃이 피는 매화 나무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조물이 뭇 고목들 소생시키려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찬 매화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누나[化工未議蘇群槁 先向寒梅一傾倒].”라는 표현이 보인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2 재화잠사(再和潛師)

 

한매롱두신(寒梅隴頭信)

친지(親知), 특히 모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의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면서 매화 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신 만나, 농두의 벗 생각하고 부쳐 보내노라[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맹(寒盟)

애공(哀公)이 오 나라 측과 회동하였는데, 오 나라에서 전에 했던 맹약을 다시 굳힐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애공은 자공(子貢)을 시켜 말하기를, “맹약은 신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정하고, 옥과 폐백으로써 상대국을 받들며, 말로 약속을 맺고, 신에게 밝히어 그 약속 지키기를 맹세하는 것이다. 일단 맹약을 맺으면 그것을 고칠 수는 없다. 또 고쳐 맹약 맺을 것 같으면 날마다 맹약 맺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지금 그 쪽에서 전의 맹약을 굳게 해야 한다고 하나, 전에 맺은 맹약을 다시 굳힐 수가 있다면 그 맹약을 식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若可尋也 亦可寒也].”하였다. 이후로 맹약을 파기하거나 잊는 것을 한맹이라 일컫게 되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哀公 12

 

한맹운(韓孟雲)

고려 후기의 문신(文臣) 한수(韓脩). 맹운(孟雲)은 그의 자()이다. 문과(文科)를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를 역임하고 뒤에 청성군(淸城君)에 피봉되었다. 문장과 서법(書法)에 능하였다.

 

한면(漢沔)

한수(漢水)와 그 상류인 면수(沔水). 형주(荊州)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무가사(漢武歌詞)

한 무제(漢武帝)의 가사.

 

한문(寒門)

북극의 산이나 북문을 말한다.

 

한문공(韓文公)

() 나라 중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이름은 유(), 자는 퇴지(退之).

 

한문석로대(漢文惜露臺)

노대(露臺)는 임금이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한 문제가 일찍이 이 노대를 지으려고 기술자를 불러 견적을 빼본 결과 백금(百金)이 들게 되므로, 문제가 이르기를 백금은 중산층 십호(十戶)의 재산에 해당되니, 어찌 이 대를 만들겠는가.” 하고, 그만두었다. 사기(史記)』 「문제기(文帝紀)

 

한문절공(韓文節公)

시호가 문절이고 호가 복재(復齋)인 고려 때의 명신 한종유(韓宗愈)를 말한다.

 

한반장(漢盤掌)

한무제(漢武帝)는 한 나라 제5대 황제이며 승로반(承露盤)은 신선이 되기 위하여 이슬을 받아먹는 그릇. 무제는 신선을 좋아하여 구리로 승로반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20길이나 되고 크기가 열 아름이었다. 이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고는 옥가루를 섞어 마시어 신선되기를 바랐다. 한서(漢書)卷六 효무제기(孝武帝紀)三輔故事

 

한발(旱魃)

가뭄의 재앙을 일으킨다는 신화 속의 여신.

 

한발(捍撥)

금은(金銀)이나 상아(象牙)로 장식한 비파(琵琶)를 타는 채를 말한다.

 

한부(恨賦)

() 나라 때의 문인 강엄(江淹)이 지은 부인데, 고인(古人)들이 비색한 시운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탄식하여 지은 글로서, 매우 애절하기로 유명하다.

 

한비세난(韓非說難)

세난(說難)30권으로 된 한비자(韓非子)중의 한 편명으로 임금에게 유세하기 어려운 점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이다. 진왕(秦王)이 한비자의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한() 나라를 공격하면서까지 그를 보려고 하자, 한 나라가 그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와 순자(荀子) 밑에서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의 모함에 걸려 하옥되었고 끝내는 이사가 보낸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三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한비장군(漢飛將軍)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 이광(李廣)을 말한다. 그가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부임하자, 흉노(匈奴)한비 장군이 왔다.”고 하면서 모두 피하고 몇 년 동안이나 침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서(漢書)』 「이광전(李廣傳),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

 

한빙지옥(寒氷地獄)

불가에서 말하는 팔한지옥(八寒地獄). 곧 찬 얼음으로 고통을 받는 큰 지옥을 말한다.

 

한빙처(韓凭妻)

() 강왕(康王)이 한빙의 아내 하씨의 미색을 탐내어 마침내 한빙을 붙잡아다가 벌로 고역(苦役)을 시키고는, 하씨는 자신이 차지했다. 하씨는 남몰래 사람을 시켜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시구(詩句)로 사랑을 위해 죽고자 하는 결심을 암시했다. 한빙은 편지를 본 후 오래지 않아 자살하였고, 하씨 역시 소식을 들은 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 유언을 남겨 한빙과 같은 무덤에 장사지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송 강왕은 이것을 알게 된 후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고의로 그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장사지내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의 무덤에서는 하룻밤 사이 상사(相思)의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서 뿌리는 아래에서 서로 얽히고, 가지는 위에서 엇갈렸고”, 원앙 한 쌍이 그 나무 위에 서식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떠나지 않고 목놓아 슬프게 울어대는데,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이 원앙 한 쌍이 다름 아닌 한빙 부부의 혼령이라고들 했다.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라는 뜻이다.

 

한사료치척격최(漢使聊馳尺檄催)

한 무제가 선우대(單于臺)에 오른 뒤 18만 대군을 거느리고 위엄을 떨치면서 선우에게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북궐에 걸어 놓았다. 선우 그대가 싸울 능력이 있으면 천자인 내가 직접 변경에서 기다릴 것이요, 싸우지 못하겠거든 속히 와서 신하로 복종하라[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矣 單于能戰 天子自將待邊 不能 亟來臣服]”하였다. 한서(漢書)6

 

한사마(韓司馬)

북제(北齊)의 한궤(韓軌)를 말한다. 대사마(大司馬)로서 유유(蠕蠕)를 정벌(征伐)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북제서(北齊書)卷十五 한궤전(韓軌傳)

 

한사마(韓司馬)

한퇴지(韓退之)는 당 나라 한유(韓愈). 배도(裴度)가 회서(淮西)를 칠 때에 한퇴지(韓退之)가 행군사마(行軍司馬)의 직책으로 종군(從軍)하였다.

 

한사사(漢使槎)

한 무제(漢武帝) 때의 장건(張騫)이 대완(大宛)ㆍ강거(康居)ㆍ월지(月支)ㆍ대하(大夏) 등 멀리 서북방의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 뗏목을 타고 하수(河水)를 따라 올라갔다 한다.

 

한사승사(漢使乘槎)

한 무제(漢武帝) 장건(張騫)이 사신 길에 뗏목을 타고 다녔다는 고사가 있다.

 

한사진동(漢士秦童)

한 나라 방사(方士)는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신선을 찾던 방사이고, () 나라 동자(童子)진시황(秦始皇) 때에 서불(徐巿)를 따라 삼신산(三神山)으로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갔던 동남 동녀(童男童女)를 말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한산(寒山)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한산사(寒山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가 유명하다.

 

한산백(韓山伯)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

 

한산자(寒山子)

() 나라 때 천태산(天台山)에 있던 고승(高僧).

 

한산팔경(韓山八景)

한산(韓山)의 여러 가지 경치를 말한다.

 

한산편석(韓山片石)

뛰어난 문사(文士)가 떠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한산은 곧 한릉산(韓陵山)을 이른다. () 나라 때 유신(庾信)이 남조(南朝)로부터 맨 처음 북방(北方)에 갔을 적에 당시 북방의 문사인 온자승(溫子昇)이 한릉산사비(韓陵山寺碑)를 지었으므로, 유신이 이 글을 읽고 베끼었는데, 남방의 문사가 유신에게 묻기를, “북방의 문사들이 어떠하던가?” 하니, 유신이 대답하기를, “오직 한릉산에 한 조각 돌이 있어 함께 말을 할 만하더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조야첨재(朝野僉載)卷六

 

한상(韓湘)

() 한유(韓愈)의 종손(從孫)으로서 도술(道術)에 심취하여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옴. 속선전(續仙傳)한상이 도술을 좋아하며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흙을 모으고 화분을 뒤짚자 바로 꽃이 피면서 꽃잎 위에 구름은 진 나라 고개를 가로질러 가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남관에 눈보라치니 말이 가려 하지 않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시구가 나타나게 하였다. 한유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에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가면서 중도에 눈보라를 만났는데, 이때 한상이 눈을 무릅쓰고 찾아 왔기에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이었다.” 하였다.

 

한생탈득동귀지(韓生奪得東歸志)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을 불태우고 동으로 돌아가려 하니 한생(韓生)관중(關中)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關中阻山河四塞, 地肥饒, 可都以霸].” 하였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사기(史記)卷七 항우본기(項羽本紀)

 

한선(寒蟬)

울지 못하는 매미로, 벙어리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일을 만나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선자(韓宣子)

한 선자는 춘추(春秋) 시대 진() 나라 대부 한기(韓起)를 말한다. ()은 그의 시호이다. 각궁(角弓)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 나라 임금이 친족(親族)을 멀리하고 소인들을 가까이 하므로, 친족들이 임금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선자가 일찍이 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 대부 계 무자(季武子)와 연향(宴享)하는 자리에서 서로 수호(修好)를 잘하자는 뜻에서 시경(詩經)소아(小雅) 각궁(角弓)내 형제 내 겨레만은 서로 멀리하지 마시오[兄弟婚姻 無胥遠矣].”라는 구절을 읊었던 고사이다. 좌전(左傳)昭公 二年

 

한섬노토(寒蟾露兎)

(羿)의 처()인 항아(姮娥)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나 두꺼비가 되었다는 전설과 옥토끼가 달 속에서 약초를 찧느라 절구질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천문지(天文志)초사(楚辭)天問 注

 

한소이두(韓蘇李杜)

한유(韓愈)소식(蘇軾)이백(李白)두보(杜甫)를 말한다. 한유는 당 헌종(唐憲宗) 때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쫓겨났으며, 소식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쫓겨나고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하옥되는가 하면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방으로 좌천되었으며, 이백은 영왕 린(永王璘)의 막좌(幕佐)로 있다가 도망친 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평정되자 사죄(死罪)에 걸려들었으나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야랑(夜郞)에 유배되었으며, 두보는 당 현종(唐玄宗) 때 사건에 연루되어 화주(華州)로 쫓겨났다가 검남(劍南)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한속(寒粟)

한기(寒氣)와 같은 뜻이다.

 

한수(寒羞)

성찬(盛饌)을 먹은 다음 먹는 과일 따위를 말하는데, 시원한 음식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한수(韓壽)

() 나라 도양(堵陽) 사람으로 상당한 미모(美貌)를 갖추었고 사공(司公) 가충(賈充)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자 가충의 딸이 한수를 좋아하여, 가충이 천자(天子)에게 하사(下賜)받은, 서역(西域)에서 보내온 기향(奇香)을 훔쳐다 한수에게 주었는데, 이 기향이 한번 묻으면 그 향기가 한 달이 지속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卷四十 가충전(賈充傳)

 

한수(漢水)

한양을 말한다.

 

한수명향(韓壽名香)

한수(韓壽)는 진() 나라 도장(道場) 사람으로 미모가 있었는데, 사공(司空) 가충(賈充)의 아전이 되었다. 충의 딸 오()가 수를 보고 좋아하여 저녁에 수를 불러 들여 기향(奇香)을 주었다. 이 향은 서월(西越)에서 조공한 것으로 사람이 한 번 품으면 한 달이 지나도 향기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황제가 충에게만 준 것을 그 딸이 훔쳐서 수에게 주었다. 충이 이 일을 알고 수를 사위로 삼았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卷四十

 

한습(寒拾)

() 나라 고승(高僧)인 한산(寒山)ㆍ습득(拾得)이다.

 

한승(寒蠅)

한유(韓愈)송후참모부하중막(送侯參謀赴河中幕)시에 이르기를 묵묵히 앉아 예전 담소하던 일 생각하면, 어리석기가 추위 만난 파리 같으리.[默坐念語笑 癡如遇寒蠅]” 하였다. 두보(杜甫)의 시에 멍청하긴 흡사 추위 만난 파리꼴[癡如遇寒蠅].”이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4 送侯參謀赴河中幕 / 인용: 詰楊吏(허격)

겨울의 파리.

무력하고 아둔한 사람.

 

한승상(漢丞相)

조조(曹操)를 말한 것.

 

한식(寒食)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이 날은 불을 금하고 찬 밥을 먹는다. 민간에서는 조상의 묘에 성묘를 한다.

 

한식상묘(寒食上墓)

한식일(寒食日)의 성묘.

 

한신(韓信)

()의 명장으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다음 그 공로로 초왕(楚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봉되었다. 국사는 온 나라가 추앙하는 선비란 뜻인데, 소하(蕭何)는 일찍이 한신을 칭찬하여 둘도 없는 국사라 하였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신내배수(韓信乃背水)

배수진(背水陣)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다. 한 나라 때 한신(韓信)이 조군(趙軍)과 싸울 적에 군사 1만 명으로 배수진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까닭을 한신에게 묻자, 한신은, “병법에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다음에야 살 길이 생기고, 망할 곳에 놓아둔 다음에야 살아날 길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사기(史記)卷九十二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신도앵(韓信渡甖)

한 고조(漢高祖) , 위왕(魏王)이 배반하자 한신(韓信)이 위 나라를 치기 위해 임진(臨晉)을 건널 적에 목앵부(木罌艀)에다 군사들을 태워 인솔하고 건너가서 위왕 표()를 사로잡고 위 나라를 평정했던 일을 말한다. 사기(史記)卷九十二 사기(史記)卷九十二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실의관(漢室衣冠)

왕망(王莽)이 한 나라를 찬탈하여 세운 신() 나라 말에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이 낙양(洛陽)에 장차 도읍을 정하려 하면서 유수(劉秀)를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임명하여 미리 그곳에 가서 궁부(宮府)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수는 자기가 거느린 관속들에게 옛 한 나라의 의관을 입히는 등 과거의 제도를 복구하였는데 그것을 본 늙은 관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한 나라 관원의 풍모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卷一 上 광무제기(光武帝紀)

 

한아(寒鴉)

반포(反哺)의 의리를 아는 까마귀로, 어미를 사모하는 효자를 비유한 말이다.

 

한안(汗顔)

부끄럽거나 두려운 일을 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는 사람을 말한다.

 

한안국(韓安國)

()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 무슨 일로 죄를 받게 되었을 때 몽현(蒙縣)의 일개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 안국에게 욕을 하였다. 이때 안국은 그에게 말하기를, “죽은 재라고 해서 다시 불붙지 말라는 법이 있다더냐[死灰獨不複然乎]?” 하자 옥리가 대답하기를,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리라[然即溺之].”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국은 다시 양()의 내사(內史)가 되자 당시 옥리였던 전갑은 그를 찾아가 육단사죄(肉袒謝罪)를 하였다. 사기(史記)卷一百八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한양도(漢兩都)

전한(前漢)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니 서도(西都), 후한(後漢)은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니 동도(東都)이다.

 

한양역력앵무주(漢陽歷歷鸚鵡洲)

당나라 최호(崔顥)황학루(黃鶴樓), “청천역력한양수, 방초처처앵무주[晴川歷歷漢陽水芳草萋萋鸚鵡洲].”라는 글귀가 있다.

 

한언환(韓嫣丸)

금으로 만든 탄환을 가리킨다. () 나라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인 한언이 무제로부터 여러 차례 하사품을 받아 몹시 부유하였다. 항상 금으로 탄환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다녔는데 새를 잡으러 갈 적마다 탄환을 10여 개씩 잃어버렸으므로 장안의 아이들이 그 탄환을 줍기 위해 한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4

 

한여(翰如)

이시우(李是釪)의 자.

 

한영(閒詠)

한가롭게 읊조림.

 

한예용라(漢隷龍拏)

한예(漢隷)는 한 나라 때에 성행했던 예서체(隷書體)를 말하고, 용이 끈다는 것은 곧 자획(字劃)의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한옥(寒玉)

맑고 차고 깨끗한 물건을 비유한 것으로, 흔히 물[]ㆍ달[]ㆍ대나무[] 등에 비유된다.

 

한옹(韓翁)

() 나라 때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진 부필(富弼)을 말한다.

 

한와(漢瓦)

한 나라 시대 궁전(宮殿)에 사용했던 기왓장에 새긴 문자(文字)를 가리킨 말이다.

 

한와당(漢瓦當)

와당(瓦當)’()’()’인데 토기(土器)의 와()이다. () 나라 시대의 것을 말한다.

 

한우(寒竽)

오래도록 불지 않고 버려 둔 피리를 이르는데, 소식(蘇軾)의 화자유시(和子由詩)나는 이제 학문을 폐한 게 한우와 같아서 오래도록 불지 않아 막히어 소리가 안 나려 하네[我今廢學如寒竽 久不吹之澁欲無].”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四

 

한우충동(汗牛充棟)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 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한원(翰院)

한림원(翰林院)과 예문관(禮文館)의 겸칭. 한원(翰苑).

 

한원(翰苑)

한림원(翰林院)의 약칭으로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이다.

 

한원(漢源)

은하수의 근원이다. 중국의 전설에 은하수는 바다와 서로 통해 있다고 전하는데,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해마다 8월이 되면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한번은 뗏목을 타고 은하에 당도하여 견우와 직녀를 보았다 한다. 흔히 하늘에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로 한 무제(漢武帝)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나가면서 한수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무제의 명에 따라 뗏목을 타고 근원을 찾아가 견우와 직녀를 보고 돌아왔다는 말이 있다. 박물지(博物志)卷三

 

한원지(韓元之)

원지(元之)는 한인급(韓仁及)의 자()이다.

 

한월(漢月)

중국의 중원(中原) 사람이 변방 외국에 나가 고국을 그릴 때 쓰는 말로 고국의 달이란 뜻이다.

 

한월사편(韓鉞謝篇)

한월과 사편(謝篇)한신(韓信)의 도끼와 사영운(謝靈運)의 시편을 말하는데, 옛날 장군들은 도끼를 잡고 출정(出征)하였다.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장으로 항우(項羽)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사영운은 진()의 문장가로 시문이 뛰어났으므로 곧 문무 겸전(文武兼全)하여 문반(文班)인 서반(西班)과 무반(武班)인 동반(東班)의 직책을 겸직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위공(韓魏公)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현상(賢相) 한기(韓琦). 자는 치규(稚圭).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한기가 일찍이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 이름했었다.

 

한유(漢劉)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왕망(王莽)의 찬탈(簒奪)로 망한 한()을 그가 중흥시켰다.

 

한유(韓柳)

문장가인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키는데 일대 문호(文豪)로 유명했다.

 

한유(韓愈)

() 나라의 유학가(儒學家)이며 문장가.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창하였으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벼슬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일찍이 사설(師說)을 지어 사도(師道)를 말하였다.

 

한유송원화(韓愈頌元和)

원화는 당()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반적(叛賊)들을 토평(討平)하여 나라를 중흥시키자, 한유(韓愈)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를 지었다.

 

한음(漢陰)

() 나라 강하(江夏) 사람인 두감(杜淦)의 호이다. 자칭 한음노인(漢陰老人)이라고 칭하고 사수(泗水) 부근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15년 만에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수모를 견디고 벼슬하는 자들은 대부분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은 수모를 견디고 나는 노력을 한다.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에 비하면 내가 낫지 않은가.” 하였다.

한수의 남쪽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호이다.

 

한음기심(漢陰機心)

한음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자공(子貢)이 기심(機心)에 대해 비웃음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자공이 남쪽으로 초() 나라를 유람하고 진() 나라로 돌아오다가 한음(漢陰)에서 어떤 노인이 마침 밭을 관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땅굴을 파고 우물로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들고 나와서 물을 주고 있었는데, 끙끙거리면서 힘을 무척 많이 들였는데도 효과는 적었다. …… 밭을 관리하던 노인이 성난 듯 얼굴빛을 바꾸고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우리 선생에게 들은 바로는,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쓰는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機心)이 있게 되고, 기심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순백(純白)함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고, 순백함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하게 된다.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알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서 몸을 구부린 채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한음무기심(漢陰無機心)

한음은 중국의 지명. 이 땅에 살던 한 노인이, 온 세상 사람들의 간사한 지혜와 교묘한 기계가 날마다 그 본심과 순박한 풍기를 해친다 하며, 기계(機械)를 만들어 쓰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일부러 단지로 우물물을 퍼서 채소에 주었다. 기심(機心)은 간교한 마음. 장자(莊子)』 「천지(天地)

 

한음병(漢陰甁)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한음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물동이를 안고 우물로 들어가 물을 퍼 가지고 나와서 채소밭에 물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한의(漢儀)

신국(新國)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빼앗았다가, 뒤에 광복(光復)하려는 군사들이 일어나 유수(劉秀)가 보낸 관리들이 한관(漢官)의 의식(儀式)을 다시 회복하니, 백성들이 감탄하여, “오늘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줄을 몰랐다.” 하였다.

 

한의(寒衣)

추울 때 입는 옷.

 

한이부(韓吏部)

한 이부는 곧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를 이른다. 석고가(石鼓歌), “對此涕淚雙滂沱라 하였다.

 

한일참광정(寒日慘光晶)

이백(李白)의 시에 길게 호읍(號泣)하며 엄친과 이별하노라니, 일월도 참담하여 빛을 잃은 듯[長號別嚴親 日月慘光晶].”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1 古風

 

한자(韓子)

전국시대(戰國時代) 한비자(韓非子). 또는 그가 지은 책 한비자(韓非子)를 말하기도 한다.

 

한자개진간힐자(韓子豈眞奸黠者)

한유(韓愈)관직도 없는 우리 동야, 너무도 쇠한 백발의 몸. 조금 교활한 나 한자, 장송에 붙은 덩굴인양 스스로 부끄러워[東野不得官 白首誇龍鍾 韓子稍姦黠 自慙靑蒿倚長松].”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한창려집(韓昌藜集)5 醉留東野

 

한자애련(韓子愛聯)

한자는 당 나라의 한유(韓愈)이며, 그가 석정연구시(石鼎聯句詩)를 짓고 서문(序文)을 붙인 것을 말한다. 한창려집(韓昌黎集)補遺

 

한자파리완(韓子玻瓈盌)

한유(韓愈)의 시에 두세 명 도사가 그 사이에 자리잡고, 파리 옥배(玉盃)에 영액을 자꾸 따라 마시누나[二三道士席其間 靈液屢進玻瓈盌].”라고 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4 遊靑龍寺 贈崔大補闕

 

한적(漢賊)

중국과 중국을 거역하는 역적을 묶은 말로, 제갈량(諸葛亮)후출사표(後出師表)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漢賊不兩立].”는 대목에서 나온다.

 

한전(漢傳)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을 가리킨다.

 

한전영잠련(漢殿領箴連)

한나라 시대에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이라는 찬송하는 송을 왕포(王褒)라는 사람이 지은 일이 있다.

 

한절(漢節)

()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갈 때 가지고 갔던 절월(節鉞)을 말한다. 소무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은 채 온갖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소제(昭帝) 때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 「소무(蘇武)

 

한절(漢節)

() 나라의 천자가 준 부절(符節), 사신을 가리킨다. 한 나라 때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굽히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사신이 가지고 가는 부절을 한절이라고 하게 되었다.

 

한절치월(漢節馳越)

남월(南越)의 왕 조타(趙佗)가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스스로 왕이 되어 무제(武帝)라고 칭하였는데, 문제가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어 타이르자 드디어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신()이라 칭하였다. 사기(史記)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한정부(閒情賦)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있었음을 말한다. 한정부(閒情賦)는 진()의 은사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글이다.

 

한정영동상(漢廷迎董相)

한정은 한() 나라 조정을 말하고, 동상(董相)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한 나라 무제가 즉위하여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는데, 동중서는 현량(賢良)으로 뽑혔다.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요지로 대책을 올리면서 육예(六藝)의 과()공자(孔子)의 학술을 배우지 않은 자는 등용하지 말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동중서를 강도상으로 삼았다. 한서(漢書)56 동중서전(董仲舒傳)

 

한제(漢帝)

서한(西漢) 12() 212년과 동한(東漢) 12196, 도합 24408. 역조(歷朝) 중 국조(國祚)가 가장 길었다.

 

한제음풍(漢帝吟風)

한 무제(漢武帝)가 분수(汾水)에 배를 띄우고 흔연히 중류(中流)에서 추풍사(秋風辭)를 지어서 늙음을 탄식하였다.

 

한제폐북관(漢帝閉北關)

한제(漢帝)는 한 나라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간 뒤에 무제가 흉노와의 관계를 단절한 일을 말한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 「소무(蘇武)

 

한제횡분악(漢帝橫汾樂)

한 나라 무제(武帝)가 늘그막에 산서성(山西省)의 분()하수에서 뱃놀이하면서 추풍가(秋風歌)를 지어서 노래하였다.

 

한졸(悍卒)

경한지졸(勁悍之卒)의 준말로, ‘강하고 날랜 병사를 말한다. / 인용: 豪民論(허균)

 

한주가곤이(漢主嫁昆夷)

여기서 말한 곤이(昆夷)는 흉노(匈奴) 묵특(冒頓)을 가리키는데 한() 나라가 흉노에게 자주 침공을 당하자 유경(劉敬)이 적장공주(適長公主)를 그들에게 시집보내어 화친을 하자고 제의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卷九十九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한주상림(漢主上林)

() 나라의 어원(御苑)인데, 그 속에 동물원도 있다. 사마상여(司馬相如)상림부(上林賦)에 천자(天子)의 사냥하는 광경의 성대한 것을 말하였다.

 

한죽(汗竹)

사책(史冊)을 가리킨다.

 

한중(漢中)

섬서성(陝西省)의 서남쪽을 흐르는 한강(漢江; 양자강의 큰 지류) 북안의 험한 땅으로서 진()나라를 멸한 유방이 항우(項羽)로부터 분봉(分封)받아 한왕(漢王)을 일컫던 곳이다.

익주(益州)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을 말한다.

 

한중(韓衆)

제인(齊人)으로 단약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한중진미(閒中眞味)

한가한 가운데 깃드는 참다운 맛이란 뜻이다.

 

한진(韓鎭)

() 나라 진산(鎭山)으로 양산(梁山)을 말한다. 주 선왕(周宣王) 때 제후인 한후(韓侯)가 재능이 출중하여 아래에서 주위의 소수 부족을 단결시키고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한혁(韓奕)하늘 높이 솟은 양산에 하우(夏禹)께서 다스렸는데 한후가 밝은 덕 지녀 천자는 글에게 사명을 내렸네[奕奕梁山 維禹甸之 有倬其道 韓侯受命].” 하였다. ()과 혁()자는 상통한다.

 

한척삼(漢尺三)

우리나라의 법령을 말한다. 한 나라 때 석 자 되는 죽간(竹簡)에 법령을 기록하였다.

 

한청(汗靑)

푸른 대나무의 진액을 빼낸다는 말로, 한간(汗簡) 또는 살청(殺靑)이라고도 하는데, () 나라 유향(劉向)별록(別錄)살청이란 대나무를 곧게 다듬어 대쪽을 만들어서 글씨를 쓰게 하는 것이다. 햇대나무에는 진액이 있어 잘 썩고 좀이 잘 들므로 대쪽을 만들 경우 모두 불 위에 쬐어 말린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후대에는 사책(史冊) 또는 그 저술의 완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 인용: 竹塢記(박지원)

 

한칠국(漢七國)

한 경제(漢景帝) 때에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곱 나라. 즉 오()ㆍ초()ㆍ조()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한침진경(漢寢震驚)

후한서(後漢書)7 효환제기(孝桓帝紀)“6월 을묘일에 헌릉(憲陵)의 침옥(寢屋)에 천둥이 쳤다.”고 하였는데, 그 주()이때 양 태후(梁太后)가 섭정하고 있었는데 그 오빠 양기(梁冀)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면서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억울하게 죽이자 천하가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하였다.

 

한팽(韓彭)

() 나라 고조(高祖) 때의 장수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가리킨다.

 

한팽견지소유집(韓彭見躓蕭猶縶)

한 고조(漢高祖)는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공신(功臣)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반역죄로 몰아서 죽이고 승상(丞相) 소하(蕭何)도 조그만 혐의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한팽역자취(韓彭亦自取)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여 장량(張良)ㆍ소하(蕭何)와 함께 삼걸(三傑)로 칭해졌는데, 뒤에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여후의 속임수에 떨어져 목이 잘렸다. 사기(史記)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팽월은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 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한신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효수(梟首)되었다. 사기(史記)90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한팽저해(韓彭菹醢)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두 사람이 다 한 고조(漢高祖) 부하의 명장(名將)으로 수훈(殊勳)을 세웠으나 그 뒤에 의심을 사 잡혀 죽었다.

 

한평동살안(閒評僮殺雁)

장자(莊子)가 어느 집에를 갔었는데, 그 집 동자가 기러기가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 줄을 모르니 죽입시다.” 하니, 그 집 주인이 울 줄 모르는 놈을 죽여라.” 하였다. 장자(莊子)의 제자는 장자(莊子)에게 주인의 집 기러기는 재능이 없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장자(莊子)나는 재주와 재주 없는 그 중간을 택하겠다.” 하였다. 장자(莊子)』 「산목(山木)

 

한풍(寒風)

말을 잘 알아본다는 상고 때 전설상의 인물이다.

 

한풍루(寒風樓)

무주(茂朱) 객사(客舍) 앞에 있던 누각이다.

 

한풍자(寒風子)

옛날 말 관상을 잘 보는 사람. 여람(呂覽)』 「관표(觀表)

 

한한(汗汗)

물의 광대한 모양

 

한한(暵暵)

햇빛이 물건을 말리는 모양, 더운 모양

 

한항금속(寒缸金粟)

등잔의 기름이 다 떨어져서 심지 끝이 타들어 가며 맺히는 불똥을 말한다. 한항은 기름이 없는 등잔으로, 한등(寒燈)이라고도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등잔 기름이 다하면서 불꽃도 짤막, 새벽 물시계 소리 역시 길게 드문드문[焰短寒缸盡 聲長曉漏遲].”이라는 표현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15 不睡

 

한해(瀚海)

몽고의 고원(高原) 동북쪽에 있는 북해(北海)를 뜻하기도 하고 사막의 별칭이기도 하다.

북쪽에 있다고 하는 큰 바다를 말한다. 이설(異說)이 분분한데, 지금의 호륜호(呼倫湖)를 지칭하는 것인 듯하다.

 

한해(翰海)

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한해소조(韓海蘇潮)

퇴지(退之) 바다 동파(東坡) 조수. 이기경(李耆卿)의 문장정의(文章精義)에 이르기를 韓如海 柳如泉 歐如瀾 蘇如潮라 하였다.

 

한헌제(漢獻帝)

헌제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로 조조(曹操)에게 계속 핍박을 당하다가 그 아들 조비(曺丕)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주고 말았다. 후한서(後漢書)卷九

 

한혈기(汗血驥)

천리마의 별칭이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복하고 한혈마를 얻어 왔다.” 하였다.

 

한혈마(汗血馬)

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는 대원(大宛)의 준마(駿馬)이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이사 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대원왕(大宛王)의 머리를 베고 한혈마를 잡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한형주(韓荊州)

한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後集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

 

한화야초(閑花野草)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절로 자라는 야생 화초를 말한다.

 

한화유가이(漢貨猶可餌)

() 나라의 심유경(沈惟敬) 등이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왜적과 화의(和議)를 맺은 뒤 그들의 군사를 본국으로 철수시킨 것을 말한다.

 

한화일종명(寒花一種名)

한화(寒花)는 추운 계절에 피는 꽃으로, 보통 국화를 가리킨다. 야국(野菊)도 국화 종류의 하나라는 말이다.

 

한황(漢皇)

중국 황제의 범칭(汎稱)으로, 중국에서 중세에는 한나라가 대표적인 왕조(王朝)이다.

 

한후(豻侯)

들개 가죽으로 장식한 과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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