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란 무엇인가?
그런데 윤회는 고대인의 우주관(cosmology)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논설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종교와 과학을, 철학과 종교를, 그리고 신앙과 이성을 적대적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하여 있다. 이것은 후대의 서구 계몽주의 정신에 의하여 파악된 왜곡된 희랍정신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전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이 한 조류를 제외하면, 모든 사상에 있어서 종교, 과학, 철학, 이런 것들은 대립을 일으키지 않는다. 결국 모든 과학적 성취도 그 궁극적 배면이나 그 최초의 동기에는 반드시 종교적 통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인간의 삶을 윤회하는 것으로 파악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윤리적인 동기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단순하게 그들이 우주의 과학적 실상을 추구한 결과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의 윤리적 요청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당할 것이다. 물론 윤리적 요청은 해탈이라고 하는 종교적 목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윤회의 사상이 본시 정복자인 아리안족 계통의 사상이었는지, 피정복자인 토착민인 드라비다족 계통의 사상이었는지도 사계의 분분한 논의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윤회의 사상은 정복자인 아리안들의 구미에 매우 잘 맞는 것이었다. 즉 윤회의 사상은 피지배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윤회의 사상은 염세론이나 숙명론 같은 세계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윤회는 고(苦)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윤회하는 삶이 곧 고라는 것이다. 즉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윤회하는 삶이 매우 즐겁고, 복락의 영원한 행복을 준다면 윤회를 벗어날려고 발버둥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윤회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려는 ‘해탈’(목샤)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윤회하는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하는 종교적 이상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가 흔히 불교의 제일명제처럼 외치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은 하등의 불교적 창안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는 삼법인과 같은 고정문구는 초기불교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윤회를 설정하는 세계관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지극히 평범한 언사일 뿐이다. 일체개고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의 굴레에 속해 있는 모든 삶이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여기 우리가 싯달타의 세계인식을 지배한 주요한 개념으로서, 목샤(해탈), 삼사라(윤회)와 더불어 꼭 추가해야 할 말이 있다. 까르마(karma), 즉 업(業)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업이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행위(action)를 뜻한다. 중성 명사 까르만의 단수주격형인 까르마는 ‘한다’라는 의미의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명사로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행위라는 것은 공간적으로 독립되거나 시간적으로 단절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말에 보통 업을 업만으로 말하지 않고 꼭 ‘업보’(業報)라고 말하는데, 이 업보라는 말에 있어서 보(報)는, 업(action)은 반드시 일정한 결과(fruits)를 남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보만을 말할 때는 과보(果報)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즉 업이라는 개념은 행위가 남기는 여력이나 과보의 개념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업을 업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업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업은 반드시 선보를 낳고, 악업은 반드시 악보를 낳는다는 생각은 싯달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싯달타의 사유에 깔려있는 인도인 전체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나의 삶의 고(苦)ㆍ락(樂)은 나의 지난 업의 보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오늘의 나는 또 끊임없이 업을 짓고 있다. 행위를 아니하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나의 행위는 반드시 나의 미래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업보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나의 현재의 선업은 미래의 낙과(樂果)를, 나의 현재의 악업은 미래의 고과(苦果)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의 선업에 대하여 고과가 수반되고, 나의 악업에 대하여 낙과가 수반되는 현실의 세태를 우리는 종종 목격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선업-낙과, 악업-고과의 필연적 인과의 고리가 무너져 버릴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나의 현존재를 과거존재나 미래존재로부터 분리하지 않는 전체적 연속성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이 전체적 연속성이 나의 아트만의 윤회이다. 나의 선업의 보장은 반드시 언젠가 윤회의 굴레 속의 미래세(未來世)에서라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티벹 말로 ‘인과를 모르는 놈’(ley day sam mi shi khen)이라고 하면 아주 상스러운 욕설이 된다고 한다. 나의 현존재의 모습을 순간순간 과거와 미래의 전체적 인과의 고리 속에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구원이란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 인도인은 간지스 강변에서 죽으면 해탈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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