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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대담 1일차, 3. 석굴과 성상주의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대담 1일차, 3. 석굴과 성상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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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판타의 석굴

 

 

저는 인도에서의 첫날밤을 뭄바이의 하버 베이(Harbour Bay)에서 지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을 열어보니 아라비아해면으로 반사되는 찬란한 햇살 저편에 그 유명한 게이트웨이 어브 인디아(Gateway of India)가 보이더군요. 첫날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게이트웨이 뒷켠을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섬 관광을 가는 배가 있다기에 별 생각 없이 올라탔습니다. 동북쪽으로 9km가량을 가니까 엘레판타라는 섬(Elephanta Island)에 도착하더군요. 저는 이곳 유적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었습니다. 엘레판타는 학구적으로 소개된 책자가 거의 없이 방치된 유적이었으니까요.

 

열대의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긴 계단을 올라가 섬의 중턱에 있는 석굴에 당도했을 때, 무방비상태로 갑자기 바라보게 된 석굴의 웅장한 모습에 저는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게 석굴이구나! 도무지 그 규모의 방대함과 돌조각의 섬세함, 그리고 인도인의 신화적 상상력의 스케일, 그리고 통돌을 깎아 들어간 석굴의 공간디자인적 감각의 탁월성에 저는 그만 아연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그토록 위대한 예술품이 너무도 형편없이 방치되어 지금도 열심히 파손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사람들이 16세기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이 위대한 신상조각들을 사격의 조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니 참으로 인간의 무지란 끔찍한 것이지요.

 

 

 엘레판타 동편 성소 입구(윗사진), 20개의 석주가 있는 마하데바 사원 본당 내부(아랫사진), 조명조건과 필자의 사진장비가 부실해서 엘레판타에서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없었다. 유감스럽다.

 

 

석굴암

 

 

성하께서 한국에 오시게 되면 딴 곳은 몰라도 꼭 한 군데는 가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조선의 옛 왕국 신라의 고도 경주토함산 꼭대기에 있는 흔히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석불사(石佛寺)라는 곳이지요경덕왕(景德王) 창건 당시 이 석굴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김대성(金大成, 700~774)의 발원에 의하여 이 석굴사원의 공사가 시작된 것은 경덕왕 10(751)이었다. 그 뒤로 약 30년에 걸쳐서 공사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黃壽永 編著, 石窟庵(서울 : 藝耕産業社, 1980), pp.18~20.. 동해바다에서 첫 일출의 햇살이 떠오르는 순간 이 석굴 속의 본존불의 이마를 비추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온 전신이 보드라운 여인의 살결처럼 살아 움직이지요. 지금은 전실이 지어져서 이런 광경을 볼 수가 없지만 저는 아홉 살 때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두 발로 토함산에 올라가 이런 감격스러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연화좌 위에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가사를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뜨리고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결가부하고 앉아있는 이 본존의 근엄한 자태는 세계불교미술사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정치한 환조석불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은 4계절의 일기 차이가 심하고 겨울에 바위들이 동파되기 때문에 인도와 같이 거대한 산이 통돌로 되어있는 그러한 자연현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석질 그 자체의 성격이 자연상태에서 통돌을 깎아 들어가는 식의 석굴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토함산 석굴은 석재를 다듬어 기하학적인 돔의 형식으로 쌓아올리고 그 안에 이상적 불토의 어떤 판테온을 조성한 것입니다. 본존 뒤에 자리잡은 십일면관음보살의 자애롭고 화려한 자태는 도무지 인간의 작품이라 말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서있는 십대제자의 리얼한 모습, 그리고 입구의 사천왕과 금강역사의 다이내믹한 모습 등은 그 절제된 조형성, 기하학적 정합성, 압축된 원융미에 있어서 세계불교미술사에 있어서 추종을 불허하는 걸작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평소 우리나라 석굴암의 특유한 맛은 돈황ㆍ운강ㆍ용문석굴의 화려하고 장엄한 맛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며 그 단아한 품격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뭄바이 엘레판타섬의 방치된 유적들을 보는 순간, 그 건조물의 스케일감과 신화적 사건을 나타낸 자유분방한 표현의 다양성, 그리고 우주의 창조ㆍ유지ㆍ파괴를 상징하는 시바의 삼면얼굴, 마헤사무르띠(Mahesamurti, Triple-Headed Shiva)의 장쾌한 모습은 도무지 형언키 어려운, 저의 영혼을 압도하는 어떤 거대한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을 던져주는 그러한 걸작품이었습니다마하데바사원(The Temple of Mahadeva)이라고 불리는 이 엘레판타섬의 성전의 특징은, 인도의 여타 사원이 대개 에클렉틱한(혼합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반하여, 오직 시바신 일신에게만 봉헌되었다는 것이다. 이 성전안의 모든 것이 오로지 시바신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곧 이 시대에 이 지역에 이미 독립적인 시바숭배교(Saivism)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0개의 거대한 석주가 떠받치고 있는 십자형의 공간구조(the cruciform temple)의 정남면 석벽에 자리잡고 있는 본존에 해당되는 이 마헤사무르띠(Mahesa-murti)의 장쾌한 얼굴은 삼면이지만 실제로는 5면의 얼굴로서 이해되고 기술된다. 본당을 들어서서 마주볼 때, 오른쪽 얼굴이 평정의 따뜨뿌르샤(Tatpursha), 왼쪽 얼굴이 진노의 아고라(Aghora), 그리고 중정의 영원한 모습이 바마데바(Vamadeva, 반데배Vandeva로 불리기도 한다)이다. 그런데 부조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바마데바의 정 뒷면에 사됴자타(Sadyojata)가 있고, 머리쪽 정수리에는 또 이샤나(Ishana)가 있다고 한다. 이 다섯 얼굴은 시바의 다섯 측면, 다섯 성격이나 무드를 나타낸다고 한다. 창조(creation), 유지(maintenance), 파괴(destruction), 감춤(concealment), 사랑(favour), Owen C. Kail, Elephanta The Island of Mystery (Bombay : Taraporevala, 1984), p.12. 그리고 Carmel Berkson, Elephanta The Care of Shira, Delhi :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999도 엘레판타 사원에 관한 희소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마헤사무르띠

 

 

 시바의 자웅동체의 모습, 불룩한 젖가슴 곁으로 내려뜨린 슬림한 왼손 팔뚝과 대비적으로 반대편의 남성적인 오른손은 난디를 누르고 있다. 터질듯이 풍만한 저 가슴의 표현을 보라! 시바의 마력은 모든 대립적 요소들을 융화시키는 힘에 있다.

 

 

 카일라사 산을 들어올리려고 용쓰는 랑카의 마왕 라바나를 가볍게 누르고 앉아, 아랑곳 없이 파르바티와 희롱하고 있는 시바. 작품의 팍손이 극심하다.

 

 

부록 12.1. 석굴암 본존의 자태

 

 

석굴암의 본존불과 그 주변의 감실. 감실의 존재는 석굴의 깊이를 주며 천연동굴의 자연미를 자아낸다. 이 석굴암의 성립연대가 아잔타 석굴의 하한선에서 불과 2세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할 때 신라 석공들의 손길의 세련미와 그 기하학적 조형성의 완벽미는 세계불교미술사의 한 경이라고 할 것이다. 그 근엄한 자태의 그윽함은 가히 비견할 곳이 없다.

 

석굴암 본존의 자태는 전통적으로 규정해온 32상의 모든 뛰어난 속성을 구현한 이상적 형상이다. 그러나 신라석공의 손길은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환조이며 편단우견의 옷자락이 등 뒤로 흘러내린 맵씨의 자연스러움은 비단결보다 더 고운 표현이다. 이런 섬세함은 인도ㆍ중국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촬영에 협조해주신 불국사ㆍ석굴암의 스님들께 감사드린다.

 

 

 

 

부록 12.2. 관세음보살과 달라이라마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잘 외우는 반야심경에는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보는 것이 자유자재로운 보살이라는 뜻이다. 관세음이란 문자 그대로 하면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본다는 뜻인데 하여튼 중생의 고통과 더불어 하며 이 세상에 끝까지 남아 세상을 구원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관세음보살은 원래 남성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지극히 여성적이다. 온갖 화려한 영락(구슬)을 몸에 휘감으며 비치는 샤리가 흘러내리는 사이로 섬세한 손가락이 우리를 매혹시킨다. 왼손은 활짝 핀 꽃이 담긴 정병을 젖가슴 밑으로 치켜들고 있고, 발은 활짝 핀 연꽃을 살짝 딛고 있다. 관음의 특징은 두상에 있다. 본래의 얼굴 이외로 두부에 11개의 얼굴이 있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은 많으나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은 여러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깔깔 웃는 얼굴, 통곡하는 얼굴, 진노하는 얼굴, 관대한 얼굴, 자비로운 미소의 얼굴그 모든 얼굴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일러 ‘11면관음보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석굴암의 관음보살상은 이 속세에서 인간이 표현한 지고의 모습이다. 살포시 내리뜬 눈 밑으로 오똑 솟은 광대뼈, 밋밋한 콧날 밑에 야무진 입술을 흐르는 잔잔한 미소, 그 얼굴은 젖가슴에 파묻혀 지켜보았던 엄마의 모습이며 아주 평범한 조선여인의 인종(忍從)과 자애의 소담한 모습인 것이다.

 

내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벹민중에게는 각인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7세기에 티벹에 소개되었다. 달라이라마가 사는 포탈라궁의 포탈라라는 이름도 본시 관세음보살이 사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티벹말로 관음은 슬퍼하는 얼굴의 보살’(Spyan-ras gzigs)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록 12.3. 석굴암에서의 추억

 

 

이 사진을 여기 공개할 수 있게 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아홉살 때 석굴암의 모습인데 이 사진의 위대성은 동해일출의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를 한 줄로 비추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을 담았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에는 전실이 없었다. 신라인의 석굴암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의 추억은 아련하면서도 생생하다. 엄마 주먹 속에 쥐어진 고사리 손을 따라 꼬불꼬불 넘고넘고 또 넘어도 여명이 밝을 줄 몰랐던 토함산! 그 토함산의 정상에서 동해바다를 바라 보았을 때 옥색 수평선의로 방울방울 맺힌 빛방을이, 점점 모여 달걀의 노른자위처럼 뭉치더니 둥실둥실 떠올랐다. 갑자기 찬란한 빛줄기를 발하자 부처님의 이마를 한줄로 비추었고 은 몸이 살아있는 여인의 감추어진 피부처럼 뽀이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터지는 경탄의 함성 속에 우리는 카메라 셧터를 눌렀다.

 

뒷줄이 아버지와 엄마, 앞줄 왼쪽으로부터 큰누나(전 교육부장관), , 작은누나. 이 사진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다가 기연으로 결국 이 사진을 찾아냈을 때의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고 엄마는 노환으로 와병중이시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엄마ㆍ아버지의 추억을 어젯 새벽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 의식 속에서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생ㆍ노ㆍ병ㆍ사 윤회의 희비가 아닐는지.

 

 

 

 

부록 12.4. 환조와 본존불에 대해

 

 

여기 환조(丸彫)라는 말은 부조(浮彫)와 대비되어 쓰이는 미술사의 용어인데, 그것은 좌우앞뒤 4면을 모두 조각한 통조각 작품이라는 뜻이다. 초기불상들을 잘 살펴보면 환조같이 보이는 것도 실상은 뒷면이 처리가 안 된 부조(relief)일 경우가 많다. 벽에 조각해 들어갈 때는 환조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간다라ㆍ마투라의 불상들이 모두 부조작품에 속하는 것이며 환조는 그 이후의 발전이다. 벤자민 로울랜드 지음, 이주형 옮김, 인도미술사(서울 : 예경, 1999), p.125.

 

그리고 석굴암의 본존(本尊)의 명호(名號)에 관하여 여러가지 논의가 있으나 이 본존은 그냥 소박하게 석가모니 부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황수영(黃壽永)선생은 석굴암 본존이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모든 자료가 선생 자신의 관념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꿰어 맞춘 방계적 자료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모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석굴암을 애써 정토신앙의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정토신앙의 전통이 강한 일본불교학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계적 자료에 의하여 석굴암 본존이 아미타불임을 역설하는 것은 석굴암을 창건한 사람들의 의도를 기복신앙적인 발원에 귀속시킬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석굴암의 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십대 제자를 거느린 역사적 싯달타의 32색신(色身, rūpa-kāya)이며, 마귀를 누르고 성도한 법신불의 모습이며, 관세음보살과 같은 세상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수없는 보살들의 보신불이다. 석굴암은 이러한 삼신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불법의 완정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유형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며 특정 종파의 성격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본존 뒤에 있는 관세음보살도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그려졌다면 대세지(大勢至) 보살과 함께 협시되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토사상과는 무관하게 이미 AD 1세기부터 형성된 관음사상의 독자적인 표현일 뿐이다.

 

선대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엄밀한 비판적 검토가 요청된다. 황수영선생의 주장은 黃壽永 編著, 安章憲 寫眞, 石窟庵, pp.29~33에 잘 요약되어 있다.

 

 

 

 

신화 속에 사는 인도인

 

 

우리나라 석굴암의 본존불의 상호에서 감지하는 고요한 적막 속에 살포시 눈썹을 내리감은 영원한 평화의 느낌, 그러한 느낌의 보다 장쾌한 깊이를 엘레판타의 마헤사(위대한 주, the Great Lord)의 모습에서 저는 발견했습니다. 영원한 명상 속에 살포시 내리감은 눈, 육감적인 도툼한 입술, 기다랗게 내려뜨린 귀, 날카로운 눈썹의 선율, 얼굴보다 더 높게 땋아올린 머리카락의 화려한 더미, 찬란한 목걸이 장식, …… 인도의 어느 곳에서 본 조각의 상호보다 이 시바의 얼굴은 뛰어난 세련미와 웅혼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카일라사 산에서 파르바티와 성교를 하고 있는 시바를 저주하기 위해서 카일라사 산을 번쩍 들어버릴려고 용솟음 치는 랑카의 마왕 라바나(Ravana), 부인을 껴안은 채 가볍게 발꼬락 하나로 지긋이 누르고 앉아있는 여유로운 시바의 모습라바나(Ravana)는 라마(Rama)의 부인 시타(Sita)를 유괴한, 서사시 라마야나의 한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이 조각은 북쪽입구에서 동쪽면으로 두 번째 남면하고 있는 벽에 조각되어 있다. 가슴 아프게도 파손이 너무 심하여 그 원형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 그리고 너무도 짓궂게 바람 피우는 남편 시바를 바람 못피우게 만들게 하기 위하여 파르바티 자신이 시바의 몸 속으로 들어가 창조했다는 시바의 자웅동체의 모습(Shiva Ardhanarishvara)이 자웅동체(the Androgyne)의 시바의 모습에는 여러가지 신화적 설명이 얽혀 있다. 나는 그 중의 하나의 설만을 취한 것이다. Carmel Berkson, Elephanta The Cave of Shiva (Delhi :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999), pp.34~5., 그리고 파르바티와 주사위노름을 하면서 우주를 희롱하고 있는 시바의 모습(Uma-Mehesvara-murti) 등등, 끊임없이 펼쳐지는 신화의 잔치에 저는 인도사람들에게 신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듯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신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자웅동체의 한 몸뚱이에 표현된 터질 듯이 볼룩한 왼쪽의 젖가슴과 히프 위로 기다랗게 내려뜨린 슬림한 팔뚝의 보드라운 선율, 그것과 대비되는 오른편의 우직한 남성의 젖통없는 가슴과 난디(Nandi, 시바가 타고 다니는 황소)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강력한 굽은 팔뚝의 남성적 표현, 너무도 너무도 저의 심미적 감성을 자극하는 명품중의 명품이었습니다.

 

 

영원한 춤꾼 시바(Shiva Nararaja).

시바의 춤은 우주의 창조와 유지와 파괴를 상징한다. 춤추는 시바의 이미지는 아리안 이전의 토속신앙과 관련있다. 춤은 인간을 변화시키며 황홀경으로 인도한다. 춤과 요가는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춤은 불이다. 불은 우리의 아집과 환상과 악업을 다 불살러 버린다. 시바의 춤은 우주의 리듬이며 중심이며 해탈(解脫, mokṣa)이다. 윗사진은 엘레판타의 시바. 머리는 해골과 뱀으로 덮여있으나 얼굴은 평온하다. 파르바티, 인드라, 브라흐마, 비슈누가 지켜보고 있다. 아랫사진은 뉴델리 인도국립 박물관 소장의 12세기 작품.

 

 

우리나라의 석굴암8세기 중엽의 작품인데 이 엘레판타의 석굴은 그보다 한 두 세기 빠른 6.7세기 찰루캬스 왕조시대(The Chalukyas)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이 엘레판타섬의 석굴에는 그 건조의 시대성을 추정할 만한 하등의 단서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지역에 성립했던 찰루캬스 왕조(the Chalukyas, 543~744)시대에 조성된 것인지, 그를 이은 라슈트라쿠타스 왕조(the Rashtrakutas, 752~982)시대 때 완성된 것인지를 확정할 길도 없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우리나라 석굴암과 동시대의 작품이다. Owen C. Kail, Elephanta, pp.2~3..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모든 힌두사원의 석조예술이 바로 대승불교의 불상운동으로부터 자극받고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엘레판타의 석굴만 해도 그 주변의 까네리 불교사원석굴(Kanheri Caves)까네리사원(Kanheri Caves)은 뭄바이의 북쪽 산제이 간디 국립공원(Sanjay Gandhi National Park) 중심부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석굴들도 차이띠야(caitya, 法堂)와 비하라로 조성된 것이며, BC 2세기경부터 AD 9세기경까지 소승ㆍ대승ㆍ금강승의 불교승려들이 꾸준히 지켜온 중요한 승려주거집단이다(one of the larger monastic settlements in India). David Collins, Mumbai (Melbourne : Lonely Planet Publications, 1999), p.155.과 동일한 연계선상에 있습니다.”

 

도올선생은 정말 다각적으로 사물을 관찰하시는군요. 미술사방면에서도 탁월한 견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엘로라의 한 석굴 앞에서 시바춤을 추고 있는 여인

 

소승, 대승, 아잔타!

 

 

그리곤 곧 아잔타석굴(the Ajanta Caves)을 가보았습니다. 제가 너무도 유명한 그 아잔타에 관하여 뭐 특별히 얘기할 것이 있겠습니까만,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650년경까지 장장 89세기에 걸치는 불교미술, 조각, 건축, 회화의 찬란한 전개를 한 무대에서 굽어볼 수 있다는 감격은 저로 하여금 문헌으로만 접해왔던 불교미술의 프로토타입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틔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잔타석굴을 안내하던 관광가이드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저로 하여금 인류의 종교미술사를 새롭게 정리할 수 있게 만드는 기준을 제공하는 천하의 명언이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저보고 묻더군요,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상의 유무지요. 소승에는 불상이 없고, 대승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가이드가 무심코 던진 이 한미디가 저에게 야기시킨 골똘한 생각들이이발로 제기 요번 인도유적관람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었습니다. 학문이란 때때로 부정확하지만 포괄적인 경구를 통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저희 조선말에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실제로 그 현장을 한번 봄으로써 막연하게 미리 속에서만 개념적으로 그리고 도식적으로 이해했던 많은 추상적 문제들이 일목요연하게 구체화되어 나타나더군요.”

 

여기서 말하는 소승(Hinayana Buddhism)이란 결국 원시부파불교를 말하는 것이겠군요. 소승이란 의미를 남전불교 전체에 적용한다면 소승에 불상이 없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지요. 부파불교도 계속 다양한 전승을 통해 발전한 것이고 따라서 대승적 성향을 흡수했으니까요. 그러나 아쇼카시대까지만 해도 스투파 워십(Stūpa Worship, 탑신앙) 중심이었고, 그 이전에는 분명 불타를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산치대탑이나 바르후트대탑(Bharhut stūpa)에 많은 부도(浮圖)가 그려져 있지만 불타의 인간모습은 없습니다. 보리수나무나 발자국이나 금강좌 등, 그 상징적 표현만 새겨져 있지요.”

 

나는 달라이라마의 불교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불교학의 대가라 할지라도 이러한 논의는 종교적 체득을 넘어서는 어떠한 학문적 인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또 물었다.

 

왜 원시불교시대에 있어서는 불타를 우리와 같은 등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았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싯달타의 열반(涅槃, nirvāṇa) 때문입니다. 그의 열반은 완전한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 mokṣa)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다시 인간의 몸을 지닌 어떤 형상체로서는 환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온전한 열반을 기리는 초기승단에 있어서 붓다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타부였습니다.”

 

그것이 원시경전에, 일례를 들면, 팔리율장 같은 데, 붓다를 등신불로 표현해서는 아니 된다는 그러한 계율이 명시되어 있습니까?”

 

많은 경전에서 붓다는 구체적 형상을 넘어서는 어떤 거룩한 존재라든가, 여래의 몸은 영원한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이후로는 사람도 신도 볼 수가 없다는 등의 추상적 논의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우파시바여, 사라져 버린 자에게는 더 이상 형태가 없다라 한 것도 그 한 예이겠지요석지현 옮김, 숫타니파타(서울 : 민족사, 2001), p.274, 5품의 제7장이다. 南傳24-406~7. No. 1076..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계율로써 명시한 구절은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타를 등신불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원시승가집단내의 일종의 불문율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생담(자타카, Jātaka)을 표현한 본생도(本生圖)에는 물론 싯달타 전생의 보살들 이야기이니까 그 구체적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싯달타 자신의 생애를 표현한 불전도(佛傳圖)에는 불타의 모습이 빠져있습니다이러한 문제를 다룬 사계의 권위로운 저작으로 타카타 오사무(高田修)佛像起源, 東京 : 岩派書店, 1967이 있다. 타카타 오사무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쉽게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岩派新書의 문고판을 내어놓았다. 佛像誕生, 東京 : 岩派新書, 1987. 그런데 이 책은 이숙희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타카타 오사무 지음, 이숙희 옮김, 불상의 탄생, 서울 : 예경, 1994. 타카타의 이 책은 사계의 정평있는 명작이므로 독자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숙희의 번역도 충실하다. 그리고 인도미술 전반에 대하여 포괄적 지식을 주며 원시불교미술을 잘 소개하고 있는 좋은 책이 파이돈 미술 시리이즈에 들어가 있다. Vidya Dehejia, Indian Art, London : Phaidon, 1998. 그런데 이 책도 이숙희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정교한 사진들이 많이 실려있는 좋은 책이므로 독자들의 일독을 권유한다. 불교미술에 관해서는 3장에서 5장까지를 참조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드야 데헤자 지음, 이숙희 옮김, 인도미술, 서울 : 한길아트, 2001. 그리고 쉽게 사서 볼 수 있는 책으로 인도미술사에 관한 좋은 가이드를 하나 더 소개하면: Roy C. Craven, Indian Art, A Concise History, New York : Thames and Hudson, 1997. 3장으로부터 제7장까지 불교미술관계의 설명이 매우 명료하다..”

 

 

 삼도보계강하(三道寶階降下), 바르후트 대탑의 일부, 붓다는 천상ㆍ천하를 마음대로 오르내리는 초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붓다의 형상은 없고 세 사다리 중 가운데 사다리의 제일 윗단과 제일 아랫단에 발자국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BC 2세기 중엽, 캘커타 박물관.

 

 

부록 13. 아잔타 사원

 

 

아잔타는 인도인의 심미적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도대륙의 가장 위대한 조형물의 하나이다. 감정적인 연루가 없이 아잔타석굴을 본다는 것은 천하의 불경이다. 아잔타는 돈황에서 우리나라 석굴암에 이르는 모든 석굴의 아키타입이다.

 

 

 

 

그것은 BC 2세기 소승의 시대로부터 AD 7세기, 엘로라에 바톤을 넘겨주기까지 번창했던 비하라(승방)차이띠야(caitya, 法堂)의 밀집취락이었다. 아우랑가바드의 북서쪽 101km, 잘가온(Jalgaon)의 남쪽 55km 지점에 위치하며 인도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요지였으며 데칸의 문이라 불리었다. 우리나라 하회(河回)와 같이 생긴 와고라강(Waghora River)의 흐름으로 침식된 높이 6m에 이르는 반월형(말발굽형)의 절벽에 구멍을 파들어간 것이다. 지금은 사원과 사원을 연결하는 절벽 밑의 관광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지만 원래는 모든 사원이 각기 강으로 직접 연결된 고립된 형태였다.

 

 

 

 

AD 7세기 힌두이즘의 왕조들이 번창하고 엘로라로 모든 예술가들이 집결되면서 아잔타는 퇴락되기 시작했고 결국 밀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다시 발견된 것은 1819428, 호랑이 사냥을 나왔던 마드라스 주둔의 영국장교 죤 스미스(John Smith)였다. 강안 건너편 절벽 꼭대기에서 제10번 석굴의 돌구멍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윗 사진이 바로 제10번 차이띠야의 내부 석주 양 옆으로 형성되어 있는 회랑의 모습이다. 10번 사원은 아잔타에서 가장 오래된 소승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1200년 동안 인적이 끊어진 데칸의 밀림 속에서 이 장엄한 석주와 찬란한 회화를 발견했을 때의 그 외경을 한번 상상해보라! 스미스의 싸인이 새겨져 있다.

 

 

 

 

10번 석굴의 기둥에 새겨진 보살들의 모습, 아잔타의 벽화는 대체로 자타카, 그러니까 싯달타 전생의 보살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때로는 동물로도 등장. 옆 페이지는 제1석굴의 유명한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의 모습. 오른쪽 어깨위로는 원숭이가 장난치고 있고, 그 위로는 공작새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 어깨위로는 천상의 악사 킨나라(kinnara)가 기타를 치고 있다. 천상ㆍ천하의 모든 유혹 속에서 고요하게 진리에만 몰두하는 보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6번 아잔타 석굴 왼쪽벽에 새겨져 있는 거대한 열반상. 아랫단에 애통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석굴은 제1 석굴과 비슷한 시기, 7세기 초에 건립된 대승사찰이다. 현장법사도 이곳을 다녀갔다.

 

 

이슬람의 형상거부

 

 

인류의 종교사에 있어서 대중문화ㆍ예술과 관련된 가장 큰 잇슈 중의 하나가 결국 신성(Divinity)을 어떻게 시각화(visual representations)하냐는 문제와 되어 있다고 봅니다. 신은 일체의 시각적 표상을 거부한다든가, 인간외적 물체의 상징으로만 나타난다든가,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표상 방법이 있겠는데, 아주 간단히 나누면 아이코닠 이미지(iconic image)와 언아이코닠 이미지(aniconic imagery)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코닉 이미지는 대체로 인간의 형상(anthropomorphic image)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아이콘(icon)이라 하면 대체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베다제식전통에서는 신들에 대한 아이콘적인 형상이 허용되질 않았습니다. 브라흐만(Brahman) 사제들의 제식에 있어서도 제단과 주문ㆍ찬가만 있었을 뿐, 어떤 구체적 신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원시불교도 이러한 베다전통을 따라 이미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든 붓다의 형상화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도 본시 야훼의 형상화를 거부합니다. 모세도 호렙산 떨기에서 타지않는 불꽃만 보았을 뿐이었고, 야훼에게 당신을 누구라 하오리까?’하고 물으니 나는 곧 나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로다.’(I am who I am. 3:14)라고 하고 그 구체적 형상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지성소에는 일체의 형상이 허용되질 않습니다.

 

이러한 형상에 대한 극단적 거부를 표방하는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이란 말 자체가 유일절대신인 알라에게 복종함으로서 마음의 평화(살람)에 도달한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이 유일절대자는 초월신이며, 초월이라는 뜻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알라의 본질과 속성이 피조물과 유추될 수 있는 일체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입니다. 이 초월자ㆍ유일자ㆍ보편자ㆍ창조자ㆍ지배자ㆍ전지전능자인 절대자에 대하여서는 일체의 상대적 형상이 거부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스지드(모스크, 회교 사원)는 텅 비어있는 공간일 뿐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공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나치게 이슬람을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과격한 종교로서 생각하는데, 사실 이슬람종교야말로 유일신관(monotheism)을 말하는 한에 있어서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정결하며 가장 정화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유일절대신인 알라만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나 무함마드나 모세나 붓다나 모든 종교의 개창자들을 예언자, 선지자로만 간주할 뿐이며, 알라가 보낸 사람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니까 아예 아리우스가 말하는 대로 예수에게도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성만을 인정하는 것이죠. 이슬람의 교리는 매우 정직하고 간결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양성을 포용하는 매우 관용적인 종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강령이라 말할 수 있는 6(六信), 알라가 유일하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종족에게 내려진 경전들을 믿으며, 모든 종족에게 나타난 선지자들을 다 믿고 존중한다는 신조가 명기되어 있는 것입니다이슬람 육신(六信)’에 관하여서는 정수일 선생의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깐수 정수일 박사의 이슬람문명산책, ‘종교와 세속생활의 지킴 이슬람교의 여섯 가지 믿음,’ 신동아(서울 : 동아일보사, 200111월호), pp.443~457. 이슬람의 전반적 이해를 위하여 나는 다음의 세 책을 참고하였다. 김용선, 코란의 이해, 서울 : 민음사, 1991. 金定慰, 이슬람사상사, 서울 : 민음사, 1991. Karen Armstrong, A History of God, New York : Ballantine Books, 1993. 이 중 암스트롱의 책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의 4천년의 역사를 추구한 책인데 이슬람부분의 해설이 편견없이 잘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론적 깊이가 있다..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일체의 형상화를 거부한다면 사실 이슬람적 해결은 다원주의적 포용성을 얼마든지 지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상에 대한 거부가 너무 강렬하다 보니까 이종교(異宗敎)의 성상주의(iconography)와 맞부닥치게 되면 그것을 파괴하는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즉 성상파괴주의, 우상파괴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이 바미얀대불(the great Buddha at Bamiyan)을 파괴한 것은 예술가적 심미성의 눈에서 볼 때에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본다면 아이콘은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신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아이코노클라즘의 소행은 이슬람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현상이지요.”

 

마침 이슬람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우리 티벹에도 라사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작은 규모의 무슬림 콤뮤니티가 있습니다. 지난 4세기 동안에 걸쳐 카쉬미르(Kashmir)와 라다크(Ladakh)지역으로부터카쉬미르(Kashmir)와 라다크(Ladakh)는 모두 인도 파키스탄의 국경분쟁으로 끊임없는 불안에 싸여있는 지역이다. 인ㆍ파 쌍방에서 그 영토권을 주장하지만, 현재 인도의 펀잡(Punjab), 히마찰 쁘라데쉬(Himachal Pradesh) 위쪽 최북상에 잠무 앤 카쉬미르(Jammu and Kashmir)라는 하나의 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카쉬미르계곡은 아주 풍족한 토양에 격절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곳이며 17세기 무갈의 황제 자한기르가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여름 별궁을 지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카쉬미르는 지금도 회교도 인구가 60%를 넘는다. 우리가 지금 입는 고급 모직 캐쉬미어는 본시 이 지역에서 생산되던 카쉬미르 숄(Kashmir shawl)16세기부터 유럽에 알려지면서 유명한 브랜드가 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카쉬미르 숄은 본시 야생 염소의 털로서 만든 것이었다. 라다크(Ladakh)는 행정적으로는 잠무 앤 카쉬미르에 속해있지만 독립적 전통을 갖는 또 하나의 문명이다. 서 히말라야산맥과 티벹고원을 연결하는 고지대의 통로로서 지구상의 마지막 샹그릴라(the last Shangri-la)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14세기말에 쫑카파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이래로 티벹불교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이주해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대개 역도(traitors)로서 규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이들을 접촉하면서 세상에 이렇게도 경건하고 점잖고 순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가 할 정도로 교양있고(cultured) 평화로운(peaceful)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티벹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생활하며 티벹사람들과 싸우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불교도들과 결혼하고 인척관계를 맺으며 해피하게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알라신에게로의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 평화를 얻고 사는, 그러면서도 우상숭배적인 미신에 빠지지 않고 담박하게 살 줄 아는 이슬람 고유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티무슬림들 같아요.”

 

달라이라마는 정말 폭이 넓은 인류의 스승이었다. 그는 어느 종교든지 그 훌륭한 장점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성상주의의 확립

 

 

나는 계속 형상(iconic)과 비형상(aniconic), 등신불과 법신불, 대승과 소승의 논제를 계속 풀어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비형상주의적 경건성에 비하여 아주 색다른 표현력을 가진 문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헬라스, 그리스 문명입니다. 크레테섬의 미노아문명에서 출발하여 이방정복자들의 문명을 창조적으로 결합해간 이 그리스 문명은 일찍이 신의 모습을 인성으로 표현하는 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인간주의를 그들의 합리적 사유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초기로부터 아이코노그라피를 발전시킨 것도, 결국 희랍세계와 접목됨으로써 시작된 것이며 예수의 모습도 초기에는 아폴로신상을 닮았던 것인데 로마제국의 제국종교가 된 이후로부터는 희랍의 영향을 받는 로마조각의 영향하에 예수의 모습은 세계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로마황제를 닮은 아이콘(Christ as the imperial reigning Lord)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십자가에서 수난받는 예수의 아이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수난의 예수의 아이콘은 10세기에서부터나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승리를 구가하는 황제적 지배자의 모습에서 고난당하는 단순한 한 인간제물의 모습으로 근원적인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의 아이콘은 르네쌍스ㆍ종교개혁시대를 거치면서보다 인간중심주의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아이콘의 역사에서 매우 특기할 사건은 우상파괴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입니다. 이것은 8~9세기에 걸쳐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난 정치ㆍ종교ㆍ문화적 대사건이었는데, 아이콘을 숭상하는 희랍문화권의 기독교인과, 희랍문명을 벗어나 있는 동방전통 그리고 셈족전통(Easterm or Semitic tradition)기독교인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황제 레오3(Emperor Leol, r. 717~741)는 성상을 숭배하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칙령(two edicts against the veneration of icons in 726 and 729)을 반포하였고 성상옹호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행위는 성상옹호론자들의 단합과 이론적 강화를 꾀할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레오4세의 부인이며 희랍지역출신이었던 황후 이레네(Empress Irene)는 다시 성상주의를 옹호하기에 이르렀지요. 그 뒤 레오5세 때 잠깐 다시 성상파괴론이 부활했지만, 결국 테오필루스 황제(Emperor Theophilus)가 죽고난 이래, 그의 부인 테오도라(the regent-empress Theodora)에 의하여 성상주의는 희랍정교회의 정통으로 요지부동한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먼 훗날 르네쌍스 예술이 만개할 수 있는 초석이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불교의 아이코노그라피는 저도 자세한 정황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 스투파신앙에서 진일보한 어떤 계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모스크 미흐랍(mihrab). 예배의 방향(메카쪽)을 알려주는 벽감(壁龕)일 뿐이다. 아무런 형상도 장식도 없다. 기독교에서처럼 ‘주의 종’으로서 목사(사제)도 인정되지 않는다. 알라와 인간 사이에 일체의 매개자가 인정되지 않는다. 예배시에는 모두 비슷한 흰 옷을 입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도 드러나지 않는다.

 

 

대승운동의 출발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좌부(Theravāda)와 대중부(Mahāsāṅghika)의 분열을 계기로, 대중부가 발전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역사적 정황을 전달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중부도 어디까지나 소승부파불교의 일파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이 곧 바로 대승불교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대승불교 운동에 대중부의 이론이 보다 깊은 영향은 주었을 것입니다. 결국 초기부파불교의 주축이 아라한을 지향하는 상주(常住)의 특수승려집단에 한정되었던 것이라면, 대승불교운동은 아쇼카시대에 극성했던 스투파신앙의 흥기에 따라 파생된 레이맨(layman) 즉 재가 신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중혁신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투파신앙이 일어나자, 역사적 싯달타의 진신의 일부가 담겨져 있다고 간주된 묘역으로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 탑() 주변으로 먼 지역으로부터 와서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이 며칠ㆍ몇 달을 머물 수밖에 없어 자연히 묘역에는 여행객들의 콤뮤니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투파는 본시 승가에서 관리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역의 종족사회에서 창출한 매우 개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이들 스투파 주변의 신도들을 향해 붓다의 본생담(자타카, Jātaka)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설화꾼들이 생겨났고, 이 설화꾼들은 전혀 기존의 승가에서 계율을 받은 승려가 아닌 자유로운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유식하고 유능하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붓다의 전생 이야기나 붓다 당대의 전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마치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자연히 그 주인공인 붓다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승려의 기능을 하는 새로운 지도자상으로 변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달타 전생의 본생담주인공들을 보살’(Bodhisattva)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신 또한 보살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렇게 꾼으로 살다보니까 모종의 새로운 계율도 만들게 되고 또 새로운 승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의 출발입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는 개인의 자각의 불교로서보다는 대중의 신앙(śtraddhā)의 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또 아라한의 경지보다는 곧바로 붓다(최종적 각자)가 되는 것을 희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대승불교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적 붓다의 구체적 체취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추상적인 비아이콘적 형상, 즉 보리수나 발자국이나 금강좌의 상징물만 가지고도 간접적으로 붓다를 느끼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지만, 대승불교운동시기에 오면 역사적 붓다로부터 너무 시간이 격절되었고, 소승부파불교의 전승과 동떨어진 일반재가신도들이 붓다에 관한 정보가 너무도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요구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성하 달라이라마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는 저는 달라이라마에 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어도 모든 상상과 느낌을 항상 동원할 수 있지만, 전혀 성하를 한번도 뵌 적이 없는 사람들, 혹은 시대적으로 격절된 한참 후대에 성하를 한번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하의 사진이나 동상같은,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요구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타부시 되어온 입열반의 붓다를 등신의 아이콘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변혁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아이콘에서 아이콘으로의 전환은 타부가 지배하던 승가집단내의 논리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쇼카 전성시대에 불교는 인도의 북서쪽, 지금의 파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쪽으로 이동하여 위세를 떨쳤는데, 이 지역은 알렉산더 원정이후에 알렉산더대왕이 떨궈놓고 간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박트리아왕국이 지배하던 영역이었습니다. 이 박트리아는 중국역사에는 대하(大夏, 따시아)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박트리아왕국은 결국 중국역사에서 월지(月氏, 月支, 위에즈)로 통칭되는 쿠샨족의 왕조로 대치되었고, 쿠샨왕조(Kushān Dynasty)중국역사에서는 꿰이수앙(貴霜)으로 불리움야말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수용하여 왕조문화의 기반을 닦았는데, 그 지배영역에 바로 간다라(Gandhara)지역과 마투라(Mathura)지역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불상의 기원이 간다라냐? 마투라냐?를 놓고 사계의 열띤 논쟁이 있지만 저는 간다라기원설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불상이 최초로 제작된 것은 AD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사건이었습니다高田修, 佛像誕生, pp.205~7. 이숙희 옮김, 불상의 탄생(서울 : 예경. 1994), pp.202~4..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 바이샬리. 이 탑에 관하여서는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제7에 상세한 기술이 있다. 이런 탑 주변으로 보살운동이 일어났고, 대승불교가 탄생된 것이다.

 

 

부록 14. 초기불교의 정신이 담긴 통도사

 

 

우리나라의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 해서 존재 의의를 갖는 사찰로서 그 가람의 성격이 초기불교의 정신에 가장 가깝게 오는 우리나라의 사찰이라 할 수 있다이 통도사를 창건한 스님, 자장율사는 신라 진골출신으로서 인도를 여행한 현장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여기 보이는 사진은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부르는 통도사의 핵심부이며 중앙에 부도 형태의 스투파(stūpa)가 있다. 그 앞에 있는 대웅전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대웅전은 이 금강계단 스투파에 대한 전실로서의 기능 밖에는 지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계단은 선덕여왕대 646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의 모습은 진신사리를 탐내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수없는 수난을 거쳐 변모된 것으로 그 본래 면목을 찾아볼 길은 없다. 그렇지만 산치대탑과도 같은 초기 가람의 어떤 심층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장율사가 이 사리(부처님의 유골)를 모시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가장 많은 설법을 하셨다고 한 라즈기르(왕사성)의 영취산과 가장 비슷한 지형을 우리나라에서 찾아낸 곳이 바로 이 곳 통도사 자리라고 한다. 통도사 뒷산을 지금도 영취산(靈鷲山)이라 부르고 있다.

 

 

 

 

불상의 탄생

 

 

우리는 쿠샨왕조하며는 그 전성기를 이룩한 카니쉬카(Kaniṣka) 왕 생각이 나고, 카니쉬카왕하며는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동생 반초(班超) 생각이 납니다. 반초는 형 반고, 아버지 반표(班彪), 여동생 반소(班昭)와 함께 이름을 날린 초()나라 명가의 자손으로 서역의 정벌에 대공을 세운 명장인데, AD 90년경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니쉬카왕의 군대와 일대 격전을 벌려 결국 카니쉬카의 무릎을 꿇게 하고 말았지만, 카니쉬카는 현명하게 화친을 맺고 오히려 파미르고원의 동서에 걸친 실크로드의 요지를 장악하고 로마와 계속 교역했던 것입니다. 카니쉬카왕이 로마의 아우레이(aurei)금화를 모방하여 갖가지 금화를 주조하였는데, 이 금화의 여러 신상 중에서 불타의 모습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가 개척한 영토는 푸루샤푸라(Puruṣapura)현 파키스탄내의 페샤와르Peshāwar를 수도로 하여, 동터키스탄과 서터키스탄의 일부,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부터 북인도의 대부분, 그리고 베나레스를 포함한 서인도의 북반에 이르는 대영토였으며, 이러한 대제국의 활발한 교류를 기반으로 불교는 아쇼카왕이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카니쉬카왕 치세하의 쿠샨왕조문명의 세계사적 의의는 바로 당대 세계의 3대문명, 인도문명, 중국문명, 로마문명의 접점 역할을 했으며 여기서 간다라예술이 탄생하고 대승불교의 씨앗이 탄생되었으며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최초의 계기를 형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이 시기에 쿠샨왕조에 전래된 불교가 대승이 아니라 소승부파불교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의 교학이 집대성되었다는 것입니다(불경의 제4결집 성립). 대비파사론이 편찬되었으며, 전설이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불교시인 아슈바고샤(Aśvaghoṣa), 마명(馬鳴)보살도 브라흐만(Brahman) 계급의 출신으로 카니쉬카 왕의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불상계열에서는 대승의 영향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소승의 아가마의 내용을 전달하는 불전도(佛傳圖)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그림을 부조로 조각한 것이며 이것은 불타 단독의 조상이 아니라 여러 오브젝트들이 같이 등장한다계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전도에 그려넣어진 불타의 모습에서 발전하여 단독 불상이 출현한 것은 타카타(高田修)선생의 고증에 의하면 AD 120~130년경이 된다고 합니다佛像誕生, p.109. 불상의 탄생, p.112.. 이 초기 단독불상에도 보살개념이 없다는 것은 아직 대승적 성격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2아쇼카라 할 카니쉬카 왕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주화를 모방하여 주조한 이 금화들은(AD 12세기) 쿠샨왕조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위대한 선전물이라 할 수 있다. 변형된 그리스 문자가 분명히 붓다임을 명시하고 있다. 광배와 긴 귓밥, 휘감은 법복의 주름형태들이 이미 오늘날 불상의 조형적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난디를 타고 있는 시바의 주화도 발견된다. 쿠샨 왕조의 국제적 성격과 다양한 종교에 대한 관용성을 잘 전해주고 있다. 대영박물관 소장.

 

 

희랍문명과 불상중심 운동

 

 

그러니까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박트리아 희랍문화로부터 시작된 쿠샨왕조의 일반적 문화풍토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아폴로나 제우스의 신상이나 신화의 내용을 담은 부조들을 벽면이나 정원의 치장에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자 자연스럽게 그러한 그리스의 신상들을 모델로 해서 붓다의 모습을 형상화했던 것입니다.

 

간다라의 불상들은, 근엄한 명상인의 정형화된 32호상의 프로토 타입을 전달하는 후기 마투라 불상들과는 달리 매우 인간적인, 아폴로를 닮은 미남자의 모습이었으며, 그 표현양식도 자세나 의복, 머리맵시 등이 자유분방한 표현을 취했으며, 대개 희랍-로마풍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조각공들은 중인도의 불상불표현(佛像不表現)을 고집한 원시교단의 입장이 전혀 전달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신을 의인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불타를 형상화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간다라에서 불상이 발생하자, 이것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모신, 나가(nāga), 약샤(yakṣa), 약시(yakṣī) 신상 등 인도고유의 토착적 양식을 고집하면서 테라코타ㆍ석조조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마투라지역에 이러한 간다라의 불상제작의 충격이 전달되자 마투라의 석공들은 독자적인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마투라의 불상이 결국 스투파신앙을 계기로 일어난 대승불교운동과 접합되면서 전인도적인 센세이션으로 불꽃처럼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간다라예술과 마투라예술에 관하여 내가 참고한 책을 두세 권만 소개한다. 생각보다 이런 방면으로 연구서적들이 희소하다. 인도에서 매우 어렵게 구한 책들이다. Sir John Marshall, The Buddhist Art of Gandhāra,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2000. R. C. Sharma, The Splendour of Mathura Art and Museum, New Delhi : D. K. Printworld Ltd., 1994. Bérénice Geoffroy-Schneiter, Gandhara, The Memory of Afghanistan, New York : Assouline Publishing, 2001. 그리고 벤자민 로울랜드가 지은 인도미술사의 제8장 간다라, 9장 마투라도 탁월한 개관이다..

 

대승운동과 불상운동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스투파와 같은 아브스트락트한(abstract, 추상적인) 물체의 숭배를 통해 그 스투파의 주인공인 싯달타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고, 한번이라도 그 옷깃을 스쳐보고 싶었던 일반신도들의 간절한 염원 속에 등장한 불상의 존재야말로 새로운 보살운동에 거대한 불씨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도올선생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군요. 어쩌면 그토록 세세하고 치밀하게 그런 역사적 정황을 유추하시는 지요. 우리 종교인들은 아무래도 종교적 진리의 체득을 목표로 하여 살게 되니까 역사적 정황에 대하여 그렇게까지는 세밀한 연구를 하지는 못합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백과사전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느낌입니다. 해박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하여 주시니까 너무도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좀더 계속하시지요.”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우리 조선에서도, 등신불(等身佛)을 없애고 법신불로 회귀한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만, 하여튼 비아이콘과 아이콘의 대립적 상황은 세계종교사를 지배하는 반복되어온 패턴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초기부파불교에서는 무불상(無佛像)이었던 것이 대승불교운동으로부터는 불상중심 운동으로 전환된 것은 불교가 세계로 전파되는 가장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계기의 핵에는 재미있게도 희랍문명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조선반도의 동해바다 남단에 위치한 석굴암도 결국 희랍의 조각예술의 전변형태라는 것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거칠게 말해서 조선의 가람배치도 탑중심은 소승의 영향이고 불상중심은 대승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한 역사적 진리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중의 불교는 모두가 불상중심불교가 되어버렸지요.”

 

그러나 대승교학이론의 핵심에는 스투파(stūpa)나 불상에 대한 거부의 경향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지요.”

 

 

 

 

불상과 반야

 

 

그렇습니다. 제가 번역한 반야경전계열의 작품으로서 AD 200년경에 성립했다고 하는 금강경(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금강경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으로도 불리우는 반야경전 중의 하나이다. 이 경전의 성립연대에 관해서는 AD 150~200년 사이라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선생의 설을 따랐다. 나는 동경대학 재학시절에 나카무라 선생의 강의를 몇 번 청강한 적이 있다. 中村元紀野一義 譯註, 般若心經金剛般若經(東京 :岩派書店, 1997), p.202.을 펼치면 제5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 如來

 

 

그리고 또 제12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 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復次須菩堤, 隋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堤 當知是人成就最上第一稀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저는 예전에 이런 말씀을 제 자신이 읽고 깨닫고 번역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역사적 참된 정황을 아잔타석굴에 와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 그랬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불상의 유무에 의하여 소승ㆍ대승이 갈린다고 하는 관광가이드의 말을 듣는 순간 저의 뇌리를 스쳤던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하는 구절은 반드시 대승불교의 불상운동의 전개를 전제로 해서만이 성립할 수 있는 경()의 말씀인 것입니다. ‘몸의 형상은 다름 아닌 불상입니다. 그것은 간다라 마투라 예술양식 이래로 대승불도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간 불상의 공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불상에 키스하고 침 바르고 발맞춤하고 향유를 칠하고 향불을 피우며 꽃잎을 흩날리는 그러한 공양으로는 도저히 여래를 볼 수 없다!

 

이것은 역으로 그 당시 얼마나 불상숭배가 성행했었나를 잘 말해주는 것이며, 이것은 인도역사에 있어서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의 등장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힌두교도 결국 이 패러다임에 의하여 새롭게 태동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견제, 부정, 혹은 선도라는 차원에서 반야사상이 성립한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하는 말씀은 반야사상을 표현한 명구라 하겠습니다. 즉 싯달타가 불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색신(色身, rūpa-kāya)과 관계없는 만고불변의 지혜(반야) 때문이며, 따라서 불의 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상을 상다웁게 만들고 있는 지혜, 그 지혜를 참으로 깨닫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파라미타’(pāramitā), 곧 지혜의 완성(perfection)이라는 것이죠. 그 반야의 완성은 오히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상이 상이 아니라는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의 논리에서 공(śūnya)사상이 발전한 것입니다. 용수(Nāgārjuna, c. 150~250)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활약한 시기도 바로 이렇게 불상승배가 극도로 치닫고 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반야사상을 표방한 최초의 경전이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 Aṣṭasāhasrikā-prjñā-pāramitā-Sūtra)이며 이것은 대강 예수의 삶과 동시대에 성립(기원 전후~AD 50)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만송반야경(十萬頌般若經), 이만오천송반야경(二萬五千頌般若經), 일만팔천송반야경(一萬八千頌般若經) 등으로 확대되었다가, 금강반야경, 반야심경등으로 새롭게 요약된 것은 23세기로부터 5세기까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이 반야경전의 성립과정에 관해서는 나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다. 카지마야 선생의 본저는 반야사상을 정말 깊이있게 요약한 명저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梶山雄一, 般若經一空世界, 東京 : 中公新書, 1987. 반야경전의 시대고증은 pp.104~5에 요약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사상적 고찰도 우리는 미술사의 제문제와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쾌하고 탁월한 견해입니다.”

 

 

세계최대의 불상, 바미얀 대불(The great Buddha at Bamiyan). 대당서역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통돌을 파고 들어간 마애불이다. 이미 성상파괴자들에 의하여 얼굴이 깎여 나갔던 이 대불은 최근 아프카니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인류를 향한 탈레반의 가장 멍청하고도 악랄한 쇼였다. 파리 귀메박물관.

 

 

불상 도입의 명과 암

 

 

달라이라마는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팔목에 찬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나 도올은 평생 팔목에 시계를 차지 않고 살았는데 달라이라마는 왼쪽 손목에 쇠줄의 네모난 시계를 차고 있었다. 자주빛 다체(drache) 법복을 걸친 그의 우람찬 몸매에 달랑 감겨있는 시계줄의 모습은 정말 코믹했다. 그러나 그는 문명의 이기도 마다하지 않는 성자였다. 얼마나 바쁜 일정을 보내시면 저렇게 손목에 시계를 걸치고 사실까?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나와의 대화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불상에 관한 이러한 장황한 얘기를 하는 본 뜻은 우리 북전불교(福田佛敎)에서는 대승만이 불타의 참 가르침을 전하는 진짜 불교이고, 소승은 개인의 수양에 치우친 좀 수준 낮은 불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이 불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소승의 비아이콘적인 태도야말로 불교의 본래정신의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ㆍ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신관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선승 단하(丹霞) 천연(天然, 739~824)은 법당에서 좌선하다가 궁둥이가 시려우니까 목불상을 도끼로 뽀개서 궁둥이 쬐는 불을 지폈지만이 장면은 나의 책, 화두(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서울 : 통나무, 1998), pp.68~69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선()의 최고경지를 모은 백 개의 공안집, 벽암록(碧巖錄)중에서 6개 공안을 강의한 것이다. 선사들의 치열한 모습들이 장엄한 드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다., 일반신도들의 불상에 대한 집착은 현실적으로 불타를 중심으로 한 일신교 사상이라 말해도 하등의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수준으로 불타를 유신론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의 부정적 측면이 인도민중에게 새로운 신앙운동을 촉발시켰고 이 신앙운동은 결국 시바나 비슈누신을 숭배하는 탄트리즘(tantrism)으로까지 발전하였고 이러한 탄트리즘이 불교로 역수입되어 밀교, 금강승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티벹불교를 생각할 때, 너무 밀교 중심이래서 제식이 번거롭고 마치 다신론적인 신앙체계인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때 달라이라마는 단호한 어조로 나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탄트리즘(밀교)은 불교탄트리즘(Buddhist Tantrism)도 있지만 비불교탄트리즘(Non-Buddhist Tantrism)도 있습니다. 비불교탄트리즘의 대표적인 것이 힌두교의 다양한 탄트리즘 형태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교탄트리즘과 비불교탄트리즘을 구분짓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한 반야공과 자비입니다. 반야공과 자비에 뿌리를 두지 않는 밀교는 밀교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탄트리즘은 공을 전제로 하고 자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대승의 일부며 대승의 발전일 뿐입니다. 따라서 티벹의 밀교도 대승정신의 계승일 뿐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과 공을 들여 오색찬란하게 만든 만다라(曼茶羅, 曼陀羅, maṇḍala)도 완성되면 곧 후욱 바람에 날려버리고 말지요. 그것을 아까워 하는 것은 우리 티벹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장엄한 만다라의 신(불ㆍ보살)의 세계라 할지라도 결국 공이라는 것이죠. 이 공의 깨달음을 무한한 자비로 확대시키는 것, 이것만이 티벹불교의 정수입니다.”

 

이미 우리의 작별시간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주변의 라크도르와 타클라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달라이라마를 재촉했다. 달라이라마는 라크도르 스님에게 항상 카조다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카조다가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라크도르 스님의 애명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이 막히거나 무슨 지시를 할 때마다 달라이라마는 카조다를 연발했다. ‘카조다라는 말은 매우 현묘한 여운을 내 귀에 남기곤 했다. 그는 카조다에게 시간을 짜보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나중에 티벹사람들에게 녹음테이프를 들려주고 확인해본 결과 내 귀에 들린 카조다라는 말은 카리싸(qa re sa, 뭐라고?), 카리세고레(ga re ser go ray, 뭐라고 할까?)라는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영어로 말문이 막히실 때마다 라크도르 스님께 그걸 뭐라고 말해야 좋지?”하고 물어보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의 만남은 오늘 하루만의 길지 않은 시간으로 약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도 지체되었다. 그렇지만 달라이라마는 나와 대화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실은 오늘 중요한 예식이 대탑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가봐야 합니다. 그런데 도올선생님은 아직도 할 얘기가 많으시죠? 우리 내일 다시 만납시다.”

 

 

 

 

티벹의 침묵

 

 

나는 정말 기뻤다! 내일 또 시간을 내주시겠다니! 오늘 나의 대화가 결코 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 바쁜 중에 또 시간을 내어 주시다니!

 

저는 도올선생님과 같은 분과 앉아서 대화하는 시간이 인생에 가장 보람 있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도올선생님처럼 그렇게 많은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만나 뵙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무슨 얘기가 나와도 그것을 진지하게 풀어나가시는군요. 요번 보드가야의 일정은 너무 빡빡합니다. 내일 제가 특별히 시간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편안할 때 한번 다람살라에 오십시오. 다람살라에 오시면 언제고 제가 뵙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보다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는 나의 친형처럼 친근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라크도르 스님에게 내일 아침 10시에 이 자리에서 나와 다시 만나는 스케쥴을 짤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보고 괜찮으면 같이 나가자고 했다. 예식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내가 참여해도 상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의 뒤를 쫓아나갔다. ~ 그런데 이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꿈에도 상상칠 못했다.

 

궁을 나섰을 때 나는 정말 놀랬다. 궁으로부터 보드가야의 대탑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천수만의 티벹군중들이 달라이라마를 한번 뵙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러한 뭇사람의 애틋한 기다림 속에서, 나와 달라이라마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달라이라마와 내가 궁을 나서는 순간, 그 순간에 전개된 군중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달라이라마가 나타나는 순간, 연도에 기다리고 있던 수천수만의 군중들이 더 가까이 그를 보기 위해 웅성거리며 도폭을 좁히며 밀려들 것이라고 나는 예상했다. 연변에는 인도경찰들이 주욱 나라비를 서서 경호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연변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모습들은 전혀 나의 예상을 뒤엎고 말았다. 갑자기 온 거리가 정적에 휩싸였다. 영화의 매우 바이올런트(Violent, 격렬한)한 장면의 극도에서 뮤트로 슬로우 모션이 지나가는 그런 상황이 있다. 펠리니의 의 첫 장면을 연상해도 좋다. 달라이라마가 나서는 순간 갑자기 온 세계가 너무도 조용해진 것이다. 미동의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티벹의 군중들은 두 손을 모아 영롱한 눈빛으로 달라이라마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달라이라마를 육안으로 쳐다보는 그 감격을 가슴으로, 눈빛으로만 표현했다. 너무도 격렬한 감동의 움직임이 고요한 자태로 표현되고 있는 그 역설! 침묵 이상의 웅변은 없었다.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 알록달록 티문양의 치마를 두른 아낙들, 문둥이 곱은 손을 정성스럽게 모으고 있는 사람들, 합장한 손이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근대사의 과정에서 죽창에 찔리고 총개머리에 터지고 성벽에서 굴러 떨어지고 인민군 탱크에 밟혀 비명에 간 가족의 상흔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손 모은 초롱초롱한 눈빛이 한 몸에 쏟아지는 그 침묵의 간망(懇望)을 나는 한몸으로 달라이라마의 곁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그들의 군주였고, 다르마의 구현체였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우뚝 서있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진실하고 소박한 한 인간이었다. 나는 이 엄청난 열망의 장 속에서 기묘한 에너지를 소리없이 느끼고 있었다. 그 침묵의 아롱진 눈망울들을 쳐다보며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비애와 환희의 눈물을 왈칵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달라이라마와 함께 연도를 걸어갔다.

 

달라이라마는 먼저 대탑 속 정중앙에 안치되어 있는 항마(降魔)인 모습의 금동불상에 절하는 예식을 했다. 나도 따라 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는 금강보좌 앞에 마련된 제단 위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나보고도 그 옆으로 라크도르 스님과 함께 자리를 마련해주시면서 앉으라 했다. 그 뒤로 천여 명의 티벹승려들이 장엄한 모습으로 착석해 있었다. 범어사 승려들의 눈 깜박이는 소리가 소나기 소리 같더라는 항간의 코믹한 이야기가 생각이 날 정도였다. 우렁찬 독송이 시작되었다. 2시간을 꼬박 천여 명이 제창으로 암송하는 독경소리는 정말 나에게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달라이라마께서는 중간에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시면서 개구장이처럼 웃곤 하셨다.

 

여러 제식이 사이사이 끼어 있었지만 그 제식과 주문을 전체적으로 잘 살펴본즉, 영신(迎神)-오신(娛神)-송신(送神)이라는 우리 예식의 디프스트럭쳐와 같은 내용이었다. 여기서 청하는 것은 붓다의 오심이었다. 그리고 붓다 앞에서 신()ㆍ구()ㆍ의()의 삼업을 씻는 물의 제식을 챈팅으로 행하였다. 이 제문은 달라이라마 당신께서 20년 전에 여러 경에서 조합하여 간략하게 만드신 것이라 했다. 제식이 끝난 후 제단에 바친 음식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궁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갑자기 나에게 손짓을 하면서, ‘밍티엔찌엔!’(明天見)이라고 죠크를 했다. 아주 정확한 중국발음이었다. 그는 내가 중국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재치가 넘치는 분이었다.

 

 

 

 

다 이루었다

 

 

나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수자타호텔 209호실로 들어갔다. 수자타호텔 리셉셔니스트가 내가 딴 호텔에서 자는 것을 눈치채고, 남향의 좋은 수트룸을 주었던 것이다. 안온한 느낌이 드는 쾌적한 방이었다. 나는 이날 밤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있기로 했다. 나는 두 손을 쫙 벌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형상으로 침대 위에 벌컥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我也悉達!

 

나 또한 다 이루었다!(19:30)는 뜻이다실달(悉達)’에는 싯달타라는 뜻과 다 이루었다는 뜻이 겹쳐있다.. 순간 나의 기나긴 반백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 이유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토록 치열하게 나는 살아야 하는 것일까? 머나먼 옛날, 엄마와 남산 수도산에 원족가던 일, 눈들 방죽에서 아이들과 빨개벗고 툼벙치던 일, 서울역에서 내려서 시발택시들이 가득 찬 광장에서 남대문의 장관을 휘둥그레 쳐다보던 일, 대학시험에 낙방하여 찔찔 눈물을 흘리던 일, 첫 아기 승중이의 탄생을 타이뻬이에서 국제전화로 듣고 기뻐하던 일, 동경대학에서 내가 출국한다고 일곱 분의 교수님들이 나 한사람을 위해 아카몬(赤門) 앞 회식집에서 센베쯔카이(餞別會)를 열어주셨던 일, 귀국할 때 노석학 벤자민 슈왈찌 선생님께서 훈계하시던 모습, 안암캠퍼스 학생들과 최루탄 맞으면서 같이 데모했던 일, 고려대학교의 마지막 수업, 서관 314강의 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던 일, 이 모든 영상들이 순간에 똑똑 침상 위로 떨어지는 눈물들과 함께 스르르르 지나갔다. EBS의 노자강의, KBS의 논어이야기의 감격, 성균관대학에서의 마지막 논어강의, 출국, 맨하탄의 3개월, 인도기행!

 

우리 엄마는 원래 개화에 뜻이 있는 여성이었다. 옛날에 우리 외할아버지보고 양코배기 선교사님께서 우리 엄마를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중매결혼 때문에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말았지만 외할아버지가 자기를 선교사한테 안 넘겨준 것을 매우 회한스럽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아마 그때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도미(渡美)했더라면 김활란박사처럼 됐을 꺼라고 했다. 우리 엄마는 김활란박사를 매우 부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인척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휘문고보 학생에게 딸을 일찍 시집보냈던 것이다. 지독하게 보수적인 사대부가문이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소실이 열둘이나 있었다. 우리 엄마는 열두 소실이 있는 곳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개화의 뜻은 꺾였지만 내 자식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우리라! 그들로 하여금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게 하리라! 우리 엄마는 정말 정성스럽게 자식들을 회초리로 키웠다. 아들 넷을 낳았고 딸 둘을 낳았다. 그 막내가 도올 김용옥이다. 마흔이 넘어 낳은 나는 엄청난 난산이었다고 했다. 기계로 뽑아냈는데 그때 기계에 눌린 눈이 지금도 침침하게 안 보인다. 그리고 거의 사체에 가까운 지경이라 차거운 윗목에 내버려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꼼지락거리더니 살아났다고 했다. 나는 갓난 아기시절부터 죽었다가 부활했던 것이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크면 젊은이들을 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항상 나의 생애의 의문이었다.

 

그 어머니가 구순을 넘으셔서 아직도 살아 계시다. 과연 내가 우리 엄마가 기대했던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 한번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우리사회에서 무지하게 욕을 얻어먹는다. 대한민국의 지식인으로서 나만큼 욕을 얻어먹는 놈이 없다. 지식인이 얻어먹어야 할 욕은 내가 다 얻어먹는 느낌이다. 내가 그렇게도 나쁜 놈일까? 내가 한번 이 사회에 나가 입을 뻥끗했다 하면 다 날 죽이려고 한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은 입을 다물 뿐이고, 입을 여는 사람은 모두 나를 증오한다. 정말 증오한다. KBS논어강의도 그렇게 좋은 강의였는데 왜 그렇게 모든 신문이 아무 이유없이 날 죽이려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정신이 바르게 든 총명한 이 땅의 젊은이들, 엘리트 기자님들이 날 그토록 죽이려고 씹어대야만 했는지 도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인생의 역정은 대강 이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럼 나는 도움을 준다. 그런데 도움을 받고 나면 그들은 그 도움에 대한 나의 공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무지하게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보고 좀 빠지라고 그런다. 그럼 난 좀 배신감을 느끼지만 빠져버린다. 그런데 또 빠지고 나면 또 빠졌다고 욕한다. 그래서 난 이래서 욕먹고 저래서 욕먹는다. 이렇게 산 것이 이제 나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달라이라마의 대화 속에서는 나는 이러한 나의 불미스러운 인생의 추억의 한 찌꺼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도 순결한 감정의 오감이었다. 내가 그와 주고받은 것은 지식의 체계가 아니었다. 순결한 영혼이 오간 것이다.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날 밤, 그 느낌대로 나는 살포시 잠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예정된 시간에 다시 대화의 자리에 착석했다. 다짜고짜 우리는 다시 대화로 몰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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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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