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에 대한 최대의 왜곡
그런데 『주역(周易)』이라는 중국경전의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선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훗날에 경사가 있고
악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훗날에 재앙이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이 『주역』 「문언」의 말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성립한, 윤회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진 고대중국인의 역사의식을 나타내는 윤리적 명제이다. 그렇지만 이 유명한 『주역』의 말은 곧 불교의 업보론을 나타내는 중국적 명제로서 중국대승불교의 역사를 통하여 줄곧 인용되어 왔다.
선(善) | → 必有 |
여경(餘慶) |
불선(不善) | → 必有 |
여앙(餘殃) |
선-여경, 불선-여앙이 ‘반드시’(必)라는 부사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명제의 사실은 그것이 어떠한 시공에서 일어나든지 간에 불교적 업보론과 동일한 연쇄를 나타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주역』의 세계관은 전혀 3계 6도와 같은 윤회적 타계(他界)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윤회를 전제로 하지 않은 역사적 시공간의 연속성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실제로 인도인의 까르마사상을 이 『주역』의 한 구절 속에서 이해하고 용해하고 또 곡해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 될 하나의 단어는 ‘적선지가’(積善之家)의 ‘가’(家)라는 단어다. 즉 적선ㆍ적불선의 주체가 ‘가’라는 집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즉 우리말로 ‘집안’이라는 의미가 되어있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업보나 업보로 인한 윤회의 주체가 인디비쥬알(individual)이 아닌 패밀리(family)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대승불학에서 일어난 인도의 까르마사상에 대한 최대의 왜곡이다. 나의 행위는 철저히 나 개인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업에 대한 나의 보도 철저히 나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나 우리 동아시아 문명권의 사람들은, 특히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업을 ‘집안덕’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부모가 공덕을 잘 쌓으면 자연히 그 공덕의 덕택을 자식이 볼 수 있게 되고, 또 자식이 공덕을 잘 쌓으면 부모의 공덕 또한 덩달아 높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덕의 범주는 형제자매간,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확대되어 나간다. 즉 한 업의 보에 수 없는 꼽사리꾼들이 끼어 들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대학입시철이 되면 자식의 합격을 빌기 위해 절깐에 적선을 하고 공덕을 쌓으러 오는 보살님들의 발길로 절문턱이 닳아 빠진다. 그렇지만 자식의 합격은 오로지 그 자식 개인의 업의 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부모님의 보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심청전』의 이야기도 대강 이러한 업에 대한 오류적 발상에서 생겨난 문학적 상상이다. 심청이가 임당수(臨塘水)에 빠진 것과 심봉사의 개안(開眼)은 전혀 무관한 사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윤회의 주체를 가(家)로 설정하고 그 가 속에서 이루어지는 효(孝)를 자비행으로 생각한 동양인의 사유체계에서는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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